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람은 한없이 아래로 떨어지는 감각에 속이 울렁거렸다. 오랜 추락의 끝. 억지로 정신을 차리니 눈앞에 검고 검은 하늘과 새카만 대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암울한 기운이 감도는 빛을 잃은 무채색 세상. 그곳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태람은 두려움과 놀라움이 뒤엉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꿈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했고, 현실이라기에는 어딘지 미흡했다.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이 공간은 카이란의 환상 결계와 닮아있었다.
천천히 전경을 살피던 태람은 누군가의 발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러자 심장이 뽑힌 남자가 비틀거리며 태람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태람은 숨이 턱하고 막혀왔다.
“루시아스….”
태람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멍하니 있는 순간 어느새 바로 코앞까지 다가온 루시아스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 받아. 그대가 원했던 것이야. 혹시 부족하다면….”
아무렇게나 던져지는 심장. 태람이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루시아스가 자신의 눈알을 뽑았다. 태람의 입에서 절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만…. 그만 해요!”
“모자란다면 양팔과 두 다리…. 나의 모든 것을 내어주겠어.”
“그러지 말아요. 루시아스!”
“그대가 나를 창조하였으니 모든 것은 전부 그대의 뜻대로.”
끔찍한 광경이 이어지고, 태람은 더는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기절하기 직전까지 몰린 그에게 루시아스의 입을 통해 또 다른 존재가 말을 걸었다.
“전부 말하고 편해지면 돼. 그들도 알고 싶어 할걸? 그들에게는 알 권리가 있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다음 순간, 남자의 얼굴이 프랑의 얼굴로 변했다.
“태람 님, 저는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싶었어요. 신관 따위 되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에는 카이란의 얼굴로 변했다.
“한 인간에 얽매이는 건 재미없어. 나는 왜 너를 좋아하게 된 거지?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고 싶었는데….”
애써 외면해 왔던 죄책감이 형태를 가지고 나타나 태람을 괴롭혔다.
“그만! 보고 싶지 않아. 듣고 싶지 않아! 제발…. 전부 사라져!”
태람은 번쩍 눈을 떴다.
폭신한 감촉이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공주 침대 위였다.
마치 늪에 빠졌다가 겨우 올라온 사람처럼 온몸이 무거웠고, 머리를 쿡쿡 찌르는 두통이 심했다. 몽롱한 정신으로 침대 옆에 놓인 물잔을 들어 물을 벌컥 들이켰다. 꿈을 하나하나 떠올려 볼수록, 태람은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게 정말 꿈이었을까? 가까운 미래의 일이라든지, 아니면 모두의 진짜 속마음이라든지….
시름시름 하는 태람의 귓전에 노크 소리가 들렸다. 태람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천천히 침대 밖으로 벗어나 방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세호가 서 있었다.
“선배, 들어가도 될까요?”
“응…. 들어와.”
방 안으로 들어온 세호는 태람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내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는 잘 다려진 손수건으로 태람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었다.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아요? 혹시 잠을 못 잤습니까?”
찰나의 순간, 태람은 자신이 꾼 악몽에 대해 세호에게 말을 해야 할지 말지 망설였다.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은 세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루시아스에 대한 것을 아직까지도 비밀로 하고 있다는 점도 마음에 걸렸다.
“잠을 조금 설쳤어.”
“설마 오늘이 일이 걱정돼서 못 잔 겁니까?”
“출정 연회면 그동안 다녔던 파티보다 규모가 큰 거잖아. 떨려서 잠이 안 오는 걸 어떡해.”
“어린애도 아니고 손이 많이 가네요.”
못마땅하게 중얼거리는 세호였으나 태람의 이마에 땀을 닦는 손길만큼은 섬세하고 다정하기만 했다.
“그런데 너 손수건은 원래 세계에 있을 때부터 가지고 다녔어?”
“네. 오랜 습관입니다.”
“…애늙은이.”
“이왕이면 클래식한 거라고 해주시죠.”
세호가 태람의 이마에 꿀밤을 안겼다. 태람은 뇌가 쪼개지는 고통을 느꼈다.
“야! 네가 하면 살인 미수야!”
태람은 한껏 억울한 얼굴로 빨갛게 물든 이마를 문질렀다.
“이번만큼은 쓸데없는 소리를 한 선배가 나쁩니다.”
“…짜증나. 그래서 무슨 일인데?”
“참 빨리도 물으시네요. 곧 환송 연회가 있지 않습니까. 저와 동반 입장을 했으면 합니다.”
국왕은 출정식을 대신해서 환송 연회를 열어주기로 했다. 조촐한 연회라고는 했지만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태람은 확신했다. 자신에게 달려들 사람들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팠다. 그래도 이번에는 일행과 함께이니 저번과 다르긴 했다.
