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75화 (75/177)

# 탈피 #

먹이사슬의 최상층에서 클로가 지배하던 이 구역.

이제까지 세상엔 없던 가장 강력한 포식자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다량의 어둠을 흡수했습니다.」

「어퍼 홀(중단전)이 반응합니다.」

번은 클로의 심장을 음미하며 저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땅엔 아직도 많은 클로가 느껴진다. 그리고 이 녀석들을 모조리 흡수하는 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

아직도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더 먹어야 한다. 이 갈증이 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이때, 몸 안에 들어와 있던 목소리가 끊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건 마치 라디오를 듣다가 전원을 끈 것 같은 기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왜 잡음이나 지지직, 하던 것이 멈춰 정적이 밀어닥칠 때 있지 않나? 음소거로 해뒀다고 해도 스피커의 전원을 뽑으면 분명 뭔가 연결이 끊겼다는 것이 느껴지는 그런.

“갔는가..”

망할 놈. 오고 싶을 때 오고, 인사 한마디 없이 가는 참으로 불친절한 녀석들.

“다섯 중의 하나..”

그래도 한 가지 중요한 일을 해결했으니, 이번엔 고맙다고 해야 할까?

번의 코가 찡긋거렸다.

-..야! 야!

하나가 가니, 하나가 돌아왔다.

다소 시끄럽고, 경박한 이 목소리가 반갑기까지 하다.

-너 괜찮냐?

“좋다. 아주 좋아.”

-어퍼 홀! 뚫었구나!

악마가 크게 놀라며 기뻐한다.

-그놈이 뭐라디?

다시 돌아온 객식구는 또다시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번은 답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저 더 날뛰고 싶었다.

이 힘.

충분히 음미하고 싶었으니까.

타탓-!

번의 발이 힘차게 땅을 박찼다.

.

.

.

이제 박쥐들도 끝이 보였다.

열흘 가까이 먹지도 못하고 사람들에게 시달린 녀석들은 마굴 안쪽으로 피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집어 던진 횃불 연기에 얼마 못 참고, 다시 기어 나왔는데, 멀리서 보면 큰 입을 가진 마굴이 연기를 울컥울컥 토해내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질식해 바닥을 구르는 것들을 사람들이 냉큼 집어 잡아 죽였다. 그물 때문에 오도 가도 못하고, 잡히는 즉시 깔끔하게 해체되어 고깃덩이로 차곡차곡 저장되는 녀석들이 한편으론 불쌍하기도 했지만, 요세인에서 기다리는 가족들을 생각하면 한 마리도 놓칠 수 없었다.

뿐인가? 가죽도 두툼하고 커서, 무두질 좀 하고 대충 꿰매면 훌륭한 의복을 만들 수도 있으리라. 에비뉴 같은 곳에 비싼 값에 팔 수도 있을 것 같고.

“끝이 보이네. 징그럽다, 진짜.”

다루가 굳은 허리를 펴며 끄응 군소리를 냈다.

“난 아쉬운걸.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니까.”

오늘 작업이 대충 마무리 되어간다.

이제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완전히 박쥐 씨가 마를 것 같았다. 1차로 절반쯤 사람을 모아 고기를 들려 보내고, 남은 이들이 정리한 뒤 따를 것이다.

사실 그제까진 박쥐를 모두 잡아야 하느냐, 좀 남겨야 하는 것이 아니겠냐 의견이 분분했었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시 세를 불릴 때까지 일정 개체를 살려두고, 훗날 다시 수확하는 것이 어떨까는 의견. 그러나 당장 이거 한 마리가 사람 몇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박쥐가 터전을 옮겨버릴 수도 있고, 이게 요세인에 소문나면 어떻게 될까? 어차피 누군가는 다 씨를 말리지 않겠는가?

결국 이래저래 뒷일 생각 말고, 다 잡아가자!라고 결론이 났고, 후련하다는 사람 절반, 직장 잃은 실업자처럼 아쉬움을 표현하는 사람 절반이었다.

-빨리빨리 옮겨! 해가 진다!

-어이, 거기 불 더 피워!

사내들이 밤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 적응할 만도 됐는데, 이 숲은 밤이 되면 아직도 무서웠다. 늘 뭔가가 숲에서 지켜보는 것 같았고, 당장에라도 흉악한 괴물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아직까진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마무리합시다!

-거기! 졸지 말라고! 엉덩이를 걷어차 줄까?

-와하하! 한센은 그래도 정신 못 차리지!

미루는 시원섭섭한 쪽이었다.

어서 집에 가서 동생들을 보고 싶었지만, 더는 이 맛있는 박쥐를 구할 수 없다는 생각에 착잡했다. 그래도 그녀는 믿었다. 황자님께서 분명 다른 방법을 찾으실 거라고. 이번보다 훨씬 흥미롭고, 가슴 설레는 모험이 기다릴 것이라고!

그녀의 눈이 마굴 위쪽을 향했다.

