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잔. 각양각색. >
3.
“자. 먼저 다시 한번 인사드리겠습니다. 금일 오후 7시 30분. 월드 클래스 코리아 2차 대회 때문에 이곳 종로 아실을 방문했고요. 앞에 서 있으신 분, 참가자. 아실의 차정환 바텐더 본인 맞으십니까?”
“네. 맞습니다.”
“네. 좋습니다. 먼저 소개해 드리자면, 전 월드 클래스 코리아 바텐더 아카데미에서 상임 디렉터와 교수로 일하고 있는 김광수라고 합니다. 오늘 심사장을 맡았고요. 시작 전 간단한 고지 먼저 하고 시작하겠습니다.”
회사원이라서일까. 들어설 때는 몰랐던 칼 같음이 일이 시작되자 확연하게 보인다.
무미건조라 불러도 좋을 공정함이 그의 눈에서 빛을 낸다.
그래서 더.
깐깐하게만 보였고.
“심사 위원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사전에 공지드린 것처럼 이채현 편집장님. 그리고 백성민 바텐더님입니다.”
“이채현입니다.”
“백성민입니다.”
“오늘 심사는 1시간 정도 예정이며 최대 석 잔까지 심사합니다. 그 이상 섭취는 가능하나 심사는 철저히 석 잔까지만 진행됩니다. 또, 정해진 서브 품목 외에 제공되는 모든 음료와 음식은 심사 대상에서 제외됩니다. 이점, 확인해주시겠어요?”
“네. 확인했습니다.”
“주문은 심사 위원 재량이며 평가는 당일 확인 불가입니다. 맛에 대한 소견은 들을 수 있지만, 이는 심사와는 무관합니다. 결과 발표 후에는 정식 절차를 통해 심사 위원이 작성한 평가표를 받아 보실 수 있습니다. 이점, 동의하시나요?”
“네. 동의합니다.”
정환은 기계처럼 나오는 그의 말에 하나씩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기울였다.
대회라는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절차였다.
“마지막으로 힘내시고 평소 손님을 대하는 모습으로 임해주시길 바라며 사전 공지는 끝내겠습니다. 심사 시작 전 따로 궁금한 점 있으시면, 지금 편하게 물어보시면 됩니다.”
“아뇨. 더 궁금한 건 없습니다.”
“좋네요. 그럼···.”
심사장을 맡은 김광수 디렉터는 옆에 앉은 다른 심사 위원과 시선을 한 번씩 맞추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시작하시죠.”
그리고 들려오는 진정한 시작. 이제는 정환의 모든 행동과 움직임 하나하나가 평가를 받는 순간이다.
‘손님 앞에서야···’
늘 평가받는 게 바텐더란 직업이다. 정환은 그런 생각에 애써 특별함을 부여하지 않고 자연스레 움직인다.
“체이서부터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물과 탄산수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준비해드릴까요?”
“전 물로 부탁해요.”
“탄산수 부탁합니다.”
“탄산수로 하죠.”
손님을 자리에 앉히고 또 수건과 체이서를 건네기까지. 아실에서는 보통 이 과정을 홀로 진행하진 않는다.
윤수나 정환이 돌아가며 부족한 걸 손님에게 하나씩 내어주며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게 바라는 공간.
허나, 오늘만큼은.
모든 과정을 정환이 홀로 견뎌내야 한다.
체이서가 준비되는 동안 심사 위원들은 저마다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끄적이기 시작한다.
한 손에는 펜과 다른 손에는 종이가 들려 심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알렸다.
평가하는 내용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이런 모습 자체가 심사를 받는 이에게는 압박감으로 느껴질 상황이었다.
“체이서 드리겠습니다.”
물과 탄산수가 차례대로 손님 앞에 높이자 이들의 고개가 아래에서 바텐더에게로 향한다.
이들의 입이 먼저 열리지는 않는다. 그저 이들이 하는 행동은 지켜보는 것뿐이다.
“주문하시겠습니까?”
정환은 바텐더답게 손님을 이끌며 주문을 물어갔다.
“흠. 먼저들 하시죠.”
