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왕의 표본-107화 (107/369)

107화

서라는 민국이 열창하는 모습을 막연히 구경하였다. 비록 춤사위는 엉망이었고 노래는 기타의 연주에 맞춰 부를 때랑은 다르게 삑사리가 난무했지만, 그래도 그 열정에서 느껴지는 감정이 확실히 전달되었다. 그러나 서라는 그 감정이 적어도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님을 짐작했다.

라디오 카세트를 튼 옆에서 맞은편에 있는 은별을 슬쩍 곁눈질하자니, 은별은 비 내리는 모래사장 아래에서 자신이 준 우산을 들고 어이없는 표정으로 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서라는 그냥 가만히 서서 그런 그녀를 쳐다보았다.

“콜록 콜록.”

민국이 헛기침이 아닌 진심 기침을 하면서 목을 달랬다. 우산을 들고 있던 은별이 천막이 있는 무대 쪽으로 올라왔다. 불꽃놀이 소품의 불꽃들은 모두 사라지고 연기도 사라진 상태였다. 그것을 내려다보던 은별이 민국에게 말했다.

“이거 준비하려고 아침부터 그렇게 수상했던 거야?”

“콜록 콜록. 크흠! 어떠냐! 은별아! 이 나의 이벤트가!”

민국은 생각했다. 비록 초라한 이벤트였지만 여자들은 정성에 감동한다고 했다. 민국은 비록 짧은 시간이되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이 이벤트에 투자했다. 자신의 계획대로라면 은별은 무조건 감동을 먹고 울먹울먹거려야만 했다.

“…그래 잘했어.”

“앵?”

하지만 은별은 그냥 그런 표정이었다. 차마 이벤트를 했는데 칭찬 한 번 안 해주면 섭섭해할까봐 억지로 해주는 모습이었다. 민국이 크게 놀라면서 소리쳤다.

“뭐시오 낭자? 왜 표정이 그러하오?”

“…뭐가? 나 진짜로 감동했는데.”

하지만 은별도 진짜로 감동했다. 물론 그 감동의 수치라는 게 존재했고, 수치에서 낮은 편에 속했지만 말이다. 민국이 말했다.

“왜 안 울어? 아~ 설마 우는 거 참는 거냐? 후후, 은별이 네 녀석도 참.”

“뭐래요. 빨리 소품이나 정리해. 도와줄 테니까.”

그리고 나열된 불꽃놀이 소품들을 하나 하나 정리하는 은별이었다. 그런 은별의 너무나도 태연한 모습에 잘난척하기 위해 웃음 짓던 민국은 순간 당황했다. 이윽고 민국이 은별의 곁으로 다가가 다시금 물었다.

“감동먹지 않았어?”

“그래, 감동했어.”

“아니 근데 왜 안 울어? 안 참아도 된다니까?”

“감동했다고 꼭 운다는 보장은 없잖아?”

은별이 가늘게 뜬 눈으로 민국을 쳐다본다. 민국이 ‘이럴 수가.’하면서 말을 이었다.

“감동 먹었으면 울어야지! 감동 안 먹었지?”

“먹었다니까?”

“이럴 수가! 내가 얼마나 정성들여 준비한 이벤트인데! 어떻게 감동을 먹지 않을 수 있니 이 매정한 무감정 여자야!”

“먹었다고 이 멍청아!”

불꽃놀이 작은 소품 하나로 민국의 이마빡을 힘껏 때려버리는 은별이었다. 민국은 ‘으악’하면서 뒤로 넘어갔다. 물론 아프지는 않았다. 워낙 안이 텅 빈 소품이었기에. …그렇게 두 사람이 투닥투닥거리는 모습을 라디오 카세트 옆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서라였다.

“…….”

흐뭇하게 웃음 짓는 것 말고는 그녀가 할 일은 없었다. 애초에 그녀가 민국과 조우했을 때, 그녀의 최고 역할은 그것이었을 지도 몰랐다.

“으어어 내 이마야. 아무튼 야 서라야, 고맙다.”

“읭? 고맙긴 뭘여! 보상으로 초코칩 한 개 더 사주셈!”

