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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42/45)

복수

휴멜의 진영은 계곡 골짜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저녁이 되자 하얀 연기가 음식 냄새와 함께 하늘로 올라갔다.

병사들의 얼굴에서 짙은 피로가 느껴졌다. 여러 왕국의 병사들을 강제로 모아 놨으니 크고 작은 충돌이 생길 만도 하건만, 진영의 분위기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나는 진영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은 후 찬찬히 진영을 살폈다.

금방 이상한 점을 눈치챌 수 있었다.

진영 어디를 둘러봐도 부상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부상자를 위한 막사는커녕 붕대를 감고 있는 사람조차 한 명 없었다.

휴멜과 제국의 전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지도 벌써 한 달 남짓.

그동안 크고 작은 전투가 10여 차례 벌어졌다. 전투의 결과는 모두 휴멜의 압승.

제국의 기사들이 전패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건이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10여 번의 전투를 부상자 한 명 없이 승리한다는 것은 기적이란 놈의 도움을 받았다 해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말이다.

나는 상식에 의거해 판단을 내렸다. 그것은 오직 휴멜만이 할 수 있는 잔인한 방법이었다.

“부상자를 버렸군.”

과연 휴멜이었다.

휴멜의 군대는 폭풍과 같은 기세로 제국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목표는 황제가 머물고 있는 제국의 수도였다.

질풍 같은 속도를 내기 위해 휴멜이 선택한 방법은 함께 싸운 전우를 전장에 버리는 것이었다. 전투를 할수록 병사의 수가 줄어들겠지만 그만큼 진군 속도는 더 빨라질 것이다.

궤멸이 먼저일까, 아니면 수도에 도착하는 것이 먼저일까.

휴멜과 제국의 전쟁은 한마디로 요약해 속도의 전쟁이었다.

“그런데…….”

나는 또 하나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휴멜의 전략은 좋고 나쁨을 떠나 병사들에게는 최악의 전략이나 같았다. 전장에 버리고 간다는 것은 죽도록 내버려 둔다는 뜻이었다.

과거처럼 권위로 찍어 누르기엔 10만이란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10만이란 숫자 속에 반골의 기질을 가진 사람이 한 명도 없을 확률은 대체 얼마나 될까.

게다가 이들은 충성심으로 똘똘 뭉친 휴멜의 사병도 아니었다. 정복한 왕국에서 강제로 징집당한 병사들이었다. 애초부터 반골의 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불온한 기운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모두 묵묵히 제 할 일만 하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스물스물 기어올라 왔다. 본능이 나중을 기약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은 결코 빗나간 적이 없었다.

“알고는 있지만…….”

물러날 시간이 없었다.

물러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물러날 수 없었다.

희석된 줄 알았던 감정이 폭발했다. 감정은 마모된 것이 아니었다. 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사납게 날뛸 날을 기다리며, 힘을 비축하기 위해 겨울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잠자고 있던 분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자…….”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머릿속을 급류처럼 휩쓸고 있는 뜨거운 감정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휴멜의 막사로 달려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에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참아야만 했다.

휴멜의 군대에 흐르고 있는 기묘한 기류가 무엇 때문인지 알아내야 했다. 변수를 제거해 성공의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여야 했다.

문득 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뒤를 생각하게 되었을까. 본래 나는 앞뒤를 재지 않고 감정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놈이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럴 수가 없었다.

아련하게 떠오르는 얼굴들.

그 질긴 인연.

무작정 뛰어들어 주먹을 날리기엔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것들이 제법 무거웠다.

평평한 바위에 몸을 뉘었다. 딱딱한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계속 휴멜의 진영을 정찰했다.

용암처럼 들끓던 감정이 어느새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일주일 동안 휴멜의 군대를 따라다녔다. 휴멜의 병사들은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행군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도저히 버틸 수 없는 강행군이었다. 뒤따르고 있는 나조차 피로를 느낄 정도였다.

휴멜의 군대는 제국의 수도를 향해 거의 일직선으로 나아갔다.

행군을 가로막는 것은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논과 밭은 불태워졌고, 마을은 약탈당했다. 행군에 낙오된 병사들은 버려졌고, 마을에서 붙잡힌 남자들이 새로운 병사로 차출되었다.

“이런 오합지졸로 어떻게 제국을 상대한다는 거지?”

