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쏴아아.
"……."
바다의 특유의 냄새가 코끝을 스쳐 지났다. 아침부터 일렁이는 파도와 더불어 조금씩 풍겨오는 바람은 유이의 긴 머리를 나부끼게 했다. 유이는 가볍게 치장을 하고 밖으로 나와 모자를 고쳐썼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태국에서나 쓰일 법한 밀집모자는 쨍쩅한 햇볕을 가려주는데 큰 용이함이 있었다.
"수상쩍은 짓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알지?"
"아직도 날 그렇게 모르나 강은별. 내가 수상쩍은 짓을 한다면 널 덮치는 것이지 그 외의 수상쩍은 짓은…."
"시끄러! 사람 있잖아!"
붉어진 얼굴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은별과, 그런 은별을 바라보며 웃음 짓다가 머리를 쓰다듬는 민국. 파도가 치는 모래사장에서 둘은 오붓하게 데이트의 시간을 갖고 있었다. 서라와 예나가 올 때까지 단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리라.
"……."
유이는 웃고 있는 민국과 은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고개는 돌아가지 않고 오로지 시선만 돌아가는 그녀는 일말의 행동조차도 아주 조용하고 조곤스러웠다.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강한 바람이 순간 몰아치자 긴 머리가 눈썹 아래를 가려버렸다.
그 머리를 귀쪽으로 올리며 유이는 밀집모자가 떨어지지 않게 나머지 손으로 붙잡았다.
"……."
'왜 항상 나만 이러는 거지? 대체 네가 뭔데!'
'네가 싫어… 망했으면 좋겠어….'
비명처럼 윽박을 지르던 한 남자와, 울음을 터트리며 손을 얼굴로 가리던 여자의 모습이 보인다. 어디까지나 환상에 가까운 잔상이었지만 그것은 실제로 있던 일이었다. 허나 예전과 다소 차이점이 존재한다면 그때는 그런 그들의 변화에 미친 듯이 가슴이 저려왔지만, 지금은 익숙하다는 것이다.
"……."
돌연 자신은 절대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코 다짐하던 강철남의 모습이 떠오른다. 허나 그 역시도 결국엔 변해버리고 말았지.
'누가 있다 한들…….'
유이의 생각의 말미는 거기서 멈췄다. 누가 있다 한들 결국엔 유이를 시기하게 되리라.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불행해졌으니, 비단 고독만을 추구하는 게 유이의 올바른 삶일 지도 모른다. 사람들 딴에선 도망치는 짓이라 손가락질 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적어도 자신만 편하면 될 일 아닐까?
"……."
뚝. 뚝. 그 순간 유이가 있는 양산 앞으로 빗방울이 한 방울 떨어졌다. 유이는 시선을 들어 하늘을 보았다. 푸르고 쨍쩅한 햇볕과 바다, 그 지평선 위로 뭉개뭉개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모래사장 전체에 그늘이 지기 시작했고 유이는 단숨에 비가 올 것임을 추측할 수 있었다.
"엇, 비 내리네."
"하필 이럴 때 비야?"
민국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직 예나가 숙박소에서 나왔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다 아직 나오지 않았음을 확인하자 민국은 대뜸 바다를 바라보면서 두 무릎을 꿇었다.
쏴아아아…. 내리기 시작하는 빗줄기 아래에서 민국은 가슴을 피고 허리를 활처럼 휘면서 두 팔을 벌렸다. 그리고 고개를 위로 쳐들고 이렇게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는 것이었다.
"안 돼애애애애!"
"…안 되긴 뭐가 안 돼! 쇼하지 말고 빨리 일어나!"
"잠깐만요 이 사람아, 영화의 한 장면 좀 따라해봅시다."
카타르시스가 느껴지는 영화의 한 장면을 따라해보고 싶던 민국이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은별이 민국의 목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당겼다. 모래사장의 수많던 사람들도 슬슬 숙박소 안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침부터 느닷없이 쏟아지는 빗줄기라니… 그 화창했던 날씨가 삽시간에 뒤바뀌고 말았다.
"……."
상념을 하던 것도 멈추고, 유이는 양산 너머로 쏟아지는 빗줄기를 보았다. 투둑 투둑. 양산에 부딪히는 빗줄기들이 어울려 내는 소리는 정말이지 고독의 연주를 하는 것 같았다.
"……."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이였다.
* *
"으아 젖었다능!"
"서라 너는 어딜 말없이 갔다 온 거야?"
비를 피해 현관에 당도했을 때 거실에서 옷을 말리고 있는 서라가 보였다. 은별이가 그렇게 한 마디하자 서라가 베실베실 웃는다.
