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93화 (93/177)

# 식목일 #

“태자님.”

뒤에서 들려오는 말에 번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다루.”

그녀가 머리를 숙이며 다가왔다.

“공작은 아직도 그러고 있나?”

“예. 아주 단단히 걸어 잠갔더라구요. 소문엔 인근 용병까지 죄다 고용해서 병력을 늘렸다고 해요.”

“쯧..”

번이 혀를 찼다.

필립 공작.

그는 번이 7황비의 파티장을 습격한 날부터 위기를 감지했는지 영주성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고 있었다. 병사를 보내 황궁으로 소환명령을 내렸지만, 묵묵부답黙黙不答으로 일관 중이다. 아는 거다. 뒤통수 한번 제대로 맞았다는 것을 말이다. 아님, 어쩌면 번이 손 내밀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사람을 모을까요?”

번은 황명에 의해 5천 명의 병사를 동원할 수 있었다. 수도엔 아직도 많은 병력이 남아 있었고, 지금 번의 위세라면 하루가 지나지 않아 충당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번은 머리를 흔들었다.

“공작은 그게 상책이라 생각하겠지만. 글쎄..”

미소 짓는 그의 얼굴을 보는 다루는 왠지 소름이 돋았다.

“과연 그럴까?”

공작은 지금 그 어디에도 손 벌릴 곳 없이 탑에 갇힌 공주님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태자가 마약에 연루된 모든 이들을 철저하게 잡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수도의 모든 사람이 아는데, 누가 그에게 도움을 주겠는가? 버틴다고? 언제까지? 그러다가 황제라도 돌아오면, 그땐 어찌 될까?

“큭큭..”

번은 웃으며 다시 저편을 바라보았다.

“놔둬. 제 발로 나올 거야. 기사들과 상대할 필욘 없어.”

번이 레드 와이번 정예들을 빼갔다곤 해도 호랑이는 호랑이다. 이빨 빠졌다고 여우가 되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자가 병력을 더 모아 수도로 진격하기라도 하면..”

“그러면 반란이잖아?”

“아..!”

“여긴 집정관이 있다고.”

다루가 크게 끄덕였다.

감히 집정관이 있는데, 수도를 어쩔 생각은 버리는 게 좋을 거다. 황제가 자리를 비워도 수도가 멀쩡하게 굴러가는 것은 다 그의 능력이었으니까.

“에비뉴는 긴 전쟁 중이야.”

번이 뒷짐을 지고, 저 땅끝에 시선을 두었다.

“병사를 모아 점령하고, 안정할 여유도 없이 남자들을 잡아와 또 다른 나라를 침략하지.”

황제는 마치 설명우가 살았던 그 세계 역사의 칭기즈칸 몽골과도 같은 전법을 구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초반엔 아주 그럴듯한 수법으로 보여도 결국, 수십 년이 계속되면 부작용이 생길 것이다. 안락함. 국가의 울타리 안에서 안락하게 보호받고 있다는 것이 사라진다는 거다.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해도 남편이 언제 끌려갈지 노심초사에, 아들을 낳으면 그때부터 악몽에 시달릴 거다. 집에 뱀 한 마리만 기어들어와 숨어도 잠을 못 이루는 게 사람인데, 어디 생활이 되겠나? 게다가 사람들은 잘 모르고 있는데, 철鐵의 군대는 생존자로 이뤄진 집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점령국 어중이떠중이 모아 10명이 전장으로 가면 1명만 살아남았다는 것. 결과적으론 전쟁에서 이기긴 해도 엄청난 인명을 소모하는 중이었고, 그러니 아무리 많은 왕국을 점령해도 어디 남아나겠나?

“호랑이 등에 올라탄 거나 마찬가지인데, 내리는 순간 잡아먹혀. 폐하도 그걸 아시니 제국과 무모한 싸움을 벌이는 거고.”

10개국 이상을 소유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이 죽고 다쳤다. 점령국은 여자와 노약자들만 남아 근근이 버티는 중이고, 부상자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도 끔찍한 전쟁 기억과 가시지 않는 흥분, 광기, 두려움 같은 트라우마에 시달려 일상생활이 힘들었다. 열심히 일해 미래를 가꿔나간다는 활력 자체가 없다는 거다.

“집정관이 에비뉴를 돌보고 있긴 하지만..”

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 하나 궁금했지만, 다루는 묵묵히 들었다.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으니까.

“폭탄은 사방에 있어.”

번이 바라보는 것은 어둑해지는 땅이 아니었다. 그 너머의 벨버른이다.

“누군가는 그 폭탄이 터지기 전에 심지를 잘라야 하는 거야.”