휴멜의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병사의 양적인 부분은 전쟁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질적인 부분도 중요했다. 농사만 짓던 농사꾼을 100명 모아 봐야 기사 한 명을 이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나는 계속 휴멜의 군대를 뒤쫓았다.

3일 후.

휴멜의 군대가 멈춘 곳은 제국의 수도와 맞닿아 있는 넓은 평원이었다. 맞은편에 제국의 군대가 주둔해 있었다.

평원 너머 거대한 황궁이 우뚝 솟아 있었다.

“공격하라! 적에게 쉴 틈을 주지 마라!”

휴멜의 군대는 거의 일직선으로 행군했기 때문에 진로를 가늠하는 것은 다섯 살짜리도 예상할 수 있을 만큼 쉬운 일이었다.

제국은 모든 힘을 평원에 집결시켜 놓은 후 적을 기다렸다. 아마 충분히 먹고, 충분히 쉬었으리라.

제국의 군대는 배수의 진을 치고, 최상의 전력을 유지한 채, 적이 지쳐 있는 순간을 노려 공격했다.

간단하면서도 절대적인 전술이었다.

“돌격하라!”

제국의 기사를 태운 말이 질주했다. 기사들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와아!

함성과 함께 병사들이 기사의 뒤를 따랐다.

드드드드!

평원이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렸다. 뽀얀 먼지구름이 안개처럼 피어났다.

사나운 기세로 달려드는 제국의 군대와 달리 휴멜의 군대는 멍한 상태였다. 쌓이고 쌓인 피로 때문인지 행동하는 게 매우 굼떴다. 병사들이 천천히 무기를 들어 올렸다. 그들의 얼굴이 무척이나 평온했다.

어느 쪽이 승리할지는 보지 않아도 명백했다.

성난 파도가 휴멜의 군대를 덮쳤다.

채챙!

서걱!

“하아압! 죽어랏!”

“제국을 우습게 본 것을 지옥에서 후회해라!”

반격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휴멜의 군대의 선두가 붕괴되었다. 마치 가위로 종이를 자르는 것처럼 휴멜의 군대가 양쪽으로 찢어졌다. 그 사이를 제국의 군대가 유린하며 질주했다.

그때였다.

휘오오오!

강맹한 폭풍이 전장 한가운데 피어올랐다. 난데없는 회오리바람에 휩쓸린 병사들이 빙글빙글 돌며 하늘로 솟구쳤다. 회오리바람의 크기가 점점 커졌다. 종국에는 하늘과 맞닿을 정도로 거대해졌다.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기현상에 병사들이 싸움을 멈췄다.

순간.

쾅!

휘이잉!

굉음과 함께 회오리바람이 폭발했다. 갈기갈기 찢어진 바람의 조각들이 전장을 휩쓸었다.

바람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나에게까지 날아왔다. 바람이 머리칼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건…….”

평범한 바람이 아니었다. 마나를 한껏 품고 있는 바람이었다.

“마법인가.”

황급히 전장을 살폈다.

고요했다. 서로의 목숨을 노리던 수십만 명의 병사들이 눈알을 굴리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반전의 기회를 제공한 것은 휴멜의 병사들이었다.

“우오오오오!”

병사 중 하나가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그것을 신호로 휴멜의 병사들이 하나둘씩 포효를 시작했다. 10만이 내지르는 고함 소리에 평원이 들썩였다.

그러다 갑자기 뚝 포효가 멈췄다.

죽음과 같은 침묵이 평원 위에 내려앉았다.

서걱!

휴멜의 병사 하나가 제국 병사의 목을 단칼에 베었다. 떨어진 머리가 풀밭을 굴렀다. 잘린 목에서 분수처럼 핏줄기가 솟구쳤다.

“공격해! 뭘 멍하니 보고 있는 거야!”

제국의 기사들이 마나를 담아 목청껏 소리를 질렀다. 잠에서 깨어난 병사들이 다시 검을 휘둘렀다.

아수라의 지옥도가 푸른 평원 위에 펼쳐졌다.

“크아아!”

처절한 비명이 푸른 하늘을 붉게 물들였다. 솟구친 핏줄기가 평원의 땅을 적시었다.

휴멜의 병사들은 묵묵히 검을 휘둘렀다. 자신의 배에 창이 박혀도 비명 한번 지르지 않았다. 죽일 때도 그리고 죽을 때도 그저 묵묵히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비명을 지르는 쪽은 오직 제국의 병사들뿐이었다.

