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684화>
적월 상단의 대형 범선을 향해 달리는 길.
치솟은 불길이 점점 거세지고 열기가 사방에서 몰아쳤다.
그러나 천문석이 발걸음을 내딛는 매 순간.
화염이 갈라져 길이 열리고 이글거리는 열기가 스스로 물러났다.
몸을 타고 흐르는 선연한 기운, 천강흔!
절정의 극에 달한 내력이 한없이 고양된 정신에 반응해 천강흔을 타고 흐르고 있다!
화염 속을 달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절정의 극(極)!
바늘 끝, 도약의 순간을 향해 외력과 내력, 영육과 혼백이 나아가고 있었다!
천문석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바라는 순간 오히려 멀어지고, 바라지 않기에 오히려 얻게 되는 이치.
이제 곧 초절정,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 초인경으로 도약할 순간이 다가온다.
둘 중 하나다.
비상하여 벽을 뛰어넘거나 실패하고 추락하거나!
그러나 그전에 이 불구덩이에서 탈출해야 한다.
이때 목표로 했던 배가 보였다.
당종과 만났던 적월 상단의 대형 범선!
선체 곳곳에 불이 붙은 대형 범선이 10미터 정도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었다!
천문석은 단숨에 갑판을 달려 난간을 밟고 뛰었다!
쿵-
대형 범선 갑판에 내려서는 순간 재빨리 주위를 살피며 달렸다.
112.5kg의 나무 궤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무통, 구명정, 문짝 같은 타고 강을 건널 물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대신 생각지도 못한 걸 찾았다.
인장 반지 대신에 던졌던 하얀 돌멩이.
특급 헌터가 강문 해변에서 준 하얀 돌멩이가 갑판 위에 떨어져 있었다.
“뭐야, 걔네들 그 난장판을 만들고 돌도 못 찾은 거야?”
피식 웃은 천문석은 하얀 돌멩이를 주머니에 넣고 갑판에 강철봉을 박아넣었다.
‘우선 뗏목을 만들고 궤짝을 찾는다!’
콰드드득-
그리고 뗏목을 만들기 위해 갑판을 뜯어내는 순간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이세기!”
“미호!?”
반사적으로 대답하며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돛이 활짝 펼쳐진 작은 배와 미호, 류호가 보였다!
“이세기! 야, 어디 있어!?”
동료를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돌아오는 모습이라니!
천문석은 갑판 난간에 올라 크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야! 나 여기에 있다!”
순간 돛 뒤에서 바람을 일으키고 있던 류호가 배 위를 달려 도약했다.
파아아앙-
류호는 돌풍에 휩싸여 단숨에 범선 갑판 위에 내려섰다.
그리고 번개같이 달려와 천문석의 옷을 잡고 외쳤다!
“야, 그 계획! 가짜 경계석 반지…….”
“벌써 해치웠습니다! 걱정할 거 없어요!”
순간 류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 어어!? 경계석 반지가 그 가짜가 제사장의 손에 들어갔다고!?”
“아뇨. 더 좋게 해결됐습니다!”
천문석은 아득한 밤하늘을 가로지르는 섬광과 화염을 가리켰다.
“갑자기 나타난 새끼 여우. 섬초가 경계석 반지를 가지고 튀었습니다.”
“……섬초님이 경계석 반지를? 그럴 리가! 분명 미호의 포대기 안에 잠들어 있을 텐데!”
경악한 류호가 밤하늘을 홀린 듯이 바라볼 때.
미호가 어느새 갑판 위에 올라와 외쳤다.
“야, 큰일 났어! 허공도의 제사장! 경계석이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데!”
“뭐!?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확인 안 된다며!”
“나도 방금 알았어! 경계석 반지 어떻게 했어! 설마 제사장한테 건넨 거야!?”
이때 류호는 다급히 미호의 포대기를 풀었다.
“엄마?”
“……!”