“갑자기? 생일파티 때는 방치하더니….”
“그때는 제가 잘못했습니다. 최근에 왕자에 대한 서술이 많이 줄어서 걱정이 됩니다.”
“확실히 그건 그렇지. 아밀은 요즘 프랑태람을 파더라.”
“메인공의 입지를 확실히 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선배가 걱정되기도 했고요….”
태람은 뒷말을 중얼거리며 부끄러워하는 세호가 귀여웠다.
“응! 같이 가자.”
*
“제국의 세 번째 빛, 키릭 루 페르시안 왕자님과 신의 대리인이신 한태람 님이 입장하십니다!”
연회장 앞을 지키는 시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안에 있던 귀족들이 모두 일제히 깊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천장에서는 오색 빛깔의 꽃잎들이 쉴 새 없이 뿌려졌다. 마법으로 만든 환영인지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허공에서 흩어지는 모습이 태람은 너무나 신기했다.
“선배. 넋 놓고 있지 마시고 허리 펴세요.”
세호가 태람을 향해 팔을 내밀자 태람은 세호의 팔에 손을 올렸다. 옷 너머로 느껴지는 세호의 탄탄한 팔근육에 태람은 조금 긴장이 풀리며 안정감이 들었다.
두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사방에서 열망을 담은 눈빛이 쏟아졌다. 태람은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투정을 부리듯 세호에게 칭얼거렸다.
“시선이 너무 따가워. 저번처럼 아무나 막 다가오는 건 아니겠지? 그때는 무서웠다고. 오늘은 네가 나 좀 지켜줘. 알았지?”
“알겠습니다. 일단 저쪽으로 가서 앉죠. 약식이지만 출정식다운 의식은 치른다고 했습니다. 말을 걸어도 그게 끝나면 일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야. 그런 소리 못 들었어. 그냥 연회라며!”
“복잡한 출정식보다는 낮잖아요. 어려운 것 없습니다. 국왕이 호명하면 단상으로 올라가서 가만히 덕담이나 들으면 됩니다.”
세호에게 설명을 들은 태람은 다시금 긴장되었다.
“긴장하셨어요?”
긴장한 탓에 밀랍 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은 태람의 어깨를 세호가 천천히 주물렀다. 아프지 않도록 세심하게 조절한 악력에 태람은 시원함과 온기를 동시에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아프면 말하세요.”
“고, 고마워.”
“선배도 긴장 같은 걸 하는 사람이었네요. 몰랐습니다.”
태람은 피식 웃는 세호의 모습이 안마보다 더 치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민망해져서 괜히 투덜거렸다.
“대체 네 안의 나는 어떤 이미지야.”
“평소에는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사시면서 쫄았습니까?”
“너 진짜!”
벌떡 일어나려는 태람을 세호가 꾹 눌렀다.
“조용히. 동료들이 왔습니다.”
“이따가 두고 보자.”
“…그래도 긴장은 풀리신 것 같네요. 안심했습니다.”
세호 덕분에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일행들을 맞이한 태람이었다.
“태람 님. 빨리 오셨네요.”
가장 먼저 다가온 프랑이 자연스럽게 태람의 옆자리에 앉았다.
“거긴 내 자린데!”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어제부터 태람의 옆자리는 나라고 정했어!”
“이런 건 먼저 행동한 사람이 이기는 겁니다.”
프랑에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카이란이 볼을 부풀렸다. 태람은 귀엽긴 했지만 카이란이 갈수록 개인지 드래곤인지 알 수 없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럼 왕자가 양보하면 안 돼? 사실은 나도 태람이랑 같이 입장하고 싶었는데 꾹 참았어.”
프랑을 설득하는 게 어렵다고 판단했는지 카이란의 다음 타깃은 세호였다.
“태람의 옆자리는 이미 나로 정해져 있다. 프랑과 알아서 하도록 해.”
“왜 갑자기 저를 끌어들이시죠? 저는 정당하게 먼저 행동해 우선권을 얻었습니다.”
“그건 모르겠고. 둘 중 아무나 나한테 양보해.”
“웃기는군. 제국의 주인은 나다. 그러니 내가 정한 일에 토 달지 마.”
“황태자 책봉식도 안 했으면서 웃기시네요.”
“나만 서 있고 다리 아파.”
태람은 아웅다웅하는 세 사람을 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카이란이 떼를 쓰거나, 프랑이 집착하는 거야 익숙했다. 거기에 세호까지 끼니 골치가 아팠다.
“그러면 태람 님에게 정하게 하죠.”
“좋아. 태람! 내 옆에 앉을 거지?”
“말할 가치도 없군. 태람. 이런 아이의 투정같은 말들은 무시하면 된다.”