아직도 수상한 검은색 기둥은 마굴과 저 하늘에 이어져 있었다. 대체 저게 뭘까? 많은 의견이 나왔지만, 그 누구도 정확히 아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 기둥이 아직 있는 것은 황자님께서 무사하시다는 증거라 여겼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황자님..’

비록 이 자리에 함께하진 않았지만, 이제 번 황자님은 이들에게 정신적 지주와도 같았다.

‘돌아오시는 거죠? 그렇죠?’

미루는 마굴 위로 뻗은 기둥을 잠깐 바라보다가 잔업을 마무리했다.

-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일찍들 주무시오! 내일은 일이 바쁠 것 같으니!

고된 하루가 정리 되어간다. 불침번이 이따금 돌아다니긴 했지만, 인적은 없다. 모두가 피곤했는지 드르렁, 드르렁 코 고는 소리만이 숲을 울렸다. 미루는 가볍게 요기를 하고, 언제나처럼 동생을 끌어안고 누웠다. 토닥, 토닥. 오늘도 수고했다며 모닥불 소리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새근새근.

다루는 벌써 잠이 들었다. 하지만 미루는 쉽게 잠을 청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제부터 배가 불편했는데, 아무래도 지금 신호가 오나 보다.

“······.”

애써 잠을 청해보려 했지만, 이마를 찡그리며 결국 일어나는 미루. 동생을 흔들어 깨워볼까 하다가 이내 머리를 저었다. 피곤할 텐데, 그냥 두자. 잠 설치면 내일이 더 힘드니까.

“..으 추워.”

누웠다 일어나서 그런지 서늘했다. 빨리 볼일을 보고 와야겠다고 생각하곤, 종종걸음으로 숲을 향한다. 1천 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좁은 지역에 열흘 넘게 모여있다 보니, 거주지역을 살짝만 벗어나도 사방이 똥 밭이었다. 마땅한 자릴 잡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밑 닦을 잎사귀가 부족할 지경.

좀 더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있어..!’

이리오라며 손짓하듯 저쪽에서 넓은 잎사귀가 흔들렸다. 마침 몸통이 굵은 나무도 근처에 있어 저쪽에서 봐도 잘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서둘러 움직이는 미루. 막 큰 나무를 지나 잎사귀 쪽으로 가려 하는데,

후욱-!

그녀의 몸이 나뒹굴었다.

곰 같은 뭔가가 그녀의 몸을 덮친 것이다.

“······!”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우악스러운 큰 손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뿌리치려고 해보았지만,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읍! 읍읍읍..!”

깔려 버둥거리는 그녀의 몸 위로 사내가 앉았다.

“흐으으..”

사내의 안색은 아주 나빴다.

동공은 쉴 새 없이 흔들렸고, 입술은 쭉쭉 허옇게 갈라져있다.

‘당신..?’

미루는 그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전에 여기 마굴에 오는 길에 말린 고깃덩이로 자매를 유혹하던 바로 그 남자!

“가만히 있는 게 흐으으.. 좋을 거야. 흐으..”

미루는 명치에 닿는 섬뜩함에 움찔 몸을 멈췄다. 칼이다. 조금만 힘주면 그녀의 여린 피부 속으로 사정없이 빨려 들어올 잘 벼려진!

“내가.. 흐으.. 네년 때문에.. 흐으으..”

그는 거칠게 살아온 남자였다. 전쟁을 겪은 망국에서 눈에 띄면 강제로 동원되는 신체 건강한 성인 남자가 지금까지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생존력은 증명하는 셈 아닌가?

“너 때문에..!”

그는 미루를 내려보며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밤. 황자는 이년에게 칼을 주었다. 그런 뒤 싸우라 했다. 물론 그때 다리가 부러져 고통스럽기도 했고, 모두가 지켜보는 통에 경황도 없었다. 하지만 당황하긴 했어도 전투 경험 전무한 여자에게 당할 만큼 사내가 호락호락하진 않았다. 귀싸대기에 한대만 제대로 후려갈겨도 여자는 자빠져 일어나지도 못할 것이니까.

그런데 분위기가 그게 아니었다.

그의 본능이 시켰다. 여기서 여자를 때려봐야 이어지는 후폭풍은 더욱 클 것이라고. 그래서 당해줬다. 노려보는 페트릭과 황자의 분노를 최대한 잠재우려 한 것이다.

“읍! 으으으읍!”

일단은 성공하는 듯했다. 대충 마무리 지어졌고, 황자의 분노는 피했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그에게 돌아오는 것은 멸시와 짜증이었다. 사내가 그럴 수도 있지. 제 놈들은 뭐 안 그랬나? 네가 뭘 그렇게 잘못 했는데? 화가 났지만, 황자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그의 눈 밖에 난 사람이 겪는 모멸감은 상상 이상이었다.

“가만히 있으라 했다..”

사내는 기다렸다. 동료들의 원망, 분노, 따돌림, 경멸을 다 받아내면서도 이 순간을 위해 참았다. 이년만 해치우고 간다. 이 빌어먹을 솔개부대 아니면, 어디 갈 곳 없을까?

