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강림
“……이곳은?”
눈을 떴을 때, 나는 어두컴컴한 공간을 부유하고 있었다. 사방이 캄캄하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빛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몸에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기절하기 직전의 상처를 생각하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나는 죽은 건가.”
그러고 보니 이 공간에는 공기도 없었다. 숨을 쉬고 있지 않은데도 아무런 불편함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래도 진짜 죽은 모양이다.
“이곳…… 왠지 익숙한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느낄 수 없는 무無의 공간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두려워하는 게 정상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를 아늑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군.”
이곳은 내가 마왕과 사투를 벌였던 그 공간과 흡사했다. 그곳에서 1,000년을 있었으니 새삼스레 두려움을 느낄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안락함을 느낄 이유는 더욱더 없었다.
그만큼 많이 지친 것이리라. 무의 공간에서 편안함을 느낄 만큼 거칠게 산 탓이리라.
몸에 힘을 주었다. 실 끊긴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크윽!”
최대한 힘을 끌어 올려 몸을 비틀었다. 조금이라도 괜찮았다.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끝내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하아…….”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피곤이 몰려왔다. 저절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다 문득 그냥 이대로 이곳에 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이곳을 탈출해 봐야 좋을 일 하나 없었다. 또다시 피 터지게 싸우는 일상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럴 바엔 차라리…….
“그래, 어쩌면 이곳에 있는 것이 인류를 위해 더 좋을지도 몰라. 내가 이곳에 있으면 마계의 마왕이 강림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니까.”
자기 합리화를 시작했다. 정말로 그런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얼마나 그럴듯하냐는 것이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지만, 그래도 제법 그럴듯한 이유를 수십 가지나 떠올렸다. 내가 이곳에 있어야 하는 이유가 수십 가지나 되다니.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때였다.
찌이익!
무언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에 빛이 새어 들어왔다. 먹구름 사이로 비치는 한 줄기 광명처럼 빛이 내 몸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벌써 포기하는 거야? 의외로 근성이 없네. 하는 수 없지. 내가 좀 도와줄게.”
빛 알갱이가 몸에 달라붙었다. 달라붙은 빛 알갱이가 몸을 천천히 위로 끌어 올렸다.
하지 마…….
하지 마!
나를 그냥 내버려 둬!
소리 없는 절규를 외치며 나는 천천히…… 천천히……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번쩍!
아찔한 섬광이 눈꺼풀을 자극했다. 반사적으로 눈을 뜨려다 빛의 괴롭힘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눈동자가 빛에 적응할 때까지 기다린 후 조심스레 눈을 떴다.
빛의 근원지는 태양이 아니었다. 벽에 박혀 있는 구슬에서 노란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안개 낀 듯 흐릿했던 시야가 점점 또렷해졌다.
“……살아 있는 건가.”
“물론 살아 있지. 내가 누군데, 에헴!”
안락한 무의 공간에서 나를 억지로 끄집어낸 그녀가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왜 살려 낸 거지?”
성녀 루미 프레이가 난처한 듯 손가락으로 뺨을 긁적였다.
“형씨를 살리기 위해 고위 마법사를 몇 명이나 초대했는지 알아? 루나 님의 치유 마법이 전혀 듣지 않는 바람에 돈만 왕창 깨졌다고.”
이단 심문관 칼렙 브론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구해 달라고 한 적 없는데. 오히려 가만 놔두길 원했지.”
“근성이 없다니까, 근성이.”
루미가 손가락질을 하며 비난했다. 그런 그녀를 사뿐히 무시하고 주변을 살폈다.
넓은 방이었다. 천장과 벽에 라이트 마법이 담긴 구슬이 박혀 있었다. 정면을 제외한 모든 면이 창문 하나 없이 막혀 있었다. 정면에 있는 것은 쇠창살이었다.
내가 누워 있는 곳은 딱딱한 돌침대였다. 묶여 있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석에 딱 달라붙은 고철이 된 느낌이었다.
몸 상태가 너무 좋아 리치에게 당한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왼쪽 어깨의 허전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정리하자면, 나는 감옥에 묶여 있었다. 엄밀히 말하면 묶여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몸을 움직일 수 없으니 묶여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나를 어떻게 할 셈이지?”
“별거 없어, 형씨. 그냥 궁금한 것 좀 물어보고, 거짓말하지 않았는지 확인해 보고, 그런 것들.”
칼렙이 씨익 웃었다. 루미가 여전히 불편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그렇군.”
