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116화 (116/175)

헌터명가 막내아들은 다재다능 116화

116. 변화(6)

“마지막 유물…….”

작은 양피지 조각이 손바닥 위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귀한 물건. 하지만 지테일은 선조의 유물을 미련 없이 넘겨주고 있었다.

작게 미소 지은 지테일이 말했다.

“고대 자료에 따르면 애커만은 지상뿐만이 아니라, 이계까지 모험한 적이 있다고 한다.”

“뭐?”

지테일의 말에 나는 눈을 끔뻑였다. 지상이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도시라고 부르기엔 광활하고 왕국이라 부르기엔 부족한 이곳에서 지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들었다. 분명 오랜 역사 속에서도 경계의 막이 뚫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어인들 대부분은 그저 전설로 내려오는 설화라 치부하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지테일이 설명을 덧붙였다.

지테일은 애커만이 직접 작성했던 일기장을 읽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는 인간들을 만나고, 이계의 존재들을 만나 여행한 이야기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고…….

그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나는 잠시 머뭇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애커만은 지구에 몬스터가 출연하기 전의 시기에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만약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몬스터, 이계의 존재들은 우리가 인지하지 못한 시기부터 지구에 존재해 왔던 것이 분명했다.

심사가 복잡해진 나는 천천히 말을 고른 후 지테일에게 말했다.

“너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구에 몸을 숨기고 사는 몬스터들도 있다는 말인데.”

“더 있다.”

지테일은 덤덤하게 말했다. 그 황당한 말에 나와 박한별은 서로를 바라봤다.

지테일은 우리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 갔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그 녀석들도 아틀리안처럼 경계막 밖으로는 나가지는 못할 테니까. 아, 지금은 상황이 다르려나?”

아틀리안의 경계막이 사라졌기 때문에 다른 곳의 경계막 또한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다급해졌다.

아틀리안처럼 인간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녀석들이 존재한다면, 반대의 성향을 가진 녀석들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도윤 씨, 이럴 시간이 없겠어요.”

“잠시만…….”

나는 지상으로 돌아가자 재촉하는 박한별을 진정시켰다. 너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지구에는 여전히 플레이어들이 존재했다. 지구에 몰래 숨어 살던 녀석들이 나타난다 한들 어느 정도 상대는 할 수 있을 터.

아직 시간이 없다고 할 순 없었다.

“고맙군.”

나는 애커만이 남긴 보물 지도를 받아 들었다.

“아틀리안을 지켜 준 진짜 영웅인데 이 정도는 드려야지.”

지테일은 푸근한 미소를 지은 채 우리에게 말했다.

“보물 지도로 남겨 둔 걸 보면 범상치 않은 보물이 숨겨져 있을 거다.”

지테일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위대한 모험가라 불리는 이가 유일하게 남겨 둔 지도에 볼품없는 물건들이 들어 있을 리 없을 테니까.

“확실히 그렇겠군…… 물건이 아직 남아 있다면 말이야.”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이것이었다.

보물이 이미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을지도 모른다는 것.

“크하하. 그럴 일은 없네.”

크게 웃어 보인 지테일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왜지?”

궁금증 넘치는 얼굴로 묻자, 지테일이 말했다.

“이걸 처음 찾을 때도 그랬거든.”

지테일은 이젠 자신의 장비가 되어 버린 애커만의 유물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말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지테일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정도면 유물에 무언가 안배가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나는 더는 묻지 않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이 보물은 내가 찾아 잘 쓰도록 하지.”

“암, 그래야지. 내 볼일은 끝났네. 마음 같아서는 며칠 동안 파티라도 벌이며 지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급한 일이 생긴 것 같아 붙잡아 둘 수도 없겠네…….”

빙긋 웃던 지테일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아마, 조금 전 박한별의 걱정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 같았다.

나도 그 부분은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 있던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올라가 보긴 해 봐야 할 것 같군.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서.”

“암, 올라가지. 지상으로 빠르게 인도할 녀석들도 붙여 주지.”

“고맙군.”

