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잔. 괜찮은 겁니까?
6.
“한때는 이발소가 외과 의사의 역할을 했던 것처럼···, 바라는 곳 역시 다른 역할을 했던 시절이 있습니다. 알고 계시나요, 정환 씨?”
영업이 끝난 고즈넉한 아르센의 안.
바 테이블 바깥에 손님처럼 자리한 명진은 바 안에 서 있는 정환을 향해 말을 물었다.
칵테일 연습을 봐 줄 테니 남아라더니. 명진은 왜 역사 강의를 하는 걸까.
이 또한 교육의 하나일까. 정환은 처음 겪는 일에 그저 명진의 말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약국과 바가 원래는 같은 역할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과연 해박하군요. 정환 씨는.”
“···아닙니다.”
능구렁이다. 이명진은.
이를 아는 정환은 명진이 하는 말에 무슨 뼈가 있을지, 조용히 이를 찾는 중이다.
“당시 유럽에 유통되던 술들은 지금의 술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였죠. 말 그대로 약. 약용주라는 말이 어울리는 정제되지 않은 술이었습니다.”
“마취, 환각, 그리고 진통. 이게 원래는 술의 용도였다고 들었습니다.”
“맞아요. 당시 술들은 약과 독. 딱 그 경계에 있었다더군요. 코카인에 헤로인, 마리화나가 들어간 술도 적지 않게 있었죠. 해서···, 약사 면허가 없다면 술 역시 다루지 못하는 게 당시의 실정이었지요.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갈피를 잡지 못한 정환은 그저 명진의 말에 고개만 끄덕였다.
“여기서 작은 문제. 이미 약도 독도 다룰 수 없는 바텐더지만···, 여전히 바텐더만이 다룰 수 있는 독도 있는 법입니다. 그게 어떤 독인지 알고 있습니까?”
진지하게 묻는 걸까. 정환은 우선 그런 생각에 명진의 얼굴을 바라봤다.
사뭇 진중한 태도로 묻는 명진의 얼굴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자한 미소만이 걸려 있었다.
‘능구렁이···’
의도야 몰라도, 답은 알 수 있다. 정환은 듣는 순간 떠오른 그 단어를 입으로 뱉어봤다.
“고독이란 이름의 독···인가요?”
- 씨익.
명진의 입이 밝게 올라갔다. 정환은 매번. 명진의 질문에 답을 찾아온다.
“처음이군요. 맞춘 사람은.”
“···.”
정환은 처음으로 맞췄다는 명진의 말에도 밝게 웃을 순 없었다.
사실 늘 쓰는 반칙 같은 거지만.
이미 알고 있는 농담이었기 때문이다.
일본 바에서 한때는 유행했던 농담이다. 바에 오는 날지 못하는 새(*일본어로 토리)의 이름은? 이란 물음에 대한 혼자(*일본어로 히토리)라는 새란 답.
긴자에 있었던 바텐더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농담에, 정환은 얼른 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지만···, 고독은 바텐더가 아니면 다루기 힘든 독이죠. 그게 손님의 고독이든···, 또 다른 동료 바텐더의 고독이든.”
명진은 말을 하며 옆에 놓은 잔에 담긴 술을 한 잔 들어 입에 들이켰다.
정환이 만든 술은 아니었다. 그저 무색투명한 진득한 느낌의 술.
정환은 미세하게 풍겨오는 솔 내음에, 저 술이 진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고독을 해독하는 게 별 게 있나요. 고독에 빠진 손님에게 말을 한마디 건네는 것, 또 그 고독을 홀로 이겨낼 수 있게 술을 한 잔 건네는 것···.”
명진은 시선을 조금 아래로 향하며 홀로 말하듯 읊조렸다. 그리고 점점 올라오며 정문의 얼굴에 닿는 그의 시선.
“그것도 아니라면, 홀로 실수를 감당하려는 동료를 위해 술병을 바꿔 건네는 것··· 등. 여러 방법이 있겠죠.”
!!
명진은 말을 마치며 다시 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깜짝 놀라 굳은 정환의 얼굴을 애써 보지 않아 주는 일종의 배려였다.