나는 깨달았다. 이들은 나를 고문할 셈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래서 무의 공간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지긋지긋한 현실이 싫어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렇게 걱정하지 마. 형씨와 내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가능하면 부드럽게 할 거니까. 가능하면.”
칼렙이 주변에 신호를 보내며 말을 이었다.
“나중에 다시 올 테니 차분히 생각 좀 정리하고 있으라고, 형씨.”
칼렙과 신관들이 감옥을 나갔다. 쇠창살이 닫히기 직전, 루미가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구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 얼굴로 쳐다보지 마라, 하고 톡 쏘아 주려다 말았다.
신관들이 모두 나가자 적막이 감돌았다.
파이레스트 신전에서 나를 가둔 이유는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역시 바로 신전에 오지 않고 로열 암스를 먼저 수집한 것은 옳은 판단이었다. 리치에게 일격을 맞고 신전 놈들에게 잡힘으로써 모든 계획이 물거품이 됐지만, 어쨌든 옳은 판단이었다.
그 ‘옳은 판단’에 근거해 앞으로의 일을 예상해 보았다.
“젠장.”
상당히 암울한 미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생각을 멈췄다.
“이렇게 된 거…….”
어차피 움직일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을 선택해야 했다. 다가올 시련을 견뎌 내려면 강인한 체력이 필요했다.
나는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치이익!
살이 타들어 가는 소리와 함께 고기 굽는 냄새가 풍겼다. 붉게 달아오른 쇳덩이가 옆구리를 지지고 있었다. 살과 쇳덩이 사이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났다.
“…….”
나는 입을 꽉 다물고 고통을 참았다. 이마에 맺혀 있던 땀이 뺨을 타고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역시 이 정도로는 끄덕도 하지 않는 건가. 이런 곳에서 근성을 발휘하지 말라고, 형씨.”
칼렙이 쇳덩이를 치우며 말했다. 옆에 있던 마법사가 재빠르게 다가와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화상 자국이 순식간에 치유되었다.
끔찍한 고통에서 해방되자마자 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치유 마법을 사용했다고 하지만 상처가 너무 빨리 아무는군. 이 정도 치유력은 최고위급 대신관쯤 돼야 가능한 레벨인데.”
무심한 목소리로 칼렙이 말을 이었다.
“다음은 신성력을 실험해 보지.”
푹!
기다란 쇠꼬챙이가 옆구리를 뚫고 들어왔다. 쇠꼬챙이의 끝이 내장을 헤집었다.
소름 끼치는 고통에 정신이 아찔했다. 이곳저곳을 들쑤시던 쇠꼬챙이가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기다리고 있던 신관이 다가와 치유 마법을 시전했다. 신성력이 상처에 스며들었다.
순간.
“큭!”
나도 모르게 신음을 삼켰다. 손가락만 한 구멍이 더 크게 벌어지면서 울컥울컥 핏물이 솟구쳤다.
“그만.”
칼렙의 명령에 신관이 치유, 아니 고문을 멈추고 뒤로 물러섰다. 그 즉시 마법사가 다가와 상처를 치료했다.
“신성력에는 상처 받고, 마법은 몇 배나 효과가 좋군. 역시 마왕이라서 그런가.”
칼렙이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형씨 말이 맞는 거 같군.”
“…….”
말없이 칼렙을 노려봤다. 그는 뻔뻔한 얼굴로 빙긋 미소를 지었다.
예상했던 대로 감옥에서의 일상은 심문과 고문의 연속이었다.
나는 묻는 말에 솔직히 대답했다. 굳이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거니와 신관 놈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을 시간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마계의 마왕은 지상으로 기어 올라오기 위해 음모를 꾸미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음모의 첫 번째 희생자는 바로 나였다.
그런 이유로 심문에 솔직히 대답했건만, 문제는 신관 놈들이었다. 아니, 칼렙이란 빌어먹을 이단 심문관이 문제였다.
칼렙은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심문이란 것은 차를 마시며 문답을 나누는 것이 아니지. 심문이란 묻고, 대답하고, 그 대답을 검증하는 것이지.”
얼토당토않은 개똥철학을 피력한 후 칼렙은 내가 한 말을 일일이 검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검증은 대부분 고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칼렙은 신성력에 상처를 입는다는 내 대답을 검증하기 위해 3일 밤낮으로 수십 가지의 고문을 행했다.
