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자의 술은 특별합니다-18화 (18/175)

18잔. 선배가 후배에게.

5.

들은 적은 있다.

아르센 같이 영세한 곳이 아니라 제법 규모가 있는 큰 바에서는 그런 일이 더러 있다고.

바백이 슬쩍 술병을 바꿔 건네주며 프론트에서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를 몰래 도와주기도 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말이다.

허나, 기준은.

그럴 때 바백을 보는 이들은 실력 있는 시니어 바텐더라는 말까지 함께 들었던 터였기에, 방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무엇인지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다.

적어도 자신에게 다른 술병을 건넨 사람은. 시니어 바텐더도 또 선임 바텐더도 아닌. 자신의 후임이자 이제 바에 막 들어온 두 달 차 신입이었으니까.

시키지도 않은 짓을 했다고. 건방지다고. 또 사과하고 처리하면 됐을 일을 크게 만들었다고.

당장에 호통이라도 쳐야 할까.

다른 선임이라면, 조금 자존심이 강한 바텐더라면.

그런 반응을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쉽게도 기준은.

그런 성격의 바텐더는 아니었다.

“고마워. 정환 씨.”

영업이 끝나고 손님이 빠진 후 기준이 제일 처음 꺼낸 말은 고맙단 말이었다.

정환은 예상못한 선임의 반응에 당황하는 표정이다.

“네?”

“아까 고든스 병···, 바꿔서 줬지?”

“아.”

“유럽···에서 유통되는 고든스더라고. 난 그런게 있는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안 거야?”

앞서 기준은 싱가폴 슬링이란 칵테일을 만들며 한 재료를 정량보다 많이 넣는 실수를 범했다. 그리고 그런 실수를 만회할 수 있게 도와준 게 정환이 건네 고든스 진.

무너진 맛의 밸런스를 잡을 수 있도록 43도의 원래 고든스가 아닌, 47도가 넘는 강한 도수의 고든스 진을 정환이 건네준 것이다.

정환이 건넨 고든스는 한국에서 유통되는 술이 아닌. 유럽과 유럽의 면세점에서나 사용되는 술병이었다.

기준은 1년이 넘는 시간 몸담았던 이 아르센에 그런 병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사실 겉으로 봐서야 일반적인 고든스와 같은 병이다. 언뜻 지나쳤다면 그 차이를 모르는 것도 이상한 건 아니었다.

라벨을 제외한 병의 모양은 모두 같았기에, 손에 전해지는 그립감 역시 똑같았고.

정환은 어떻게 그걸 알아본 걸까. 또 그 술이 들어가면 밸런스가 맞을 거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었을까.

기준은 의문이 머리에 가득 찼지만, 우선은 감사함을 정환에게 표했다.

다른 사실을 다 밀어두고라도. 정환 덕에 실수할 뻔한 위기를 넘긴 건 사실이었으니까.

“우연히 봐둬서요. 바백···을 시작하면서 공부했잖아요. 매일 정리도 하고 또 미리 외워도 두고요. 마침 딱-! 그게 생각이 나더라구요. 헤헤.”

정환은 슬쩍 뒷머리를 긁으며 별일 아니라는 말을 이어갔다.

우연히 봐뒀고 또 마침 생각이 났다는 조금은 믿을 수 없는 말과 함께.

정환이 보여준 퍼포먼스가 바백으로 펼칠 수 있는 최고의 서포트였음에도. 정환은 아무런 잘난 체가 없어 보였다.

뭐, 어쩔 수 있나.

자신이 경력이 제법 있는 바텐더라 그 술병을 딱 알아봤고 계산이야 눈으로 보면 답이 나올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

“···순간 머리가 하얘지더라고. 하마터면···”

“다시 만드셨어도 괜찮았을 거예요. 손님이 조금 그랬지만요.”

다시 만드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긴 했다.

다만, 정환도 조금 전의 경우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과연 그랬을까···’

바에 대한 불평과 자신의 짜증을 잔뜩 늘어놓았던 손님이었다. 거기에 목소리와 행동도 과장될 만큼 취기가 올랐던 손님.

칵테일에 관한 뒷이야기를 주고받으며 기대치까지 가득 올려뒀던 그런 손님이.

