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1/14)

  리듬감 있고 통통 튀는 귀여운 문체. 예상치 못한 전개로 가는 의외성. 초콜릿처럼 달콤하고 행복한 결말. 세호는 태람의 글이 그와 참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

  일행은 오늘도 늦은 저녁을 먹게 되었다.

  “프랑! 편식은 나빠.”

  “편식이 아니라 기호의 차이예요.”

  “고블린 발바닥이 어때서! 양념도 잘 배서 맛있어. 육질도 부드러운 게 운동량이 많았던 몬스터인가 봐.”

  “저는 그 어떤 발바닥도 싫습니다. 애초에 인간은 몬스터 고기를 안 먹어요.”

  “아밀은 먹잖아.”

  “프랑 님은 제 요리가 싫으신 건가요?”

  “그게 아니라….”

  루시아스는 세 사람이 옥신각신하는 틈을 타 카이란에게 자신의 접시를 밀었다.

  평소와 같이 시끌벅적한 식탁이었다. 하지만 세호는 작은 위화감을 느꼈다. 이상하게 태람이 조용했다. 불안한 마음에 옆을 보니 태람의 몸이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스르륵 옆으로 쓰러지는 작은 몸. 세호는 급하게 태람을 잡았다.

  잠든 것 같긴 하지만 세호는 혹시 몰라 태람의 호흡을 확인했다. 다행히 그에게서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든 것뿐이다.”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이쪽을 보고 있던 일행들은 일제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최근 들어 무리하시긴 했죠. 요령 피우는 것도 못 하는 정직한 분이니까요.”

  “그런 점이 귀엽잖아. 자는 모습도 귀여워.”

  루시아스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세호는 급격하게 기분이 나빠졌다. 책 속 세계에서도 태람은 모두에게 사랑을 받고 있었다.

  선배 옆에 나만 있었으면 좋겠는데….

  뒤틀린 소유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태람은 세호의 인생에 처음으로 나타난 벽이자 열등감을 불러일으킨 존재였다. 처음에 있었던 약간의 호감도 태람이 자신의 작품을 부정하고 조롱한 일로 지워졌다.

  하지만 소설 속에 떨어지고, 태람을 알아가면서 세호는 어쩌면 오해가 있던 게 아닐까 싶어졌다. 앞뒤가 투명한 태람이 뒷이야기를 할 리 없었다.

  왜 그랬을까? 내가 오해를 한 것 같아. 만약 진짜라도 이유가 있었을지도 몰라.

  미움과 집착이 방향을 트니 무거운 애정이 되었다. 세호는 이제 더는 태람이 겉모습만 취향이라고 주장할 수 없어졌다. 그의 모든 것이 좋았다.

  “잠이 드셨다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살펴볼게요.”

  세호는 태람에게 다가오려는 프랑을 손을 뻗어 가로막았다.

  “내가 하겠다.”

  “태람 님의 건강을 위한 겁니다. 고집부리지 마세요.”

  “사심을 채울 생각밖에 없는 주제에 웃기는군.”

  “뭐라고요?”

  “태람은 지친 것뿐이다. 이대로 침대에 눕히면 되는 일이야.”

  “그러니까 그걸 제가 하겠다고요.”

  “보이지 않는 상처가 있을 수도 있으니 치유 주문도 걸고….”

  “태람이 깨겠어. 그냥 둘이 같이 옮겨라.”

  오늘 처음으로 입을 연 루시아스가 두 사람을 중재했다. 세호와 프랑은 얌전히 루시아스의 말을 따랐다.

  태람의 막사에 들어간 세호는 태람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세호는 잠든 태람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조용하고 단정한 태람의 모습이 신기했다.

  하나하나 뜯어보니 볼수록 취향이었다. 곱게 뻗은 풍성한 속눈썹이 예뻤다. 오뚝하게 솟은 코와 오물거리는 입술이 작아서 귀여웠다. 하늘하늘 비단 같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워 보였다. 아이같이 무방비한 얼굴을 만져보고 싶어졌다.

  몇 번을 봐도 질리지 않는 태람의 얼굴에 세호는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그런 세호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지켜보던 프랑이 짜증스럽게 입을 열었다.

  “치유해야 하니 비키세요.”

  “아직도 있었나?”

  “여기에 왕자님만 두고 갈 순 없잖아요.”

  “그건 내가 할 소리다.”

  “쓸데없는 거로 실랑이하고 싶지 않아요. 내일도 강행군이 될 텐데 피로를 풀어드리고 싶어요.”

  세호는 프랑에게 태람을 맡기는 건 내키지 않았지만, 일단 비켜섰다. 분하지만 태람을 치유해줄 수 있는 건 프랑밖에 없었다. 무리하다가 또 쓰러지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대에게 주신 리안의 은총를!”

  프랑에게서 뻗어 나온 빛이 태람의 몸을 감쌌다. 태람의 얼굴이 한결 편해 보였다.

  “다 끝났으면 이제 나가라.”

  “왕자님이 나가시면요.”

  프랑이 침대 옆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어쩔 수 없이 세호도 적당히 책상에 걸터앉았다. 프랑을 절대로 믿을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경계하며 침묵을 지켰다. 피차 살갑게 이야기를 주고받은 사이는 아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프랑이 먼저 침묵을 깼다.

  “왕자님은 태람 님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생각보다 깊은 프랑의 질문에 세호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에게 선배는 뭘까? 한마디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감정이었다.

  어긋나버린 첫 만남. 얼굴만 마주치면 다투기 일쑤였다.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세호는 점점 태람에게 빠져들었다. 혼자만 그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아 서운했고, 태람이 좀 더 자신을 생각해 주길 원했다. 그러면서도 마주할 용기는 없어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만 맴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비겁한 행동이었다.

  세호는 겁이 많은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민 태람이 멋있었다. 그때, 아밀의 방해가 없었다면 솔직하게 속마음을 다 말했을 것이다.

  “계속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태람 님은 언젠가 떠나시잖아요. 왕자님은 그래도 괜찮아요?”

