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리블 1 #
“요, 용서를.. 끄으으..”
위로 들린 융의 눈가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
그런 융의 얼굴을 들어보는 번.
이참에 기를 확실히 잡을 생각이었다. 시야에서 벗어나 수작을 부리면 곤란하니까.
“쯧..”
무섭게 노려보며 말한다.
“두 번은 없다. 알겠나?”
"······!"
칙칙한 융의 눈에 금세 생기가 돌았다.
“예! 그럴게요!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할거에요! 제가 욕심에 눈이 멀어, 잠시 미쳤었나 봐요!”
번은 쓰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가슴으로 가져왔다. 파묻힌 융의 얼굴에서 끄윽, 끅, 설움이 터져 나왔다.
스스스스스..
번의 몸에서 왈칵왈칵 터지는 어둠이 융의 전신을 바늘같이 찔러 들어갔다.
“아..!”
아픈 듯, 황홀한 듯 몸을 떨어대면서도 번의 몸에 꼭 붙어 떨어지지 않는 그녀. 검버섯 잔뜩 거무죽죽하던 피부가 점차 탄력을 되찾아갔다. 늘어진 젖가슴은 탱글탱글 포도송이처럼 솟아오르고, 처진 엉덩이는 풍선처럼 볼록하게 부풀었다.
“흐윽, 흑-!”
황홀한 듯 마지막을 느끼는 융.
번이 그녀를 끌어안은 채 창밖을 바라본다.
공터에선 다루가 신입을 10개 조로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다행히 차질없이 진행되고 있는 것 같다. 다루의 수완도 좋았고. 하지만 이래선 남은 두 달 동안 10만을 채우기엔 역부족일 것이다. 무슨 좋은 수가 없을까 번이 고민하는 사이, 융이 아름다움을 되찾고, 새근새근 숨소리를 냈다.
‘아아, 이거 너무 좋아. 벗어날 수 없어.’
사실 그녀 입장에선 젊음만 포기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외형 따위 뭐가 중요한가? 이미 세상 풍파 다 겪어본 나이인데. 하지만 어둠이 온몸을 스며드는 이 기분은 그 어떤 쾌락보다 강렬하고, 상쾌했다. 단언컨대, 레인보우 립도 이 정도는 아니리라.
“하아, 하아..”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두 손으로 번의 옷깃을 꼬옥 잡고 버티는 그녀에게 매몰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으면 가봐.”
번이 에비뉴로 떠난 사이, 융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뭔가를 시도했다. 그런데 번이 그걸 알아차렸고, 실험은 중지되었다. 그 일로 번의 눈 밖에 난 융은 벌을 받았는데, 오늘에서야 겨우 용서를 받게 된 것이었다.
“태자님..”
“왜?”
융은 번의 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결심한 듯 말했다.
“파기하기엔 그간 들인 공이 너무 아까워요. 이왕 시작한 거 마저 끝내면 안 될까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번이 한발 다가서자, 융이 로브를 주섬주섬 걸치다가 기겁하며 히익! 물러났다.
“문제가 좀 있긴 했지만, 분명 태자님께 도움이 되어 드리려 한 거예요! 정말이에요!”
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약물을 만들고 있었다곤 하지만, 문제는 간단하지가 않았다. 그녀는 마녀. 일반적인 방법으로 했을리 만무하다.
“······.”
번이 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를 믿진 않는다. 몰래 일을 벌였다는 게 괘씸도 하고. 하지만 거의 완성되었다는데, 결과는 봐야할까?
“향수라 했던가?”
“예! 다른 형태로도 바꿀 수 있어요! 분말로 할까요? 사탕처럼 만들까요?”
“흐음..”
번은 입맛을 다시다가 팔짱을 꼈다.
“향수라..”
어떤 기억 하나가 그의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융은 번의 고개가 희미하게 끄덕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고맙습니다! 꼭 완성할게요!”
“더는 희생이 없어야 할 거야.”
“그럼요! 이제 제물은 필요 없어요! 시간과 노력만 들이면 끝나요! 아! 녹두꺼비의 알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괜찮죠? 묘지 까마귀 알도요!”
융이 죽은 여자들의 시체를 이용해 뭔가 수작을 부리고 있다는 것을 친위대에게 전해 들었을 땐, 당장 쳐내려 했지만, 악마가 말렸다.
-어차피 죽은 사람인데, 뭐가 문젠데?
듣고 보니 그랬다. 번도 이전의 삶들 속에서 어미가 물어오는 동물의 사체를 뜯어먹고 자랐지 않은가. 그것이 자연의 생리이기도 하고 말이다. 사람이라고 다른가? 물론 유족 입장에선 받아들이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나?