“그럴까요? 아. 백 바텐더님이 먼저 해보시는 건 어떠세요?”
“제가요? 그러죠. 전, B&B로 시작하겠습니다.”
첫 주문이 부담이라서일까. 서로 떠넘기던 심사 위원 중 백성민 바텐더가 먼저 입을 연다.
그의 주문은 베네딕틴과 브랜디를 섞는 B&B라는 칵테일이다.
“슈터로 드릴까요, 스터로 드릴까요?”
“스터로 하죠.”
“네. 알겠습니다. B&B. 스터로. 확인했습니다.”
“아. 나도 주문할게요. 난. 올드패션드로 부탁합니다. 버번으로.”
“음. 전 그럼 네그로니 먼저 해볼까요?”
시작을 백성민 바텐더가 끊자, 연이어 다른 주문까지 몰려온다.
김광수 디렉터는 올드패션드를, 이채현 편집장은 네그로니를 주문했다.
“올드패션드와 네그로니. 확인했습니다.”
정환은 밝게 웃으며 주문을 받고는 손을 움직였다.
무난한 주문들이었다. 첫 주문이기에 그랬겠지만, 심사치고는 무난한 것이 사실.
아직은 알 수 없는 저들의 심사 기준을 얼른 알아채려 정환은 속으로 연신 머리를 굴려 갔다.
적어도 두 번째까지는, 주문을 받아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은 저들의 속내였다.
바백을 봐주는 윤수도 없이 재료를 홀로 준비하는 정환. 그리 크지 않은 공간이기에 준비는 어려움 없이 끝이 난다.
그의 앞에는 B&B의 재료인 베네딕틴과 브랜디, 그리고 올드패션드에 쓸 버번위스키와 네그로니의 재료인 진과 캄파리, 스위트 베르무트가 놓였다.
‘흠. 첫 주문은···’
신기하게도 전부 스터로 만드는 칵테일들이다. 셰이킹보다는 이번 대회에서 스터를 더 보려는 걸까.
섬세하기로는 셰이킹보다 어렵고 복잡한 분야가 스터기에, 정환은 심사 기준이 제법 까다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달그라아아악. 달그라아아악.
그런 생각은 가지면서도 스터는 유려하게 흘러갔다. 바 스푼이 믹싱 글라스를 타고 돌 때 나는 소리가 청아하게 들려올 때쯤.
심사 위원들은 시선이 정환의 손에 주목했다.
특히 같은 바텐더인 백성민 바텐더의 눈이 광채를 뿜으며 귀까지 꿈틀거리는 모습이었다.
반대로 김광수 디렉터와 이채현 편집장은 시선을 주면서도 뜯어보는 느낌은 나지 않는다.
그들이 보는 건 조금 다른 곳에 있어 보였다.
- 촤아아아악.
스트레이너를 거치며 첫 잔이 완성되어 나온다. 주문받은 순서에 맞게 먼저 나오는 건 B&B.
베네딘틴과 브랜디의 앞글자를 따서 만든 이 B&B라는 칵테일은 플로팅을 이용한 슈터 스타일과 스터로 간단히 섞는 스타일 두 가지가 존재하는 유명한 칵테일이었다.
술과 술을 섞는다는 특성 덕에 스터에 있어서는 제법 섬세한 컨트롤이 필요한 칵테일이 B&B.
정환은 우선 기준을 스터로 잡고는 정성스레 B&B의 맛을 컨트롤했다.
얼음도 없이 그저 진득한 브랜디처럼 보이는 잔이 손님의 앞으로 향했다.
“주문하신 B&B.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맛은 다른 잔이 나오면 같이 보겠습니다.”
한 명이 잔을 마시고 반응을 보이면 이는 다른 위원들에게 예단을 심어줄 수도 있다.
이를 아는 심사 위원들은 동시에 잔을 드는 걸 원칙으로 삼는 것처럼 보였다.
정환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얼른 다음 잔을 향해 손을 움직였다.
다음으로 만들 잔은 올드패션드. 라이위스키나 버번위스키를 사용하는 칵테일로 세계 최초의 칵테일이 바로 이 올드패션드였다.
