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132화 (132/175)

< 132잔. 각자의 기준. >

4.

“색뿐만이 아니라 맛도 좋아요. 네그로니의 색을 맛으로 형상화한 느낌도 드네요.”

감정을 최대한 눌러 담아. 또, 속에서 느낀 걸 어떻게든 절제하려.

이채현 편집장은 나오는 말을 그렇게 단속하며 짧은 감상을 들려줬다.

아무래도 심사 위원들 사이에 오가던 눈빛 속에서 제일 먼저 굴복한 건 그녀였던 모양이다.

“B&B는 한쪽으로 치우칠 수 있는 칵테일입니다. 헌데, 이건 밸런스가 아주 좋네요.”

“흠. 올드패션드가 아주 올드패션드하면서 정석적이군요. 위스키 고유의 향을 아주 잘 살렸습니다.”

연달아 백성민 바텐더와 김광수 디렉터의 감상 역시 입을 타고 흐른다.

그들 역시 제법 절제하며 속에 든 말을 모두 꺼내지 않으려는 눈치였다.

이해는 한다. 심사고, 또 심사 위원이란 자리에 있는 이들이니 어찌 참가자에게 느낀 걸 그대로 표출할 수 있겠나.

특히나 결과를 이 자리에서 공개하지 않는 심사의 특성상 그들은 어떻게든 속에서 느낀 걸 숨겨야만 했을 것이다.

그리 잘 숨겨진 것처럼 보이진 않았어도 말이다.

정환은 조용히 고개만을 끄덕이며 나온 반응들이 나쁘지 않음을 느꼈다.

거기에 또 느낄 수 있었던 건 작은 추측이지만 심사 위원들의 평가 기준.

색을 먼저 말한 이채현 편집장의 말과 밸런스를 짚고 가는 백성민 바텐더의 말, 그리고 기주의 특성을 잡은 김광수 디렉터의 말에서 정환은 작은 단서를 잡을 수 있었다.

심사를 받는다는 건 하나의 시험과 같다. 그렇다면 출제자의 출제 의도를 알아채야 고득점에 닿을 수 있을 터.

정환은 출제자인 저 심사 위원들이 무엇을 중점으로 자신을 평가할지 차분히 예상해 가고 있었다.

이제, 두 번째 주문이 나온다면. 이는 조금 더 명확해질 것이다.

- 호르르륵.

- 꿀꺽.

- 턱.

자연스레 소리는 손님들이 겪는 여느 과정과 같이 흘러갔다. 오가는 잔 속에서 가볍게 물어오는 말들은 바에 관한 말들.

정환은 아실 안을 하나씩 그들에게 소개하며 일반적인, 그리고 기본에 충실한 접객을 보여줬다.

이것 역시 평가에 들어갈지는 몰라도, 그리 큰 영역은 아닐 것이다.

어느덧 말이 몇 번 이어지고는 잔이 바닥을 보여간다. 바텐더는 늦지 않게 이를 알아채야 하는 법.

정환은 이들의 잔이 한 모금에서 두 모금. 딱 그 정도 남았을 때 얼른 앞으로 다가서며 다음 주문을 물었다.

“다음 잔은 어떻게 준비해드릴까요?”

적당한 타이밍이다. 손님들은 적시에 들어온 바텐더의 질문에 그런 생각을 하며 다음 잔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저마다의 평가 기준에 맞춘 여러 칵테일이 그들의 머리를 떠다녔다.

정환은 이제야 비로소 보일 이들의 기준을 얼른 읽어보기로 한다.

“전 앞에 마신 잔과 색이 비슷한 잔으로 부탁드릴게요. 네그로니처럼 붉고, 또 보기에도 좋은 잔으로요.”

제일 쉬운 기준이 제일 무난한 사람의 입을 타고 주문으로 발한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채현 편집장.

스타일리쉬란 말과 잘 어울리는 여성 잡지의 편집장인 그녀는 색상과 모양, 그리고 그 완성도를 기준으로 삼은 것처럼 보였다.

칵테일이 언제나 여성, 그리고 잡지, 또 사진과 함께 엮이는 이유는 다분하다.

어쩌면, 칵테일과 또 바라는 곳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직업의 그녀가 심사 위원으로 위촉된 것에는 이런 이유가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네그로니와 색이 비슷한 칵테일 말씀이군요. 마침 떠오르는 게 하나 있습니다. 맛은 따로 선호하시는 건 없으신가요?”

“너무 독하지만 않으면 될 거 같아요. 네그로니보다 더 순해도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주문, 확인했습니다.”