“마법이군.”

회오리바람에 담겨 있던 마나가 휴멜의 병사들에게서 공포의 감정을 앗아 간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마법의 시전자는 아마도 마나완드의 주인일 것이다.

악의에 가까운 취급에도 병사들이 반항하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그 역시 마법일 것이다.

10만 명이 넘는 사람을 동시에 조종할 수 있는 마법사라.

터무니없었다.

그런 능력을 가진 마법사가 실재한다면 진즉에 대륙의 공적으로 몰렸을 것이다. 재앙이나 다름없는 그런 힘을 왕들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어쨌든 말도 안 되는 능력을 가진 마법사가 있다는 뜻이군.”

하지만 그다지 큰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마법사는 강력하지만 근접전에는 취약한 존재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접근과 암살을 위한 최적의 아티팩트가 있었다.

전쟁의 양상은 서서히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제국의 병사들이 분전하고 있었지만, 감정을 잃은 인형들의 자살 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게다가 상황을 타개해 줄 기사들 역시 어디선가 날아오는 강력한 마법 공격의 희생양이 되었다.

제국 병사들의 얼굴에 절망이 떠올랐다. 자신들의 패배는 곧 제국의 수도가 적의 손아귀에 떨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모 형제가 적의 손에 죽어 가리라. 사랑하는 아내, 연인이 능욕을 당하리라. 수백 년 동안 지녀 온 제국의 자부심이 산산조각이 나리라.

절망하던 병사들의 눈에 독기가 서렸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한 독기와 감정을 상실한 광기가 처절하게 부딪쳤다.

적아의 구분조차 상실한 아비규환이었다.

비명과 비명.

고통과 죽음.

절규와 저주.

그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마지막 히든카드가 검을 뽑았다.

번쩍!

콰광!

새하얀 섬광과 함께 수십 명의 병사가 하늘로 튕겨져 올랐다.

번쩍! 번쩍!

섬광이 연속적으로 터졌다. 동시에 섬광 근처의 병사들이 나풀거리며 날아갔다.

나는 섬광의 원흉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휴우우메에엘!”

병장기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을 뚫고 내 목소리가 기적적으로 그에게 닿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내가 있는 곳을 쳐다봤다.

오싹!

눈과 눈이 마주쳤다. 살기와 살기가 얽히고설켰다.

참을 수 없는 흥분. 막을 수 없는 희열.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짜릿한 전율.

드디어 ‘그날’이 왔다.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잔챙이와 싸울 생각은 없었다.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공격을 지그재그로 피하며 휴멜에게 달려갔다.

“비켜!”

마력을 담아 사자후를 질렀다. 쩌렁쩌렁한 음파가 전장을 강타했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병사들이 귀를 감싸며 우수수 쓰러졌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휴멜의 모습이 점점 커졌다.

“네 녀석은?”

휴멜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아아…… 그렇군.

휴멜에게 나는 이미 잊힌 존재였다. 그에게 있어 나란 존재는 별 볼 일 없는 장기말 중 하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언제든지 대체할 수 있는, 쓰다가 망가지면 버릴 수 있는 장난감. 그런 존재를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이런 놈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렇게 죽을 고생을 했단 말인가.

허무와 울분이 일거에 폭발했다.

슈슉!

다크섀도우를 꺼냈다.

스르륵!

이름 모를 병사의 그림자 속으로 몸을 날렸다. 목표로 했던 그림자 밖으로 튀어나오면서 손을 뒤로 잡아당겼다.

휘익!

푹!

손날을 몸속에 박아 넣었다. 완전히 관통한 팔이 가슴을 뚫고 삐져나왔다.

“아…… 아…….”

왼쪽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그녀는 쏟아지는 피를 막기 위해 양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결국 막을 수 없었다.

털썩.

그녀는 자신이 만든 피 웅덩이 위로 쓰러졌다. 부들부들 몸을 떨다 이내 잠잠해졌다.

나는 그녀가 떨어뜨린 작달막한 나무 막대기를 주웠다. 로열 암스의 주인 중 유일하게 죽음을 맞이한 그녀를 흘끔 쳐다본 뒤 두어 걸음 떨어져 있는 사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뒤를 생각하게 되었을까.

계획대로라면 마나완드를 얻는 즉시 전장에서 이탈해야 했다. 이렇게 위험 속에 몸을 던져서는 아니 되었다.

