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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72화 (72/177)

# 사냥 2 #

저주.

남들에겐 치가 떨리고, 무서운 공포의 상징이었지만, 번에겐 남다른 것.

“흐음, 그래? 구체적으로 어떤?”

“여기 퍼져있는 어둠의 기운을 한곳에 모으고, 클로의 부산물과 독충, 독초 같은 것들을 잘 이용하면..!”

“하면?”

“대마법사의 재앙급 저주를 구현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태풍을 일으키고, 바다를 뒤엎고, 산을 무너뜨리는 자연재해를 사람의 힘으로 일으킬 수 있는 세상이 바로 여기였다. 물론 그런 일을 아무나 할 순 없지만, 대마법사라는 것들은 그게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공격마법을 재앙급으로 분류하는데, 마녀들 세계에서도 그런 고위 저주가 있었다.

“그게 제대로 구현되면 황자님은 어둠의 정수를 더 빨리 얻을 수 있으실 거에요!”

저주받아 힘을 키운다니 웃기는 얘기였지만, 번은 실제로 그랬다. 날아오는 살殺도 흡수할 수 있는 기이한 능력을 갖췄으니까.

“해봐.”

“네!”

융이 신이 난 듯 저쪽으로 달려갔다.

무섭게 집중한 그녀는 끊임없이 뭔가 중얼거리며 돌아다녔는데,

“일단 황색 독 두꺼비 눈알을 말리고, 클로의 쓸개를 잘게 잘라서 한 줌. 상덕 버섯도 있으니 올리브 뱀한테 먹여 독기를 올리는 게 좋겠지? 이틀이면 통통하게 부풀어 죽을 거야! 히히! 가만있자! 솥을 구해야 하는데! 클로의 두개골을 써볼까?”

..지금은 가까이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

번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인근에서 가장 굵고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엘프들이 말뚝을 박아놓아서 쉽게 디디고 오를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놈들은 엘프라면서 나무를 이리 막 다뤄도 되는 건가? 불도 피우는 것 같은데. 하긴 이런 것들이 다 편견일지도 몰랐다. 실제로 엘프를 본 적은 없었으니까.

휘이이이잉-!

높은 곳에 오르자, 바람이 거칠게 몸을 흔들었다.

‘클로란 게 개체 수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은데?’

-당연하지. 사자가 많냐? 사슴이 많냐?

먹이사슬의 높은 곳으로 오를수록 숫자는 줄어든다. 이건 자연의 이치이자, 생태계를 유지하는 법칙이기도 하다. 뭐, 그래도 엘프 옆에 달라붙어 있으면 놈들은 올 거다. 그 또한 자연스러운거니까.

그렇게 번은 간만에 주변 풍경을 느긋하게 보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빠르게 굴러간다. 중단전이 만들어지면 뭐가 어떻게 달라질까? 확실히 쓸모가 있으니 악마가 저리 재촉하는 거겠지만, 인간의 틀에서 너무 벗어나서도 곤란하다. 황궁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을까? 어머니와 샨은 잘 지내겠지? 아버지는 전쟁을 잘 이끌고 있으려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흘렀다.

부스럭.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누가 왔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신을 믿겠다는 말은 아니에요.”

“그러라고 한 적 없어.”

“하지만 계약이라면 하겠어요. 우리를 내보내 주세요.”

번은 뒤를 돌아보았다.

체리티가 서 있다. 170cm정도의 키에 군살이라곤 하나도 없는 미끈한 몸. 엘프라 그런지 젊음을 유지하고 있고, 도시에서 만에 하나 눈에 띌까 말까 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나가서 좋을 게 없을 수도 있어.”

번이 그녀의 몸을 훑으며 말했다.

“노예로 팔려갈 수도 있고, 더 좋지 않은 일을 당할 수도 있다.”

분명 다크 엘프에게 강한 호기심을 보이는 부류가 있을 거다. 짬뽕만 먹다 군침 도는 짜장을 보면 일단 입에 쑤셔 넣고 보는 권력자들도 있을 것이니까.

“알고 있어요. 인간들은 그리 착한 생물이 아니란 건 아니까.”

“인간만 그럴 것 같진 않은데?”

엘프란 것들이 대륙에 남아 있다면 그들이 얘들을 인정할까? 모르겠다. 이게 내기라면 아니라는 쪽에 돈을 걸고 싶다.

“..그렇다 해도 이렇게 살 순 없어요. 우린 아주 오랫동안 약자로 살아왔어요. 언제나 사냥당하고, 숨죽이고, 겁먹고..”