애커만의 보물 지도를 얻은 나는 빠르게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 * *

“여기부턴 저희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상어가 끄는 마차를 해변가 인근까지 타고 온 우리는 데려다준 어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지, 조심히 가게.”

“감사합니다.”

가볍게 인사를 마친 우리는 바다를 향해 뛰어들었다. 나나 박한별이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지는 오래됐기 때문에, 지상까지 도착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휴. 드디어 도착했네요.”

박한별은 옷에 묻은 물기를 짜내며 깊은숨을 내뱉었다. 나 역시 얼굴 위로 흐르는 물기를 털어 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많은 일이 있었던 해저였다. 아틀리안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한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몬스터의 사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텅 비어 버린 모래사장. 그곳에는 헌터로 보이는 플레이어들이 몇 명 돌아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저기, 이곳은 출입 금지 구역입…… 어?”

갑자기 나타난 우리를 제지하기 위해 다가왔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말을 멈췄다. 떨리는 동공. 내가 누군지 알아본 것이 틀림없었다.

“……천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는 플레이어를 바라본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바닷속으로 도망간 몬스터가 있어서 잡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하던 일 하시죠.”

“그럼 이곳을 모두 정리한 게…….”

“네.”

짧게 말한 나는 박한별과 함께 가드 라인이 설치되어 있는 출입 금지 구역을 빠져나왔다.

빠져나오는 도중 만난 플레이어들이 나와 박한별 중 한 명은 반드시 알아봤기 때문에, 나오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저희가 유명해지긴 했나 봐요.”

“그러게요.”

원래 관심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현재 정도의 관심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니 오히려 더 유명세를 끌어 올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이계의 존재, 강해진 몬스터. 지구에 몰래 자리를 잡고 살고 있던 몬스터들까지.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에 힘이 실려야 해.’

재앙 같은 일이 벌어졌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 혹은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 중 하나가 유명세였다.

‘영향력이 있어야, 혼란스러운 일이 벌어졌을 때 상황을 통제하기 쉽다.’

지구에는 플레이어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비중이 늘고 있긴 하지만, 여전히 일반인이 대다수였고 힘을 얻은 자는 소수였다. 일반인을 효율적으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유명세는 필수였다.

“도윤 씨.”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박한별이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꺼내 주셔야죠.”

“네? 뭐를요?”

박한별은 그럴 줄 알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노예로 팔려 갈 뻔했던 사람들이요.”

그제야 잊고 있던 사람들이 생각났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아! 맞다! 깜빡하고 있었네요.”

“으휴, 그럴 줄 알았어요. 빨리 꺼내 드려요. 답답하시겠다.”

“알겠습니다. 잠시…….”

나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 도깨비 보따리를 꺼내 들었다. 입구 쪽을 쫙 벌리자, 어인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려나갈 뻔한 사람들이 줄줄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후…… 여긴?”

“어머! 살았어!”

“살았다고!!”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제 평생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주위를 둘러본 사람들은 지상에 도착했음을 확인하고는 환호를 질러 댔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해요.”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는데…… 흐윽!”

감사의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었다. 박한별은 눈물을 흘리고 있는 젊은 여성을 토닥였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젠 안전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박한별은 여성이 눈물을 멈출 때까지 한참을 안아 주었다. 그 따듯한 모습을 보자, 자연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요즘 장난기가 넘치긴 하지만, 박한별은 원래 저런 성격이지.’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나는 시선을 옮겼다. 격하게 고마움을 표현하는 이들이 있다면, 상대적으로 소극적인 사람들도 있기 마련이었다.

쭈뼛대는 사람, 작은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전하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존재했다. 나는 적극적으로 감사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을 욕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각자의 방식이 다른 것일 뿐이니까.

그러나 용서하지 못할 경우도 있었다. 나는 소극적으로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을 지나쳐 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는 그들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의 젊은 남성을 주축으로 모인 4명의 남녀의 앞에 섰다.

“다행이네요. 나올 수 있어서.”