“…알았다 인마.”

그리고 은별을 따라 불꽃놀이 소품들을 정리하는 민국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서라 역시 짐짓 밝은 웃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가가 후다닥 돕는 모습이었다.

* *

유이는 거실 베란다에서 푸르른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느리게 고개를 돌리는 유이였다.

“어휴 추워라.”

“…그러게 옷 좀 입고 준비하던가 하지.”

“훗. 널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그 정도 수고는 감당할 수 있다.”

“…….”

“후후, 또 감동 먹었는가 은별이여.”

“그래 먹었다 먹었어. 이 바보야.”

여전히 ‘감동’을 주제로 하여 투닥투닥거리고 있는 은별과 민국이었다. 그 뒤를 이어 서라도 들어오고 있었다. 이윽고 민국이 베란다에 있는 유이를 발견하고는 입을 열었다.

“오오, 유이 씨. 꼭 비련의 여자 주인공처럼 베란다에서 바다를 감상하고 계셨군요.”

“…….”

“후후. 그렇다면 저의 이벤트 역시 어쩔 수 없이 보았겠군요.”

“이벤트…?”

“예! 후후, 그게 말입니다. 제가 오늘 은별이를 울렸지 말입니다. 저기 무대 세트 장에서 노래를 불러서 말이지요.”

“감동했다고 했지 운적은 없거든? 왜 과대포장하세요? 인터넷 기자세요?”

또다시 투닥거리는 모습에 가만히 바라보던 유이가 곧 몸을 돌렸다. 베란다에 서 있는 그녀에게 은근히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내리는 장마는 도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이따금씩 유이 머리 위에 있는 판막이에 빗줄기가 떨어져 퍼짐으로서 그녀의 옷에도 물기가 조금씩 묻어났다.

“어? 근데 예나 언니찡은 어디갔셈?”

“…….”

맨 마지막으로 들어오던 서라였다. 무언가 빈 자리를 느꼈는지 서라가 그리 물었다. 은별과 밝게 웃으며 대화를 하던 민국은 순간 표정이 굳고 말았다. 이벤트를 준비하기 전의 예나와 나누었던 대화가 떠오른 것이다. 민국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서라에게 물었다.

“예나 안 들어왔어?”

“안 들어온 거 같은데염? 화장실에 있으시남!”

화장실 문을 끼이익 열어보는 서라였지만 아무도 없었다. 민국도 설마 싶어 자기 방도 살펴보고 안방도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고, 민국은 불안감에 휩싸여 베란다의 유이를 부르게 되었다.

“유이 씨. 혹시 예나 숙박소에 안 들어왔었나요?”

“…….”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는 유이였다. 민국은 상당히 심각해진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읽은 은별이 일순간 불안감을 느꼈는지 물었다.

“혹시 예나랑 무슨 일 있었어?”

“…….”

은별의 추궁에 민국은 답할 생각도 못했다. 아무래도 밖으로 나가서 예나를 찾아보는 게 급할 것 같았다. 비는 강세였고 바깥에 계속 있다간 무슨 위험한 일이 벌어질 지도 몰랐다. 특히 지금의 예나의 상태라면…. 민국은 은별에게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한 뒤 현관으로 나가려 했다. 끼이익.

“…….”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예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서라는 비에 흠뻑 젖어 자신의 바로 뒤에 당도한 예나의 모습에 ‘부왁!’하면서 소리쳤다.

“예나 누님찡! 몰골이 왜 그래염! 비에 부카게 당한 것처럼!”

“…….”

서라의 장난에도 예나는 웃지 않았다. 예나는 긴 머리와 옷 모두 많이 젖은 상태였다. 똑똑 흐르는 빗방울이 현관의 신발들에도 들어가고 있었다. 민국이 이를 심각하게 쳐다보았다. 예나 역시 고개를 들어 살짝 드러나는 눈동자로 민국을 마주하였다.

“…….”

“…….”

오묘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한참을 이어지던 찰나였다. 예나가 고개를 다시금 내려 눈을 피하더니, 짐짓 ‘핫’하고 웃음 지으면서 말을 잇는 것이었다.