그리고 텅 빈 포대기 안을 확인하는 순간 류호는 휘청거렸다.
‘하늘에서 번뜩이는 섬광이 진짜 섬초님이다!’
“엄마! 왜 이래!”
미호가 휘청이는 류호를 부축할 때.
천문석은 섬광과 화염이 원을 그리는 하늘을 봤다.
그야말로 천우신조(天佑神助)!
섬초가 가짜 경계석 반지를 먹튀 하지 않았으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될 뻔했다!
“와, 이렇게 운이 좋다고!”
탄성을 터트린 천문석은 바로 미호에게 외쳤다.
“걱정할 거 없어! 가짜 경계석 반지 가져간 섬초 저 위에서 도망치고 있어!”
“위?”
밤하늘을 본 미호는 바로 알아챘다.
아득히 높은 곳에서 쉴 새 없이 터지는 섬광과 그 뒤를 쫓는 푸른 화염!
“설마 저 빛이!?”
“맞아! 섬광이 섬초, 푸른 화염이 허공도의 제사장이야!”
“잡히면 끝장이잖아!?”
미호의 걱정스러운 질문에, 천문석은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섬초 공간 도약으로 일부러 뺑뺑이 돌리고 있어! 제사장은 잡을 방법 없어! 절대 안 잡힌다!”
미호의 얼굴이 극적으로 변했다.
“와! 이런 재수! 엄마, 들었지! 모두 해결됐어! 으하하하-.”
“맞아 모두 해결됐다! 카캬카카-.”
으하하하-
카캬카카-
미호와 천문석은 하늘을 바라보며 같이 웃음을 터트렸다.
“…….”
그러나 류호의 얼굴은 밝아지지 않았다.
미호의 먼 친척이라고 말한 섬초.
하지만 섬초의 정체는 헤아릴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온 여우 일족의 선조다.
그것도 혼돈에 물들어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상태!
언제정신이 깜빡 나가거나, 죽은 듯이 잠들어 버릴지 몰랐다!
그리고 이게 선조께서 경계석 반지를 낚아채 도망간 이유였다.
혼돈에 금을 그어 구분한 경계석.
경계석은 본질에 스며든 혼돈을 몰아내는 힘이 있다!
본질에 스며든 혼돈을 몰아내면 선조께서는 힘과 기억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열기조차 삼키는 냉염(冷炎)을 부리는 여우 일족의 왕혈(王血), 섬초(纤楚)!
힘을 되찾은 섬초님이라면 허공도의 제사장이 부리는 화염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경계석이 진짜일 때만 가능한 이야기.
경계석은 가짜고 섬초님은 지금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상태다!
류호는 앞으로 벌어질 일이 눈에 선했다.
1. 섬초님의 정신이 깜빡 나가 허공도의 제사장에게 잡힌다.
2. 제사장은 경계석 반지를 손에 넣고 가짜란 걸 알아챈다.
3. 분노한 제사장의 화염 폭풍이 적염성에 쏟아져 모든 게 잿더미가 된다!
카캬카카-
으하하하-
이세기와 미호가 웃는 지금.
최악의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류호는 추격전이 벌어지는 하늘을 바라보며 머리를 굴렸다!
* * *
카캬카카카-
웃음을 터트리던 천문석은 문득 깨달았다!
“앗! 너 배는!?”
“걱정 마! 난간에 잘 묶어 뒀어!”
난간에 묶어 둔 밧줄을 가리키는 미호.
안도한 천문석은 재빨리 말했다.
“그럼 난 배 안 좀 빠르게 훑어볼게! 1각 정도만 기다려 줘!”
“야, 무슨 소리야! 불 번지는데 당장 배 타고 튀어…….”
천문석은 단 한마디로 미호의 말을 막아 버렸다.
“5관 금괴!”
“5관 금괴?”
