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0/14)

 막사의 설치를 마친 태람과 그의 일행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모닥불 주변에 털썩 주저앉았다. 연속되는 전투를 벌인 터라 다들 행색이 엉망이었다. 들고 있는 무기와 옷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몬스터의 피로 범벅이 돼 있었으며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드러나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 조금만 이동해도 사방에서 몬스터가 득달같이 몰려드는 통에 방관하던 카이란과 루시아스도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 마왕성까지 아직도 한참 남은 상황이었다.

  태람은 여러 가지 의문을 차례차례 떠올렸다. 전투에 참여하지 않는 자신이 이렇게 지칠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괜찮을까? 원래 마왕성까지 이렇게 길고, 힘들었나? 이럴 리가 없는데? 찜찜한 표정을 한 태람에게 세호가 다가와 속삭였다. 

  “원래도 이랬습니까?”

  “뭐가?”

  “지금 상황 말입니다. 마치 누군가가 우리를 노리고 몬스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잖아요.”

  “모르겠어. 원작에서 마왕성까지 가는 길은 순탄했어. 이렇게 늘어지지는 않았는데….”

  “누군가가 개입했을 가능성은 없을까요?”

  “그럴 리 없어….”

  태람은 자꾸만 떠오르는 의문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빈칸으로 둔 설정이 채워진 적은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새로운 등장인물은 말도 안 됐다. 하지만 그것 외에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할 방법이 없긴 했다. 

  그런 태람의 생각을 끊은 것은 프랑의 나긋나긋한 목소리였다.

  “두 분이서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하세요?”

  “아….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의논했어요.”

  태람이 어색하게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세호가 복병이었다.

  “너와는 상관없다.”

  “저는 태람 님한테 물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동료인데 상관없다뇨?”

  “쓸데없이 나서지 마라. 어제도 네가 억지로 태람을 옆에 두어서 그가 피해를 보았잖아.”

  “피해를 준 건 왕자님 쪽이겠죠. 이틀 전, 왕자님 때문에 태람 님이 크게 다칠 뻔한 건 기억 안 나세요?”

  “그건! 네 형편없는 마법 탓이었다.”

  “뭐라고요!”

  갑자기 싸우기 시작한 두 사람을 보며 태람은 어이가 없었다.

  어제 일은 세호가 고의로 프랑에게 식인 꽃을 집어던져서 생긴 문제였다. 프랑이 마법으로 꽃을 반으로 갈랐고, 옆에 있던 태람이 그 잔해를 그대로 뒤집어썼다.

  이틀 전에 일도 사정은 비슷했다. 언데드 무리를 만나 대활약을 펼치던 프랑이 성역 선포 마법을 써서 교묘하게 세호 쪽으로 언데드들을 몰아넣었다. 거기에 말려든 태람은 정말로 죽을 뻔했었다.

  이제는 일상이 된 세호와 프랑의 싸움을 누구도 말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태람조차 질려서 뒤로 물러서 상황을 관망할 뿐이었다.

  그때, 아밀이 벌떡 일어났다.

  “식사를 준비할게요! 제가 요리할 동안 다른 분들은 씻으러 가시면 어떨까요?”

  “저도 도울게요. 아밀. 그래도 이 중에서는 제가 가장 멀쩡하니까요.”

  태람의 말에 다들 저마다 한마디씩 말을 얹기 시작했다.

  “태람 님이 요리요? 힘들지 않을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다.”

  “나도 반대. 태람은 먹는 건 귀엽게 잘하지만 만드는 건 서툴잖아.”

  “그대는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어.”

  말수가 적은 루시아스까지 합세하니 무시당한 것 같아 태람은 살짝 울컥했다. 나도 나름대로 모두를 생각해서 그런 건데 다들 너무하네.

  “가요. 아밀! 다들 싸우지나 말고 깨끗하게 씻고 기다려요.”

  모두를 한차례 째려보는 것으로 불편함을 표시한 태람은 성큼성큼 앞서 걸었다.

  “앗! 태람 님.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에요.”

  아밀의 뒤를 따라 도착한 막사 뒤편에는 최소한의 형태를 갖춘 주방이 있었다. 임시로 만든 화구와 각종 향신료, 도마까지 있었다.

  “이걸 다 가지고 온 거예요? 들고 오느라 무거웠겠네요.”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긴. 아밀이 나보다 힘이 더 셌지. 태람은 금방 납득했다. 실제로 아밀은 자신의 몸집보다 몇 배나 큰 짐을 가볍게 들고 다녔다. 