“미안… 도중에 우산이 고장나서….”

사실 들고 있는 우산은 고장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렇게 핑계라도 대는 게 나았다. 은별과 서라가 놀라서 바라보는 가운데, 예나는 ‘들어갈게’라면서 화장실로 향했다.

끼이익. 쿵. 화장실 문이 닫힌 뒤 샤워기 소리가 들려왔고, 은별은 민국을 돌아보았다. 민국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화장실 쪽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

그리고 이 상황을 베란다에서 구경하던 유이는 고개를 돌려 바닷가 쪽을 보았다. 쏴아아아…. 내리는 장마는 끊임이 없었고, 유이는 몇 개월 전의 회상이 떠오르는 자신을 느꼈다.

‘이벤트…….’

‘유이 씨. 여기 꽃이에요.’

강철남과 데이트를 몇 번 진행해왔던 때였을까. 유이는 그와 만나자마자 급작스레 꽃다발을 받게 되었다. 유이는 멍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꽃다발을 내려다보았다.

‘기분 좋으셨으면 좋겠네요.’

‘…….’

그때의 강철남이 다시금 떠오르자 유이는 가슴이 저릿한 걸 느꼈다. 대체, 자신과 그 사이에 무슨 갈등이 있어 이런 결말이 난 것인가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그런 걸 생각하는 것도 참 부질없는 짓이겠지. 유이는 막연히 바다를 바라볼 뿐이었다.

* *

밤이 찾아왔다. 한 시간 뒤에서야 화장실에서 나왔던 예나는 안방에 들어가 이부자리를 펴고 누웠고, 얼굴을 숨기기 위해 등만 보였다.

서라는 왠지 기운이 없는 예나에게 다가가 격려의 한 마디라도 하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너무 안 좋아 보여 그냥 건들지 않기로 했다. 유이는 거실에서 이어폰을 끼고 노래를 듣고 있었으며, 민국과 은별은 여전히 투닥거리고 있었다.

“설마 우리의 사랑이 벌써 식은 거니? 어쩜 사랑이 변하니!”

“아씨! 감동했다고 했잖아? 아까부터 왜 자꾸 징징거려? 사랑을 교과서로 배우셨나.”

민국의 방에서 투덜투덜거리는 두 사람의 모습에 서라는 마냥 웃음만 지었다. 마치 영화를 감상하듯 쳐다보며 초코칩을 하나씩 짚어먹는 서라였다.

“냠.”

“야 서라야! 넌 말이 된다고 생각하냐? 멋지게 열창까지 했는데 어떻게 울지 않는 거지?”

“어멍! 전 달려 있어서 몰라효!”

“…너 여자거든? 그리고 열창은 무슨 얼어 죽을 열창이야! 흐느적흐느적거리는 오징어 춤에 삑싸리까지 내놓고!”

“와아! 이 여편네야! 가! 가버려! 너를 만난 뒤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분노의 영수증 던지기를 시전하는 민국이었다. 물론 그 영수증은 은별의 곁에 날아가다가 도중에 하락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민국의 말에 상당히 열이 받았는지 가늘게 뜬 눈으로 은별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며 말했다.

“진짜 간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자비를 주십시오.”

곧바로 엎드려서 사과를 하는 민국의 모습에 은별은 ‘흥’하면서 다시금 자리에 앉았다. 이래나 저래나 재미있는 커플이었다.

“으음! 전 두 사람을 방해하면 안 되니 2만!”

“…야! 어디 가? 설마 이 변태랑 나만 같이 놔두고 가려고?”

“서라 네 녀석. 역시 뭘 좀 아는구나.

”“시끄러워 넌…!”

“형! 2세의 소식을 기다리겠수다!”

엄지손가락을 번쩍 치켜들며 소리친 서라였다. 은별은 붉어진 얼굴로 ‘2세는 무슨 얼어죽을!’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그런 은별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놓지 않는 민국이었다.

