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 암스
다시 눈을 떴을 때 눈동자에 맺힌 것은 시커먼 하늘이었다. 먹구름이 잔뜩 끼어 달은커녕 별 하나조차 반짝이지 않았다.
“어둠…….”
대체 어떤 놈이 어둠을 보고 공포와 절망의 상징이라고 표현했단 말인가. 이토록 포근하고, 이토록 아늑한 빛깔이 또 어디 있다고.
작열하는 빛에 혹사당했던 눈이 오랜만에 안식을 취했다.
바르디엘의 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다리고 있었다, 마왕이여.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마왕……인가.”
적무도에서 리치와 싸울 때 기억의 일부분을 되찾았다. 그 기억을 토대로 내가 마왕의 힘을 흡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바르디엘이 장시간에 걸쳐 내게 알려 준 것은 그 사실이 뜻하는 의미였다.
그가 말했다.
“너는 빛의 여신 파이레스트의 안배로 마왕을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힘을 흡수했지. 다시 말해 넌 마왕을 잡아먹은 것이다.”
내가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자 바르디엘이 혀를 찼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한 건지 모르는 모양이군. 알기 쉽게 말해 주지. 너는 마왕이 되었다.”
“헛소리.”
“나도 헛소리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빌어먹게도 봐, 버, 렸, 거, 든.”
“봤다고? 무엇을?”
“나는 시간과 공간을 지배한 9레벨의 대마법사다. 덕분에 부분적으로나마 볼 수 있었다. 마왕이 대륙을 불태우는 지옥 같은 미래를.”
“…….”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말을 꺼낸 사람은 전무후무한 대마법사 바르디엘. 그 이름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때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블러드 배틀 때 있었던 폭주. 오직 파괴 본능만으로 움직이던, 결국 섬을 통째로 증발시켜 버린 괴물 중의 괴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바르디엘이 나를 지칭했던 말.
마왕.
그것이 의미하는 것.
“내가 대륙을 불태운다는 뜻…….”
“아니다. 네가 아니라 마왕이다. 마계에서 강림한 진짜 마왕 말이다.”
“아까 전에는 내가 마왕이라고 했는데.”
“마왕 맞아. 그리고 아니기도 하지.”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놈의 말은 도통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여신이 불멸의 존재라면 마왕은 필멸의 존재다.”
“인간처럼?”
“마왕을 죽여 봤으니 알 텐데? 다만 한 가지, 마왕은 죽지만 마왕이란 자리는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그리고 마왕을 오롯하게 마왕이게 하는 것이 바로 마왕이란 이름의 지위다.”
“마계의 마족들에게 마왕이라고 인정받는 순간 진정한 마왕이 된다는 뜻인가?”
“그렇다. 고로 마계의 마족이 모두 소멸하지 않는 이상 마왕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제야 바르디엘의 말을 이해했다. 마왕은 필멸의 존재이면서, 여신과는 다른 방식으로 불멸의 존재였다.
“원래 마왕은 하나다. 이것은 태초부터 내려온 만고불변의 규칙이었다. 하지만 1,000년 전 마왕이 현계에 강림하고 난 후 규칙이 깨어졌다. 바로 네가 마왕을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그러고는 사라졌지. 당연히 마왕이 죽었다고 생각한 마계의 마족들은 처절한 전쟁 끝에 새로운 마왕을 뽑았다. 마계의 전쟁이 종식되는 데는 자그마치 1,0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내가 나타났다는 것인가.”
“그래. 게다가 마왕으로 완전히 각성하지 못한 인간의 몸으로 말이지. 하긴 애초에 마왕을 잡아먹지 못하고 마왕에게 흡수되었다면 마계에 마왕이 생겨났을 리도 없었겠지만. 어쨌든 너로 인해 태초 이래 처음으로 마왕의 힘을 지닌 자가 둘이 되었다.”
어렴풋하게 바르디엘이 하고자 하는 말을 깨달았다. 만약 나의 깨달음이 옳다면 바르디엘이 보았다는, 마왕이 강림한 미래는 아마…….
“깨달은 것 같군. 그래, 마계의 마왕은 바로 너를 잡아먹기 위해 현계로 올라오는 것이다. 그리고 네가 마계의 마왕에게 잡아먹혀 두 마왕이 하나가 되는 순간…… 그 순간이 인류의 마지막 역사가 되겠지.”
그 이후에도 바르디엘은 많은 것을 알려 주었다. 공간과 시간의 지배자란 별명답게 그는 모르는 것이 없었다. 그의 도움으로 나는 나의 과거를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다가올 미래를 준비할 수 있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지? 어차피 네가 죽고 난 후의 일일 텐데.”
헤어지기 직전 내가 물었다.
“나는 9레벨의 대마법사다. 그에 어울리는 일 정도는 해야 되지 않겠어? 예를 들어 인류의 구원자 같은 것 말이야.”
빛무리가 바르디엘의 몸을 감쌌다. 엄청난 후광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빛보다 더 환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매달려 있었다.
“마왕……인가.”
나는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두 마왕이 하나가 되는 순간 인류의 역사가 끝이 난다. 본래 마왕은 여신과 비등한 힘을 지닌 존재였다. 그런 마왕이 두 배의 힘을 얻게 되었으니 가로막을 자가 있을 리 없었다.