  “태람 님과 함께 요리하게 돼서 너무 기뻐요.”

  들뜬 표정의 아밀이 어디선가 주먹 두 개 정도 크기의 주머니를 가지고 왔다. 

  “그게 뭐예요?”

  “보시면 알아요.”

  아밀이 주머니를 열어 탈탈 털자 새우, 키조개, 꽃게. 문어, 홍합, 오징어 등 다양한 바다의 식재료들이 도마 위에 와르르 쏟아졌다.

  “엄청나네요. 그거 마법 도구 맞죠?”

  “네! 카이란 님이 선물해 주셨어요. 이 주머니 안에 재료를 넣으면 바로 얼어서 신선함이 유지돼요. 혹시 몰라서 몬스터를 종류별로 넣어둔 주머니도 가지고 왔어요.”

  태람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알아버렸다고 생각했다.

  아밀은 몬스터 요리에 진심이구나, 그냥 잊자.

  “오늘 메뉴는 뭔가요?”

  “해산물 찜이에요!”

  “맛있겠네요. 저는 뭘 하면 되죠?”

  “해산물들을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어주세요, 그러면 제가 손질할게요. 불순물이 남으면 배탈이 날 수도 있으니 꼼꼼하게 부탁드려요.”

  “네, 알겠어요.”

  태람은 먹이를 씻는 라쿤처럼 해산물을 벅벅 씻기 시작했다.

  “잘하시네요.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아요. 이제 저한테 주세요,”

  태람이 열심히 씻은 재료를 아밀에게 넘겼다. 아밀은 능숙한 손길로 순식간에 재료를 손질한 뒤 간단하게 양념해 냄비 속에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막사를 가득 채웠다.

  “맛있는 냄새….”

  냄비 속이 너무 궁금했던 태람은 슬쩍 뚜껑을 열려고 했다.

  “안 됩니다. 그러면 풍미가 전부 날아가 버려요.”

  “미, 미안해요.”

  처음 보는 아밀의 단호한 표정에 얼이 빠진 태람은 어색하게 웃으며 뚜껑에 뻗은 손을 살며시 내렸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두 사람은 육수가 끓기를 기다리며 수다의 장을 열었다.

  “태람 님은 네 분 중 어떤 분이 좋으세요?”

  아밀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 그게 무슨….”

  “깊은 의미는 아니에요. 그냥 태람 님을 중심으로 모인 파티잖아요. 그래서 태람 님이 어떤 분과 마음이 가장 잘 맞나 궁금해요.”

  “글쎄요. 아무래도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난 분이라 그런지 왕자님이 가장 가깝게 느껴지네요.”

  별생각 없이 내뱉은 태람의 말을 듣고 아밀이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키릭태람…. 귀축공과 꽃수 조합은 왕도…. 역시 이 조합이 공식….”

  태람은 아밀의 말을 못 들은 척 화제를 옮겼다.

  “그나저나 아밀은 정말 요리를 잘하네요. 역시 사용인 육성 학교 수석다워요.”

  “네. 부끄럽지만 좋은 성과를 거뒀어요. 그런데 태람 님이 제가 수석인 걸 어떻게 아세요?”

  “그게…. 와, 왕자님이 알려주셨어요. 제가 있던 곳에도 대학교라는 교육기관이 있거든요. 그 이야기를 하다가 듣게 되었어요.”

  “그러시구나. 흥미롭네요. 태람 님도 그곳에 다니셨나요?”

  “저는….”

  태람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대학생이었나? 그랬나? 그러고 보니 보석을 마지막으로 확인한 게 언제였더라? 대체 어디까지 기억을 잃어버린 거지?

  딱딱하게 굳어버린 태람의 얼굴을 아밀이 걱정스럽게 올려다봤다.

  “태람 님?”

  “미안해요. 피곤해서 잠시 멍해졌네요. 육수 다 된 것 같은데요?”

  “타기 전에 덜어야겠네요. 이따가 태람 님한테는 특별히 해산물을 더 많이 덜어 드릴게요.”

  “기대할게요.”

  요리가 다 되어 식탁으로 돌아가니 세호와 프랑이 아직도 다투고 있었다.

  “다들 식사하세요!”

  커다란 냄비가 식탁 위에 올려졌다. 맛있는 냄새에 이끌렸는지 일행들이 식탁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아밀은 앞 접시에 국자, 집게까지 순식간에 완벽한 세팅을 했다.

  “잘 먹겠습니다. 태람 님이 만드신 요리라니 기대되네요.”

