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가상 화폐!
이 순간 천문석은 자신이 놓치고 있던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가상 화폐와 실제 돈의 가장 큰 차이점은 가치 보증 여부다.
국가에서 가치를 보증하는 돈과 달리.
가상 화폐는 국가에서 가치를 보증하지 않는다.
그러나 가치 보증이 없다 해도 게임 머니, 가상 화폐 모두 거래가 되고 실제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이걸 놓치고 있었다니!
순간 머릿속에서 무림 던전의 7일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장일에게 받은 '돈'.
-사기 도박장에서 딴 '돈'.
-흑사회의 도박선에서 낼름한 '돈'.
-극음도 이열이 수결한 3만냥의 ‘돈’.
-배를 타고 도망칠 때 암기 대신에 던진 '돈'.
그리고 주호의 수결이 찍힌 은자 100만냥 짜리 지급문서.
은자 100만냥.
3,000,000,000,000원.
정신이 아득해지는 엄청난 액수의 돈!
순간 천문석은 본능에 따라 움직였다.
이대로 갈 수는 없었다!
던전이 닫혀도 마경을 통해 돌아오면 된다!
엄청난 액수에 눈이 돌아간 천문석은 번개같이 몸을 돌려 무림 던전 입구로 달렸다.
"으앗! 안돼요!"
“지금 들어가시면 위험합니다!”
"에너지 준위가 요동치고 있어요!"
...
다급한 외침이 사방에서 터져 나올 때,
위연화가 땅을 박차고 뛰어 손을 뻗었다.
쿠르릉-
위연화의 장법이 천문석의 등 뒤로 쏘아졌다.
그러나 천문석은 보지도 않고 손을 빙글 돌렸다.
탁-
손과 손이 맞닿는 순간,
일순 모든 감각이 사라지는 느낌!
천문석을 향해 돌진하던 위연화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180도 회전해 뒤로 뛰고 있었다.
"...!?"
위연화가 경악하는 순간,
천문석은 던전 입구로 몸을 던졌다.
이 순간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 던전 입구를 가로막는 헌터!
"비켜라!"
천문석이 구인권으로 헌터를 단숨에 밀어내려 할 때.
파스스슥-
던전 입구를 막은 헌터의 등 뒤에서 엄청난 섬광이 터졌다.
그리고 섬광이 사라졌을 때 무림 던전 출입구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
천문석은 얼음물을 뒤집어쓴 듯 우두커니 서서 평범한 벽이 된 무림 던전 출입구를 바라봤다.
정신을 차린 천문석은 직감했다.
그대로 몸을 던졌으면 통과하는 중에 던전이 사라졌다!
돈에 홀려서 이런 멍청한 짓을 하다니!
하아-
천문석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입구를 막았던 헌터를 봤다.
이때 들려오는 귀에 익은 목소리.
"괜찮냐?"
입구를 막았던 헌터는 장철이었다.
---
"아니, 여기는 어떻게?"
천문석이 말하는 순간,
장철은 주위 연구원들을 쓱 돌아보며 말했다.
"이 헌터는 내가 데려간다. 가자"
장철 헌터가 석실을 나서려 하자,
급히 달려와 제지하는 연구원들.
"그냥 가시면 안 됩니다! 안대를 하셔야···!"
"잠시만! 아직 조사할 게 있습니다!"
"그 옷과 장비! 이 헌터가 던전을 클리어했습니다! 클리어 보상일 수 있으니 정말 조사를 해야 합니다!"
...
장철은 말을 쏟아내는 연구원들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차피 각성 던전은 끝장난 거잖아? 이제는 이곳 위치 숨길 필요 없지. 그리고 쟤가 입고 있는 옷하고 장비는 그동안의 내 지분이라고 생각해라. 문제 될 것 없지?"
말문이 막힌 연구원들이 멈춰서는 순간,
위연화가 앞으로 나서서 장철에게 고개를 숙였다.
"장철 헌터님. 오랜만에 뵙네요. 위연화라고 합니다."
"...우리가 아는 사이인가?"
의아해하는 장철에게 위연화는 예전 일을 말했다.
"철권 대협으로 무림맹에 가실 때 수행 무사 중 한 명이었습니다."
"아. 그때! 그런데 무슨 일이지?"
장철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위연화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장가장의 장일 총관이 던전 안에 남았습니다."
“...알았다.”
장철은 가볍게 고개만 끄덕이고 천문석에게 눈짓했다.