채찍으로 맞거나, 칼에 찔리는 것은 애교였다. 내장을 꺼낸 후 집어넣거나, 심지어 발가락과 손가락을 자른 후 다시 붙인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3일 내내 나를 괴롭히더니 이제 와서 내 말을 믿겠단다. 때려죽이고 싶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동안 고생 많았네, 형씨. 그럼 오늘은 푹 쉬고 내일부터 다른 것을 검, 증, 해, 보, 자, 구.”
칼렙이 가볍게 손을 흔들며 감옥을 나갔다.
감옥에 홀로 남자마자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갖은 용을 다 써 봤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시간이 없는데…….”
마음이 초조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신전에서 웰런과 다른 부하들을 건드리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수의 알을 흡수한 마렉과 메이어만이 특별 관리를 당하고 있는 듯했지만, 역시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부하들을 건드리지 않는 이유를 물으니, 만약을 위해서라는 애매모호한 대답을 했다. 대답을 한 사람이 칼렙이라 모두 믿을 순 없겠지만 지금으로썬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젠장!”
휴멜만 없애면 다 괜찮아질 줄 알았다. 이렇게 빨리 분노를 느끼며 복수를 생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뜨거운 불꽃이 가슴속에서 타올랐다.
천천히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은 탈출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
다시 몸에 힘을 주었다.
다음 날 아침.
안타깝게도 결국 탈출에 실패했다.
나는 꼼짝없이 결박당한 채로 어디론가 끌려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서인지 수십 명의 신관과 성기사들이 나를 에워싼 채 따라왔다.
그들에게 떠밀려 간 곳은 넓은 정원이었다.
잘 손질된 정원수가 주변을 감싸고 있었다. 빨, 주, 노, 초 다양한 색깔의 꽃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꽃과 꽃 사이로 나비와 벌이 한가로이 날아다녔다.
평화로운 정원 한가운데 마법으로 만든 결계가 만들어져 있었다.
신관이 나를 그 결계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수작이지?”
칼렙이 어깨를 으쓱하며 다가왔다.
“형씨가 말한 다크 블레이드라는 것을 검증하려는 것이지.”
나는 슬쩍 결계를 만졌다. 파직, 하는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다크 블레이드로 부수려고 해도 소용없어, 형씨. 이 결계는 마력을 저장하지 않고 방출해 버리거든.”
“믿지 못하고 검증이나 하는 주제에.”
“믿지 못하는 게 아니야. 거짓말일 가능성을 차단하고 싶은 거지.”
나는 코웃음을 쳤다.
“그래서 어떻게 검증할 예정이지? 내가 쉽게 보여 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래서 준비했지. 형씨가 다크 블레이드란 것을 보여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드르르륵!
칼렙이 손짓하자 뒤쪽에서 커다란 수레가 들어왔다. 수레 안에 있는 것은 시커먼 털로 뒤덮인 짐승이었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성기사들이 수레를 결계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건?”
“형씨의 대전 상대.”
수레를 감싸고 있던 힘이 사라졌다.
잠시 후 결박에서 해방된 시커먼 짐승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요하면서도 치명적인 살기가 공기의 밀도를 무겁게 만들었다.
-크르르릉.
시커먼 짐승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는 시커먼 짐승의 정체를 깨달았다.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최악의 마수魔獸.
마계보다 훨씬 더 짙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곳, 지옥. 짐승은 그곳의 수문장이었다.
“케르베로스? 어째서 여기에?”
“과거에 흑마법사가 소환한 것을 봉인하고 관리한 것이 우리 신전이지. 오랜만에 깨어났으니 제법 배가 고플 거야. 부디 살아남길 바라지.”
지옥의 마수 케르베로스가 세 개의 머리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샛노란 눈동자에 광기가 스며 있었다. 꼬리에 붙어 있는 독사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크르르릉!
케르베로스가 날카로운 어금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허연 침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자신을 가둬 버린 인간에 대한 증오가 살기로 화했다.
나는 왼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왼팔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쪽으로 오는 공격에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케르베로스는 나의 왼쪽을 호시탐탐 노렸다.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라서 그런지 무작정 달려드는 대신 가만히 나의 전력을 분석하고 있었다.
지옥의 수문장 케르베로스는 자세를 낮춘 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뒷발의 근육이 꿈틀거렸다고 느낀 순간, 마수가 땅을 박차고 도약했다.
-크허헝!
케르베로스의 세 머리가 각기 다른 곳을 노렸다. 하나뿐인 팔로 막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바닥을 굴러 자리에서 벗어났다.