“투정이라고요? 그러면 마음이 어른이신 왕자님이 양보해주시면 되겠네요.”
“나이로 따지면 내가 제일 연장자인데….”
“그러면 카이란 님이 양보하시면 되겠네요.”
“그건 싫어. 인간의 기준으로 따지만 나는 아직 어린 드래곤이야.”
태람이 세 사람 사이에 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누군가의 손이 그의 허리를 낚아챘다.
“우왓!”
조용히 다가와 태람을 안아 든 건 루시아스였다. 그는 갑자기 허공에 들려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진 태람을 자신의 옆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루시아스?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루시아스는 침묵을 지켰다. 답답한 태람의 의문을 해결해준 건 뒤에서 쓱 나타난 아밀이었다. 그의 손에는 태람이 좋아하는 디저트가 한가득 올려져 있는 쟁반이 들려있었다.
“제가 말씀드릴게요. 우선 태람 님. 좋아하시는 것만 가져왔는데 원하시는 만큼 드세요.”
태람은 반사적으로 한입 크기로 잘려져 있는 브라우니를 집어 들었다. 진한 초콜릿 향을 거부할 수 없었다.
“맛있어요. 아니! 그보다 아밀. 어떻게 된 거예요? 왜 루시아스가 여기에?”
“루시아스 님이 입구에서 서성거리시길래 제가 모시고 왔어요. 저번에 태람 님과 말씀을 나누시는 걸 봤거든요. 이야기해보니 마계에도 함께 가신다고 들었어요! 새 동료분이시죠?”
아밀의 말이 끝나자마자 세 사람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태람 님. 이분은 누구시죠? 마계에 같이 간다고요?”
“다 좋은데 왜 멋대로 너를 안고 갔지? 불쾌하군.”
“상당히 흥미로운 영혼이긴 한데…. 어쩐지 마음에 안 들어.”
태람은 일이 더 복잡해지기 전에 일행에게 루시아스를 소개하기로 했다.
“이쪽은 루시아스. 앞으로 저희와 함께할 동료예요. 모두에게 미리 말씀드리지 못한 건 죄송해요. 하지만 마계로 가는 원정에 참여하신 적도 있는 경험이 풍부한 용병이세요.”
그러나 태람의 설명에도 분위기는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세 사람은 잔뜩 경계하는 눈빛으로 루시아스를 노려 뿐이었다. 그는 여전히 조용했다. 그 태도가 더 세 사람을 자극한 것 같았다.
“용병 출신? 딱 봐도 수상해 보이는 자를 네 옆에 둘 수는 없다.”
“맞아요. 신원을 보증해 줄 사람이 있나요?”
“감정이 안 보여. 모르겠어. 이런 건 처음이야. 수상해.”
아니. 프랑이랑 카이란은 그렇다고 치자. 이세호. 너까지 그러면 안 되잖아. 예상하지 못한 강한 반발에 태람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루시아스는 제가 마을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저를 도와줬어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저희 전부 마계는 처음이잖아요. 길잡이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요.”
“마계는 위험하지만 우리의 실력이라면 문제없다.”
“맞아요. 태람 님. 저도 공격 마법을 더 배울게요!”
“나는 처음 아니야! 마계라면 나도 자유롭게 힘을 쓸 수 있어!”
태람의 설득에도 세 사람은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들의 반발을 압살한 건 예상외로 루시아스였다. 그는 단 한마디로 상황을 종결시켰다.
“태람을 곤란하게 할 셈이냐?”
세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다들 불만 가득한 표정을 숨길 수는 없었지만, 한결 편해진 태람의 얼굴을 보고 어쩔 수 없이 납득한 것 같았다.
“루시아스. 고마워요. 덕분에 상황이 잘 정리됐네요.”
루시아스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거렸다. 태람은 새삼 참 과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얼마 뒤 국왕이 단상에 섰다.
약식이지만 화려한 휘장과 꽃으로 꾸며진 단상은 웬만한 의식에서 쓰이는 단상 못지않았다. 국왕은 간단한 인사말을 한 뒤 태람의 이름을 불렀다.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태람은 다소 어색하지만 당당한 걸음으로 붉은 카펫 위를 걸었다. 열 맞춰 늘어서서 단상까지 올라가는 길을 지키고 서 있는 무장한 병사들의 모습은 장관이었다.
태람은 무사히 국왕의 앞에 도달했다.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숨을 멈추고 두 사람을 주시했다. 수백에 달하는 귀족들과 왕족들의 눈동자가 태람을 다시 긴장하게 했다. 태람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중후한 국왕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주신 리안의 대리자여. 그대는 어떤 위험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맹세하는가?”
