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기사 (44/45)

흑기사

“너무 빠른데.”

마계의 마왕이 현계에 강림했다. 아직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조만간 모두 알게 될 것이 확실했다.

“어떻게 된 거지?”

현자 바르디엘이 알려 준 시기는 훨씬 후였다. 그의 말을 믿고 마왕과 싸우기 위해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마왕이 강림하고 말았다.

바르디엘이 본 미래가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미래가 변한 것이 분명했다.

“미래는 고정되어 있지 않아.”

내 머릿속을 읽었는지 루미가 궁금증을 해소해 주었다.

“의지력이 강한 자는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개척할 수 있지. 그리고 마왕은 그럴 만한 능력이 충분해.”

“쓸데없이 능력만 좋아서…….”

“그건 칼리온도 마찬가지야.”

“무슨 뜻이지?”

루미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그런다고 내가 용서해 줄 것 같으냐.

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루미와 그 뒤에 서 있는 성기사들을 노려봤다.

“파이레스트 님께 내가 받은 계시는 ‘마왕을 도와 마왕을 막아라.’라는 것뿐이었어. 때문에 네가 어느 쪽 마왕인지, 좋은 마왕인지 아니면 나쁜 마왕인지,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었지. 파이레스트 님을 졸라서 간신히 좋은 마왕에 대한 정보를 몇 개 얻었는데, 네 행동이 그것과 많이 달랐어.”

“미래는 바뀔 수 있는 거라며?”

“머리론 알고 있지만 내가 이래 봬도 파이레스트 님을 모시는 성녀잖아. 파이레스트 님의 계시가 틀렸다고 여기는 것보다 네가 좋은 마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 더 인간적이지 않아?”

“얼어 죽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이해했다고 해서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루미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마음대로 생각하고 원하는 만큼 욕을 해도 좋아. 원한다면 대륙의 모든 신전을 다 때려 부수고, 모든 신관을 죽여도 좋아.”

“루, 루미 님!”

칼렙이 깜짝 놀라며 외쳤다. 루미가 손을 들어 칼렙을 제지했다.

그러곤.

털썩!

빛의 여신 파이레스트를 모시는 신관 중의 대신관.

제국의 황제에게 경어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성녀 루미 프레이가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니…… 인간을 구해 주세요.”

털썩!

루미 뒤에 서 있던 성기사들이 그녀를 따라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 나와 악연 관계가 되어 버린 칼렙조차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있는 루미와 성기사들을 바라봤다.

“……젠장.”

내가 이들의 목을 진짜로 벤다 할지라도 어느 누구 하나 미동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누구 하나 살려 달라고 빌지 않을 것이다.

당한 것을 갚아 줘야 했지만, 이렇게 막무가내로 목을 내미는 놈들을 상대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정말이지 젠장할 일이다. 신관들이란 존재는 정말이지.

“그렇게 부탁하지 않아도 돼. 어차피 나와 마왕은 싸우게 될 테니까.”

“어째서?”

루미가 눈을 뜨고 나를 쳐다봤다. 자기를 해치지 않을 것임을 알았는지 표정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마왕이 나를 죽이려 할 테니까.”

“그렇군. 너는 순순히 죽어 줄 만큼 자비로운 남자가 아니었지.”

자리에서 일어난 루미가 나에게 다가왔다.

“은원 관계가 청산되었다면 가자. 시간이 얼마 없어.”

조금 전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 여자가 맞는지 의심이 될 만큼 멋진 미소를 지으며 루미가 앞장섰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루미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또 하나 용서를 구할 것이 있어. 네 물건 중 하나를 못 쓰게 망가뜨렸거든.”

“뭔데?”

“네 부하 말로는 마수의 알이라던데.”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루미가 말했다. 내가 죽이지 않을 것임을 알게 된 순간부터 그녀는 평소의 뻔뻔함을 되찾았다.

마수의 알.

그게 어떤 것이던가.

확률의 문제가 있긴 하지만 성공만 한다면, 마렉이나 메이어 같은 강자를 탄생시킬 수도 있는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대신 네게 선물이 있어.”