  “부끄럽네요. 거의 아밀이 했는데요. 뭐….”

  “좋은 냄새가 나! 너 의외로 요리 잘하는구나.”

  “의외는 빼주세요. 카이란.”

  “아밀이 옆에 있었으니 믿을 수 있겠군.”

  “조용히 하고 먹어요.”

  “고생했다.”

  “맛있게 드세요. 루시아스.”

  마침내 냄비 뚜껑이 열렸다. 해산물 특유의 고소하고 짭조름한 바다의 향이 확 하고 퍼지자 모두가 침을 꿀꺽 집어삼켰다. 태람과 아밀도 자리에 앉아서 해산물을 정신없이 먹어 댔다.

  “태람 님, 이것 좀 드세요.”

  프랑이 탱글탱글한 새우 살을 발라 태람의 입안에 쏙 넣어줬다.

  “이것도 먹도록.”

  이번에는 세호가 조개를 까서 부드러운 속살을 태람의 접시에 올려줬다.

  “감사합니다.”

  입을 우물거리며 맛있게 먹는 태람. 그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보던 세호와 프랑은 경쟁이 붙었는지 껍질을 까고, 벗기는 것에 속도를 붙였다.

  한참을 주는 대로 받아먹기만 하던 태람은 결국 포크를 내려놓았다.

  “두 사람 다 이제 그만 주세요. 저 배불러요.”

  “아직 많이 남았는데….”

  “너는 말랐으니 더 먹어도 된다.”

  “진짜 더 못 먹겠어요.”

  “괜히 왕자님까지 나서서 이렇게 되어 버렸잖아요.”

  “하. 웃기는군.”

  태람의 단호한 거절에 아쉬움을 숨기지 못한 프랑이 세호를 향해 원망의 한 마디를 내뱉었고, 2차전, 아니 3차전이 시작되었다. 그 꼴을 지켜보던 태람은 서로 왁왁하며 싸우는 두 사람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산책 좀 다녀올게요.”

  밖으로 나가는 태람을 본 카이란은 먹고 있던 새우를 통째로 삼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같이 가! 혼자 가면 위험해!”

  “네. 좋아요.”

  “신난다.”

  태람은 마냥 해맑은 카이란의 모습이 귀여웠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나란히 산책길을 나섰다.

  “밤이라 그런지 더 어둡네요.”

  어두침침한 하늘에 풀 한 포기 없는 척박한 대지. 습하고 텁텁한 공기 속에는 죽음이 느껴졌다. 새삼스럽게 이곳이 마계라는 것을 실감했다.

  마계라고 해서 꼭 스산하고 음울할 필요는 없었는데 말이지.

  눈 앞에 펼쳐진 과거의 업보를 마주한 태람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꾸는 악몽도 자업자득인 것 같았다.

  “우울한 감정이 흘러들어 와. 아주 많이.”

  “그냥 답답하네요.”

  “답답해? 왜?”

  “제가 잘하고 있는지 자신이 없어졌어요.”

  눈을 감으면 아른거리는 악몽이 태람을 질책했다.

  가슴에 구멍이 뚫려, 피를 토하면서도 헌신하려던 루시아스의 모습. 그를 희생 시켜야 하는 상황이 무서웠다. 불우한 과거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나를 원망하던 프랑의 모습. 그를 끝까지 책임져줄 수 없어서 미안했다. 그리고 한 곳에 얽매이기 싫다며 자유를 갈구하던 카이란의 모습.

  “나한테만큼은 미안해하지 마. 그리고 꿈은 꿈일 뿐이야.”

  태람의 마음속에 있는 죄책감을 읽어 낸 카이란이 한없이 바닥으로 하강하는 태람의 생각을 끊어냈다.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미안해요.”

  “아프지만 좋아.”

  “아픈데 좋다고요?”

  태람은 두서없는 카이란의 말에 의문을 표했다.

  “응! 네가 슬퍼하니까 막 가슴 한쪽이 콕콕 아팠어. 그런데도 하나도 싫지 않았다. 이게 형이 말한 사랑인가 봐.”

  엉뚱하지만 귀여운 카이란의 말에 태람은 풋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도 나를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저도 카이란이 좋아요.”

  “나는 진지해….”

  태람을 직시하는 카이란의 두 눈은 한없이 진지했다. 태람은 허투루 대답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카이란이랑 있으면 즐거워요.”

  “지금은 그걸로 만족할게.”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카이란이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여 태람의 가슴팍에 머리를 가져다 댔다. 태람은 카이란이 원하는 대로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줬다. 부드러운 감촉이 기분이 좋았다. 골골거리는 고양이처럼 나른해진 카이란이 태람에게 조용히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안심해.”