“자살도 불가능하고…….”
바르디엘의 말에 따르면 자살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마법사가 심장에 마나석을 만들듯, 이미 나에게도 비슷한 결정체가 있으리란 것이었다.
나에게 남은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그 안에는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
“먹히기 전에…… 먹어 버린다.”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힘이 느껴졌다.
전생의 기억을 되찾음과 동시에 마력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힘을 여전히 전부 사용하지 못하리란 것을 깨달았다.
내 육체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육체가 능력을 따라가지 못했던 메이어처럼 말이다.
반면 현계에 강림한 마왕은 이 힘을 전부 사용하리라.
결코 뒤집을 수 없는 그 압도적인 차이.
운명처럼 예약되어 있는 죽음의 그림자.
하지만 바르디엘은 그 차이를 메울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러기 위해선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스케일이 너무 커졌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목표가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황제를 노리는 미친놈에게 복수하는 것에서 대륙의 운명을 짊어져야 하는 용사가 되다니.
“용사는 아니군.”
그렇다.
나는 마왕이었다.
* * *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날이 밝아 왔다. 동쪽에서 시작된 빛이 산등선을 타고 구불구불 퍼져 나갔다.
따뜻한 아침 햇살에 몸을 녹이며 산을 내려가려 할 때, 문득 이상한 것을 눈치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싸움이 벌어졌던 공터였다.
바르디엘의 마굴은 공간의 틈새에 숨어 있었고, 그곳으로 통하는 열쇠는 강대한 마력이었다.
나는 페이든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막대한 마력을 끌어 올렸다. 게다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루미가 끼어들었다. 그 결과 월광의 힘과 마력 그리고 홀리쉴드의 힘이 부딪쳐 가공할 폭발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르디엘의 마굴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 기억이었다.
기억대로라면 공터 주변은 쑥대밭이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내가 서 있는 이곳은 나무와 풀이 울창했다. 눈이 시릴 만큼 녹음이 짙었다.
“어떻게 된 일이지?”
기억을 떠올리며 싸움의 흔적을 찾았다.
자세히 살피자 하나둘 싸움의 흔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움푹 들어간 구덩이는 잡초로 무성했고, 부러졌던 나무는 상처를 보듬으며 다시 자라고 있었다.
잠시 후 나는 결론을 내렸다.
역시 이곳은 마굴로 들어가기 전의 그 공터가 분명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시간이 흘렀다는 뜻인가.”
황급히 산을 내려갔다. 마침 산을 올라오는 남자가 있어 날짜를 물었다.
대답을 듣는 순간 걸음이 저절로 멈췄다. 서두름이 의미를 잃었다.
내가 아레나를 떠난 것은 제국력으로 352년.
남자가 말했다.
“지금은 제국력으로 357년이오.”
5년이 흐른 후였다.
신선 노름에 도끼 자루 썩는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내가 딱 그 꼴이었다.
바르디엘과 대화를 나눈 시간은 길어 봐야 반나절 정도였다. 그런데 현실적으론 무려 5년의 시간이 흘렀다.
“과연 9레벨의 대마법사……. 시간과 공간의 지배자란 말이군.”
마음이 급해졌다. 부하들의 행방이 염려스러웠다.
성녀와 이단 심문관의 얼굴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마렉과 나에게서 마력을 확인한 그들이 내 부하들에게 무슨 짓을 했을지 걱정이 되었다.
불안한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에 속도를 내려 할 때였다.
“잠깐! 잠깐만!”
낯익은 목소리가 걸음을 붙잡았다. 결코 이곳에 있을 리 없는 사내의 목소리. 황급히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반가운 얼굴이 뒤쪽에서 뛰어오고 있었다.
“웰런?”
“네! 형님! 접니다!”
웰런이 하나뿐인 팔을 흔들며 달려왔다.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나는 감격에 겨워하고 있는 외팔이 사내를 혼란스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성녀와 이단 심문관이 가만히 놔뒀을 리 없을 텐데, 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웰런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형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신전이 웰런을 가만 놔둔 것이 분명했다.
나는 정신을 추스른 후 물었다.
“설마 5년 내내 여기서 나를 기다린 것은…….”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웰런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닌 인연이었다. 투기장에서 적으로 만나 훗날 이용하기 위해 접근했다. 나의 흑심을 알면서도 웰런은 기꺼이 그것을 수용했다.
딴에는 자기만족을 위해서라고 하지만 결코 그것만이 아니었다. 나를 바라보는 웰런의 눈동자가 뜨거웠다.
나는 격정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슬쩍 고개를 돌렸다.
“아레나는 어떻게 됐지? 다른 놈들은?”
“다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형님 덕분에 원래 계획보다 훨씬 빠르게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습니다. 어떻게 신전을 구워삶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역시 형님입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자세히 말해 봐.”
웰런의 이야기는 놀라웠다.
내가 행방불명되고 얼마 후 신전에서 밀사를 보내 웰런에게 전폭적인 지지를 약속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긴가민가하는 마음에 조심했지만 지원을 해 주겠다는 약속은 사실이었습니다. 신전의 전폭적인 지원 덕분에 아레나는 1년 만에 다시 최고의 투기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형님의 계획대로 대륙의 투기장을 모두 발밑에 두고 있습니다.”