천문석이 장철을 향해 움직일 때,
위연화는 다급히 입을 열어 질문했다.
"무림 던전은 이제 끝인가요? 다시 무림 던전으로 들어갈 방법은 없는지···."
이 순간 석실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장철에게 모였다.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된 표정으로 장철을 바라보는 연구원들.
장철은 피식 웃으며 연구원들을 가리켰다.
"그런 건 저기 기업 연구원들에게 물어봐야지. 어때 무림 던전에서 무슨 비밀이라도 찾았나?"
순간 연구원들은 장철의 시선을 피했다.
장철이 관리를 위탁한 각성 스팟, 무림 던전.
무림 던전은 파고들면 들수록 보통의 던전과 너무나 달랐다.
그래서 관리를 위탁받은 길드들은 장철에게 알리지 않고 몇몇 기업과 함께 무림 던전을 조사하고 있었다.
지금 이곳의 연구원들은 장철의 눈을 피해서 무림 던전을 조사하던 기업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장철 헌터는 모든걸 알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장철 헌터.
일반인뿐만 아니라 헌터 업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헌터다.
그러나 무림 던전을 조사하며 알게 된 그의 과거 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힘과 권력, 인맥 무엇으로도 눈앞의 장철 헌터를 제지할 수 없었다.
“...”
무거운 침묵이 이어지자,
장철은 석실 안을 쓱 돌아봤다.
십여 명의 연구원.
예전에 한번 봤던 위연화.
던전 입구로 연결됐던 계측장치.
간이침대에 뉘어진 예비 각성자들.
그리고 무복과 가죽신 위에, 털가죽 옷과 털모자를 쓴 무림인 복장의 천문석.
천문석은 별다른 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장철은 천문석에게 슬쩍 눈짓하며 연구원들에게 선언했다.
"이제 나는 여기서 손을 떼겠다. 남은 건 알아서 정리해라."
장철은 몸을 돌려 석실 밖으로 걸었고,
천문석은 재빨리 장철을 따라나섰다.
등 뒤에서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들.
그러나 천문석은 묵묵히 걸었고,
곧 인공적인 바닥이 사라지고 천연동굴이 나왔다.
이때 들려오는 장철의 목소리.
“안에서 괜찮았냐? 어제저녁. 박혁한테 마력장 수치가 요동을 친다는 연락을 받고 왔는데···.”
어제저녁이라면 자신과 던전 보스 주호가 본격적으로 싸우기 시작했을 때다.
그러고 보니···.
무림 던전이 클리어되면서 최대 지분을 가진 장철이 큰 피해를 봤다.
이거 어떻게 말하지.
천문석은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직설적으로 말했다.
"단혈철검 주호. 던전 보스가 패배했습니다. 제가···."
장철은 손을 들어 천문석의 말을 막고 손목에 걸린 헌터용 시계를 조작했다.
구으으응-
순간 시계에서 뻗어 나온 마력장이 장철과 천문석 주위를 감쌌다.
이미 한번 겪었던 소리와 시야를 차단하는 마력장이었다.
그리고 장철의 입에서 생각도 못 한 말이 나왔다.
"하- 주호 그 얍삽한 녀석. 절대로 안 질 거 같아서 보스로 지정해 놨는데."
"네?! 보스로 지정이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이야?!
천문석이 깜짝 놀라는 순간,
장철은 천문석의 옷을 가리켰다.
"던전 클리어 네가 한 거 맞지? 그 옷을 보니까 보상도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클리어하고 바로 나온 것 같은데?"
장철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천문석은 지금 입고 있는 옷과 대환단이 어떻게 던전을 통과했는지 짐작이 갔다.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던전을 클리어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 같았다.
"직접적이지는 않은데···. 제가 연관된 거는 맞습니다. 죄송합니다."
사과하던 천문석은 문득 드는 생각에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장일 총관이 장가장을 지키겠다고 남았습니다. 출입구가 사라져서···."
"너무 걱정하지 마라. 장일은 나한테 해결방법이 있으니까."
"네? 출입구가 사라졌는데 방법이 있다고요?"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고개를 들자,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는 장철이 보였다.
"사실. 무림 던전은 던전이 아니거든. 무림은 게이트 너머 이세계와 같은 다른 세계다."
“...네?!”
천문석은 자신도 모르게 외쳤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야?
무림 던전이 던전이 아니라고!?
그럼 던전 보스 주호, 던전 출입구, 아이템은 다 뭐야?