  “…고마워요.”

  태람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카이란에게 진심으로 고마웠다. 마계에 있어도 태양처럼 해맑은 카이란. 그와 있는 시간이 편안했다.

*

  마왕성에 가까워질수록 길은 복잡해지고, 일행은 헤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최근에는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대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군.’

  태람은 어제 루시아스가 지나가다 한 말을 떠올리며 그가 기운을 푼 것 같다고 추측했다. 그 말 직후 일행에게 접근하는 몬스터가 싹 사라졌으니 말이다. 카이란이 묘하게 루시아스를 의식하게 된 것도 딱 그쯤이었다.

  아마 카이란은 뭔가 느꼈을 거야. 그나저나 엄청나네. 드래곤 사냥 때는 파티원 중에 드래곤이 있었고, 마왕 토벌 때는 마왕이 있어.

  태람은 새삼스럽지만 이 상황이 웃기다고 생각했다.

  “이러다가 밤이 되어 버리겠어요.”

  “많이 힘드신가 보네요. 탐색 마법이라도 써 볼까요?”

  몬스터가 안 나오는 건 좋았으나 오랫동안 걸어서인지 태람의 몸은 한계에 달해있었다.

  “네. 부탁드릴게요. 저 때문에 죄송해요.”

  “아니에요. 어차피 더 어두워지기 전에 잘 곳은 찾아야 하니까요. 주신 리안이여. 저희에게 올바른 이정표를!”

  여느 때처럼 프랑은 빛으로 둘러싸였다.

  “어때요? 프랑? 뭔가 보여요?”

  “그게….”

  기대에 찬 태람의 말에 프랑이 곤란한 듯 웃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동굴을 하나 발견했는데 앞으로 2시간은 걸어가야 할 것 같아요.”

  충격적인 사실에 태람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루시아스에게 ‘너희 집에 놀러 가고 싶은데 당장 안내해 줄래’라며 멱살이라도 싶은 심경이었다.

  “힘드시면 제가 도와드릴까요?”

  “사양하겠습니다.”

  프랑의 제안은 달콤했지만 수락하는 순간 다른 사람들도 우르르 몰려올 것을 알기에 태람은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미 힘든데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지속해서 치유 주문을 받고 있어서 어떻게든 움직일 수는 있었다.

  드디어 프랑이 말한 동굴에 도착했다. 태람은 바로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태람 님. 옷이 더러워져요.”

  널부러진 태람을 아밀이 번쩍 들어 바위 위로 옮겨줬다. 태람은 자신의 꼴이 한심하다고 생각했지만, 손 하나 까딱할 기력이 없었다.

  “금방 쉴 곳을 만들 테니까 잠시만 여기 계세요.”

  “고마워요. 아밀.”

  “별말씀을요.”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밀을 다른 일행이 도왔다. 세호만이 태람의 시야에 잡히지 않았다.

  “아밀. 왕자님은요?”

  “아까까진 계셨는데? 카이란 님. 왕자님이 어디 가신 줄 아세요?”

  “아니 못 봤는데? 프랑. 왕자 봤어?”

  “제가 왕자님에 대해 알 리가 없잖아요.”

  태람과 눈이 마주친 루시아스도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동굴 안쪽으로 들어가시는 걸 본 것도 같아요.”

  “저는 할 일 없으니 왕자님을 찾으러 다녀올게요.”

  태람은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세호가 걱정되기도 했고, 생각해보니 그와 이야기를 한 지가 아득했다.

  “네? 위험해요.”

  “어차피 그리 멀리 가진 않을 거예요. 위험해지면 바로 돌아올게요.”

  “태람 님! 그렇게 가버리시면….”

  아밀의 잔소리를 피해 태람은 재빠르게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동굴 깊이 들어간 태람은 생각보다 빨리 세호를 발견할 수 있었다.

  “세호야.”

  작은 호수 앞에 쭈그려 앉아있는 세호는 깊은 생각에 잠겨있는지 태람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태람은 할 수 없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세호. 뭐해?”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무것도 아니긴 안색이 안 좋은데? 혹시 어디 아파?”

  세호는 입을 꾹 다물고 태람의 시선을 피했다.

  “또 그런다. 너는 불리하면 입 다무는 습관을 고쳐야 해.”

  “스토리 전개에는 지장을 주지 않겠습니다.”