왜 싸우지 않지? 라는 말은 하지 말자. 클로를 상대해봐서 안다. 그 튼튼한 다리는 웬만한 무기론 흠집조차 내지 못할 거다. 튼튼한 가죽은 화살도 박히지 않을 거고. 번이 특수한 경우니까 해치운 거지, 모두가 그처럼 깡패가 될 순 없었다.

“어디든 여기보단 나을 거에요.”

체리티는 느끼고 있었다. 번이 클로를 완전히 소멸시킬 순 없을 것이다. 그가 떠나고 나면 당장은 숫자가 줄긴 해도 시간이 흐르면 다시 늘어날 거고, 그리되면 엘프들은 계속해서 먹잇감으로 살아가야 함을 말이다.

"······."

번 역시 누구보다 이들의 기분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봤으니까. 포식자에게 언제 잡아먹힐지 조마조마하며 초원에서 풀을 뜯는 가장 최약체의 삶을.

“이들을 위해서라면 저는.. 당신에게 영혼을 팔 수도 있어요.”

체리티가 번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깝게.

“하지만 나 하나로만.. 다른 이들은 놓아주세요.”

그녀는 번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악마와 거래를 하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희생이다. 여왕으로서, 일족의 미래를 책임져야 하는 모두의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 그녀의 손이 어깨의 나무줄기를 잡아 아래로 내렸다. 투욱 풀어지기 시작하는 가느다란 옷은 이제 본래의 모든 기능을 상실한다. 남자라면 거부할 수 없는 매혹적인 몸.

번은 그녀의 모든 것들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부르르..

각오는 하고 왔지만, 그녀 역시 떨린다.

질끈 두 눈을 꼬옥 감고, 속눈썹을 흔들었다. 하지만,

따악-!

“아앗! 아팟!”

그녀가 어둠 속에서 본 것은 별이었다.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고, 비틀거리는 체리티.

“치워. 관심 없으니까.”

“나, 나로는 부족한 건가요?”

악마가 여자를 마다하다니! 더 어린 여자를 찾는 건가? 혹은 남자를?

“······.”

번이 성 경험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수사슴으로 많은 암컷무리도 이끌어봤고, 개구리, 쇠똥구리, 달팽이, 심지어 파리로도 태어나 교미해봤다. 하지만 그건 본능이었다.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이젠 발정기가 없는 것이다.

이제 사람으로써 번은 충분히 이성을 통제할 수 있었고, 당장에 필요성이 없다면 굳이 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몸을 쓰고 싶으면 다른 방식으로 도와. 내게 필요한 건 클로다.”

체리티는 상처받은 여자처럼 눈을 그렁그렁하게 뜨더니 입술을 꾹 다물었다.

“쯥..”

자존심에 상처받은 게 분명한 체리티를 내버려두고, 번은 훌쩍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클로란 놈들, 홀로 생활하냐?’

아래로 내려와 악마에게 물었다.

-보통은 그렇지.

“쳇.”

우글우글 모여 살면 더 편할 텐데. 어쩔 수 없이 하나씩 처리해야 하는 건가?

남는 시간에 다른 거나 주워 먹으며 무료함을 달래야겠다고 생각한 번이 마을을 벗어나려는데, 언제 따라붙었는지 체리티가 다시 나타났다.

“같이 가요.”

번은 피식 웃었다.

“그러든지.”

이곳 지리에 밝은 사람이 도와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

일주일이 지났다.

번은 이 사이 엘프 마을로 접근하는 클로를 세 마리 사냥했고, 심장을 먹었다. 마녀 융은 두 눈이 퀭할 정도로 잠도 안 자고 저주에 몰입했고, 처음엔 이 수상한 이인조를 경계하던 엘프들도 하나둘 경계를 풀기 시작했다.

그들이 악마를 처음 본 건 아니었다.

수년 혹은 수십 년에 한 번씩 느닷없이 나타나서 아이들을 잡아가거나, 여자들을(혹은 남자를) 겁탈하고 인정사정없이 살육을 저지르곤 훌쩍 떠나는 일도 있었다.

그런데 번은 달랐다.

여자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늘 홀로 생활했으며 이들에게 원하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러다 보니 호기심이 커진 것은 엘프 쪽이었다.

“악마가 아닐지도 몰라. 신성력을 쓴다고. 그건 불가능해.”

“하지만 꼬리가 있잖아! 마녀도 달고 다니고!”

"그거 못봤어? 클로 심장 먹는거? 으으으!"

엘프들의 설왕설래說往說來가 이어진다.

체리티도 복잡한 심경이었다. 대체 번이라는 자의 정체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클로의 심장을 거리낌 없이 먹는 걸 직접 봤으니 악마라 할 수 있었는데, 그와 동행하다 보니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게다가,

“황자님! 황자니이이임!”

