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어이구야, 장마철이랍시고 억수로 쏟아지는거 봐라. 왜 하필 이런 때 비가 온대?"
폭풍우처럼 내리는 빗줄기를 보면서 민국은 궁시렁거렸다. 바캉스에 가기 전까지 앞으로의 날씨도 모두 확인했던 민국이었다.
그런 철저한 계획 하에 진행한 바캉스 여행이었는데 난데없이 기상호우로 빗줄기가 폭우처럼 쏟아지는 것이었다. 민국은 불꽃놀이를 비가 내리는 모래사장에서 할 수는 없을 테고, 어딘가 마땅한 장소를 마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흠, 작은 소품만 사용해야겠는걸."
원래 밤하늘 높이 불꽃놀이를 띄울 생각이었지만, 방식을 바꿔야겠다. 민국은 서라가 가져온 불꽃놀이 소품 중에서 작은 불꽃놀이에 속하는 소품을 들었다. 그리고 비를 피하되 바다가 그대로 보이는 강당 같은 무대 쪽으로 향했다.
원래 있어야 할 음악 세트들도 모두 다 정리되어 없었고, 비를 피할 수 있는 천막도 위에 있는지라 민국은 이거면 충분하겠다고 생각했다.
"에고, 이게 뭔 고생이라냐."
구부린 채로 소품을 바닥에 진열하고 있자니 허리가 아파왔다. 민국은 허리를 두드리면서 계속 그 소품들을 하트 모양에 맞게 놓고 있었다. 근데 돌연 후두둑 쏟아지는 빗줄기를 우산으로 피하면서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민국아?"
"에고야!"
민국은 급작스레 들려온 소리에 깜짝 놀랐다. 심지어 자신의 이름도 알고 호명하는 것으로 보아 딱 봐도 자신과 관계가 밀접한, 숙박소의 같은 사람인 것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홱하고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민국의 거친 시선을 받은 예나가 순간적으로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이윽고 민국이 예나임을 확인하고는 '헉.'하면서 소리쳤다.
"예, 예나야?"
"거기서… 뭐하는 거야?"
예나의 작지만 분명한 의지가 어린 물음이었다. 민국은 그 물음에 고개를 돌려 다시금 진열해놓은 소품들을 확인하였다. 아직 반쪽짜리 하트만 만들어진 상태였지만, 누가 보아도 그것이 이벤트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이윽고 민국이 그것을 가리려는 듯 예나에게로 완전히 몸을 돌리며 머리를 긁적긁적였다.
"아니 뭐 별 건 아니고 하하…."
"……."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단 말이 있다. 민국이 어물쩡하게 넘어가고 싶어하는 것을 예나 또한 모를 리가 없었다. 그녀도 은별이보단 아니지만 눈치가 상당히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만은 왠지 그래선 안 된단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도 가만히 두 손 놓고 있다간 중요한 무언가를 놓칠 것만 같았다.
"은별 씨한테 해주는 거지? 그거…."
"어? 어… 어 음… 음…."
예나의 직설적인 물음에 민국은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턱에 손을 올리고 한참을 고민하는 듯한 민국의 얼굴은 머지 않아 결심이 선 모양이었다.
"맞아."
"……."
"미안해 예나야."
"왜… 사과를 하고 그래?"
예나가 쥐고 있는 우산 위에서는 비가 빠른 속도로 내리고 있었다. 쏴아아…. 한층 더 거세지는 빗소리에 무대 위의 민국과, 모래사장 위의 예나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민국의 눈망울은 그 어느 때보다 굳건했고, 한 편으론 씁쓸함이 묻어나 있었다. 그 감정을 그대로 읽어버린 예나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민국을 보다가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홱하고 몸을 돌리며 어디론가 향하는 예나의 모습에 민국이 '예나야!'하고 소리쳤다.
"오지마…."
"……."
"따라오지마… 부탁이야…."
'제발.'이라고 덧붙인 후, 예나는 민국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걷기 시작했다. 민국은 그런 예나의 씁쓸한 등모습을 바라보며 움직이려다가 그만 멈추게 되었다.
"……."
이제 슬슬 정리할 때가 오고 있었다. 어차피 즐기는 것도 한 순간일 뿐, 언제고 계속 미련을 갖고 붙잡게 하는 것도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니었다.
은별의 마음의 소리를 들으면서 은별이 지금까지 얼마나 심리적으로 위태로웠는지 알게 된 민국이었고, 또 한 편으로는 예나가 얼마나 자신을 좋아하는지 알았기 때문에 확답을 내려주는 게 그녀의 새로운 시작을 도와주는 것이라 생각한 민국이었다.
"미안해 예나야."
민국은 다시 한 번, 서서히 멀어지는 예나의 모습을 보면서 중얼거릴 뿐이었다. 어쩌면 이로써, 앞으로의 친구 관계도 끝날 지도 모르겠다고 민국은 생각했다.
쏟아지는 빗줄기 아래에서 바람의 세기는 점차 강해지고 있었다. 그 바람을 억지로 뚫듯 모래사장을 걸어가며 예나는 사람이 한 점도 없는 돌무더기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을 천천히 올라가 마침내 자신의 모습이 감춰질 크기의 돌을 발견했을 때 그곳에 몸을 숨겼다.