  사무적으로 대답하는 세호의 태도에 태람은 기분이 상했다. 그래도 무턱대고 화를 내지 않고,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기로 했다. 대체 뭐 때문에 골이 났는지는 몰라도 이유 없이 저럴 애는 아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가끔은 나한테 의지해 봐.”

  “필요 없습니다.”

  세호는 태람을 외면하며 등을 획 돌려버렸다. 태람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이 확 찌푸려졌다. 기껏 걱정해 줬더니 저런 태도라니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화냈으면 좋겠어?” 

  “그럴 리 없지 않습니까.”

  “지금 네 행동이 나를 화나게 만들어.”

  세호는 끝내 태람과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태람은 속했다. 세호는 늘 저런 식으로 자신과 소통을 피했다. 자의식 과잉은 아니지만 태람은 세호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저런 태도를 보이는 세호가 괘씸하기까지 했다.

  “정말 할 말 없어?”

  화가 묻어나는 태람의 목소리에 세호가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평소의 그답지 않게 자신이 없어 보이는 목소리였다. 

  “저한테 신경 쓰지 않아도 선배 주위에는 선배를 위해 줄 다른 사람이 많잖아요.”

  그렇게 말하는 세호의 얼굴은 무척 속상해 보였다. 적어도 태람의 짜증을 식게 할 만큼의 위력은 있었다.

  아무래도 저건 질투가 맞지? 너는 왜 나를 좋아하는 마음을 인정하지 않는 거야? 내가 남자라서? 아니면 강제력 때문에 일시적인 현상 같아서? 적어도 나는 어느 쪽이든 상관없어,

  태람은 먼저 마음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저번에 카이란 때문에 본 환상 말이야.”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일단 조용히 하고 내 말부터 들어 봐.”

  태람은 차분히 자신이 본 환상과 그때 느꼈던 마음에 대해 털어놓았다. 세호의 옆에 다른 사람이 있어서 괴로웠던 것. 바닥에 엎어진 자신을 비웃는 세호에게 서운했던 것. 그 당시 쪽팔린다고 생각했던 게 무안할 정도로 말이 술술 나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세호는 한참을 곰곰이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꼴사납다고 생각했습니다.”

  “빈말도 못 하냐?”

  태람은 이대로 이 자식을 좋아해도 되는 걸지 잠깐 고민했다.

  “스토킹은 나쁘지만, 환상 속의 나는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어. 여기 쭈그리고 있는 네 모습이 환상 속 나보다 더 못났다고 생각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요?”

  “나한테서 도망치지 말라고.”

  “도망친 적 없습니다.”

  “나는 네가 좋아.”

  “선배….”

  “그러니까 너도 피하지 말고 말해줬으면 좋겠어. 네 감정. 네 마음.”

  세호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

  “…….”

  태람은 보채지 않고 세호를 기다렸다. 한참 뒤 그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제 환상 속의 선배는 저보다 약한 주제에 늘 저를 지켜주려 했습니다. 비효율적이고, 바보 같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도 저는 그런 선배에게 지켜지는 게 좋았습니다. 그 결과, 저는 선배를 잃고 말았습니다.”

  세호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몸을 가늘게 떨었다. 눈앞에 멀쩡하게 살아있는 태람이 있는데도 세호는 무척이나 괴로워 보였다. 태람은 그런 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사람이 죽는 걸 본다는 건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고, 하물며 좋아하는 사람의 죽음이라면 더 충격이었겠지. 정말 서툴다. 이 멍청이. 그래도 싫지 않아.

  “입술 다치니까 깨물지 말고.”

  “죄송합니다.”

  “나한테 사과할 건 아니지.”

  태람이 세호를 확 끌어안았다. 세호는 놀라서 몸을 움찔했지만, 태람이 힘들지 않게 몸을 숙이고 얌전히 있었다. 자세가 편해진 태람은 세호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괜찮아. 나는 절대 안 죽어. 여차하면 너를 미끼로 써서라도 살아남을게.”

  “그렇게 말하면 감동이 다 깨집니다.”

  “피차일반이야.”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마세요.”

  세호는 말없이 태람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살포시 포갰다.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말라버린 입술이 타액으로 촉촉이 젖을 때까지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입술을 겹쳤다.

  처음으로 왕자와 메인수가 아닌 이세호와 한태람으로써 한 키스였다.

*

  싸늘한 추위에 잠이 달아난 태람은 졸린 눈을 비비며 막사를 나왔다. 뿌연 안개를 보니 아직 새벽인 것 같았다. 꺼져가는 모닥불에 땔감을 넣고 그 옆에 앉았다.