아레나를 장악한 것은 투기장 연합을 집어삼키기 위한 포석이었다. 투기장 연합을 손아귀에 틀어쥘 수 있다면, 용병 길드처럼 투사들만의 길드를 만들 수도 있으리란 계산에서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은밀해야 했다. 용병 길드와 같은 거대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어느 누구도 반기지 않을 테니 말이다. 특히 신전처럼 이미 세력을 이루고 있는 곳은 권력의 구조상 반대의 입장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마족의 힘인 마력을 사용하는 자가 주인으로 있는 곳이었다. 신전이 도와줄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전이 발을 벗고 나섰다. 필시 내가 모르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머릿속이 혼란했다.
“부하들은 모두 무사한 거지?”
나는 한 번 더 물었다.
“모두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만…….”
웰런이 꺼림칙한 표정으로 말을 흐렸다.
“다만?”
내 표정을 살피던 웰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법사가 사라졌습니다.”
웰런이 말하는 마법사는 리치가 분명했다. 리치가 행방불명된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신전과 리치는 상극 중의 상극이었다. 신전이 아레나를 지원했다는 것은 아레나에 리치의 자리가 사라졌음을 의미했다.
나는 정신을 집중했다.
리치와 나는 노예 각인 마법인 슬레이브 스템프로 이어져 있었다. 만약 리치가 신전의 성기사들에게 제거되지 않았다면 리치의 존재가 느껴질 것이다.
한참을 집중해 봤지만 리치의 존재는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건가.”
마음이 복잡했다. 왠지 모르게 심란했다. 나를 숙주로 삼으려 했던 마물이었지만, 그래도 오랜 시간을 함께한 존재였다. 알게 모르게 감정이 쌓인 듯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잡념을 날려 버렸다.
어차피 이 세상에 있어선 안 될 존재였다. 복수를 끝내면 내 손으로 죽여 없애려 했던 존재였다.
차라리 남의 손에 죽은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이용만 해 먹고 죽이는 것은, 상대가 아무리 마물이라 할지라도, 찝찝한 일이었다.
“그럼 가 볼까, 부하들을 보러.”
내가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웰런이 입을 열었다.
“그 전에 가 볼 곳이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지?”
웰런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신전입니다. 형님이 다시 나타나면 꼭 신전으로 데려와 달라고 그러더군요. 그것은…… 부탁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여전히 신전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적인지 아군인지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놈들의 홈그라운드로 들어갈 수는 없었다.
“신전에는 나 혼자 가겠다. 그러니 너는 먼저 아레나로 돌아가 있어. 만약 신전에서 온 사람이 묻거든 조만간 내가 찾아간다고만 말해 둬라.”
신전의 의도가 좋든 나쁘든, 그들이 부하들의 숨통을 쥐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신전의 호의가 함정이었을 때를 대비해야 했다. 다행히 그것은 미래를 위해 해야 되는 일과도 일맥상통했다.
당혹해하는 웰런을 세워 둔 채 몸을 돌렸다. 그러곤 뛰다시피 산을 내려왔다.
“형님! 어디 가는 겁니까!”
등 뒤에서 웰런의 외침이 들렸다.
* * *
에르마 왕국은 대륙의 남서쪽을 지배하고 있는 강대한 왕국이었다. 분명 5년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5년이 지난 지금은 어느 곳에서도 강대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에르마 왕국의 수도 쿠이린은 마치 두들겨 맞은 주정뱅이처럼 폐허가 되어 있었다. 건물은 대부분 무너져 있었고, 사람들은 모두 거지꼴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남자에게 사정을 물었다.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내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이름이었다.
휴멜 드 호엔레른.
호엔레른 백작을 죽이고 백작가를 차지한 휴멜이 기어이 전쟁을 일으켰다. 모든 사람들의 예상을 깨고 그는 1년 만에 자타르 왕국을 평정했다.
호엔레른 백작가가 제아무리 자타르 왕국 내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대가문이라 할지라도, 1년 사이에 왕국을 뒤엎은 것은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휴멜은 내란의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곧장 주변 왕국들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 후에 이어진 3년간의 전쟁은 말 그대로 태풍이었다. 휴멜은 역사상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강했으며, 그의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로 무모했다.
연전연승.
아무도 휴멜을 막지 못했다. 휴멜이 없는 틈을 타 주변 왕국이 자타르를 공격했지만 휴멜은 회군하지 않았다.
사로잡힌 포로는 아군이 되거나 처형당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보급은 마을을 약탈하는 것으로 해결했다.
그렇게 휴멜의 군대는 전진, 또 전진하며 남부 대륙을 유린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군세는 늘어 갔고, 승리는 쌓여 갔다.
치국을 포기하고 전진만 한 탓에 남부 대륙을 통일했음에도 불구하고 휴멜은 온전히 자신만의 나라를 세울 수 없었다. 휴멜에게 정복당한 나라의 반란군들이 곳곳에서 들고일어나 새로운 왕국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휴멜은 그들을 무시했다. 마치 언제라도 때려잡을 수 있다는 듯 오만하게.
그는 여태껏 해 왔던 행동을 반복했다. 남부 대륙을 유린하며 얻은 10만의 정예병을 앞세워 제국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던 것이다.
휴멜은 그렇게 전진했다.
