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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좌의 게임-33화 (33/177)

# 반전 #

물론 어린 번이 그 남자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것은 아니었다. 꿈속의 남자는 투구를 썼었고, 나이도 훨씬 많았다. 하지만 성녀는 번을 보자마자 알았다. 이 어린 황자가 자라서 바로 그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일종의 권능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거지?’

꿈을 더듬어보자.

수도는 불탔고, 그는 신을 부정하는 언행을 했다. 그 지경이 되었는데, 현 황제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이미 처리된 건가? 철鐵의 군대는? 수도 경비단은?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었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그 남자는 반황이었다.

에비뉴의 모든 것을 부술 폭군이자, 재앙!

그녀가 인상을 팍 찡그리고 있자, 옆에서 장로가 묻는다.

“성녀님? 괜찮으십니까?”

“아, 예.. 괜찮습니다.”

장로에게 설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것이 예언이 아닐 수도 있고, 그 남자와 번 황자를 동일시한다는 증거조차 없었다. 성녀의 말 한마디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신중할 수밖에.

“보시겠습니까?”

사제들이 성녀 앞에 들것을 내려놓자, 장로가 긴장된 표정으로 물었다. 그도 괴이한 경험을 한 상태라 선뜻 추천하긴 어려웠으나, 성녀가 아니면 번 황자의 상태를 특정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래요..”

성녀는 조심스럽게 번에게 다가가 앉았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불가사의한 일이..”

장로가 아까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그리 말했지만, 쓸데없는 소리란 건 안다. 성녀가 괜히 성녀겠는가? 신神께서 직접 수호하시는 분이다. 만약 그녀가 못하거나 괴이한 일이 또다시 발생한다면 그것 역시 신의 뜻일 터였다.

“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녀는 가볍게 미소 지으며 번의 이마에 손을 올렸다.

작고 고운 아이의 살결.

이렇게만 보면 한없이 사랑스러운 어린 황자일 뿐인데.. 착각이었을까?

“······.”

시간이 찬찬히 흘러갔다.

장로가 불안한 듯 지켜보지만, 다행히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번의 내력을 살피는 성녀의 얼굴도 평온하기만 했다. 하지만,

“아. 아아.. 아..!”

이따금 묘한 탄성과 감탄, 탄식을 내뱉는 성녀. 10분, 15분, 20분이 흘러가며 장로와 사제들의 표정 또한 계속 변했다.

이윽고,

성녀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손을 뗐다.

“어떻습니까?”

장로가 바로 물었다.

“염려하지 않아도 상처는 회복될 것입니다.”

“아! 역시! 대단하십니다!”

장로는 과연 성녀인가! 라는 표정으로 외쳤지만, 성녀는 머리를 흔들었다.

“제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답니다.”

“네?”

“스스로 치료하고 있으시군요.”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스스로라니요?”

“저도 정확히는 모릅니다. 하지만 번 황자님께선 여러 신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시고 계신다는 것이 느껴지네요. 우리로선 감히 짐작도 하지 못할 만큼 말이예요. 아마 그 은총 덕분에 아까와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 같습니다.”

“여러 신이라니..! 그게 가능합니까?”

“믿기진 않지만, 사실이에요. 이분의 몸에는 적어도 다섯분 이상의 손길이 닿아있는 듯해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좀 걸리겠지만, 황자님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될 것입니다. 그저 저희가 도울 일은 안정을 취하시게 하는 것 뿐이군요. 절로 일어나실 거예요.”

성녀의 말을 들은 장로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성녀가 신과 대화하는 방식은 아주 간단했다. 물론 인간처럼 언어로 소통하는 것은 아니다. 직관直觀. 필요하면 보이고, 원하면 깨닫는다. 지금도 마찬가지. 그녀가 번의 몸을 느끼며 살펴보았고, 그러며 부러진 허벅지 뼈가 조금씩 붙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그의 몸속 구석구석에 미지의 힘이 깃들어 있고, 그것들은 인간이 원한다고 품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누가 이러한 일을 가능케 했겠나? 신 아니면 악마? 성력을 받아들이는데, 반탄력이 없으니 당연히 악마의 소행은 아닐 터였다.

더는 번의 곁에서 할 일이 없어짐을 느낀 그녀.

“황자님이 깨어나시거든, 기별 주세요. 꼭 드려야 할 말씀이 있답니다.”

“알겠습니다. 성녀님.”

성녀가 끄덕이는 장로를 보며 일어나려는데, 그 순간!

“······!”

그녀의 손목이 누군가에게 잡혔다.

-아앗!

-황자님!

-깨어나셨습니까?

번이었다.

‘내가 정신을 잃었었나?’ 인식하는 순간, 목소리가 들려왔다.