"짐의 업무는 국가 기밀급이라 알려줄 수 엄슴!"
"에휴 그래. …바보야 머리 제대로 말려야지."
"아앗! 수건에 가버렷!"
머리가 젖어 있는 채로 베실베실 웃는 서라가 영 안쓰러웠는지 대신해서 수건으로 머리를 말려주는 은별이었다. 서라는 그런 은별의 손길을 느끼면서 동시에 따뜻한 감정도 느끼게 되었다.
확실히 차갑기만 하면 별로였을 여자지만, 이런 배려 서린 따뜻함도 있기 때문에 민국이 은별을 좋아하는 거겠거니, 서라는 생각했다.
"은별 언니찡은 머리 안 말려여?"
"냔 샤워할거야."
"오옷! …헠헠 가슴 만지고 싶네여. 같이 하져!"
"…싫거든?"
또다시 오르가슴 사건 때처럼 이상한 기분을 느낄까봐 서라의 접촉을 자제하는 은별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마려준 뒤 수건을 내려놓는 은별. 그때 마침 현관으로 민국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비 좀 맞았나 보네."
아침부터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에 혹시나 자신의 신부름을 갔던 서라가 많이 젖었을까 염려했던 민국이었다. 그런 민국의 염려 어린 생각을 읽은 듯 가만히 쳐다보던 서라가 다시금 웃음 지었다.
"은별 언니찡이 있는데 나한테 반하면 아니되영!"
"크읏! 눈앞에 이상향이 있는데 왜 먹질 못하니!"
"둘 다 이상한 소리하지 말고 각자 할 일 하러 가!"
서라의 드립에 맞장구 쳐주던 민국이었다. 은별의 윽박에 민국과 서라는 제 각기 할 일을 하기 위해 각 방으로 들어갔다.
서라는 화장실로 가는 도중, 민국은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도중,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치며 감정을 교환했다. 서라가 오케이 싸인으로 원형으로 손가락을 말아 보여주자 민국은 굳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왜 저러는 거람?"
은별은 그런 둘의 오케이 사인을 확인하였지만 차마 의문을 추궁하기엔 타이밍이 뭐해서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팔짱을 끼고 의심을 표하는 은별을 뒤로하고, 자기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근 민국은 중심부에 놓여진 봉지 하나를 보았다.
'이것이로군.'
민국은 군말없이 그것을 들춰보았다. 그러자 민국이 심부름을 시키기 전 요구했던 사항의 물건들이 그것에 고이 두어 있었다. 하나 하나 꺼내서 확인해보는 민국이었다.
"흐음, 서라가 잘 사오긴 했는데 이거 비가 와서 할 수 있을 런지 모르겠네."
민국은 자기 방의 창문을 보았다. 느닷없이 거세게 쏟아지는 빗줄기는 도무지 지금 상태로는 그칠 기미를 안 보였다. 숙박소로 돌아오는 중에 휴대폰으로 오늘 날씨를 확인해보니, 장마가 시작될 거라는 말이 있었다. 민국은 진심으로 고민했다.
'어떡하냐. 이제 와서 그만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일단 사긴 했으니까 쓰는 게 좋을 것이고, 무엇보다 이벤트를 진행할 수 있는 날도 오늘밖에 없었다. 민국은 굳게 마음을 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 *
끼이익. 막 안방에서 치장을 마치고 거실로 나온 예나였다. 거실에 있던 은별이 팔짱을 끼고 있다가 그녀를 보았다. 예나와 시선을 마주친 은별이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다들 돌아왔어. 비가 와서 말이야."
"네…. 그럴 거 같았어요."
두 사람은 그리 대화를 나눈 뒤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도도하게 소파에 앉아있던 은별은 돌연 어제의 기억이 떠올랐다.
못된 삼인방에게 밀쳐져서 바다에 빠져버렸을 때,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건 다름아닌 예나였다. 그때 은별은 바닷속에 빠져 기절하기 직전 자신을 구하기 위해 뛰어들던 예나의 모습을 보았었다.
그 광경이 얼핏 떠오르자 은별은 입이 근질근질거렸다.
"으으…."
"……? 왜 그러시죠?"
"아, 아니야. 그냥…."
은별이 무언가 말하길 머뭇거리는 모습에 예나는 의문을 가졌다. 허나 고개만 도리도리 거릴 뿐 쉽사리 얘기하지 못하는 은별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나 역시도 맘 속에 또 다른 의문 한 가지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예나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였으며… 은별에게 확실하게 물어봐야 할 일일 지도 몰랐다.
"……."
하지만 예나 역시도 마냥 가만히 서 있을 뿐, 쉽사리 얘기를 내놓을 수는 없었다. 이윽고 한참을 근질거리는 입에 괴로워하던 은별이었다. 그녀가 돌연 부끄러움을 참으며 소리쳤다.