나는 싱긋 웃는 얼굴로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잠시 멈칫한 그들은 나를 바라보더니, 환하게 웃기 시작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몬스터에게 당했을 겁니다.”

가장 선두에 있던 갈색 머리 사내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부드러운 미소로 뒤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죠. 감사합니다, 헌터님.”

“감사합니다.”

뒤에 서 있던 3명의 남녀도 서둘러 감사 인사를 전했다.

“엎드려 절받기도 아니고…….”

“네?”

“아, 아닙니다.”

“그렇군요. 선생님. 몇 번을 말해도 모자랄 것 같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사람 좋은 얼굴로 미소 짓는 그를 보자, 어이가 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아닙니다. 저도 운이 좋았습니다.”

갈색 머리의 남성이 손사래를 쳤다.

“운이라뇨. 저는 알고 있습니다. 당신이 천가의 이인자라는 걸요. 천가의 도움을 받다니 정말 하늘이 도운 것 같습니다.”

갈색 머리의 사내는 끊임없이 나를 띄워 주며 감사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나는 느끼고 있었다. 멀리서 이쪽을 한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던 녀석의 탐욕스런 눈빛을. 나는 여전히 시치미를 뚝 떼며, 지나칠 정도로 아부하는 녀석을 보며 말했다.

“아, 알고 있었단 말이지?”

“네? 뭐가……?”

“내가 천가의 천도윤이라는 사실.”

잠시 당황했던 갈색 머리의 청년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 그야 뭐 당연히…… 워낙 유명하신 분들 아니십니까? 저쪽은 박한별 씨 맞으시죠? 저분께도 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싱긋 웃는 녀석을 빤히 바라봤다.

뻘쭘한 듯 머리를 긁적이던 남성이 말했다.

“너무나도 영광이었습니다. 혹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을 수 있겠습니까? 제 친구들에게 자랑이라도…….”

“……내놔.”

“네? 갑자기 뭘…….”

“몰라서 묻나?”

나는 고개를 틀어 이쪽을 바라보는 3명의 남녀를 바라봤다.

그들은 내 시선을 피하며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머릿속 실하나가 툭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셋을 세겠다.”

“천도윤 님. 갑자기 그게 무슨…….”

“무슨 말인지는 너희가 알아야 할 거야. 은혜를 원수로 갚는 새끼들아!”

나는 살기를 방출했다. 억제하고 또 억제한 살기였지만, 일반인이 버티기에는 버거운 수준이었다. 내 살기를 직격으로 맞은 4명의 남녀는 금세 사색이 되었다. 박한별이 깜짝 놀라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녀석들을 바라봤다.

“보따리 안에서 훔친 물건들 싹 다 내려놓고 꺼져.”

“도윤 씨, 뭔가 오해를…….”

“셋.”

창백해진 얼굴의 남녀 한 쌍이 주머니에서 훔친 물건을 꺼내 내려놨다.

“저 미친놈들이!”

갈색 머리의 남성이 남녀를 향해 욕을 하다가 입을 턱 틀어막았다.

남은 건 갈색 머리의 사내와 우람한 체격을 가진 남성뿐이었다.

“아니, 저희는…….”

당황한 듯한 갈색 머리의 남성.

물건을 내려놓은 남녀는 뛰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명의 남성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도깨비 보따리에서 꺼내 온 값비싼 물건들을 넘겨주기 싫은 모양이었다.

“둘.”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어느새 사납게 눈빛을 바꾼 갈색 머리 사내가 배낭을 벗어 바닥에 툭 내려놓았다.

끝까지 버티던 우람한 체격의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물건을 내려놓은 남성 둘은 사과도 하지 않은 채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다.

당당히 걷던 사내들의 발걸음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얼핏 보면 무서워 꽁무니를 빼는 모습.

그러나 내 눈에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보였다.

“끝까지 말을 안 듣네.”

나는 마지막 남은 숫자를 조용히 외쳤다.

“하나.”

푸학-!

멀리 달아나던 남성 둘이 고꾸라지고……. 그들의 재킷 안에 숨겨 놨던 작은 보물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