“그 미친놈이 정말로…….”
나를 퍼스트 나이트로 만들어 주겠다고 하던 말은 역시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심 어린 말과 그것을 이루게 해 주는 능력은 상호 비례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휴멜의 천재성은 전무후무한 것이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진격의 속도가 너무 빨랐다. 불과 몇 년 만에 무너질 만큼 대륙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기연이라도 얻었나.”
나는 생각을 멈췄다. 휴멜이 무슨 수를 썼는지 아무리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나중에 만남의 시간이 왔을 때 휴멜에게 물어보는 편이 훨씬 나은 방법이었다. 그리고 나와 휴멜은 반드시 만나야만 했다.
그때였다.
“아…….”
우뚝 걸음을 멈췄다. 무언가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생각의, 아니 감정의 이질감. 분노하고 있어야 할 자리를 차가운 이성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피가 거꾸로 솟구칠 만큼 저주하는 놈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감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마치 수학 문제를 풀듯 담담하게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고 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휴멜에 대해서만큼은 그래선 아니 되었다.
낯선 세상에서 눈을 뜬 이래 그는 내 삶의 목적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복수하겠단 일념 하나로 가지고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였다.
나는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서 무엇이 나를 변하게 했는지 생각했다.
어쩌면 증오의 감정이 시간에 의해 마모된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복수의 감정이 순수하지 못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나에게는 삶의 목적이 필요했으니까. 때문에 인류의 구원이라는 보다 고차원의 목적과 만나는 순간 목적의 희소성이 옅어진 것인지도 몰랐다.
“뭐,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하지 않을 것도 아니고.”
복수의 의미가 작아졌다 해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이미 복수는 산비탈에서 구르는 바위와 같았다. 이제 와 멈출 수는 없었다.
“조만간 결착을 내야겠지.”
나는 폐허가 된 에르마 왕국의 수도를 가로질렀다. 목적지는 수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공작령 트레보르.
휴멜에게 점령당한 에르마 왕국의 독립을 위한 반란군의 아지트였다.
* * *
공작령 트레보르.
에르마 왕국의 유일한 공작 오스툴의 영지.
에르마는 대대로 왕권이 강성한 왕국이었다. 오스툴은 그런 왕국에서 국왕 다음가는 권력을 지닌 유일한 귀족이었다. 아니, 병권을 한 손에 틀어쥐고 있었기 때문에 권력의 크기는 왕을 능가했다.
그렇다고 해서 에르마 왕국의 왕이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사자왕이라 불릴 만큼 용맹한 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툴 공작에게 병권을 몰아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오스툴 공작은 대륙 최강의 무기를 소유한 기사 중의 기사였다.
오스툴 폰 트레보르.
그는 로열 암스 아이스파이어의 주인이었다.
반란군의 주둔지는 오스툴 공작의 저택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었다. 본래 반란군 하면 좀 더 은밀한 곳에 위치하고 있어야 했지만 에르마 왕국의 정복자는 반란군의 소탕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덕분에 반란군은 마음 편히 힘을 기를 수 있었다.
오스툴 공작의 저택을 어슬렁거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나를 노려봤다.
“못 보던 얼굴인데?”
험악하게 생긴 사내가 경계를 하며 말을 걸었다.
“지나가던 용병이다.”
“용병이 여기서 뭐 하는 거지?”
말속에 경계심이 더욱 짙어졌다.
“어느 쪽에 붙어야 좋을까 살펴보는 중이다. 오스툴 공작이 대단하다고 해서 와 봤는데 헛소문이었나 보군. 휴멜의 기세는 멀리서도 대단했는데.”
사람들의 표정이 일시에 일그러졌다.
“오스툴 공작님을 모욕하는 것이냐? 오스툴 공작님은 에르마 왕국, 아니 대륙 제일의 기사이다! 기세도 갈무리 못 하는 천둥벌거숭이 놈과 비교하지 마라!”
천둥벌거숭이라.
이들은 절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다. 적의 능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놈들이 휴멜을 상대로 승리할 리가 없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한 죄책감이 사라졌다. 어차피 성공하지 못할 것이니 차라리 나에게 맡기는 편이 좋으리라.
나는 몸을 돌렸다.
“어딜 도망가는 것이냐! 공작님을 능멸하고 그냥 갈 수 있을 것 같으냐!”
사람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오스툴 공작이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소란을 피울 일이 없었다. 나는 슬쩍슬쩍 몸을 피하며 멀리 도망쳤다.
“이 쥐새끼 같은 놈아! 멈춰라!”
주저앉은 사내들이 숨을 헐떡이며 소리를 질렀다. 그들의 간절한 외침을 가볍게 무시하며 골목길로 몸을 숨겼다. 그곳에서 밤이 되길 기다렸다.
남의 집 담벼락 아래에 숨어 휴식을 취하는 사이 어느새 밤이 되었다. 철저하게 파괴당한 수도보다는 나았지만 공작령 역시 휴멜에게 유린을 당한 후였다. 전란의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거리는 폐광촌처럼 스산했다.
나는 유일하게 대낮처럼 밝은 공작가의 저택을 지그시 바라봤다.
“하나! 둘!”
“목소리 봐라! 더 크게 못 해!”
훈련 중인 반란군의 목소리가 고요한 밤공기를 찢었다.