케르베로스의 평범한 짐승이 아닌 지옥의 입구를 지키는 마수였다. 그래서인지 상당히 지능이 높았다. 특히 적의 약점을 찾고, 그곳을 공략하는 것에는 전문 암살자 못지않았다.
그 특기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검은 털의 짐승이 재빠르게 나의 왼쪽을 노리며 들어왔다.
“젠장!”
한쪽 팔이 없어서인지 몸의 중심이 자꾸 흐트러졌다. 오른쪽으로 몸을 틀다 다리가 꼬이는 바람에 하마터면 한쪽 다리를 물릴 뻔했다.
장기전으로 가면 승산이 없었다.
케르베로스는 여태껏 싸워 왔던 그 어떤 몬스터보다 날래고, 강한 괴물이었다.
퍽!
목을 물어뜯으려는 케르베로스의 머리 하나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체중이 제대로 실리지 않아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나머지 두 개의 머리에게 상처를 입었다. 어금니가 스친 옆구리와 다리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거리를 벌린 케르베로스가 세 개의 머리를 곧추세웠다.
-크르르릉!
유황 냄새가 짙어졌다. 케르베로스의 코에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왔다.
입가에 밝은 빛이 일렁이더니.
벼락처럼 세 개의 입에서 세 개의 불덩이를 토해 냈다.
화르륵!
뜨거운 열기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팔 하나로 세 방향에서 날아오는 불덩이를 모두 막을 수는 없었다. 가장 위협적인 것 하나를 쳐 낸 후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 나머지 두 개를 피했다.
그 틈을 노려 케르베로스가 달려들었다.
-크헝!
마수의 머리 하나를 잡은 후 옆으로 패대기쳤다. 케르베로스가 결계의 벽에 부딪쳤다. 자세를 바로 한 마수가 어지러운 듯 머리를 흔들었다.
“기다리다가 지치겠군.”
결계 밖에 서 있던 칼렙이 하품을 하며 이죽거렸다.
그렇게 보고 싶다면…….
보여 주마!
심호흡을 한 후 천천히 힘을 끌어 올렸다. 잠에서 깨어난 마력이 오른 주먹으로 집결했다.
-크르르릉!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케르베로스가 자세를 바짝 낮춘 채 나를 경계했다.
작은 손에 막대한 양의 마력을 몰아넣자 손이 터질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 마력을 주입했다.
손안에 응집된 마력의 양이 한계치를 초월한 순간, 마력이 손바닥을 뚫고 밖으로 분출되었다.
파지직!
손톱만 한 크기의 시커먼 번개검이 손바닥 위로 솟아올랐다. 번개검은 거머리처럼 손안의 마력을 빨아 먹었다.
번개검의 길이가 점점 늘어났다.
파지지직!
롱 소드 길이가 된 번개검이 들쭉날쭉 몸을 흔들었다. 광포한 기운이 결계를 흔들었다.
“이게 그렇게 보고 싶어 하던 다크 블레이드다. 소감이 어때?”
나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칼렙에게 말했다.
칼렙은 번개검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아무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가 빨리 다크 블레이드의 위력을 보여 달라며 외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칼렙이 원하는 것과는 방향이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수준 높은 기술을 관람하는데 그 정도 대가는 지불해야 수지 타산이 맞는다.
“일단은 눈앞의 장애물부터 없애고…….”
털을 곤두세운 채 으르렁거리고 있는 지옥의 파수견을 향해 다크 블레이드를 곧추세웠다.
케르베로스가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리 온, 똥개야.”
내 말뜻을 알아들었는지 케르베로스가 사납게 그르렁거렸다. 하지만 전과 다르게 쉽사리 달려들지 않았다. 시커먼 번개검을 경계하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다시 유황 냄새가 짙어졌다. 마수의 콧구멍에서 새어 나온 검은 연기 때문에 숨쉬기가 힘들 정도로 공기가 탁해졌다.
케르베로스의 이빨 틈새로 넘실거리는 불꽃이 보였다.
-크허헝!
화르륵!
케르베로스가 포효와 함께 불꽃을 토해 냈다.
이번에는 피하지 않았다. 나는 세 개의 불덩이 사이를 걸으며 다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펑!
펑! 펑!
다크 블레이드에 닿은 불덩이가 공중에서 폭발했다. 흩어진 불씨가 마치 불꽃놀이처럼 화려하게 허공을 수놓았다.
