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261 --------------
“····새롭지만··· 낡은··· 자?”
무심한 드워프가 또 이상한 말을 흘렸다.
아니, 깜짝 놀랄까봐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너무도 태연했다.
당연히 우려했던 공격도 없었다.
“네, 네?”
‘또 이상한 말을 하네? 저 놈의 드워프가 혹시···’
자신이 전생을 기억한다는 사실을 눈치 했을까?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팰리스가 그 말의 진의를 물으려고 했으나 이어지는 말에 그럴 기회를 놓쳤다.
“그래, 새로운 아니, 어린 인간! 왔냐?”
“····아 네에~ 그런데 그 말은 무슨 뜻으로···”
“근데, 왜 왔어?”
“···”
“물었잖아. 여긴 왜 왔냐고! 빨리 말해 봐.”
확실히 생산활동(?) 외에는 매우 단순하다는 어른들의 말이 맞았다.
드워프는 정말 단순무식한 것 같았다.
그래서 팰리스가 단도직입적으로 제안했다.
‘일단은 계약이 먼저다. 궁금증은 나중에 풀자.’
“각궁을 만들어주세요. 아니, 저와 계약을 맺어요.”
‘꿀꺽~ 빨리, 계약한다고 말해줘! 빨리~’
“계약이라···”
“네! 계약이요. 인간과 드워프 간의 생산에 관한··· 무슨 뜻인지 아시죠?”
“당연히 알고 있다. 신성한 계약. 그런데··· 내가 왜?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으흐흐흐~ 그럼, 맥주를 구해줄게요.”
“···매, 맥주?”
‘후르릅~ 꿀꺽~’
드워프가 저도 모르게 입안에 고인 침을 삼켰다.
회가 동했는지 망치까지 내려놓았다.
‘앗싸아~’
맥주가 통했다.
그럼··· 됐다.
“네, 맥주! 콜?”
‘꿀꺽~’
“으하하하~ 나는 검은 모루족의 젊은 망치, 티아늄 골드버그다.”
‘아무리 봐도 노인 같은데. 뭐, 드워프가 원래 털투성이라니 내가 이해해야지. 그런데 어째 이름이 무슨 금속 같군. 아차~ 자기소개 시간이었지?’
“반갑습니다. 저는 아르펜 휘슬러의 아들 팰리스 휘슬럽니다.”
“그렇군. 어이~ 팰리스. 따라와라.”
티아늄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곤 동굴의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팰리스의 귀에는 계약할 곳으로 빨리 따라오라는 말로 들려왔다.
“자, 잠깐! 같이 가요.”
‘으흐흐흐~ 나는 역시 천재야, 천재!’
팰리스는 정말 기뻤다.
오랜 노력의 결과 마침내 드워프를 꼬드겼기 때문이다.
팰리스와 티아늄은 밑으로 향한 동굴의 복도를 걸어 주변보다 훨씬 어두운 토굴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티아늄이 손을 들어 한쪽 벽을 가리켰다.
“왜, 왜요?”
팰리스는 이상하게도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예감은 제대로 들어맞았다.
너무 어두워 눈을 비비고 살펴보니 도축한 짐승들 사이에 곡식자루와 오크통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서, 설마···’
“저거, 내가 담근 맥주거든? 굳이 어린친구가 구해주지 않아도 돼. 으하하하~”
“네, 네? 아~ 네에~”
‘이런 망할 놈의 드워프가··· 놀려먹을 생각으로 일부러 여기까지 데려왔군.’
팰리스의 추리가 정확했다.
예전의 일과 오늘의 행실을 종합할 때, 티아늄은 아무래도 ‘성격파탄자’같았다.
“어린 친구~ 이제 어떡할 거야?”
“티아늄~ 나와 그냥 계약하면 안 되나요?”
“내가 왜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날 이해시켜봐, 팰리스!”
터지려는 폭소를 힘겹게 참고 말하는 티아늄. 속을 박박 긁는 멘트가 다시금 반복되었다.