“네. 맹세합니다.”
“더 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는가?”
“네. 그렇습니다.”
“레온 루 페르시안의 이름으로 다른 차원에서 온 이방인에게 용사의 칭호를 하사하노라.”
“영광입니다.”
“용사여. 그대의 기나긴 여정에 행운을 깃들기를 기원하겠다.”
국왕의 선포와 동시에 나팔이 울려 퍼졌고, 귀가 아플 정도의 박수와 성원이 쏟아졌다. 연회장의 있는 모두가 태람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수많은 사람이 자신을 우러러보고 있자 태람은 부끄러워서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슬쩍 원래 있던 테이블로 시선을 돌리니 세호가 태람을 보며 다정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여행 중 지칠 때마다 힘을 주던 모닥불처럼 몸과 마음을 녹여주는 은은한 따뜻함이 담겨 있었다.
태람은 프랑의 청초한 미소도, 카이란의 귀여운 미소도, 루시아스의 중후한 미소도 좋지만 역시 세호의 미소가 가장 멋있고,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
태람은 이리저리 끌려다니다가 겨우 모든 일정을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이동했다. 그러던 중 복도에서 프랑과 마주쳤다.
“태람 님!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셨어요. 늦게라도 만날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어쩌다 운 좋게 모든 공을 가져가 버렸으니 책임을 질 수밖에 없죠.”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태람 님이 없었다면 저희 파티는 없었을 거예요.”
“한 것도 없는데요. 뭘.”
“적어도 저는 태람 님이 있어서 기운을 낼 수 있었어요. 위안을 주는 존재는 필요한 법이니까요.”
예쁘게 웃는 프랑을 보고 있자니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태람은 바로 프랑의 말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확실히 위안이 되는 존재는 중요할지도 몰라.
“너무 피곤해 보이세요. 제가 옆에서 태람 님의 부담을 덜어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해요.”
“프랑도 정신없었잖아요. 저는 어제 잠을 설쳐서 더 피곤해 보이는 걸 수도 있어요.”
“저런. 악몽이라도 꾸셨나요?”
걱정 어린 프랑의 시선에 태람이 힘없이 웃으며 대답했다.
“비슷해요. 두 번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꿈이었어요.”
“요즘 고민이 많아 보이세요. 태람 님만 괜찮다면 짐을 나누어 드리고 싶네요.”
프랑의 자상한 목소리에 마음이 누그러진 태람은 계속 신경 쓰였던 것을 물어봤다. 자신이 모두를 기만하고 있는 것에 대한 면죄부를 원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프랑의 진심을 듣고 싶었다.
마계에 가게 되면 이런 이야기를 할 기회는 없을 테니까.
“만약에 말이에요. 프랑의 감정이 누군가에 의해 조작된 것이라면 어떨 것 같아요?”
프랑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명쾌하게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요?”
“처음부터 모든 게 정해져 있다면 그건 진짜가 아니잖아요. 저라면 기분 나쁠 것 같아요. 그렇게 만들어 버린 존재를 원망하지 않을까요?”
“진짜인지, 가짜인지는 상관없어요.”
태람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프랑의 눈빛은 진중하고 한없이 깊었다. 태람은 마치 프랑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 같아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로 인해 마음의 위안을 받았고, 지금이 행복하다면 문제없다고 생각해요.”
“…그럴까요?”
“네. 저는 오히려 그 존재에게 고맙다고 할 것 같아요. 조금은 도움이 되었나요?”
“많이 참고가 되었어요. 이상한 말을 해서 미안해요.”
“이상하긴요. 이런 거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아…. 제가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네요. 나중에 또 이야기해요.”
“그래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태람 님.”
프랑은 허리를 숙이더니 아주 자연스럽게 태람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오늘 밤은 부디 좋은 꿈을 꾸시길.”
“고마워요. 프랑.”
마지막 프랑의 굿나잇 키스는 조금 놀랐지만, 한결 속이 편해진 태람은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었다.
이날도 태람은 악몽을 꾸었다.
*
워프를 통해 단숨에 들어온 마계 초입.
태양이 검어서 낮인지 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시야를 지배하는 건 온통 검붉은 사막 같은 대지였다. 울퉁불퉁 다듬어지지 않은 돌길과 아무렇게나 뻗어있는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태람은 이 광경이 낯설지 않았다. 최근에 자주 꾸는 악몽 속 장소와 너무나 똑같았기 때문이다.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마계가 무서워? 걱정하지 마. 몬스터가 나오면 내가 다 처리해 줄게. 여차하면 내가 업고 다닐게.”
카이란이 다가와 태람의 손을 꼭 잡아줬다. 태람은 자신의 손을 전부 감싸고도 남을 정도로 큰 손이 믿음직스럽게 느껴졌다. 말랑말랑한 감촉은 아이의 손 같은데 신기했다.
