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크….”
하지만 반대로 민국은 아쉬워하고 있었다. 생에 들을까 말까한 사람의 속마음이었다. 그것도 매사에 튕기기 일쑤인 은별이의 진심 어린 목소리를 듣게 되니 내심 기분 좋은 것도 있었다. 허나 그 목소리를 고작 하루만 듣고 못 듣게 되다니, 민국은 묘한 안타까움을 느꼈다.
“…….”
물론 은별은 그런 민국을 진심으로 한심하게 쳐다볼 따름이었다. 이윽고 소음에 뒤척이던 예나가 서서히 상체를 일으켰다. 잠옷을 입고 있던 예나는 눈을 비비적거렸다. 이를 본 민국이 입을 열었다.
“일어났어 예나야?”
“아… 민국이…? 아! 응…!”
눈을 비비던 예나가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음성의 주인이 민국임을 알게 되자 크게 놀라면서 부리나케 얼굴을 피하는 모습이었다. 소꿉친구 시절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성적 호감을 느낀 민국에게 잠잔 뒤 모습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사실상 민국과 함께 여행을 온 것도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예나는 하필이면 이런 얼굴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상당한 창피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런 예나의 심리를 한 눈에 훑었던 은별은 다소 눈을 가늘게 뜰 뿐이었다.
“발기찬 아침의 시작이네여 형. 오늘은 뭐할 거임?”
“어제는 바다에서 공놀이 했으니까 이번에는 누워서 햇볕이나 쬐볼까?”
“우왕! 혹시 형은 쥐포가 되는 게 꿈이세여? 아님 말라비틀어진 오징어?”
“흠. 오징어는 서라 네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니냐?”
“헐! 형님 정말 야하시네여! 마치 제 냄새를 맡아본 것처럼 그럼!”
그러면서 서라는 은근슬쩍 자신의 중요한 부위를 두 손으로 가리는 모습이었다. 다행이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제정신이 아닌 예나는 그 드립을 듣지 못했다. 이윽고 민국이 그런 예나의 눈치를 보다가 서라를 작게 불렀다.
“서라야.”
“읭?”
“잠깐만 나와봐.”
작게 손짓하는 민국은 수상쩍일 따름이었다. 가만히 앉아 있던 은별 역시 민국을 빤히 쳐다볼 따름이었다. 서라가 ‘마사카!’하면서 자기 몸을 두 팔로 감쌌다.
“설마 동인지에서 나오는 네토라레 하시게여? 이번에 주연은 은별 언니가 아니라 민국찡이랑 저인가여?!”
“…….”
들려오는 소음에 편히 잠을 잤던 유이도 스르르 눈을 뜨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유이도 이부자리에서 상체를 일으켰고, 그것을 목격한 서라가 소리쳤다.
“슴가찡!”
“…….”
민국 역시 입을 열었다.
“깨셨나요 유이 씨?”
물론 예나가 있기 때문에 이미지 메이킹을 놓지 않는 민국이었다. 유이는 그런 민국의 물음에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꾸벅 끄덕였다.
그녀 역시 졸음 앞에서는 무표정이던 얼굴도 조금은 무방비해지는 듯했다. 허나 그건 그것의 문제고… 은별이 다시금 고개를 돌려 민국을 바라보았따. 방금 전의 화제에 관해 추궁하기 시작하는 그녀였다.
“서라랑 단 둘이 무슨 얘기하려는 건데?”
“별 거 아니야. 그냥 단 둘이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래.”
“…….”
숨기는 모습이 영 좋지 않다. 이럴 때는 그토록 답답하고 짜증났던 마음의 소리가 그리워졌다.
역시 사람이란 건 실로 이중적인 동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계속해서 서라에게 손짓하는 민국의 모습에 은별이 한숨을 쉬었다.
서라는 아직 민국을 따라가지 않고, 민국과 은별을 번갈아 쳐다보며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이내 은별이가 담담해진 음성으로 말했다.
“가봐.”
“읭? 네토라레 해도 되어?”
“…하면 때릴 거야.”
하지만 은별은 여전히 서라와 일대일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는 민국의 제안에 동의하는 모습이었다. 그것은 은별 자신에게 꽤나 큰 변화였다.
늘 변태스럽고 여자에 환장하던 민국을 마냥 내버려두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것도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은별이라면 한층 더 마찬가지였다.
허나 그녀가 이렇게 민국을 믿고 서라와의 대화를 허락해줄 수 있는 건… 역시 어젯밤의 일 때문이겠지.
