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시작된 전쟁 (6)
앨라스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비켜보세요.”
앨라스에게 다가간 아벨의 손에 성유물이 들려있었다.
‘치유의 신인가.’
아벨이 앨라스의 심장 부근에 성유물을 가져다 대자, 앨라스의 안색이 눈에 띄게 나아지고 있었다.
“괜찮아? 도대체 어디 있다 온 거야.”
아만이 죽었다는 사실을 들은 앨라스는 충격에 휩싸여 뛰쳐나갔었다.
“하아… 하아…….”
입가에 묻은 피를 슥 닦아 낸 앨라스가 거친 숨을 토해냈다.
“다그치지 말아라, 아벨. 숨 돌릴 시간은 줘야 하지 않겠느냐.”
루카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아벨이 앨라스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마법으로 정리했다.
“프라이얀이 살아있어요.”
“그게 정말이냐?”
죽은 줄로만 알았던 프라이얀은 실버 일족 중 하나였다. 앨라스와 친하게 지내던 드래곤이었는데, 그런 그녀가 살아있단다.
“분명 프라이얀의 기운이 사라졌었는데……!”
하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읊조렸다. 그와 같은 실버 일족이기에 그가 착각했을 리는 없었다.
드래곤은 같은 일족끼리는 아주 옅게나마 그들의 기운을 공유할 수 있었다.
때문에 누가 죽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확실한가?”
그러자 앨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프라이얀은 갇혀있어요. 아직 영혼도 그대로 있고요.”
“갇혀있다니?”
“그러니까…… 갇혀있는 게 맞아요… 갇혀있다는 말 외엔 설명할 방법이 없어요. 소용돌이… 소용돌이 안에 갇혀있었어요.”
모두 의뭉스러운 표정이었다. 소용돌이라니? 어떻게 그 안에 갇혀있다는 말인가.
“검은 소용돌이였어요. 그 소용돌이가 프라이얀의 기운을 누르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상상만으로 고통스러운지 인상을 찌푸린 앨라스가 말을 잠시 삼켜냈다.
“프라이얀에게 있는 무언가를 뽑아내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저도 처음 본 거라……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좋을지…….”
앨라스 역시 혼란스러운 것 같았다.
“갇혀있다…… 게다가 무언가를 뽑아낸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레아디스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그럼 앨라스 넌 어쩌다 그렇게 된 거야?”
“프라이얀을 구하려다가 저도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바람에…….”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루카스와 하셀을 번갈아 바라봤다.
“그래서 지금 프라이얀은 어디에 있나.”
루카스가 물었다.
“로드라타 시국 옆이에요.”
“로드라타 시국 옆? 로드라타 옆엔 아무것도 없잖아.”
앨라스의 대답에 아벨이 되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로드라타는 커다란 섬이었다. 게다가 주변엔 작은 섬도 없었으며 해역도 험난했다.
“네. 프라이얀은 바다 위에 있어요.”
하셀의 미간이 험상궂게 구겨졌다.
“내가 가보도록 하마.”
그런 하셀의 표정을 본 루카스가 먼저 앞으로 나섰다.
“아닙니다. 제가 가겠습니다.”
“같은 실버 일족이기에 더욱 마음이 쓰이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라 하셀. 지금 로드는 바로 너다.”
“…….”
루카스가 아공간을 뒤져 팔찌 하나를 꺼내 하셀에게 건넸다.
“지금 이런 상황에 우두머리가 없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전쟁의 신 아스탈의 유물 중 하나인 지휘관의 팔찌였다.
지휘관의 팔찌는 광역 버프 효과와 더불어 적들의 시선을 분산시키는 효과가 있는 성유물이었다.
사실 드래곤들에게는 큰 필요가 없는 물건이었지만, 지니고 있는 의미만큼은 지금 필요할지도 몰랐다.
“네가 가지고 있는 것이 좋겠구나.”
그것을 받아 든 하셀의 입매가 다부지게 다물렸다.
“이곳의 지휘관은 바로 너다. 하셀.”
“예. 알겠습니다.”
앨라스에게 대강 좌표를 전해 들은 루카스가 곧장 텔레포트해 사라졌다.
***
아무것도 없었다.
