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좌의 게임-73화 (73/177)

# 딥키스 #

“어때요? 우리 계약, 갱신할만하지 않나요? 당신과 나는 서로 도울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체리티에겐 번이 백마 탄 왕자님으로 보일지도 몰랐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백마도 있고, 황자의 신분도 거짓이 아니니까. 아직 번이 열두 살이란 건 모르는 모양이었지만.

“그거 농작물도 영향을 주나?”

“그럼요! 우릴 우습게 보지 말아줬으면 하네요!”

이곳 생태계에선 최약체 먹잇감으로 전락했다곤 해도, 그녀는 엘프다. 대륙에선 찾아보기도 힘든 가장 귀한 몸이라는 거였다. 물론, 이들은 묘하게 뒤틀려 있었다. 본래 엘프라면 식물을 아끼고, 사랑해마지않아 고사한 나무만 이용해 집을 짓고, 과일도 땅에 떨어진 것만 주워 먹을 정도로 자연친화적이었는데, 체리티만 봐도 그런 게 없었다. 이 혹독한 환경에서 변한 것은 피부색만이 아니었던 거다.

‘이들이 작물의 성장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지?’

-그건 나도 모른다. 엘프를 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만 알지.

벨버른은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농사를 지어도 그게 자랄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 하지만 800명의 엘프라면? 아직 정확한 계산은 어렵지만, 긴급수혈쯤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번이 갈등하는 모습을 보이자, 체리티가 냉큼 말했다.

“처음에 우리 선조가 여기에 자리를 잡았을 땐, 이곳에 숲이 없었다고 해요. 그저 황량한 황무지였죠. 이것으로 증명이 되었지 않나요?”

어둠만 가득한 이 세계에서, 이 정도의 숲을 자연스럽게 일궜다면 이들 존재 자체가 지닌 힘은 무시하지 못하리라.

체리티는 쐐기를 박듯 한가지 비밀을 더 꺼냈다.

“그리고.. 여긴 없지만, 밖에 나가면 정령의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그랬다.

엘프는 정령과 절친이다. 땅의 정령, 물의 정령, 바람의 정령만 이용해도 숲 하나를 만들어 가꾸는 건 일도 아닌거다.

-저건 사실이다. 저것들은 신에게 그쪽으로 능력을 몰빵 받았으니까. 이 계통으론 드루이드와 쌍벽을 이룬다 할 수 있지.

이놈 앞에선 말을 좀 가려 해야겠다. 악마가 체면도 없이 뭘 이렇게 빨리 배우냐.

“흐음.”

그보다 이거 생각보다 의외의 성과인데?

하지만 이들을 데리고 나가는 것과 책임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다크 엘프. 우선 ‘다크’라는 게 붙어 있다는 게 지금 번이 처한 상황에서 그리 좋은 방식으로 작용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

‘방법을 찾아봐야겠군.’

겨우 악마 꼬리표를 뗐는데, 다크 엘프와 어울리면 황실의 정적들이 무슨 소문을 만들어낼지 몰랐다.

'그래도..'

위험을 감수할 만큼 매력적인 능력이긴 하다.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존재들이니까.

그때였다.

“황자니이이임!”

저쪽에서 융이 외친다.

저주가 완성되었다는 뜻이리라.

.

.

-우와아아아아!

-황자님이 해냈어! 해내셨다고!

-언니이이이이이!

-아빠!

요세인이 발칵 뒤집혔다.

사냥에 떠났던 사람들이 일부 돌아왔는데, 줄로 꼬아 만든 망태기에 한가득 고기를 짊어지고 나타난 거다. 그것도 그냥 고기가 아니라 아주 귀한 호박 박쥐 고기를!

줄줄 흘러내린 침이 뚝뚝 떨어진다.

훈제로 잘 말린 고기는 입에 넣으면 단박에 먹어치우리라.

미루와 다루 자매는 사람들의 밝은 표정을 보며 절로 배가 불렀다. 요세인 사람들이 이렇게 밝게 웃는 것을 본 게 언제던가?

“누나!”

“언니!”

그녀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다섯 동생은 그녀들의 치마폭에 매달려 펑펑 울었는데, 그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건네준 고기를 와구와구 씹어 삼켰다. 일단 허기를 달래게 하고, 국을 끓여 배부르게 다 같이 나눠 먹자!

한데, 경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고물이나 마찬가지였던 물건들을 싸들고 출발했던 말이 돌아온 거다. 그것도 말의 허리가 휘어질 정도로 곡식을 바리바리 싣고서. 비록 그 양은 요세인 사람들이 전부 풍족하게 먹을 양은 아니었지만, 영주 성 앞은 아주 오랜만에 배식을 받으러 선 줄이 길게 늘어섰다. 한 줌의 행복. 너무도 소중한 희망의 씨앗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배가 부른 흔치 않은 날.

미루는 달라붙는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주었다.

“큰언니야, 안 가면 안 돼?”