나에게는 그만큼 중요한 사명이 있었다.

……아니다.

위험? 휴멜 따위가 위험이라고?

겨우 이깟 것에 쓰러진다면 애초부터 나에겐 인류를 구원할 능력 따윈 없는 것이겠지.

더 이상 뒤를 생각하지 않으리라.

결심이 섰다. 이제 남은 것은 본능에 몸을 맡긴 채 마음껏 날뛰는 것이었다.

나는 마나완드를 잘 갈무리한 후 꽈악 주먹을 쥐었다. 검붉은 기운이 주먹에 서렸다.

“네놈은 설마…… 카렌을 죽인 노예 놈? 아닌가? 뭐, 상관없겠지. 어쨌든 고맙군. 안 그래도 전쟁이 끝나면 그 마법사 년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이었는데.”

어렴풋하게나마 휴멜이 나를 기억해 주었다.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툭 끊어졌다.

감사한 마음을 주먹에 담아 힘차게 진각을 밟았다.

쾅!

주먹과 검이 부딪쳤다. 휴멜의 신형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입가에서 한 줄기 선혈이 흘러내렸다.

“반갑다, 개새끼야.”

나는 반갑게 인사했고, 휴멜은 그 답례로 으르렁거렸다.

“어디서 튀어나온 천둥벌거숭이인지는 모르겠지만 겁도 없이 날뛴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지.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될 것이다.”

휴멜이 흉흉한 살기를 뿌리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나는 단번에 죽여 줄 테니. 나는 너처럼 고문을 즐기는 변태가 아니거든.”

나는 이죽거리며 휴멜을 놀렸다.

그때였다.

“휴멜 님을 지켜라!”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하얀 섬광이 번쩍였다. 나는 감에 의지해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쾅!

콰광!

내가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초토화되었다.

네 명의 건장한 사내가 휴멜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이들이 누구인지 알 것만 같았다.

아마도 퍼스트 나이트의 후보들일 것이다.

만약 노예 각인 마법을 풀지 못했다면 나 역시 저 네 명처럼 휴멜을 지키고 있었으리라.

기분이 더러워졌다.

“자아, 그럼 놀아 볼까!”

고기는 먹어야 맛이고, 무기는 적을 베어야 맛이다. 좋은 무기를 썩혀 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으리라.

마법 가방을 뒤적여 마창 그랜드스피어를 꺼냈다.

제국에 전쟁을 선포한 휴멜을 상대로 사용하는 것이니 원래 주인인 로열 기사단의 단장도 크게 기꺼워할 것이다.

좋은 무기는 주인을 가리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주인을 가리긴 하지만, 주인의 능력을 가리지는 않는다. 주인의 모자라는 능력을 보충해 주는 것이 좋은 무기니까.

휘오오오!

그랜드스피어가 아귀처럼 마력을 집어삼켰다.

딱히 창수는 아니었지만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나는 비효율적일 만큼 마력을 쏟아부어 섬세한 기교를 뛰어넘을 만한 파괴력을 구현했다.

웅웅!

마창의 창대가 부르르 떨렸다. 창날에 검은빛이 어렸다. 점점 짙어지던 어둠이 일순 폭발했다.

번쩍!

시커먼 어둠이 전방의 적을 덥석 집어삼켰다.

나는 그랜드스피어를 집어넣고, 신의 망치 묠니르를 꺼냈다. 이왕 있는 거 다 써먹어 보자는 심보였다.

쾅!

망치를 들고 바닥을 내리쳤다.

쩌저적!

땅이 갈라졌다.

“으아아아!”

“살려 줘!”

갈라진 땅으로 애꿎은 병사들이 떨어졌다. 땅을 가리며 뻗어 나간 힘이 어둠이 집어삼킨 장소를 강타했다.

어둠의 장막이 찢어졌다.

장막 안에 있던 휴멜의 네 노예가 파리한 얼굴로 후들거리고 있었다.

망치를 집어넣고 이글아이와 아이스파이어를 꺼냈다. 아이스파이어를 이글아이의 시위에 얹어 놓은 후 마력을 불어 넣었다.

화르륵!

아이스파이어에서 청염이 일었다.

백발백중의 활 이글아이의 시위를 최대한 뒤로 잡아당겼다. 숨을 멈추고, 겨냥하고, 손에 힘을 풀었다.