“그, 그럼 갑니담여?”
그리고 ‘이쿠욧’하면서 민국에게로 다가가는 서라였다. 이윽고 민국이 그런 서라와 함께 안방문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은별은 아무 일도 없겠거니 생각하면서 자신의 떠오르는 의심에게 가만 있으라고 일갈했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어차피 대화만 나누러 가는 거고. 난 서민국의 진심을 보았으니까!’
“사실 너를 나무 위의 사과처럼 따먹기 위해 불렀다.”
“히, 히익! 60억분의 1에 가까운 로또 확률로 예상 적중!”
“…….”
안방을 나가면서 소곤소곤거리던 두 사람의 대화가 조금 심기에 거슬렸지만 은별은 그냥 참기로 했다. 이내 안방 문이 닫히고 예나가 ‘민국이 나갔어요?’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은별은 ‘하아….’하고 한숨만 쉴 뿐이었다.
* *
“왜 아침 대낮부터 저만 이 외롭고 텅빈 고독의 거실로 초대한 거시져? 설마 레알로 네토라레?”
“크으, 남자들의 꿈 하렘왕을 내 몸소 실천할 수 있다면 실로 좋으련만.”
“우왕 세상에 이런 자상한 병신을 다 봤낭.”
작살인 멘트가 오간 뒤였다. 민국은 ‘흠흠’하면서 헛기침을 선보였다. 항상 진지한 얘기로 돌입하거나 무언가를 부탁할 때 취하는 제스쳐였다. 이윽고 민국이 ‘서라야.’하면서 그녀를 부르려는 찰나였다. 서라가 ‘타임!’하면서 엑스자를 그렸다.
“온니쨩! 정말 너무하네여! 어떻게 은별 언니찡을 두고 절 좋아하려고 할 수가 있져? 우리나라는 아랍이 아님여!”
“자식아. 내가 널 좋아하는 건 너도 진즉에 알고 있던 사실이면서 뭐 새삼스레 얘기를 해.”
“어, 어머낭!”
입가에 양손을 갖다 대면서 두 차례 뒤로 물러나는 서라였다.
“나 난데요 고레….”
“자, 이제 제대로 이야기를 해보자.”
민국이 언급한 ‘좋아함’이란 건 어디까지나 서라를 좋은 동생으로서 보는 ‘좋아함’이었지만, 서라는 방금 전 그 돌발적인 대사에서 ‘좋아함’을 순간적으로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부끄러움을 탔다. 물론 이 사실을 민국은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다른 문제를 중요한 안건으로 두고 있었기에.
“뭔데 그러삼?”
“내가 오늘 이벤트를 할 거거든. 그러니까 나 좀 도와라.”
“읭? 이벤트?”
서라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그래. 이벤트. 은별이를 위한 이벤트를 할 생각이거든.”
“…….”
“고로 네가 좀 도와라. 예나나 유이 씨에게는 얘기하지 말고.”
유이야 어차피 그런 번거로운 일에 참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타입 같았기에 민국은 제안하지 않았다. 다만 비제이로서도 친하고 실제로도 친한 편에 속하는 죽마고우 같은 여동생, 서라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외 예나는… 역시 예나 같은 경우는 민국도 속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제안을 하는 게 가혹한 짓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그런 가혹한 짓을 할 정도로 민국은 냉랭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말이지, 이번 한 번만은 확실한 게 좋을 테니까.’
어젯밤 마음의 소리를 통해서 민국도 확실히 깨닫게 되었다. 은별의 마음을. 그리고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리 흔들리고 있었는지를. 민국의 주변에 늘 여자가 넘쳐났고, 민국의 우유부단한 듯하면서도 카사노바 같은 행동에서 항상 의구심을 가져왔던 것이다.
여자 친구였던 은별로서는 상당한 양의 스트레스를 느꼈으리라.
“이, 이벤트라닝….”
그리고 민국의 제안을 듣게 된 서라는 잠시 머뭇거리는 모습이었다. 장난스레 머뭇거렸던 적은 있지만, 진지하게 머뭇거리는 모습은 처음이었기에 민국은 조금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서라야?”
“아, 아니라능! 아노된다능?”
“어? 안 된다는 거냐?”
민국의 물음이었다. 서라가 자신은 참여하지 못하겠다고 해서 안 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보통 재미난 일이 있으면 늘 참여해왔던 강서라. 그녀가 느닷없이 거절을 해오는 건 처음이었기에 민국도 조금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그, 그게 아니라! 참여는 하겠지만 또 할까 말까 망설여지는… 오덕후라능!”