은밀하게 잠입하는 것은 불가능한 환경이었다. 하지만 나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나에게는 은신을 도와주는 최고의 아티팩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꺼냈다.
로열 암스 월광.
최강의 암살자 페이든의 보물.
월광을 몸에 둘렀다. 기이한 감각이 전신을 감쌌다. 한 번도 사용해 본 적 없지만 어째서인지 사용 방법을 알 것 같았다.
심호흡을 한 후 머릿속에 떠오른 대로 몸을 움직였다.
스르륵!
그림자 속으로 몸이 녹아들었다.
확실히 월광은 암살자를 위한 최고의 아티팩트였다. 그림자와 그림자를 넘나들며 저택 안으로 숨어드는 동안 어느 누구도 나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스르륵!
방의 한쪽 구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벽난로 옆이었고, 때문에 그림자가 가장 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숨을 죽인 채 내부를 살폈다.
양쪽 벽면에 화려한 장식의 가구가 높여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소파와 테이블이 위치했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열린 창문에서 바람과 함께 달빛이 들어왔다.
그 달빛이 아슬아슬하게 닿은 곳에 중년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그가 앉아 있는 흔들의자가 바람에 떠밀린 배처럼 흔들거렸다.
탁!
사내는 보고 있던 책을 덮고, 내가 있는 어둠 속을 지그시 쳐다봤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차렸다.
“생각보다 늦었군.”
사내는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의자 옆에 세워져 있는 롱 소드를 들어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것만으로 기세가 바뀌었다.
잔잔했던 방 안의 공기가 사납게 날뛰기 시작했다. 반쯤 열린 창문이 덜커덩거리다 이내 활짝 열렸다. 커튼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달빛이 방을 환히 밝혔다. 은은한 달빛이 오스툴 공작의 얼굴을 비췄다.
어차피 암습할 생각이 아니었기에 나는 달빛 속으로 걸어 나갔다.
“놈이 보낸 암살자인가? 나를 죽이고 내 검을 가져오라고 하더냐?”
‘놈’은 아마 휴멜을 가리키는 듯했다.
“나는 암살자가 아니다. 하지만 네 검을 가져가려는 것은 맞다.”
오스툴 공작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의 진의를 꿰뚫어 보려는 듯이.
“언제까지 앉아 있을 셈인지? 싸우는 데 이유가 필요한가?”
오스툴 공작이 피식 웃었다. 그는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났다. 한 손에 검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네 말이 맞다. 네가 암살자든, 아니든,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 내 검을 빼앗으러 왔다는 게 중요하지. 어디 그만한 실력이 있는지 볼까?”
“재미있을 것이다. 검을 내주고 싶을 만큼.”
“기대하지.”
오스툴 공작이 미소를 지었다.
사납게 요동치던 공기가 잔잔하게 내려앉았다. 압축을 하는 것처럼 공기가 서서히 무거워졌다. 마치 바다 깊숙한 곳에서 수압을 느끼듯 가슴이 답답했다.
“크윽!”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토해 내는 순간.
챙!
오스툴 공작이 검을 뽑았다. 섬광이 눈앞에서 번쩍였다.
나는 눈을 감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섬광을 피해 몸을 비틀었다.
서걱!
나를 스쳐 간 섬광이 내 옆에 있던 벽난로를 갈랐다. 타다 만 장작개비와 불티가 사방으로 튀었다.
“고작 그 실력으로 내 검을 가지러 왔단 말이냐!”
검 끝을 나에게 향한 채로 공작이 비웃었다. 그는 활시위를 당기듯 검을 천천히 뒤로 잡아당겼다.
화르륵!
푸른 불꽃이 검날에 서렸다. 불꽃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모든 것을 얼리는 차가운 불꽃.
불과 얼음의 검, 아이스파이어가 마침내 힘을 개방했다.
공기 중의 수증기가 일순간에 얼어붙었다. 숨을 쉴 때마다 공기가 허파를 난도질했다. 하얀 입김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났다.
“이것도 피할 수 있나 보자!”
공작이 당겼던 검을 앞으로 내뻗었다.
휘오오오!
광풍과 함께 검날에 서려 있던 푸른 불꽃이 뻗어 나왔다. 푸른 불꽃은 채찍처럼 날뛰며 주변을 휩쓸었다. 푸른 불꽃에 닿은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뒷걸음질 치며 피하다 보니 어느새 구석까지 몰리게 되었다.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었다.
휘리릭!
독니를 품은 불꽃이 발목을 물어뜯었다.
“크윽!”
발목이 잘려 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발목은 여전히 그 자리에 붙어 있었다.
다만 얼어붙었을 뿐이다.
푸른 불꽃이 몸 곳곳을 할퀴고 지나갔다. 한쪽 발이 바닥에 붙어 있어 공격을 피할 수가 없었다.
차가움이 지나치면 뜨거운 법이다. 온몸이 불구덩이에 있는 것처럼 뜨거웠다.
푸른 불꽃이 가슴팍을 스치며 지나갔을 때, 마침내 나는 얼음 동상이 되었다.
몸을 꼼짝할 수 없었다. 투명한 얼음 너머로 오스툴 공작이 보였다. 그는 푸른 불꽃을 거둔 채 저벅저벅 나에게 걸어왔다.