-..깨어나시거든 기별 주세요..

나른함이 깃든 차분함.

그 안에 녹아든 달콤함이 매력적인 여자의 육성이었다.

‘성녀라고? 그보다 경연은 어떻게 된 거지?’

정신이 들자마자, 그는 머리가 빠르게 돌아간다.

“······!”

"······!"

마주친 시선.

성녀는 이 짧은 순간 느꼈다. 그는 다르다고.

아무리 어려도 사람들은 자신을 보면 그 눈빛 속에 어떤 이성이랄까, 감정이란 것이 들어있어야 하는데, 번의 눈엔 이상하리만치 그게 전혀 없었다.

「누적된 신성력이 어퍼 홀upper hall에 저장되었습니다.」

「흡수한 신성력이 어퍼 홀上丹田을 확장합니다.」

「누적된 신성력의 사용조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어퍼..뭐? 상단전..?’

하지만 번은 지금 그녀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뇌의 어떤 부분이 변한 것 같은데, 정신을 잃은 사이 무슨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신성력이 뇌의 어떤 특정 부위에 저장되었다는 것인가? 왜? 어째서? 어떻게? 모르겠다. 이건 시간을 두고 더 고민해봐야 할 문제 같았다.

우선 당장은 지금 닥친 문제부터. 번은 성녀를 똑바로 바라보고는 진지하게 묻는다.

“지금 제 상태가 어떻습니까?”

그의 음성은 어린 그의 얼굴과는 다르게 진중하기만 하다. 그게 귀여웠는지 피식 웃음을 보이는 그녀가 가볍게 답했다.

“상처는 곧 아물 거에요.”

“그걸 묻는 게 아닙니다.”

여긴 어딥니까? 따위의 영양가 없는 질문 따윈 생략한다. 이 여자가 성녀라면 다시 만나 대화를 할 수 있는 확률은 로또나 다름없을 테니까.

살면서 많은 곳을 탐색하고 다녔지만, 에비뉴의 신전들은 아주 폐쇄적이었다. 신도가 아니면 접근조차 힘들었고, 사제들과는 교류조차 쌓을 수 없었다. 그런데 성녀라니!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허벅지의 부상 따위가 아니다.

“이것 좀..”

성녀가 번이 잡은 손목을 바라보자,

“아..”

번은 손을 놓았다. 그러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끄응, 절로 신음이 터지긴 했어도 몸을 움직이는데 큰 애로사항은 없어 보였다.

“정확히 어떤 것이 알고 싶으신 건가요?”

그의 진심이 전해졌을까?

그녀는 번과 같이 신중해졌다.

그러자 번은 그녀에게 절실한 이것부터 묻는다.

“저는 마나를 느끼지 못합니다. 왜 이런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해결 방법이 있다면..”

하지만 미간을 움푹 찌푸리며 말하는 번을 보며, 성녀가 갸웃했다.

“황자님께서는 착각하고 계신것 같군요.”

“······?”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랍니다. 그저 그것이 너무 가까이 있기에 염두에 두지 않을 뿐이지요. 이미 황자님께선 그 누구보다 사랑받고 계신답니다.”

'사랑받고 있다고? 내가?'

번의 눈살이 한껏 찌푸려졌다.

이제까지 살아오며 놓친 것이 있나? 그 수많은 환생을 반복하며 깨닫지 못한 것이 있었나? 번뇌로 흔들리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성녀는 싱긋 웃었다. 그런데 그녀의 웃음이 기묘하다. 이 말을 해주는 것이 좋을지 아닐지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음... 다섯이라는 숫자의 개념을 알아버리면, 더는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게 되죠. 사슴이나 토끼 같은 초식 동물이 육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버리면, 그들을 마주쳤을 때 두려움을 가지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황자님께선 지금 사고의 접근이 잘못되었을 가능성이 커요. 제겐 보인답니다. 이 순간에도 황자님 곁을 맴도는 마나가.”

“······!”

어려운 개념이었지만, 번은 알듯 모를 듯 머릿속을 떠도는 어떤 깨달음을 잡으려 노력했다.

‘내가 본질을 못 보고 있다는 건가?’

번이 성녀의 말에 고민하는 듯 하자, 성녀가 다시 입을 뗀다. 아까 장로에게 번이 깨어나면 알려달라고 했던 부탁.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 바로 물어볼 수 있었다.

“황자님.”

“······?”

“답을 드렸으니, 제 질문도 답해주시겠어요?”

그녀의 눈매가 가늘게 변해갔다.

‘질문?’

그가 갸웃하는 사이, 그녀는 번의 의중을 훑기라도 하듯 표정 하나하나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우선 허락 없이 황자님의 몸을 살핀 것은 죄송하게 생각해요.”

