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더라 392화>
형제 헌터 주점으로 돌아온 천문석은 305호 최설의 방을 두들겼다.
쿵, 쿵-
"최설!"
....
"정비하러 간 건가?"
고개를 갸웃하며 손잡이를 돌리자 바로 열리는 문.
"하, 이 허술한 녀석 문도 안 잠그고 나간 거야!"
그러나 문 틈으로 흩어진 옷가지, 짐이 실린 채 벽에 기대진 지게가 보였다.
깜짝 놀라 들어가는 순간 들려오는 신음.
으으으-
욕실이다!
"최설! 야, 너 무슨 일이야? 괜찮아?!"
쿵, 쿵, 쿵-
욕실 문을 두들겼으나, 신음만 계속 들려올 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천문석은 바로 욕실 문을 열었고 굳어 버렸다.
“....!”
덮개가 덮인 욕조에서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만 내민 채 잠든 최설.
최설이 잠꼬대하고 있었다.
"으으으- 따라가면 안 돼···."
"사인···. 사인 하면 안 돼···. 으으으-"
....
신음 사이에 섞인 잠꼬대를 들으니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바로 감이 왔다.
"그렇게 힘들었냐?"
천문석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최설 흑도, 삼합회 보스의 비서 출신이다.
그러나 천문석이 며칠 동안 겪은 최설은 거친 흑도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위로 올라온 무사가 아니라 엘리트 교육을 받은 책상물림에 가까웠다.
최설은 오랜 시간 무공을 익히고 무공 각성까지 해서 일신의 무위는 수준급이지만,
무림 던전에서 만난 주호처럼 끈질기게 질척질척 달라붙는 근성과 거칠게 밀어붙이는 터프함이 부족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보는 순간 한눈에 ‘이 녀석 흑도 놈이구나!’ 싶던 인상 더러운 주호와 달리,
최설은 아버지가 삼합회 보스란 것만 제외하면 인상도 선하고 행동도 회사원 티가 났으니까.
그러나 과거가 어떠하든 이제는 김철수 사무실의 직원이다.
최설은 야근을 밥 먹듯이 하고 산처럼 짐이 실린 지게를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5층까지 지고 온 소중한 사원인 것이다!
천문석은 다시 한번 다짐했다.
"최설. 내가 꼭 너에게 주호 같은 근성과 터프함을 만들어 줄게!"
그리고 욕실 안에 갈아입을 옷을 놓고, 세탁물을 내놓고 장비를 정비하고 소모품을 보충하기 위해 도시로 나갔다.
---
장비 정비와 소모품 보충을 모두 끝내니 벌써 오후 6시.
천문석은 바로 형제 헌터 주점으로 돌아왔다.
텅 비었던 주점 1층 홀이 반쯤 채워지고 하나둘 헌터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천문석은 정식 2인분을 주문하고 헌터들 사이 적당한 테이블에 앉았다.
테이블에 앉은 헌터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문 들었어?"
"무슨 소문? 광석 가격이라도 올랐냐?"
"그거 말고 위에 소문 말야."
목소리를 낮추며 하늘을 손가락질하는 헌터.
바로 옆 테이블의 헌터가 끼어들었다.
"혹시, 재금 그룹 관련된 소문이냐?"
재금 그룹이 언급되는 순간 확 모여드는 시선들!
재금 그룹은 그동안 수많은 사건·사고를 만들었고 그 사건 하나하나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던전 깊은 곳에 있는 헌터들이라도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무슨 소문인데?"
"재금 그룹이 또 사고 쳤냐?!"
"이 캔맥주 마시고 얼른 말해봐라!"
흥미진진한 시선이 쏟아질 때.
천문석이 앞에 앉는 최설.
"장비 정비 미안하다. 깜빡 잠드는 바람에···."
천문석은 고개만 까닥하고 시선이 모인 곳을 가리켰다.
"식사 네 것까지 내가 시켰다. 그리고 저 헌터 재금 그룹 관련 소문을 말하네."
"뭐? 재금 그룹!"
깜짝 놀란 최설이 고개를 돌릴 때.
1층 모든 사람의 시선을 받은 헌터가 입을 열었다.
"이거 방금 들은 소문인데···. 재금 그룹 오너 한데 숨겨진 아들이 있단다!"
하아-
에휴-
사방에서 한숨 소리가 터져 나오고 실망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또 그런 헛소문이야?"
"하, 어디서 구라를 듣고 와서는!"
"야! 내가 준 캔맥주 도로 내놔라!"
....
소문을 말한 헌터가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이번에는 예전이랑 달라!"
"뭐가 다른데? 이름이라도 밝혀졌냐?"
한 헌터가 피식 웃으며 묻는 순간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하하하하-
으하하하-
주점 1층 전체가 웃음으로 가득 찰 때,
소문을 전한 헌터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야? 너희들 벌써 알고 있던 거야?"
"어···?"