  어젯밤, 태람은 세호와 한참을 키스한 후 그를 내버려 둔 채 도망쳐 버렸다. 그리고는 동료들에게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무작정 잠을 청했다. 일종의 현실도피였다. 그와 키스한 게 처음이 아니었지만, 이제까지의 애정행각은 전부 이유가 있었다. 마지못해 하는 건 아니었지만, 해야 했기 때문에 했었다.

  하지만 어제의 키스는 전혀 달랐지. 세호도 싫지는 않았던 거 같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대담했지.

  태람은 괜히 입술을 매만졌다. 어제의 세호는 안쓰러웠고,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엄청난 짓을 저질러 버린 기분이 들었다.

  연상에, 남자에, 심지어 맨날 박터지 게 싸우던 상대. 태람은 세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고백의 대답은 듣고 도망쳤어야 했나? 아니, 애초에 왜 도망쳤지? 그냥 있을걸. 얼굴을 마주치면 뭐라고 해야 할까?

  태람은 너무 부끄러워 사라지고 싶었다. 세호의 얼굴을 어떻게 봐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당장은 떠오르지 않았지만, 우선은 아침 식사 전까지는 마음을 차분히 해야 했다. 

  “…선배. 태람 선배…. 태람 형?”

  생각에 잠겨있던 태람은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고개를 드니 세호가 평소와 똑같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세호? 그보다 너 방금 형이라고 했지?”

  “많이 피곤합니까? 체력도 없는 주제에 무리하시긴 했죠.”

  “말 돌리지 말고.”

  “뭐가요?”

  세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대꾸했다. 태람은 자기 귀가 이상한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형이라는 말이 너무 듣고 싶은 나머지 내가 만들어낸 환청? 아니야. 분명 귓가로 파고든 단어는 형이었어. 현실! 부끄러운 게 문제가 아니야.

  긴급상황이 아니면 도통 듣지 못했던 형이라는 말. 게다가 방금 거는 어딘지 자상했다. 태람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호칭에 집착하는 타입인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형이라는 소리를 또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호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할지 고민했던 것은 이미 저편으로 사라졌었다.

  “똑똑히 들었어. 방금 나보고 형이라고 했지?”

  결국, 담담했던 세호의 표정이 무너졌다. 그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워낙에 포커페이스라 읽기 힘들지만 태람은 그가 상당히 당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불리하면 입 다무는 버릇은 여전하네. 형이라고 했잖아. 아주 상냥하게.”

  태람은 일부러 ‘상냥하게’를 유독 힘줘서 말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세호의 칼 같은 부정. 그러나 그의 눈동자가 좌우로 흔들리고 있었다.

  “정말로?”

  “정말이지. 선배는….”

  “형.”

  “그러니까…”

  “형이라니까.”

  마침내 세호가 백기를 들었다.

  

  “태람 형은 정말 엉뚱해요.”

  

  뭔가를 내려놓은 세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태람이 언젠가 보았던 멋진 미소였다. 엉뚱하다는 말이 썩 좋은 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태람은 기분이 좋아졌다.

  진짜 잘생겼어. 이런 세호를 아는 건 아마 나뿐이겠지?

  태람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좋아해. 생각 보다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대체 선배는 왜 그렇게 직설적인 겁니까?”

  거침없는 태람의 고백에 세호는 두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얼굴을 손으로 가려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귀는 이미 사과처럼 빨갛게 익어있었다. 덩치도 큰 남자가 저러니 징그러울 법도 한데 태람의 눈에는 그런 그의 모습이 마냥 귀엽게만 보였다.

  태람은 세호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야. 이세호. 손 좀 치워 봐.”

  “싫습니다.”

  “세호야. 얼굴 보고 얘기하자. 응?”

  태람은 아이를 달래듯 다정하게 말하면서 세호의 얼굴에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는 태람의 손길에 움찔하기만 할 뿐 별다른 반항은 하지 않았다. 세호의 큰 손을 치우니 태람은 그의 예쁜 눈과 딱하고 마주쳤다. 옅은 자수정 눈동자가 보석같이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원래 세계로 돌아가면 그때도 이렇게 가까이 마주하고 싶어.”

  “선배가 정말 싫습니다.”

  세호의 얼굴은 푹 익은 사과를 뛰어넘어 불타는 고구마로 진화해 있었다. 태람은 심장이 뻐근할 정도로 폭력적인 귀여움 앞에 좌절했다. 숨겨진 가학심이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이세호. 참 위험한 남자야.

  “정말 나 싫어?”

