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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45/45)

에필로그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구름을 밀었고, 구름 뒤에 숨어 있던 태양이 모습을 드러냈다. 은은한 꽃향기가 코끝을 간질였다. 따뜻한 햇살이 포근하게 몸을 감쌌다.

평화롭고 아늑한 오후.

“하하하!”

“꺄르르!”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이 해맑게 웃으며 뛰어다녔다.

“어이! 여기 좀 도와줘!”

“잠깐 기다려! 금방 갈게!”

사람들이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부지런히 망치를 휘두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불타 버린 대지 위에 새로운 희망이 싹트고 있었다.

“그 희망인 네가 이대로 사라지면 어떡해?”

검은 그림자가 내 몸을 덮었다.

고개를 드니 루미가 서 있었다.

“성녀 주제에 나돌아 다니긴.”

햇볕이 드는 쪽으로 몸을 데구르르 굴리며 핀잔을 주었다.

루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왕이 되어야 할 놈도 땡땡이를 치고 있는데, 뭐 어때.”

“알 텐데? 내가 왕이 될 수 없는 이유를. 내가 이곳에 있는 이상 마계에 새로운 마왕이 또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현계를 침략하겠지. 마왕은 기본적으로 불사의 존재. 나 역시 마왕이니 내가 현계에 있는 한 계속 같은 역사가 반복될 테지. 그럴 바엔 차라리 내가…….”

말을 멈췄지만 루미는 이미 나의 뒷말을 알고 있었다. 어쩐지 조금은 화난 목소리로 그녀가 뒷말을 이었다.

“네가 마계의 마왕이 되는 게 낫다고? 그래서 새로운 마왕이 생겨나는 것을 아예 원천 봉쇄하겠다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한참 후에 루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먼 미래의 일이잖아. 적어도……”

“적어도 1,000년 후의?”

“킥!”

루미가 웃음을 터뜨렸다. 웃고 있음에도 그녀의 눈동자는 왠지 슬퍼 보였다.

“진짜 갈 거야? 아직 우리에겐 네가 필요해. 지금 네가 사라지면 큰 혼란이 올 거야. 서로 자기가 왕이 되겠다고 날뛰겠지. 모처럼 하나가 된 인류가 다시 갈기갈기 찢어지는 꼴을 보고 싶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마땅히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해 인류가 잘 먹고 잘살건, 치고받고 싸우든, 왕이 되기 위해 전쟁을 벌이건, 모두 내 알 바 아니었다.

마왕을 죽이는 순간, 마왕의 심장을 뜯어내어 그 피를 마신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안에 있는 마력의 힘이 언젠가 나를 삼키리란 사실을.

그만큼 마왕과의 전투에서 나는 공포와 전율과 환희를 맛보았다.

다시 말해 나는 싸움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것이다. 치유는 불가능했다. 내 안에 마왕의 힘, 광포하고 사나운 마력이 살아 있는 이상 그것은 불가능했다.

그렇게 싸우고, 싸우다 결국 마력에 잡아먹혀 폭주하고 말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바르디엘이 보았다는 미래의 마왕은 나였는지도 몰랐다.

나는 한숨을 쉰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차피 마왕이 될 거라면 마왕이 돼도 괜찮은 곳으로 떠나면 되었다. 다행히 세상에는 그러한 곳이 존재했다.

마계.

전투와 전쟁이 영원히 계속되는 곳.

나는 하하호호 웃고 있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바라본 뒤 걸음을 옮겼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봐! 야! 칼리온! 기다려!”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손만 살짝 들어 올려 마지막 작별 인사를 보냈다.

나는 살아남은 마법사를 모두 그러모아 한곳에 집결시켰다. 그곳은 리치가 마왕을 소환한 장소로, 과거 제국의 황제가 머물렀던 황궁 안이었다.

마왕을 소환했던 마법진은 황궁에서 가장 큰 무도회장에 그려져 있었다.

“이 마법진을 이용해서 역으로 마계에 갈 수 있단 말이지?”

“이론상으론 가능합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가장 나이가 많은 마법사가 모두를 대표해 대답했다.

“조건?”

