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섯 중에 하나 #
-이런.. 빌어.. 처먹을.. 갑자기 왜..
악마의 음성이 뚝뚝 끊어지더니, 완전히 차단되었다.
이때, 번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껍질 속에 반질반질 새로 태어난 것 같은 작은 몸으로 들어가 있었는데, 본래 그가 가져야 할 12살 아이의 체구였다. 모든 육체변형이 풀리고, 순수한 상태로 되돌아간 것이다.
‘이상해.’
몸의 감각이 아주 낯설다.
뭐랄까? 오감이 아닌, 그 두 배는 되는 어떤 감각으로 주변과 사물을 인식하고 있달까?
「그럴 테지.」
움찔!
「인간에겐 주어지지 않는 힘이니까. 익숙하지 않을 거야.」
번의 몸이 흔들렸다.
전혀 새로운, 악마의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낯선 목소리에 반응한 거다. 한데, 그러면서도 익숙했다. 아주 오래도록 들어본 것 같은?
‘너는 뭐지?’
「인간은 내 이름을 감당할 수 없다.」
느껴지는 게 있다.
이런 종류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으니까.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
-당신은 이미 충분히 사랑받고 계신걸요.
성녀가 했던 말.
‘내 안에 들어온 건가?’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모든 곳에 존재하고, 모든 곳에 없으니까.」
‘무슨 볼일이지?’
「특별한 이윤 없다. 그저 네가 청하기에 답했을 뿐.」
‘내가?’
「그렇다.」
이 녀석 때문에 악마와의 접속이 끊어진 것 같다. 아니면 꼭꼭 숨어버렸거나.
「적당한 때에 너는 나를 원했고, 나는 응했을 뿐.」
번은 곰곰이 생각했다.
지금 이 감각, 나쁘지 않다. 분명 눈을 감고 있는데, 모든 것이 또렷하게 보였다. 이건 아주 기이한 것이었는데, 물체를 선과 면으로 보는 게 아니라 특정한 어떤 것들을 인식했다. ‘어둠’을 말이다.
이 메카의 모든 것들은 어둠을 품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번에겐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세상이 보였다. 이마에 뜬 그 눈으로 말이다.
거기에 하나 더.
‘저건.. 클로인가?’
「그렇다.」
이 능력엔 거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아주 먼 곳이라 여겨지는 것도 감각에 잡혔고, 가깝다, 짧다, 길다라기 보다는 어둠의 양에 따라 크다, 작다로 구분되었다. 중요도랄까? 현미경으로 깔유리glass slide위의 세포를 들여보면 큰놈들이 움직이는데, 그것만 보이는 것 같은? 주변에 더 작은 것들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거슬리는 걸 먼저 인식하는 게 사람이다.
‘물어볼 게 있어.’
번은 새로운 감각을 몸에 적응하려 애썼다. 마치 우주에서 여길 내려보고 있는 기분이다. 나는 분명 여기에 있는데 말이다. 하지만 남은 시간을 마냥 흘러가게 두지 않는다. 이 질문에 답해줄 존재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으니까.
「법칙을 깨지 않는 범위에서라면.」
‘나는 왜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지?’
인식이라고 해야 할까? 느끼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몇 가지 단어 선택에 있어 잠깐 고민했지만, 사용이라 말했다. 실제로 번은 오색마나를 감지하고 있었지만, 그걸 다른 기사나 마법사들처럼 쓰질 못하는 것뿐이었으니 말이다.
「착각하고 있군.」
‘착각?’
「너는 지금 어떤 기분이지? 새롭게 받아들인 그 힘에 대해서 말이야.」
‘없던 팔이 생긴 것 같아.’
「그래, 인간이란 그렇다. 처음부터 주어진 것엔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새로운 것엔 아주 배타적이지. 너 또한 마찬가지다. 네가 알고 있는 어떤 것에 대해 선을 그어버렸기 때문에 그것으로 인해 벽이 생겼다.」
‘그게 정확히 뭔데?’
「보여주지.」
쑤아아아아아악-!
번의 의식이 갑자기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그래, 그렇게 표현하는 게 정확할 거다. 송두리째 끌려갔으니까. 스크루지가 유령을 따라 과거의 어느 지점으로 이동해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번도 3자의 시각에서 ‘어떤 생물’이었을 때를 보고 있었다.
‘저건..’
「그래, 너다.」
몇 번째 삶이었는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저게 나였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건 쥐였다.
태어나자마자 엄마의 발톱에 한쪽 눈을 잃고, 외눈박이로 살던 작고 보잘것없는 시궁쥐. 저 때가 생후 6개월쯤 되었나?
‘왜..?’
이걸 보여주는 걸까?
그리 특별할 것 없는 삶이었다. 쥐의 일상이 늘 그렇듯 먹기 위해 하루를 살았고, 언제나 그렇듯 느닷없이 죽었다.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건 선입견이다. 그것이 성장을 막고, 한계를 만들지. 너 또한 그렇다. 작은 바늘 하나가 뇌에 꽂혀 있다고 해야 할까?」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그게 이거와 무슨 상관이지? 번은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쥐를 바라보았다. ‘과거’의 나를 말이다.
