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 드래곤, 아카데미 가다!-192화 (192/225)
  • 192화. 시작된 전쟁 (5)

    에스카르 산맥을 지키는 드래곤들의 표정은 모두 숙연했다.

    누구 하나 섣불리 입을 열지도 않았으며, 드래곤 특유의 여유도 웃음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모두 함께 일생 최대의 위기를 맞았다.

    잃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일족을 너무도 어이없이 잃었고, 절대 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상대에게 너무 쉽게 당했다.

    웬만한 몬스터들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할 만큼의 강한 마력의 파장.

    그들이 있는 곳은 여느 때보다 강한 마법으로 보호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감은 해소되지 않았다.

    “오셨네요.”

    “대비는 모두 마쳤어요. 그런데 상황이 개 같긴 마찬가지네요.”

    “하셀님. 마족들이 아직도 빈틈을 노리고 들어오고 있습니다.”

    돌아온 하셀이 아직 입을 떼기도 전에 보고가 쏟아져 들어왔다.

    “라노스님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지난날 루카스가 돌아온 것을 모두 다 함께 알게 되었지만, 그 이후에 루카스를 볼 수는 없었다.

    “다들 고생이 많습니다.”

    그들의 말을 우선 잘라낸 하셀이 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라노스님께서는 이종족들을 모두 안전지대로 옮기고 계실 겁니다.”

    “이종족들을요? 그런 짓을 왜…….”

    블랙 일족인 에라몬드가 의문을 표하자, 그것을 받아치려 입을 떼던 하셀이 다시 말을 삼켰다.

    그래 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아서였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사명이니까요.”

    “거참. 쓸데없는 일을 하시는군요. 괜스레 피곤하지 않습니까. 안 그래도 은혜도 모르는 족속들이 아닙니까?”

    하지만 에라몬드는 하셀과 달리 말을 참지 않았다.

    “에라몬드님. 눈치 좀 챙기세요.”

    그때 뒤에서 가만히 말을 듣던 레드 일족인 아벨이 에라몬드를 타박했다.

    “뭐요? 눈치를 챙겨?”

    에라몬드가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눈치요. 그러니까 친구가 없는 거예요. 아니 애초에 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라도 좀 알고는 계세요. 이종족들이 전부 등 돌리려던 거 하셀님이랑 다른 장로들이 고생해서 다시 붙잡아 둔 건 아시나?”

    아벨이 차분히 쏘아붙였다.

    “하! 나는 그 일에 동의한 적도 없소! 그 이종족들 없어도 충분하다는 건 다들 알지 않나? 지금도 보면 알지 않소! 이종족들 마을을 지켜주겠다고 나가 있던 이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지 않소!?”

    에라몬드가 언성을 높였다.

    “그들을 지키지 않았으면요? 그럼 우리가 왕으로 칭송받을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하세요? 여태 왕이라고 대접받았으면 그에 맞게 행동을 좀 하세요. 왕관만 썼다고 왕인가요?”

    “저, 저런!”

    싸움이 과열되자 결국 하셀이 그들 앞을 가로막았다.

    “그만들 하시죠. 지금 우리끼리 이래봤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건 다들 알지 않습니까.”

    “그래요.”

    아벨은 끝까지 언성 하나 높이지 않고 차분한 모습이었다.

    “그보다 정령왕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러자 다들 침묵을 지켰다. 아무도 응답이 없는 듯했다.

    “심각하군요…….”

    “하셀님. 혹시 정령왕들이 이번 일에 연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아벨이었다.

    “의심은…… 하고 있습니다.”

    자연을 의심한다는 건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들은 자연 자체인 이들이었다. 자연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그들의 의사를 확인했다. 그들은 드래곤들의 도움 요청을 거절했고, 마족들의 편에도 서지 않겠다 이미 못을 박았다.

    “그럴 가능성이 현저히 적다는 것은 아시지요?”

    “압니다.”

    “하지만 저도 의심이 가는 건 사실이에요. 마왕과 마신의 작품이라기엔 이번에 쓰인 아티팩트며 술식이 굉장히 추접스러웠거든요.”

    다른 드래곤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추접스러운 술식과 아티팩트. 그게 정령왕의 짓일 가능성은 더 낮죠.”

