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68화 (168/369)

168화

<행복했기를>

느와르 장르의 영화 속 남주인공은 항상 거대한 조직과 싸우고 피가 흘러나오는 복부를 부여잡으며 벽에 몸을 기댄다. 그리고 어둑어둑한 하늘을 바라보며 사람 한 명 없는 좁은 길에서 서서히 눈을 감는데… 민국은 돌연 그것을 따라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고로 그는 유이에게 이유 불문으로 두들겨 맞은 뒤 처량해진 몰골로 거실 벽면에 기대면서 천장에 달린 전등을 하염없이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느와르 장르 속 비극의 남주처럼 ‘후웃….’하면서 가볍게 미소 짓는 민국이었다.

“죽기 전에 주식 한 번 했어야 하는데….”

주식을 하는데 필수 조건은 한강물이 따뜻한지 먼저 확인해보는 것이었다. 민국은 고개를 떨구면서 눈을 감았다. 이윽고 아기를 품에 안은 서라가 그의 곁으로 다가와서 볼을 톡톡 건드렸다.

“아직 체온이 남아 있넴. 언제 죽으세여?”

“…….”

“체온 떨어지라고 선풍기 틀어드릴게여.”

그리고 거실 구석에 있는 선풍기를 가지고 오는 서라였다. 민국은 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그런 서라를 덮치면서 해드락을 걸었다.

“인석아! 인류 60억 중에 가장 잘 생기고 잘 나가는 남자가 일진에게 맞고 있는데 지켜보고만 있냐!”

“으아아! 머리 찢어진다요! 온니짱 지는 일진이 길거리에만 있어도 고개 숙이고 가는 놈이랑깨요!”

일진이 의미하는 것은 유이였다. 어찌됐든 아기 떨어질라 해드락을 금세 멈추는 민국이었다. 서라가 관자놀이를 손으로 비비면서 아기를 바라보았다.

“읭? 잠들었네?”

“녀석. 줏대 있는 거 보소.”

신명나게 놀았고 배도 채웠겠다, 금세 잠에 드는 아기의 모습이었다. 확실히 아기들은 잠을 많이 자는 성향이 있었다.

많이 자고 건강해야 성장하기 좋았으니까. 서라는 조심조심해서 안방의 침대에 아기를 눕혔다. 평안히 잠에 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서라가 벽면의 시계를 돌아본다.

오후 세 시. 오늘 하루 정처 없이 시간을 보내던 끝에 벌써 저녁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고 내 몸아. 야, 서라야.”

“왜 그러셈?”

“밥 먹을 거냐? 먹을 거면 음식 좀 하게.”

민국의 물음이었다. 이미 소매를 걷고 있는 걸 보면 요리를 자기가 하겠다는 의지가 선명했다. 그것을 빤히 쳐다보던 서라가 베시시 미소 지으면서 물었다.

“원래 여자가 요리하는 거 아님? 내가 특별히 해드리겠음!”

“됐다 인마. 넌 아기 돌보느라 계속 고생했잖아. 난 맞느라 고생했지만.”

그러면서 부엌으로 이동하는 민국이었다. 또라이 기질이 다분한 남자였지만 그만큼 배려심도 깊었다. 필시 그러한 까닭으로 여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다가도 좋은 인상까지 줘 아리송하게 만드는 것이겠지. 서라는 다시금 아기를 내려다보았다.

하염없이 꿈나라에 빠져서 새근새근거리는 아기의 얼굴에 서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아기의 보드라운 뺨을 매만지던 서라가 가볍게 입을 열었다.

“좋은 꿈나라에.”

그리고 어연 여섯 시간이 경과했다. 아기가 잠시 낮잠을 자는 틈을 타 민국과 서라는 가볍게 요기를 채웠다.

식사를 하는 동안 아기가 잠을 자다 보니 최대한 조용히 하는 두 사람이었고, 이후 아기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두 사람은 몹시 피곤했지만 그래도 부모의 도리로서 열심히 놀아주었다. 민국 같은 경우 장난감으로 치고 박고 소리치면서 놀아주었고, 서라의 경우 소꿉놀이를 하거나 갖갖이 리액션을 보여주면서 놀아주었다.

그 결과 아기의 면면에서 행복한 웃음꽃이 사라지는 건 볼 수 없었다. 둘은 그래도 최선을 다한 것이다.

자신의 핏줄에게.

‘세 시간 남았네여.’

서라는 벽면의 시계를 보면서 혼자만 들리게 생각했다. 시계는 어느 덧 오후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서서히 취침할 시각을 알리고 있었다.

보통 때라면 비제이를 하는 두 사람답게 이제 막 신명나게 놀 터였지만, 아기들은 보통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좋은 것이었다. 아기의 건강을 위해서 두 사람도 일찍 자는 게 좋을 테지.

“…….”

보통의 아기였다면 그러했겠지.

“애가 많이 졸린 가보네.”