“너에게 오덕끼가 있던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 어쨌든 도와준다는 건 맞아?”
서라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다능….”
왠지 모르게 쉽지 않은 제안이었다. 이윽고 민국이 말했다.
“얌마, 내가 단순히 공짜로 도와달라 할 놈은 아닌 거 알잖아. 도와주는 보상으로 초코칩 두 개 사주마. 어떠냐?”
“읭… 나님을 고작 초코칩 두 개에 굴복시키려고 하냐능! 세 개를 주심져!”
세 손가락을 펼치는 서라였고, 민국은 ‘크윽….’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어쩔 수 없지. 중요한 일이니까.”
“…….”
“그럼 필요로 하는 것들 내가 적어줄 테니 근처 마켓에 가서 사와줘라.”
“예쓰 마네카칫솔!”
군대에서 경례를 하듯 손을 이마 근처에 올리는 서라였다. 민국은 피식 웃고는 서라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안방으로 다시금 향하는 민국의 뒷모습을 보며 서라는 가만히 서 있었다.
똑똑똑. 노크를 하자 은별의 ‘들어와.’소리가 들려왔다. 민국이 문을 열자 막 머리띠를 하고 어설프게나마 깨끗하게 치장한 예나가 보였다.
민국이 그런 예나에게 흐뭇하게 미소 지은 뒤 은별을 돌아보았다. 민국을 신뢰하는 마음은 생겼지만 그래도 역시나 의구심이 생겼던 은별이 물었다.
“무슨 얘기한 거야?”
그 말에 민국은 치장 중인 예나와, 아직 잠에서 덜 깬 유이를 흘긋 곁눈질했다. 그 뒤 은별을 보면서 입술로만 이렇게 얘기했다.
‘비밀.’
“…….”
은별은 그런 민국이 마냥 수상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민국은 반대로 마음 속 깊은 곳부터 이벤트 직후를 상상하고 있었다. 불꽃놀이가 파앙! 해변가에서 하트 모양으로 터지는 불꽃놀이 이벤트에 은별이가 고개를 높이 올려 하늘을 바라보고… 펑펑 터지는 그 불꽃놀이 아래에서 민국이 ‘사랑한다 강은별!’을 소리친다면?!
‘흑… 흐윽 바보야! 누가 이런 이벤트를 하라고 했어! 그런다고 기뻐나 할 거 같아?’
‘후후, 왜 울고 그러는 것이오 달링?’
‘몰라 바보야 으흑흑!’
‘후후훗. 야레야레… 얼굴이 더러워졌구만.’
야레야레 : 이런이런
‘푸헤헤헤헤헤헤!’
이벤트에 감동 받아 울음을 터트릴 은별의 모습을 상상하자니 민국은 마냥 좋아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런 미소를 억지로 참아내는 민국의 모습에 은별은 점점 더 의구심을 가질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서라는 민국에게 돈을 받아 근처 마트로 향하게 되었다. 워낙 바캉스가 많은 주요 지역이었기 때문에 대형 마트가 하나쯤은 있었고, 그곳에는 불꽃놀이에 필요한 소품을 비롯하여 갖갖이 놀이 소품들도 있었다.
서라는 일단 민국이 사오라고 했던 불꽃놀이 소품들을 대거 구매했다. 무게가 그리 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이 외 필요한 것들 나머지는 민국이 알아서 한다고 했으니, 서라는 얘기하는 것 몇 개만 도와주면 끝날 것이었다. 이윽고 직원에게서 물건의 거스름돈을 받고, 불꽃놀이 소품이 들어 있는 봉지를 손목에 매고 초코칩 세 개를 두 손에 드는 서라였다.
…그리고 저벅저벅, 차가 거의 오가지 않는 일자 도로면을 걸어갈 따름이었다. 쨍쨍한 햇살은 기분 좋은 아침임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서라는 솔직히 아니었다.
“…….”
‘그래! 보상으로 까짓것 초코칩 세 개다!’
서라의 초코칩 세 개 요구에 잠시 망설이다가 소리치던 민국의 모습. 서라는 그 모습이 자꾸만 눈 속에 어른거리자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고 한참을 바닥만 내려다보며 걸어갈 따름이었다. 그러다 햇볕이 뜨거웠는지 아님 다른 이유에서인지 들고 있는 초코칩들로 눈을 가린 다음에 누가 들으랴 작게 소리내는 서라였다. 돌이켜보면….
“이런 건 필요치 않은데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