  “힘들겠지만 억지로 묶어둘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고 싶어.”

  “허울 좋은 이야기에요. 하긴. 왕자님은 간절하지 않겠죠.”

  “그게 무슨 뜻이지?”

  “그걸 저한테 묻는 건가요? 저는 태람 님을 절대 놔주고 싶지 않아요.”

  프랑의 말속에는 맹목적인 의지가 가득 담겨 있었다. 세호는 태람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선택한다고 해도 절대 프랑만큼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역시 프랑은 위험했다. 프랑은 요사스러운 뱀 같은 남자였다. 그는 남의 약점을 파고들어 꼼짝 못 하게 하는 집요함과 음침함이 있었다. 올곧은 태람과 어울리지 않았다.

  “태람을 건드리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프랑은 세호의 경고를 비웃었다.

  “왕자님이 태람 님의 뭔데요? 저나 왕자님이나 크게 다를 바 없어요. 적어도 지금은 말이죠.”

  프랑의 말이 세호의 가슴에 칼날처럼 박혔다. 고백을 받은 것과는 별개로 태람은 세호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적어도 세호는 그렇게 믿었다. 요즘 꾼다는 악몽, 갑자기 짙어진 보석, 태람은 무엇하나 털어놓지 않았다.

  어두워진 세호의 표정을 보던 프랑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여기 더 있어봤자 의미가 없네요. 어차피 왕자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난 프랑이 유유히 막사를 나갔다. 혼자 남은 세호는 프랑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내가 선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선배에게 무슨 고민이 있는지조차 모르는데…. 자신이 없어.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선배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리며 막사를 지키는 일 뿐이지.

  우울한 생각이 바닥까지 질질 늘어졌다. 어두운 마계의 하늘처럼 세호의 마음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안개 속에서 헤맸다.

*

  “…야. …호야!”

  익숙한 목소리가 세호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높고, 시끄러운 목소리. 하지만 듣기 좋았다.

  “이세호! 일어나. 벌써 점심때야.”

  세호는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태람 선배?”

  “눈이 아주 흐리멍덩하네. 이거 마시고 정신 좀 차려.”

  세호는 태람이 건네주는 물잔을 받아 단숨에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흐릿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일어나 보니까 네가 내 위에 엎어져 있더라.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선배가 식사 도중에 갑자기 잠드셔서….”

  “알아. 알아. 프랑한테 들었어. 둘이 같이 나를 옮겨줬다며. 그새 친해졌나 봐?”

  “절대 아닙니다!”

  “아니면 아니지. 소리는 왜 질러?”

  “선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그렇죠.”

  “미안하다. 됐냐?”

  세호는 이러다간 또 싸우게 된다는 걸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예측할 수 있었다. 태람에게 듣고 싶은 말이 많았다. 괜한 다툼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소리쳐서 죄송합니다.”

  “아니, 뭐…. 사과할 필요까진 없고.”

  세호의 빠른 사과에 태람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아! 그렇지. 아침 먹으면서 말이 나왔는데 오늘 하루는 쉬기로 했어. 나 때문인 것 같아서 미안하네….”

  세호는 겸연쩍어하는 태람이 귀여웠다. 한편으로는 태람이 비전투원인 것을 과하게 신경 쓰고 있는 것 같아 걱정되었다.

  “선배는 선배 나름대로 자기 몫을 해내고 있습니다. 각자 잘 할 수 있는 일은 다르니까요,”

  생각지도 못한 상냥한 말에 태람은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세호를 빤히 쳐다봤다.

  “왜요?”

  “그냥…. 네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어. 평소라면 ‘선배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 낭비했습니다.’ 이랬을걸?”

  “그 정도는 아닙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맞지?”

  “…할 말 다 했으면 나가주시죠.”

  세호는 태람을 막사 밖으로 떠밀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자신을 흉내 내는 태람에게 조금 기분이 상해버린 탓이다.

  “잠깐! 잠깐! 애초에 여기 내 막사거든! 이제 안 놀릴 테니까 내 말 좀 들어줘.”

  “…뭔데요?”

  “너 따로 할 거 없으면 나랑 나갈래?”

  “나간다고요?”

  세호는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밖은 황량한 마계였다.

  “저번에 말한 검술 훈련 말이야. 그거 오늘 하자. 밥 먹다가 쓰러지는 건 인간적으로 심한 것 같아. 나도 조금 반성했어.”

  “좋습니다.”

  두 사람은 가까운 공터로 나왔다. 

  세호는 우선 태람의 기본 실력을 알아보고 싶어 간단한 대련을 제안했다. 최대한 살살한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미심쩍어하던 태람은 세호의 말을 믿고 검을 뽑았다.

  대련이 시작되고 1분도 안 돼서 태람은 후회했다.

  “장난칩니까? 움직임이 너무 단조롭습니다.”

  “네 검 너무 무거워!”

  “무작정 내지르지 마시고 생각 좀 하세요.”

  “살살 한다며!”

  “충분히 살살하고 있습니다.”

  “거짓말!”

  “그만 징징거리시고 움직이세요. 원을 그리듯이 하면 자연스럽고 연속적인 움직임이 가능할 겁니다.”

  그러나 태람의 검은 휘두르는 족족 허공을 갈랐다.

  “…안 되겠습니다. 기본적인 자세부터 잡아 드릴게요.”

  결국, 세호는 검을 내려놓고 태람에게 다가갔다. 세호는 태람의 허리와 어깨에 손을 올려 자세를 교정해 주었다. 

  태람은 처음에는 뻣뻣하기 그지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점차 능숙해졌다.

  “좋습니다. 손끝에 힘을 주세요.”

  “이, 이렇게?”

  “그러면 오히려 파괴력이 반감돼요. 팔을 쭉 펴세요.”

  “알았어. 이렇게?”

  “잘하셨어요.”

  

  그럭저럭 완성된 태람의 자세를 보고 세호는 처음으로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선배는 힘은 어린아이 이하지만, 의외로 학습 능력은 좋네요.”

  “의외는 빼!”

  그렇게 두 사람은 훈련에 열중했다.