비가 온 덕분에 벌레들도 모조리 숨었고, 앉기에도 편하겠다 싶어 예나는 그대로 자리에 앉았다. 푹 주저앉듯 다리에 힘이 풀린 채 앉아버린 그녀는 우산도 애매하게 쓴 채로 발목에 빗물이 닿는 걸 느끼면서도 가만히 아래를 쳐다보고 있었다.
"…흐윽."
비가 오는 게 진심으로 다행이라 여기는 예나였다. 그녀는 쏟아지려는 울음을 두 손으로 닦아내면서 다시 바다 쪽으로 고개를 올렸다. 바다는 예나의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울한 색깔을 보이고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오후가 찾아왔다. 오후라고 해봤자 오전 12시를 넘어간 상태였지만, 햇볕은 안 보이고 먹구름이 너무도 낀 탓에 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민국은 무대에 준비된 소품들을 전부 확인해 보았다. 불꽃놀이도 무사히 준비했고, 노래가 담긴 라디오 반주 CD와 라디오 카세트도 구비된 상태였다.
민국은 '흠!'하고 고개를 당차게 끄덕인 다음에 이제 슬슬 은별을 꾀어낼 작정을 하자고 생각했다.
"……."
물론 눈앞의 이벤트를 준비하면서 이따금씩 예나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애써 숨기려고 했지만, 그 얼굴 속에 담겨 있는 슬픔을 민국은 모를 리가 없었다. 민국은 '후우, 그만하자 그만하자고.'하면서 고개를 저은 다음에 은별을 부르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뚜루루루루….
"사랑합니다 호갱님. 어쩐 일로 연락하셨세여?"
물론 민국이 전화를 한 사람은 은별이 아닌 서라였다. 아무래도 은별에게 바로 연락을 걸어서 나오라고 하면 왠지 이벤트성이 짙어 보이기 때문에, 직관력이 강한 은별로서는 바로 바로 눈치챌 수가 있었다. 민국은 때문에 서라의 도움을 받아 일을 해결할 생각이었다.
"오퍼레이션이 준비되었다. 서라야, 이제 마지막 임무다."
"어멋! 저 지금 화장실에서 볼 일 볼 건데여? 바쁘거든여! 다른 애 시키시져!"
"이곳에 애는 너밖에 없단다 로리 아이야."
“삐뽀삐뽀! 아청법 위반! 아청법 단속 재게 준비합니다!”
장난은 이쯤이었다. 서라가 물었다.
“그럼 지금 데리고 나가면 됨?”
“그래 그래.”
“그럼 뭐라고 하고 데려가면 됨?”
“그냥 뭐 잠깐 바다에 들리자니 그런 식으로 얘기해봐. 일단 내 쪽으로만 오게 하면 되니까.”
“오키도키 무대 쪽 맞지영?”
“그래그래 강지영.”
민국의 한심한 멘트에 전화를 바로 끊어버리는 서라였다. 민국은 ‘이 뭐 병’ 소리가 나왔지만 그냥 참았다. 이윽고 전화를 끊은 서라가 화장실에서 휴대폰을 보다가 고개를 올렸다. 거울을 보던 서라는 어느 정도 다짐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은별 언니찡! 잠깐 나와봐염! 우리 바닷가 가염!”
“…지금 폭우 쏟아지는 거 안 보여?”
“이잉! 언니찡은 아직 모르시는 군혀? 내리는 빗속에서 바닷가를 바라보는 여좌! 얼마나 아름답겠어여?”
은별이 가늘게 눈을 떴다.
“솔직히 말해봐. 다른 이유 있지?”
“어. 엄는데여?”
가늘어진 눈으로 추궁하는 은별의 기세에 서라는 졸지에 말을 더듬어버렸다. 그것을 절대 놓치지 않고 캐치한 은별이었다. 하지만 역시 우물쭈물거리는 기세로 보아… 무언가 나쁜 일은 아닌 거 같았다.
“하아, 알았어.”
“왓 정말여?!”
“그래. 근데 나 우산 안 가지고 왔는데.”
“우산은 나님에게 있음여! 받아라 꽃피우는 우산!”
기다렸다는 듯 작은 우산을 펼쳐드는 서라였다. 두 사람이 들어가면 간신히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사이즈가 작았다.
그 작은 사이즈에 은별은 영 못 마땅한지 ‘쩝’하고 입맛을 다셨지만,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이었다. 쏴아아…. 그리하여 두 사람은 비가 내리는 모래사장에 발을 딛게 되었다.
사람은 한 점도 보이지 않았고 바다는 우울함 그 자체였으며, 도대체 이곳에서 무엇을 하자는 건지 은별은 의혹스러웠다. 그때 서라가 어디론가 우산을 가지고 걷기 시작했다.
은별은 졸지에 비를 피하기 위해 그녀를 따라가게 되었다.
“대체 어디가자는 거야?”
“으으음! 왠지 이쪽으로 가라는 신의 계시가!”
