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수레가 사라지자 마차 지붕에 눕는 천문석.
침엽수 가지가 드리워진 하늘에는 한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태양이 떠 있었다.
천문석은 기지개를 켜며 크게 하품을 했다.
추적은 따돌렸고,
이제 곧 무림 던전에서 나간다.
수많은 사건·사고를 겪은 무림 던전.
그러나 아쉬움은 느껴져도 미련은 없었다.
천문석은 문득 하늘로 손을 뻗어 태양을 움켜잡았다.
손안에 잡히는듯한 열기,
아지랑이 지듯 피어오르는 내력.
일기일원공!
지난 이틀 연이은 격전을 헤쳐나오며,
일기일원공이 어느새 벽을 넘었다.
지금 느끼기에는 3성을 넘은 게 확실하다.
며칠 고생 좀 했다고 3성을 넘어서다니!
역시 고난 속에서 성장하는 내공심법, 일기일원공다웠다.
게다가 체력을 쥐어짜며 설원을 달리고 격전을 치르며 혼백에 새겨진 전투 감각이 깨어났다.
무림 던전 안에 들어오기 전과 비교해 월등히 강해졌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이것도 얻었다.
문득 미소 지으며 품 안으로 손을 넣었다.
품 안에서 나온 손에 들려있는 나뭇가지 검.
휘이이-
천문석은 휘파람 소리가 나는 나뭇가지 검을 휘두르며 지난 7일을 생각했다.
던전의 모든 것은 허상이라고 하지만,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 말이 믿기지 않았다.
이세기로 개명한 젊은 무사 이원.
흑사회주 여량위.
흑기당주 당무, 극음도 이열.
응룡채주 마일도.
던전 보스 압샵한 주호.
장가장 장일 총관.
기억에 남은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오랜 친우 천검 이세기.
악연도 있고 선연도 있으나,
은원은 이미 흘러가고 남은 것은 기억뿐.
무림 던전이 클리어되고 입구가 사라지면 아마도 이들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삶은 예측불허.
언젠가 어디선가 이들을 다시 보게 될지도 모른다.
전생의 오랜 친우 이세기를 다시 만난 것처럼 말이다.
천문석은 문득 하늘을 바라보며 마지막 작별인사를 했다.
“모두 잘 살아라. 그리고 언젠가 다시 보자.”
---
휘유우우-
흑기당의 매가 우는 순간 설산 능선에서 오르는 흑기!
"북동쪽이다!"
설원 곳곳에서 외침이 터져 나오고,
흑기당의 무사들과 극음도의 무사들이 날듯이 달렸다.
이들은 곧 흑기당의 매가 원을 그리는 곳에 도착했고.
다시 한번 허탕을 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흑기당의 매가 원을 그리는 하늘 아래에 있는 것은 장가장의 빈객이었다.
"나 철도 권무혁! 오늘 이곳에서 철권 대협께 받은 은혜를 갚겠다!"
장가장의 빈객 권무혁이 대도를 뽑으며 외치는 순간.
툭-
나뭇가지를 밟고 달려온 극음도 이열이 설원에 내려섰다.
"이번에도 장가장의 빈객이었습니다!"
흑기당주 당무가 고개를 숙이며 외치자,
극음도 이열의 시선이 철도 권무혁에게 향했다.
이열의 서릿발 같은 시선이 닿는 순간,
엄청난 위압감에 전신을 부르르 떠는 권무혁.
훙-
권무혁은 대도로 허공을 가르며 외쳤다.
"내 입에서는 한마디 말도 나오지 않으리라! 싸우자!"
권무혁이 대도를 들어 올리는 순간,
극음도 이열의 손이 움직였다.
"...!"
대도를 들어 올리던 권무혁이 굳어졌다.
포권을 취한 극음도 이열!
이열은 정중한 어조로 외쳤다.
"강호의 은원은 한낱 목숨보다 무거운 것! 장가장의 금권 대협께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부디 제가 은혜를 갚도록 도와주십시오!"
권무혁은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하나하나가 명문 거파의 힘을 넘어선다는 마도 18문의 일문들.
그중에서도 천마의 자리를 노린다는 극음도의 대공자가 허리를 숙였다니!
이때 다시 한번 들려오는 매 울음소리.
휘유우우우-
극음도 이열은 번쩍 고개를 들어 주위 무사들에게 외쳤다.
"모든 힘을 동원해서 반드시 찾아야 한다! 금권 대협은 은인이시다!"
"존명!"
...
사방에서 외침이 들려오고 무사들이 달리는 순간,
극음도 이열은 부러진 칼, 극음도를 뽑았다.
[관음을 보았는가?]
장난스러운 필체로 적힌 한 줄의 문장.
그러나 어떤 영약, 무공으로도 이루지 못한 가문의 오랜 염원에 이 한 줄의 문장으로 닿았다.