    “그 말도 맞군요. 저 역시 아벨과 하셀님의 말엔 동의합니다만, 제가 본 바로도 정령왕의 짓일 가능성은 낮다고 파악했습니다.”

    “흠…… 혹시 정령왕들이 아니라면 누굴까요?”

    그러자 여러 이름들이 거론되기 시작했다.

    “마신이 쓸만한 수도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어둠의 신은 아닐까요?”

    “그쪽이 더러운 식을 잘 쓰기로는 유명하죠. 아티팩트도 그렇고.”

    “그렇다기엔 쓰인 성유물들이 너무 다양했다. 아모레의 것도 있었지 않았나.”

    그러자 장내에 다시 침묵이 흘렀다.

    “어렵군요. 하지만 정령왕들의 짓이 아니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습니다. 모든 일에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으니 말입니다.”

    정령왕뿐 아니라 자연을 유지하는 하급 정령을 제외한 모든 정령들이 소환에 응답하지 않았다.

    사실 이것만으로 의심할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파앗!

    그때 루카스가 그들의 앞에 나타났다.

    “라노스님.”

    모두 아는 얼굴들이었지만, 이곳에 없는 이들은 대부분 죽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렸다.

    “다들…… 괜찮은가.”

    하마터면 무사하냐는 말이 나올 뻔했다.

    “예. 라노스님은 괜찮으십니까.”

    “그래. 레아디스. 길레온의 일은 안타깝게 되었네.”

    레아디스는 픽시들의 숲을 지키다가 죽은 길레온의 형제였다.

    “어쩌겠습니까. 저 역시 안타깝지만, 그의 운명이었을 거라 생각할 수밖에요.”

    레아디스가 쓰게 웃었다.

    “아벨. 가우스의 일은…….”

    “괜찮아요. 아버지도 그들을 지키다 죽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주신께서 돌아오시면 어떻게든 새 삶을 주시겠지요.”

    아벨 역시 침착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입꼬리가 살짝 떨려왔다.

    “다들…… 미안하네.”

    루카스가 자리에 모여 앉은 일족들을 향해 말했다.

    “모두 내 탓일세.”

    누구 하나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마족과의 일은 천여 년 전의 일이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 중 관련이 없는 이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련이 있다고 한들, 전대 로드였던 루카스가 거의 독단적으로 진행하다시피 한 일이기에 그들 역시 생각하는 바가 조금씩 다른 듯했다.

    “괜찮아요. 일족의 일이잖아요.”

    아벨이 먼저 입을 떼자 다른 이들도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어차피 우리 모두 겪어야 할 일이었지요.”

    “네. 그리고 그때 마족들을 내치지 않았더라면 또 무슨 일이 생겼을지 모르는 일 아니겠어요?”

    고마웠다. 이들 중 마음이 성한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당장 제 곁에 선 하셀만 보아도 아들을 잃지 않았던가.

    “……사실 나는 안 괜찮소이다.”

    블랙 일족인 에라몬드가 입을 열었다.

    “그래. 에라몬드. 자네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크네.”

    “나는 마족들의 일이 있었을 때도 반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지 말자고 말입니다. 그런데 로드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에라몬드가 버럭 언성을 높이자, 옆에 앉아있던 다른 블랙 일족인 엘론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에라몬드님. 진정하세요.”

    엘론 역시 마족들이 마계로 내쫓길 때 반대하는 쪽에 섰던 이 중 하나였다.

    “아니, 오늘 다들 왜 이러는 게요? 왜 자꾸만 내게만 반기를 드냐는 말이오! 내가 뭐 틀린 말을 했소? 엘론. 네가 한번 말해봐라. 내가 뭐 틀린 말을 했느냐?”

    “에라몬드님. 지금 여기서 누가 옳고 그른지를 판가름할 때인가요?”

    “오늘 자꾸만 내게 반기를 드는데 그쪽도 할 말이 많지 않소? 이제 레드 일족은 자네 혼자 남겨지지 않았소?”

    “하…….”

    아벨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에라몬드. 자네 입장은 나도 충분히 이해하네.”

    루카스는 지금 상황을 최대한 잘 넘기고 싶었다. 아벨의 말대로 누구의 말이 맞고 틀린 걸 떠나서 지금은 힘을 합쳐야 하니까.