서라를 대신해서 아기를 품에 안고 있던 민국이었다. 아기들답게 부모 품에 꼭 달라붙어 있는 걸 좋아하다 보니, 조금만 앉아있어도 응애응애 울곤 하였다. 덕분에 서라나 민국이나 지친 기색은 역력하였지만 계속해서 아기를 배려해 교체하면서 일어서 있곤 하였다. 민국도 이제 끝물이 다가오자 슬슬 직감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 재울까?”

“…….”

민국의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 물음에는 단순히 ‘잠을 잔다.’라는 의미만이 서려 있는 게 아니었다. 이별을 고하는 메시지였다.

“온니찡은 어떻게 생각하는데염?”

서라가 애써 태연한 척 미소 지으면서 질문하였다. 민국 역시 짐짓 미소 짓고는 대답했다.

“재우자.”

서라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여.”

부모의 욕심으로서는 좀 더 깨어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애교를 부리거나 앙탈을 피우는 자기 새끼의 모습을 보는 게 정상적인 부모라면 당연지사 행복하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부모의 욕심을 위해 피로의 충족을 원하는 아기를 일방적으로 깨우고 있을 수는 없었다.

두 사람은 노련하진 않았지만 마지막까지 부모로서의 됨됨이는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빠빠….”

“자. 이놈아. 아무대도 안 가니까.”

품속에서 민국의 옷을 붙들고 눈을 감으려다가 마는 아기의 모습을 보면서 민국은 그리 중얼거렸다. 아무대도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계속 곁에 있어줄 생각이었다.

“마마….”

“…….”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서라가 걸터앉아있던 침대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리고는 서 있는 민국의 근처로 나아가 내미는 아기의 작디작은 손을 양손으로 포근히 감싸주었다.

“잘 자여. 내일 뵈여.”

“…….”

비록 급작스런 유이의 출연으로 아수라장스러운 하루가 되긴 했지만, 그래도 둘은 아기에게 많은 추억을 남겨주기 위해 노력했다. 어색하고 노련스럽지 못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갑작스레 부모가 된 거니까. 서라의 달래는 듯한 음성에 아기가 이윽고 눈을 감았다.

“자는군여.”

“그러게.”

서라의 말에 민국은 동조했다. 밤에 깨어나서 응애응애 울기도 하는 게 아기였다. 하지만 무슨 느낌에선지 두 사람은 더 이상 아기가 눈을 뜨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본능적으로 깨우고 싶은 충동이 일어도, 열심히 참아본다.

“자, 우리도 1일 가족답게 한 침대에서 오붓이 자볼까?”

민국의 부드러운 제안이었다. 어차피 어제도 같이 침대에서 잠을 잤었지만, 적어도 오늘만은 그 느낌이 다르리라. 민국을 마주하며 서라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이 되면 이제 서라도 민국의 집에 있는 건 끝이 나리라. 3일간 출장을 가셨던 부모님이 돌아올 테니까.

“아기는 중간에 놓고.”

“온니찡 잠버릇 조심해여. 껴안고 자는 버릇 있잖아여?”

“씁, 그럼 난 아래에서 자야하나.”

보통 때라면 뭐 어떠냐며 성드립을 쳤을 민국이었다. 그래도 아기를 위하는 마음이 있었는지 민국은 순간 침대에 같이 오르는 걸 머뭇거렸다. 먼저 침대에 이불을 쓰고 앉은 서라가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괜찮음. 만일 그런 일 생기면 나님이 깨울게여.”

“그래, 오늘은 너만 믿는다.”

본래라면 드립을 치기도 했겠지만, 솔직히 지친 것도 있었고 이런 분위기에선 왠지 도리가 아니란 느낌이 들었다. 가족스러운 오붓한 분위기 속에서 서라는 침대 중간에 있는 아기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이불을 덮어쓰며 누웠다. 민국 역시 서라의 반대편 되는 곳에 이불을 덮어쓰고 누웠다.

“정신없는 하루였군여.”

“넌 안 피곤하냐?”

아기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두 사람이었다. 불은 이미 끈 상태였기에, 마주하긴 하되 표정이 잘 보이진 않았다. 서라는 씁쓸함을 숨기면서 입을 열었다.

“사실 좀 피곤하지여. 부모 되는 게 쉽지는 않네여.”

“그러게 말이다. 왠지 부모님이 새삼 존경스러워지는 하루구나.”

아기를 낳고 키우고 나서야 부모님의 심정도 이랬을까, 생각하는 게 사람의 자연스런 이치라고 하였다. 민국과 서라는 돌연 떠오른 부모님의 모습을 회상하면서 잠시간 침묵했다. 이윽고 서라가 조금 진지함이 담긴 음성으로 물었다.

“즐거웠을까여? 즐거웠었으면 좋겠네여.”

“즐거웠을 거야. 자는 얼굴 봐라. 얼마나 평화롭냐?”

어두운데도 아기의 얼굴은 잘도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기의 얼굴을 가리키는 민국의 손짓에 서라는 입을 다물었다. 한참 침묵하던 끝에, 서라가 인사했다.

“온니짱 잘자여.”

“그래, 너도 좋은 꿈꿔.”