난해해 보이는 주문에도 정환은 여유롭게 답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주문에 스치는 이름이 있는 모양이었다.

“전, 솔 쿠바노로 부탁드립니다.”

“솔 쿠바노. 주문 확인했습니다.”

연달아 주문을 뱉는 이는 별다른 망설임이 없어 보인다. 마치 정해진 수순처럼 주문을 말한 이는 백성민 바텐더.

정환은 그의 두 번째 주문을 듣는 즉시, 그의 심사 기준을 알아챌 수 있었다.

‘첫 잔은 스터, 두 번째는 빌드. 그렇다면···’

다음 주문은 필시 셰이킹일 것이라. 과연 바텐더답게 기술적인 측면에 무게를 두고 심사하고 있다고.

정환은 그렇게 예상했다.

“흠. 난 뭐로 해볼까나. 그렇지. 갓파더. 갓파더로 부탁합시다. 위스키는···”

“당연히 조니 워커 블랙이죠.”

- 씨익.

“좋아요. 아주. 그렇게 부탁드리죠.”

“갓파더, 주문 확인했습니다.”

김광수 디렉터의 주문까지 이어지며 대대적으로 두 번째 심사가 시작된다.

갓파더를 주문하는 그를 보며 조니 워커 블랙 라벨이란 제품군을 꺼내 점수를 받는 정환.

이는, 조금 냉정하지만 어쩔 수 없는 대회 속 어른들의 사정 때문이다.

월드 클래스 코리아라는 대회는 당연한 이야기지만 주최사(社)라 불리는 곳이 있다.

세계적으로 큰 주류 기업이자 조니 워커라는 누구나 들어도 알 법한 브랜드를 가진 곳이 바로 그 주최사.

그렇기에, 칵테일에 사용되는 술들은 제품군이 겹치는 한, 그 회사의 제품을 꼭 써야 했다.

이전 잔부터 정환의 손을 눈여겨보던 김광수 디렉터는 특히나 본사 소속의 직원으로 더욱 이런 것에 민감해 보였다.

정환은 앞선 칵테일에도 꼭 주최사의 술을 기주로 쓰며 그를 만족시키는 중이다.

‘흠. 아직 이 사람은···’

정확히 무얼 중점으로 보는지 긴가민가하다. 정환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위스키를 두 잔 연속. 그게 전부네, 지금은.’

강하게 드는 의심은 기주로 삼은 위스키로 쏠린다. 허나, 그 외에도 보여준 모습이 많기에 정환은 우선 판단을 미루기로 한다.

주문을 모두 접수한 뒤로는 바텐더의 시간이 시작된다. 아직 남은 잔을 들이키며 다음 잔을 만드는 바텐더를 감상하는 심사 위원들.

정환은 그들의 앞에서 제일 먼저 이채현 편집장을 위한 술을 만들어 갔다.

역시 대회 주최사와 같은 회사에서 출시된 보드카와 코앵트로, 라임 주스 그리고 크랜베리 주스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다.

정환은 이 재료들을 셰이커에 넣고는 세차게 흔들기 시작했다.

- 챠카착! 챠카착! 챠카착!

셰이킹이 시작되자 심사 위원들의 반응이 또 새롭게 변한다. 눈이 커지며 앞뒤로 스트로크를 주는 정환의 손을 따라가는 그들의 시선.

정환의 자세가 예사롭지도 않고 또 새롭게 창안한 자세였기에 이들은 신기한 물건을 보듯 구경하는 모습을 감출 수 없었다.

그저 일반적인 손님이었다면 조금 특이하다며 넘어갔을 상황이지만, 매번 바텐더를 만나는 이들에게는 이건 조금 흥미로운 모습이다.

- 촤아아아아악.

셰이킹이 끝나자 잔으로 투명한 붉은 빛 액체가 쏟아진다. 정환은 오렌지 껍질을 꼬아 트위스트로 가니쉬를 한 후 이를 이채현 편집장에게 밀어냈다.

- 스윽.

“코스모폴리탄. 나왔습니다.”

그리고 살포시 던져보는 칵테일의 이름. 세계적인 여성향 잡지와 같은 이름의 칵테일이 그녀를 반겼다.

“와! 생각도 못했는데, 딱이네요! 색도 제가 주문한 색이고!”

색과 모양, 그리고 완성도. 맛보다는 겉에서 보이는 것에 중점을 둔 그녀의 심사 기준을 생각한다면, 정환은 제법 답안지를 잘 고른 것처럼 보였다.