‘놔! 놓으라고!’라며 소리치는 은별을 뒤로하고 서라는 웃음 지으면서 방을 나왔다. 민국의 방에서 나온 서라는 들려오는 너머의 소리에 저도 모르게 한숨이 쏟아지려는 입을 참았다. 그리고 그때, 거실의 유이의 시선을 느낀 서라가 고개를 들었다.

“헛! 말랑말랑찡!”

“…….”

“나님 잠깐만 밖에 나갔다 올 게염! 비도 그쳤겠다 바람 세고 싶어염! 말랑말랑찡!”

그리고 손을 흔들고는 후다닥 밖으로 나가는 서라였다. 노래를 듣고 있던 유이는 서라가 나가고 나서야 이어폰을 뺐다.

“…….”

무슨 소린지 듣지도 못했다.

*

띠링~. 기타 소리가 심금을 울리는 밤이었다. 어제의 캠프파이어는 마치 없던 것처럼, 원판나무 의자들이 모여 있는 그 장소에는 오로지 한 남자만이 기타를 연주하고 있었다.

어제 민국의 노래에 맞춰 반주를 해주었던 청년이었다. 숙박소를 나왔던 서라는 그쪽으로 걸어갔다.

이내 그녀를 발견한 남자가 ‘오’하면서 말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셈여~.”

“하하, 어제 봤던 그 귀여운 분이시군요. 오늘은 아무 일도 없는데 어쩐 일로 오셨나요?”

지금 시각은 밤 12시를 넘어가는 시각. 운이 좋은지 비는 잠깐 멈춰 있었고, 밤하늘은 칠흑과 동시에 새하얀 별들로 가득했다. 떠오른 만월은 커다랗기 그지없었다. 이윽고 서라가 젖은 원판 나무에 대놓고 앉으면서 씨익 미소 지었다.

“노래 하나만 불러도 될까염?”

“노래요? 무슨 노래요?”

서라는 다시금 활짝 미소 짓더니 부를 노래를 읊어주었다. 그 노래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더니 물었다.

“부르실 수 있으세요? 많이 어려울 텐데.”

“헤헤! 포켓몬스터도 부르는데 못 부를 건 없져!”

그런 위트 있는 대사에 남자가 흐뭇하게 웃음 지었다. 이윽고 남자가 ‘그럼 갑니다?’하면서 마지막으로 서라에게 물었다.

서라가 고개를 주억거렸고, 남자의 기타 연주가 서서히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서라는 당차게 고개를 들어 얌전히 하늘을 바라보았다.

오늘의 하늘은 넓고 아름다웠다. 그리고 지속된 반주 속에서, 마침내 그녀의 노랫말이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어제는 하루 종일 비가 내렸어.”

김광석의 사랑했지만이었다.

“자~욱하게 내려앉은 먼지 사이로.”

{귓가에 은은하게 울려 퍼지는.

그대 음성 빗속으로 사라져 버려}남자는 어제와는 달리 사뭇 진지해진 서라의 목소리에 눈을 감고 연주를 반복했다.

그녀의 고운 음성은 수려했다.

{때론 눈물도 흐르겠지 그리움으로…}{때론 가슴도 저리겠지 외로움으로~~]

서라는 눈을 감았다. 다소곳이 모은 두 무릎에는 그녀의 얇은 두 손이 모여져 있었다.

“사랑했지만.”

조용히 섬세하게 울려 퍼지는 그녀의 음성은 이 하늘과 어울렸다.

{그대를 사랑했지만.

그저 이렇게 멀리서 바라볼 뿐 다가설 수 없어}노래 한 소절이 끝난 뒤였다. 몸을 좌우로 움직이며 박자에 맞게 노래를 부르던 서라는 곧 눈을 감고 이쯤이면 됐다고 말하였다. 이윽고 기타 반주를 간드러지게 마친 남자가 놀란 듯 얘기했다.

“정말 좋네요. 소녀 감성이 풍부하게 느껴졌어요.”

“헤헤, 그런가여?”

“예. 마치 진짜 사랑했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느낌이네요.”

남자의 소감에 서라는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베시시 웃음 지을 따름이었다.

밤의 연주는 이렇게 끝이 났고, 여행을 끝낼 시간이 다가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