사실 이런 '효율'과 ‘도리’의 경계에서 번은 요즘 갈등하고 있었다. 무엇이 옳은지 한쪽으로 치우치기 어려워진 거다.
“그딴 건 알아서 해. 단, 두 번의 용서는 없어.”
“네! 그럼요! 당연하죠!”
후다닥 방을 나가는 융의 뒷모습을 보던 번이 악마에게 물었다.
“이봐.”
-왜?
“매혹의 범위가 어느 정도나 되지?”
-범위라니?
“효과 말이야. 융이 만드는 향수를 일반인이 거부할 수 있나?”
매혹의 효과를 가진 향수는 마녀가 등장하는 동화책이나 옛이야기 속에서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유혹의 마법이다. 왜, 있지 않나? 멋진 왕자님을 꼬시려고 마녀나 악마에게 작은 유리병을 얻어 사용하는 못생긴 여자의 흔하디흔한 스토리..
-그건 완성돼야 알지. 같은 주술이라도 결과물은 천지 차이니까.
“흐음.”
매혹이라.. 이걸 다른 말로 바꾸면 호감이 되고, 동물에 비유하면 발정기 때 페로몬 팍팍 풍겨대는 암컷들의 그것과 같으리라. 번 역시 동물로 살 때, 발정기가 오면 이성이 날아가 버리는 경험을 여러 번 맛봤었다.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어도 어떤 냄새에 노출되면 내가 누군지, 뭘 하고 있었는지 싹 날아가고 해야 할 일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하고 싶다! 하고 싶어! 무조건 해야만 해!」
교미.
그래, 신이 정해놓은 굴레는 이리도 무서운 거다. 그 명령코드를 거부할 수 있는 생물은 없었다. 아, 유일하게 인간만이 조절할 수 있다고 봐야 할까?
“그 말은, 잘만 만들어지면 신도 거부할 수 없다는 건가?”
-이론상으론 그렇지만, 그게 가능할 린 없지.
“일단.. 봐야겠군.”
융이 만들어오면 써봐야 하겠지만, 그것의 효과가 만족할 수준이라면 대량생산도 노려봐야겠다.
-근데 그걸로 뭐하게?
“아직은 모르지..”
발키리가 매혹의 향수를 가진다면 어찌 될까? 일단, 가까이 생각하면 그녀들을 동경하는 요세인의 수많은 여인이 갈팡질팡을 멈추고 군에 지원할 것이며, 멀리는 그녀들을 상대해야 하는 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다. 침을 질질 흘리며 목을 쭈욱 내밀진 않더라도 아주 잠깐 그들의 방심을 유도할 수 있다면 그것이 검을 무디게 할 것이고, 발키리의 목숨을 구원할 수 있는 틈을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거기에 더해, 번은 발키리에게 한가지 약물을 더 줄 생각이었다. 소량의 세이프 레인보우. 그것이라면 공포를 이겨내고, 투지를 일깨워줄 것이다. 본연의 실력이 아닌, 약물남용으로 강해지는 군대가 얼마나 버티겠느냐마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녀들은 전장에 도착하자마자 개죽음을 당할 거다.
-처음부터 무모했어. 10만이라니. 그냥 강제로 잡아서 끌고 가지? 그게 훨씬 쉬울 거다. 지금 같은 방법으론 시간 안에 맞추긴 불가능해.
악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건 최후의 수단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두 번째, 세 번째도 착착 맞아 들어가니까. 초장부터 나쁜 이미지를 심어주면, 요세인으로 흘러드는 사람의 발길이 가벼울까? 악마 같은 태자가 싹 잡아가 전쟁터로 보낸다고 악명이나 떨치겠지.
‘흠.. 조커 패는 쥐고 있는 게 좋겠지.’
번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방을 나섰다. 페트릭을 찾아가는 거다.
건물을 나가 뒤쪽으로 걷는다.
본래 정원이었던 이곳은 이제 1~4기 발키리의 개별 훈련 시설로 탈바꿈되어 있었다.
“태자님!”
“태자님-!”
경계근무를 서던 솔개부대원들이 급히 인사를 건네왔지만, 번은 손을 흔들며 그들의 훈련에 차질이 없게 했다.
힐끔, 힐끔.
-우와! 태자님이시다.
-소문대로 정말 늠름하시네.
-멋져!
-아아, 현기증이 나.
-얘, 그건 배고파서 그래.
한창 무기 다루는 법을 배우는 발키리도 있고, 이제 막 휴식을 얻어 땅에 널브러진 발키리도 있었다. 그녀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번을 보고 있었는데, 번이 빙긋 웃어주자 화르륵 얼굴을 붉혔다. 아직은 감정을 숨기지도 못하는 서툰 시골 처녀의 모습.
‘아직 멀었군.’
4기라 그런가? 내색하진 않았지만, 애송이. 딱 그렇게 부를 수밖에 없었다.