몸에 힘을 줬다.
드드득!
얼음에 균열이 생겼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움직일 수 없었다.
“대단하군. 아직도 살아 있다니.”
오스툴 공작이 나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의 얼굴에 기분 나쁜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 봐도 사람이 얼어붙은 모습은 아름다워.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공작의 손가락이 어깨를 지나 팔을 훑었다. 공작 때문인지, 아니면 얼음의 차가움 때문인지,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몸에 더 힘을 주었다.
쩍!
쩌저적!
얼음의 균열이 더 커졌다. 가느다란 선이 얼음 위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그렇게 서두르지 마라. 곧 얼음에서 꺼내 줄 테니.”
오스툴 공작이 손을 들어 내 목을 잡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그의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위기가 느껴지자 본능처럼 마력이 솟구쳤다. 검은 열기가 차갑게 식은 혈관 위를 질주했다. 꺼져 가던 생명의 불꽃이 다시 타올랐다. 잃어버린 힘이 되돌아왔다.
나의 변화를 알아차린 공작이 손에 힘을 주었다.
내가 더 빨랐다.
쩡!
파파팟!
단말마의 비명처럼 얼음이 깨어졌다. 깨진 얼음 조각이 공작을 향해 폭사되었다.
“커헉!”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공작이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얼굴을 제외한 몸 전체에 얼음 송곳이 박혔다. 투명한 얼음 송곳을 타고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방 안은 이미 만년설이 쌓인 고산과 다를 바 없었다. 나 역시 설인처럼 하얀 서리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타타탁!
“공작님 방이다!”
“침입자다! 모두 공작님 방으로!”
폭발음을 듣고 공작의 부하가 몰려들었다.
“일단 사과해 두지. 좀 더 싸우고 싶지만…… 아직 여유가 부족해서.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제대로 붙어 보자고.”
나는 상처 입은 야수처럼 으르렁거리고 있는 공작에게 사죄했다.
“뭔 개소리냐! 이곳에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공작이 살기를 뿜으며 다시 검을 들었다. 사그라졌던 푸른 불꽃이 다시 맹렬히 타올랐다. 전보다 훨씬 강맹한 기세였다.
나는 옆으로 살짝 뛰었다. 그곳에는 부서진 벽난로가 만든 그림자가 있었다. 시커먼 구멍 속으로 뛰어들었다.
슉!
다시 튀어나온 곳은 공작의 등 뒤였다. 기척을 알아차린 공작이 푸른 불꽃이 깃든 아이스파이어를 휘둘렀다.
이번에도 역시 내가 더 빨랐다.
퍽!
손날로 공작의 팔목을 내리쳤다.
우드득!
“큭!”
뼈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공작이 검을 놓쳤다.
공작의 엉덩이를 걷어참과 동시에 떨어지는 검의 손잡이를 낚아챘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검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엉덩이를 걷어차여 멀리 나가떨어진 공작이 분노로 이글거리는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감히! 그것이 어떤 검인 줄이나 알고 있느냐!”
나는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집을 들어 아이스파이어를 넣었다. 반항을 하던 검이 그제야 잠잠해졌다.
“물론 알고 있지.”
그때였다.
쾅!
방문이 폭발하며 공작의 부하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대화를 나눌 여건이 되지 않는군. 그럼 인연이 있다면 나중에 보자.”
“자, 잠깐! 기다려!”
공작의 부하가 아니었기에 나는 과감히 그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러곤 달빛이 미처 다다르지 못한 곳으로 몸을 날렸다.
스르륵!
나는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안 돼애애!”
공작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 * *
오스툴 공작의 저택을 탈출한 후 멀리 도망쳤다. 월광이 있는 이상 사로잡힐 위험은 거의 없었지만, 괜한 소모전으로 힘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자아, 다음에 갈 곳은…….”
나는 기억을 더듬었다.
“좋아. 정했다.”
그곳은 월광의 위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장소였다. 더불어 나에게 가장 위험한 장소이기도 했다.
나는 마법사 길드로 가 리칸 왕국으로 텔레포트했다. 그리고 리칸 왕국의 마법사 길드를 이용해 북동쪽으로 다시 텔레포트했다.
그곳에는 대륙을 통틀어 악명이 높은 마물의 숲이 있었다. 마물의 어두운 기운 탓인지 숲의 나무들이 대부분 바짝 말라 있어, 사람들은 그곳을 가시나무 숲이라 불렀다.
가시나무 숲은 그 자체만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지만, 한 사람의 기행으로 인해 더욱더 이름이 높아졌다.
신궁神弓 포를란.
열다섯 살에 가시나무 숲에 들어가 20여 년 동안 숲 밖으로 나오지 않은 기인 중의 기인.
그가 왜 마물의 숲으로 들어갔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자는 마물에게 가족을 잃어 그 복수를 하기 위해 들어갔다고 했다. 혹자는 숲 속의 마물이 숲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들어갔다고 했다.
포를란이 복수심에 미쳐 버린 광인인지,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용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기회가 된다면 숲에서 살고 있는 진짜 이유를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사악한 기운으로 둘러싸인 숲을 바라봤다.
“살아 있겠지?”