저쪽에서 마녀가 달려왔다.

“준비가 거의 끝났어요! 오늘 밤이면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잘됐군.”

황자라 한다. 황자면 황제의 아들이라는 뜻 아닌가? 요즘 바깥세상에선 악마를 그리 부르나? 그의 엉덩이에 붙어 살랑거리는 꼬리를 보던 체리티가 불쑥 물었다.

“왜 당신을 황자라 부르죠?”

번과 융이 체리티를 보았다.

“······.”

“······.”

뭐라 해야 하나? 황자니까 황자라 부르지.

번은 머리를 흔들며 그녀들을 떠나 다시 할 일을 했다.

밤이 왔다.

그 사이 융에게 번의 신분을 전해 들은 체리티가 아주 미묘한 표정으로 모닥불 가에 앉아 있는 번에게 다가왔다.

“진짜, 에비뉴라는 나라의 후계자예요?”

“······."

“왜 말하지 않았죠?”

“안 물어봤잖아.”

“······.”

기막힌 듯 입을 쩍 벌리는 체리티. 저러고 있으니 귀엽긴 하다.

“아, 아니 무슨 황자가..”

클로의 심장을 먹고, 악마의 꼬리를 가진 것도 모자라 이렇게 마녀와 둘이 다니나? 아득히 오래전에 이곳에 갇혀서 인간들의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진 몰랐지만, 왕국이나 제국 같은 기초지식은 남아 있는 체리티였기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그게 상관있나?”

“있지요!”

“······?”

“당신이라면 우리에게 보금자리를 줄 수 있잖아요!”

“아아, 아직 그 정도 능력은 없는데?”

“후계자라면서요! 그러면 머지않아 나라의 주인이 된다는 뜻 아닌가요?”

거야, 니가 대 에비뉴의 황제 폐하가 어떤 사람인지 몰라서 하는 말이고. 번이 씁쓸하게 미소 지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그렇게 쉬웠으면 이 고생을 하고 있겠냐?

체리티는 여왕이라곤 하지만 여기 처박혀 살아와서 그런지 아주 순수한 구석이 있었다. 아니 이걸 멍청하다고 해야 하나? 사기꾼에게 이용당하기 딱 좋을 정도였다. 하긴, 그랬으니 여기 갇혔겠지만.

“우리를 도와줘요. 이 은혜는 반드시 갚을게요!”

“아아, 그러고 싶어도 능력이 없다니까 그러네.”

체리티는 번을 따라 세상으로 나간다곤 했어도, 바깥세상에 대한 미지의 공포가 있었다. 833명이나 되는 일족을 이끌고, 새로운 터전에 자리를 잡아야 하는 부담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미안하지만, 너흰 내게 짐밖에 안 돼.”

번은 자선 사업가가 아니다. 요세인이야 이유가 있으니 돕고 있는 거지, 온 세상 어중이떠중이 곤란한 이들을 모두 책임질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에비뉴 황자가 아니라 제국의 절대자라도 못하는 일 아닌가.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를 못한다잖나?

“왜요? 우리가 얼마나 쓸모가 많은데요!”

네까짓 게?

피식 웃던 번이 끄덕였다.

아아, 몸값은 비싸긴 하겠네. 여자에게 환장한 돈 많은 아저씨들은 특별한 걸 원할 테니까.

딱 그 정도였다. 번이 매기는 가치는.

“..불쾌하네요.”

번의 눈빛을 보며 체리티가 입술을 깨물더니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

뭐하는 거지? 갸웃하는데, 그녀의 손에서 검은빛이 반짝였다. 그게 이슬처럼 토옥, 톡, 바닥으로 떨어진다.

“비록 여기선 잘 안되지만..”

땅으로 떨어진 빛은 아래로 스며들더니, 묘한 기운을 물씬 내뿜었다. 그리곤,

들썩들썩.

흙이 움직이더니, 고사리 대가리 같은 뭔가가 올라오다가 시들어버렸다.

“밖에선 다를 거에요.”

그녀가 의미심장하게 번을 보았다.

“당신이 있던 곳이 식량난에 처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융이 어디까지 말했는진 모르겠지만, 번은 방금 들썩였던 땅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서 악마에게 묻는다.

‘엘프들이 식물에 얼마나 영향을 줄 수 있지?’

-네가 어둠을 느끼는 것처럼 저것들은 풀과 나무 따위와 감응하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변 식물이 잘 자랄 만큼 영향력을 행사한달까?

‘오호라-!’

번의 눈이 오래간만에 번쩍 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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