그리고 두 사람은 눈을 감았다. 축적된 피로로 자꾸 눈이 감기는 것도 있었고, 부모로서 의무적으로 감아야 한다는 느낌도 들었다. 더 이상 시끄러운 대화는 아기의 잠을 방해한단 생각이 들었으니까. 부모로서의 마지막 도리까지는 다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

하지만 20분이 경과하고, 한 시간이 경과해도, 서라는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자꾸만 가슴에 무언가 웅어리가 지는 느낌이었다.

서라는 결국 잠을 헤매던 끝에 눈을 뜨고 말았다. 그러자 이제 좀 익숙해진 칠흑 속에서… 곤히 자고 있는 아기의 모습이 보였다. 슬그머니 시선을 돌려 민국을 쳐다본다.

그는 이미 유이의 구타로 축적된 피로를 풀기 위해 잠의 나라로 빠진 모양이었다.

“…….”

민국의 상태를 확인한 서라의 시선이 다시금 아래로 내려갔다. 새근새근 잠에 들어 있는 아기를 보면서… 서라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아기의 배에 올렸다.

아기는 부모의 따뜻한 체온을 느낀 것 마냥 숨을 더 크게 들이쉬는 모습이었다. 안정적인 혈색을 보이는 아기의 얼굴에 서라는 피로가 누적됐지만 상당히 따뜻한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했어여. 행복했나여?”

“…….”

“그랬으면 좋겠어여. 비록 부모가 뭔지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

“한 가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아여. 그건 바로….”

아기는 대답이 없었다. 그건 지극히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서라는 말을 이어갔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것….”

누구나 가질 부모로서의 마음. 서라는 그것을 처음으로 느꼈다.

“…….”

그리고 서라는 30분을 더 헤맨 끝에서야 잠에 들게 되었다. 가벼운 숨소리를 내면서 잠에 든 그녀의 모습에 민국은 서서히 눈을 떴다.

“…….”

민국은 이미 다 듣고 있었다는 듯, 잠에 든 서라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주는 민국이었다. 간질거리는 감촉에 서라는 ‘우웅….’하면서 잠시 뒤척이다가 한층 깊은 꿈나라에 빠져들었다. 민국은 가볍게 미소 지으면서 아기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즐거웠냐?”

“…….”

“나도 갑작스레 아빠가 된 거라 잘 대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네가 오늘을 즐겁게 받아들였으면 좋겠다.”

민국의 속마음은 심히 듣기 어려운 것이었다.

“즐겁지 않았다고 생각해서 엄마 슬프게 하지 말고, 좋은 꿈꿔.”

볼을 가볍게 당기던 민국이 아기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아기 역시 뒤척이다가 한층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민국은 짓고 있던 웃음을 더 깊게 깔면서 천장이 보이는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 역시도, 이제야 맘 편히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이것이 두 사람이 현재로서 할 수 있는 최고의 행동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이 찾아왔다.

“…….”

아침 일곱 시. 눈을 떴을 때는 없었다.

마치 하루만의 기적처럼,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처럼.

어느 순간 사라져 있는 그 기척에 서라는 일어난 채로 한참동안 멍을 때렸다.

민국 역시 묘한 느낌이 드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나이가 좀 더 있는 만큼 먼저 침대에서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갔나 보네.”

“…….”

서라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자꾸만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자, 그곳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는 서라였다.

‘마마!’

울컥이게 되는 감정. 단순 꿈이었는지, 환상이었는지,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 그 순간순간들. 과연 자신에게 행복했던 추억이라 일컬을 수 있을까?

“…….”

민국은 그런 서라의 감추려도 해도 드러나는 표정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스윽 천천히 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서라는 그 감촉에서야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마주하는 서라를 쳐다보면서 민국은 짙게 미소 짓고는 물었다.

“배고프지? 학교 가기 전에 식사나 하고 가자.”

“…….”

민국은 과연 이 순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서라는 내심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어느 순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래, 부모라는 건….

“알겠다능! 배고프니까 빨리 달라능!”

“그래. 기다리고 있어. 내가 어제와는 차원이 다른 음식을 요리해주지.”

“오오오오! 기대되어서 공복의 알림이 두 배로 올라가네여! 빨리 빨리 해주셈여! 두근두근두근두근!”

두 손을 불끈 쥐고 기대된다는 표정으로 오바하는 서라를 보면서 민국은 피식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천천히 부엌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 그래, 부모라는 건….

“…….”

민국이 안방에서 나가자 홀로 남게 된 서라는 다시금 아기가 있어야 할 침대를 보았다. 아무도 없음에, 씁쓸함과 더불어 마음 한켠이 비는 느낌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쓸데없는 추억이었다면 결코 아니었다.

‘부모라는 건….’

서라는 아기가 있던 침대를 만졌다. 마치 살아있던 것처럼, 체온이 그대로 느껴지고 있었다. 서라는 눈을 감고 그 손바닥으로 체온을 느끼면서 생각했다.

‘아기의 행복을 빌어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거였네여….’

부모란, 자식의 행복만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서라는 울음을 삼키면서 간신히 미소 지었다. 마치 침대에 있어야 할 아기를 마주하듯이, 그녀는 기도하였다.

“행복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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