버럭 소리를 지르려는 나에게 루미가 선수를 쳤다.

“……선물?”

나는 분노를 억지로 삼키며 되물었다.

루미가 가리키는 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캄캄했다. 루미를 따라온 성기사가 벽에 손을 대고 신성력을 불어 넣었다. 그러자 천장에 있던 구슬이 빛을 발했다.

구슬 아래, 가장 환한 공간에 기다란 유리병이 놓여 있었다.

“…….”

나는 말없이 유리병을 쳐다봤다. 그 안에 있는 것은 바로 나의 왼쪽 팔이었다.

“선물이 마음에 들어? 이 정도면 보상이 될까?”

루미의 기고만장한 표정이 심하게 거슬렸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상이 되냐고?

물론 되고말고.

떨어진 팔을 제자리에 붙이는 대수술을 위해 무려 10여 명의 고위급 마법사가 동원되었다.

“성녀인 내가 남에게 치료를 맡겨야 되다니. 수치야.”

치료 내내 루미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붙기는 붙는 건가?”

강력한 치유 마법은 떨어진 팔다리도 붙일 수 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상처가 아문 상태에서도 그것이 가능한지는 의문이었다.

“걱정하지 마. 시간과 돈만 있으면 안 되는 일이란 없어.”

루미는 성녀 주제에 세속에 찌든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다.

어쨌든 루미의 말이 옳았다.

10여 명의 고위급 마법사가 번갈아 가며 하루 밤낮을 꼬박 치료했다. 그 결과 나는 다시 두 팔을 갖게 되었다.

왼팔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어때?”

“괜찮은데. 흉터만 없으면 잘렸는지도 모를 정도로군.”

“그거 다행이네.”

루미가 싱글싱글 웃으며 나를 쳐다봤다.

“왜 쳐다보는 거지?”

“이제 할 일을 해야지?”

“할 일?”

“팔도 달아 줬으니 밖으로 나가서 용사가 되어야지?”

말투가 너무도 가벼워 하마터면 알겠다고 대답할 뻔했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때려잡아야 하는 것은 그 이름도 거창한 마왕이었다.

“여신에게 받은 계시를 너무 믿지 말라고. 벌써 한 번 틀렸잖아. 내가 당하면 어쩌려고 그러지?”

“내가 누구인지 자꾸 잊나 본데.”

“무조건적인 믿음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래도 하는 수 없어. 나는 파이레스트 님을 모시는 성녀니까.”

한숨이 나올 만큼 무조건적인 믿음이었다.

나는 여신의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포기했다. 어차피 여신의 광휘는 나를 도와주지 못한다. 그러니 내가 할 일을 하자.

“로열 암스를 내놔.”

“로열 암스?”

루미가 딴청을 부리며 되물었다.

“설마 그곳에 놔두고 왔다는 헛소리를 할 생각은 아니겠지?”

“음…….”

당황하는 것을 보니 그럴 생각이었나 보다.

절도에, 거짓말까지.

이런 여자를 성녀로 선택한 여신의 의도가 궁금했다.

“내놔. 마왕과 싸우기 위해선 로열 암스가 필요해.”

“여섯 개 모두? 하나면 되지 않아? 무기가 많다고 해서 꼭 유리한 것은 아니잖아. 오히려 하나만 있는 게 집중력이…….”

“내놔.”

나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일곱 개 모두.”

내 주먹 안에 숨어 있는 다크섀도우 역시 로열 암스 중 하나였지만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었다.

즉, 일곱 개의 로열 암스라 함은…….

“……일곱 개?”

루미의 미소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눈가가 실룩거리는 것이 억지로 웃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가 수집해 놓은 여섯 개에다, 네가 가지고 있는 홀리쉴드까지. 일곱 개.”

루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굳어 버린 그녀를 대신해 성기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홀리쉴드가 어떤 것인 줄이나 알고 있습니까!”