정환은 놀라서 굳은 채 시선을 둘 곳을 잃었다. 저게 그냥 하는 말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상황이 절묘하지 않나.
“···.”
“재미난 행동을 했더군요, 오늘.”
가만히 굳은 정환에게 명진이 먼저 본론을 꺼냈다. 아마 명진은. 이미 모두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런 미친···’
이상적인 바텐더는 반대편 끝에 앉은 손님의 잔이 비어있는 걸 다른 반대편에서 알아채는 바텐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들을 때는 그저 일본에서나 유행하는 뜬구름 잡는 소리겠거니 했었는데. 지금 보니, 그게 정말로 가능한 모양이다.
반대편에서 자신의 바텐딩을 펼치며 또 다른 반대편에서 오가는 상황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니.
아직 자신도 닿지 못한 경지에, 정환은 혀를 내두를 뻔했다.
“그게···”
놀란 것도 놀란 거지만, 기준과 정환은 이 일에 대해 이명진에게 아무런 보고를 하지 않았다.
기준이야 경황이 없어서였고, 정환이 이를 말하면 고자질하는 게 될 수 있다.
난감한 상황에 놓인 정환이 슬쩍 명진의 눈치를 살폈다.
“아끼는 진이었는데 말이죠. 유럽 여행에서 가져온 유일한 보틀이고. 꼭꼭 숨겨두기까지 했었는데···”
명진은 정환의 모습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테이블 위에 술병을 하나 올려뒀다.
정환이 기준에게 건넸던 고든스의 유럽판이었다.
“그···, 죄송합니다. 마스터.”
“글쎄요. 딱히 사과할 일은 없지 않았나요?”
“네?”
“기준 씨가 만든 싱가폴 슬링이 레시피에 맞지 않았나요?”
“아뇨···”
“그럼 맛이 없기라도?”
“그것도···”
“손님을 속였나요?”
“···아마 아닐 겁니다.”
손님이 정한 진은 그냥 고든스였다. 그게 유럽판이라는 말도 국내용이라는 말도 없었으니, 딱히 속인 게 아니긴 했다.
“그렇죠. 아니면 손님에게서 무슨 컴플레인이라도?”
“없었습니다.”
“그럼 뭐가 문제죠? 아, 제가 아끼는 술을 쓴 거?”
“···.”
“그건 사과를 받긴 해야겠군요.”
듣고 보니 그렇긴 하다. 무언가 우당탕탕 몰래 일을 진행했기에 제 발이 저린 건 있었지만, 뜯어보니 크게 잘못은 없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환은.
여기서 하고픈 말도 없진 않았다.
“···기준 형이 다시 만드는 경험을 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손님에게 실수를 솔직히 말하고··· 칵테일을 다시 만들어야 했다?”
“그게 옳은 거라고 알고 있습니다.”
너무도 강직한 모습 때문일까. 정환의 말을 듣자 명진은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혼내는 분위기도 또 질책하는 분위기도. 그에게서는 전혀 뿜어지지 않았다.
“중요한 날이었습니다. 유독. 평소라면 그랬을 수도 있지만··· 오늘 같은 날 실수를 했고, 또 손님에게 핀잔을 들었다면. 제법 큰 상처로 남았을 수도 있겠죠.”
“······!”
명진은 딱 정환이 생각했던, 기준을 보며 불안해하던 점을 정확히 짚어 냈다.
같은 선배의 입장에서 한참 뒤의 후배를 바라보는 시선은 모두가 같은 걸까.
명진의 신통방통함에 정환이 놀라고 있을 때.
- 스윽.
명진은 자신의 앞에 놓았던 유럽판 고든스 진을 정환 쪽으로 밀어냈다.
“우선 한 잔 만들어 볼까요? 이걸 베이스로.”
“···네?”
“연습해야죠. 칵테일.”
“아, 네···. 그럼 어떤 걸···?”
“김렛. 김렛으로 해보죠.”
“네. 알겠습니다.”
정환은 명진이 내민 술을 받아 들고는 셰이커를 준비해 김렛을 만들어 갔다.