주어진 정보를 토대로 그 손님에게 알맞은 잔을 건넨다. 이건, 보기에도 당연히 좋지 않겠나.

정환은 잠시 심사 위원이란 사실을 잊은 듯 크게 기뻐하는 그녀의 앞에서 얼른 다음 잔인 ‘솔 쿠바노’를 만들기 위해 손을 움직였다.

그의 손이 화이트 럼으로 향했다.

화이트 럼과 자몽 주스, 그리고 탄산수로 이루어진 간단한 재료를 모아오는 정환.

정환은 기다란 하이볼 잔을 준비하고는 그곳에 얼음을 채워 넣었다.

그리고 간단히 더해지는 화이트 럼과 자몽 주스.

분명 백성민 바텐더는 기술적인 면을 본다고 정환을 예상했다. 그런 것 치고는 제법 쉬워 보이는 조주 과정.

허나, 이건. 아직 그가 보려는 ‘빌드’란 기법의 핵심에는 다가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드란 기법은 탄산을 부을 때가 되어서야 진가를 발휘한다. 그저 얼음이 든 잔에 재료를 붓고 쌓아서 잔을 완성하는 것 같지만 제일 중요한 건 마지막에 더해질 탄산.

바텐더라면. 이 과정에서 탄산의 맛을 헤치지 않고 그대로 살려낼 자신만의 기술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 치이이익!

정환의 손이 탄산수 캔을 뜯자, 백성민 바텐더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정환의 예상이 제법 적절했던 모양이다.

- 솨아아아아아!

탄산은 정환이 놓은 바 스푼의 등을 타고는 얼음을 피해 컵의 옆면을 타고 술에 섞여 갔다.

얼음에 닿으면 기포가 깨지며 청량감이 줄어들기에 이런 작업을 해주는 것.

거기에 탄산을 떨어트리는 속도와 높이까지 고유의 손놀림으로 조절해주니.

솔 쿠바노라는 칵테일에 담기는 탄산이 마치 캔에서 바로 나오는 탄산의 청량감 그대로처럼 느껴졌다.

탄산을 살리는 건 붓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탄산을 직각으로 떨어트리지 않는 이상 음료와는 제대로 섞이지 않았을 잔 속의 상태.

보통은 스푼을 넣어 이를 스터로 섞어주지만, 정환은 다른 길을 택해본다.

- 처억. 처억.

가볍게. 그리고 아주 살포시. 스푼을 잔 바닥까지 넣어 얼음을 아기 안 듯 조심히 들어 올렸다가 내려두는 정환.

얼음이 아래위로 움직이며 조금씩 흔들리는 움직임만으로 탄산과 술을 섞어준 그였다.

“주문하신 솔 쿠바노. 나왔습니다.”

두 번째 잔도 무사히. 자신의 주인을 찾아갔다.

마지막으로 만들어야 할 잔은 갓파더. 대부라는 이름이 붙은 이 칵테일은 스카치위스키에 아마레토라는 견과류 리큐르를 스터한, 간단한 칵테일이었다.

허나, 간단하다는 말에는 언제나 맹점이 있다. 간단한 만큼 맛이 노골적이고 기주 본연의 향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는 것.

즉, 이렇게 간단한 잔일수록 바텐더의 실력은 노골적으로 티가 나게 된다.

기주의 맛이 그대로 묻어나면 이는 바텐더가 한 일이 없다는 뜻이다.

기주의 장점을 잘 살리면서도 조화롭게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이 잔을 만들 때 바텐더가 명심해야 할 사항이다.

- 달그락악. 달그라아아아악. 달그라아악.

정환은 머릿속으로 자신이 아는 위스키와 아마레토의 맛을 떠올리며 스터의 강약과 회전을 조절했다.

위스키 본연의 맛은 살리고, 향은 아마레토로 덮어 버린다. 정환의 손은 그것만을 떠올렸다.

- 촤아아아악.

얼음이 담긴 잔에 갓파더가 담기고는 정환이 가니쉬를 끝낸 후 이를 밀어낸다.

- 스윽.

“주문하신 갓 파더. 나왔습니다.”

과제의 두 번째 단계 역시 무탈하게 마친 것만 같았다.

“감사합니다. 다들, 드셔보시죠. 많이들 기다린 건 아니시죠?”

“조금요. 향이 너무 좋아서 못 기다릴 뻔했지 뭐예요. 얼마 걸리지도 않았지만요.”

“그럼, 전 먼저 맛을 보겠습니다.”