흔한 섬 하나도 없는 바다 위에 일렁이는 검은 파도는 위협적이었으며, 파도가 높게 일 때마다 부서지는 달빛은 암울했다.
‘저곳인가.’
바다 한가운데에 뜬 몸을 마법으로 붙잡은 루카스의 시선이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향했다.
높은 파도 사이로 보이는 검은 공간. 그곳엔 달빛조차 닿지 않았다.
그곳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자 휘몰아치는 검은 소용돌이가 보였다.
“크윽…….”
더 다가갈 수가 없었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지자 몸이 조금 기우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통이 몰려왔다.
정신이 아득해지며 자아를 잃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도대체 어떤 걸로 만들어진 건지 감도 오지 않았다. 성유물이나 아티팩트의 기운이 느껴지기도 했으며, 마기와 함께 순수한 마나도 느껴졌다.
하지만 프라이얀의 기운은 전혀 느껴지질 않았다.
‘앨라스의 말대로 기운이 숨겨졌군.’
소용돌이 안에 얼핏 비추는 은빛 비늘. 그게 아니었더라면 프라이얀이 저곳에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었다.
루카스가 온몸에 방어 마법을 두른 채 조금씩 나아갔다.
“큭…….”
하지만 소용돌이에 다가갈수록 정신 방벽이 점차 얕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안 되겠군. 이러다가 나도 정신을 잃고 말겠어.’
도저히 더는 나아갈 수가 없다고 느낀 루카스가 주변을 살폈다. 잘 살피면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는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탐색 마법을 펼치고 소용돌이 주변을 살피길 몇 분이나 지났을까.
“……?!”
달빛이 닿는 곳에 언뜻 무언가가 반짝이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소용돌이에서 조금 떨어진 곳이었다. 파도가 높게 일며 수면이 움푹 파일 때마다 반짝이는 은빛.
루카스가 숨을 고른 뒤 마음을 다잡고는 다시 한번 몸에 방어 마법을 둘렀다.
‘한 번에 간다.’
소용돌이에 잡아먹히기 전에 저 물건을 낚아챌 생각이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파앗!
단박에 물건 앞으로 텔레포트한 루카스가 손을 뻗었다.
아득한 정신을 겨우겨우 붙잡으며 물건에 손이 닿은 그때.
-파아앗!
물건에서 커다란 힘이 터져 나와 루카스를 밀쳐 냈다.
‘안 돼……!’
루카스의 몸이 물 밖으로 튕겨 나가며 크게 떠올랐다.
‘소용돌이에 잡아 먹혀선 안 된다.’
날아오른 몸이 소용돌이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파앗!
소용돌이에 닿기 직전 겨우 정신을 붙잡은 루카스가 텔레포트했다.
“하아…… 하아…….”
흠뻑 젖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그건…….’
물건에 손이 닿기 직전 루카스는 보았다.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 분명 아는 물건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소용돌이의 영향인지 아직 머리가 뿌연 상태였다.
기억해 내려고 애를 쓸수록 진실이 자꾸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집에 가봐야겠다.’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왠지 시타타에 무슨 일이 생긴 것만 같은 예감에 머리를 세차게 흔들어 정신을 다잡은 루카스가 텔레포트해 사라졌다.
***
백작저 주변은 고요했다. 광장을 비롯한 어느 곳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백작저 안으로 들어선 루카스는 곧장 지하로 향했다.
아만과 하셀이 함께 걸어둔 방어 마법은 아직 견고했으며,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지하로 향하는 문을 열자 벽에 박힌 발광석이 환하게 빛을 내뿜었다.
지하가 뿜어내는 음습한 기운에 루카스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루키!”
문 하나를 더 열자마자 들려오는 폴라의 목소리.
“하아…….”
그와 함께 순식간에 안식이 찾아들었다. 불안함에 쿵쿵 뛰던 심장 박동이 고요해졌다.
“어디 갔다가 이제 와?”
“아이고, 우리 아들!”
시비에가 루카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아들!!”
제 어미인 블레인이 달려와 루카스를 꼭 안아주고는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니? 엄마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그래. 도대체 왜 이제야 온 게냐!”