가시나무 숲을 탐험했던 모험가들의 증언만이 포를란의 생존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물의 숲을 탐험할 만큼 정신이 나간 탐험가가 그리 많은 것도 아니고, 게다가 숲에 들어갔다고 해서 모두 포를란을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그의 생사는 몇 년 단위로 확인될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 길드에서 확인해 본 결과 포를란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것은 4년 전이었다.
“자아, 그럼…….”
나는 숲 속으로 크게 발을 디뎠다.
과거의 모험가들처럼 숲을 탐험하며 포를란을 찾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이 넓은 숲에서 그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그가 나를 찾아오게 만들어야 했다.
제아무리 몬스터들이 바글거리는 마물의 숲이라 할지라도 20여 년이 넘도록 살아온 터전이었다. 자신의 안마당을 파괴하는 놈을 가만히 지켜볼 성인군자는 얼마 없다.
스르릉!
오스툴 공작에게서 빼앗은 아이스파이어를 꺼냈다.
웅!
아직도 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검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마력을 주입하자 이내 잠잠해졌다. 순수한 마나의 결정체인 마력을 좋아하지 않을 리 없었다.
화르륵!
검날에 푸른 불꽃이 타올랐다.
나는 차갑디차가운 불꽃을 팔자 모양으로 휘저으며 숲 속을 거닐었다. 목표는 딱히 없었다. 나무가 있으면 나무를 베었고, 몬스터가 보이면 몬스터를 베었다.
마물의 숲답게 사방에서 몬스터들이 공격해 왔지만 푸른 불꽃을 이겨 낼 만한 몬스터는 없었다. 한때 나를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드레이크조차 순식간에 얼음 동상이 되어 버렸다.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내가 만들어 놓은 순백의 세계를 감상했다.
새하얀 얼음이 태양 아래 반짝반짝 빛났다. 다양한 모양의 얼음 조각들이 마치 예술 작품처럼 광활한 숲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나는 나의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을 내려다봤다. 발밑에 박혀 있는 것은 하나의 화살이었다.
화살이 날아온 곳을 향해 고개를 드니, 멀리 떨어진 곳에 어렴풋이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높은 나뭇가지 위에 누워 있었다. 낮잠이라도 즐기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깨어 있음을 알았다.
실보다 가는 살기가 일직선으로 뻗어 와 나의 심장을 가리키고 있었다. 섬뜩한 느낌과 함께 소름이 돋았다.
사내를 향해 한 발 내딛는 순간 다시 화살 한 발이 날아왔다. 날아온 화살이 땅에 박혀 있던 화살의 화살대를 반으로 갈랐다.
오한이 들 만큼 정교한 활 솜씨였다.
나는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사실 보는 순간 사내의 정체를 짐작했지만 엄청난 활 솜씨를 보고 나니 확신이 생겼다.
겨냥한 표적은 절대로 놓치지 않는 백발백중의 활, 이글아이Eagle Eye.
“포를란……. 역시 살아 있었군.”
나는 현존 최강의 사냥꾼이 보내온 경고를 무시한 채 다시 한 발을 내디뎠다. 왼쪽 어깨가 따끔하다고 생각한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분명히 피했다고 생각했건만, 화살이 왼쪽 어깨를 때렸다. 다행히 촉이 달려 있지 않은 화살이었다. 뼈가 찌르르 울릴 만큼 날카로운 일격이었다.
“역시 멀리서 다가가는 것은 무리인가. 그렇다면…….”
나는 아름드리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포를란이 나뭇가지 위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곤 뛰기 시작했다. 그는 마치 월광의 능력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렸다.
포를란은 그렇게 도망을 치면서 내가 그림자 속에서 튀어나오는 순간을 노려 화살을 날렸다.
그 화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정교했다.
나무 뒤로 숨어 봤지만 소용없었다. 화살은 살아 있는 뱀처럼 나무 뒤로 휘어져 들어왔다.
하마터면 머리에 구멍이 날 뻔했다.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어 간신히 화살을 피했다.
나는 화살에 맞지 않기 위해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다.
해가 뜨고, 해가 졌다. 달이 뜨고, 달이 졌다.
해가 있을 때는 쫓기고, 달이 떴을 때는 쫓았다. 다시 해가 뜨면 그가 나를 쫓았고, 달이 뜨면 내가 그를 쫓았다.
그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우리는 서로의 꽁무니를 열심히 쫓았다.
“헉…… 헉…….”
숨이 턱까지 차올랐다. 단순히 달리기만 했다면 이 정도까지 지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화살에 맞지 않기 위해 쏟아붓는 심력이 너무 많았다.
포를란의 화살은 보기엔 평범한데 막기가 매우 까다로웠다. 마치 맞을 자리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처럼 제대로 피할 수가 없었다. 화살에는 노린 자리에 반드시 박혀야 한다는 강렬한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로열 암스 이글아이의 고유 능력으로 보였다.
그로 인해 숨어도 휘어져 쫓아오고, 부러뜨려도 부러진 반쪽 화살이 여전히 내 목을 노렸다.
화살에 맞지 않기 위해선 그 의지를 꺾을 만한 힘이 필요했다. 아이스파이어로 얼려 버리거나, 아니면 그림자 속으로 숨어 존재를 지우든가.
장시간 정신을 집중한 탓에 머리가 무거웠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밤낮 가리지 않고 이어지던 추격전이 서서히 끝나 갔다. 결코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술래잡기가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나는 그림자 안에서 튀어나왔다.