“고마워요. 카이란. 그래도 이제 막 도착했으니 일단은 혼자 힘내볼게요.”
“알았어. 힘들면 바로 말해.”
씩씩한 말과 달리 태람은 얼마 걷지 않아 녹초가 되었다. 기본 체력도 없는 상태에서 정신적으로 몰려있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했다. 태람은 마치 납덩어리를 주렁주렁 매단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본의 아니게 깊이 들이마신 매캐한 먼지에 입안까지 텁텁했다.
“태람 님. 괜찮아요?”
위태롭게 휘청거리는 태람을 프랑이 부축해줬다. 태람은 고맙다는 말을 할 힘도 없어 프랑에게 얌전히 몸을 맡겼다.
“열이라도 있으신가?”
프랑의 손이 태람의 이마에 닿았다. 서늘하고 청량한 감촉에 태람은 조금이지만 기분이 나아졌다.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일단 치유해 드릴까요?”
“아직은 괜찮아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데 마나를 아껴야죠.”
“힘들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태람이 프랑에게 의지해가며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나에게 기대라. 태람.”
앞서가던 세호가 태람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태람은 팔랑거리는 종이 인형처럼 무기력하게 끌려갔다.
“뭐 하는 짓이죠? 태람 님은 제게 기대고 있었습니다.”
“너보다 내 쪽이 더 키가 크고, 안정적이다.”
“아니요. 왕자님은 키가 너무 커서 불편할 거예요.”
“두 사람 다 그만해. 태람이 힘들어하잖아. 그냥 내가 안을게!”
갑자기 난입한 카이란이 태람을 번쩍 들어 올렸다. 평소라면 창피하다며 반항했을 태람은 물먹은 솜처럼 카이란에게 안긴 채 축 늘어져 있었다. 태람의 안색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으나 그러거나 말거나 세 사람은 몇 번일지 모를 쟁탈전을 시작했다.
“카이란. 태람을 내려놔라.”
“그래요. 카이란 님. 태람 님이 불편해 보이네요.”
“싫어. 싫어! 태람은 이게 편하대.”
태람은 물건처럼 이리저리 옮겨졌다. 다들 작작 좀 하지. 태람은 짜증이 났지만, 세 사람의 손아귀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힘이 없었다. 그때 루시아스와 눈이 딱 마주쳤다.
태람은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루시아스에게 도움을 바라는 간절한 눈빛을 보냈다. 그는 한참 태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난리 통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안 돼! 이번에는 절대로 안 넘겨줄 거야.”
“루시아스 님은 끼어들지 마세요.”
“우리끼리 해결을 볼 테니 돌아가지, 그래.”
세 사람은 싸울 때는 언제고 합심해서 루시아스를 배척하며, 태람을 등 뒤로 숨겼다. 그러거나 말거나 루시아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차분히 설명을 시작했다.
“보통 인간보다 연약한 태람의 몸이 농도가 짙은 마계의 기운에 적응하지 못해 과부하를 일으킨 것 같군. 마계의 기운은 인간계의 기운과 달리 고도로 응축되어 있다. 능력을 갖춘 자에게는 큰 영향을 주지 않지만,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곤욕일 것이다. 적응하지 못하면 죽을 수도 있으니 적절한 조치가 필요하다.”
담담하게 말하는 루시아스였지만, 그 내용은 상당히 무서웠다. 태람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불안해졌다. 게다가 또 자신이 모르는 설정이었다.
“루시아스가 저렇게 길게 말한 건 처음 들었어.”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카이란을 구박하는 프랑에 말에 태람은 격하게 공감했다.
인간이랑 감각이 달라서 그런가? 그래도 그렇지, 카이란아. 나를 살려낼 생각부터 해야지. 지금 쓸데없는 생각이나 할 때야?
한쪽에서 루시아스의 말을 경청하던 세호가 그에게 차분히 질문했다.
“최대한 안전하게 태람을 편하게 해줄 방법은 없나?”
“몸 안에 있는 인간계의 기운을 전부 밀어내고, 마계의 기운으로 채우면 된다. 다만, 태람의 몸이 그걸 견딜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저렇게 연약한 몸은 처음이라….”
태람은 자신을 걱정해서 망설이는 루시아스가 고마웠지만, 한편으로는 유리 몸을 인증 당해 창피하기도 했다. 그래도 계속 빌빌거리다가 죽는 것보다야 낫다고 생각했다. 잘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쥐어짜 냈다.
“…참아 볼 테니까 부탁드려요.”
태람의 결정에 프랑과 세호가 바로 루시아스에게 달려들었다.
