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말이 끝나기 무섭게 힐러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을 내려다보며 힐러는 창백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지원 요청입니다. D시가 함락 직전이라고…….”
‘그럴 줄 알았다.’
“이리로 방향 튼 몬스터 웨이브 위치는요.”
“여기서 20여 분 거리입니다! 건물을 하나씩 습격하며 이동하고 있어, 느려진 이동 속도를 감안해도 그렇다고…….”
‘코앞이잖아.’
방어에 실패했으면 재깍재깍 주변에 경보부터 날릴 것이지, 되는 데까지 붙잡고 있다 연락하니 주변에서는 대비도 힘든 게 아닌가?
“시민들 대피 준비하세요. 15분 안에. 청연 쪽으로 갑시다.”
단우가 명령했다.
“예.”
힐러는 혼비백산해서 나갔다. ‘왜 명령이냐, 너희는 뭐 할 건데’라고 물을 정신도 없는 표정이었다.
그가 문을 여는데 복도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하늘이…….”
“하늘?”
차우원이 병실 커튼을 걷었다. 덕분에 단우는 침대에 걸터앉아 창밖 꼴을 볼 수 있었다.
검붉은 하늘에서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었다. 짙은 회색빛의 눈송이가 뭉쳐서 떨어져 마치 재라도 쏟아지는 듯했다. 그게 단순히 보기에만 불길한 광경은 아니라는 걸 단우는 알고 있었다.
이단우는 이 현상을 겪어 본 적 있다.
‘<최후의 던전>에 들어가기 직전.’
그리고 그때 들어간 건 차우원 팀이 아니라 이단우 팀이었다. 다시 말해 본래라면 이단우가 스물일곱이 되어서야 일어날 기상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가지가지 한다.’
-……모든 시민들은 건물 안으로 몸을 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현재 내리는 눈은 정상적인 기상 현상이 아닙니다. 독성을 띠고 있습니다. 피부에 닿지 않게 주의하시고 외부에 머물지 마십시오. 피부에 닿았을 경우 가까운 병원을 방문해 조치를 취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안내드립니다…….
경찰의 경고 방송이 들렸다.
넋 놓고 구경하던 시민들도 창을 닫았다.
<종말>의 오염은 기상 이변을 가져온다. 헌터 교육 따위는 받지 않은 시민들도 아는 사실이다. 전대 종말 때 겪었던 일이니까.
제대로 교육받은 힐러는 말할 것도 없어서 그는 나가려던 발을 멈췄다.
“대피 준비를 해도, 이래서야 이동 자체가 어렵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지금 가야죠. 눈 쌓이면 더 어려울 텐데.”
“……!”
맞는 말이라 힐러가 나갔다. 여기 버티고 앉아 D시에서 몰려드는 몬스터 웨이브에 깔려 죽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문이 닫힌 걸 확인하고 차우원이 물었다.
“왜 벌써 기상 이변이 일어나지? 이 정도 이상 현상이 나타나려면 전대처럼 긴 시간 오염되어야 하지 않나.”
오염이 악화돼서 숨 쉴 때 필요한 산소조차 독성을 띨 정도가 되어야 일어나는 현상이다.
전대는 <성물>의 발견이 몹시 늦어서 종말의 오염이 심각했다.
“애초에 벌써 <최후의 던전>도 열릴 게 아니었어. 내가 알던 것과 발생 시간대가 전부 달라. 오염도 그렇고 던전 브레이크도 그렇고…… 죄다 빠르게 진행되고 있어. 내가 돌아와서 시간축이 꼬인 것 같은데……. 원래 칠 년의 시간을 두고 일어나야 할 일이 일 년 만에 일어나고 있거든.”
단우는 입이 말랐다.
그런데 말없이 듣던 차우원이 뜬금없이 물었다.
“그럼 원래 스물일곱 살이야?”
‘……?’
“어.”
“난 몇 살에 죽었어?”
단우는 이게 무슨 대화인지 알 수 없었다.
“스물여섯에…….”
“내가 성검의 주인이었고 단우 동료였으면, 죽은 곳은 <최후의 던전>이었나?”
차우원은 머리 좋은 놈이라 몇 가지 단서로 잘도 상황을 끼워 맞췄다.
“어…….”
“그때 팀원이 울림이랑 서정이였구나. 두 사람도 그때 죽었어?”
“어.”
납득하는 것처럼 차우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이따위 소리를 믿는 건가?’