가야 한다. 아직도 마굴엔 일손이 부족하다. 일을 해야 더 많은 고기를 분배받을 수도 있고, 모두 힘을 합하는 중요성도 깨달았다. 뿌듯한 이 느낌. 잊고 싶진 않았다. 집에서 놀고 있어 봐야, 밥이 나오나 국이 나오나?

“이제 사람 사는 것 같네. 그치?”

다루의 말에 미루도 끄덕였다.

아직 사람들이 가족과의 회포를 다 풀지 못했나보다.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매달리는 동생들을 달래 집으로 보낸 뒤, 자매는 서로에게 기대 팔짱을 끼고, 도시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변하고 있었다. 조금이지만, 생기가 돌고 활력이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황자님은 괜찮으실까?”

다루가 말했다.

벌써 일주일. 박쥐는 아직도 넘쳐났고, 작업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모두의 얼굴에 근심은 갈수록 깊어졌다. 황자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젠 페트릭 경이 마굴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몇 걸음도 못 가서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오시는 걸 보았다. 보기엔 별거 아닌 것 같아도 굴 안쪽의 불길한 기운과 박쥐 똥의 역한 냄새가 누구도 견딜 수 없는 구토를 유발했기 때문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그곳을 뚫고, 대체 황자님은 어디로 가신 걸까?

-다 왔나? 출발한다! 어이, 거기! 졸지 말라고!

미루와 다루는 사람들과 다시 마굴로 향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요세인이 멀어진다. 다시 이틀을 걸어가야 하겠지만, 처음관 달리 이젠 힘이 난다. 그녀들의 앞엔 희망이 기다리고 있었고, 기다리는 이들에게 안겨줄 고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황자님..’

이제 한 분만 무사하시면 바랄 게 없다.

‘괜찮으신 거죠?’

미루는 그 날 밤 모닥불에서의 사건 이후 황자님의 얼굴이 한순간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분을 생각하면 괜히 가슴이 콩닥거렸고, 심장이 철렁철렁 수시로 내려앉았다.

물론 소녀는 안다. 이게 어떤 감정인지. 그래서 더 잘 알고 있다. 엄청난 신분의 벽을 뚫을 수 없다는 것도. 그는 황자. 나는 보잘것없는 소녀 가장 아닌가.

하지만 기도한다. 뭐 어떤가? 마음으로 응원하는 것은 자유인데!

‘기다릴게요!’

그렇게..

그녀가 올려보는 밤하늘 어디쯤.

반짝이는 별들 틈 어느 한 지점 사이에서.

“크으으읍!”

번은 온몸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공터.

반지름 4미터짜리 거대한 원이 그려져 있었다. 안쪽엔 복잡하게 그려진 도형의 꼭짓점마다 불길함 가득 품은 제물이 놓여있었고, 이제 막 꺼낸 동물의 생간이나 급하게 부패시킨 사체, 독기 듬뿍 먹은 과일 따위가 반응했다.

푸스스스스..

그런 것들이 뿜어내는 푸른 연기가 마법진 안쪽에 고여 들었고, 중심에 앉은 번의 몸을 할퀸다.

-저거, 괜찮은 걸까?

-무시무시하잖아!

-괜찮을 리가! 이런 건 처음 본다고!

웅성웅성.

모든 엘프들이 주위에 모여있었다.

이미 번이 악마가 아니라 에비뉴라는 황국의 황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며 이젠 그를 걱정하는 엘프들이 늘어갔다. 번을 따라 여길 나가야 하는데, 지금 그가 잘못되면 말짱 꽝이 아닌가!

“융, 이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이렇게 무시무시한 기운은 처음이라고요! 멈춰야 해요!”

체리티도 안달이 났다. 하지만 마법진 안쪽으로 감히 들어갈 엄두를 못낸다.

씨익-!

소름끼치는 융의 미소.

안쪽에서 융이 허리를 숙여 이것저것 위치를 조율하면서 최종점검을 하고 있다.

“걱정 말라니까 그러네. 황자님껜 이게 독이 아니라 약이라고.”

“세상 누가 그래요!”

“이분은 그렇다니까?”

어둠으로 가득 찬 이곳이 아니면 엄두조차 내지 못할 주문이다. 이 기회를 놓치면 또 언제 해볼까?

“저리 가! 방해 말고! 너 때문에 망치겠다! 책임질 거야?”

“흐읍..! 아뇨!”

파리 쫓듯 손을 휘저으며 체리티를 물린 융은 중얼거리며 힐끔 번의 안색을 확인했다.

나쁘지 않다. 저리 땀을 흘리는 건 몸속 어둠이 반응하고 있다는 증거다. 혈색도 좋고, 그리 고통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즉살卽殺..타살他殺..”

그녀는 주문을 읊기 시작했다.

이걸 밖에서 하려면 숙련된 마녀 수십이 달라붙어 몇십 년을 준비해도 될까 말까다. 그만큼 강력하고, 비범하며 무서운 저주였고, 타인에게 이렇게 직접적이고 곧바로 해를 끼칠 수 있는 저주도 드물다.

“만병萬病의 근원이자.. 죽음과 가장 가까운 자여..”