팽!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아이스파이어가 푸른 빛줄기를 그으며 날아갔다.

아이스파이어가 노예들 한가운데 꽂혔다.

검이 응축된 청염을 토해 냈다. 얼음보다 차가운 돌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바람에 닿은 모든 것이 하얗게 얼어붙었다.

“……굉장하군.”

나는 내가 만들어 놓은 풍경에 솔직하게 감탄했다. 로열 암스에 마력을 집어넣어 휘둘렀을 뿐인데도 모든 것이 초토화되었다.

지진이 난 것처럼 땅이 갈라졌으며, 수백 개의 얼음 동상이 순식간에 만들어졌다.

겁에 질린 제국의 병사들이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도망가는 자는 베겠다!”

기사들이 병사들을 위협했지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다.

잠시 후 마치 썰물이 빠지듯 병사들이 도망쳤다. 마법에 조종당해 이지를 상실한 휴멜의 병사들이 어슬렁어슬렁 그 뒤를 쫓았다.

전쟁은 완벽하게 휴멜의 승리였다. 그는 자신이 장담했던 대로 황제의 자리를 거의 목전에 두었다.

나만 아니었다면, 휴멜은 진정 황제가 될 수 있었으리라.

“안됐군.”

나는 얼음 동상을 향해 조소했다.

순간 섬뜩한 살기와 함께.

파삭!

얼음 동상 중 하나가 깨어졌다. 얼음 동상에서 튀어나온 신형이 나에게 폭사되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동자.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

그래, 바로 이거다.

“그런 얼굴이 보고 싶었다고!”

마력을 끌어모았다.

새하얗게 달아오른 오러 블레이드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벼락같은 압력이 몸을 압박했다.

“크윽!”

본능적인 두려움을 씹어 삼키며 억지로 한 발 내디뎠다. 검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쾅!

동시에 휴멜의 눈빛이 변했다. 분노가 경악으로 바뀌었다.

그래, 이 표정도 마음에 든다.

솟아오르는 희열을 만끽하며 왼발을 축으로 몸을 빙글 회전시켰다. 그리고 놈의 배를 향해 오른발을 날렸다.

부웅!

발과 배가 만나기 직전 휴멜이 몸을 비틀었다. 공중에서 몸을 비틀다니 역시 재주가 좋은 놈이다.

돌려차기가 허공을 가르는 바람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휴멜이 그 틈을 노리고 검을 찔렀다.

나는 재빨리 뒷걸음질 쳤다. 그러면서 주먹으로 검날을 때렸다. 경쾌한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한차례 격돌 후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너, 이름이 뭐지?”

“칼리온이다.”

휴멜이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났다. 노예 각인 마법을 풀고 도망친 노예였군. 어떠냐? 지금이라도 내게 돌아온다면 과거의 잘못은 덮어 주지. 네게 퍼스트 나이트의 지위를 주겠다.”

“괜찮겠군. 퍼스트 나이트는 황제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다지?”

“싫단 말이군. 하는 수 없지.”

대화가 끝났다. 이제 남은 것은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것뿐이었다.

휴멜은 사상 최고의 재능을 소유한 천재 중의 천재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떻게 상대해야 좋을지, 과연 상대할 수나 있을지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던 놈이다.

하지만 이 순간, 놈의 검을 마주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이상하게도 긴장이 되지 않았다.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시야를 넓게 하고, 다가올 위험을 하나하나 계산했다. 물론 그 아래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분노가 맹렬히 타오르고 있었다.

휴멜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웃음은 아니었다.

섬뜩한 예감.

공간을 뛰어넘은 살기가 나를 후려쳤다.

휙!

깃털처럼 가볍게 휴멜이 날아올랐다. 천천히 검을 휘두른다.

하나, 둘, 셋…….

휴멜의 검이 분열하기 시작했다. 수백 개의 검이 하늘을 덮었다.

본 적이 있는 기술이었다. 적무도에서 베네딕트가 썼던 검의 폭풍이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분열한 검의 개수와 검 하나하나가 지니고 있는 가공할 위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검의 폭풍 속으로 뛰어들었다.

바보 같은 짓이었지만, 내가 원하는 짓이었다. 정면으로 붙어서 휴멜을 박살 내는 것.

내가 원하는 것은 오직 그 하나뿐이었다.

서늘한 예기가 사방에서 몰아쳤다.