"뭐···? 너 지금 뭐라고?!"
"야! 잠깐 조용히 해! 조용히 좀 해봐!"
주점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지고 바짝 긴장한 헌터들의 시선이 다시 한번 모였다.
지금까지 재금 그룹 오너와 관련된 헛소문은 많이 돌았지만, 구체적인 이름이 언급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뜬소문이면 몰라도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해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의 심기를 건드리는 건 너무나 위험한 일어였으니까.
이제야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헌터들의 뜨거운 시선이 쏟아지고 숨 막힐듯한 침묵이 흐를 때.
"...."
"...."
소문을 전한 헌터는 만족스럽게 미소지으며 입을 열었다.
"레이 실트. 성별은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곳 부산 던전에 있을 확률이 높다!"
"부산 던전!?"
"여기에 재금 그룹 오너 아들이 있다고?!"
"아니 그런 사람이 생활 헌터가 모이는 부산 던전에는 왜!?"
경악한 외침이 사방에서 터져 나올 때,
소문을 전하던 헌터는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게 끝이 아니다! 레이 실트의 행방을 제보해주면 엄청난 보상을 해준다고 한다! 재금 그룹에서!"
초거대기업 재금 그룹의 보상!
재금 그룹은 ‘마탄 라이센스’와 ‘게이트 안정화 장치’로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부를 쌓아 올렸다.
그리고 재금 그룹은 악명이 쌓일 정도로 계산에 철저했다.
그런 재금 그룹이 보상해준다면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단 1년만 마력 물품 유통 권한, 마탄 라이센스 무료 사용권을 줘도 수백억이 넘는 이익이 떨어진다!
생활 헌터가 많은 부산 던전의 특성상 이 주점의 헌터들은 사실상 헌터라기보다는 광부에 가까웠다.
그런 그들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헌터들이 눈이 번뜩이며 당장이라도 주점 밖으로 뛰어나가 '레이 실트'를 찾으려 할 때.
소문을 전한 헌터가 테이블 위로 올라가 외쳤다.
"모두 이거 받아가라!"
촤르르륵-
주점 안에 휙 뿌려지는 전단지!
천문석과 최설이 앉은 테이블에도 전단지가 한 장 떨어졌다.
최설은 다급히 전단지를 주워 펼쳤다.
[레이 실트를 발견하면 꼭 이 [보안 번호]로 연락해주셔야 보상금을 받을 수 있습니다. 999-121-1212]
헌터들은 다급히 전단지를 주워 주점 밖으로 달려나갔고,
전단지를 받지 못한 헌터들은 소문을 전한 헌터에게 몰려들었다.
"더 없냐?!"
"야! 나도! 나도 한 장만 줘!"
....
최설은 전단지를 움켜쥐고 다급히 외쳤다.
"재금 그룹이라니!"
"우리도 바로 움직이자!"
"와! 어떻게 이런 행운이! 하하-"
....
마침 직원이 정식 2인분을 가져와 물었다.
"식사 혹시 필요 없으신가요?"
직원은 주점 밖으로 달려가는 헌터와 벌떡 일어선 최설을 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먹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야! 지금 밥 먹을 때가 아냐! 저기 밖으로 뛰어가는 헌터들 안 보여!? 곧 도시 전체에 소문이 퍼질 거야! 늦기 전에 우리도 움직여야지!"
최설이 다급히 외쳤지만,
천문석은 일어나지 않고 식판을 밀어줬다.
"응 아냐. 지금은 밥 먹을 때야. 너 지금 밥 안 먹으면 24시간 공복 수련시킨다?"
장난스러운 말투, 하지만 천문석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최설은 설득을 포기하고 바로 테이블에 앉아 빠르게 식사를 끝냈다.
그러나 천문석은 천천히 식사하고 맥주까지 마시기 시작했다.
"야, 나라도 찾고 있을게! 넌 나중에 와라!"
결국, 인내심이 끊어진 최설이 외칠 때.
천문석이 번쩍 고개를 들더니 한숨을 쉬었다.
"하아- 너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아갈래?"
"뭐?"
당황한 최설이 반문하는 순간.
툭-
앞에 놓이는 종이 뭉치.
"이건···."
종이 뭉치를 확인한 최설의 얼굴이 환해졌다.
천문석이 꺼내놓은 종이 뭉치는 각기 다른 전단지다.
그러나 이 전단지는 모두 같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재금 그룹 오너의 후계자 '레이 실트'를 찾는다는 내용!
"이렇게 대규모로 전단까지 뿌리면서 찾는 걸 보면 소문이 사실인 게 분명해! 우리도 바로 움직이자!"
최설이 희열에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순간.
천문석은 손가락을 들어 전단지 위를 짚었다.
"여기, 여기, 여기···. 이거 보고 너 뭐 느껴지는 거 없냐?"
"보안 번호? 그게 왜?"
