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종지부 #
“간만에 기분이 좋으신 것 같습니다.”
스캇이 말했다.
황제는 부정하지 않는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끄덕인다.
“저놈, 물건이군.”
“피가 어디 가겠습니까?”
“그건 아니지. 같은 핏줄을 받았는데, 저리 다르지 않나?”
카이사르를 두고 하는 말.
스캇 역시 그 점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기에 쿡쿡, 웃었다.
“꼭 카이사르 황자가 아니었다 해도, 저 독기를 감당하긴 힘들었을 겁니다.”
“하긴.. 저런 놈 앞에 있으면 오금이 저릴 거야. 전쟁터에서도 저러긴 쉽지 않은데 말이지. 저건 배운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나?”
그들이 본 번은 냉철했다.
은사의 말에 딱 그만두는 것을 봐라. 흥분해서 날뛰다 얻어걸린 것도 아니오, 운이 좋았다는 것도 아니란 얘기가 된다. 자신의 실력을 철저하게 알고, 상대의 방심을 노려 모든 것을 계획했다는 것. 고작 아홉 살짜리가 말이다.
“옛생각 나시죠? 저는 마치 수년 전, 폐하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었습니다.”
“내가 뭘?”
“이다낭의 수도 사함을 공략할 때, 직접 적 기사들의 사지를 잡아 뽑으며 진군하지 않으셨습니까?”
“그거야..”
“본보기가 필요했죠.”
“알면서 뭘.”
“번 황자도 같은 일을 벌인 것 같지 않습니까?”
아주 보란 듯이 말이다.
“반응을 보아하니.. 제대로 통한 듯하고요.”
-번 황자님! 최곱니다!
-번! 번! 번! 번!
-꺄아아! 어서 자라서 날 가져요!
열기는 아직도 식지 않고 있었다.
가슴을 까고 흔들어대는 여자도 있다. 이건 이 콜로세움의 승자가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응원이기도 했다.
“······.”
쯧, 혀를 찬 황제는 저 아래를 내려본다. 번의 어미가 보였다. 작은 등과 마른 어깨. 그게 가늘게 떨리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허리는 곧게 서 있고,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아들이 정신을 잃어도 끝까지 지켜봐 주고 있는 것이다.
“잘 키웠군.”
묘한 여자. 겉보기엔 수더분하고, 나서지 않는 조용한 사람 같아도 저럴 때 보면 강인한 여장부가 따로 없다. 하긴 그때도 그러했다.
-나라의 이름이 바뀌는 것뿐이겠지요. 아버님. 저는 불행하다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분의 말씀을 따르세요. 그것이 죽는 것보다 백번 나은 일입니다. 살아 있어야 기회도 오지 않겠습니까?
끝까지 저항하는 왕을 차분하게 말리던 딸. 그게 저 여자였다. 그러고 보면 번 녀석의 성격이 어미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기회라..’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는 고개를 돌려 스캇에게 말했다.
“저 녀석이 깨어나거든, 내게 보내라.”
“상이라도 주시려고요?”
“그것도 좋겠지.”
오늘 아주 멋진 장면을 보았으니, 작은 답례 정도야 대수겠나?
“편애가 느껴지면 경연에 지장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라고 하는 거다. 다른 녀석들도 좀 보고 배워야 하지 않겠나.”
황제는 강한 사람을 좋아했다. 그것은 무력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오른팔이 잘려도, 왼팔로 검을 쥐고 적을 하나라도 더 베라. 왼팔도 잘린다면 이로 물고라도 베라. 그리하면 나는 반드시 보상을 내릴 것이다. 라는 것이 철鐵의 군대의 암묵적 룰이었다. 실제로 황제는 그런 전사들에게 포상을 아낌없이 베푸는 것으로도 유명했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번은 오늘 전사였다.
자격은 충분하다.
“내가 전에 은사와 이런 얘길 했던 적이 있지.”
“······?”
“저 녀석이 성장하면, 반드시 내 적이 될 거라고 말이야.”
“그랬습니까?”
“그래, 그런데 오늘 보니 알겠어.”
“확신하신 것입니까?”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저 보고 싶군. 녀석이 어떻게 성장할지 말이야..”
황제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등을 기댔다. 그사이 장내를 정리한 집정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두 번째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경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윗과 골리앗, 개구리와 뱀, 쥐와 고양이. 보통은 상하관계가 절대 뒤집힐 리 없을 때 쓰는 비유. 그런데 간혹 살다 보면 가끔은 이게 역전逆轉하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곤 하는데, 오늘이 그랬다.