놈의 뒤통수가 내 앞에 있었다. 놈이 반응하기도 전에 손날로 목덜미를 가격했다.
퍽!
“크윽!”
외마디 비명과 함께 포를란이 고꾸라졌다.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댄 채 털썩 주저앉았다. 숲 특유의 청량한 공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끄응!”
단순히 일어나는 동작만으로도 뼈마디가 비명을 질렀다.
조금만 쉬었다 갈까.
다시 주저앉으려다 간신히 버티고 섰다.
나는 이글아이와 포를란을 양쪽 어깨에 들쳐 멨다.
포를란을 마물의 숲에 무방비로 남겨 놓을 수는 없었다. 술래잡기를 토대로 포를란의 실력을 가늠해 본 결과 포를란이 이글아이 없이 이곳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상당히 희박했다.
“이런다고 해서 나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 줄 것 같지는 않지만…….”
쓴웃음을 지으며 걷기 시작했다.
포를란이 깨어날 때마다 다시 기절시키기를 반복하며 가시나무 숲의 입구로 향했다.
숲의 입구에 도착한 것은 꼬박 하루가 지난 후였다.
나는 입구에 포를란을 버리고 숲을 떠났다. 끝내 그가 무슨 이유로 가시나무 숲에서 살고 있는지 묻지 못했다. 대화 한마디 나눌 겨를도 없이 술래잡기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뭐, 기회가 된다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포를란을 흘끔 돌아본 후 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다음 목적지는 폭풍을 일으키는 마창魔槍, 그랜드스피어Grand Spear의 주인이 있는 곳이었다.
한 달 후.
나는 마창 그랜드스피어를 손에 넣었다. 그랜드스피어의 주인은 제국 최강의 기사단인 로열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때문에 일대일이 가능하도록 기회를 만드는 데 애를 먹어야 했다.
다시 한 달 후.
지진을 일으키고 해일을 만드는 신의 망치, 묠니르Mjolnir를 손에 넣었다. 묠니르의 주인은 용병 길드의 마스터였다. 때문에 나는 방랑벽으로 유명한 그의 행방을 찾기 위해 애를 먹어야 했다.
현재 내가 모은 로열 암스는 모두 다섯 개. 아니, 바르디엘의 말을 믿자면 여섯 개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호엔레른 백작가의 무기 창고에서 얻은 다크섀도우 역시 로열 암스라 하였다.
로열 암스는 알려진 것과 달리 여신의 숨결이 담긴 무기가 아니었다. 오히려 마왕의 숨결이 담긴 악마의 무기였다.
1,000년 전 마왕이 대륙에 강림했다.
마왕은 대륙을 난도질했고 인간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죽어 갔다.
마왕의 목적은 인류의 멸망이었고, 그것은 곧 신의 죽음을 뜻하기도 했다.
신의 최정점에 위치해 있던 빛의 여신 파이레스트는 마왕의 진격을 방관할 수 없었다. 여신은 자신의 권능을 부여받은 용사를 탄생시켜 마왕과 대적하게 했다. 또한 ‘나’를 이용해 마왕의 빈틈을 노리게 했다.
여신의 계략은 적중하여 인류는 마왕과의 전쟁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로열 암스는 마왕과의 전쟁이 끝난 바로 이때 만들어졌다.
로열 암스의 재료는 마왕의 피를 머금은 신검이었다. 마왕의 힘과 여신의 힘을 동시에 머금은 금속은 그 자체로 아티팩트나 다름없었다.
나는 아티팩트나 다름없는 금속으로 만든 일곱, 아니 여덟 개의 로열 암스를 찾아 다시 하나로 합쳐야 했다. 그것이 바르디엘이 내게 알려 준 유일한 방법이었다.
“시간이 부족하군.”
지금쯤이면 내가 돌아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신전 놈들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웰런에게 부탁해 놓은 말이 있지만 그들이 기다려 준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너무 늦으면 내가 도망갔다고 판단해 웰런을 고문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신전에는 성녀의 로열 암스 홀리쉴드가 있었다. 성녀라는 위치상 지금까지처럼 일대일 대결이나, 기습을 이용해 로열 암스를 빼앗기는 힘들 것이다.
아마 정면으로 부딪쳐야 하리라.
때문에 신전으로 찾아가기 전, 홀리쉴드를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손안에 넣어야 했다.
남은 것은 하나.
세계수의 나뭇가지로 만들었다고 알려진 마나의 지팡이, 마나완드Mana Wand.
“좀 더 나중에 만나고 싶었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기쁨과 망설임, 설렘과 원인 모를 갈등이 번갈아 마음을 들쑤셨다.
내가 가야만 하는 곳.
내가 만나야만 하는 사람.
마나완드의 주인인 그녀는 그곳에서 그를 돕고 있었다.
그가 불과 몇 년 만에 남부 대륙을 초토화시킬 수 있었던 이유. 그가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할 수 있었던 이유.
그녀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멀리 그의 진영이 보였다. 10만이 넘는 병사들이 천막을 치고 야영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이었다.
현자 바르디엘 이래 최대의 재능으로 인정받고 있는 천재 마법사.
마나완드의 주인은 바로 휴멜의 옆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