“루시아스 님! 위험한 건 아니죠? 혹시라도 태람 님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저는….”
“태람이 잘못 된다면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뒤를 이어 아밀과 카이란도 합세했다.
“태람 님이 어서 건강해지시길.”
“기운 없는 태람을 보니 마음이 안 좋아.”
“걱정마라. 태람이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태람은 자신을 걱정하는 사람들을 보며 힘없이 미소 지었다.
“저는 괜찮아요.”
“태람. 불안하면 내 손을 잡아라.”
“이때다 싶어서 개수작 부리지 마세요. 왕자님.”
“걱정하지 마세요. 태람 님, 별일 없을 거예요.”
“루시아스는 검사인 것 같은데 그런 섬세한 마나 컨트롤을 할 수 있다고?”
마지막 말은 살짝 걱정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태람은 불안을 떨칠 수 있었다.
“집중이 필요하니 다들 조용히 해라.”
“루시아스. 잘 부탁해요.”
“알았다. 긴장을 풀고 나한테 몸을 맡겨.”
루시아스가 태람의 이마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잠시 후 그의 손끝이 검은색으로 빛났다. 손끝에서 생겨난 빛이 점차 태람의 몸에 골고루 퍼졌다. 태람은 몸 안에 이질적인 기운이 돌아다니는 이상한 감각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다른 일행들은 그 광경을 걱정 반, 신기함 반으로 지켜봤다.
“끝났다. 천천히 일어나 봐라.”
태람은 몸이 개운해진 걸 느꼈다.
“…이제 괜찮아졌어요. 감사합니다.”
“오랜만이라 불안했는데 다행이야.”
루시아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에는 희미한 안도가 스쳤다.
“걱정해줘서 고마….”
태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카이란이 끼어들었다. 드물게 흥분한 프랑까지 가세했다.
“루시아스! 방금 그거 어떻게 한 거야?”
“세상에! 그런 방법으로 치유 능력을 사용하시다니 대단하시네요.”
“치유와는 다르다.”
“그럼 마법이야? 나도 해볼래! 아까 꿀렁꿀렁한 거 한 번만 더 보여주면 안 돼?”
“저도 어떤 원리인지 궁금합니다! 한 번 더 해보시면 안 될까요?”
루시아스는 카이란과 프랑에게 붙잡혀 어디론가 끌려가 버렸다. 자신을 새까맣게 잊어버린 두 사람에게 조금 서운했지만 그래도 루시아스가 일행 사이에 녹아든 것 같아 다행이라 생각했다.
“선배. 정말로 괜찮습니까?”
어느새 태람에게 다가온 세호가 작게 속삭였다. 그는 태람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만 봐. 나 정말 괜찮다니까.”
빠르게 짐을 뒤적거린 세호는 작고 가벼운 담요를 태람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일단 이거라도 덮고 있어요. 땀을 많이 흘렸으니 체온이 떨어졌을 겁니다.”
“고마워. 이 몸은 너무 약하다니까. 이 정도면 병약수 속성이라도 있는 거 아니야?”
적당히 웃어넘기려는 태람의 노력에도 세호의 표정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그동안 무리했던 게 쌓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제가 좀 더 꼼꼼하게 살폈어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 내가 아픈 게 왜 네 탓이야. 고작 악몽 때문에 제대로 못 잔 나 때문이지.”
“악몽이요? 처음 듣는 소리네요.”
“음…. 그게….”
“자세히 말해보세요. 언제부터 시작된 겁니까? 제 생각에는 단순한 악몽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날카로운 세호의 눈빛에 태람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솔직하게 털어놓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하지만 그러다 쓸데없는 것까지 말해버릴 것 같았다.
“진짜 별거 아니야. 너랑은 크게 상관이 없는 일이고….”
“저에게는 말할 수 없습니까?”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한 태람과 그런 그를 집요하게 쳐다보는 세호. 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왕자님! 명령하신 대로 막사를 설치하기 좋은 평지를 찾았습니다!”
질식할 것 같은 침묵을 깨준 건 아밀이었다.
“지금 간다. 선배는 천천히 따라오세요.”
세호가 가고, 태람은 긴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걱정해주는 건 고맙지만, 루시아스를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생각을 정리하지 못했다.
그렇게 마계에서의 첫날이 지나가고 있었다.
*
태람의 몸 상태가 나아져 여정에 속도가 붙나 했지만, 본격적으로 몬스터가 등장하기 시작해 속도는 전보다 더 떨어졌다. 일주일이 지나도록 일행은 마계 초입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몬스터가 나타났다.
“뀨잉? 뀽! 뀽!”
슬라임 한 마리가 꿈틀거리며 태람에게 다가왔다.
“감히. 어딜.”