고개를 숙여 수평으로 날아오는 검을 피했다. 동시에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리고, 오른쪽 어깨를 내렸다. 땅을 디디고 있는 오른쪽 다리를 축으로 한 바퀴 회전했다.

그렇게 검의 폭풍 속에서 춤을 추고 있는 사이 드디어 바늘구멍 같은 길이 눈앞에 나타났다.

“타핫!”

강하게 발을 구른 후 앞으로 튀어 나갔다. 검 끝이 피부를 스치며 지나갔다. 찌릿찌릿한 고통이 전신을 긁었다.

휴멜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멍청한 놈! 뒈져랏!”

휴멜이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내리그었다.

하늘마저 양단할 일격.

휘오오오!

모든 공기가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공기가 빨려 들어가는 곳은 바로 나의 주먹이었다.

은색 빛줄기와 검붉은 빛줄기가 서로 맞부딪쳤다.

쾅!

엄청난 굉음이 울렸다. 충격파를 이기지 못한 얼음 동상들이 산산이 부서진 채 하늘로 날아올랐다.

콰직!

검과 부딪친 주먹의 뼈가 부러졌다.

쨍!

주먹과 부딪친 검에 실금이 그어졌다.

힘과 힘의 충돌.

분노와 분노의 격돌.

마침내 팽팽하던 균형에 균열이 생겼다.

나는 마력을 더 끌어 올리며 한 걸음 전진했다. 고통을 참으며 뼈가 부서진 주먹을 앞으로 뻗었다.

휴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하앗!”

기합과 함께 한 걸음 더 전진한 순간.

파삭!

검이 깨졌다.

장애물을 제거한 주먹이 앞으로 돌진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퍽!

나는 현실도피를 시도하는 휴멜의 주둥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큭!”

나도 모르게 실소했다.

냉철하고 잔인했던 휴멜의 얼굴이 말 그대로 가관이었기 때문이다.

양쪽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고, 앞니가 모두 부러져 입을 벌릴 때마다 바보 같았다. 코가 내려앉아 매부리코처럼 보였다.

나는 휴멜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쓰러뜨리면 기쁠 줄 알았다. 쓰러뜨리면 자유를 되찾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내 가슴속을 메우고 있는 것은 짙은 허무감뿐이었다.

허무감 사이로 울분이 터져 나왔다.

겨우 이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이었냐. 겨우 이 정도로 쓰러질 놈이었냐.

마음이 혼란함으로 가득 찼다. 나를 압도할 만큼 휴멜이 강했기를 바라는 마음조차 있었다.

그만큼 치열해야 했다. 그만큼 처절해야 했다. 그래야 복수의 의미가 퇴색되지 않을 테니.

하지만 그럴 수 없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마왕을 잡아먹고 그의 힘을 소유했다. 바르디엘의 도움으로 완전한 기억을 찾았을 때, 나는 마왕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완벽하게 깨달았다.

그런 나를 ‘인간’이 이길 수는 없었다. 만약 있다면 그는 여신의 축복을 받은 용사뿐이리라.

휴멜의 앞에 섰다. 나의 그림자가 휴멜의 볼품없는 얼굴을 덮었다.

아아…… 그러고 보니 그건 쓰지도 못했구나.

“내, 내가,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휴멜이 더듬더듬 소리를 질렀다. 이빨이 부러져 발음이 시원찮았다. 죽음의 그림자를 느꼈는지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나를 위해 조금만 더 당당해 주면 좋겠군.”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죽음 앞에서 휴멜은 바닥을 드러냈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나는 대륙의 황제가 될 몸이시다! 노예 새끼에게 죽을 수는 없어!”

더 이상은 차마 두고 볼 수 없었다. 나의 복수가 시궁창에서 더럽혀지는 기분이었다.

파지직!

왼손 손바닥이 찌릿했다. 손바닥을 뚫고 지그재그 모양의 번개검이 솟아올랐다. 시커먼 검이 살아 있는 생물체처럼 몸부림을 쳤다.

“네놈을 위해 준비한 히든카드였다. 네놈이 너무 약해서 쓸 틈조차 없었군. 마무리는 이걸로 해 주지.”

그 무엇도 벨 수 없지만 그 어떤 것도 파괴할 수 있는 파멸의 검.

다크 블레이드.

휴멜을 위해 준비한 나의 최강 그리고 최후의 필살기.