김렛은 진을 베이스로 라임즙과 설탕을 넣고 셰이킹하면 되는 간단하지만, 맛이 좋은 칵테일이다.
세계적으로 손에 꼽을 만큼 인기가 있는 칵테일이기도 했고.
또 김렛은 면접 때 만들었던 마티니와는 다르게 셰이킹 기법에 있어서는 정점에 있는 칵테일이라 불러도 좋을 정도였다.
마티니는 바텐더의 스터를 볼 수 있는 최적의 칵테일, 김렛은 바텐더의 셰이킹을 볼 수 있는 최적의 칵테일.
말 그대로, 송곳(Gimlet)처럼 날카로운 주문에 정환의 피부가 따끔거리는 기분이었다.
- 촤악. 촤악.
지거에 담긴 진과 라임즙이 찬찬히 셰이커로 흘러들었다. 음악도, 다른 말소리도. 아무것도 없는 조용한 바 안.
손님의 자리에 앉은 이명진도, 바텐더의 자리에 선 차정환도.
그저 셰이커에만 시선을 두고 있을 뿐이다.
정환이 셰이커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내 고요한 바 안을 채우는 경쾌한 소리.
- 샤카! 샤카! 샤카!
- 착! 착! 착! 착!
명진의 눈이 감기고 턱이 올라간다. 명진은 이렇게 맑은 셰이킹 소리를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것 같다.
다른 실력 좋은 바텐더와는 결이 다른 소리로 느껴진다. 잘 익은, 원숙한 셰이킹 소리에 그의 턱이 정점을 찍을 때.
- 촤르르륵! 슥!
잔에 완성된 김렛을 따라낸 정환이 이를 명진의 앞으로 살며시 밀어냈다. 밝은 녹색의 액체에 잘게 부서진 얼음이 섞여 청량함이 가득 담긴 술이 명진의 앞에 놓였다.
“김렛, 나왔습니다.”
“색이 좋군요.”
색을 보고 한 번 웃은 명진은 그대로 잔을 들어 입으로 향했다. 잔을 코로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저 아래에 있는 잔에서 풍겨오는 은은한 향은, 아르센을 가득 채우고 남을 정도였다.
- 호르륵.
한 모금 정도가 명진의 입으로 흘러 들어갔다. 명진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눈이 커지고 또 깜짝 놀라며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
아쉽게도. 전부 아니었다.
명진은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인자한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의 입은.
“정말···, 신입이 맞기는 한 겁니까?”
당연히 해야 했던 의심을 뱉기 시작했다.
‘······!’
정환의 시선이 갈 곳을 잃었다. 한 발 슬쩍 뒤로 물러났지만, 바텐더는 도망갈 곳도 없다.
바는, 좁으니까.
“쉽게 답하지 못하는군요.”
“···아, 아닙니다. 현재로 말하자면, 신입이 맞습니다···.”
현재로 말하자면. 정환이 한참을 고민하고 붙인 조건은 그게 전부였다. 자신이 생각해도 조금 초라하고 말이 안 되기는 하지만, 어쩔 수는 없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명진의 눈빛이, 흡사 거짓을 뱉는 순간 모든 걸 꿰뚫어 볼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군요. 그럼 하나 더 묻죠.”
“······.”
“아르센에 온 이유는 무엇이죠?”
명진은 여전히 담담한 태도로 정환에게 말을 물었다. 그의 말투나 표정, 눈빛에는 의심도 질책도 전혀 담겨있지 않았다. 그래서 간담이 더욱 서늘하긴 했지만.
어떻게 답을 해야 할까. 솔직히 말하자면 다른 선문답에 비해 지금 물어오는 말들은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질문들이다.
실력을 숨겼어야 했을까. 아니면, 다른 식으로 나타냈어야 했던 걸까.
잠시 고민에 빠진 정환은, 그저 정공법으로 나가보기로 한다.
“바텐더···, 바텐더가 되려고 왔습니다.”
“흠···, 바텐더가 된 후에는요?”
“저만의 바를 가지고 싶습니다.”
“어떤 바를 말씀이죠?”
“누구나 와서 쉴 수 있는, 또 하루의 마무리가 될 수 있는 그런 ‘공간’ 같은 바···. 현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서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정환은 그렇게 자부하며 명진과 눈을 마주쳤다.