.
.
.
“왜 치료가 안 되지?”
“모르겠어! 성信력은 문제가 없다고!”
“다시 해봐! 이러다가 큰일 나겠어!”
콜로세움 내부 치료실.
카이사르와 번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있었는데, 신전에서 파견 나온 사제들이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보라고! 여기 카이사르 황자님은 호전되고 있잖아!”
카이사르의 터진 불알도 아무는 신성력이었다. 사지가 잘려나간 게 아니라면, 외상엔 탁월한 효과를 지닌 다는 것. 골든타임만 지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번의 부러진 허벅지 뼈가 붙질 않았다.
“어쩌지? 이러다 경을 치겠어!”
“우리론 힘들겠어! 장로님을 모셔와!”
사제들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냥 환자가 아니었다. 무려 경연에 승리한 황자다. 심지어 황제 폐하께서 깨는 즉시 데려오라는 전갈을 받지 않았던가? 직접 주관하셨던 곳에서 일어난 부상이니, 치료가 잘못되면 그 분노는 고스란히 신전이 감당해야 할 것이었다.
“내가 다녀올게! 너희는 계속 시도해봐!”
“그래!”
약 40분 정도가 더 흘렀다.
“후..”
카이사르의 치료를 맡았던 사제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한시름 돌렸다. 외상은 대부분 회복되었고, 새살이 돋아난다. 내부 장기도 며칠 안정을 취하면 제 기능을 할 것이다.
‘모를 일이군.’
하지만 번 황자가 문제였다.
성력이 통하지 않는다니? 이런 해괴한 경우가 다 있나?
이런 경우는 단 둘뿐이다. 성력 자체가 독으로 작용하는 악마의 하수인이거나, 신의 미움을 받은 저주받은 신체를 타고났거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성력이 닿았을 때 몸이 거부해 펄떡이거나 살이 타들어 가는 반응이 보였어야 하는데, 그조차 없으니..
“어떻게.. 전혀 듣질 않아.”
“확실히 우리론 안 되겠어.”
마치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쑤욱 성력이 번 황자의 몸으로 빨려 들어갈 뿐 어떤 조짐이나 징후도 보이지 않는다.
이때, 문이 벌컥 열렸다.
“한센 장로님.”
“미카엘.”
긴 수염을 기른 노인이 하얀 사제복을 입고 들어섰다.
“이분이신가?”
번에게 다가가며 묻는 한센 장로.
“그렇습니다. 성력이 전혀 듣질 않습니다!”
“몇 번이고 시도해 보았지만, 무용지물입니다!”
사제들은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한센 장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조심스럽게 번의 손을 잡았다.
“으음..”
한센 장로는 교단에서도 이름 높은 권위자였다. 50년 넘게 신전을 위해 헌신했고, 과거엔 몇 번의 신탁까지 직접 받았을 정도로 대단한 신성력을 지녔다. 그런데..
“기이하구나..”
사제로 오십 년이다. 그간 그가 본 환자는 헤아릴 수도 없다. 좀비에 물린 사람,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사내, 애를 낳다 죽어가는 여인까지. 다양한 사람을 보았고, 치료했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성력을 불어넣으면 아무 반응 없이 그저 빨려 들어간다니.. 그렇게 들어간 성력이 어떻게 흐르고, 작용하는지라도 느껴져야 하는데, 그조차 없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말이다.
“나로서도 알 수 없구나..”
그때였다.
“으음?”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굳었다.
“흐읍..!”
번을 잡은 손을 놓으려 했다. 그런데 떨어지질 않았다. 게다가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성력이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이, 이런..?”
그는 당황해서 있는 힘을 다해 손을 떨치려 했다.
“크허어어어억..!”
당황한 나머지 번을 떠밀듯이 밀쳐내고서야 겨우 떨어졌다.
“장로님!”
“한센 장로님!”
“괜찮으십니까?”
볼품없이 뒤로 나뒹구는 장로를 급히 사제들이 따라붙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장로는 자신의 손을 보며 일그러진 눈으로 중얼거렸다.
“모르겠다. 나도..”
그때였다.
“어? 어어?”
“버, 번 황자님이..!”
모두의 시선이 침대의 번을 향했다.
희끗희끗 보이는 어떤 장면.