한 번 실수한 바텐더의 칵테일을. 두 번의 시도 끝에 겨우 나온 그런 칵테일을 온전히 즐겼을 리는 만무했다.

‘난리가 났을 테지.’

기준은 있었을 법한 일을 떠올리며 겨우 고개를 내저었다. 바텐더라면 다시 만드는 걸 두려워해선 안 된다.

그래도 데뷔전에서부터 손님에게 호통을 들었을 상상을 하니 눈앞이 아찔한 기준이다.

정환은 그런 기준을 옆에 두고 콧노래를 부르며 뒷정리에 매진했다.

자신을 향한 칭찬에도, 또 자신이 한 일에도. 아무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는 모습이었다.

기준은 그런 정환의 옆모습을 의미심장하게 바라봤다.

‘정말 우연일까?’

정말 우연히 그 병이 떠올랐고 다행히 도수가 맞아서 맛의 균형이 돌아온 걸까.

기준은 그건 아닐 거라.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곰곰이 고개를 끄덕이던 정환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모습은 확실히 술의 균형을 계산하던 바텐더의 모습이 분명했다.

매니저 신정우나 마스터 이명진이 무언가를 맛보고 계산할 때도 그런 모습이 자주 나온다.

주변에서 이를 오래도록 지켜본 기준은 그를 모르지 않았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기준의 머리를 스쳤다.

어떻게.

어떻게 이제 막 바에 발을 들인 신입이 이를 계산할 수 있었을까. 그런 의문이.

예사롭지 않은 실력을 갖춘 신입이란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미 바백으로 바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비범함을 보여주지 않았나.

오히려 그런 지난 모습들 덕에 이번 일도 받아들일 수 있긴 했지만, 여전히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뭐, 그래도 하나 정도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도 있긴 했다.

정환이 한 행동.

그 행동 자체가.

기준에게는 선의로 다가왔다는 것.

그것만큼은 확실히 부정할 수 없었다.

의도를 가지고 무언가를 했다면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떠벌리는 게 당연한 수순이다.

허나, 정환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 생색도 내지 않았고 또 그저 잘 되었으니 됐다는 말이 전부였다.

즉, 다른 의도는.

전혀 없었다는 뜻이다.

슬쩍 정환을 훑어보던 기준이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무언가 잡념을 떨치려는 그런 의도로.

기준은 자신을 향해 선의를 보여준 사람에게. 의심을 보태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자신의 눈앞에 일어난 일과 또 그 일에 따른 결과. 그리고 자신에게 미친 영향력만을 보기로 하는 기준이다.

“정환 씨.”

“네, 형.”

“언제고 내가 꼭 은혜 갚을게. 오늘 정말 고마웠어.”

“에이,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줘.”

“전 정말 괜찮아요.”

“아냐. 데뷔전···. 나한테는 정말 중요한 날이었거든. 알잖아.”

“형···.”

정환은 무거운 눈빛으로 자신을 향해 감사를 표하는 기준과 시선을 맞췄다.

무언가 안타까운 눈빛이, 정환의 눈에 아렸다.

“실수할 수도 있죠, 뭐 어때요. 우리 편하게 해요. 안 되면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고. 마음 편하게 먹자구요. 우린 이제 시작하는 사람들이잖아요.”

이제 시작하는 거라. 정환이 그런 말을 하자 기준은 힘이 탁! 하고 풀리며 무언가 무거운 짐이 하나 어깨에서 내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이게 뭐라고.

이제 막 프론트에 나선 주니어를 위해 배려하는 자리가 바로 데뷔전이다.

그런 데뷔전에서 실수 한 번이 뭐 어떻단 말인가.

기준은 무작정 실수해선 안 된다. 잘해야 한다. 그런 강박을 가졌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봤다.

그리고 그런 기준을 바라보는 따스한 정환의 눈빛.

‘너무 힘이 들어가 있어.’

강직한 사람들의 특징임을 정환은 알고 있다. 이미 수많은 바텐더를 접했고 또 후임으로 길러낸 경험이 있는 정환은.

한기준같이 강직한 사람들이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정환이 나서서 먼저 다시 만들자고 권했을지도 모른다.

