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잔. 수상한.
1.
이런 광경은 오랜만에 본다.
이건 비단 지금의 나이를 기준이 아닌 지난 생을 불러와도 정말 오랜만에 보는 광경.
정환은 자신의 옆으로 비슷한 복장을 갖추고는 터덜거리며 걸어가는 이들을 보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저마다 편안한 복장을 갖춘 이들이 학생과 같은 백팩을 등에 메고 있다.
목 위로는 잔뜩 편안함을 갖춘 아이템들이 자리를 빛낸다. 누구는 도수가 높아 눈이 콩알만 하게 보일 안경을, 또 누구는 감지 않은 머리 위로 눌러 쓴 모자를.
이들이 일할 때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에 이들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은 절로 웃음이 나올 모습이었다.
이들은 밤이면 정갈한 복장과 깔끔한 스타일로 변신하는 바텐더들이었다.
‘무슨 고시생들 같네…’
큰 시험을 앞둔 이들의 모습은 전부 비슷한 것만 같다. 정환은 재미난 상상과 함께 걸음을 시험장으로 옮겼다.
정해진 자리에 짐을 푸니 긴장이 조금은 내려가는 느낌이다. 가방에서 정리된 요약집을 꺼내며 간단히 복습을 준비하는 정환.
그의 손에는.
지난 대회와 지지난 대회에 참가했던 선배들이 복원한 기출 문제를 모아봤습니다. 겹치는 부분이 없진 않더라구요. 문제를 알아도 답을 적는 게 힘들다는 함정은 있지만, 도움은 될 겁니다.
재훈과.
그레인 호텔에서 제작한 예상 문제들이야. 적중률은 거의 없지만. 그래도 필요는 하지? 인마. 너는 이 형 없으면 어떡할래, 정말? 고맙다고? 술이나 사.
정우.
요즘 유럽 쪽에서 유행하는 최신 기법에 관한 논문을 정리해 왔습니다. 분자 칵테일 관련 논문하고 잊혀진 클래식에 대한 복원을 정리한 부분이죠. 믹솔로지스트 학계에서 가장 핫한 이슈들이니, 월드 클래스도 한 번쯤은 다룰 겁니다.
그리고 주용까지.
주변의 바텐더들이 건넨 각종 자료를 정리한 요약집이 한곳에 모여 있다.
하나의 가게를 운영하고 또 바에 선 바텐더로서 손님을 맞이할 때와는 다른 게 대회라고 생각했다.
이건 오롯이 홀로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영역.
헌데, 이렇게 막상 이를 준비하며 여러 상황을 마주하니. 이 역시 혼자 걷는 길은 아닌 모양이다.
삭. 삭.
사각. 사각.
바보다 훨씬 고요한 정적이 방 안을 채운다. 바텐더가 이렇게 모여도 정적만이 내려앉는 방 안.
정적을 가장 싫어하는 이들이 만들어 낸 이런 정적은.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시험관이 안으로 들어서고 나서야 깨질 수 있었다.
“다들 보시던 자료는 넣어주시고 필기구만 올려주세요. 곧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목에는 명찰을 건 평범한 중년인 시험관은 마치 고등학생들을 다루는 선생처럼 보였다.
대회 주최사 소속 평범한 회사원의 무미건조한 어투가 바텐더들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문제는 총 70문항입니다. 제한시간이 끝나면 바로 제출해주시고 부정행위는 절대 안 됩니다. 지켜주실 거라 믿고 시험을 진행하겠습니다. 시험지를 받으시면 우선 프린트가 정성적으로 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주십시오.”
간단한 설명이 이어지고는 시험지가 배부된다. 빠르게 넘어오는 시험지를 받아드는 정환.
정환은 눈으로 빠르게 프린트 상황을 보며 문제도 함께 훑었다.
‘딱히…’
거슬릴 정도로 어려운 문항은 보이지 않는다. 몇몇 문제는 지인들이 건넸던 자료에서 본 것 같은 문항들.
어쩌면, 일이 조금은 쉽게 풀릴 것도 같았다.
“자. 시험을 시작하겠습니다.”
손을 조심히 책상으로 내려둔 이들이 감독관의 말과 함께 동시에 소리를 낸다.
차차차착!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이들 사이에 끼어있는 정환.
정환은.
“후우.”
크게 숨을 한번 내어 쉬고는 얼른 고개를 시험지에 박았다.
2.
필기시험이 끝나고 얼마 후.
정환은 스쳐 간 시험이 마치 아무런 일이 아니라는 듯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결과가 나오는 거야 이제는 시간에 맡길 일. 손을 떠나간 화살에 미련을 두는 건 제법 어리석은 일일 것이다.