찍찍찍.
열심히 코를 벌름거리며 먹을 것을 찾고 있었다. 나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아는데,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다.
쥐는 아주 예민한 동물이다.
지진이 나기 전이나 홍수가 닥치기 전에 그걸 감지하고 피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것을 생각하고 의식해서 한다기보다는 그저 본능이다. 지금도 그런 본능이 발동했다. 인간들이 대규모 쥐 토벌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모르고 있었지만, 몸을 사려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찍찍찍.
쥐는 구멍의 경계에서 잠시 기다렸다. 여길 나가면 위험지역에 들어서야 한다. 벽과 벽 사이의 이곳까진 인간이 손을 넣을 수 없지만, 나가는 순간 고양이나 개, 독수리 같은 온갖 천적에게 노출될 것이다. 벌름벌름, 냄새가 말해준다. 근처에 사람의 흔적을.
역시 위험해.
찍찍.
쥐는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이때!
-휘이이익~ 휘익~ 휘이익~
어떤 소리가 들려왔다.
쥐를 지켜보던 번.
오싸아아악-!
소름을 넘어선 전율을 느꼈다. 영혼이 통째로 바르르 떨리는 것 같은 기분.
이 휘파람은?
-휘이익~ 휘익~
소리는 말한다.
괜찮아. 너는 안전해. 여기 먹을 것이 있어. 이리 온.
특정 주파수의 그것은 쥐에겐 평온함을 주었고, 조금 전까진 두려움과 경계에 긴장했지만 이젠 다리가 절로 움직였다.
막 구멍을 나가는 그 순간!
“잡았다! 으하하하핫!”
어떤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찍! 소리도 내지 못하고, 등이 부러져버린 짧은 삶.
번은 이렇게 생을 마감했었다.
쑤우우우우우욱!
번의 의식이 다시 마법진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정신은 아직 망치로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처럼 빠져있다.
「답을 찾은 것 같군.」
목소리엔 즐거움이 묻어 있었다. 하지만 번은 어처구니없는 기분에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
.
그의 이마에 새로 난 눈이 천천히 깜빡인다.
-황자님이 어떻게 되신 거야?
-모르겠어! 기분 나빠!
-무서워.. 으헤에에엥..
융이 침을 꿀꺽 삼키며 번에게 다가왔다. 삼안三眼이라니. 이건 인간에게 허락된 신체구조가 아니었다. 단순히 머리에 구멍을 뚫고 눈알을 박아 넣는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란 거다.
“황자님? 정신이 드세요?”
하지만 번의 눈동자는 움직이고 있었다. 이건 시신경이 제대로 이어져 있다는 뜻이었고, 심지어 촉촉하기까지 하다. 눈물샘 또한 존재한다는 것. 마법적 문양 따위가 아닌 진짜 눈! 이게 가능한 존재는 융이 알기로 단 하나밖에 없었다.
‘신神의..? 어떻게 이런..?’
“황자님! 황자님?”
융이 물었지만, 번의 눈동자는 그녀를 향하지 않았다.
오들오들.
번의 몸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후두두둑. 그의 육체에 붙어 있던 오물과도 같은 껍질들이 사방으로 떨어져 나간다. 이 순간, 번은 의식의 개혁이자 혁신을 맛보고 있었다.
머릿속이 퍼엉! 터진 뒤, 다시 재구성되는 기분!
‘과거가 아니었다고?’
그 많은 삶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들이 자연스럽게 생각난다. 몇 가지 삶에서 의문을 가졌던 시차. 그러려니, 내가 뭔가 잘못 알았겠지 하고 넘어갔던 그것들과 전혀 낯선 곳에서 시간을 감지하지 못하고 살았던 몇 번의 삶들.
「인간의 작은 머리에 담기엔, 세상은 훨씬 더 복잡하지.」
투툭, 툭, 투욱.
뇌의 뉴런들이 가지를 뻗기 시작했다. 전두엽부터 대뇌, 소뇌, 더 깊은 안쪽의 관자엽까지 일제히 오므리고 있던 손을 쫘악 펴는 것처럼 이어졌다.
“황자님! 번 황자님!”
융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번은 반응할 수 없었다. 고작 신체의 어느 기관 하나가 발달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뇌가 바뀐다. 그것도 일반적인 보통 사람의 그것이 아닌 수많은 능력과 성분이 자리 잡은 번의 뇌가 말이다.
「신성력이 어퍼 홀(상단전)에 완전히 자리 잡았습니다.」
「오색마나가 뇌세포 구성에 참여합니다.」
「두개골이 재구성됩니다.」
「뼈가 튼튼해집니다.」
「뼈가 유연해집니다.」
고작 하나였다.
작은 편견偏見하나가 수만 조각의 편린을 만들어 생각의 혈관을 막고 있었던 거다. 인간의 의식은 우주와도 같아서 상상력은 끝이 없고, 그것이 곧 힘이 된다.
지이이이이잉-!