“홀리쉴드는 성녀임을 증명하는 성물입니다! 함부로 주고받을 수 있는 물건이 아닙니다!”

나는 이들의 불만을 잠재울 마법의 한마디를 알고 있었다.

“마왕과 싸우기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크윽…….”

성기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루미는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지만 이미 승자가 정해진 싸움이었다. 아쉬운 것은 내가 아니라 저들이었다.

“마왕을 무찔러 달라며? 원한다면 대륙의 모든 신전을 부수고, 모든 신관을 죽여도 좋다며? 고작 아티팩트 하나 가지고 쩨쩨하게 굴지 말라고.”

“고, 고작 아티팩트라니!”

성기사들이 다시 발끈했다. 루미가 암울한 표정으로 성기사들을 말렸다.

“칼리온, 네 말이 맞아. 고작 물건 하나 때문에 대의를 망칠 수는 없지. 자, 받아.”

루미가 목에 걸고 있던 홀리쉴드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애써 대범한 척하고 있지만 홀리쉴드를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홀리쉴드를 잡았다.

“…….”

“…….”

“……놔.”

루미는 뭔가 사생결단을 내는 사람처럼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그제야 간신히 홀리쉴드에서 손을 떼었다.

“비싼 건데…….”

그녀는 마지막까지 세속적인 말을 읊조렸다.

나는 루미와 똑같은 과정을 여섯 번 반복한 후에야 일곱 개의 로열 암스를 모두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그 일곱 개의 로열 암스를 가지고 루미가 마련해 준 조용한 방으로 들어갔다.

“건물 전체에 성기사를 세워 둘 거니까 도망칠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불과 몇 분 사이에 루미의 얼굴이 수십 년 정도 늙은 듯했다.

“안 도망쳐.”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지?”

“나도 모른다.”

루미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엇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능한 빨리 끝내 줬으면 해. 마왕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전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방문을 닫았다.

방 한가운데 앉아 일곱 개의 로열 암스를 일렬로 늘어놓았다.

마창 그랜드스피어.

절대 방어의 방패 홀리쉴드.

백발백중의 활 이글아이.

불과 얼음의 검 아이스파이어.

신의 망치 묠니르.

마나의 지팡이 마나완드.

암흑의 로브 월광.

하나같이 대단한 아티팩트였다.

바르디엘은 이 일곱 개, 아니 여덟 개의 아티팩트가 하나의 재료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1,000년 전 마계의 마왕이 강림했을 때 여신이 인간에게 내려 준 신검이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로열 암스를 하나하나 쓰다듬었다.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로열 암스가 웅웅 몸을 떨었다.

바르디엘이 알려 준 것을 떠올리며 천천히 로열 암스를 잡았다.

“자아, 이제 다시 하나의 검으로 합쳐질 순간이다.”

신검은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다시 태어날 것이다.

바로 나의 몸속에서.

아이스파이어의 날에 손이 닿은 순간, 썰물이 빠지듯 마력이 빠져나갔다.

“크윽!”

온몸에서 힘이 사라졌다. 혼미한 정신을 간신히 추슬렀다. 숨쉬기가 힘들 만큼 괴로웠다.

고통스러웠지만, 오히려 그 고통이 방법의 올바름을 증명해 주었다. 다크섀도우를 얻을 때도 이와 같은 고통을 느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길게 내쉬었다.

고통이 조금 진정되었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과거와 같은 방법으로 마력의 흐름을 조종했다.

그렇게 아티팩트와 나의 지리멸렬한 싸움이 시작되었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사나운 맹수를 길들이는 조련사였다. 맹수는 나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니 나를 물어뜯기 위해 있는 힘껏 날뛰었다.

때론 강하게 몰아붙이고, 때론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맹수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렸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마력의 흐름이 점점 빨라졌다. 맹수를 길들이기 위해 사용하는 마력의 양이 빠르게 늘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클라이맥스가 다가왔다.

화악!

아이스파이어의 검날이 빛을 뿜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이스파이어는 손잡이 부분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헉…… 헉…….”