관음을 느끼는 순간,
인지를 넘어 벼락 치듯 깨달은 무공.
관음천수도!
이열은 가문의 염원이 이뤄졌다는 걸 깨닫는 동시에 헤아릴 수 없이 큰 은혜를 입었다는 걸 알았다.
경박함, 놀리는 듯한 말투, 사기꾼 같은 언행은 모두 위장.
금권 대협은 우연히 극음도의 정수를 얻은 이가 아니라,
극음도의 일문이 그토록 찾던 초대 조사의 후인이었다!
초대 조사께서 극음도를 전하셨고,
그 후인, 금권 대협은 다시 극음도를 넘어서는 무공을 전하셨다.
순간 이열은 전신이 격동으로 떨리는 것을 느꼈다.
‘헤아릴 수 없이 커다란 은혜!’
강호의 은혜는 무겁고도 무거운 것.
그중에서도 가장 큰 은혜 가르침을 받았으니 반드시 보답해야 했다!
이열은 칼을 늘어트린 채 포권을 취하며 진심이 담긴 절절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 극음도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금권 대협께 조금의 위해도 끼치지 않겠습니다. 부디 은공께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게 무슨···."
장가장의 빈객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극음도 이열이 금권 대협을 찾아 설산을 뒤지고 있을 때.
금권 대협 천문석은 무림 던전의 출구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
예비 각성자를 태운 마차는 바위 협곡에서 멈춰섰다.
그리고 바위 협곡을 달리기 시작한 인솔자 위연화와 6명의 예비 각성자들.
위연화는 협곡 안 바위로 위장된 동굴 입구를 열었고, 6명의 예비 각성자들은 바로 동굴로 들어갔다.
"제 뒤로 바짝 붙어 이동합니다. 가능한 한 빨리 이동해야 합니다."
위연화 다급한 모습에 예비 각성자들은 의아해했다.
"혹시 던전에 무슨 문제가 있는건가요?"
"지금 몸이 좀 이상한데···."
"너무 급해 보이는데?"
...
예비 각성자들의 표정을 본 천문석은 깨달았다.
'무림 던전이 클리어됐다는 것을 알리지 않았구나!'
"별일 아닙니다. 일정이 지연돼서 그렇습니다."
위연화는 예비 각성자들을 안심시키고 천문석을 봤다.
"...일행 후미를 맡아줄 수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천문석은 순순히 대답했고,
일행은 바로 이동을 시작했다.
복잡하게 얽힌 동굴 안을 능숙하게 걷는 위연화.
동굴 안을 1시간가량 이동하자 막다른 길에 도착했다.
위연화는 들고 있던 등을 머리 위로 들고 벽 곳곳을 두들겼다.
그륵, 그륵-
버튼을 누른 것처럼 밀려 들어가는 벽.
위연화는 밀려 들어간 벽에 손을 두 손을 올리더니 옆으로 밀었다.
그르르륵-
순간 미닫이문처럼 열리는 막다른 벽.
일행은 바로 벽 안으로 들어갔고,
이미 한번 본 이질적인 스크린을 발견했다.
무림 던전에 들어왔던 입구와 똑같다.
스크린을 보는 모두는 깨달았다.
무림 던전의 출구!
그런데 거대한 벽화 크기였던 던전의 입구가 보통의 문 정도 크기로 줄어들었다!
"이게 무슨···?"
예비 각성자들이 경악해서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위연화는 외쳤다.
"바로 나갑니다! 달려!"
예비 각성자들은 반사적으로 달려 던전 출구로 몸을 던졌다.
하나, 둘 빛과 함께 사라지는 예비 각성자들.
천문석도 이들을 따라 던전 출구로 뛰어들었다.
후두둑-
순간 던전 출구에서 들려오는 소리.
문득 시선을 내리자 보였다.
이질적인 스크린에서 떨어져 내리는 옷가지와 종이 뭉치, 반지와 목걸이, 단검 같은 물건들.
“..!”
던전에서는 아이템이 아닌 물건은 가지고 나가지 못한다.
예비 각성자들이 가지고 있던 아이템이 아닌 물건들이 떨어져 내린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은?
적예의 나뭇가지 검!
천문석이 다급히 몸을 멈추려는 순간, 등 뒤에 닿는 누군가의 육체.
위연화.
천문석은 뭘 어떻게 할 새도 없이 위연화와 함께 던전 출구로 들어갔다.
---
타다다다닥-
정전기가 올라오듯이 따끔거리는 전신.
갑자기 느껴지는 현기증에 휘청 꺾이는 다리.
천문석이 재빨리 균형을 잡고 서는 순간.
단단한 석실 바닥에 쓰러진 예비 각성자들이 보였다.
흩어진 은자 사이 벌거벗은 채 기절한 예비 각성자들!
"던전에서 사람이 나왔다!"