“이 배 적월 상단 당종의 보물선이다! 아까 갤리선으로 당종이랑 적월 상단 무사들 나무 궤짝 옮겼냐? 5관 금괴 6개가 들어 있는 30관쯤 되는 나무 상자다.”
미호는 순간적으로 기억을 되짚고 깨달았다!
“당종이랑 적월 상단…… 맨몸으로 갤리선에 올랐어!”
“확실해!? 기사, 낭인, 무사들은 어땠어!?”
“당종은 확실해! 내가 보고 깜짝 놀랐거든! 다른 녀석들은 못 봤지만…… 저 배로 이탈할 때도 갤리선에서 나무 궤짝은 못 봤어!”
“……!”
“……!”
순간 천문석과 미호의 이글거리는 두 눈이 마주쳤다!
말을 할 필요도 없었다!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가짜 경계석 반지는 이미 해결된 상황!
불길이 치솟고 있는 이 배 어딘가에 30관 금괴 궤짝이 쌓여 있다!
“어디에 있을까?”
천문석이 말하는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한곳으로 움직였다.
높게 솟은 후미 갑판 아래, 선장실!
천문석과 미호는 번개같이 달려가 선장실 문을 두들겼다.
쿵-
묵직한 강철 게다가 주술력까지 느껴진다!
두 사람은 좌우로 흩어져 벽을 두들겼다.
쿵쿵, 쿵쿵쿵-
“이쪽 모두 강철이다!”
“여기도 마찬가지야!”
‘통째로 강철로 둘렀다!’
천문석과 미호는 직감했다.
여기다!
이 안에 금괴가 담긴 궤짝이 있다!
문제는 걸려 있는 주술이 뭔지 모른다는 것!
그러나 당종이 금괴를 놓아두고 갔을 정도면, 배가 불에 타거나 침몰한다 해도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었을 거다!
“미호 주술 풀 수 있겠어!?”
“아니. 수준이 너무 높아! 내가 풀면 하루 이상 걸릴 거야!”
미호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단, 여기에는 이 주술 방벽을 순식간에 풀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류호!
천문석과 미호가 동시에 시선을 돌리는 순간.
류호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한달음에 달려와 주술 방벽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바로 열게! 금괴 있으면 바로 배로 옮기고 떠나야 해! 상황이 변했어!”
“네?”
천문석이 반문하는 순간 철컹- 자물쇠가 열리고 소리 없이 문이 열렸다!
평범한 집무실 안쪽, 너무나 익숙한 나무 궤짝이 보였다!
5관 금괴 궤짝!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무 궤짝이 차곡차곡 쌓여 벽을 이루고 있었다!
천문석과 미호, 류호는 한달음에 달려가 나무 궤짝을 들고 배 위로 옮겼다!
쿵쿵, 쿵쿵쿵-
모두 10개의 나무 궤짝이 작은 배 위로 옮겨졌다.
이것만으로도 300관! 1톤이 훌쩍 넘는 무게!
“좀 더 나를까?”
“당연하지! 한계까지 채우자!”
천문석이 밧줄을 잡고 갑판으로 뛰어오르려는 순간.
류호가 고개를 저었다.
“이거면 충분해. 우리 지금 당장 섬초님 데리고 도망쳐야 해!”
“엄마! 그게 무슨 말이야! 섬초 저 하늘에 있잖아!”
이때 섬광과 화염이 수직으로 강으로 떨어졌다!
파바바바팟-
파아아아앙-
콰아앙-
엄청난 수증기가 터져 나오고 강물이 요동쳤다!
물속으로 섬초와 제사장이 꽂혔다!
“지금 물속으로 추락한 거야!?”
천문석이 경악하는 순간.
류호와 미호가 다급히 외쳤다.
“섬초!”
“섬초님!?”
이때 생각지도 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불렀어?”
배 위에 놓인 포대기 속에서 새하얀 새끼 여우, 섬초가 기어 나와 말했다.