  날이 어둑어둑해지자 태람이 바닥에 축 늘어졌다.

  “나 이제 죽어도 못해.”

  “사람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습니다.”

  “…깜짝이야. 순간 군대인 줄 알았잖아. 나 소름 돋았어.”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일어나세요. 더럽잖아요.”

  “어차피 땀 때문에 씻어야 하는데 뭐 어때.”

  “정말이지 선배는….”

  “너도 이쪽으로 와!”

  태람이 갑자기 세호의 팔을 잡아당겼다. 방심하고 있던 세호는 그대로 땅바닥으로 엎어졌다.

  “선배!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화내지 말고 누워.”

  세호는 반쯤 자포자기해서 그대로 바닥에 누웠다. 태람의 말처럼 이미 엉망이 된 몸이었다.

  “마계의 하늘에도 별은 있구나. 예쁘다.”

  세호는 태람의 시선을 따라 위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하늘에 촘촘히 박힌 별들. 하나하나가 각자 다른 보석 같았다. 마계라는 것을 잊을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확실히 흔하게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가끔은 이런 것도 나쁘진 않네요.”

  “그치? 프랑이 그랬는데 오늘은 그나마 하늘이 맑은 날이래.”

  프랑을 언급하는 태람 때문에 세호는 들떴던 기분이 하강했다. 태람의 일상에 당연한 듯 침투한 프랑이 너무 싫었다.

  선배는 나보다 프랑이 더 소중할까?

  유치해서 입 밖에 낼 수 없는 아이 같은 질문이었다. 세호는 태람이 프랑을 아끼는 것을 알기에 침울해졌다.

*

  프랑은 신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저주했었다. 가진 것이 없었기에 크고 작은 범죄를 저질렀다. 프랑은 자신을 악이라 정의 내렸다. 그런데도 자신에게 신성한 빛은 내려왔다.

  선과 악을 가르는 기준이 없는 신. 공평하지 않은 신. 이런 신에게 존재 가치가 있을까? 신성이란 정말로 신성한 걸까?

  프랑은 누가 들으면 불경하다고 할 생각을 끝없이 했다. 그는 신에게 가장 가깝다고 칭송받는 사람이었으나 어느 순간, 신도이기를 포기했다.

  태람 님. 오직 당신만이 나의 신입니다. 신이 멋대로 나에게 힘을 주었듯이 나 역시 내가 섬길 사람을 직접 선택하겠어.

  그렇게 태람은 프랑의 신이 되었다.

*

  프랑의 막사에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태람 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늦은 밤에 미안해요. 프랑. 너무 힘들어서 잠이 안 와서요. 저한테 치유를 써주시면 안 될까요?”

  태람 쪽에서 먼저 자신을 찾아온 건 처음이었기에 프랑의 마음이 한껏 들떴다, 막 씻고 나왔는지 촉촉한 얼굴에 머리가 반쯤 젖어 있는 태람에게서는 좋은 향기가 났다.

  “그건 어렵지 않지만, 왜 그렇게 지치셨어요?”

  “그게…. 왕자님의 제안으로 단련을 좀 했거든요. 아직도 팔이 아파요.”

  “단련이요? 위험하잖아요. 왕자님도 참 너무하시네요. 안 그래도 체력이 없는 태람 님한테….”

  “제가 부탁드렸어요. 왕자님이 예전에 기본 체력이라도 키우면 좋을 것 같다고 하신 게 생각났거든요.”

  

  열심히 세호를 변호하는 태람의 모습에 프랑은 들떴던 기분이 가라앉았다.

  왕자…. 아니, 세호라고 그랬나? 그 새끼와 태람 님은 분명 같은 세계에서 왔다고 했지. 정말로 거슬려. 거기다 왕자는 메인공으로 태람 님과 이어질 운명이라고 했어. 빨리 죽어버리면 좋을 텐데….

  프랑은 내일 아침에는 왕자의 식사에 더 독한 독을 풀기로 했다.

  “그럼 태람 님, 이쪽에 앉으세요.”

  프랑이 태람에게 자신의 침대에 앉으라고 권하자 태람은 꼬물꼬물 침대 위로 기어 올라갔다. 프랑은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영상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기회가 되면 카이란에게 영상구를 얻기로 마음먹었다.

  “잘 부탁드려요.”

  “그대에게 주신 리안의 은총를!”

  태람의 몸이 찬란한 빛으로 감싸였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한결 편해졌다.

  “더 불편한 곳은 없으신가요?”

  ”두통은 사라진 것 같은데 많이 졸리네요….”

  “체력을 소모하셔서 그래요. 아무 생각 말고 주무세요.”

  “고마워요. 그럼 저는 들어가 볼게요.”

  태람은 눈을 비비더니 그대로 일어나 프랑의 막사를 나가려 했다.

  “잠깐만요. 머리만 말리고 가세요. 그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피곤한데….”

  “제가 해드릴게요.”

  “…고마워요.”

  반쯤 눈이 감긴 태람을 다시 침대에 앉힌 프랑은 어느샌가 꺼내온 수건으로 태람의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 프랑은 섬세하고, 능숙하게 태람의 머리에 남아있는 물기를 탁탁 털었다.

  프랑의 손길이 편했는지 태람은 그에게 머리를 맡긴 채 잠들어 버렸다.

  “태람 님? 자요?”

  이미 잠든 태람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프랑은 헝클어진 태람의 머리를 정돈해주다가 그의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가지런하게 정돈된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더럽히고 싶을 정도로 새하얀 사람이었다. 그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이 전부 사랑스러웠다. 

  “어디로도 보내고 싶지 않아요.”

  프랑은 처음, 이 세계가 가공된 세상이라는 걸 알았을 때 절망했고, 공포를 느꼈다. 보이지 않는 손에 통제되는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불경스럽지만 일시적으로 태람에게 끌리는 마음마저 의심했었다.

  “모든 것이 정해진 대로 흐르는 세상이라도 좋아. 설령 그렇다고 해도 이 마음만은 진짜니까. 그러니까 당신을 이 세계의 묶어 둘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하겠어.”