  태람은 수줍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세호에게 일부러 얼굴을 들이밀었다. 세호는 필사적으로 태람의 눈길을 피하며 모깃소리보다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얼굴 저리 치우세요.”

  “말해주면 치워줄게. 나 싫어?”

  세호는 다시금 입을 다물고 고개를 푹 숙였다. 여기서 더 놀리면 역효과가 날 것 같다는 생각에 태람은 한발 물러서기로 했다.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말해줘.”

  세호는 겉모습과는 달리 섬세하니 태람은 자신이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람이 끈기를 가지고 한참을 기다리자 마침내 세호의 입술이 들썩거렸다. 드디어 그가 뭐라고 말하려는 순간이었다.

  아밀의 발랄한 목소리가 그보다 먼저 침묵을 깨트려버렸다.

  “왕자님! 태람 님! 안녕하세요! 일찍 일어나셨네요.”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서로에게서 빠르게 떨어졌다.

  “그래. 좋은 아침이다.”

  잠깐 사이에 세호는 가면을 갈아 끼운 듯 키릭 왕자로 변해있었다. 태람도 그를 따라 메인수가 되었다.

  “아밀. 안녕하세요.”

  “금방 아침 식사를 준비할게요! 두 분은 다른 분들을 깨워주시면 안 될까요?”

  “네. 알겠어요.”

  “알겠다.”

  태람은 속으로는 투덜거리면서도 세호와 함께 역할을 충실히 해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밀이 방해를 했다는 게 참 어이가 없었다.

*

<맛있는 남자 220P>

  태람 님과 요리하는 건 정말로 즐거웠어요. 서툰 손놀림으로 끙끙거리면서 해산물을 씻으시는데 소동물 같고, 너무나 사랑스러웠어요. 대체 뭘 먹고 자라셨길래 이렇게나 귀여우실까요? 이야기할 시간이 생겨서 아닌 척 살짝 공 후보를 들어 밀어 봤어요.

  태람 님은 이곳에 와서 처음 만나 차근차근 추억을 쌓아간 키릭 왕자님을 선택하셨어요! 역시 평소에는 자상하지만 엄청난 소유욕으로 격정적이고, 과격한 면모를 지닌 귀축공과 가녀리고 아름다운 꽃수는 유구한 전통을 가진 최고의 조합인 것 같아요. 다른 조합도 좋긴 하지만 키릭태람은 특히 새롭고, 제 심장을 쫄깃하게 만들어요.

  어쩔 수 없이 들리게 된 동굴에서도 태람 님은 왕자님을 챙기셨어요. 저녁 식사 때도 왕자님의 옆에 딱 붙어있으셨는데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두 분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어쩐지 평소와 달랐어요. 제가 모르는 곳에서 일어났다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가장 선호하는 두 사람이 잘되고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네요.

*

  세호에게 진심을 전한 태람은 그날 밤, 평소와는 조금 다른 꿈을 꾸었다. 장소부터 마계가 아닌 룬베르 왕성이었고, 루시아스 대신 프랑이 나왔다.

  “프랑?”

  프랑은 별궁의 꼭대기에 위태롭게 서 있었다. 이상하다는 생각도 잠시, 프랑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태람은 다급하게 소리쳤다.

  “프랑! 거기서 뭐 해요! 위험해요!”

  “태람 님….”

  뒤돌아본 프랑의 얼굴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태람은 자신을 볼 때는 늘 상냥하게 미소 짓던 그의 무표정이 낯설었다. 위화감이 들었지만, 프랑이 위험한 것은 변하지 않는 사실인지라 태람은 다시 한번 외쳤다.

  “당장 이쪽으로 오세요! 빨리요!”

  “이상하게 오늘은 태람 님의 상태가 안정적이네. 그래서 이렇게 된 건가?”

  태람은 프랑이 뭐라고 중얼거리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프랑! 제발요. 위험하다니까요!”

  “나를 걱정하는 태람 님의 얼굴. 더 보고 싶다. 그래도 목이 상하면 안 되니까….”

  프랑이 주문을 외우자, 다음 순간 공간이 흐물흐물 일렁이더니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퍼즐을 짜 맞추듯 재구성된 장소는 태람에게 익숙한 곳이었다.

  “이게 대체?”

  따뜻한 햇볕을 머금고 아름답게 피어난 봄꽃들. 예쁘게 정돈되어 아득한 느낌을 주는 정원수. 태람이 종종 프랑과 티타임을 즐겼던 온실 정원이었다.