그러자 태람의 옆에 있던 카이란이 손짓 한 번으로 슬라임을 간단하게 없앴다. 이때만 해도 일행은 평온했다.
“뒤에 또 있어. 다들 조심해.”
카이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수십 마리의 슬라임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보통 슬라임이 아니다.”
“움직임이 수상하네요. 태람 님. 앞으로 나오지 마세요.”
“네, 네!”
슬라임들은 서로 뭉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덩치를 불렸다. 이제는 집채만 해진 거대 슬라임이 일행을 향해 돌진했다. 프랑이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주신 리안이여. 눈앞의 적의 움직임을 봉쇄하소서!”
“뀽뀽뀽!”
거대 슬라임이 프랑이 만든 빛의 결계 속에 갇혔다. 슬라임은 결계를 벗어나기 위해 거칠게 발버둥 쳤고, 프랑은 결계를 강화했다.
“젠장! 왕자님! 뭘 보고만 있어요! 뭉그적거리지 말고 빨리 처리하세요. 유지하기 힘들단 말이에요!”
프랑이 짜증을 내며 소리쳤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라.”
세호는 순식간에 검을 뽑아 거대 슬라임을 향해 보라색 검기를 날렸다. 그러자 결계 속에 갇혀있던 슬라임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끝이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정찰하고 있던 아밀이 급하게 달려왔다.
“뒤쪽에서 슬라임 대군이 오고 있어요! 크기가 아주 커요!”
아밀의 말대로 족히 100마리는 넘어 보이는 거대 슬라임이 꾸물꾸물하며 밀려오고 있었다. 세호와 프랑은 질린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전투태세를 갖췄다.
“다들 공격 준비.”
“왕자님이야말로 제게 명령하지 마시죠!”
“저도 가세하겠습니다!”
세호와 프랑 그리고 아밀까지 세 사람은 정신없이 없이 몰려오는 슬라임을 상대했고, 태람은 재빨리 수풀로 숨었다.
“주신 리안이여. 적을 꿰뚫을 창을 내리소서!”
“왕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놓친 슬라임들이 그쪽으로 갔어요! 조심하세요!”
“알았다! 나는 괜찮으니 앞을 봐!”
“주신 리안이여. 눈앞의 적을 섬멸할 철퇴를!”
“프랑. 그건 안 통한다. 차라리 방어 마법을!”
“프랑 님, 저도요! 슬라임들이 산성 액을 뱉어내기 시작했어요.”
“그대에게 주신 리안의 가호가 깃들기를!”
제법 시간이 지나 슬라임의 수가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그에 비례해 세 사람은 상당히 지쳐 보였다. 쉬지 않고 주문을 영창 했던 프랑은 반쯤 목소리가 쉬었고, 아밀과 세호은 슬라임의 사체로 범벅이 되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포위당하기 전에 한 곳을 뚫겠다. 아밀 너는 내 보조를.”
“네! 알겠습니다.”
“프랑. 너는 약점을 찾아라.”
“알겠습니다. 주신 리안이여. 어둠 속의 활로를 비추소서.”
프랑은 불만스러워 보이는 표정이었지만 얌전히 세호의 말을 따랐다.
“저깁니다! 가세요!”
“따라와라. 아밀!”
“네! 뒤는 맡겨주세요.”
세호와 아밀이 프랑이 가리키는 곳을 억지로 돌파했다. 남은 슬라임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태람은 저번 그린 드래곤 사냥 때도 그렇고, 틈만 나면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것 치곤 세호와 프랑의 호흡이 참 잘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감탄하면서도 치열하게 싸우는 세 사람을 보니 숨어있는 자신이 창피했고, 많이 미안했다.
그때 카이란의 태평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 다 강해졌네. 마계의 슬라임은 까다롭잖아. 그렇지?”
유유자적한 카이란의 말에 태람이 한소리 해주려고 했을 때였다. 너무 조용해 존재감이 희미했던 루시아스가 입을 열었다.
“마계의 슬라임은 농도가 짙은 기운을 먹고 자라 인간계의 슬라임보다 크기가 크고, 마기를 품고 있어서 마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맞아. 특히 왕자가 대단한 것 같아. 인간 중에서 가장 강하지 않을까?”
“신관이 더 강하다.”
“눈 삐었어? 절대로 왕자가 더 강해! 파괴력만 놓고 보면 당연히 왕자 쪽이지!”
“종합적인 능력을 보자면 신관 쪽이 우세하다.”
해도 해도 너무하다고 생각한 태람은 결국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제가 할 말이 아니긴 한데 두 분은 왜 안 싸우세요?”
“왕자도 프랑도 아밀도 조금만 구르면 강해질 것 같아서 기회를 주는 거야. 나는 이미 강하니까 괜찮고.”