"관리자! 나왔습니까?"
"바로 인원확인부터!"
...
이 순간 사방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천문석은 주위를 돌아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무림 던전으로 들어갔던 그 석실이었다.
계측장치만 있던 빈 석실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십여 명의 연구원들이 모여있었다.
연구원들이 사방에서 달려와 쓰러진 예비 각성자들의 몸을 담요로 덮고 인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때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이번 기수 6명 전원 나왔습니다. 이번 기수 인솔자. 위연화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위연화에게 모이고 질문이 쏟아졌다.
"도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말도 안 되는 수치가 나왔어요! 안에서 이상 현상이 일어난 겁니까?"
"혹시 던전이 클리어된 건가요?!"
"그럴 리가 없다니까. 단혈철검을 이기는 건 불가능해!"
"거점은 어떤가요? 장가장은 안전한가요?"
"무림 던전 관리자는 어디에 있죠?"
"우선 담요부터! 벗은 거 안 보여요?"
연구원 중 한 명이 외치자,
위연화의 벗은 몸에 담요가 덮였다.
천문석은 고개를 돌리며 한걸음 물러서는 순간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예비 각성자들과 인솔자 위연화까지 모두가 벌거벗은 채 담요를 덮고 있다.
천문석은 문득 손을 들어 올렸다.
장갑 낀 두 손.
손에서 몸으로 시선을 이동하며 손으로 만져본다.
두툼한 털가죽 옷, 머리에 쓴 털모자.
품 안에서 자리한 나뭇가지 검과 작은 상자.
그리고 검대에 걸린 전낭에서 들려오는 소리!
철그렁-
순간 석실 안 모든 연구원의 시선이 천문석에게 집중됐다.
"저 사람···!"
"저 옷! 저 장비!
"아이템!?"
"아니 분명 무림 던전의 아이템은···."
...
사방에서 다급한 외침이 쏟아질 때,
천문석은 홀린 듯이 전낭을 끌러서 열었다.
'은자!'
전낭 안에는 던전에서 쓰고 남은 은자 몇 개가 그대로 있었다.
순간 기절한 예비 각성자 주위에 흩어진 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 은자 설마!"
이 순간 질문을 쏟아내던 연구원 중 한 명이 바닥에 떨어진 은자를 흘낏 보고 대답했다.
"무림 던전의 아이템 은자입니다. 각성 던전 안에 거점을 만들기 힘든 이유가 저것 때문이죠. 아무리 정밀 주조를 해도 아이템은 복제가 안 되니까. 직접 안에서 벌어야 합니다."
"은자가 아이템이라고요!"
"네. 무림 던전의 은자는 아이템입니다. 그보다 질문할 게 있습니다."
순간 정신이 멍해지고,
사방에서 들려오던 소리가 사라졌다.
"...!"
"... ... ...!"
음 소거한 영상처럼 소리 없이 입만 움직이는 연구원들이 보일 때.
머릿속에서 폭발적으로 튀어나오는 기억들!
-무림 던전의 기반 장가장.
-안전한 각성 스팟, 안전한 장원을 몇 번이나 강조하던 장일 총관.
-무림 던전에서는 돈 벌기가 정말 힘들다고 앓는 소리를 하던 모습.
천문석은 은자를 움켜잡았다.
1냥짜리 은자.
한국에서 은 1냥, 37.5g의 가격은 대략 3만원.
은자 1만냥 이라고 해봐야 은값은 3억 원.
가공비가 아무리 비싸다고 해도 천만원도 안 된다.
은자 1만냥은 3.1억원.
3.1억원이 일반인에게는 엄청나도 대형 길드에는 푼돈이었다.
그런데도 던전 안 거점은 장가장 하나뿐이고,
던전 관리자 장일은 돈이 없어서 전전긍긍했다.
그 의문이 지금 풀렸다.
무림 던전에서는 은자, 돈이 아이템이었던 거다!
천문석은 쥐고 있던 은자 1냥을 연구원에게 내밀었다.
500원 동전 5개 정도 무게의 1냥짜리 은자!
"이거 여기서 얼마인가요?"
순간 질문을 쏟아내던 연구원이 은자를 힐끗 보고 대답했다.
"1냥짜리 은화네요. 물량 자체가 나오지를 않는데 보통 은화 1냥에 300만 원 정도 거래됩니다. 액수가 크면 더 비싸게 사고요."
1냥에 300만원!
이런 미친! 이거 금값이잖아!?
천문석은 정신이 멍해졌다.
아이템 은자 1만냥은 3억원이 아니었다.
'300억+a'이다!
순간 주호가 수결한 지급문서를 들고 설원을 달리던 기억이 떠올랐다.
'게임 머니, 게임 머니, 게임 머니······.'
그때 나올락 말락 나오지 않았던 목소리가 지금 이 순간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가상 화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