“이것은 보통의 마법진이 아닌 마계와 현계를 잇는 차원 이동 마법진입니다. 이 마법진을 작동시키기 위해선 막대한 양의 마나가 필요합니다.”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차피 남는 게 마력이었다. 마나는 아니지만 마나보다 더 순수한 힘이니 부작용의 가능성은 별로 없을 것이다.

나는 뚜벅뚜벅 걸어가 마법진 한가운데 섰다. 마법사들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시작하지.”

“지금…… 당장 말입니까?”

마법사들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그래. 지금 당장.”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떠나기로 마음먹었으니 미련이 남기 전에 떠나는 것이 좋았다.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둘러쌌다.

“그럼 이곳에 힘을 불어 넣어 주십시오.”

나는 마법사가 가리키는 곳에 손바닥을 댄 후 마력을 불어 넣었다.

차원과 차원을 잇는 대마법진답게 빨아들이는 마력의 양이 장난이 아니었다.

지루한 줄다리기 끝에 결국 내가 승리했다.

화아악!

마법진에 생기가 돌더니 곧 밝은 빛을 뿜었다. 마법진에서 올라온 빛의 기둥이 발목을 타고 종아리를 지나 허리를 감쌌다. 빛의 기둥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그때였다.

“형님!”

웰런이 절박한 얼굴로 뛰어왔다.

“이렇게 가는 겁니까! 저는 어쩌고요!”

“내가 네 마누라냐?”

나는 피식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잘 있거라, 아우야.”

“형님!”

빛의 기둥이 내 몸 전체를 덮었다. 공중에 부웅 뜬 느낌과 함께 의식이 서서히 멀어졌다.

순간.

우당탕!

“어딜 혼자 도망치려고!”

“그렇게는 못 하지!”

무언가 둔탁한 것이 허리를 붙잡았다.

동시에.

화아악!

밝은 빛이 의식을 날려 버렸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날 따라온 거지?”

나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삼키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야 당연히 대장을 보필하기 위해…….”

“그야 당연히 재미있는 것을 너 혼자 하게 놔둘 수는 없기 때문에…….”

마법진이 발동하기 직전 마법진 안으로 뛰어든 멍청한 두 사내를 지그시 노려봤다.

마렉과 메이어가 황급히 입을 닫고 내 눈치를 살폈다. 물론 끝까지 얌전할 마렉이 아니었다.

“에잇! 네가 마계로 온 이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우리는 잘 알고 있어. 싸움에 미친 광전사가 될까 봐 그런 거잖아. 네가 지킨 땅, 네가 지킨 사람들을 네 손으로 파괴할까 겁이 났기 때문이잖아. 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메이어가 그늘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마수의 알 때문이냐?”

“그래. 이제 와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지만. 젠장!”

마렉과 메이어는 마왕과의 전쟁에서 가장 큰 공적을 남겼다. 수백이 넘는 마족을 죽이고, 수만 명의 인간을 구원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계속 강해졌고, 끝내 마수의 알과 완전히 동화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영웅이었지만, 반대로 가장 증오 받아야 할 대상인 마족이 되었다.

마수의 알은 마계에 살고 있는 짐승, 즉 몬스터의 알이었다. 그것과 동화됐다고 하는 것은 반인반마半人半魔가 되었다는 뜻과 같았다.

“그렇군.”

나는 마렉과 메이어의 마음을 납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선택에 화가 나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이곳이 어딘 줄은 알지?”

“악마의 땅, 마족의 성지, 마계잖아.”

마렉이 씨익 웃었다.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니 어쩌면 영원히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몰라.”

“정말 원 없이 싸울 수 있겠군요. 생각만 해도 짜릿한데요.”

메이어가 씨익 웃었다.

“……멍청한 놈들.”

바람을 타고 고약한 노린내가 날아왔다.

-크르르릉!

주변을 둘러보니 어느새 수십 마리의 마수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새빨간 눈동자에 살기가 일렁거렸다.

나는 마력을 일으켰다. 검붉은 갑옷이 전신을 덮었다. 마렉과 메이어 역시 전투준비를 마쳤다.

끝을 알 수 없는 기나긴 싸움의 서장이 시작된다. 작은 불안과 작은 희망을 품에 안은 채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그럼 마계를 정복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해 볼까?”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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