그건 비 온 뒤 잠깐 뜨는 무지개 같기도 했고, 아주 맑은 날 지평선 끝까지 붉은빛을 뿌리는 노을 같기도 했다. 그런 어떤 신비로운 광채가 번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모두가 이런 광경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알록달록한 빛무리는 얼핏 보면 정령이 모여있나 여길 수 있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정령력과 신성, 마나는 확연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건 마치..’
장로가 침을 꿀꺽 넘겼다.
마나에도 성질이 있고, 분류가 있다. 어둠의 마나를 쓰는 자들을 흑마법사라 규정하는 것도 그 이유 아닌가.
‘번 황자님의 몸에 들어가지 못해 안달이라도 난 것 같지 않나?’
그랬다. 지금 번의 주변에 맴도는 빛무리는 분명히 ‘마나’였고, 그것들은 계속 얼쩡거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저 작은 몸에 들어가려고 말이다! 이게 말이 되는가? 칙칙하고 검은 어둠 마나만 있다면 ‘혹시 악마와 내통하고 있는 것인가! 그래서 성력이 통하지 않았던 것인가? 납득하기라도 했겠다만은..
보라!
자연을, 만물을 구성하는 모든 색이 전부 모인 것 같지 않은가! 그것들이 나 좀 보라고 살랑살랑 유혹한다. 내 손을 잡으라고 춤을 추기도 하고, 왜 날 외면하느냐며 성을 내는 것 같기도 했다.
“허..”
그런데 그때였다.
번이 눈을 떴다.
“······?”
“······!”
“황자님?”
그와 동시에 주변의 모든 마나가 거짓말처럼 파파팟! 사라졌다. 0.1초도 안 되는, 그것보다 더욱 빠르게!
"······!"
"······?"
그리고 이어진 찰나의 적막.
이내 번의 눈이 다시 감기고, 감긴 눈은 다시 뜨이지 않았다.
.
.
.
꿈이다.
꿈이란 걸 아는데도 깰 수 없는 꿈.
악몽惡夢. 아니, 이건 신성모독이다.
-끄아아아아아!
-살려줘!
-우리 아이가 아직 집에 있어요! 누가 좀 도와주세요!
수도가 불타고 있었다.
아비규환을 넘어 지옥도가 펼쳐졌다.
도시는 비명과 울음으로 가득하고, 신전 역시 겁화를 피할 수 없었다. 사제들은 바닥에 쓰러져 싸늘하게 식어가고, 어떤 사제는 끔찍하게 불타서 숯덩이가 되어버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광경.
“선택하라 했다. 가루비.”
한 사내가 계단에 앉아 있었다.
신께 기도를 올리기 위해 높은 위치에 만들어 놓은 제단으로 향하는 길목에, 벌거벗은 채 불길한 흑룡의 형상으로 만든 투구를 쓴 사내가.
‘이 남자는 누구지?’
꿈속에서 그녀는 생각한다.
의식이 있다는 증거.
사내의 몸은 성한 곳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흉터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조차 아름다워 보였다. 그 상처들이 여심을 자극하고, 모성을 일깨운달까?
“네게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아.”
사내가 다시 말했다.
가루비는 그의 앞에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그녀 역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 하지만 부끄러움보다는 당혹감이 앞섰다.
‘내가 왜 벗고 있는 거야?’
성녀. 그녀는 신의 여자다. 모두가 아는 사실이며, 그러기에 모든이가 경외하고, 존경받는다. 그런데 지금 이 사내는 그 관계를 깨라 하고 있었다. 신을 거부하고, 자신을 선택하라 말이다. 지엄한 ‘가’를 쓰는 사도에게 감히!
‘그렇게 보지 마! 부끄러워!’
하지만 어쩐 일인지 꿈속의 그녀는 그저 여인이 되어 있었다. 사내의 눈길에 몸을 떨고, 얼굴을 붉히는 평범한 여자가.
“가루비.”
그녀가 대답하지 못하자, 사내가 일어섰다. 그의 손에 잡힌 대검이 바닥의 대리석을 뚫고 박혀있다가, 우직! 다시 뽑혔다.
사내의 몸은 장인이 빚은 조각처럼 예술적이었다. 그의 하체에 매달린 남성은 그 어떤 것보다 외설적이기도 했고. 가루비의 몸이 바르르 떨렸다. 그가 다가올수록 느끼고 있는 거다. 머리는 부정하는데, 몸이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을.
“가루비.”
이제 그가 바짝 다가섰다.