---
천문석이 경악해 굳어있자,
장철은 천문석의 어깨를 툭 치며 말했다.
"나가면서 이야기하자."
다시 동굴을 걷기 시작하는 장철과 천문석.
"...이게 어떻게 된 건가요?"
천문석의 질문에 장철은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미리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오래전에 정보공개가 금지된 사항이거든. 1세대 헌터 중에서도 극히 일부. 헌터부에서도 관련자만 알고 있어.”
장철은 동굴 안쪽을 슬쩍 보며 말을 이었다.
“여기 무림 던전처럼 개방형 던전이라고 알려진 곳 중에는 이세계가 섞여 있어. 지구에서 게이트로 이곳 이세계로 이어지는 것처럼. 던전 입구로 들어가면 이세계로 나오는 거지."
"그럼 던전 출입구와 던전 보스 주호는···?"
"박혁 기억하지? 재금 그룹 이사. 이게 좀 복잡한 이야긴데. 걔가 일종의 출입구를 뚫었다. 그러면서 단혈철검 주호에게 클리어 트리거를 심어 놓았다. 던전처럼 말이지."
순간 천문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출입구를 뚫었다고?
한번 입구를 뚫었다면 당연히 두 번도 가능할 거다!
천문석이 기대감 어린 눈으로 장철을 보는 순간,
장철은 천문석의 내심을 짐작하고 고개를 저었다.
"이게 사실 뚫었다기보다는 이미 있는 폐쇄형 던전을 확장하고 출입구를 안정화한 거에 가깝다. 그리고 이곳 무림 던전은 너무 알려졌어. 아까 연구원 중에 심상치 않은 놈들도 있고 지금 박혁도 바빠서···. 좀 잠잠해지면 다른 곳의 입구를 사용하게 할 생각이다."
"다른 곳에 입구가 있다고요?"
"이세계로 이어지는 게이트도 전 세계에 있잖아?"
장철의 대답을 듣는 순간,
천문석은 머리를 한 대 맞은듯했다.
게이트 안정화 권역 밖에서 무작위로 나타나는 균열과 던전들!
"설마 지구에 열리는 던전 중에 무림 던전과 이어진 던전이 있는 건가요?"
장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한국 같은 경우는 빠르게 클리어돼서 금방 사라지지만. 다른 나라 같은 경우 몇몇 던전은 여러 이유로 방치된 상태다. 그중 하나에 입구를 뚫을 생각이다."
"그건 어디에?"
“남중국.”
순간 천문석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군벌화된 헌터들이 지배하는 남중국.
남중국은 마경과 던전, 균열이 어지럽게 뒤섞인 무법지대였다.
미국의 옐로스톤, 멕시코의 구리협곡 마경 정도는 아니지만 지금 이곳처럼 쉽게 접근할 수는 없었다.
‘하필 그곳에···.’
장철은 천문석의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그쪽에 아는 사람도 있고. 거기 요즘은 안정화되고 있어. 장민이 협상 중이니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걔들 상황도 안 좋고 말야."
장철은 웃음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 남중국 던전으로 들어온 헌터 애들 이야기를 들었는데. 무림에 적응을 전혀 못 하고 있어. 사파, 흑도에도 선이 있는데 아무한테나 시비 걸고 다니다가 무림 공적으로 찍혀서 몇 번 토벌도 당했더라. 하하하-"
"..."
무림 던전에 다시 들어갈 수 있게 됐다.
그러나 기뻐하기도 잠시 천문석은 생각도 못 한 이야기에 정신이 멍해졌다.
단지 허상일 뿐이라던 무림 던전은 또 다른 이세계였고,
단혈철검 주호는 출입구를 만들며 지정한 던전 보스였다.
‘아니 그럼 뭐가 어떻게 되는 거야?’
자신은 젊은 무사 이원과 흑사회주 여량위에게 무공을 전했고,
오랜 친우 이세기에게 천검의 검혼을 넘기고 대환단을 건네줬다.
전생의 기억 그대로였던 무림.
그런데 자신이 과거로 가면서 많은 것들이 변해버렸다.
-내가 과거로 가서 역사를 바꾼 건가?
-타임 패러독스 때문에라도 안 될 텐데.
-그러면 과거가 아니라 평행 세계로 갔던 건가?
...
답이 없는 수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전생에 대한 의문을 풀었다고 좋아했는데 오히려 수많은 의문이 생겨난 상황.
천문석이 복잡한 머리를 부여잡는 순간.
복잡한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은자 100만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