한 번쯤 그런 실수와 함께 손님에게 혼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경험이니까.

허나, 기준처럼 강직하고 또 우직한 이들은.

중대한 순간에 찾아오는 실수에 대한 두려움에 무너질 수 있음을 정환은 모르지 않았다.

실수할 수도 있다.

이제 시작하는 거니까.

부러 ‘우리’란 말로 한 곳에 묶었지만, 사실 이는 정환이 후배인 기준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다.

아르센에서야 선배인 한기준이지만 지금 정환의 몸속에는 12년 경력의 노련한 바텐더가 있지 않나.

그런 선배의 입장에서.

정환은 한기준이라는 제법 괜찮아 보이는 새싹을 밝게 틔워주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 맞아. 이게 뭐라고.”

기준은 정환의 어깨를 한 번 쓸고는 밝은 미소로 고개를 끄덕여줬다.

건방지다며 한소리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기준은 후배의 말을 가슴에 새기기로 했다.

그렇게 아련한 기운이 둘 사이를 감싸고 있을 때.

“자. 이제 마무리할까요?”

하루를 끝마치자는 마스터 이명진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 마스터.”

세 명의 스태프는 일시에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중앙으로 모여들었다.

“우선 정우 씨. 오늘 하루 고생하셨어요.”

“저야 뭐 늘 같은 하루였죠. 끄떡없습니다.”

제일 처음 꺼내는 말은 자신과 합을 맞췄던 신정우 바텐더에게 향했다.

명진은 간단히 수고했다는 말과 따스한 눈빛으로 그를 맞았다.

다음으로 명진의 눈빛이 기준에게 닿았다.

“기준 씨. 오늘 하루 고생 많았어요. 성공적인 데뷔전이었나요?”

“많은 걸···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요. 완성된 사람만이 바에 서는 건 아니랍니다. 바에 선 뒤로도 계속해서 배워가야죠. 그걸 알았다니 성공적인 하루였겠군요.”

명진은 앞서 일어난 일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인자한 웃음으로 기준을 격려했다.

“오늘 기준이 데뷔도 했는데 회식 한 번 갈까요, 마스터? 저어기 압구정 쪽에 ‘새벽 집’이라고 좋은 곳 있는데. 아침까지 한다더라구요.”

매니저 신정우는 훈훈한 분위기에 신난 듯 회포나 풀자는 말로 기분을 한껏 올려봤다.

하지만.

“다음에. 다음에 가시죠. 오늘 같은 날은 기준 씨도 홀로 하루를 돌아볼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요.”

“아···. 그건 그렇죠. 아쉽네요.”

“다음 주쯤에 자리를 가지죠. 제가 좋은 곳에서 크게 쏘겠습니다.”

“방금 하신 말씀, 기억합니다?”

“물론이죠.”

명진은 그런 정우의 바람을 물리며 오늘은 자리를 파하자는 말을 했다.

마지막으로 기준을 지나쳐 정환에게 닿는 명진의 시선.

“다들 정리하고 들어가세요. 정환 씨는 오늘 남으시고.”

“네? 저···요?”

정환은 그런 명진의 말에 눈을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원래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하지 않나. 정환과 기준은. 동시에 얼굴에 당황이 아렸다.

기준은 마른 입술을 겨우 적시며 만약 혼나거나 그런 거라면 자신이 나서리라. 그런 생각을 품고 있었다.

허나.

“칵테일 연습을 봐 드린다고 했으니까요. 제 몸이 언제 또 탈 날지 모릅니다. 시간이 있을 때. 봐 드릴게요.”

명진은 이 둘의 걱정을 날리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해줬다.

마스터가 신입에게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아. 넵.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칵테일 연습을 하자니. 정환에게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다.

기준이 만드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데뷔전을 떠올렸던 정환은 간만에 바툴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

- 짝!

명진은 박수를 한 번 치고는 시선을 환기했다.

그리고.

“자,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이라는 말로, 아르센의 영업 종료를 알렸다.

기준과 정우가 웃으며 떠난 아르센에는 정환과 명진만이 남게 되었다.

어색한 적막이 잔잔하게 들려오는 깊은 새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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