“흐읍..!”

사내의 손이 미루의 치마를 거칠게 걷어 올렸다. 미루의 다리가 필사적으로 움직였지만, 허무하게 허공만 찰 뿐이다.

“그러다 죽어. 죽는다고.”

칼을 대놓은 미루의 명치에선 피가 조금씩 맺히고 있었다. 그녀가 반항하자, 그 움직임에 칼끝이 살갗을 파고든 것이다.

‘싫어! 저리 가!’

동생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치며, 미루는 깨달았다. 이 남자. 나를 살려둘 생각이 없다고. 눈을 보면 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순결은 가지고 갈래! 생각한 미루는 허리를 뒤틀었다.

그러자,

퍼억-!

주먹이 내리꽂혔다.

사내의 주먹은 여자가 감당할 만한 수준의 그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전력으로 내리쳤다. 죽일 작정까지 한 사내에게 얼굴 좀 망가진다고 대수일까?

“······!”

미루는 악! 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입을 맞는 순간 위아래 입술이 모조리 터져나갔고, 잇몸 전체가 흔들렸다. 뇌가 흔들려 순간적으로 정신이 핑- 나가버렸고, 앞니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스럽게 빠지거나 부러지진 않았지만, 강력한 고통에 마비가 온 것이다.

“..가만히 있으면 좋잖아?”

한 대 더 치려던 그의 주먹이 내려오며 펴졌다. 그 손이 거칠게 미루의 앞섬을 풀어헤친다. 이제 칼은 필요 없다. 폭력을 알아버린 몸은 대항하지 못할 테니까.

칼끝에 닿았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하얀 가슴에 문대졌다. 양이 많진 않았지만, 그 붉은 피에 사내는 더 흥분한다.

“금방 끝난다고. 흐으으..”

그는 이제 바지 끈을 풀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론 미루의 목을 움켜쥐었다. 이렇게 조르고 있으면 소리도 못 지르고, 힘이 빠져 저항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게다가 언제든 숨통을 끊어놓을 수 있고, 그 시기를 조절할 수도 있겠지. 타인의 목숨을 쥔다는 것이 주는 쾌감!

“끄으으윽! 끄으윽..!”

미루의 몸이 거칠게 펄떡였다.

숨을 쉴 수 없는 그녀의 얼굴은 당장에라도 터질 것 같이 붉어졌다.

‘사, 살려..’

조금 전까진 순결을 잃느니 죽고 싶었는데, 막상 죽음의 순간이 닥쳐오자 그녀는 애원했다.

살고 싶어!

무서워!

누가 좀..!

“크흐흐흐!”

그의 손이 팽팽하게 부푼 우람한 것을 쥐고, 오랜 기다림 끝에 목적달성을 위한 조준을 하기 위해 웅크릴 때,

바르르르르르르-!

그의 몸이 충격으로 떨렸다.

“······!”

“······?”

누군가가 그의 목을 뒤에서 잡은 것이다.

그래, 고작 목만 잡혔다.

그런데 사내는 그 순간, 온몸의 모든 것이 쑤우우우욱! 빨려 나가는 기분을 맛봤다.

-내가 뭐랬냐? 사람은 안 변한다니까? 그때 죽이라니까! 물러 터져서는!

악마가 낄낄거렸다.

“······.”

번은 무심한 눈으로 사내의 등을 노려보았다.

변하리라, 미련을 가지고 단칼에 목을 베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지 사람이 모자랐을 뿐, 하지만 사람이 모자라더라도 처리할 놈은 바로 처리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셈. 그러다가 자신을 올려보고 있는 미루와 눈이 마주쳤다. 사내의 손에서 힘이 풀리자, 그녀의 호흡이 돌아왔다.

“컥, 컥컥..! 화, 황.. 황자니이임?”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거 꿈은 아니지?

“..끄윽. 끅.”

긴장이 한순간 풀리며 이제 살았다는 안도감이 해일처럼 밀어닥쳤다.

하지만, 그때.

저게 뭐야?

‘천사..?’

그렇게 느껴졌다. 아주 예쁘고, 까만 천사. 그래서 더 무섭다. 갑자기 무슨 천사가 보여? 그건 내가 죽었다는 뜻인가? 근데 왜 날개가 없지? 경황이 없어, 헛것이 보이나?

“······?”

흠칫.

아니다. 그녀는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이제 이것이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라 인지되기 시작한다. 머릿속엔 경고등이 울려대지만, 소름은 가시질 않고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뭔가 이상한 게 보이는데, 그게 너무도 무서웠기 때문이리라.

스스스스스스.

사방에서 다가 온다.

그리고 밤보다 어두운 피부를 가진 수많은 이들이 이곳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얼굴들.

미루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것. 수많은 얼굴에서 번뜩이는 시선이 쏟아지고 있었다.

“······!”

찰나였다. 미루의 시선이 저 하늘로 도피한 것은.

그리고 본다.

‘없어!’

마굴과 하늘을 잇던 까만 기둥이 사라졌다는 것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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