    “이해요? 도대체 당신이 뭘 이해합니까. 오천 년이나 살다가 갔으면 된 거지, 뭐 하러 다시 나타나 속을 또 뒤집습니까? 그랬으면 그냥 우리끼리 알아서 해결을 했을 텐데 말입니다!!!”

    결국 에라몬드가 선을 넘었다.

    “에라몬드님. 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그냥 가세요. 레어로 들어가 잠이나 주무시라고요. 뭐 그동안 이기면 그쪽도 좋은 거고 그게 아니라도 운이 좋으면 최후의 드래곤쯤은 되지 않겠어요?”

    루카스와 하셀의 표정이 급격히 굳자, 아벨이 벌떡 일어나 에라몬드의 앞에 섰다.

    “에라몬드님. 그만하세요.”

    엘론이 그의 팔을 다시 한번 잡아당겼지만, 에라몬드는 엘론의 손을 팍 뿌리치고는 등을 돌렸다.

    “하……! 좋소. 나는 그럼 최후가 되든 혼자 죽든 알아서 할 테니 그쪽들도 알아서 하시구려.”

    에라몬드가 그대로 사라졌다.

    “하…….”

    모든 이들이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엘론이 루카스를 향해 말했다.

    “아니다. 엘론.”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에라몬드님은 이따 제가 가서 다시 데리고 올게요.”

    “그래. 부탁하마.”

    지금 쫓아가봤자 상황이 나아지진 않을 것이다.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마음을 가다듬은 루카스가 다시 입을 뗐다.

    “아모레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신계 역시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의 신은 마신의 편에 섰다.”

    “아…….”

    너무도 비극적인 소식에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정령계 역시 초토화가 되었다고 하더군.”

    “그래서였나 보군요.”

    모두 같은 반응이었다. 루카스가 오기 전까지 열띠게 나누었던 토론에 답이 나온 셈이었다.

    “그리고 이종족들은 모두 안전한 곳으로 이주를 마쳤다. 또한 오는 길에 들른 인간들의 도시 역시 참담하더군.”

    아란트를 비롯한 모든 나라의 도시가 쑥대밭이 된 것을 보고 온 참이었다.

    그나마 시타타는 상황이 조금 나은 편이었지만, 그마저도 좋진 않았다.

    “그래도 인간들은 언제나처럼 또다시 살아남겠지요.”

    “질긴 목숨들이니 말입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말이 맞았다.

    인간들은 또다시 살아남을 것이다.

    “마족들의 움직임은 어떤가?”

    “지금은 잠잠해요. 뭐, 간간이 이곳을 뚫으려는 움직임은 보이지만, 그 역시도 우리를 조금 놀리려는 듯한 느낌이에요.”

    “…….”

    “맞소. 마치 우리를 약 오르게 한 다음 밖으로 꾀어내 죽이려는 것처럼 말이오.”

    확실히 저들의 손에 놀아나고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죠?”

    루카스는 지금 머릿속에 든 생각을 말할까 잠시 고민했다.

    ‘아직은 안 된다.’

    저들의 조력자가 정령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으니, 이제 내부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었다.

    게다가 주신 역시 제게 경고하지 않았던가.

    “신계가 정리될 때까지 우선 기다릴 생각이다.”

    “그건 전략이라고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데요.”

    아벨이 눈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마족들이 가진 패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싸울 수는 없다. 우리는 머물러 있던 데에 반해 마족들은 엄청난 발전을 이룩했으니 말이다.”

    “흠…….”

    “그 말인즉 저들은 우리의 수를 모두 알고 있는데, 우린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된다.”

    “그것도 그렇네요.”

    루카스의 말을 들은 아벨이 수긍했다.

    “휴. 이럴 때 정령왕이 도와주기라도 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정령계가 곧 정리될 것 같다고 하더군. 그렇다면 정령왕들은 우리 편에 서줄 것이다.”

    “음. 뭐 그렇겠네요. 마신 쪽이 그런 짓을 벌였다면 우리에겐 오히려 기회겠어요.”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그들 앞에 앨라스가 나타났다.

    “앨라스. 어딜 그렇게…….”

    무어라 타박하려던 하셀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크, 크억!”

    “앨라스!”

    앨라스의 입에서 검붉은 피가 한 움큼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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