“흠. 완벽하네요. 오늘도. 윤수 씨. 고생했어요. 오픈까지는 시간이 남네요. 잠시 쉴까요?”
“좋죠! 전 옆 가게에 잠시 놀러 다녀와도 될까요?”
“또요? 오늘은 어디로 가시려구요?”
“오늘은 봉황당요! 새로 온 바텐더 승휘 씨 아시죠?”
“아, 그 머리 긴 분? 네. 알죠.”
“저랑 제법 잘 맞는 부분이 있어서요!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누고 일도 돕고. 그렇게 시간 보내는 거죠.”
“다녀와요. 아직 오픈까지는 여유가 많네요. 너무 늦게 오지만 마시구요.”
“넵! 감사합니다! 30분 전에는 꼭 도착하겠습니다!”
“10분 전까지만 와요. 괜찮으니까.”
이제는 일이 완벽히 손에 익어 시간을 널널하게 두고 준비를 마치는 윤수.
정환은 너그러운 사장의 표본답게 그런 윤수에게 남는 시간은 언제나 자유 시간을 주고 있다.
윤수가 자유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다양했다. 때로는 숲에, 또 때로는 봉황당에.
이웃한 가게를 누비며 여러 바텐더와 대화를 나누고 거기서 일도 도우며 시간을 보내는 것.
다른 이들은 아직 윤수만큼 일이 손에 익지는 않았기에 윤수는 거기서 제법 선배 대접을 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같은 바텐더에게 받은 상처가 깊었던 사람이 윤수인 만큼, 정환은 아실에서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윤수에게 이런 시간을 언제나 권장하고 있었다.
윤수가 없는 시간은, 가끔은 정환에게도 여유가 되기도 했고.
길지는 않은 시간이었지만 말이다.
‘흐음.’
적당한 이끼가 묻은 담벼락과 사이로 벌어진 틈으로 내리쬐는 늦은 오후의 햇살.
한동안 시험 준비로 바쁜 나날을 보냈던 정환은 길지 않은 여유를 만끽했다.
이 여유는 곧.
딸랑.
“다녀왔습니다!”
윤수가 돌아오면 끝이 나니까.
“잘 다녀왔어요? 생각보다 일찍 왔네요.”
“꼭 전해야 할 거 같은 말이 있어서요! 사장님! 수상한 사람이 있어요!”
“수상한 사람이요?”
주어진 시간보다 여유롭게 돌아온 윤수는 언제나처럼 새로운 소식을 몰고 나타났다.
“아니, 제가 봉황당이랑 숲에 전부 다녀왔거든요?”
그 짧은 시간에 활발히도 움직인 것 같다. 정환은 자연스레 두 곳이나 들렸다는 윤수의 말이 재밌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본다.
“그래서요?”
“처음 봉황당에 갔을 때부터 맞은 편에서 누가 이-상한 시선을 보내더라구요. 수염은 덥수룩하지, 머리에는 비니를 눌러썼지. 또 커다란 덩치까지! 눈에 안 띌 수가 없는 그런 모습 있잖아요, 왜!”
“딱 봐도 수상한 차림의 사람? 그건 그냥 외관만 보고 판단을 내리기에는…”
“아뇨! 사장님! 무슨 섭섭한 말씀을요! 제가 그런 사람은 아닙니다! 에이, 그런 거면 이런 호들갑도 안 떨었죠!”
“네네. 다른 수상한 점이 있었다? 그 말이죠?”
“물론이죠! 손에 작은 노트를 들고 막 무언가를 적더라구요. 계속 봉황당을 응시하면서! 안에 있을 때부터 봤는데, 나올 때는 사진도 찍고 있는 거 있죠!”
“사진까지요?”
이건 제법 수상하게 볼 여지가 있다. 윤수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던 정환은 계속해서 들려오는 수상한 점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거기까지였어도 그냥 넘어가죠! 봉황당이야 사진 찍기 좋은 곳이잖아요!”
“더 있다는 말이에요?”
“제가 봉황당 다음에 간 곳이 어디라고 했죠?”
“숲…이라고 했죠.”
“그러니까요! 숲에서 나오는데 딱! 또 마주친 거예요! 그 사람을!”
“아까 그 수상한 사람?”
“네에! 이번에도 막 그 노트를 들고는!”
“…….”
윤수의 말이 끝나자 정환의 손이 올라가 턱을 잡기 시작한다. 이건 정환이 생각에 잠길 때면 나오는 특유의 자세.
정환은 윤수의 말을 곱씹으며 상황을 돌아보는 중이다.
‘떠오르는 게…’
없는 건 아니다.
정환은 두 개의 상황을 떠올리며 자신의 추론을 좁혀간다. 하나는 좋은 쪽으로, 또 하나는 나쁜 쪽으로.