  프랑은 잠든 태람의 얼굴을 계속해서 지켜보다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

  정신을 차리니 따뜻한 햇볕이 프랑을 비추고 있었다.

  아침? 태람 님을 보다가 잠들어 버렸나?

  “어쩐지 아까부터 대답이 없다 했더니…. 프랑. 자고 있었어요?”

  “태람 님?”

  강렬한 위화감에 프랑은 주변을 둘러봤다. 향기를 머금고 아름답게 피어난 꽃들과 정원수. 종종 태람과 티타임을 즐겼던 온실 정원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환상 마법으로 만든 적이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설마? 결계 속?

  프랑은 집중해서 마나의 흐름을 추적했다. 예상대로 자신과 태람은 환상 결계 속에 있었다. 슬쩍 마나를 흘려보니 경계면이 흐물흐물 일렁거렸다. 짜임이 엉성한 데다 이질적이고 거친 기운이 느껴졌다. 마력도 신성력도 아닌 무언가 다른 기운이었다. 

  프랑은 곰곰이 생각하고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이 공간의 주인은 태람 님인 것 같아. 주기적으로 환상 결계를 겪으면서 영향을 받으신 건가? 태람 님은 마력이 없지만 특별한 존재니까…. 같은 공간인데도 아주 밝은 기운이 나네. 태람 님 다운 마법이야.

  프랑이 좀 더 자세히 현상을 분석하려는 찰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상념을 깨뜨렸다. 

  “오늘따라 집중을 못 하네요. 프랑의 멍한 모습이 신선하긴 한데 조금 서운해요. 저랑 있는 게 지루해요?”

  “그, 그렇지 않아요! 저는 태람 님과 있는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해요.”

  “하하…. 그렇게 정색하지 않아도 알아요. 프랑한테는 장난도 못 치겠다.”

  막 피어난 꽃보다 싱그러운 태람의 미소. 프랑은 자기도 모르게 넋을 잃고 태람을 바라보게 되었다. 이 순간만큼 그는 어린아이보다 무방비했다.

  “또 멍하게 있네. 잠이 덜 깬 건가? 잠도 깰 겸 이거라도 마셔봐요.”

  “감사합니다.”

  프랑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태람이 내민 차를 받아 들었다. 한 모금 머금자 진한 달콤함이 입안에 번졌다. 무나 달았다.

  “밀크티가 입맛에 안 맞나 보네요.”

  테이블 위에는 내용물은 다르지만 언젠가 보았던 화려한 3단 트레이가 놓여 있었다. 프랑이 구현했던 물건들이었다. 모든 것은 태람이 프랑의 마법을 기초로 이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합동 작업 같아서 기분이 좋아.

  프랑은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그럼 디저트라도 먹어요.”

  “네, 네!”

  태람의 채근에 프랑은 다시 테이블 위로 눈을 두었다. 트레이에는 초콜릿으로 코팅된 쿠키와 초콜릿 푸딩. 초콜릿 케이크 등이 담겨 있었다. 전부 혀가 마비될 정도로 달콤한 것들뿐이었다. 프랑은 적당한 것을 잡아 입안에 넣었다. 예상대로 달았다.

  “너무 제가 좋아하는 것만 가지고 왔나 봐요. 미안해요. 프랑.”

  “아니요. 맛있어요.”

  “입에 안 맞는 거 다 티 나요. 사실은 단 거 별로 안 좋아하죠?”

  “그게….”

  “배려해주는 건 고맙지만 저는 프랑이 좋아하는 게 뭔지 알고 싶어요.”

  “제가 좋아하는 거요?”

  “그래요. 좋아하는 디저트 말고도…. 좋아하는 장소나 책이나 음악이나 뭐 그런 것들요.”

  태어나서 처음 듣는 질문에 프랑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제껏 누구도 자신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각자의 입맛대로 나라는 사람을 멋대로 규정지었다, 그저 정해진 역할을 강요했다. ‘더러운 고아 새끼’였던 시절에도…. ‘위대한 대신관님’이 된 지금도 변하는 건 없었다.

  저에게 의미 있는 건 태람 님뿐이에요. 오직 당신만을 좋아해요.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하지만 이 마음이 당신에게는 너무 무겁죠?

  프랑은 태람이 자신을 피할까 봐 두려웠다. 

  “부끄럽지만 잘 모르겠네요.”

  “좋아요! 그럼 모처럼 정원에 왔으니까 프랑이 좋아하는 꽃부터 알아보러 가요!”

  벌떡 일어난 태람이 프랑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프랑은 태람의 작은 손, 작은 등이 자신을 새로운 세계로 이끌어 주는 왕자님의 등 같아 보였다. 

   “정말 다양한 꽃들이 피어 있네요.”

   “그렇네요.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아요.”

  다양한 꽃들이 저마다 화려함을 뽐냈다. 그 모습이 웅장하면서도 어딘지 포근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정원을 거닐었다. 

  “어때요? 프랑. 좋아할 것 같은 꽃은 찾았어요?”

  “잘 모르겠어요.”

  프랑은 이동하는 내내 무엇이 그리 신기한지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리는 태람만을 바라봤다.

  “프랑! 저 말고 꽃을 봐요.”

  “꽃도 함께 보고 있어요.”

  프랑은 문득 화려한 꽃들 사이로 유독 시선을 끄는 꽃을 발견했다. 새하얗고 작은 종 모양의 꽃은 가녀리면서 꿋꿋한 게 태람과 닮아있었다.

  “저 꽃이 마음에 들어요?”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이름을 모르니 아쉽네요.”

  “노트북이라도 있으면 검색을 해볼 텐데…. 아! 저 꽃이 뭔지 기억났어요!”

  “정말요?”

  “눈송이 꽃(Snowflake) 이에요.”

  “눈송이 꽃…. 작고 동글동글해서 그런지 어울리네요.”

  “예전에 아방수에 어울리는 상징 꽃을 찾았었는데….”

  “아방수요?”

  “그, 그게 저희 세계에서는 작고 귀여운 남자를 그렇게 부르기도 해요.”