  “태람 님이 좋아하는 디저트로만 준비했어요. 식기 전에 드세요.”

  

  새하얀 식탁보가 펼쳐진 테이블에는 화려한 3단 트레이가 있었다. 트레이 안에는 향긋한 장미 향이 나는 잼과 호박 스콘. 초콜릿케이크, 과일 푸딩 등이 담겨 있었다.

  “전부 이상해요.”

  “태람 님. 이건 꿈이에요.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요. 천천히 즐기시면 돼요.”

  프랑의 말을 들은 순간 태람은 머릿속에 있던 모든 의문이 휘발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눈앞에 있는 먹음직스러운 디저트가 눈에 들어왔다.

  “먹어도 되나요?”

  “물론이죠.”

  열심히 디저트를 격파하는 태람을 보며 프랑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요즘도 계속 잠을 못 주무시는 것 같은데 괜찮아요? 아직도 악몽에 시달리시는 것 맞죠?”

  “힘든 거 티 나요?”

  분주하던 태람의 손이 멈췄다.

  “전혀요.”

  “그럼 어떻게 알았어요?”

  “제가 늘 태람 님만 바라보고 있으니까요.”

  “그, 그렇군요.”

  태람은 프랑의 노골적인 어필에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그가 카이란이랑 친해지더니 조금 닮아간다고 무심코 생각했다.

  “태람 님은 참 대단해요. 아무리 힘들어도 내색하지 않고, 주변을 밝게 만들어 주시죠.”

  “저는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생각이 많아 보이시네요.”

  “아무래도 마왕성이 가까워지니까 마음이 복잡해요.”

  “그러시구나.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편하게 쉬세요. 아무 생각도 하지 마시고요.”

  “그렇게 할게요. 신경 써줘서 고마워요.”

  “더 편하게 쉬실 수 있는 곳으로 모실게요.”

  “네?”

  프랑이 갑자기 태람을 확 안아 올렸다.

  “내, 내려주세요!”

  “바동거리면 떨어트릴지도 몰라요. 얌전히 계시면 침실까지 데려다 드릴게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프랑의 경고에 태람은 어쩔 수 없이 반항을 멈췄다. 프랑은 태람을 안아 올린 채로 천천히 이동했다.

  

  “꼭 처음 만났을 때 같지 않나요?”

  “…프랑은 가끔 제 예상을 뛰어넘어요.”

  “왜요? 태람 님이 아는 저답지 않나요? 이런 제가 이상한가요?”

  대수롭지 않은 프랑의 말이 태람은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이 기분은 대체 뭘까?

  “그렇진 않아요.”

  “괜찮으니까 저한테 기대요. 착하죠?”

  “애 취급은 그만 하세요.”

  “애 취급이 아니라 공주님 취급인데요?”

  “그게 더 질이 나빠요.”

  분하지만 프랑의 품은 포근해서 기분이 좋았다. 태람은 긴장이 풀려서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졸리면 주무세요.”

  “…늘 저만 도움을 받는 것 같아요.”

  

  태람은 반쯤 잠긴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그렇지 않아요. 태람 님이 있어서 저는 구원받았거든요.”

  “그건…. 너무 거창한데요?”

  “정말이에요. 신관의 손에 이끌려 처음 수도에 왔을 때…. 아마 대여섯 살쯤 되었을 거예요.”

  태람은 예쁠 것이 분명한 어린 프랑을 떠올리니 조금은 흐뭇해졌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이렇게 번쩍 안아 올렸어요.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웃는 광경이 참 아름다워 보였는데…. 아마 연인 사이였겠죠?”

  “그랬군요.”

  잠에 취해 웅얼웅얼하는 태람의 반응에도 프랑은 말을 이었다.

  “그때부터 쭉 생각했어요. 나한테도 소중한 사람이 생길까? 그건 어떤 기분일까? 그런 사람이 생긴다면 아주 소중하게 여겨야겠다. 평생 곁에 있어야지. …태람 님? 자요?”

  “안 자요….”

  거의 눈이 감긴 태람이 힘겹게 대답했다.

  “이번에는 부디 좋은 꿈을.”

  태람은 멀어져가는 의식 속에서 본 프랑의 마지막 얼굴이 한없이 자상하다고 느꼈다.

  눈을 뜨니 태람은 막사였다. 그의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꿈속에서 누군가와 만난 것 같은데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다양한 감정의 잔상만이 남아 있었다. 다급했고, 무서웠고, 화가 났고, 그런데도 왜인지 편안했다. 악몽인지 아닌지 판별하기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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