신성력이 점거한 뇌의 상단전, 어둠의 정수가 만들어진 명치 아래의 중단전, 그리고 오늘 처음 반응하기 시작한 하단전이 차례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고속도로같이 뻥! 뚫린 그곳에 자동차처럼 여러 기운이 섞여 달린다. 거기에 레인보우 립의 성분이 혼합되었다.
“아아아아..”
그 많은 삶 중에 어느 것이 미래의 것이고, 어느 것이 과거의 것인지 구분할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몇 번의 삶 속에서 번이 확실히 ‘마나’를 써보았다는 것이었다. 마나를 가지고 태어나는 생물도 분명 존재했었으니까. 그 경험이 자연스럽게 흘러들고, 없던 팔이 자란 것처럼 몸이 반응했다.
그랬다.
성녀가 말했던 것처럼 번은 처음부터 이걸 가지고 있었다. 단지 깨닫지 못했을 뿐.
번쩍-!
번이 원래 가지고 있던 두 개의 눈이 뜨였다.
“황..자님..?”
융과 눈이 딱 마주쳤다.
씨익 한쪽 끝으로 올라가는 입꼬리.
“어? 어..?”
융이 이마를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하는데, 번이 갑자기 후욱! 일어서더니 튀어 나갔다.
좌르르륵.
그의 몸에 붙은 것들이 완전히 떨어지고, 미끈한 번의 몸이 질주한다.
빨랐다.
너무도 빨라 융이 머리를 휙! 돌렸는데, 어느새 저 멀리까지 번은 달려가고 있었다.
“황자니이이이이임!”
융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번은 계속해서 달렸다.
공복감.
그래, 허기다. 배가 고픈 게 아니다. 몸속의 어딘가가 원하고 있다. 채우라고. 저기에 먹을 것이 있다고.
이제 막 개통한 단전들의 통로는 더 많은 기운을 원했다. 상행선과 하행선이 나뉘어 질서정연하게 흐르는 3가지 기운은 균형을 원했고,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기氣는 단 한 종류뿐. 그것이라도 먹어야 했다. 이 허전함을 달래려면 말이다.
사라라라라락.
숲을 질주하던 번의 손톱에 열 개의 빛이 어리기 시작했다. 3cm 정도 자란 우윳빛 그건 상단전에서 보내온 신성력이다.
하지만 전과는 다르다.
신창이네, 신검이네, 했던 모양만 그럴듯한 사기가 아니라 그것관 완전히 다른, 팔라딘이 무기에 감싸 쓰는 기사들의 오러와 같은 그 강인한 힘이 맺힌 것이었다.
"크르르르?"
절벽 아래 볕을 쬐며 몸을 뒹굴고 있던 클로 한 마리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크르륵?"
번의 육체가 빠르게 접근했다.
몸은 가볍고, 다리는 깃털 같다.
치타보다 빠른 속도로 느껴질 만큼 질주하던 그의 몸이 푸르스름하게 광채로 뒤덮였다. 이건 마나다. 번이 스캇에게 편법으로 배웠던 그 방패 같은 호신護身기가 번의 몸에 어린 거다.
고속도로가 개통된 이상, 이제 국도로 돌아갈 필요가 사라졌다. 그가 원하면 힘은 바로 반응하고, 의식하면 떠오른다.
"캬아아아아아!"
클로가 늑대 아가리를 쩍 벌리며 번을 경계했다. 땅에 비비던 몸통을 벌떡 세워 그 단단한 발로 바닥을 퍽퍽 차며 위협했다.
그래, 경계와 위협.
다크 엘프를 고작 먹이로 인식하던 클로가 본능적으로 번을 ‘맹수’로 인식하는 거다.
그러나 그 정도론 안 되는 거다.
번을 보는 순간 도망쳤어야 한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녀석의 삶을 이어주었을지도 몰랐으니까.
천적.
그게 뒤바뀌는 순간이 왔다.
“크크크..”
기분 좋은 전율이 이어지고 있다.
웃음이 그의 몸을 뒤따를 때, 이미 번은 클로의 바로 앞까지 접근해있었다. 그러더니 훌쩍 뛰었다. 전처럼 클로의 약점을 노리기 위해 배 부분으로 슬라이딩한 게 아니다. 무려 4미터 이상을 점프한 거다. 바로 정면으로!
콰아아악!
클로도 반사적으로 아가리를 쩍 벌려 번의 몸통을 통째로 물어뜯으려 했다.
하지만.
“······!”
번의 두 손이 녀석의 위턱과 아래턱을 잡고 그대로 찢어버렸다.
"커, 컥..?"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번의 손이 팔까지 그대로 녀석의 목구멍에 처박혔기 때문이다. 신성력 맺힌 손톱은 뼈를 녹이고, 단단한 머리도 뚫고 들어가 뇌를 헤집었다.
파파파파파팟!
번의 양손이 미친 듯이 클로의 몸뚱이를 파고 들어간다.
그그그그극!
쿵!
클로의 몸뚱이가 바닥에 쓰러질 때쯤, 녀석의 몸뚱이를 밟고 선 번의 손엔 펄떡이는 심장이 들려있었다.
불과 몇 초 사이에 벌어진 일.
번은 위를 올려보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이거..”
죽이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