벨버른처럼 빈곤에 시달리는 점령국들이 들고 일어나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황제가 이끄는 철鐵의 군대의 위용이 대단하고, 에비뉴가 무패행진을 계속하니 감히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아이들은 자란다. 아차 돌아보면 어느새 코흘리개들이 몸에 맞지 않는 갑옷을 두르고 등을 찌르고 있을 거다. 녀석은 ‘영웅’이라는 이름을 쓰겠지. 난세에 잡초만 자라는 것이 아니지 않나?

“저는.. 태자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돌아선 번이 다루의 어깨에 손을 올려 가볍게 두드려주었다.

“급할 거 없어. 어차피 알게 될 일이니까. 우선, 우린 벨버른으로 간다.”

차려놓은 밥상을 영웅에게 바칠 순 없다.

“아직 여기 일이 다 안 끝났는데요?”

“말했잖아. 여기 누가 있다고?”

“아..!”

단물 쏙 빼먹었으니, 나머지 골치 아픈 일은 집정관에게 떠넘길 생각이었던 거다. 그의 시선을 돌리기에도 좋고.

번은 다시 돌아서며 말했다.

“모레 아침에 떠난다. 그리 전파하도록.”

“십위는요?”

“그들은 남긴다. 이제 쓸 데가 없어.”

번은 민생을 돌보기 위해 점령국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자신이 영웅이 되려는 거다. 기아에 시달리는 백성들이 의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빛. 믿고 따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

“큭큭..”

번의 웃음에 다루가 흠칫 놀라 물러섰다.

“…….”

그 기척에 번이 시선을 돌린다.

“내가 무섭나?”

“그건.. 아니지만.. 가끔 태자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몰라도 돼. 너는 주어진 일만 열심히 하면 된다.”

“하지만 어디로 가시는진 알아야 따라가죠.”

다루의 말에 번은 무심코 하늘을 보았다.

“어디라..”

그러고 보니 매일 치열하게 달리고 있긴 한데, 그 끝을 어디로 잡을지 번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다.

그가 깊은 생각에 잠겨 하늘을 보자, 대답을 듣기 힘들다고 판단한 다루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몸을 돌렸다.

'참 이상한 사람.'

처음 저분을 만났을 때는 그저 에비뉴의 잘 먹고 잘 자란 황자로 밖에 보지 않았다. 하지만 곁에서 지켜볼수록 그게 아니었다. 황자라기 보다는 잡초같다. 모진풍파를 견뎌낸. 게다가 어떨 땐 한없이 인자하다가도, 어떨 땐 냉기가 풀풀 날릴 정도로 차가운 그는 ‘선, 악’의 개념조차 모호해 보일 때도 있었으니.. 그저 내 것만 챙기는 사람 같달까?

‘짐승처럼..’

문득 떠올린 생각에 다루는 힘차게 도리질 쳤다. 짐승이라니 이 무슨 불경한..!

‘다 뜻이 있으실 거야.’

그녀는 믿기로 했다. 그를 따라가면 분명 어제보다 오늘이 나았고, 오늘보단 내일이 나을 것이니까. 어쨌든 지금은 그의 울타리 안에 있었고, 그렇게도 힘들던 시절처럼 배를 곯진 않지 않나?

오늘도 열심히 하루를 살아보려는 그녀였다.

.

.

.

명우가 어릴 때, 아버지가 위인전집을 사오셨었다.

50권으로 된 책들은 하나하나가 사전처럼 엄청나게 두꺼웠고, 그림 하나 없이 글자만 빼곡했는데, 한국대 출신의 아버지는 겉으론 명우에게 전교 1등 따위를 기대하진 않으셨지만, 내심 훌륭한 사람이 되길 바라셨던 것 같다. 이순신, 헬렌 켈러, 뉴턴, 소크라테스, 간디, 에디슨, 공자, 아인슈타인..

그나마 공부하는 것보다는 재미있었으니 위인전을 읽었고, 그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쏘아붙이고 싶었던 엄마도 차마 아버지가 사오신 책을 빼앗진 못했다. 50권이나 되는 걸 적어도 두세 번씩 읽었으니 당연히 그해 성적은 떨어졌지만, 축 늘어진 어깨로 성적표를 들고 온 명우에게 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네가 읽은 책이 쌓여 너를 만드는 거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잘 모르면서 끄덕였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솔개부대를 이끌고 요세인으로 돌아온 이튿날 아침. 번은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었다.

“보유 자금이 얼마나 되지?”

깔끔한 옷을 차려입은 미루가 번의 옆에서 서류를 들었다.

“12,000골드 정도 있지만, 나갈 곳이 많아 빠듯해요.”