“제가 무사할 거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폴라가 부부를 향해 눈을 슬쩍 흘겼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루카스의 부재를 잘 설명해 준 듯 보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다들 괜찮으신 거죠?”
루카스가 주변을 살폈다. 지하 공간을 잘 만들어 둔 덕에 꽤나 쾌적했지만, 그래도 저택보다는 불편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럼. 우린 모두 괜찮단다.”
사용인들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괜찮은 듯 보였다.
“그보다 언제 이렇게 지하를 만들어 둔 게냐. 나도 모르는 사이에 말이다.”
시비에가 물었다.
“그래. 방도 이렇게나 많이 만들어 두고. 언제 이렇게 가구까지 다 넣었대?”
폴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앨리님과 함께 만든 겁니다. 아, 그보다 영지민들은요?”
“그들도 모두 잘 있다. 기사들을 보내 계속 확인하고 있으니 너무 걱정 안 해도 된다.”
백작저 옆에 붙어있는 광산을 개조한 지하 공간 모두를 영지민들에게 내어주었고, 일이 터지기 전 영지민들에게 비상시에 그곳으로 이동할 수 있도록 안내까지 마쳐둔 상태였다.
“진짜 대단하더군. 루카스. 네게 배울 점이 많다. 광산을 개조하다니…… 지하 도시라고 해도 무방하겠더군.”
“앨리님께서 모두 하셨어.”
“앨리님은 정말 다재다능하신 분이군. 나도 언젠가 그분과 함께 내 영지를 가꾸고 싶다.”
스키르가 감탄을 내뱉었다.
아이들의 표정이 어딘가 불편해 보이는 것을 보니 루카스에게 묻고 싶은 말들을 모두 꾹 참는 듯했다.
‘드래곤이 눈앞에서 죽었으니.’
아이들은 눈앞에서 아만이 죽는 것을 모두 지켜봤다. 게다가 아만이 자신을 향해 하는 말들도 모두 들었으니 궁금한 것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든 궁금증을 꾹 누른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릴 뿐이었다.
루카스는 아이들과 눈을 맞췄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옮겨 제 아버지와 어머니를 바라봤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아들. 괜찮은 거 맞지? 밥은, 밥은 먹은 거니?”
블레인의 걱정 어린 따뜻한 말에 가슴이 찌르르 울렸다.
“예. 괜찮습니다.”
“저런, 우리 아들 얼굴이 반쪽이 되었구나. 어디서 뭘 하는지는 몰라도 네 몸이 우선이다.”
시비에가 루카스의 어깨를 다정히 어루만졌다.
“그래. 남들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겐 네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네 엄마 말이 맞다. 너는 내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인 것을 잊어선 안 된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그래. 나는 이들에게 목숨보다 소중한 아들이다.’
언제든 내던질 수 있는 하찮은 목숨이라 여겼던 제 목숨이 누군가의 목숨과도 같은 것이었다.
“많이 힘드니?”
블레인이 루카스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루카스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힘들었다. 너무도 힘들었다.
“저런…… 우리 아들. 이리 온.”
블레인이 팔을 열어 루카스를 품에 꼭 안았다.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고 쉬어도 된단다. 네가 모든 짐을 진 것처럼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괜찮아. 누구도 널 탓하지 않아.”
제 등을 느리게 쓰다듬는 블레인의 손길에 결국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우리 아들. 착한 내 아들…….”
강해야 했기에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다.
힘들다고 불평할 수 없었다. 자신이 전생에 저지른 잘못을 모두 바로잡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사실 몇 번이고 후회가 됐었다.
아만에게 제 정체를 들키지 않았더라면 조금 더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차라리 타라스의 제안에 응했더라면 조금 더 편안했을까?
아무리 거듭 생각해도 쓸모가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울 때마다, 루카스는 모든 사념을 털어내고 마음을 다잡았다.
해야 한다고.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해야 한다.’
모두 포기하고 싶은 지금도 그래야만 했다.
“괜찮아요. 할 수 있어요.”
루카스가 슬프게 웃었다.
“제가 해야 하는 일이니까요.”
블레인의 품에서 벗어나던 때 머릿속에 하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드! 지금 당장 오셔야 합니다.]
다시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