케르베로스의 입에서 다시 불덩이가 뿜어져 나오는 순간을 노려 세 개의 머리 중 하나를 베었다. 머리가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다 이내 불덩이처럼 폭발했다.
-크아앙!
케르베로스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울부짖었다.
아무리 지옥의 마수라지만 고통에 괴로워하는 것을 오래 보고 싶지는 않았다.
휙!
단칼에 남은 두 개의 머리를 베었다. 잠시 후 두 개의 머리와 함께 케르베로스의 몸이 폭발했다.
마수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채 숨을 골랐다.
짝짝짝!
경쾌한 박수 소리가 정적을 깨뜨렸다.
“그것이 다크 블레이드인가. 대단하군.”
칼렙은 진심으로 감탄한 듯했다.
“말로 들었을 때는 믿을 수 없었는데 사실이었군. 결코 막을 수 없는 일격필살의 기술이라.”
“아직 감탄하긴 일러.”
“응? 또 뭐가 있나?”
“당연히 있지. 네놈에게 진짜 다크 블레이드를 보여 주마.”
바르디엘 덕분으로 나는 과거의 기억을 되찾았다.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몸 안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되었다. 더 이상 몸이 버텨 내지 못할까 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바르디엘의 말처럼 나는 인간의 탈을 쓴 마왕이었다.
고오오오!
결계 안의 공기가 변했다.
파지지직!
롱 소드만 했던 다크 블레이드가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다. 중검이 되었다 다시 대검이 되었다. 종국에 가서는 창보다 훨씬 더 길어졌다.
“뭐 하려는 거지? 결계를 부술 생각인가? 무리라고 했을 텐데.”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알지.”
나는 칼렙을 향해 씨익 웃었다. 그러고는 다크 블레이드를 결계의 한쪽 벽에 꽂았다.
쾅!
폭음과 함께 공기가 들썩거렸다. 폭발의 충격이 결계 안에 휘몰아쳤다. 그 바람에 하마터면 다크 블레이드가 소멸될 뻔했다.
나는 몸을 강타한 충격파를 참으며 다크 블레이드에 더욱 마력을 집중시켰다.
파파팟!
다크 블레이드와 결계가 맞닿은 부분에서 불꽃이 튀었다. 다크 블레이드에서 뿜어져 나온 마력이 결계를 폭발시키지 못하고 허무하게 스러졌다.
“소용없다고 하지 않았나? 무의미한 저항은 그만두는 게 어때? 괜히 힘 빼지 말라고. 아직 검증해야 할 것이 많으니까. 하하하!”
잠깐 긴장했던 칼렙이 이내 여유를 되찾았다.
그 웃음이 언제까지 가나 두고 보자.
나는 모든 마력을 다크 블레이드에 쏟아부었다. 처음으로 마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 신전의 결계는 훌륭했다. 칼렙이 자신할 만했다.
하지만 나 역시 자신이 있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나 다름없었지만 자신이 있었다.
아무리 완벽한 결계라 할지라도 하나의 결계로 무한의 마력을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마왕의 힘이 고작 그 정도라면, 바르디엘이 굳이 나를 용사로 선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아아압!”
몸 안의 마력이 쭉쭉 사라졌다.
“보기보다 미련이 많군. 슬슬 포기할 때도…….”
칼렙이 말을 멈췄다.
내가 느낀 이변을 그가 느끼지 못했을 리 없었다.
드드드드!
결계의 벽이 떨리기 시작했다. 진동이 점점 커졌다. 종국에는 결계뿐 아니라 결계가 있는 정원과 정원 주변의 건물들까지 모두 흔들렸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파이레스트 여신이시여…….”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 신관들이 결계에서 떨어졌다. 칼렙만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결계를 지켰다.
콰르르!
결국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원하던 그 순간이 찾아왔음을.
마력을 그러모아 한꺼번에 방출했다. 이렇게 많은 양의 마력을 사용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밑 빠진 독에 물이 넘치기 시작했다. 한번 넘치기 시작하자 걷잡을 수 없이 결계의 균형이 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쨍그랑!
독이 깨어졌다.
독 안에 가득 차 있던 마력이 정원을 휩쓸었다. 광포한 기운을 견디지 못한 신관들이 숨을 헐떡이며 쓰러졌다.
나는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그러곤 마력의 홍수에 맞서고 있는 칼렙에게 다크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직접 네 몸으로 검증해 봐라! 다크 블레이드의 위력을!”
“아아안 돼애애!”
