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69화 (169/369)

169화

<예고>

‘오늘도 방송했구나….’

예나는 현대왕의 홈페이지에 들려서 방송 녹화 날짜를 확인하고 있었다. 워낙 공공연히 알려진 유명인이다 보니 방송 홈페이지의 게시판에도 팬들이 써놓은 글이 상당히 많았다.

예나는 그 글들을 스크롤로 일일이 훑어보았다. 사랑한다는 둥, 목소리가 섹시하다는 둥 칭찬글이 더러 있었지만 그에 반면 제발 방송 좀 그만하라면서 비아냥거리는 글들도 몇 가닥 있었다.

‘이렇게 방송하면 정말 그런 생각이 들지도….’

예나는 평소 민국의 편이었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든 늘 민국의 곁에서 함께 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본래 성격 중에 하나인 그의 변태적 막장 성향은… 예나조차도 감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질이었다.

‘같은 비제이기 때문에 받아줄 수 있는 걸까?’

돌연 민국의 여자 친구인 강은별이 떠올랐다. 그녀 역시 파뿌리TV라는 방송 홈페이지에서 유명한 방송인으로 점찍여 있었다. 그러나 민국처럼 정체가 들켰어도 그게 당황하던 모습은 아니었다.

그 이유야 당연지사, 민국과는 다르게 그녀는 일반 방송인이라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항상 주변에 폐를 끼치고 다니는 민국과는 다르게, 은별의 방송은 너무나도 예의 바르고 팬들에게 거리낌 없이 잘하는 식이었으니 말이었다.

‘…….’

예나는 말없이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다가 은근슬쩍 ‘방송하기 버튼’으로 마우스 커서를 움직였다. 혹시나 자신도 방송을 하게 되면 조금이나마 민국을 이해하게 될 지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서 돌발적으로 한 행위였다.

“언니 뭐하세요?”

“…꺄악!”

벌컥 문이 열림과 동시에 들려온 목소리에 예나가 화들짝 놀라면서 마우스에서 손을 땠다. 너무나 긴장을 하고 있던 탓에 돌발적으로 난입한 인물에 많이 당황하는 얼굴이었다.

그런 예나의 얼굴을 처음 보는 예나의 여동생, 예슬이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윽고 마음을 진정시킨 예나가 허겁지겁 마우스를 놀려서 파뿌리TV 홈페이지를 껐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

예슬은 또 다른 의미에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높아진 박동수를 진정시키며 의자에서 일어난 예나가 예슬이에게로 다가갔다.

“예슬이는 무슨 일로 올라왔어요?”

“엄마가 잠시 언니 내려오래요! 그거 말하려고 올라왔어요!”

“으응, 알겠어요. 고마워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여동생임에도 불구하고 예의 바르게 존댓말을 하는 예나였다.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눈을 감고 손길을 느끼던 예슬이가 호감 어린 눈빛으로 예나의 뒷모습을 쫓았다. 예나는 대화를 원하는 어머니를 위해 1층 계단을 내려갔다.

“…….”

미소 짓던 예슬이었다. 예나가 내려가자 홀로 2층 방에 남게 된 예슬은 컴퓨터를 돌아보았다. 평소 때라면 급작스레 말을 걸어도 놀라지 않고 신중하게 행동하던 예나였다. 그런 언니가 식겁을 하는 모습은 정말이지 살다 살다 처음 보는 것!

“…….”

자신의 언니가 무엇 때문에 그리 감정선이 오락가락한 건지 내심 궁금해져 진지해졌지만, 일단 방문을 닫고 나오는 예슬이었다.

***

은별은 워드에 접속해서 키보드를 입력하고 있었다. 글자 입력에 집중을 하는 그녀는 대학교 교수님이 내준 과제를 성실히 수행하는 중이었다. 이윽고 집중하던 중 휴대폰으로 문자 하나가 날아왔다. 은별은 그것을 확인하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그만 보내면 안 되는 거야? 변태도 아니고.’

민국에게 쓰던 변태와는 다른 의미의 변태였다. 은별은 대학교에서 인기 톱인 여학생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예의도 발라, 눈치도 있고 사회성도 좋아, 심지어 비쥬얼부터 몸매까지… 가슴을 제외한 그 모든 것이 완벽한 그녀로서 대시를 안 받는다면 거짓이었다.

“으, 진짜….”

수많은 남자들의 치덕거림이야 일상 속에서 늘 겪어왔고, 공교롭다며 거절한 게 다반사였다. 때문에 대학 생활에 사내들의 치덕거림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런 사내들 중에서도 항상 복병을 달고 나타나는 종자가 존재할 따름이었다. 의이잉….

‘말로만 동아리 제안이지 다른 꿍꿍이인 거 모를 줄 알고?’

요즘 들어 틈만 나면 득달같이 달려드는 모자란 선배 한 명 때문에 은별은 스트레스를 받아 미칠 지경이었다. 심지어 도끼병이 어찌나 심하던지… 은별은 아무리 거절을 해도 그것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니 고개를 저으면서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이제는 대놓고 무시하다 못해 도망까지 칠 지경인데… 은별은 차마 같은 학과라서 얼굴을 매일 마주하다 보니 번호를 차단 못하는 게 심히 짜증날 지경이었다.