처음으로 서빙될 잔이 코스모폴리탄이었다. 제일 기다리는 시간도 많았을 잔이 그 잔.

정환은 이를 잊지 않으며 그 잔을 마실 사람이 기다릴 시간 역시 계산해 맛을 풀어냈다.

시간이 지나면 색도 향도 서서히 풀리는 게 셰이킹이라지만, 정환이 만든 코스모폴리탄은 여전히 그 향과 색을 간직하고 있다.

“흐음.”

- 호르르륵. 꿀꺽.

간단히 몇 마디를 더 나눠도 될 텐데. 백성민 바텐더는 마치 누가 쫓아오는 것처럼 그대로 잔을 들고 노즈를 짧게 맡더니 얼른 목으로 삼켜 버린다.

탄산이라는 재료가 들어갔고, 또 이를 잘 조절했는지 보고 싶은 그에게는 시간이 더 지나기 전에 저 잔을 마시는 게 무엇보다 중요해 보였다.

“뭐. 우리도 마십시다. 우선 마시고 말씀을 나누죠. 허허. 생각해보니, 첫 잔은 별 대화도 없이 잔을 마셔버렸네요. 이것저것 물었어야 했는데···.”

“···그랬죠. 맞네요, 디렉터님. 이제부터라도 해야죠. 우선 드셔요.”

잔을 마시고 설명을 듣는다. 이게 간단한 심사의 프로세스임에도 이들은 첫 잔을 마신 후 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어쩌면, 덧붙일 말이 필요 없을 정도의 잔이었기에 그랬을지도 모르고.

- 차르르.

김광수 디렉터는 잔을 가볍게 돌리며 얼음으로 주변을 적신 후 그대로 목에 갓파더를 털어 넣었다.

그런 그의 옆에서 유심히 잔을 여기저기 관찰하며 외관에 집중하는 이채현 편집장.

그녀 역시 몇 번의 구경을 더 끝내고는 잔을 입으로 향했다.

세 사람의 입을 타고 잔이 속에 닿자.

이번에는 달라야지. 냉정하게 뜯어보고 이것저것 물을 걸 다 물어야지.

첫 잔과는 달리 결심을 굳혔던 세 심사 위원의 표정은.

이번에도 첫 잔을 마셨을 때와는 같아지고 말았다.

***

1. 코스모폴리탄

(보드카 + 코앵트로 + 라임 주스 + 크랜베리 주스)

- '세계주의'란 이름에서 유례한 칵테일, 코스모폴리탄입니다.

- 다른 무엇보다 코스모폴리탄은 여성들과 늘 어울려온 칵테일입니다.

-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에 등장한 이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죠. 단지 색이 예쁘고 달콤하다는 느낌보다는 주체적인 삶을 살며 당당한 여성을 의미하곤 합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주로도 많이 쓰이는 술입니다. 레이디스 킬러 칵테일이라고 부르죠. 취하게 만드는. 도수가 20도를 넘어가는 칵테일입니다.

- 레시피는 IBA(국제바텐더협회)기준을 참고했습니다. 다른 버전도 많다고 합니다.

- 이름과 잡지사의 관계는 바텐더 차정환 님께 설명을 넘기겠습니다.

2. 솔 쿠바노

(화이트 럼 + 자몽주스 + 토닉워터)

- 자몽이라면서 왜 색이 하얀 색일까요? 여기서 말하는 자몽 주스는 흔히들 아는 핑크빛 자몽이 아닌 하얀 자몽을 써야하기 때문입니다.

- 평소와는 다른 자몽 맛을 느끼고 싶으시다면, 솔 쿠바노 강추 입니다!

- 일본에서는 진토닉을 대체할지도 모른다! 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로 인기가 좋은 칵테일입니다.

- 이 역시, 자세한 설명은 차정환 님께!

3. 갓파더

(스카치 위스키 + 아마레토)

- '대부'란 이름의 칵테일, 갓파더입니다.

- 대부란 영화 제목이 떠오르며 자연스레 느와르적인 느낌이 나시나요? 맞습니다. 그걸 의도한 칵테일입니다.

- 남성적인 면을 상징하는 칵테일로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사제락도 있고 올드 패션드도 있죠. 하지만, 이 갓파더 역시 그런 하드 보일드, 느와르 장르에서는 밀리지 않는 베스트 셀러입니다.

- 재즈, 시가와 함께 갓파더 한잔. 느낌있네요 :)

- 자세한 이름과 관련된 설명은 내용에서 만나보시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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