왼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내가 바로 대륙의 황제 휴멜 드 호엔레른이다!”

“그래, 너 잘났다.”

왼손을 아래로 내리그었다.

서걱!

푸확!

섬뜩한 소리와 함께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

나는 바닥을 뒹굴고 있는 왼팔을 멍하니 내려다봤다. 왼팔이 있던 자리가 휑했다. 왼쪽 어깻죽지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마력의 공급이 끊기자 다크 블레이드가 요동을 쳤다.

파지직!

결국 번개검은 마지막 발악을 한 후 서서히 소멸되었다.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나는 눈으로 본 것을 믿을 수 없었다.

“너, 너는…… 분명히 죽었을 텐데.”

심장이 있던 자리가 덩그러니 비어 있는 여자가 나를 향해 방긋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휴멜과 싸우기 전 먼저 제거했던 마나완드의 주인이었다.

“어, 어떻게?”

“제법 괜찮은 몸이었는데 당신 때문에 또 쓸모없게 되었군요. 역시 당신과 전 악연인가 봅니다.”

여자의 눈동자에 검은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낯익은 눈동자였다.

“……리치?”

“죽은 척하느라 힘들었습니다. 피에 거부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얼굴을 피 웅덩이에 집어넣는 건 상당히 고역이더군요. 나중에 고문할 때 써먹어 봐야겠습니다.”

“나를…… 죽일 셈……이냐?”

갑자기 많은 양의 피를 흘려서인지 머리가 아찔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기가 힘들었다.

리치가 건들거리며 내 주위를 맴돌았다.

“당신을 죽이지 못하리라 생각하는 겁니까?”

“나를 죽이면…… 너도 죽을…… 텐데.”

“하하하하!”

여자의 몸을 한 리치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니 그녀는 한참을 낄낄거렸다.

“당신도 느끼고 있을 텐데요. 슬레이브 스템프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어떻……게 그럴 수…….”

털썩!

나는 끝내 무릎을 꿇었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피를 많이 쏟은 탓인지 오한이 몰려왔다. 턱이 덜덜덜 떨려 말조차 할 수 없었다.

“바르디엘은 과연 현자라 불릴 만하더군요. 공간의 틈새에 마굴을 만들 줄이야. 당신이 공간의 틈새로 사라진 덕분에 저와 당신을 이어 주던 노예 각인 마법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과 노예 계약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덕분에 그 빌어먹을 마법을 파괴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

젠장. 그렇게 된 것이었구나.

나 역시 슬레이브 스템프를 부수지 않았던가. 어째서 그 가능성을 고려해 보지 않았을까.

신전의 성기사에게 죽어 버렸다고 멋대로 생각한 벌이었다. 벌치고는 좀 과하지만 하는 수 없었다.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리치였으니.

“하하……하하하! 사, 살아 있었구나! 역시 대마법사답다! 죽여라! 어서 그놈을 죽여!”

반쯤 정신이 나간 휴멜이 미친 듯이 웃으며 리치에게 소리를 질렀다. 망가져도 너무 망가진 모습이었다.

휴멜이, 너무 높은 곳에 있어 닿을 수나 있을까 나를 절망케 했던 그놈이, 고작 이런 놈이었다고?

휴멜처럼 높은 경지를 바라보던 강자가 죽음의 공포 따위에 무너질 리 없었다. 강자가 강자인 이유는 이러한 공포를 극복했기 때문이다.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것이 있었다.

“네…… 짓이냐?”

리치는 내 말뜻을 바로 알아차렸다.

“휴멜이란 인간은 말도 안 되게 강하더군요. 하마터면 제가 당할 뻔했습니다. 만약 마나완드를 얻지 못했다면 꼼짝없이 당했을 테지요.”

“믿을…… 수 없다. 고작 그것으로…… 휴멜을 저렇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물론입니다. 힘 대 힘으로 싸웠다면 양패구상 하는 게 고작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 인간. 인간이란 존재는 마음을 가지고 있죠. 그것은 인간을 강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반대로 한없이 나약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의외로 쉬웠습니다. 휴멜은 야심만만한 인간이었고, 저는 그 마음을 살짝 건드리기만 했을 뿐이니까요.”

살짝 벌어진 마음의 틈을 더욱 벌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리라. 그렇게 리치는 천천히 휴멜의 정신을 오염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휴멜이었다.