"저기, 있잖아…!"
"네?"
"…아니, 그게. 아… 몰라… 아니!"
잡다로운 감정들을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내던 은별이었다. 그녀가 마주하는 예나의 시선을 피하면서 붉게 물들어진 얼굴로 작게 소리냈다.
"고마워…."
"……."
"…어제 말이야! 내가 물에 빠졌을 때… 구하러 와줬잖아…."
"……."
비록 민국을 가지고 싸우는 게 현재 진행형인 두 사람의 사이라지만, 은별은 그래도 고마움은 표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예나도 그제야 은별이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지 알았는지 머지 않아 작게 미소 짓고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알겠어요."
"……."
비록 대답은 간결하기 그지 없었지만, 그래도 전했으면 됐다고 생각하는 은별이었다.
"민국이는 그럼 어딨어요?"
"잠시 방에 들어갔어. 할 일이 있다나 뭐라나…."
궁시렁거리는 은별에게 고개를 끄덕인 예나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현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잠시 나갔다 올게요. 바람 좀 세고 싶어서."
"…으응."
나가는 예나를 보면서 은별은 한 편으론 미안함을 느끼기도 했다. 사실상 어젯밤 마음의 소리를 통해서 예나와 민국이 얼마나 오래된 사이인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민국도 한 때는 예나에게 어떤 감정을 갖고 있었는지도 알게 되었다.
지금은 그런 게 아예 없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그 사실을 알고 나니 예나가 민국을 좋아하는 까닭도 어느 정도는 납득하게 되었다. 끼이익, 쿵. 이윽고 예나가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 지 5분 뒤였다.
수중에 어떤 봉투를 싸들고 자기 방에서 나오는 민국이 보였다. 은별이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 은별 낭자. 일어나지 말고 잠시 기다리시오."
"뭐하려고 그러는데?"
"내 잠시 밖에 볼 일이 있어서 그러니 여기 있으시오."
"…설마 예나 보러 가는 거야?"
은별의 물음에 민국이 두 눈을 껌뻑껌뻑 거리다가 말했다.
"예나 밖에 나갔어? 이 비 오는 와중에?"
"……."
아무래도 예나랑 대화를 나누려고 나가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은별은 민국의 수중에 들린 봉투를 보았다. 검은 봉투라서 안에 뭐가 있는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봉투는 뭐야?"
"아, 훗. 이 봉투에는 나만의 무기들이 저장되어 있지. 무한의 봉투다."
"말 안해줄 생각이지?"
민국이 웃음을 머금자 은별은 '하아'하고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믿음을 얻기는 어려운 남자다. 마냥 믿음을 줄 수 밖에 없는 남자의 모습에 은별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알겠어. 빨리 돌아올 거지? 비 많이 오니까 위험해."
"오오, 역시 남자친구니까 걱정을 해주는 건가?"
"…당연하지! 그럼 남남인데 걱정해주겠어?"
은별이의 외침에 민국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말로는 항상 저렇게 투덜대지만 속은 어떤지 이제 민국도 알고 있었다. 이내 민국이 봉투를 움켜쥐고 현관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금방 갔다 올게."
"…그래. 다치지마."
그리고 현관을 나가는 민국이었다. 이로써 이 5인실에 단 둘이 남게 된 은별과 서라. 하지만 서라는 화장실에서 콧노래를 부르면서 샤워 중에 있었으니, 은별은 마냥 소파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끼이익.
"읭? 설마 다 나갔으염?"
"…다들 무슨 볼 일이라도 있나 봐."
"헐! 설마 민국 형도 나갔음?"
은별이가 뜸을 들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서라가 반쯤 장난으로 어이없단 표정을 지었다.
"으어어! 어떻게 여자췬구를 놔두고 비맞으러 가버릴 수가 있쪄?! 정말 나르시즘 中이네여!"
"…나르시즘이랑 그게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왜 벗은 채로 내 쪽에 오는데?"
서라가 반쯤 수건으로 알몸을 가린 채 은별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샴푸가 몸에 맨질맨질 남아 있는 걸로 봐서는 아직 씻다 만 상태였다. 서라가 물방울이 묻은 머리카락으로 '흐흣'하고 다가오면서 은밀하게 소리쳤다.
"사실 이렇게 단 둘이 남길 기다렸어여! 제 아길 낳아주세여 은별찡!"
"…꺼져 바보얏!"
5인 숙박소에서 단 둘이 남게 된 서라와 은별은 장난을 칠 따름이었다. 쏴아아…. 비는 끊임없이 쏟아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