“…….”
관자놀이 쪽에 손가락을 얹고 눈을 감는 서라의 모습에 은별은 당면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천막이 쳐져 있는 무대가 하나 보였다. 바캉스를 위해 놀러온 사람들을 위한, 음악의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음악 장비들은 하나도 없고 천막과 웬 잡다한 물건들이 늘어져 있었는데, 마치 무언가를 위해 준비된 듯한….
‘설마.’
너무나도 촉이 좋다는 건 이런 문제를 야기한다. 가끔은 조금 둔해도 될 텐데, 은별은 너무나도 현재 진행형에서 일어날 상황을 쉽게 예견했다.
“짜잔!”
무대 앞에 도착한 서라가 큰 소리를 내면서 무대 쪽을 팔로 가리켰다. 은별은 그냥 할 말을 잃고 막연히 무대만 바라보았다. 천막의 어두컴컴한 그곳에서는 막 누군가가 쭈그려 앉아 있었다. 하지만 큰 키 때문인지 쉽게 얼굴을 가리기는 어려워보였다.
‘서민국….’
대번에 알아차려버린 은별이었다. 허나 그 속내를 하나도 모르는 민국은 마냥 하트로 진열된 불꽃놀이 소품을 피우는데만 집중했다.
‘붙어라 붙어!’
이윽고 타닥타닥 소리와 함께 작은 불꽃놀이의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그것은 하늘로 높이 올라가는 불꽃놀이 소품은 아니었지만, 일직선으로 화악하고 작게나마 올라오는 용도의 아이템이었기 때문에 하트 모양으로 새겨진 모습이 꽤나 장관이었다.
이윽고 완연히 뿜어져 나오는 그 하트 모양의 불꽃 속에서, 중심부에 있던 민국이 일어서서 가만히 눈을 감았다.
“…….”
환해진 천막 내부의 모습에 은별은 마냥 지켜보았다. 이윽고 민국이 ‘흡!’하고 눈을 번쩍 떴다. 그것은 마치 맛있는 걸 먹고 ‘아니 이것은?’하면서 놀라는 사람의 얼굴과도 같았다. 막연히 쳐다보는 은별을 향해 민국은 하트 모양의 중심부에서 두 손으로 하트를 그리려고 했다.
“사랑한다 강은… 으악 뜨거! 뜨거뜨거!”
“…….”
“씨발 존나 뜨거! 사람 살려 으아 뜨거!”
하지만 하트 모양의 불꽃놀이 소품이 뿜어내는 불꽃이 은근히 뜨거웠는지, 손에 튀기는 재에 비명 소리를 내면서 발을 동동 굴러대는 민국이었다. 결국 이를 못 참은 은별이 ‘으으….’하다가 소리쳤다.
“바보야 뭐해! 빨리 안에서 나와!”
“으아아!”
민국이 비명을 지르면서 간신히 하트 모양의 불꽃놀이 안에서 나왔다. 하트 모양으로 강렬하게 뿜어지는 일직선의 불꽃에서 주저앉듯 도망간 민국. 이윽고 무대의 끄트머리에서 가만히 아이템의 불꽃이 꺼지길 기다리던 민국이었다.
쉬이이…. 한 1분쯤 지났을까. 서서히 타오르는 연기와 함께 줄어드는 불꽃을 보며 민국이 끄트머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이거 참’하고는 불꽃놀이 소품이 있는 하트 모양 중심부 쪽으로 향한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은별과 서라.
이윽고 민국이 은별의 시선을 느꼈는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대뜸 양손으로 하트를 그리고 이리 소리치는 것이었다.
“알러뷰다 강은별!”
“…….”
“내 널 위해 노래를 준비했다! 틀어라 강서라!”
“옙!”
은별의 옆에 있던 서라의 외침이었다. 서라는 곧장 우산을 은별에게 준 뒤 천막으로 후다닥 뛰어갔다. 그리고 라디오 카세트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고요한 MR 반주가 흐르기 시작했고, 민국은 노래했다.
“우우우우우~.”
“…….”
“잠에 들지 않아도~.”
휘성의 나잇앤데이라는 노래였다.
“꿈은 꾸고 있는 걸~.”
졸지에 춤까지 추는 민국이었다. 그러나 춤은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지, 영 어색했다. 하지만 노력만은 가상하달까?
“가끔 너의 곁에 있어도~.”
“…….”
“아임고잉 트리폴아월! 너라서 고마워~~~! 볼! 때마다 놀라워어어어~”
1절은 무사히, 2절도 무사히. 그리고 후렴 이전에 있을 고음 하이라이트를 준비하는 민국.
“내 삶의 이윤 바로 너!”
“…….”
“거어어어어(삑)어어어(삑)어어어어어(삑)어어어어어억!(삑)으아아아아아악!”
“…….”
고음 하이라이트를 멋지게 망친 뒤, 후렴부까지 간신히 노래를 끝낸 민국의 소감이었다.
“큭, 나 많이 죽었군.”
은별은 노력은 가상하다고 생각해 박수는 쳐줬다.
============================ 작품 후기 ============================
방심하지마 이 소설의 작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