“그, 그것이···”
“낄낄낄~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구먼. 아이고~ 재미있네. 우리 드워프는 역시 아무런 고민이 없이 작업해야 해. 낄낄낄~”
이제야 확실해졌다.
티아늄은 확실한 성격파탄자였다.
“···”
팰리스는 기기 막히고 말문도 막혔다.
‘맥주’라는 확실한 패만 믿고 있었는데···
그 패가 사라지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그러나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다.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했는데. 포기하기엔 너무 멀리 왔다. 그래, 일단 시간을 끌면서 좋은 미끼를 생각해내자.’
“그런데 티아늄. 드워프는 물건을 아주 잘 만든다면서요?"
“당연하지. 우리 드워프보다 실력이 뛰어난 종족은 아무도 없다.”
“아~ 네에~ 작업하는 데 무슨 애로사항 같은 건 없나요?”
“없다.”
시간을 끌 목적으로 괜한 말을 던지다가 갑자기 아주 좋은 미끼가 떠올랐다.
드워프가 대장간을 돌리기 위해서는 철광석과 석탄을 충분히 캐야 한다.
이 작업에 필요한 시간 만해도 벅찰 텐데 어떻게 농사까지 짓겠는가!
“혹시 농사를 짓나요?”
‘피식~’
“드워프가 농사짓는 거 봤니?”
“저도 처음이라서··· 그나저나 맥주를 담그려면 곡식이 필요할 텐데, 맞아! 맥주를 만들 곡식이 필요하지 않나요?”
“그건··· 그럼, 맥주를 만들 곡식을 네가 구해줄 수 있겠니?”
‘앗싸아~··· 이거다!’
“당연히···”
“···라고 이렇게 말할 줄 알았지? 낄낄낄~”
“네, 네?”“나이가 어려도 인간은 인간인가? 어린 팰리스도 어째 다른 인간들처럼 말하는군. 낄낄낄~ 곡식들은 잘 아는 형님에게 얻어 쓴다네.”
잘 안다는 형님의 정체는 아마도 영주의 대장간에서 일한다는 그 드워프일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뭐, 아니면 말고···
“···”
‘이런 염병할 놈이···’
팰리스가 화가 나 저도 모르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맘 같아서는 오른 손에 마나를 왕창 두르고 드워프의 턱주가리에 어퍼컷을 힘껏 날려주고 싶었다.
그러나 계약을 위해서 힘들게 참아냈다.
티아늄이 어른 허벅지 같은 팔뚝으로 성인 머리통만한 망치를 마구 휘둘렀기 때문이 절대로 아니었다.
‘난! 아주 관대하니깐! 지, 진짜라니깐? 아무튼 이 방법도 실패다. 계속 시간을 끌며 다른 미끼를 생각해내자.’
“···”
“어이~ 팰리스. 화났나?”
“아뇨! 화 안 났어요.”
“에이~ 화 난 것 같은데?”
“이런 씹~ 나··· 화 안, 났, 다, 고, 요!”
“오~ 그랬어? 그럼, 화가 안 났다고 인정하지 뭐.”
‘화 난 것이 진실이지만.’이라는 중얼거림이 뒤를 이었지만 팰리스는 그냥 안 들은 것으로 치부했다.
“···”
“하하하~ 자꾸 놀려서 미안하다. 요즘 스트레스가 많이 쌓였었거든?”
“···”
“사과하는 의미로 내가 ‘직접’ 담근 맥주를 대접하지.”
“맥주··· 요?”
‘후르릅~ 꿀꺽~’
팰리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화를 냈던 일도 잠시 잊을 정도였다.
암 투병으로 술을 마시지 못한 전생 이후로 얼마 만에 접하는 술인가!
아직 몸이 어리지만 도수가 약한 맥주다. 아마도 한두 잔 정도는 문제없을 것이다.