  “그렇군요. 태람 님 덕분에 새로운 사실을 알았어요. 태람 님 같은 분을 아방수라고 하는군요.”

  “하하…. 그거 되도록 안 쓰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런데 눈송이 꽃말이에요. 생각해보니 이 세계에서는 다른 이름이겠네요.”

  “눈송이 꽃이 좋아요. 저는 그렇게 부를래요.”

  “프랑이 좋다면 그렇게 해요. 말 나온 김에 눈송이 꽃의 꽃말도 알려드릴게요. 눈송이 꽃의 꽃말은 ‘아름다움’이래요. 프랑한테 참 잘 어울리네요.”

  “저보다는 태람 님이….”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요!”

  태람은 수줍어하는 프랑을 방치한 채 화단 가운데 풀썩 주저앉아 꼬물꼬물 꽃을 엮었다. 서툰 손놀림이었다. 그래도 끝까지 엮고 나자 제법 그럴듯한 화관이 나왔다.

  “그게 뭔가요?”

  “프랑한테 주려고 만들었어요!”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태람은 프랑의 머리 위에 살포시 화관을 씌워줬다. 

  “음, 역시 어울린다. 아니, 진짜 심하게 예쁘네요.”

  “…그 정도는 아니에요.”

  프랑은 밝게 웃는 태람을 보는 것은 좋았으나 노골적인 칭찬에 부끄러워졌다.

  “소중하게 보관할 테니까 일단 빼도 될까요?”

  “안 돼요. 적어도 정원에 있을 때는 끼고 있기. 잘 어울리는데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태람 님은 가끔 짓궂어요.”

  “예쁜 걸 예쁘다고 하는데 왜요?”

  어느새 웃음이 전염된 듯 프랑도 태람을 따라 웃고 있었다.

  당신이 항상 나에게 웃어줬으면 좋겠어. 하지만 내가 한 짓을 알게 되면 다시는 웃어주지 않으시겠지. 프랑은 자신이 지독히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신을 저버린 신도가 간절히 기원했다.

  당신이 빛을 잃게 되어도 영원히 제 곁에 머물 수 있기를.

*

  “…랑…. …프랑!”

  익숙한 목소리가 프랑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태람이었다. 달달하고 듣기 좋은 목소리. 꿈의 연속일까?

  “일어나요. 벌써 점심때에요. 그냥 자게 둘까 했는데 식사를 거르면 몸이 상하니까요.”

  프랑은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태람 님?”

  “어제는 저희 둘 다 그대로 잠들어 버렸나 봐요. 일단 다른 사람들한테는 하루만 더 쉬자고 했어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물부터 마셔요. 기운이 날 거예요.”

  프랑은 태람이 건네주는 물잔을 받아 천천히 들이켰다. 차가운 물이 온몸으로 퍼져나가자 흐릿했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오는 것 같았다.

  “일어나 보니까 프랑이 옆에 있어서 놀랐어요. 생각해보니까 매번 저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을 치유해 주는 것도 참 피곤한 일이겠죠.”

  “아니에요. 폐를 끼쳤네요….”

  “제가 더 죄송하죠. 어제도 저 때문에 치유 마법을 쓰느라 힘드셨죠?”

  “제가 하고 싶어서 한 일인걸요.”

  “아! 그렇지. 오늘은 후식은 아밀한테 부탁해서 꽃차를 준비했어요.”

  “꽃차요?”

  “네. 프랑은 단 것보다 은은한 향을 더 좋아하잖아요.”

  “제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나요?”

  “어? 생각해보니 없네요.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지? 거의 기억이 나진 않지만 꿈에서 프랑을 본 것 같아요. 일어나니까 프랑한테 꽃차를 우려줘야 할 것 같아서…. 이상하죠?”

  “아니요. 그 꿈은 행복했나요?”

  “네! 아주 즐거웠어요. 프랑은 꿈에서도 저한테 상냥했거든요.”

  “제가 상냥했나요?”

  “당연하죠. 그럼 저는 먼저 갈게요! 빨리 밥 먹으러 나와요.”

  태람이 막사를 나가고 프랑은 홀로 남겨졌다.

  “태람 님, 저는 상냥한 사람이 아니에요.”

  프랑은 태람의 꿈을 엿보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루시아스가 태람에게 심장을 바치는 게 정해진 이야기라는 것. 그것을 막는다면 이야기가 일그러진다는 것.

  괴로워하며 울부짖는 태람을 보면서도 프랑은 죄책감을 증폭시키는 악몽을 멈추지 않았다. 괴로워하는 태람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흔들렸지만 끝내 그를 외면했다.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비겁한 저와는 반대로 태람 님은 어떤 환상 속에서도 눈을 돌리지 않았어요. 정말로 상냥한 사람은 당신이야. 그렇기에 당신은 결국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겠죠. 미련하고, 바보 같은 사람. 하지만 그런 점이 사랑스럽지.

*

  태람은 순탄한 카이란의 용생에 나타난 최대의 난제였다. 

  처음 보는 형태의 영혼에 대한 순수한 흥미. 아주 작은 관심에서 출발한 마음이었다. 작은 호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고, 덩치를 불렸다. 정신을 차리니 자신의 모든 걸 좌우할 정도로 거대한 바다가 되어있었다. 이제까지 겪어본 적 없는 불편한 감정. 갑자기 찾아온 변화는 달갑지 않았다. 

  물건이든, 생물이든 내가 독점하지 못하는 건 없었는데…. 왜 너는 온전히 가질 수 없지? 어떻게 하면 너를 독점할 수 있을까? 차라리 너를 어딘가에 가둬버릴까? 그러면 너는 슬퍼하겠지? 슬픈 얼굴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카이란은 고개를 든 못된 생각을 다시 마음속에 봉인했다.

*

  몸 상태가 안 좋다며 나오지 않은 프랑을 제외하고는 언제나와 같은 식사 시간. 점심 메뉴는 고블린 야채볶음 이었다. 카이란은 언제나처럼 분주하게 포크를 움직였다.