칼렙이 비명을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때였다.
무릎에 힘이 빠지면서 다리가 휘청거렸다. 다크 블레이드가 칼렙의 머리칼을 스치며 지나갔다.
마력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현재 내 몸은 정상이 아니었다.
리치에게 팔이 잘리는 중상을 입었고, 신전에 끌려와 몇 날 며칠 고문을 당했다.
게다가 체력적 부담이 큰 기술인 다크 블레이드를 한계까지 사용했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파직!
마력의 공급이 끊어졌다. 번개검이 사납게 몸부림치다 손바닥 안으로 사라졌다.
젠장. 안타깝지만 이렇게 된 이상.
“표정 죽이는데.”
나는 잔뜩 움츠리고 있는 칼렙을 향해 비웃음을 날려 준 후 그대로 도망쳤다.
잠시 후 칼렙의 분노 어린 포효가 길게 울려 퍼졌다.
* * *
제국에 버금가는 힘을 가졌다더니 명불허전이었다.
“젠장! 대체 출구가 어디야?”
커도 너무 컸다. 게다가 모든 건물이 밋밋한 장식으로 만들어져 있어 길을 찾기가 무척 힘들었다.
돌아다니는 신관을 잡아 길을 물어봤지만 하나같이 눈을 감고 기도만 읊조릴 뿐이었다.
“저기 있다!”
“잡아라!”
성기사들이 우르르 쫓아왔다.
나는 잡고 있는 신관을 번쩍 들어 성기사들을 향해 집어 던졌다.
“으아아아!”
우당탕!
날아온 신관을 붙잡느라 성기사들이 주춤거렸다. 그 틈을 이용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출구를 찾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렸지만 결국 막다른 길에 몰렸다.
필연적인 결과였다.
이곳은 성기사들의 안방이었다.
“재롱은 다 끝난 거냐?”
칼렙이 기고만장한 얼굴로 말했다.
“쫄아 있던 주제에 잘난 척은.”
비웃음을 흘리며 도발했다.
칼렙의 몸에서 살기가 흘러나왔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험악한 인상이었다.
“아직 검증할 게 남아 있으니 죽이지 마라.”
잠깐 말을 끊었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는지 칼렙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또 도망칠 수도 있으니 다리를 잘라라. 어차피 검증하는 데 다리가 필요한 것도 아니니.”
칼렙의 수신호를 받은 성기사들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상황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몸은 만신창이였고, 무기라곤 맨주먹, 게다가 하나뿐이었다.
이길 수 있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길 수 없다면 어쩌겠는가. 항복도 받아 주지 않을 적과는 싸우는 길밖에 없었다.
마력을 일으켜 보았다.
다크 블레이드는 무리였고, 간신히 오러 블레이드는 사용할 수 있을 듯했다.
순식간에 계획을 세웠다.
일단 성기사 한 명을 쓰러뜨려 검을 빼앗는다. 그 검으로 오러 블레이드를 사용해 탈출로를 뚫는다.
계획대로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최악의 경우 이판사판으로 마력을 폭주시킬 것이다.
섬 하나를 통째로 날려 버린 경력을 봤을 때, 무고한 사람이 수없이 죽어 갈 것이다.
아마…… ‘마왕’이라고 불릴 테지.
“그럼 지상에 마왕이 두 명이나 강림하고, 또 그 마왕끼리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것인가.”
대륙의 앞날도 풍전등화였다.
잡생각을 하는 사이 성기사들이 나를 에워쌌다.
성기사들이 천천히 숨을 골랐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부릅뜬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나 역시 언제 어느 때라도 반응할 수 있게끔 몸을 긴장시켰다.
일촉즉발의 상황.
그때였다.
두근!
심장이 뛰었다.
두근!
무언가 안 좋은 미래를 봐 버린 예언가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두근! 두근!
무언가를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보던 성기사들 역시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쳐다봤다.
도망치려면 지금이 최고의 기회였다. 하지만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모든 인간, 아니 모든 생명체가 똑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두근!
심장의 떨림은 근원적 공포였다.
두근!
바로 지금 뭔가가 세상에 태어났다. 거대한 악의를 가진 무언가가.
타타탓!
멀리서 낯익은 얼굴의 여자가 뛰어왔다. 그녀는 만류하는 성기사들을 제치고 내 앞에 섰다.
성녀 루미가 무슨 말을 할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마왕이 강림했어.”
젠장.
불길한 느낌은 언제나 들어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