천문석은 자신이 짚은 서로 다른 [보안 번호]를 보고도 여전히 고개를 갸웃하는 최설이 어이가 없었다.
삼합회면 유서 깊은 흑도,
그런 삼합회에서 보스 비서까지 한 녀석이 이렇게 허술하다니!
"야, 여기 보안 번호라고 적은 번호가 다 다르잖아!"
"그게 뭐?"
탁, 탁, 탁, 탁-
천문석은 전단지를 테이블 위에 한 장 한 장 넓게 펼쳐 놓았다.
종이에 펜으로 적은 조악한 전단지를 가리키며 말하는 천문석.
"그룹 내 베테랑 보안 요원이 아닌 일반 헌터들."
"마력 통신이 아닌 조악한 전단지."
"대표 번호가 아닌 서로 다른 번호."
"재금 그룹 같은 초거대기업이 그룹 후계자를 찾는 중요사안을 이렇게 대놓고 허술하게 처리한다고?"
"이거 설마?!"
최설이 이제야 이상함을 눈치채는 순간.
쾅-
천문석은 테이블을 내려치며 외쳤다.
"이건 사기! 일종의 보이스피싱이다!"
"보이스피싱?!"
"분명, 이 번호로 전화를 걸면 이렇게 말할 거다!"
=지금 거짓 제보가 너무 많아서 공탁금을 걸어두신 분의 제보만 받고 있습니다.
=걸어두신 공탁금은 전액 돌려드리니 아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
“설마···.”
"그러고는 공탁금을 낼름 먹는 거지! 정황이 전형적인 보이스 피싱 수법이다!"
"야! 그래도 재금 그룹 가지고 이런 식으로 헛소문을 낼 리 없잖아!?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최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테이블 위에 놓인 전단지를 가리키며 외치는 순간.
“쯧쯧쯧-”
천문석은 혀를 차며 대답했다.
“바로 그러니까 사기가 먹히는 거다. 심리적 허점! ‘설마, 그걸로 사기를 치겠어?’ 사기꾼들은 그걸 노리는 거야!”
천문석은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신동대문 때 기억 안 나? 이런 일은 내가 전문가다."
"....!"
순간 최설의 머릿속을 스치는 기억들!
사라진 시청 공고문과 한자가 새겨진 화살을 엮어 신동대문에 퍼트린 소문.
이 소문을 들은 신동대문의 모든 헌터가 거리로 쏟아져나와 삼합회, 칠성파, 규슈 야쿠자를 박살냈다.
그때 삼합회 위장 길드 삼합 길드를 박살낸 무리의 선두에 있던 게 천문석이고.
신동대문에서 소문을 퍼트린 사람도 천문석이었다.
천문석은 사기와 모략, 군중 선동, 여론 조작의 달인이었다!
이 순간 마음속에 남아있던 한 조각 의구심도 날아갔다.
사기꾼 마음은 사기꾼이 가장 잘 아는 법!
사기꾼 천문석이 사기라고 판단했으면 사기일 확률이 99%다!
"와! 이런 죽일 놈들!"
최설이 분통을 터트리며 와락 전단지를 구기는 순간.
천문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탄식했다.
"하- 너 같은 엘리트가 이런 잔머리에 넘어가다니···."
"...."
터질 듯 얼굴이 달아오른 최설은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였다.
최설 만이 아니었다.
끼익, 툭, 털썩-
아직 1층 홀에 남아있던 헌터들이 조용히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광기가 사라지고 다시금 평온을 되찾은 주점,
천문석은 테이블의 전단지를 챙기며 최설에게 말했다.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 주워라."
"...이 사기 전단지는 뭐하러?"
"이런 거 좋아하시는 형님이 계시거든."
"하,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최설은 어이없어하면서도 바닥에 떨어진 전단지를 주웠고,
곳곳에 앉은 헌터들도 떨어진 전단지를 주워 최설에게 넘겼다.
이렇게 모인 묵직한 전단지를 쥔 천문석은 웃었다.
이 전단지를 건네주면 환하게 웃을 한 사람이 떠오른다.
보이스 피싱 전화를 건 해외 범죄조직을 단숨에 박살 내버린 사람.
이태성 길드장.
이태성 길드장은 너무나 즐겁게 이 전단지를 뿌린 조직을 끝까지 파고들어 완전히 박살 낼 거다!
카캬카-
천문석은 정의의 철퇴를 대신 휘둘러줄 아는 형님의 존재에 통쾌하게 웃었다.
이때 제주도 삼합 호텔의 이태성 길드장은 빗나간 계획에 분통을 터트렸고.
"으으윽- 뭐가 이따위야?! 가면? 가면이라고?!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전단지가 뿌려진 원인, 헛소문 유포로 정보 획득에 성공한 유희명 대표는 희열에 찬 얼굴로 웃고 있었다.
"으하하- 당연하지! 봐라! 내 말대로 공탁금 걸고 제보하게 하니까. 제대로 된 정보가 들어왔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