“아아, 불가항력이었으니, 이해합니다. 게다가 그건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 할 일 같은데요?”

번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 역시 긴장의 끈은 놓지 않았다.

방금 그녀가 뭐라 했는가? ‘살폈다’하지 않은가? 그는 많은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중 하나라도 외부에 알려지면 곤란하다. 어디 외곽의 돌팔이 의사가 의문을 품었다면 모를까, 이 여자는 성녀. 번으로서도 그녀가 어디까지 알게 되었을지 전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신神의 힘이 공공연하게 통용되는 세상이니까.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이에요.”

아홉 살이라고? 그의 조숙한 말투에 그녀는 잠시 놀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힐끔. 그녀가 주변 사제들을 보았다.

"아, 네."

장로는 그녀의 의중을 금새 알아챘다.

"너희들은 잠시 나가 있거라!"

그 또한 눈치 없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함께 자릴 비워준다. 보통은 그녀가 남자와 둘만 남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지만, 오늘은 예외가 되었다. 번이 아직 어린아이라는 인식이 짙게 깔려 있기도 했고.

“······.”

물론 그녀의 시선에 번은 아이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었다. 아직도 꿈속의 그 장면이 눈앞에 생생했으니까.

두근, 두근.

괜히 가슴이 콩닥거리고, 번의 작은 얼굴이 그 무서운 투구의 남자와 겹쳤다.

“그래, 무슨 일이십니까?”

사람까지 물리고. 무슨 말을 하려고? 번 역시 그녀가 어디까지 눈치챘을까 싶어, 두근거림에 선질문을 한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이야기는 혹시 모를 소문을 피하기 위함이에요. 황자님께서 원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소문이라..”

번은 피식 웃었다.

이미 밖이 어떻게 뒤집혔을지 짐작이 갔다. 가장 유력한 후계자를 걸레로 만들어놓았으니.

“아, 카이사르 형님은 괜찮습니까?”

“그럴 거예요. 경연이 열리기 전부터 폐하께서 불미스러운 일에 관하여 단단히 일러두셨답니다. 조치가 빨라 큰 후유증 없이 곧 완치되실 거에요.”

“아.. 그렇군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번은 속으로 쓰게 웃었다.

'이 정도 사태는 예상했다는 건가?'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그럴 줄 알았으면 그놈의 거길 완전히 뜯어내 버렸어야 했는데 말이다. 남자 구실 못할 정도로. 그랬다면 후대를 생산하지 못하니, 후계 싸움에 좀 더 유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뭐, 언젠가 기회가 또 있겠지 생각하며 번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제 몸에 이상이라도 발견된 겁니까?”

“그렇다고 할 수도 있고, 아니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부담 없이 말씀해보세요. 들을 준비 됐습니다.”

번이 대답하자, 그녀가 번의 주변을 천천히 걸었다.

"······."

입가의 미소는 여전하지만, 그녀의 속내는 읽을 수 없었다. 그녀와 가까이 마주하게 되니, 기분이 묘해진다. 다시 이런 기회가 있을까? 아마 힘들겠지? 생각한 번이 툭,

“신성력을 사용하기 위해선 어떤 특별한 절차라도 있습니까?”

“저희 교단에 입적하시려고요?”

“그냥 묻는 겁니다. 학문적 관심이랄까요?”

그녀는 여전히 가늠할 수 없는 표정이었지만, 친절한 어조로 답해준다. 그리 큰 비밀도 아니었으니까.

“신성력을 사용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신神의 사도로서 모든 것을 증명한 셈이랍니다. 믿음信의 증거가 바로 그것일 테니까요. 음.. 마치 여섯 번째 손가락 같달까요? 꼬리 같은 기분이겠죠? 내 몸의 일부는 아니지만, 그렇게 사용할 수 있는.. 너무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어떻게 설명할 수도 없는..”

“때가 되면 알게 된다는 거군요.”

못 느끼면 평생 모를 테고.

‘더 연구해봐야겠군.’

머리의 어떤 부분에 분명 신성력이 쌓였다 했다. 그걸 처박아두고 쓰지 않으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테니, 어떻게든 활용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뭐, 우선은 여길 나가서.

“황자님.”

이야기가 흐트러지자, 그녀는 이제까지 어떤 순간보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를 불러세운다. 늦은 새벽기도 소리처럼, 스산한 겨울 동틀 무렵 마지막 떨어지는 낙엽소리처럼.

“당신은 누구신가요?”

번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의 눈동자가 그의 모든 것을 샅샅이 훑고 있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육체가 아닌, 다른 모든 것들 마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군요.”

“아시잖아요!”

그녀가 뾰족하게 외친다.