  아밀이 최근 들어 고블린 고기만 고집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오늘도 아밀의 요리는 맛있어.

  “태람! 이거 먹어 봐!”

  “저는 배가 불러서….”

  “이제 막 먹기 시작했으면서 무슨 소리야.”

  카이란은 태람이 곤란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귄유를 멈추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게 이 볶음요리는 정말 대단했다. 아삭아삭 씹는 재미가 있는 야채. 쫀득하면서도 입에 들어오면 사르륵 녹는 부드러운 고기, 여기에 감칠맛 나는 간장 소스까지 더 해지니 천상의 맛이었다.

  “진짜 맛있어서 그래. 태람도 꼭 맛보면 좋겠어! 응? 한 번만.”

  “…머, 먹을 테니까 그만 쳐다봐요.”

  카이란은 눈을 딱 감고 볶음요리를 집어 든 태람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태람은 자신의 얼굴에 약했다.

  

  “맛있네요….”

  “그치?”

  “…몬스터 고기만 아니라면 순수하게 즐길 수 있을 텐데 말이죠.”

  “인간은 온갖 것을 다 먹잖아. 몬스터는 왜 안 되는데?”

  ”그야…. 몬스터는 일단 가축과 다르잖아요. 솔직히 독을 먹는 기분이에요.”

  “면역력이 생겨서 이제는 어떤 몬스터도 다 먹을 수 있겠다. 그치?”

  “그런 게 생겨서 뭐 해요.”

  “맛있다며?”

  “맛있어요. 그렇긴 한데….”

  카이란은 툴툴거리면서도 착실히 수저를 놀리며 고블린 요리를 먹는 태람이 귀여웠다.

  분했다가, 행복했다가 참 바쁘네. 다채로운 태람의 감정을 엿보는 건 정말 즐거워.

  카이란이 한창 태람을 감상하고 있을 때, 방해꾼이 나타났다. 식사 내내 고민이 있는지 깨작거리기만 했던 세호였다.

  “태람. 잠깐 의논할 일이 있다.”

  “네, 알겠어요. 저는 먼저 일어날게요.”

  “그래. 가 봐.”

  태람은 세호를 따라 막사로 들어가 버렸다. 카이란은 어쩐지 혼자만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들어 씁쓸해졌다.

  세호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는 태람. 카이란은 태람의 절박함 알았기 때문에 파고들진 않았지만, 그가 하고 있는 일이 이 세계의 존속과 관계된 일이란 건 알 수 있었다.

  왜 너는 나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네가 부탁하면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데…. 그게 세계를 뒤엎는 일이 된다고 해도 말이야.

  카이란의 긴 용생에서 단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부정적인 감정이 기어 올라왔다.

  “하나도 재미없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나쁜 마음을 식히기 위해 카이란은 괜히 막사를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배고프다.”

  아직 배가 고팠던 카이란은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식탁에는 의외의 인물이 남아있었다. 흐트러짐 없는 바른 자세로 단정하게 식사 중인 루시아스의 옆에는 엄청난 양의 빈 접시가 쌓여 있었다.

  “너도 의외로 많이 먹네.”

  루시아스는 카이란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모닥불에 가까운 자리를 권했다.

  “몸이 차니까 모닥불 옆에 앉으라고?”

  루시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카이란은 얌전히 루시아스의 말을 따랐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포근하게 내려왔다. 루시아스의 상냥함은 모닥불의 온기처럼 은은하게 카이란의 마음에 스며들었다.

  그러고 보면 루시아스도 도통 정체를 알 수 없지. 요즘 들어 짙어진 마력의 파장을 보면 마족인 건 확실한데 생각보다 거물일 것 같단 말이지.

  루시아스를 관찰하던 카이란은 툭하고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너 혹시 마왕이야?”

  “그렇다.”

  루시아스가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버린 터라 카이란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생각한 뒤 재차 물었다.

  “…진짜? 마왕이야?”

  “네게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다.”

  카이란은 자신도 막 나가는 편이지면 루시아스는 더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나도 드래곤이면서 드래곤 퇴치에 참여했긴 했었지. 그래도 그건 나를 노리는 건 아니었잖아. 콕 집어서 마왕 토벌 파티인데 마왕이 들어온 게 더 이상해.

  “그거 태람도 알아? 아니, 대체 어쩔 생각이야. 너 괜찮아.”

  “모른다.”

  “태람이 네 정체를 모른다고? 아니면 앞으로 어쩔 생각인지 모른다고? 어느 쪽?”

  카이란이 혼란스러워하든 말든 식사를 마친 루시아스는 바로 일어났다.

  “태람에게도 모두에게도 절대 피해를 주지 않을 생각이니 안심해라.”

  “아니, 그럼 너 자살이라도 할 거야?”

  “곁에 있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는 안 되는 건가? 너 역시 그럴 텐데….”

  말은 마친 루시아스는 유유히 떠났다. 혼자 남겨진 카이란은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을 계속해서 곱씹었다.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 애초에 나는 왜 태람을 좋아할까? 특이한 영혼이니까? 그렇게 따지만 루시아스도 왕자도 프랑도 특별한 편이지. 귀여워서? 아밀도 귀엽잖아. 내가 이렇게 다른 생물의 마음을 신경 쓴 적이 있었나?

  

  고민하는 건 카이란의 성미에 안 맞았다. 고민한 보람도 없이 답은 쉽게 나왔다.

  있고 싶은 만큼 태람의 옆에 있으면 되잖아.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이럴 시간에 옆에 있을래.”

  적당히 남은 요리를 먹고, 벌떡 일어난 카이란은 태람의 막사로 들어갔다.

*

  카이란은 노크와 동시에 막사를 활짝 열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란 태람은 토끼처럼 눈이 커져 있었다.

  “카이란?”

  “야식 먹으러 가자.”

  “지금요?”

  “지금 먹으니까 야식이지. 너 아까 밥 제대로 못 먹었잖아.”

  “그렇긴 한데…. 자, 잠깐 만요!”

  태람이 뭐라고 하기 전에 카이란은 그의 손을 잡고 공간 이동 마법을 썼다. 