단우는 차우원의 정신 상태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차우원은 무슨 소리를 해도 그럴듯하게 들리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 탓에 단우는 자신이 미친 소리로 대답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냥 대화 같았다…….
“그럼 단우가 일 년을 혼자였겠구나. 외로웠겠다.”
“……?”
‘이게 무슨 결론이지.’
단우가 차우원을 빤히 쳐다보는데 그가 창에서 등을 뗐다. 창밖에 불길한 눈덩이가 흩날리는데도 병원은 따듯했고 차우원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이단우의 이마에 자신의 것을 마주 댔다.
“열 좀 떨어졌다.”
문제가 그것뿐이라는 듯 차우원이 말했다.
그의 말은 언제나 설득력이 있어서 단우는 다른 생각은 잊었다. 입은 여전히 말랐으나 아까와는 달랐다. 이단우는 과거가 아닌 현실에 있었다.
눈을 마주한 채 차우원이 물었다.
“그러니까 전부 지금 일어날 일이 아니었다는 거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스승님께 가서 방어전 합류해?”
“아니. 그건 알아서 하시라고 하고. 우리가 해야 할 건 <최후의 던전> 공략이지.”
‘팀원은 괜찮다.’
강울림이 빠져도 실은 문제는 없었다. 이단우는 <최후의 던전>을 한 번 깼는데 그곳에서 정말 중요한 건 탱킹이 아니었다. 아니, 물론 탱커의 역할은 중요했으나…….
탱커가 빠진다면 꼭 팀에 넣어야 할 놈이 이단우의 수중에 있었다. 과거와 달리 그놈의 소재를 찾아 헤맬 필요도 없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단우는 차우원을 힐끗 쳐다봤다. 단정하고 신뢰감을 주는 얼굴이 그를 마주 봤다.
이 성실한 놈이 그 쓰레기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지금은 말하지 말자.’
설득하는 데 십오 분은 더 걸릴 터였다. 그게 아니라도…….
헛소리를 한 번 하면 ‘그렇구나’ 해줄 사람도 두 번 하면 못 받아 주는 법이다. 이단우는 차우원의 이해심을 시험할 마음은 없었다.
‘쉬운 것부터 하자.’
이단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에 잠깐 어디 들르자.”
“어디?”
“강울림 병실.”
‘힐러 넣자.’
권준홍을 각성시켜야 한다.
* * *
배지슬의 소꿉친구 권준홍은 <차우원 팀>의 팬이었다. 그리고 이단우가 헌터계에 데뷔했을 때부터 그를 응원해 오기도 했다.
막 헌터가 된 이단우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권준홍은 자신이 이단우의 극초기를 알고 응원해 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이 있는 편이었다.
‘아저씨 때문에 알게 된 거지만…….’
권준홍은 헌터계와 그 자신은 연관이 없었으나 배지슬 때문에 접하는 정보가 많았다. 배지슬의 아버지, 이림 전 길드장인 ‘아저씨’가 젊은 헌터들에게 관심이 많기 때문이었다.
-지슬아, 차우원 헌터 기억하지? 응? 너희가 얼마나 사이가 좋았는지…….
-아, 아빠! 그게 언제 적 일인데요! 기억 안 나요!
뭐 이런 목적이 뻔한 관심이었으나, 어쨌든 덕분에 배지슬은 각종 젊은 헌터들의 자료를 우연인 척 보게 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이 <차우원 팀>의 영상을 접한 건 배지슬이 영화를 보려고 TV를 켰을 때였다. 놀랍게도 TV를 틀면 자료 영상이 재생되게 장치가 되어 있어서, 배지슬과 함께 그녀 방에 앉아 있던 권준홍도 영상을 봤다. 아저씨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집요하게 행동하시는 면이 있었다……. 배지슬이 질색하는 면모였다.
하여간, 덕분에 두 사람은 <차우원 팀>의 팬이 됐다. 각자 좋아하는 헌터는 달랐지만.
그래서 이단우 헌터의 실물을 봤을 때 권준홍은 가볍게 들떴다.
아저씨가 위험하시다는데 그가 들뜰 일은 아니어서 ‘와, 이단우 헌터다’ 하고 말았지만.
그리고 실물 이단우 헌터는…….
‘으음. 좀 특이한 분 같기도…….’
권준홍은 고개를 저었다.
독특한 면이 있지만, 어쨌든 좋은 분임에 틀림없었다!
며칠이 지나도 지슬이가 아저씨를 싫어한다는 극비정보는 외부에 유출되지 않았던 것이다.