그만큼 역사가 깊고 또 인기도 많으며 전문가들에게 가장 친숙한 칵테일이 이 올드패션드일 터.
이 역시, 절대 쉽지 않은 과제였다.
- 팟! 파파파파팟!
올드패션드를 만들기 위해서 제일 처음으로 펼쳐지는 건 아이스 카빙이다.
특히나 올드패션드와 그다음에 이어질 네그로니는 얼음의 영향을 많이 받는 칵테일.
정환은 이에 맞춰 다음에 나올 네그로니와 지금의 올드패션드에 쓰일 얼음을 직접 손으로 깎아 나갔다.
- 가가가각!
모서리를 쳐내며 점점 각을 줄여가고 울퉁불퉁한 단면을 칼로 깎아내는 정환의 손이 화려하게 움직인다.
“오.”
“우와.”
“흐음.”
그런 손놀림을 보고는 심사 위원들은 저마다 속으로 삼키는 반응을 보여준다.
김광수 디렉터는 흥미롭게 보는 눈치였고 이채현 편집장은 신기하게 보는 눈빛.
백성민 바텐더는 생각이 깊어지는 눈빛이었다.
얼음이 준비되자 정환은 각설탕을 하나 잔에 넣고는 그 위에 비터스를 몇 방울 떨어트렸다.
그리고 더해지는 아주 소량의 탄산수. 이건, 맛을 위함이 아닌 그저 설탕을 녹이기 위함이다.
이제 이어지는 건.
- 콰드드득!
이라는 소리를 내는 머들링 과정이다. 비터스와 탄산을 섞은 설탕을 잘게 부숴주는 과정이었다.
머들러로 몇 번을 눌러주자 이내 설탕이 입자를 잃고는 액체 녹아든다.
이를 온전히 확인한 정환은 얼음을 넣고는 그 위로 버번위스키를 더해갔다.
- 달그라아아아악. 달그라아아아악.
믹싱 글라스가 아닌 잔 안에서 바 스푼이 잔의 벽을 타고 돌아간다.
요즘에야 모든 칵테일이 셰이커나 믹싱 글라스 안에서 만들어진다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요즘의 이야기.
잔에 모든 재료를 넣고 섞어 만드는 이 방법은.
말 그대로 올드패션드한, 옛날의 방식. 즉, 과거에 최초로 칵테일이 만들어졌을 때 사용되었던 그 방식이다.
- 취이익!
스터가 끝나자 오렌지 껍질이 미스트를 뿌리며 잔에 향을 입힌다.
레몬이나 오렌지. 둘 중 하나를 고르는 게 바텐더의 선택 사항.
정환은 오렌지를 고른 후 안에 넣을 가니쉬로는 마스키라노 체리를 택했다.
“주문하신 올드패션드. 나왔습니다.”
“오. 감사합니다. 맛은 말씀드린 것처럼···.”
“네. 그럼. 다음 잔 준비하겠습니다.”
다 함께 잔을 든다면 속력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얼음이 녹으며 맛이 변하는 게 칵테일의 성질.
이런 시간을 조절하는 것까지 심사의 항목일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다. 첫 주문이 모두 같은 방식이었고 어렵지 않은 주문이었다는 건.
정환은 그렇게 생각하며 만들어 놓은 얼음을 잔에 넣고는 네그로니를 준비했다.
진과 캄파리, 그리고 스위트 베르무트를 스터 후, 잔에 잘 따르기만 하면 되는 네그로니는 오늘 나온 과제 중 제일 쉬운 축에 속했다.
맛으로 간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 달그라아아아악. 달그라아아아악.
- 촤아아아악!
정환은 탄력을 받은 이처럼 손놀림에 박차를 가해 빠른 속도로 네그로니를 완성해 냈다.
- 스윽.
“주문하신 네그로니. 나왔습니다.”
드디어 첫 과제를 모두 쳐낸 정환이었다.
“감사합니다. 색이 정말 예쁘네요. 전 이 색이 참 좋더라구요. 자자. 다들 얼른 마셔보죠. 표정들이 못 참겠다는 표정들이시네요.”