겨우 하나 흡수하는데 이 모양이었다. 남아 있는 로열 암스는 아직도 여섯 개.

나는 그랜드스피어로 손을 뻗다 이내 멈췄다.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절약해야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로열 암스를 안전하게 흡수하는 것이었다.

“좀 쉬었다 하자.”

뒤로 벌렁 누운 후 눈을 감았다.

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 * *

“으윽!”

눈을 떴다. 방이 캄캄했다. 천장에 달려 있던 야광주는 이미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였다.

몸을 일으키자 온몸에서 우드득 소리가 났다.

얼마나 누워 있던 것일까.

여섯 개의 로열 암스를 흡수하고 마지막으로 홀리쉴드를 손에 쥔 순간, 눈이 번쩍할 만큼 강력한 폭발이 일었다. 그 폭발은 오롯이 내 몸 안에서 일었다.

신체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 속에 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너무 서둘렀나.”

홀리쉴드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 몸에 흡수된 것이 분명했다. 일곱 개의 로열 암스를 모두 흡수했건만 바르디엘이 말했던, 마왕과 싸울 수 있는 힘은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실패한 것은 아니겠지?”

갑자기 불안이 엄습했다.

로열 암스를 전부 사라지게 만든 대가가 고작 실패라면 마왕과 싸우기도 전에 루미에게 맞아 죽을지도 몰랐다.

“뭐가 잘못된 거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력을 일으키려는 순간.

쾅!

밖에서 폭음이 들렸다. 충격으로 건물이 흔들리면서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쾅! 쾅!

폭음이 연달아 이어졌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밖이 매우 소란스러웠다. 망치로 건물 벽을 두드리는 듯했다. 마치 나에게 빨리 나오라며 시위하는 것처럼.

“내가 스스로 나올 때까지 조용히 있어 달라고 했는데.”

성격 급하고, 속물적이고, 뻔뻔하긴 했어도 약속만큼은 잘 지키는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오판인 것 같았다.

쾅!

다시 건물이 흔들렸다.

“나가면 되잖아, 나가면.”

나는 신경질적으로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휘이잉!

이곳은 파이레스트 신전의 총본산이었다. 웬만한 왕국의 수도보다 넓은 지역에 빛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이 빽빽이 들어찬 곳이었다.

내가 로열 암스를 흡수하기 위해 건물 안으로 들어올 때만 해도 주변에 높은 건물이 부지기수였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휘이잉!

다시 바람이 불었다.

나는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던 첨탑과 거대한 예배당, 신관들이 머무는 숙소와 과거 장인들이 만든 아름다운 동상.

그 모든 것이 무너져 있었다. 주변에 서 있는 건물이라곤 오직 하나, 내가 들어가 있었던 곳뿐이다.

10여 명의 성기사들과 루미가 건물을 에워싸고 있었다. 모두 지친 얼굴이었다. 옷은 누더기처럼 더러웠고, 크고 작은 상처가 온몸에 새겨져 있었다.

그때였다.

번쩍!

하늘에서 섬광이 떨어졌다.

“어림없지!”

루미가 가슴에 손을 모은 채 기도문을 외웠다.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투명한 막이 되어 건물을 에워쌌다.

쾅!

섬광이 보호막을 때렸다.

“컥!”

루미가 피를 토하며 주저앉았다.

“루미 님! 괜찮으십니까?”

성기사들이 얼른 신성력을 일으켜 루미를 치료했다. 기운을 되찾은 루미가 몸을 일으킨 후 다음 공격을 대비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흠칫!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만큼 루미가 뿜어내는 기세는 사나웠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 그녀가 외쳤다.

“이 망할 놈아! 왜 이제야 기어 나오는 거야!”

황량한 벌판으로 변한 대지에 루미의 고함이 메아리쳤다. 한참을 씩씩거리던 그녀가 간신히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네 말대로 나올 때까지 기다렸어! 이제 된 거지? 이제 싸울 수 있는 거지? 만약 또 아직도 아니라고 한다면…….”