잔을 들어 잠시 표정을 가리는 명진이, 무언가 잠잠한 고민에 빠진 모양이다.
- 탁.
명진이 잔을 내려둔다.
다시 드러나는 그의 표정.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특유의 제스처가 오늘따라 더욱 의미심장하게만 보였다.
내려둔 잔은 이미 비어버려 든 것이 없다.
“그렇군요. 좋은 바가 되겠군요, 그곳은.”
“네?”
“열심히 해 봐요.”
명진은 그 말만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환은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도저히 알 수 없다.
좌석에서 일어난 명진은 바 테이블을 돌아 백사이드로 향했다. 멀뚱히 선 정환을 지나쳐 백사이드로 가는 명진.
정환은 명진의 몸이 백사이드의 문을 전부 넘기 전에, 겨우 한마디를 꺼낼 수 있었다.
“저···, 괜찮은 건가요···?”
명진은 백사이드로 향하던 몸을 살짝 빼낸 후, 정환을 바라봤다.
“뭐가 말씀이죠?”
“···계속 일해도···”
되는 거냐. 정환은 그걸 물으려 했다.
“실력 좋은 무경력자 신입···. 처음에는 의심도 갔습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온 건 아닐까 하고요. 허나, 정환 씨의 행동 하나하나가 방금 말한 것과 일치하고 있더군요. 바텐더가 되고 싶다는 말도···, 만들겠다는 바도. 아닌가요?”
“······.”
“거기에 오늘처럼 기준 씨와 정우 씨를 열심히 도와주고도 있고. 아르센에서 일하지 못할 이유가 없죠.”
“···제 사정은···”
“궁금은 합니다. 그래도···, 제가 궁금하다고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무슨 의도였는지, 또 무슨 뜻이었을지. 정환은 알 수 없다. 다만, 확실한 건, 정환이 여느 때처럼 일해도 괜찮다는 뜻인 건 분명했다.
“실력은 잘 알았습니다. 솔직히 정우 씨···, 아니면 저. 그 이상이겠더군요. 허나, 아르센에도 정해진 절차란 게 있습니다. 당장에 프론트는 안 됩니다.”
“무, 물론입니다! 그런 생각은···!”
“그리고 연습도 계속하세요. 대신 제가 봐 드릴 수 있는 건 없을 거 같더군요. 가끔···, 이렇게 자리나 채우죠. 오늘처럼 김렛이나 한잔하며.”
“네, 연습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명진은 이 말을 하는 게 맞을까. 그런 표정을 잠시 떠올리더니, 이내 결심이 선 듯 정환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의 눈빛이 앞선 말을 할 때보다, 더욱 진지하게만 보였다.
“정우 씨와 기준 씨. 많이 도와주세요. 무슨 뜻인지 아실 거라 믿습니다.”
명진은 이제 대놓고 정환이 정우와 기준보다 실력이 좋다는 걸 인정하는 말을 뱉었다.
정환은 저 말을 하는 명진의 심정을 알 것도 같았기에 최대한 겸양하는 태도로 말을 받았다.
“···능력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제가 없을 때는 더더욱···.”
“네?”
“···가끔 자리를 비우니까요. 그럴 때···. 네. 부탁드리죠.”
명진은 알 수 없는 말을 끝으로 완전히 백사이드로 들어섰다.
바에 홀로 남은 정환은 잠시 침묵에 빠졌다.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오히려 마스터가 실력을 알게 되었으니 잘된 일이라 생각해야 할까.
아니면, 알 수 없는 비밀을 가진 수상한 사람이 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정환의 머리에 가득 찼다.
허나, 한 가지 확실해진 건.
그래도 계속해서 아르센에서 일할 수 있다는 것과.
바텐더로서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오늘은 그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차라리···’
잘 된 거라 여기자.
그런 생각까지 들자, 오히려 무언가 하나의 무거운 짐이 어깨에서 내려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 명이라도. 적어도 한 명이라도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
순간, 무언가 알 수 없는 후련함이 정환의 가슴을 쓸고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