2황비 고것이 황자님을 그리 괴롭혔지만, 그래도 좋은 거 하나 남기고 갔다. 바로 이 저주가 어떻게 쓰이느냐!를 알게 되었으니,

남에겐 독할수록 번에겐 달 것이고,

“어둠보다 까맣고.. 혼란보다 타락한 자여..”

마기와 사기가 넘칠수록 번의 빈 그릇을 채우리라.

융의 두 팔이 하늘을 향해 번쩍 들렸다.

“당신의 키스를 청합니다!”

콰르르르르르릉!

검은색 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히이이이익!

-엄마야!

-꺄아아아아!

마법진 주변에 있던 엘프들이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번쩍, 번쩍! 쾅쾅!

벼락은 계속해서 마법진을 때렸다.

배터리를 충전하듯 힘을 모은 마법진은 이윽고 준비가 끝났는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이제 저주 대상을 찾는 과정이다.

“다크니스darkness 컨택트contact!”

저주는 어둠과의 농밀한 접촉을 의미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그늘의 그런 어둠 따위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주에서 가장 불길한 자의 악의惡意.

세상에서 가장 타락한 자의 살의殺意.

쩌어어어억-!

번의 목 뒤로 공간이 벌어졌다. 마치 누군가 허공을 종이처럼 잡아 찢은 것 같다. 그 사이로 뭔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번이 보았다면 곱창 같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건 거머리처럼 동그란 입을 가졌는데, 꾸물거리며 번의 뒤에서 도사리더니 느닷없이 착! 번의 등 어깨에 달라붙었다.

-아아악! 황자님!

체리티가 비명을 질렀다.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가장 뛰어난 암살자. 마계의 가장 불길한 생명체의 일부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크흑..?”

번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쪼오오옥-!

강렬한 키스를 남긴 그건 다시 쑤욱 물러나더니, 거짓말처럼 공간의 틈으로 빨려 갔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친..!’

이때, 번은 의식을 차리고 있었다.

-끌끌, 좀 아플 거다. 따끔하지?

악마가 즐거운 듯 웃었다.

이게 조금이라고? 니가 한번 물려봐라!

「고통을 차단했습니다.」

「아드레날린을 분비합니다.」

「상처를 재생합니다.」

분명 신경을 끊었는데, 고통은 가시질 않았다. 이건 육체적인 상처가 아니다. 영혼을 질겅질겅 씹어뱉은 기분이랄까?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아픔이 아니었다.

-아베, 저놈은 마계의 가장 밑바닥에서도 최하층에 사는 놈이다. 수만 년간 쌓인 온갖 잡스러운 기운을 빨아먹고 살아서 놈의 주둥이에 닿은 생물은 버텨내질 못하지. 그 어떤 약으로도 해독할 수 없고, 신神도 죽일 수 있는 맹독猛毒을 품은 키스를 한다고!

하지만 아베의 키스가 고통만 남기고 간 것은 아니다.

「농밀한 다량의 어둠을 흡수합니다.」

「새로운 8종의 성분을 흡수합니다.」

「어퍼 홀이 확장합니다.」

감전된 것처럼 몸을 떨어대는 번은 가까스로 침을 삼켰다. 세상에 이런 강력한 독은 처음이었다. 그렇다는 건 이것만 이겨내면 더는 무서울 게 없다는 말과 같다.

좋게 생각하자.

고통은 잠시지만, 그것으로 얻는 능력은 영원하다.

번은 그렇게 이 끔찍한 시간을 이겨내고 있었다.

덜덜덜덜.

그의 몸에 변화가 생긴 것은 파랗게 질린 입술부터였다. 쩍쩍, 갈라지더니 피가 줄줄 턱까지 흘러내렸다.

몸이 절로 반응한다.

「지혈합니다.」

「상처를 재생합니다.」

번의 몸 곳곳에 퍼져 있는 오색마나가 위기를 느끼고, 대항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파괴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입술에 이어 모든 피부가 줄줄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후두두둑, 머리칼이 흩날렸다. 눈썹까지 모조리 빠졌다. 이건 마치 옆에서 지켜보자면 얼음으로 만든 조각이 뜨거운 볕에 녹는 것 같았다.

물론 그렇게 단순한 상황이라면 비명을 지르는 이도 없었겠지만.

-꺄아아아악! 황자님!

-어떻게! 으아아악!

-끔찍해! 으아아아아앙! 무서워!

아이들은 울고, 여자들은 기겁한다.

그 와중에 융은 번의 몸에 바짝 달라붙어 눈을 가늘게 뜨고 유심히 살폈다.

모든 것이 순조롭다.

지금 이건 뱀이 허물을 벗는 거나 매미가 탈피하는 것과 같으리라.

그런데 어느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무얼 발견했다.

번의 미간 사이 약간 위쪽. 이마의 중간쯤?

“어어어어억?”

그녀가 해괴한 소리를 내며 뒤로 벌러덩! 자빠졌다.

분명 번의 두 눈은 질끈 감겨 있는데, 그의 이마에 또 하나의 눈이 뜨여 융을 빤히 노려보고 있기 때문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