몇 주, 몇 달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이단우 헌터는 권준홍에게 몇 번이나 전화를 주기까지 했다. 물론 비밀을 지켰다고 확인시켜 주려는 의도는 아닌 듯했지만. ‘아저씨’가 또 위협받지는 않나, 때문에 지슬이랑 자신이 휘말리지는 않나 걱정이 돼서인 듯했다.
‘애프터 케어도 확실하시구나!’
권준홍은 이단우 헌터가 좀 이상하지만 훌륭한 분임을 확신했다.
이러니 <차우원 팀>을 결성 일 년 만에 영웅팀 후보로 올릴 수 있었을 터다.
그러나 성물 강탈 사건이 일어났다. 저택은 성검 강탈자에게 습격받았고, 아저씨가 납치당했다. 경호하던 헌터들과 사용인들은 다수 죽거나 부상당했다.
배지슬은 아저씨를 잃은 상황에서도 정신을 놓고 울고만 있지는 않았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제가 이곳의 책임자예요.’ 하고 구급차에 함께 올랐다. 그때도 울고 있기는 했지만.
권준홍은 떨리는 배지슬의 손을 잡고 그 옆에 함께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병원 앞에서 또다시 성검 강탈자를 마주쳤다. 그 무시무시한 존재를, <차우원 팀>의 탱커 강울림이 막아 냈다.
그는 등 뒤의 병원 건물이 있다는 걸 알고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가 배지슬과 자신의 목숨을 살렸다!
<차우원 팀>은 영웅으로 불릴 만한 헌터들뿐이었다.
그들은 감사 인사를 하러 갈 예정이었으나 ‘아저씨’가 영웅 차문경을 배신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내가 감히 병문안을 가도 될까?
-괜찮을 거야. ……어, 걱정만 하지 말고, 우리 여쭤보자! 정말로 내키지 않으시면 거절하실 거야.
-그러시겠지? 내가 영웅인 데다 팀원 부모님을 배신한 나쁜 사람의 자식이지만, 병문안을 가도 되느냐는 전화만으로 폐를 끼치진 않겠지? 나 때문에 너무 기분이 나빠져서 상태가 안 좋아지시진 않겠지?!
-그럼, 물론이지!
그래도 혹시 몰랐기 때문에 전화는 권준홍이 했다.
그리고 그들은 허락을 받았다!
예상하지 못했던 건, 팀원이 다쳤다는 소식을 들은 차우원과 이단우가 당연히 병문안을 오리라는 사실이었다.
“……!”
차우원을 마주친 순간 배지슬은 굳었으나, 이상 반응은 이단우에게서 나왔다.
그는 파랗게 질려서 병실을 나갔다.
“내, 내가 병문안을 오는 게 아니었나 봐! 화나게 해 드린 것 같아!”
“그럴 리 없어. 그런 분이 아니야!”
권준홍은 이단우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바가 없었으나 일단 배지슬을 달랬다.
병실에 남아 있던 팀원들이 맞장구쳤다.
“맞아. 이단우 걔가 성격은 나빠도 가족 죄까지 청구하진 않을걸?”
“무슨 소리야? 걔는 연좌제 물고도 남지. 차우원 설쳤다고 우리 다 강의 들은 거 잊었어? 내가 보기엔, 지금도 강울림 때문에 열받은 거 덤터기 쓴 거야. 걱정하지 마.”
권준홍은 걱정이 됐다!
침착해진 배지슬이 말했다.
“강울림 헌터가 다친 원인인 내가 눈앞에 있어서 더 놀라고 충격받으신 거지. 내가 사라지지 않으면…….”
“아가씨!”
“아가씨를 잡아!”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배지슬을 경호원들이 붙잡았다.
그리고 <최후의 던전>이 열렸다. 그 경호원들이 전부 병원 밖으로 나갔다 오는 일련의 사건 끝에…….
부서질 듯 병실 문이 열리고 이단우가 들어왔다.
‘허억!’
그는 병실 안을 쭉 둘러보더니 권준홍을 쳐다봤다. 그가 걸어와서 권준홍 앞에 섰다. 배지슬 앞을 무심코 가로막았던 권준홍은 깜짝 놀랐다.
‘나?’
이단우는 객관적으로는 무서워할 만한 외모가 아니었다. 그러나 기세가 흉흉했다!
그가 대뜸 자신을 불렀다.
“권준홍 씨.”
“네, 네?”
“배지슬 씨 좋아하죠.”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