“아실 앞에서는 못 본 거죠?”
“네! 아실 쪽에서는 못 봤어요. 봉황당에서 숲으로 가려면 아실을 지나쳐야 하잖아요? 아실을 보고 숲으로 왔다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아요!”
“흠.”
윤수의 답을 들은 정환은 슬쩍 밖으로 나서 주변을 살펴본다. 윤수의 묘사대로라면 한눈에 들어올 차림의 사내였기에 만약 있다면 한눈에 정환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실의 앞 골목은 한없이 조용하며 오가는 행인만이 가득할 뿐이다.
‘아실은 미리 다녀갔다는 말이고.’
다녀간 곳이 봉황당과 숲이라면 아실 역시 보고 갔을 가능성이 높다.
순서가 마지막이 아니라면 제일 처음 보고 갔을 게 분명한 상황.
정환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다시 안으로 들어선다.
“뭐. 우선 직접 해를 끼친 건 없으니까요.”
“산업 스파이, 그런 걸까요?”
“글쎄요. 딱히…, 이렇게 엿본다고 뭐가 나오는 건 아니니까요. 오히려 와서 물어보면 친절하게 가르쳐 줄 텐데요. 그렇지 않나요?”
“그건 그렇죠. 같은 바텐더라면.”
“그렇다면, 뭐. 떠오르는 게 없진 않네요. 딱히 우리한테 해악을 끼칠 건 아닌 모양이니까요. 내버려 둬도 될 거 같아요.”
“정말요? 정말 괜찮은 거죠? 아니면, 월드 클래스 대회 때문에 사장님을 염탐하러 온 경쟁자라거나…?”
“아직 1차 결과 발표도 안 나왔는데요?”
“그야…, 사장님은 당연히 통과하셨을 거니까?”
탁.
자기 결과도 모른 채 당연히 상대가 붙었을 걸 대비해 염탐하러 오는 사람도 있을까.
정환은 모든 사람의 사고가 자신의 머리에 맞춰진 윤수를 보며 고래를 절레 내젓는다.
윤수의 머릿속에서 정환은 당연히 완벽한 사람인 모양이다.
“뭐…, 그런 경우라도. 우린 영업을 계속해야겠죠? 그건 차차 생각해봐요. 나중에 다른 사장님들께도 제가 말씀드릴게요”
“넵! 제가 또 다니면서 주의 깊게 감시하겠습니다!”
“그, 그래요. 자자. 영업 시작합시다.”
정환은 이 일을 나중에 이야기하자며 일축하고는 영업을 시작한다.
사장에게 보고까지 했으면 자신의 의무는 끝.
윤수 역시 이 일을 머리 한 편으로 밀어 넣고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아실은 오픈 직후에도 바로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당장 바로 만석을 이루는 건 아니라도 7시가 조금 넘은 시간 반 정도의 테이블을 채우는 저력을 보이는 곳.
이건 바라는 업장의 특성을 고려하고 본다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들어오시죠. 두 분이신가요? 이쪽으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식사는 하고 오셨어요? 일찍부터 오셨네요.”
“여기 수건이랑 체이서 준비해 드릴게요.”
반 정도 찬 테이블은 두 사람의 바텐더가 감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역시 한 시간이 지나면 두 사람이 혼신의 열정을 쏟아내야 할 정도로 바뀌겠지만 아직은 괜찮은 정도다.
두 사람은 여유롭게 손님을 받으며 하루를 열고 있었다.
그렇게 영업이 시작되고 약 20분 정도가 지나 반 정도 채운 손님의 앞에도 하나씩 잔이 놓였을 때.
딸랑.
언제나 아실에 평범함과 새로움을 몰고 오는 그 소리가 오늘도 울려온다.
결과를 알기 전까지 바텐더들은, 저 소리가 몰고 오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 어?!”
서둘러 손님을 맞이하려던 윤수의 얼굴에 맺힌 표정이. 이번에 들어온 손님은 새로움을 몰고 오는 손님을 표하는 것만 같다.
옆에서 다른 손님을 상대하던 정환은 고개를 돌려 윤수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덥수룩한 수염에 비니를 눌러쓴. 그리고 큰 덩치에 뿔테와 빈티지한 셔츠가 잘 어울리는.
윤수의 묘사가 그대로 묻은 사내가 서 있다.
‘어…?’
정환은 신기하다는 듯 그의 얼굴을 훑더니 이내 눈을 잠시 고쳐 뜬다.
그의 얼굴에 멈추듯 고정한 정환의 시선.
‘저 사람은…!?’
정환은 그의 얼굴을 한번 다시 보고서야.
상황이 자신의 추론 중 좋은 쪽에 닿았음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