맥주를 작은 술통(성인 상체만한)에 담고 간단한 안주거리를 챙긴 티아늄은 팰리스를 휴식공간으로 데려갔다. 푹신한 의자를 권하곤 주석 잔에 맥주를 가득 따라 세팅했다.
‘챙~’
‘꿀꺽~’
팰리스는 어린 몸을 생각해 아주 살짝 마셨다.
첫맛, 미지근하고 김이 빠져 실망했다.
그러나 실망은 곧 환희로 대신했다.
상면발효맥주의 대표주자 에일(Ale, 색이 진하고 쓴 맛이 강한 맥주)의 진하고 깊은 풍미! 입안 가득히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캬아~ 정말··· 좋네요.”
‘이것에 비하면 한국맥주는 정말···’
술맛은 분명 개인의 취향일 것이다.
그러나 인류 최악의 국가라는 북한의 맥주보다도 형편없다는 한국맥주. ‘그 따위’를 평생토록 마셔야했던 전생이 너무도 억울할 정도였다.
“오호~ 맥주 맛을 알잖아? 어린친구의 미래가 참 밝군. 아주 바람직해.”
“아, 네에~”
이번에는 비꼼이 아닌 순수한 칭찬이었다.
그런데 어째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 티아늄! 도대체 무슨 일인데요?”
“응? 뜬금없이 무슨 소린가?”
“방금 전에 자꾸 스트레스가 어쩌고 고민이 어쩌고 그랬잖아요.”
“아~ 그거?”
‘꿀꺽, 꿀꺽~ 탁!’
단번에 잔을 비운 티아늄. 주석 잔을 다시 채우며 잠시 중단되었던 대화를 이어갔다.
“어린 팰리스는 몰라도 되는 문제다. 어른들의 문제거든?”
‘이 자식이 자꾸··· 얌마 나이로 따지··· 아니, 경륜으로 따지면 내가 더 어른이거든?’
500년을 산다는 드워프다.
그래서 나이가 아닌 경륜(經綸)을 거론했다.
“기쁜 일을 나누면 두 배가 되지만 슬픈 일은 반으로 줄어들잖아요, 안 그래요?”
“오~ 그것 참 명언이군.”
“나에게만 살짝 말해 봐요. 혹시 알아요? 그러다가 고민을 풀어줄 단서가 나타날지?”
“하긴 뭐··· 사실은 말이다.”
술주정 같은 티아늄의 신세한탄이 흘러나왔다.
시시때때로 튀어나오는 자기자랑과 욕설을 제외하면 대략 이렇다.
티아늄은 현재 120살로 20년 전에 이미 성인(육체적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는 성인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장인’으로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드워프다운 물품을 만들지 못했기 때문인데 드워프 사회의 성인식이자 통과의례라고 한다.
티아늄은 장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자신이 만든 물건들을 자주 장로들에게 보여줬었다.
그러나 번번이 인정받지 못했다.
[뭐야! 이번에도 또 검과 방패냐? 이번 것도 너만의 개성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저번에는 다이아몬드 커팅을 표절해서 세공하더니 쯧쯧쯧~ 다른 때는 괜찮아도 ‘인정’받을 때는 안 된다는 거, 몰라?]
[어째 요즘 것들은 창의력이 없어요, 창의력이!]
[그렇지? 우리 때는 뭔가 특별하거나 개성이 담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밤새워 고민했었는데. 안 그런가?]
[당연하지! 밤을 새워 술판을··· 아니, 창의력을 갈고 닦았었지. 세상이 어찌 되려는지. 에휴~ 말세다, 말세.]
티아늄과 또래의 드워프들이 특별하지 못한 진부한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이란다.
티아늄은 강력하게 곧 죽을 노친네들 즉, 기성세대들이 젊은 자신들을 질투했기 때문이라고 강변했지만 어쨌든!
“티아늄. 장인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무슨 문제가 있나요? 어차피 혼자인데, 인정이고 뭐고 상관없잖아요.”
사회적인 지위나 인정은 집단이라는 형태 내에서만 통용된다.