“죽여! 죽이라고! 나는 지상 최고의 인간이다! 대륙의 황제 휴멜 님이시다! 으하하하!”

“시끄럽군.”

리치가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이글거리는 불꽃이 휴멜의 발치에서 폭발했다.

“크아악!”

휴멜이 비명을 지르며 날아갔다. 기절했는지 다시는 일어나지 않았다.

휴멜의 광소가 사라지자 봄날의 춘곤증만큼이나 조용해졌다.

“드디어 약속을 지킬 때가 왔군요.”

“……약속?”

“반드시 당신을 죽여 내 몸으로 쓰겠다고 했었지요.”

기억이 났다.

적무도에서 베네딕트, 카렌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러 가기 직전. 내 앞을 가로막은 리치를 슬레이브 스템프의 힘을 이용해 전투 불능으로 만들었을 때, 리치는 나에게 맹세했다.

나의 몸을 빼앗겠다고.

“비록 외팔이지만, 어차피 마법사니까 팔 하나쯤 없어도 괜찮겠지요. 그 전에 잠시 해야 할 일이 있군요.”

리치가 나의 왼팔을 주워 들었다. 품 안에서 혈석을 꺼내더니 왼쪽 주먹에 가져다 대었다.

혈석에서 붉은빛이 깜박였다.

“자는 척 그만하고 나와도 된다.”

혈석의 깜박임이 더욱 빨라졌다. 그러더니 이내 붉은빛이 왼팔을 삼켰다.

잠시 후 붉은빛이 사라지자 주먹만 한 혈석에 낯익은 얼굴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쿠차차.”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에고 아티팩트의 이름을 불렀다. 쿠차차는 불편한 얼굴로 나를 외면했다.

“어떻……게 된 거지?”

리치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쿠차차는 본래 마족 소환 의식에 사용되어야 할 혈석으로 만든 아틱팩트입니다.”

많은 의미가 함축된 대답이었다.

“일부러 내…… 몸에 심었다는…… 뜻이냐?”

“몸에 마력을, 그것도 무한에 가까운 마력을 소유한 인간을 만난 것은 일종의 행운이었습니다. 비록 굴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순수한 마력을 흠뻑 빨아들인 혈석을 얻게 됐으니 전체적으론 만족스러운 결과군요.”

쿠차차는 자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숨죽인 채 나의 마력을 먹어 치우고 있었던 것이다.

요사스러운 빛을 발하는 혈석을 던졌다 받았다 하며 리치가 미소를 지었다. 쿠차차는 여전히 내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자아, 그럼 이제…… 복수를 마무리 지을 시간입니다. 어떻게 죽여 드릴까요? 검으로 심장을 찔러서? 아니면 도끼로 머리를 쪼개서? 아니, 너무 파손되면 숙주로 써먹지 못할 테니 도끼는 안 되겠군요. 하하하!”

리치는 마음 내키는 대로 지껄이고 있었다. 분하게도 그것을 막을 힘이 내게 남아 있지 않았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결정했습니다. 당신의 영혼을 혈석에 봉인해 영원히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드리지요. 저와 함께 영원히 사는 겁니다. 생각만 해도 설레지요? 하하하!”

리치가 품속에서 엄지손가락만 한 혈석을 꺼냈다. 그는 혈석을 내 정수리 위에 올려놓은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혈석을 뿌리치기 위해 머리를 움직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꼼짝할 수 없었다.

기하학적인 도형과 읽을 수 없는 문자가 발밑에 그려졌다.

화아악!

마법진에서 뿜어져 나온 빛이 내 몸을 감쌌다.

“크윽!”

정수리의 혈석이 두개골을 뚫고 뇌를 헤집는 듯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고통에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무언가가 혈석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의식이 희미해졌다.

아무 생각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오직 리치의 광소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바로 그때였다.

흐릿한 시야에 빛이 보였다. 순수하고 부드러운 느낌의 밝은 빛이었다.

천천히 다가온 빛이 내 콧잔등 위에 내려앉았다.

그리고 그 순간.

파앗!

섬광과 함께 빛이 폭발했다.

“뭐, 뭐냐!”

리치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순백의 빛이 몸을 감쌌다. 정수리를 파고들던 혈석이 빛의 장막에 떠밀려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

나는 빛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홀리……쉴드.”

흐릿한 시야 너머로 낯익은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빛이 너무 밝아 더 이상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을 감았다. 시커먼 어둠이 나를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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