“서민국에게 확 말해버려? …아니야, 걔는.”

그의 여자 친구를 몇 개월간 해오면서 느낀 게 있다면, 민국은 은근히 사건을 크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었다.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닌데 타고난 재능이랄까? 은별은 괜히 일이 커져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우우우웅….

‘참자… 참아.’

휴대폰의 진동을 아예 꺼버리고는, 은별은 과제에만 몰두했다.

***

“…….”

유이는 오랜만에 방송을 마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방송을 진행한 건 강철남 사건 이후 정말이지 오랜만이었다.

비록 아픔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시간의 약이라는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윽고 2층을 내려온 유이가 텅 빈 부엌에서 물을 따라 마셨다.

사아아아…. 가을의 스산함이 느껴지는 바람 소리가 창밖에서 들려왔다. 유이는 홀짝이던 물컵을 싱크대에 내려놓고 거실로 향했다.

혼자 사용하기에는 너무나도 넓은 거실. 하지만 그녀에겐 그것이 익숙했고, 그 외로움이 편안했다. 강철남 이후로 그녀는 그리 변하고만 것이다.

“…….”

죽어가는 색으로 물들어가는 나뭇잎들이 하릴 없이 바람에 휘둘려 떨어져 내린다. 저택의 창문으로 보이는 주변의 나무들에 유이는 침묵했다. 필시 이 풍경을 보면서 똑같이 외로움을 느끼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

강철남의 연락은 더 이상 오지 않는다. 원망을 했던 건 이제 엊그제 같은 일이었고, 지금은 그가 과연 그때의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반성의 기미를 갖출까 자문만 하게 되었다. 물론 반성을 한다고 해서 그를 용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평생 나을 수 없는 병에 걸리고만 유이였으니까.

‘죽기 전에 가슴이라도 만지고 죽을 테다! 당신의 가슴을 내 손바닥이란 무기에 담아 체온을 만끽하며 죽을 테다!’

“…….”

진지하게 상념 도중, 유이는 급작스레 떠오르는 어느 변태의 얼굴을 떠올렸다. 느리게 고개를 가로젓던 유이는 쉽사리 떨쳐지지 않는 그 강렬한 인상에 결국… 쿠웅!

“…….”

저택 근처를 지나가던 사람이 화들짝 놀랄 정도로 세게 벽면을 걷어찼다. 자칫하면 집이 무너질 뻔했다…. 유이는 호흡을 다지듯 숨을 끌어 모았다가 무겁게 내쉬었다. 벽면에 올렸던 발을 내리면서 잠시 입을 다무는 그녀였다.

“왜….”

무슨 연유에선지, 이젠 강철남이 아닌 그 개구쟁이 같은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워낙 인상이 강한 남자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이 주위에 강철남과 서민국을 제외하곤 남자가 없어서? 그것도 실상은 아닌 것이… 그녀가 정말 만반의 옷차림으로 길거리에 나가면 쳐다보는 남자들도 즐비했다.

비록 극소심한 성격 탓에 남자들과 친근하게 어울리지 못할 뿐, 만들려면 진짜로 만들 수 있었다.

“…….”

유이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

“저기 저기! 내 집에 놀러오지 않을래? 내가 엑쏘 오빠들 팬 싸인된 CD 몇 장이 있거든! 그 중에 한 개 줄 수 있는데! 응? 어때?”

“나는 피부에 꽤 좋은 화장품 있어! 집에 오면 내가 쓰는 법 알려주고 한 번 바르게 해줄게! 응응?”

“그러지 말구 나랑 같이 놀자! 나 아는 오빠들 정말 많단 말이야. 너 무슨 일 생기면 언제든지 도와줄 수 있어.”

여기는 교내의 어느 반. 본래 여자라면 남자들에게 인기가 있어야 하는 게 자명했건만, 여기 여자들에게 극도의 호감과 관심을 받는 여인이 한 명 있었다.

“으아니. 돼, 됐당깨여… 지는 애니 오덕후라서 애니만 있으면 됨….”

“애니? 우와! 무슨 애니 보는데? 나도 같이 보자!”

“여, 연쇄 살인 코난이랑 북한간첩 김정일이라능….”

“와! 이야기만 들어도 되게 재밌겠다. 어디 어디! 나도 추천해주면 안 돼? 추천해줘! 으응?!”

‘미치겠다능!’

평소 남자들에게 호감의 눈길을 받되, 차마 감당할 수 없는 비주얼에 멀찍이 인기만 받던 소녀, 강서라. 그녀는 이제 무수한 여자들에게 휩싸여 동성의 사랑을 시작할 예정은 개뿔. 이건 모두 서민국 때문이었다.

‘온니찡… 이것이 온니찡의 계획이었음? 온니짱은 라이토였음? 파르르르… 코 옆에 점찍고 복수할 거셈!’