그러자 번은 갸웃한 표정으로 별 시답잖은 소릴 들었다는 듯 회피하려 했다. 물론 이건 가장이었다.

‘뭘 알고 있는 거지?’

그의 서늘한 속보다 더 차가운 의심이 마음속에 똬리를 튼다. 우선 이 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질 파악해야 했다. 그는 정면돌파를 시작했다.

“저는 번입니다. 번 리갈 드 요르간드 바야흐. 당신이야말로 아시지 않습니까?”

“······.”

번의 말에도 그녀가 계속 물끄러미 바라보자, 어깨를 으쓱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번. 천천히 그녀 앞에 걸어가 선다. 키 차이도 나고, 누가 보더라도 성녀 쪽이 더 어른스러웠지만, 이 순간 한걸음 뒤로 물러난 것은 오히려 성녀였다.

“황실의 존엄을 훼손하는 행위는 아주 큰 죄입니다.”

“저, 저는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그럼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왜? 내가 이 껍데기라도 뒤집어쓰고, 황자 행세라도 하고 있을까 봐서요?”

성녀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자, 번이 좀 더 그녀에게 다가섰다. 그녀의 가슴이 번의 눈높이에 맞춰졌다. 당황했는지 거칠게 오르락내리락하는 봉우리를 보며 번은 좀 더 고개를 위로 향했다.

“예의라는 것은 상식이 통할 때 지켜지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무리 성녀란 신분을 가지고 있다곤 하나, 해서 될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는 겁니다.”

카이사르 황자의 불알을 물어뜯은 광기. 형을 병신으로 만들 수도 있던 일을 벌인 그였다. 이 사건 하나만 보더라도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면 오늘 일 이후, 황좌에 가장 가까이 닿을 사람 또한 이 사람일 것이다.

‘속을 모르겠어..이 사람..’

그녀는 지금 협박을 당하고 있었다.

말조심해, 입 닥치는 게 좋을 거야. 내 위신을 깎을 어떤 소문이라도 들리면 그건 네가 범인이다. 알겠느냐? 같은 눈빛으로 또렷하게 응시하는 저 시선!

움찔..!

번의 손이 들리자, 성녀는 본능적으로 흠칫했다.

공포영화를 보면 시체가 움직이고, 인형이 칼을 들고 설치며 아이가 귀신들려 활개치는 것들에 관객은 공포를 느낀다. 평소라면 절대 무섭지 않을 그것들. 그것이 두려움을 심어주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미지未知의 존재가 그 속에 들어있기에. 성녀 또한 지금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모든 행동엔 책임이 따르는 거야. 이 예쁜 입술 조심하라고. 하듯 번이 웃으며 그녀의 도톰한 입술을 살짝 쓰다듬자, 성녀는 소스라치게 몸을 떨며 뒤로 성큼 물러났다.

그 누구도 성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 신전을 욕보이는 행위 역시 큰 죄였다. 그래서 당황스럽다. 그녀 역시 이런 일을 겪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디 가서 말도 못할 것이다. 사실 지금 큰일이 벌어진 것은 아니지 않나?

“또 뵙겠습니다. 가루비 성녀님. 치료가 끝났으면 이만 쉬고 싶군요.”

번은 환하게 웃으며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인사했다.

‘대체..’

이 또한 신의 뜻이란 말인가?

그녀의 머릿속이 혼란으로 가득 차올랐다.

.

.

.

이틀 후.

두 번째 경연에 대한 소식이 에비뉴 전역으로 퍼져나갈 때, 그 태풍의 중심에 선 꼬마 하나가 황궁을 걷고 있었다. 궁에서도 가장 경계가 삼엄하며, 고급스럽고 으리으리한 공간. 황제의 거처로 이동한 번은 문이 열리자, 입술에 가볍게 침을 발랐다.

똑똑.

아버지는 의자에 몸을 깊숙이 묻고, 심드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었다. 번이 들어오자, 그는 힐끔 눈으로만 움직임을 쫓더니,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까이 오라는 뜻이었다.

"······."

번은 긴장을 풀지 않고, 차분하게 걸었다. 아버지 앞에서는 1초도 방심하면 안 된다. 여기 에비뉴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이었으니까.

“소란을 피웠더구나.”

번의 이마가 살짝 일그러졌다.

혹시 성녀가 무슨 말을 지껄였나? 잠깐 생각이 스쳤지만,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대답했다.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느냐?”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다 보니, 그리되었을 뿐입니다.”

번을 지그시 내려보던 황제가 몸을 고쳐잡았다. 그 작은 동작 하나만으로도 웅크리고 있던 호랑이가 덮쳐오는 기분.

‘과연..’

이것이 제왕의 기도인가?

번이 눈꼬리를 파르르 떨자, 황제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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