“이자에게 끌려왔을 뿐이다.”
“혼자 보는 건 재미없잖아. 루시아스는 나 정도로 강한 것 같고!”
“그래도 세 사람이 저렇게 고생하는데 살짝 거들어도 좋지 않을까요?”
“무엇보다 나는 너를 지켜줘야 하니까.”
“네?”
“약속했잖아. 너만은 반드시 지켜줄게.”
“기, 감사합니다.”
고맙긴 한데 어쩐지 속은 느낌? 태람은 당당한 카이란의 태도에 할 말을 잃었다. 태람이 어이없어하든 말든 두 사람은 다시 토론의 장을 이어갔다. 태람은 격투기 경기를 보는 것처럼 들뜬 두 사람의 입을 확 꿰매버리고 싶었지만 구경하고 있는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기에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세계관 최강자인 드래곤 로드와 마왕이 노닥거리는 동안 슬라임을 다 처리한 세 사람이 귀환했다. 카이란은 루시아스와의 토론으로 지쳤는지 그의 무릎을 베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얄미워서 볼을 꼬집어주고 싶어진 태람이었지만, 우선은 세 사람이 걱정되어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들 괜찮아요? 어디 안 다쳤죠?”
“문제없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가까이 오면 태람 님의 옷이 더러워지니까 조심하세요.”
“이걸로 식량 획득이네요. 너무 기뻐요. 그럼 저는 막사를 설치해야 해서 먼저 가볼게요!”
마지막 아밀의 말은 태람을 오싹하게 했지만 다들 무사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안도한 태람의 눈에 세호의 상처가 포착되었다.
“자, 잠깐만요! 왕자님! 다쳤잖아요.”
세호의 걸음걸이가 어색하다 했더니 그의 왼쪽 다리에서 피가 나고 있었다.
“소란 떨지 마라. 살짝 긁힌 것뿐이다.”
“살짝 긁힌 것뿐인데 이렇게 피가 철철 나요? 이쪽에 앉아요!”
태람은 억지로 세호를 바위 위에 앉혀 놓고 매고 있던 가방에서 포션을 꺼냈다.
“이 정도는 금방 났습니다.”
태람에게만 들리게 작게 속삭이는 세호를 무시하고 태람이 그의 다리에 포션을 퍼부었다. 후끈거리는 상처에 차가운 액체가 쏟아져 내리자 세호는 저도 모르게 움찔하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으….”
“이것 봐. 안 아프긴 무슨….”
“그렇게 무식하게 퍼부으면 누구라도 신음이 날 겁니다.”
“바보야. 아픈 거에 익숙해지지 마. 참아 봤자 골병만 들어. 나중에 돌아갔을 때도 생각해야지. 우리 세계에 마법은 없잖아.”
“선배가 그런 말을 하니까 이상하네요.”
세호는 태람의 입에서 미래의 계획 비슷한 게 나왔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언젠가 그가 자신에게 말했던 이곳에서의 변화를 실감한 순간이었다.
“뭐가?”
“선배도 이곳에 와서 많이 변한 것 같아요.”
“잘은 모르겠지만 욕은 아니지?”
“네, 좋은 쪽 변하셨어요. 그게 조금 기쁩니다.”
태람은 평소와 달리 달달한 목소리로 말하는 세호에 소름이 돋았다. 아파서 정신이 나갔나?
“그런 낯간지러운 소리를 다 하고…. 너 진짜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치료 끝났으면 가세요.”
“메정한 놈. 간다. 가. 어차피 프랑도 봐주려고 했어.”
태람은 이번에는 프랑의 상태를 살피러 갔다.
“프랑.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프랑?”
태람이 다시 한번 프랑을 부르니 그제야 프랑이 그를 봤다. 태람은 기분 탓인지 프랑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저는 괜찮아요.”
“정말 괜찮은 거 맞아요?”
“지쳤나 봐요. 잠시 멍하니 있었네요.”
“긴 전투였으니 지쳤을 만도 하죠. 일단 눈에 보이는 상처는 없는 것 같아요.”
“고마워요. 그럼 저는 먼저 가볼게요. 옷이 더러워져서 씻고 싶네요.”
“네. 알겠어요.”
프랑은 태람을 지나쳐 갔다. 태람은 잠시 스쳤던 프랑의 기묘한 표정이 신경 쓰였으나 피곤해서 그런 것으로 생각하며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
휴식을 취하러 가는 일행의 뒷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는 낯선 그림자가 있었다.
“아아…. 나의 왕이시여.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머리에 돋은 커다란 뿔과 한 쌍의 검은 날개. 그가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번들거리는 붉은 눈동자에는 경애라기에는 과도한 광기가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