“흡. 그럽시다. 매번 심사해도 항상 이 시간이 괴롭군요. 허허. 그래서 주문도 미뤘던 건데.”
“드시죠.”
“그럽시다. 잡담은 우선 마시고.”
바텐더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는 손님, 즉 평가자의 시간이 시작된다.
바텐더는 바 테이블 위의 모든 걸 책임질 수 있지만, 이 시간만큼은 그도 손을 쓸 수가 없다.
“흡흡.”
“이야.”
“후하.”
칵테일을 받은 이들이 저마다 잔을 들고는 여기저기 뜯어보기 바쁘다.
김광수 디렉터는 연신 코를 벌렁거리며 노즈를 깊게 느끼는 모습이었고 이채현 편집장은 색과 모습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백성민 바텐더는 체이서로 입을 씻고는 잔을 그대로 맞이할 준비를 마친다.
세 사람이 첫 과정을 끝내고 나서야 동시에 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 호르르르르륵.
B&B, 올드패션드, 네그로니가 천천히 세 사람의 입술을 적셨다.
그리고 동시에 나오는 미세한 반응들.
- 꿈틀!
손님의 자리에 앉은 이들을 유심히 바라보던 바텐더는 이 작은 반응을 놓치지 않고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저마다 살짝 커지는 눈과 꿈틀거리는 눈썹, 그리고 멈춘듯한 손동작까지.
정환은 그런 반응을 보고 나서야 조금 마음이 놓이는 눈치였다.
‘다행히···’
첫 잔은 잘 넘긴 것만 같다. 그런 생각에 정환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정환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첫 과제를 무사히 끝낸 이의 세레모니를 펼쳐보려 한다.
“입에는 맞으신가요?”
- 꿀꺽.
누가 먼저 입을 열어야 하나. 세 심사 위원이 서로의 시선을 교차한 순간이었다.
***
1. B&B(Bénédictine&Brandy)
(베네딕틴 + 브랜디)
- 이름이 참 단순합니다. 말 그대로 두 재료의 이름인 베네딕틴과 브랜디입니다.
- 베네딕틴 역시 브랜디를 베이스로 첨향한 리큐르입니다. 따라서, 진한 과일향과 과일 아로마, 담백한 느낌에 브라운 스피릿 특유의 진득함을 느낄 수 있는 칵테일입니다.
- 슈터로도 많이 드시지만, 전 스터 버전을 추천드립니다.
- 베네딕틴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수도원에 기원을 두었다고 '주장'합니다만, 확실하진 않은 정보입니다.
- 향을 즐기고 오래 마시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전 단언컨대 비앤비가 최고라 생각합니다.
2. 올드패션드(Old Fashioned)
(설탕 + 비터스 + 탄산수 + 라이, 버번위스키)
- 세계 최초의 칵테일이자 역사가 깊은 칵테일, 올드패션드입니다.
- 사실 기본 중의 기본이라 안 다루다보니 어느새 100화가 넘어야 처음 다루네요.
-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칵테일 연간 1위를 몇 년 연속으로 수성 중인 녀석이 바로 이녀석입죠.
- 맛은 으른의 맛. 씁쓸하면서도 달달한 크흐. 인생의 맛? 키햐! 옙. 한때 겉멋에 빠졌을 때는 이 녀석을 달고 살았더랬죠.
- 기주의 영향이 적은 칵테일과 달리 기주의 영향을 크게 받습니다. 좋은 위스키를 쓸 수록 맛있는 녀석이라 생각합니다.(개인적인 의견입니다)
- 수상 이력이 화려합니다. 세계 최초, 세계 최다, 그리고 남성을 상징하는 칵테일 1위가 올드 패션드입니다.
- 조금은 마초적인 칵테일입니다.
- 동양권에서 김렛, 마티니, 진피즈 등으로 바텐더의 실력을 본다면 서양에서는 올드패션드로 바텐더의 실력을 본다고 합니다. 머들링, 탄산, 얼음, 기주, 스터까지. 크래프트의 전형을 담았다고 하네요:)
3. 네그로니.
- 앞서 다뤘기에 사진만 살짝 첨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