그녀의 의지가, 그녀의 분노가, 그녀의 희망이 심장을 관통했다.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

나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 그녀에게 어떻게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녀를 괴롭히고 있던 시커먼 괴물들을 쳐다봤다. 몸에 서려 있는 어둡고 광포한 기운이 낯익었다. 마계의 마왕이 현계에 강림할 때 같이 올라온 마족들이 분명했다.

100여 마리의 마족을 이끌고 있는 것은 나의 왼팔을 베었던 리치였다.

“역시 살아 있었군요. 다행입니다. 혹시 신관 놈들에게 죽지 않았을까 걱정했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당신의 몸을 빼앗아 드리죠.”

리치가 핏빛 살기를 뿌리며 미소를 지었다.

“계획대로 잘된 거지?”

불안한 듯 루미가 다시 물었다.

상황도 그렇고, 싸워야 하는 적도 그렇고,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물론이지. 나에게 맡겨.”

나는 루미를 제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쳤던 몸이 빠르게 회복되었다. 전투의 시점이 가까워질수록 마력이 용솟음쳤다.

로열 암스를 흡수한 게 완전히 실패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려는 순간.

번쩍!

섬광이 날아왔다.

나는 가볍게 왼손을 휘둘렀다. 성녀의 방어막조차 사정없이 뒤흔들던 일격이었다. 제대로 방비했어야 했다. 하지만 직감적으로 이 정도면 된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리고 확신이 옳았다.

쾅!

왼손과 부딪친 섬광이 180도 방향을 틀어 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졸지에 자신이 한 공격에 공격받게 된 리치가 허겁지겁 몸을 피했다. 그 바람에 리치 대신 근처에 있던 마족들이 폭사했다.

“어, 어떻게…….”

리치가 경악했다.

놀란 것은 적뿐만이 아니었다. 아군 역시 입을 벌린 채 나를 쳐다봤다.

“괴, 굉장한데!”

루미가 반색을 하며 말했다. 성기사들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나는 섬광을 튕겨 낸 왼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상태를 살폈다. 저릿저릿한 느낌을 제외하곤 아무 이상이 없었다.

로열 암스를 모두 흡수한 대가치고는 괄목한 만한 성장이 아니었지만, 완전히 실패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그럼 본격적으로 놀아 볼까.”

마력을 끌어 올렸다.

“아…….”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기억을 되찾고 난 후 나는 내 안에 잠재되어 있는 마력의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그때의 짐작이 터무니없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도 힘이라면…….

그래, 이 힘이라면, 마왕이라는 놈과 한번 붙어 볼 만할지도 모른다.

마력을 더욱더 끌어 올렸다.

슈슉!

다크섀도우가 모습을 드러냈다.

“음?”

이변을 느낀 것은 그때였다.

다크섀도우가 마력을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마치 다크 블레이드를 소환하는 것처럼 무자비한 속도로 마력을 먹어 치웠다.

“카, 칼리온! 파, 팔이!”

루미가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이끌려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슈슉!

슈슈슉!

주먹만 간신히 감싸던 다크섀도우가 성장 마법이 걸린 식물처럼 자라났다.

검붉은 금속이 손목을 지나 팔꿈치를 거쳐 어깨를 감쌌다. 잠시 후 흉갑이 생겼다. 금속이 다리를 감싸고, 마지막으로 목을 타고 얼굴로 올라왔다.

검붉은 투구가 완성되는 순간, 주체 못한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끓어올랐다.

그것은 모든 것을 파멸시킬 절망.

그것은 모든 것을 굴복시킬 공포.

그것은…… 오롯이 만물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의 외침.

포효가, 살아 있는 자들의 의지를, 물어뜯었다.

나는 포효를 멈추고 몸 안에 흐르고 있는 거대한 힘을 느꼈다.

털썩!

루미와 성기사들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리치와 마족들 역시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거, 검은 갑옷?”