예전 서라의 학교에 놀러와 운동장에서 인기를 누렸던 서민국. 그때 민국은 반 진심 반 장난으로 서라의 친척 오빠라고 자신을 소개했었다. 그리고 그 결과… 서라를 늘 질투하면서 적으로 인상 짓던 수많은 여자들이, 언제 그래왔냐는 듯 서라를 하느님처럼 떠받들면서 비굴하게 굴고 있었다.

“서라야, 너 예전에 교내에 왔던 오빠 있잖아. 네 친척 오빠라고 했었지?”

“의… 그 그러신데.”

“나 소개 좀 해주면 안 돼? 그 오빠 정말 잘 생겼더라! 한 번이라도 좋으니 다시 만나보고 싶어!”

“어머어머! 얘! 누가 너같은 애랑 만날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사치부리는 거 아니야? 서라야! 내 언니가 가진 세일러문 피규어들 몇 개 있는데 그거 줄 테니까 민국 오빠 좀 만나게 해줄래?”

“이 기집애! 감히 뇌물 교환으로 서라 오빠를 범하려고 해? 네가 그러고도 인간이야?”

왁자지껄. 도무지 감당 못할 정도로 여학생들의 사투가 반복되자, 서라는 그저 ‘우, 웃음… 허탈한 웃음….’하면서 허탈하게 웃음 지을 따름이었다. 그런데 그 찰나였다. 저벅 저벅.

“저기….”

서라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시끄러운 소란이 그녀의 근처에서 일어나는 가운데, 찾아온 남자는 안경을 쓴 어느 모범생이었다. 서라는 이젠 좀 익숙한 그 사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이 휘둥그레질 수밖에 없었다.

“대답…들을 수 있을까 해서.”

이전에 민국에게 고민 상담으로 털어놓았던 학생. 자신에게 용기 있게 고백을 청해왔던 남학생이었다. 학교에서 회장 자리를 맡다 못해 공부도 전교권이고… 심지어 얼굴도 안경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꽤나 훈훈한 티가 났다.

서라와 마찬가지로 애니를 좋아했으며 오덕후 기질도 다분했고… 여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호감의 대상으로 입소문이 오른 상대.

“나가서 얘기하져!”

소란스러운 장소를 벗어나 복도로 나온 서라와 남학생이었다. 남학생은 정말로 서라를 좋아하는지 눈도 선뜻 마주치지 못했다. 서라가 뒷모습을 보이자 남학생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서 대시했다.

“저기…! 나 정말 너한테 잘해줄 수 있거든? 비록 학생이고 너랑 나이도 같지만…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을 거야!”

“…….”

“그러니까…! 나랑 사귀어주지 않을래?”

텅 빈 복도에서, 용기 있게 소리치는 남학생. 솔직히 욕심이 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지어다. 서라는 결정한 듯 홱 몸을 돌렸다. 남학생은 매우 긴장한 눈빛으로 서라를 쳐다보았다.

“헤헤.”

“…아!”

베시시 미소 짓는 서라의 입술에 남학생은 성사되었다고 생각했는지 잠시나마 좋아했다.

“미안해여.”

“…….”

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서라는 자신의 손가락에 껴져 있는 반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아기에게 선물 받았던 장난감 반지였다.

“그, 그 반지는…?”

남학생은 예전엔 볼 수 없었던 반지가 그녀의 손가락에 껴 있자 의문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서라는 말을 이었다.

“사실 나님에게 그런 식으로 고백을 해온 건 당신이 처음임! 능력도 좋으니 좀 끌리긴 했어여 솔직히!”

“…….”

“하지만 역시 안 될 것 같아여. 미안해욤.”

서라의 사과의 의미가 담긴 거절에 남학생은 절망에 빠진 듯이 고개를 떨구었다. 이윽고 서라가 그런 그를 마주하는 가운데, 남학생이 간신히 고개를 들면서 질문했다.

“혹시… 사귀는 사람이라도 있는 거야?”

“읭?”

“사귀는 사람이 있으니까 거절하는 거 아니야?”

그 말에 서라는 ‘아니라능!’하면서 손사래를 쳤다. 그녀의 강한 부정에 남학생은 의문 어린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냥 내가 싫어서?”

“그런 것도 아니라능! 어음, 쉽게 표현하자면 말이져.”

손사래를 치던 손을 바로 하면서 서라는 미소 지었다. 그러나 그 미소는 슬프지 않았다.

“짝사랑임.”

“…….”

“그쪽처럼여. 그래서 미안해여. 나도 그 맘을 아니까.”

하지만,

“마음이 안 가는 건 어쩔 수 없는 걸여.”

그 미소에 남학생은 얼어붙은 표정만 지을 따름이었다. 미워할 수도 없는 것이, 그녀도 자신과 같은 감정을 누군가에게 느끼고 있다고 했으니 말이었다.

“미안해여.”

미소 짓는 서라였다.

============================ 작품 후기 ============================

이번 편은 예고편인 셈입니다.

이제 두 번째 메인 파트가 얼마 안 남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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