번의 친위대가 모두 모여 머리를 맞대고 있지만, 뾰족한 수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숨통이 트였다곤 해도 벨버른은 여전히 못 먹고 못살고 있었으니, 밑빠진 독에 물도 한계가 온 듯하다.

“만이천이라..”

서민은 꿈도 못 꿀 엄청나게 큰돈이었다. 그러나 하나하나 셀 수도 없는 이 금액도 벨버른 전역을 먹여 살리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하나 상단이 1달이면 소진할 돈이다.

“으음..”

잠깐 고민하던 번이 시선을 돌렸다.

“리켄스.”

“예!”

“곧 추수가 시작되지?”

“그렇습니다!”

명우의 삶에 녹은 위인전이 번의 머릿속에서 뒤섞였다. 어느 책 몇 번째 줄의 누가 한 말인지 콕 집어 말할 순 없지만, 적재적소에 뭘 써야 하는진 그냥 튀어나온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지.”

-누가?

악마는 무시하자.

“오늘부터 하나 상단은 모든 업무에서 손을 뗀다.”

“네?”

“뭐, 뭐라고요?”

“진짜요?”

직접 고용된 인원만 수천, 관련된 사람은 수만에 이르는 거대한 집단이 하루아침에 일손을 놓으면..?

“태, 태자님. 그것은..”

리켄스가 당황해서 말리려 했지만, 번은 눈을 가늘게 뜨고 웃고 있었다.

“레인보우 립을 비축하되 유통은 금지하고, 상단이 보유한 모든 재화를 여기 요세인으로 집중한다.”

어차피 황제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할 텐데, 제국이나 에비뉴에 마약을 파는 것은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 이게 마냥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중독이란 건 아주 무섭다.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던 것이 갑자기 끊기면, 본래의 두 배, 세배를 주고서라도 사람들은 마약을 얻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값은 천정부지로 뛸 것이다.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담뱃값을 올릴 때마다 정부는 국민의 건강증진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다음 해에 보면 더 많은 세금이 걷히지 않았나?

“갑자기 상단이 오지 않으면, 많은 이들이 굶주릴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을 입구에 나와 마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시지 않습니까?”

친위대가 얼굴을 붉히며 나섰지만, 번은 코웃음 쳤다. 그러면서 일어났다.

“언젠 안 굶었더냐?”

“……?”

“……!”

낮게 깔린 음성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아주 배가 불렀구나.”

번이 한걸음 나서자, 리켄스가 흠칫 상체를 뒤로 물렸다.

“너희가 어디서 일하는지 잊지 마라. 우린 상단이다. 거지를 돌보는 구호단체가 아니란 말이다. 알겠나?”

그런 일을 할 사람은 따로 있다.

“미루.”

“예. 태자님.”

“신전에선 연락 없나?”

성녀가 모금 활동을 벌인 것도 꽤 시일이 흘렀으니, 움직임이 있어야 했다.

“아직이요.”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움직일 셈이군.”

번이 손을 내밀자, 미루가 들고 있던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걸 한번 스윽 훑어보곤, 친위대를 무섭게 쏘아보는 번.

“상단의 모든 이들에게 전파해라. 벨버른 구석구석으로 퍼질 수 있도록!”

“어, 어떤..?”

번은 황제와 약속을 했다. 3개월 안에 10만 병사를 전장으로 데려가겠다고. 하지만 그냥 머릿수만 맞춰 질질 멱살 잡고 끌고 갈 생각은 없다. 그게 무슨 헛짓거린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한다.

“여기 요세인에 훈련소를 운영할 거다. 그것에 필요한 모든 노동력에 이바지하면 채무를 갚을 수 있다. 또한, 하루 두 끼의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할 것이다.”

슬슬 증서를 써먹을 때가 되었다.

“에비뉴의 자랑스러운 병사로 참전하면 그 즉시 얼마를 빌렸든 증서를 파기할 것이며, 원한다면 명예로운 솔개부대의 일원으로 승급할 수도 있다.”

번은 지금 나무를 심으려 한다.

여기 벨버른에 그 어떤 도끼질에도 끄떡없는 뿌리 깊은 거목을.

“만이천 골드로 에비뉴에서 식량과 물자를 사와라. 무기를 다룰 수 있거나 전쟁에 참전했던 경험이 있는 자들 또한 고용한다.”

돈이 흐르면 사람이 모일 것이다. 물론 빚을 갚으려고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자들도 있을 거다. 하지만 아무래도 좋다. 요세인이 활기를 되찾고, 폭발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물이 흘러넘쳐 주변을 적시듯 일시적이라 할지라도 싹이 틀 것이다.

“가라-!”

촉촉이 젖은 땅이 뜨거운 볕에 마르기 전에.

‘3개월.’

굶어 죽든, 싸워 이겨내든 끝장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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