소름 탓에 피부에서 일어난 솜털이 서로의 몸에 닿을 정도로.
“신과 함께 죽겠나?”
그의 우람한 왼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았다.
“나와 함께 살겠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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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어어어억!”
꿈에서 벗어난 그녀가 책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깜빡 잠이 든 모양인데,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분명 이웃 왕국에 파견된 수도사들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었는데..
“헉, 헉헉..”
그냥 악몽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그녀는 성녀. 나쁜 꿈을 꾸게 하는 마물이나 어둠의 요정 자체가 침투할 수 없는 성력으로 무장하고 있는 그녀였다. 그런데도 이런 게 보였다는 것은 예지몽일 확률이 높았다.
“대체..”
이건 계시啓示, 혹은 신탁이다.
어떤 미래의 한 지점일 수도 있었고.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거지..?”
땀에 흠뻑 젖은 그녀의 몸이 투명한 옷 사이로 비쳤다. 분홍빛 유실이 옷 속에서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아.."
그녀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생각하는 거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를.
모든 것은 인과가 있고, 결과엔 원인이 있을 터.
'투구를 쓴 그 남자는 누구지? '
그녀가 반듯한 이마를 와락 구기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똑똑 노크가 들리더니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녀님.
“네. 말씀하세요. 다란 사제님.”
-한센 장로님께서 뵙길 청하고 계십니다.
“지금요?”
-네, 그렇습니다. 무척 다급해 보이셨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그녀는 흠뻑 젖은 옷을 갈아입고, 식은땀을 닦아낸다. 몸무새를 가다듬은 뒤, 문밖으로 나가자 다란 사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요?”
“급한 환자가 있답니다.”
“환자요?”
그녀는 갸웃한다. 이제까지 성녀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환자를 직접 집도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녀는 성녀로써 그 존재만으로도 교단의 상징이 되기에 그 자체로도 중요한 의미가 되었고, 만일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외부인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려왔었다. 그런 그녀에게 환자를?
“황자님이십니다. 자세한 사정은 한센 장로님을 뵙고 듣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의 회복은 중요했다.
치료하지 못하면 신전의 무능함을 만천하에 알리는 꼴이 되니까.
신神.
대륙의 99신 중 태양신 가이아의 영향력이 가장 큰 에비뉴는 9개의 신전이 있었지만, 무척이나 폐쇄적이었다. 신도에게 허락된 공간은 아주 극소수였고, 제단이나 신전 안쪽은 왕족도 쉽게 출입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같이 특수한 날은 예외였다. 벌써 여기 신전까지 번의 활약이 흘러들었고, 카이사르에 맞서 싸워 이긴 그의 일화는 순식간에 전설처럼 도시 구석구석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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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관에서 한센 장로와 마주한 성녀.
“그랬군요. 이상한 일이네요. 성력이 소멸하다니.”
자초지종을 듣고, 성녀는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 모습이 참으로 순진해 보인다. 어깨 밑까지 흘러내린 상아색 금발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에 반사되어 금은처럼 빛났다. 또한 키는 작아, 사제복을 입혀놓으면 14세 정도 되는 수련사제로 보일 정도랄까? 하지만 그녀의 외모가 수련사제처럼 보인다는 것은 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저 얼굴.
저 얼굴 하나에 모든 것이 다 들어있었다. 사내를 유혹하는 색色은 물론이요, 아직 피지 못한 목련의 봉우리처럼 2차 성징이 채 끝나지 않은 처녀의 그것도 함께 말이다. 보고만 있어도 아주 혼란스러운 머리와 심장, 그리고 다른 한 부위가 뻐근해질 정도로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
“······.”
사제 하나가 얼굴을 붉히는 것을 보며 한센 장로는 머리를 흔들었다. 성녀님의 미색이 갈수록 인간의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눈에 보이면 흑심黑心이 생기는 것이니, 조만간 장로들과 이 문제를 상의해보아야 겠다. 앞으론 외부활동이 아니라도 신전 안에서 성녀에게 면사를 씌워야 할지도..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니.
“너는 어서 번 황자님을 모셔오라.”
“예, 예!”
후다닥 나가는 사제를 보며 장로는 근심 어린 한숨을 푹 쉬었다.
잠시 후.
나갔던 사제가 다른 사제들과 함께 들 것을 가져왔다. 그 위에 번 황자가 누워있었다.
그런데.
바르르..!
‘이 사람?’
성녀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꿈속의?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