  “여기는 코른?”

  “응! 저번에 나만 너랑 못 놀아서 서운했어.”

  “그건 그렇네요. 카이란하고만 못 왔었죠.”

  태람은 아직도 얼떨떨한 듯 보였으나 기분이 나빠 보이진 않았다. 다소 억지를 부린 것은 인지하고 있었기에 카이란은 살짝 안심했다. 

  오랜만에 온 코른은 여전히 활기차고 사람들로 북적였다. 노점상들은 적극적으로 호객행위를 하였고, 곳곳에서 다양한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태람은 즐거워졌다. 어두운 마계를 잠시라도 벗어났다는 것에 해방감도 느꼈다.

  “좋긴 한데 괜찮아요? 대체 어떻게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거죠? 저는 마법은 잘 모르지만 공간 이동은 엄청난 정신력과 마나가 소모된다고 들었어요.”

  “무리한 건 사실인데 코른은 내 레어랑 가깝잖아. 레어 안에 있는 이동 장치의 도움을 받았지. 이따 돌아가는 것까지 생각하면 내일은 거의 힘을 못 쓰겠네.”

  “정말 괜찮아요?”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요즘엔 전투도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카이란이었지만 여차하면 마왕인 루시아스도 있으니 문제없다는 계산도 솔직히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고작 야식 때문에 이렇게 무리를 하시다니….”

  “하루 정도? 아니, 이틀이면 회복되니까 괜찮아. 그리고 나한테는 중요해.”

  “야식을 먹는 게요?”

  “아니! 너랑 맛있는 걸 먹는 거.”

  “정말이지. 카이란은 어쩔 수 없네요.”

  “이미 와버렸으니까 가자.”

  “알았어요. 그럼 어디로 갈까요?”

  “네가 좋아하는 음식은 뭐야? 그거 먹으러 가자.”

  “아니에요. 저번에 못 온 카이란이 고르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점심때 몬스터 고기를 억지로 먹였잖아. 그게 미안한 것도 있어.”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어요? 몬스터 고기라서 거부감이 있었을 뿐이지. 맛있었어요. 카이란 덕분에 늘 새로운 경험을 하는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해주는 건 고마워. 근데 네가 좋아하는 게 뭔지 궁금하기도 해.”

  ”정 그러시다면….”

  태람은 세호와 갔던 곳으로 카이란을 데리고 갔다.

  구석에 있는 낡고 오래된 작은 흙벽돌집. 닭 요리라는 투박한 푯말. 저번에 갔던 가게는 모습은 변한 것이 없었지만 긴 줄이 늘어져 있었다.

  “다른 데 갈까?”

  “기다리는 것도 나름 추억이니 기다려요.”

  “알았어.”

  태람은 긴 줄에 질려버린 카이란을 끌고 줄의 꼬리에 가서 섰다. 태람의 머릿속은 치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줄은 쉽게 줄어들지 않았다.

  “태람. 너 엄청 추워보여.”

  “이게 다 카이란이 갑자기 쳐들어와서 그래요. 옷을 더 챙겨 입을 시간도 없었잖아요.”

  “책임질게. 내가 안아줄까?”

  “여기서요?”

  “그럼 다른 곳에선 괜찮다는 뜻?”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요즘 나한테 쌀쌀맞은 것 같아.”

  “그게 아니라….”

  “조금 슬프네.”

  카이란이 작정하고 한껏 슬픈 표정을 지으니 태람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카이란은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함락될 거로 생각하고 한층 서글픈 표정을 지었다. 태람은 카이란을 어리게 보는 경향이 있었다.

  카이란은 속으로 작게 툴툴거렸다. 보살핌받는 게 싫지 않고, 이용하기도 하니까 상관없지만 가끔은 태람이 나한테 기댔으면 좋겠어.

  “그렇게 해요. 그럼.”

  결국에는 카이란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태람이었다. 카이란은 원하는 대로 흘러간 상황에 만족했다.

  하여간 물러터졌다니까….

  “자. 이리 와.”

  카이란이 두 팔을 벌리자 태람은 주뼛주뼛하면서 그의 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제 좀 덜 추워?”

  “그렇긴 한데….”

  “부끄러워?”

  “다 알면서 물어보지 마세요. 가만 보면 은근히 성격이 나빠요.”

  카이란은 태람을 품에 안으니 기분이 좋았다. 작고 말랑거리는 게 슬라임 같아. 기분 좋은 향기도 나네.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숨을 깊이 들이쉬자 달콤한 향이 더 짙어졌다.

  “초콜릿? 밥은 안 먹었으면서 디저트 꼭꼭 챙겨 먹었네.”

  “카이란. 그만. 간지러워요. 진짜 개 같아.”

  “개가 아니라 용. 내 출생을 왜곡한 벌로 주문할 때까진 이러고 있을래.”

  투덕거리다 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제일 앞쪽까지 도달했다. 태람은 조금의 미련도 없이 카이란의 품에서 벗어나 가게로 들어갔다. 카이란은 따뜻한 온기가 멀어지자 아주 아쉬웠다. 자신만 좋았나 싶어서 괜히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그럼 주문하고 올게요. 카이란은 뭐 드실래요?”

  “아니야. 힘들 텐데 앉아있어.”

  카이란은 메뉴판을 유심히 보다가 주인에게 당당히 외쳤다.

  “여기 화끈화끈 파이어 맛 두 개!”

  잠시 후 새빨간 소스로 범벅된 닭 두 마리가 나왔다.

  “이거 제일 매운맛 아니에요? 그래도 맛있어 보이네요! 잘 먹겠습니다.”

  잔뜩 들떠있던 태람의 표정에 카이란은 괜히 심통이 났다. 정말 먹을 것밖에 모르는 건 태람이라고 생각했다. 카이란은 태람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새빨간 소스가 잔뜩 뿌려진 닭다리를 우걱우걱 먹었다.

  “와. 카이란은 진짜 잘 먹네요. 저한테는 조금 매운데 그래도 맛있어요!”