번은 계속 걸었다.
아직 완벽히 체계가 잡히지 않아 안쪽으로 갈수록 난민촌처럼 사방에 빨래가 늘어져 있고 정리가 안 되어 부산했지만, 이 또한 시간이 해결할 것이다. 미루가 그랬고, 다루가 그러했으니까.
이윽고, 커다란 천막을 앞에 둔 번.
앞을 지키는 부대원의 인사에 가볍게 끄덕이며 휘장 안으로 들어간다.
발키리 부대 사령관 페트릭.
여자로만 구성된, 그것도 무려 1만 명에 가까운 엄청난 규모의 군대. 남자라면 꿈에 그리는 직장이기도 하겠지만, 이 망국의 왕은 성욕에서 완전히 벗어난 지 오래였다. 사령관이라는 압도적인 권력으로 주지육림을 실현할 수 있겠지만, 그는 오늘도 막사에 처박혀 두통에 신음할 뿐이었다. 번이 들어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말이다.
“무엇이 그리도 그대를 괴롭히는가?”
“아..! 태자님!”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는 페트릭을 보며 번은 환하게 웃었다.
“작은 일은 아랫사람들에게 맡기고, 좀 쉬엄쉬엄하게. 그러다 병나겠네. 잠은 자면서 하는 건가?”
번이 페트릭의 책상에 걸터앉았다.
책상 위엔 발키리의 부대구성과 보급, 앞으로의 훈련 계획 따위가 빼곡하게 널려있었다. 발키리 부대는 전투를 책임지는 1사단과 보급, 치료, 후방지원을 맡는 2사단으로 나뉜다. 지원자가 입소하면 체력이나 성향에 따라 차등을 두는 것이다.
“하아.. 작은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만 삐끗해도 난리가 나는 것을요.”
여자들만 모여 있다고 온순할 거란 생각은 버려야 한다. 오히려 기존의 군대완 다른 잡음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는데, 여자가 셋만 모이면 접시가 깨진다는 말이 있듯 주로 감정싸움이 심했다. 대한민국식 표현으로 왕따도 벌써 생기고 있었으니, 말 다하지 않았나?
“흠..”
좀 도와줄까? 생각에 번이 훈련계획표를 보며 말했다.
“여기 2주차부터 휴식시간에 구보를 넣지.”
“네? 쉬는 시간을 없애란 말씀이십니까?”
“가볍게 뛰게 하라는 거야. 웬만하면 요세인 구석구석을 돌게 하면 더 좋고.”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도 휴식은 반드시 필요한..”
“그게 더 효과가 좋을 수도 있다. 바깥에 나가 바람도 쐬고, 사람들의 시선도 즐기면서. 그리고 몸을 굴려야 잡생각이 없어져. 녹초가 되어 잠자기 바쁜데, 무슨 시기 질투를 할까?”
어느 정도 훈련받아 탄탄해진 발키리가 외부로 돌면 홍보 효과도 좋을 거고.
“늘어져 있다고 쉬는 건 아니야. 사람이란 건, 기쁠 때 힘이 나지. 그렇지 않은가? 좋아하는 일은 하면 힘든지도 모르고 열중하지 않나?”
“그건 그렇습니다. 일단 한주 시도는 해보겠습니다.”
교관의 '10분간 휴식!' 이라는 달콤한 말만 기다리며 죽을 힘을 다해 버텨내던 발키리들의 원성이 벌써부터 들려오는 듯하다.
“그리고 막사를 매주 바꿔보도록 해. 친해질 시간을 주지 마.”
“그건 자칫 전우애를..”
“전우애는 전장에서 기르면 돼.”
설명우로 살 때 설날이었던가? 사촌 형이 휴가 나와 해준 말이 떠오른다. 죽고 못 살 것 같던 훈련소 동기들. 자대에 갔더니, 이름은커녕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했다던가?
“노닥거리라고 주어진 시간이 아니야. 하나라도 더 배워야 살 수 있다. 나는 죽으라고 그녀들을 모은 게 아니야.”
페트릭이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그 또한 마찬가지다. 딸 같은 아이들을 죽이고 싶겠는가?
“그건 그렇고..”
번이 말을 돌렸다. 이제 여기 온 용건을 꺼낼 시간이었다.
“전에 했던 그 말.”
벨버른 왕가의 보물.
상징이라 불러야 하나? 신물이라 칭해야 하나?
페트릭도 바로 알아챘는지, 주변을 스윽 둘러보더니 입을 연다.
“레터링lettering 말씀이십니까?”
“레터링이라. 그게 그것의 이름인가?”
“그렇습니다. 신의 말씀을 기록했기에 오래전부터 그리 불렀습니다.”
번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게 어디 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