루미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나는 다크섀도우로 감싸인 몸을 살폈다. 어디 걸리는 부분이 없는지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조금 불편하긴 했지만 움직이는 데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다크섀도우의 강도와 경도를 생각해 봤을 때, 이 갑옷은 그 어떤 것보다 가볍고 단단한 것이 분명했다. 또한 기분 탓인지 신체 능력 역시 급상승한 느낌이었다. 이 느낌이 사실인지는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로열 암스의 흡수는 완벽하게 성공한 것이다.

의심해서 미안하군, 바르디엘.

나는 위대한 현자에게 사과를 하며 꽈악 주먹을 쥐었다.

“가라! 칼리온! 출동! 시커먼 갑옷!”

루미가 응원을 시작했다.

“시커먼 갑옷이라니.”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진각을 밟았다. 주체 못할 힘을 주먹에 담아 정권을 내질렀다.

리치가 다급한 얼굴로 마족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 지시가 어떤 것이든, 설령 함정이라 할지라도, 패배하리란 느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오직 승리에 대한 확신만이 가득했다.

이번에도 확신이 옳았다.

쾅!

분화구처럼 파인 땅 위에 서서, 공포에 질린 리치와 마족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적 한가운데 있었지만 나를 위협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살아남은 신관과 성기사가 붙여 준 나의 칭호.

강림한 마왕에 맞설 유일한 용사의 이름.

흑기사.

흑기사 칼리온.

나는 힘을 개방했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리치의 소멸과 함께 1,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새로운 전설이 시작되었다.

* * *

상황은 절망적으로 암울했다.

대륙의 9할을 빼앗겼고, 그보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성녀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았지만 적의 움직임이 너무 빨랐다.

그만큼 마왕과 마족 군대의 힘은 강력했고, 마왕과의 전쟁은 서서히 인류의 멸망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마왕이 강림한 이유는 나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왕과 싸울 수 있는 자도 나뿐이었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사람들을 하나로 모으기가 매우 힘들었다.

결국 나를 적대하던 인간들이 모두 죽고 나서야 인류는 하나로 뭉쳤다.

그리고 지금.

최후의 일전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들어라, 쓰레기들아!”

마법으로 증폭시킨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멀리 퍼져 나갔다.

바로 옆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사내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병사들의 사기가 점차 고조되었다.

연설을 하고 있는 사람은 곰 같은 체구를 가진 마렉이었다. 마수의 알을 흡수한 그와 메이어는 어느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대륙 제일의 강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마렉을 바라보는 병사들의 시선에 경외감이 섞여 있었다.

마렉이 말을 이었다.

“네놈들은 운이 좋다. 너희 같은 쓰레기들이 이런 역사의 현장에 있는 것부터가 천고의 행운이다. 게다가 오늘은 인류의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날이다. 어찌 영광이 아니라 말할 수 있겠느냐!”

대군을 이끌 기사에게는 절대로 어울리지 않는 말투였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친 시대였고, 거칠지 않은 자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폭발할 듯 숨을 몰아쉬었다. 얼굴에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공포는 없었다. 그들의 눈동자는 복수와 전의와 살의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한쪽은 전멸할 것이고, 다른 한쪽은 생존할 것이다. 어느 쪽이 생존할 것인지는 천치 같은 네놈들도 알 거라 믿는다.”

병사들의 호흡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렉의 연설에 동화되고 있었다. 몰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의 의심도 없이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었다. 그동안 마렉과 자신들이 이룩해 왔던 기적과 같은 위업이 하나 더 늘어날 것이라고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네놈들의 이름은 명예가 될 것이다. 역사가 될 것이다.”

가슴이 폭발할 듯 두근거렸다. 숨을 쉴 때마다 뜨거운 단내가 풍겨 왔다. 온몸의 근육이 터질 것처럼 꿈틀거렸다.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전율이 되어 날뛰었다. 도망가고 싶은 본능과 모든 것을 부숴 버리고 싶은 파괴 욕망이 머릿속에서 충돌을 일으켰다.

“가서, 그것을, 움켜쥐어라.”