혼자서 작업하는 현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나에게 상관··· 있거든? 그것도 엄청!”
“그래요? 왜 그렇죠?”
“하아~ 이것까지 털어놔야 하는지···”
“···”
팰리스는 침묵으로 대답을 종용했다.
“에이, 씨~ 몰라, 몰라! 그래~ 나도 한 번 장가를 가보자!”
“네, 네? 자, 장가요?”
너무 의외의 발언이라 팰리스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그래, 결혼 말이다, 결혼! 실력과 창의력만 최고로 치는 계집애들···”
‘으드득~’
핏발이 선 눈동자에서 불길이 활활 타오를 것만 같았다.
“계집애들이 장인이 아니라고 드워프 취급도 안 해 주다니··· 크흑~ 데이트 한번이 그리도 어려웠더냐? 누가 잡아먹느냐고!”
‘꿀꺽, 꿀꺽~’
‘탁!’
티아늄은 단번에 술잔을 비우고는 거칠게 내려놓았다.
이제 보니 드워프의 사회는 조선의 사대부(士大夫)처럼 실력을 중시하는 사회인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의 티아늄의 행실을 고려해 볼 때, 그녀들의 판단이 옳은 것 같았다.
“뭐, 개성이 담뿍 담긴 작품? 게다가 이전에 없던 뭔가 특별한 물건? 쳇~ 지들은 젊었을 때가 없었나? 소싯적에는 우리보다 더 문제였으면서··· 쳇~”
“아하~ 그래서 티아늄이 크큭~ 인간 세상으로 크큭~ 나왔군요?”
팰리스는 자꾸만 새어나오는 웃음을 힘겹게 참으며 말했다.
“손재주는 확실히 우리 드워프다. 그러나 인간은 본래 예측을 불허하는 종족이지. 인간세상을 관찰하며 뭔가 특별한 것을 만들 생각이다.”
‘오~ 그랬어? 그렇다면 확실히 계약할 의향은 가지고 있었네?’
“그럼, 저와 계약해요.”
“내가 왜에~?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날 이해시켜봐, 팰리스!”
속을 뒤집는 그것이 다시금 반복되었다.
팰리스는 티아늄에게 자신을 관찰하며 새로운 물건을 개발하라고 설득··· 하다가 말았다.
‘가만! 새로운··· 물건? 이런 멍청한!’
“티아늄! 혹시 각궁 아니, 이곳에 없는 전혀 새로운 물건인데. 그것을 만들 방법을 알려주면 나랑 계약 할래요?”
“이곳에 없는··· 전혀 새로운 물건? 그게 뭔데?”
“각궁이에요.”
“가꿍? 가꿍이라··· 확실히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긴 한데.”
문제는 그것이 작업에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고 장로에게 인정받을 만한 물건일까?
아참, 티아늄은 한국어 ‘각궁’을 자꾸 ‘가꿍’으로 발음했다.
“그거··· ‘인정’ 받을 수 있겠어? 작업할 만한 가치가 있겠냐고.”
“당연하죠. 각궁이 얼마나 대단한 활인데요.”
팰리스의 자랑에 티아늄이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호오~ 그렇단 말이지? 그럼, 크기와 생김새부터 설명해 봐라.”
“일단, 각궁의 생김새는···”
팰리스는 손가락에 맥주를 발라 탁자에 각궁의 모습부터 그렸다.
이어 대략적인 크기와 성능을 설명했다.
그런데 한창 열을 올리던 티아늄이 갑자기 심드렁해졌다.
“뿔소의 기다란 뿔을 가공하여 활을 만드는 건 확실히 특별하긴 특별한데···”
“왜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아주 심각한 문제가 숨어있다.”
“시, 심각한··· 문제라고요?”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가꿍이라는 활은···”
‘꿀꺽~’
“활은요?”
“크지 않아! 크지 않으면 아름답지 않아.”
아무래도 티아늄은 ‘크고 아름다운 것’을 맹신하는 드워프 같았다.
4. 팰리스의 선물-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