모두가 말을 잊은 순간.
쿠릉, 쿠르릉-
강물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제사장이 물속에서 섬초를 쫓고 있다!’
“야! 당장 튀자! 잡히면. 아니, 같이 있는 것만 보여도 끝장이야!”
천문석의 말에 류호와 미호는 흠칫 놀랐다.
그렇다!
경계석 반지를 가지고 튄 섬초와 적염성의 여우 일족이 관련 있다는 의심을 받는 것만으로도 끝장이다!
허공도의 제사장이 물속을 뒤지고 있을 때 튀어야 한다!
배는 순식간에 불타는 대형 상선을 벗어나 요동치는 강을 지나 하류로 나아갔다!
그리고 어느 정도 거리를 벌리는 순간 천문석은 재빨리 외쳤다.
“야, 너 빨리 팟팟- 공간 도약으로 멀리 도망쳐! 급해!”
“맞아! 섬초야 착하지! 얼른 멀리멀리 도망치자!”
“섬초님! 우선 강 하류로 당장 도망쳐야 해요! 이대로 잡히면 큰일 나요!”
“…….”
섬초는 천문석, 미호, 류호 셋을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포대기 위로 발라당 드러누워 울었다.
냐아, 냐아아-!
“야! 말로 해! 너 말 잘하잖아!”
천문석이 버럭 외치는 순간 진짜로 말이 튀어나왔다.
“아, 너무 힘들다!”
“뭐!? 야, 갑자기 뭔 소리야!”
“초콜릿! 난 초콜릿 주기 전에는 한 발짝도 안 움직일 거야! 냐아-.”
‘하필이면 지금!’
류호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세기를 쫓을 때도 ‘초콜릿’을 내놓으라고 땡깡을 부려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초콜릿’이 뭔지도 모르는데 줄 수는 없었다!
이때 섬초의 시선이 바람에 부푼 돛에 닿고 위험한 빛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재빨리 앞을 막으려는 순간.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너 초콜릿 주면 다시 팟, 팟- 도망치는 거 맞지!?”
“어……?”
“미호! 타륜 좀 잡아줘!”
“알았어!”
미호에게 타륜을 맡긴 천문석은 재빨리 재킷 주머니를 훑었다.
있었다!
비상용 고열량 초콜릿!
단숨에 섬초에게 달려간 천문석은 초콜릿을 건넸다.
냐아아-
섬초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초콜릿을 받아 꽈득- 모서리를 씹었다.
“……진짜잖아! 진짜 초콜릿이야!”
섬초의 두 눈이 크게 뜨이고 정신없이 초콜릿을 씹으며 얼굴이 헤헤 풀렸다!
“야, 이제 다시 공간 도약으로 도망쳐! 빨리빨리! 쟤 다시 나오기 전에 튀어야 해!”
미친 듯이 요동치는 강물!
헛다리를 짚은 허공도의 제사장이 물에서 튀어나오기 전에 섬초는 도망쳐야 한다!
“알았어! 걱정 마!”
섬초는 입과 손에 초콜릿을 묻힌 채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압-!
그리고 기합을 지르는 순간 팟- 섬광이 터지고 도약했다.
30cm 위로!
“……?”
“……!?”
“야, 제대로 해 봐! 이게 뭐야!”
“어, 어!? 이상하네? 왜 안 되지!? 이야압-!”
팟, 팟, 팟-
연속해서 섬광이 터지고 섬초는 공간 도약을 했다.
30, 20, 10cm!
점점 거리가 짧아지더니.
팟-
0cm!
제자리에서 그대로 나타났다!
“아,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어. 나 쉴래.”
섬초는 포대기 위에 발랑 드러누워 할짝, 할짝- 손에 묻은 초콜릿을 핥았다!
미호, 류호, 천문석 셋은 눈이 마주치는 동시에 생각했다.
‘당한 건가?’
‘당했구나!’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