병사들이 지평선 너머까지 펼쳐진 벌판을 새까맣게 메우고 있었다. 그들이 내뿜는 열기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처럼 꿈틀거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마렉이 있던 연단에 섰다.

“흐, 흑기사다!”

“진짜 흑기사다!”

“우와아아!”

병사들의 사기가 단숨에 치달렸다.

그때였다.

루미가 내 옆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지?”

“마지막 전쟁인데 성녀로서 축복 정도는 해 줘야지.”

방긋 미소를 지으며 루미가 말했다. 이런 최악의 상황에서조차 그녀는 빛을 잃지 않고 있었다. 반드시 우리가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었다.

“진짜 축복하면 죽을지도 몰라.”

내 힘의 근원은 마력, 마왕의 힘이었다. 성녀의 축복을 받았다가는 최후의 결전을 펼치기도 전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지도 몰랐다.

내 말에 루미가 꺄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걱정하지 마. 나도 그 정도는 아니까.”

루미가 웃음을 멈춘 후 나를 지그시 쳐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질 때쯤.

그녀가 힘껏 까치발을 하여 나와의 신장 차이를 줄였다.

“…….”

“…….”

입맞춤은 짧았지만 그만큼 강렬했다. 향긋한 향기가 입술 주위를 맴돌았다.

놀라고 있는 나를 향해 루미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들의 미래를 부탁해.”

다시 한 번 방긋 미소를 지은 후 그녀가 병사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는 가슴에 손을 모은 채 기도문을 외웠다. 기도문이 끝남과 동시에 가슴 앞에 모았던 손을 하늘로 치켜들었다.

화아아악!

성녀의 몸에서 성스러운 빛이 뿜어져 나왔다. 빛은 거대한 해일이 되어 퍼져 나갔다.

병사들은 자신의 몸에 서린 축복의 빛을 보며 경악했다.

어찌 인간이 수십만 명에 가까운 인원을 한 번에 축복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성녀의 축복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고, 그 기적은 병사들의 전의를 폭발시켰다.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천천히 검을 들어 적의 진영을 가리켰다. 나의 의지는 병사들에게 충분히 전달되었다.

“돌격!”

마렉의 목소리가 전장의 공기를 가로질렀다.

나는 마왕을 강림시킨 죄인으로서, 마왕을 무찌를 용사로서, 진형의 맨 앞에 섰다.

와아!

절규와 같은 함성과 함께 병사들이 나의 뒤를 쫓았다.

드드드드!

지축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인간 군대의 선봉과 마족 군대의 선봉이 부딪쳤다.

채챙!

파팟팟!

“커헉!”

“죽어랏!”

죽음을 각오한 인간과 죽음을 즐기는 마족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사방에서 검이 날아오고 그 검을 피하면 또 다른 검이 날아왔다.

“사, 살려 줘!”

“오오! 여신이시여!”

“저주를! 악마의 종자들에게 저주를! 크헉!”

수만에 불과한 마족들이 수십만에 가까운 인간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학살.

그것은 학살이었다.

많은 병사가 나의 앞길을 뚫어 주기 위해 대신 죽어 갔다. 나는 그들이 만들어 준 혈로를 묵묵히 걸어갔다.

전투는 9일 밤낮이나 계속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10일째 되던 날, 나는 마왕 앞에 설 수 있었다.

“늦었노라, 벌레여.”

마왕은 인간의 시체를 쌓아 만든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권태로운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나는 말없이 마왕을 쳐다봤다.

마왕은 휴멜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진짜로 질긴 인연이다.”

마왕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단지 자세만 바꿨을 뿐인데도 압도적인 절망감이 나를 찍어 눌렀다. 하지만 나는 절대로 무릎을 꿇을 수 없었다.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이들을 위해서도.

나와 마왕의 대결은 작게는 서로의 생사를 결정하는 대결이었다. 크게는 인간과 마족의 대결, 빛과 어둠의 대결 그리고 절망과 희망의 대결이었다.

나는 마왕에게, 휴멜에게, 선언했다.

“악연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해 보자. 덤벼라, 후레자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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