  태람은 카이란의 기분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고, 행복한 듯 닭을 뜯었다. 태람은 닭 한 마리를 다 먹을 때까지 카이란의 기분이 상한 걸 알아채지 못했다.

  결국, 카이란은 제풀에 지쳐서 평소대로 돌아왔다. 둔해 빠졌어.

  야식을 다 먹은 두 사람은 거리에 전시된 그림이나 무희의 공연 등을 구경했다.

  “저 그림 좀 봐요. 붓이 혼자서 움직이네요.”

  “움직이는 그림은 내 레어에도 많아.”

  “다음에 꼭 보여주세요.”

  순간, 카이란은 태람과 자신에게 다음이 있을까 의문이 들어 우울해졌지만, 그의 기분을 깨고 싶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응! 좋아.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지 와도 돼.”

  “저쪽도 가봐요.”

  진열대에 놓인 악세서리들을 구경하던 중에 카이란은 마음에 드는 것을 발견했다.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릴 것 같아.”

  카이란은 붉은색 보석이 박힌 리본을 들어 태람의 머리에 툭 얹어봤다.

  “이건 여자 거잖아요.”

“너도 맨날 프랑한테 예쁘다 예쁘다 하잖아. 예쁜 거에 남자, 여자가 어디 있어? 형이 그랬어. 예쁜 거랑 예쁜 거가 합쳐지면 더 좋은 게 된다고.”

  “이, 아무튼 저는 리본은 안 할 거예요.”

  태람과 카이란이 옥신각신하는 와중 악세서리 가게 주인이 끼어들었다.

  “리본을 꼭 머리에 달 필요는 없잖아요. 손목에 둘러도 되고요. 두 분 연인이세요?”

  “맞아.”

  “아니요.”

  “왜 그렇게 단호해? 나 싫어?”

  태람에게 특히 먹히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람은 또다시 카이란에게 넘어갔다.

  “아니…. 저희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잖아요.”

  “내 처음을 빼앗아 놓고….”

  “오해할만한 소리 하지 마세요!”

  “슬퍼서 이대로 혼자 돌아갈래.”

  “그렇게 치사하게 나올 거예요?”

  “이 리본을 달아주면 기분이 풀릴 것 같지만 맘대로 해.”

  “카이란!”

  가게 주인까지 합세했다.

  “이 리본은 룬베르 왕실에도 납품되는 최고급 실크로 만들어졌어요. 마침 딱 하나 남았어요.”

  태람은 작게 한숨을 쉬더니 마침내 항복했다.

  “알았어요.”

  “주인 누나. 이거 살게!”

  카이란은 재빨리 계산하고, 주저 없이 바로 태람의 머리에 리본을 올려줬다.

  “역시 어울린다.”

  “꼭 머리에 할 필요 없다고 그랬잖아요.”

  “그 말은 가게 주인이 했잖아.”

  “그렇긴 한데….”

  “오늘 밤까지만 끼고 다니자.”

  “나중에 두고 보세요. 복수할 거야.”

  “그거 기대되네. 얼마든지 복수해. 그 다음에는 더 귀여운 모습을 보여줄 거지?”

  “공연이나 보러 가요.”

  두 사람은 사이좋게 밤의 시장을 즐겼다.

*

  “오늘은 정말 즐거웠어요. 설마 마을에 갈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요. 역시 카이란의 마법은 대단하네요.”

  “원한다면 뭐든지 해줄 수 있어.”

  “그렇게 말하면 정말 뭐든지 말해 버릴 거예요.”

  카이라은 꽤 진지했지만 태람은 장난이라 생각하고 가볍게 받아쳤다. 

  네가 원한다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카이란은 하고 싶은 말을 꾹 삼켰다. 해맑은 태람의 미소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내일 아침에는 아밀이 어떤 몬스터 요리를 해줄까?”

  “몬스터 요리는 싫은데….”

  “좋은 경험이라고 했잖아.”

  “가끔만 하고 싶어요. 아주 가끔만.”

  “너무 늦었다. 들어가.”

  “네!”

  태람이 떠나고 잠자리에 들려던 카이란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살기를 감지했다.

  일정한 패턴의 움직임을 보아하니 몬스터는 아닐 것 같았지만 혹시 몰라 카이란은 살기를 감지한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는 세호가 막무가내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젠장!”

  한참을 파괴적인 행위를 지속하던 세호는 이내 검을 집어 던졌다. 검이 듣기 거북한 쇳소리를 내며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버려진 검처럼 그도 아무렇게나 바닥에 드러누웠다.

  카이란은 못 본척하려다 태람을 떠올리고는 세호에게 다가갔다.

  “네가 다치면 태람이 슬퍼할걸?”

  “카이란?”

  “어둡고 복잡한 감정이네. 아까 태람이랑 잘 안 풀렸어?”

  세호는 도저히 왕자를 연기할 기분이 들지 않았다. 프랑만큼은 아니지만 카이란 역시 고민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선배는 너희를 소중히 해. 어쩌면 나보다도.”

  화풀이에 가까운 세호의 말에도 카이란은 빙긋 웃었다.

  “너도 태람과 비슷한 존재였지. 아. 쓸데없이 놀라지 마. 더 파고들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고. 근데 말이야. 내가 보기에는 다 쓸데없는 고민이야.”

  “뭐라고?”

  “중요한 건 네 마음이잖아.”

  “…내 마음?”

  카이란은 루시아스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을 듣고 자신도 어느 정도는 마음이 정리되었으니 세호에게도 효과가 있을 것 같았다. 카이란은 태람을 위해서라도 세호가 정신을 차려주길 바랐다.

  “나는 태람이 좋으니까 옆에 있을 거야. 너도 그러면 되잖아.” 

  세호의 마음속 흔들림이 어느 정도 잦아든 것을 확인한 카이란은 공터를 떠났다.

  카이란은 태람에게 세호가 조금 더 특별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일부로 알려주지 않았다.

  속상하긴 하지만 아직 끝난 게 아니니까.

  모든 게 끝나면 정식으로 청혼할 테니까 기다려줘. 태람.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