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26화 (26/45)

26. 함정

날이 새자 오다 기미는 즉시 행동에 착수했다.

조용히 아파트를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리지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겉모습하고는 아주 달라...... 보통 아가씨가

아니야......저렇게 침착할 수가 없어......"

아파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마침 빈 택시가 굴러와 멎었다.

기미는 택시를 타고 부산역으로 향했다.

길가의 가로수 가지들이 비바람에 활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길가에는 간판이며 유리조각 같은 것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녀는 짙은 녹색의 점퍼를 위에 걸치고 있었고 밑에는

베이지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무릎 위에는 조그만 여행가방을

얌전히 올려놓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도무지 큰 일을

앞에 둔 테러리스트 같지가 않았다. 약간 슬픈 듯이 보이는

얼굴은 몹시 창백했지만 남들과 비교될 수 있는 특이한

점이라고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사쓰마 겐지의 아이를 배고 있었다. 임신 4개월이었다.

그와의 첫 관계에서 아이를 밴 것이었다. 그때 그들은 서울에서

만났었다. 그녀가 임신한 것을 사쓰마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그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임신이

러트에게 발각된 것은 전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의 요구에 절대 복종해. 그는 용감한 전사니까 그에게

봉사하는 것을 영광으로 알아야 해. 서울 가거든 그를 정성껏

섬기라구. 난 개의치 않을 테니까 정성을 다해 그를 섬겨요.

그의 요구를 거절해서는 안 돼."

하세카와는 그녀를 서울로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었다. 그녀는

애인의 말에 따랐다. 그래서 사쓰마가 그녀의 몸을 요구했을 때

그녀는 스스럼없이 자신을 바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가

임신 4개월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그 사실을 애인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뱃속의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 같은 것은 아직 구체적으로 해본 적도 없었다. 단지 아기를

하나 낳고 싶다는 욕구만이 막연히 가슴 한쪽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기를 낳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그녀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 애인보다도 사쓰마를 더 사랑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만난 남자들 가운데서 가장 강렬한 것을 지니고 있는

남자였고, 죽도록 사랑해보고 싶은 테러리스트였던 것이다.

그러나 상대방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는 사랑이라는 것을

혐오한다고 했고, 그리고 혁명가에게 있어서 사랑은

금기사항이라고도 말했었다. 그런 그에게 당신의 아이를

가졌다고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그녀로 말하면 혁명보다도

사랑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녀는 철두철미한

테러리스트라고 할 수 없었고, 그보다도 테러리스트의

동반자라는 표현이 옳았다.

부산역에 도착한 그녀는 8시에 출발하는 서울행 새마을 열차에

올랐다. 이른 아침인데다 태풍 때문에 열차는 텅 비다시피

출발했다.

열차는 예정보다 10분 늦은 12시 20분에 서울역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역광장에는 무섭도록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우산으로

비바람을 막는다는 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녀는 역광장을

가로질러 지하도 쪽으로 뛰어갔다. 그동안 한국에 수 차례 와서

지리를 익혀두었기 때문에 그녀는 서울 아가씨들처럼 능숙하게

지하철을 이용할 줄을 알고 있었다.

지하철을 타기 전에 그녀는 제2의 은신처로 먼저 전화를 걸어

자신의 도착을 알렸다.

"해바라기 10호,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려드립니다."

"예정대로 이행하시오."

그것은 2호 하인리히 분케의 무뚝뚝한 목소리였다.

을지로 입구에서 지하철을 내린 그녀는 최고급 호텔인 K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이윽고 그녀는 숙박카드에 자신의 이름과 인적사항을 기재한

다음 숙박료를 지불하고 열쇠를 받아들었다.

방 번호는 1918호였다.

잠시후 그녀는 19층 1918호실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을 젖히고

한동안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전화통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해바라기 10호, K호텔 1918호실에 투숙했습니다."

"수고했어요. 계속하시오."

상대는 K호텔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나서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짐을 그곳에 놓아두고 밖으로 나왔다. 자정까지는

아직도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움직였다.

호텔 앞에서 콜택시를 탄 그녀가 3류 호텔로 안내해 달라고

하자 운전사는 그녀를 강남 쪽에다 데려다놓았다. 택시에서 내린

그녀는 B호텔 안으로 들어가 체크인했다. 잠시 후 그녀는

은신처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해바라기 10호, B호텔 505호실에 투숙했습니다."

그녀는 B호텔의 전화번호를 불러주었다.

"됐어요. 이제부터 기다려야 해요. 두 시간마다 호텔을

바꿔요. 그리고 매시 정각에 이쪽으로 전화하는 것을 잊지

말아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는 사쓰마의 목소를 듣고 싶었지만 전화를 바꿔달라고

하지는 않았다.

전화를 끊고난 그녀는 옷을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몸은 너무 말라 있었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깡마른 몸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다가 오른손으로 하복부를

가만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배는 아직 눈에 띌 정도로 부르지는

않았다. 아들일까? 딸일까? 사쓰마를 닮은 아들이라면 좋겠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한국 경찰에 체포되어 고통을 받게 되면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려줄까? 임신 사실을 알려주면 육체적인

고통은 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아이한테는 위험이 가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자백할 기회를 잃게 된다.

고통을 받아볼까? 그녀는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K호텔의 프런트 데스크에는 여러 명의 남녀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침나절과 12시를 전후한 시간에 프런트

데스크에는 제일 많이 사람들이 몰린다.

3시 경에야 프런트 데스크는 좀 한산해졌다.

여직원은 문득 생각이 미쳐 데스크 안쪽에 붙어 있는

지명수배자 명단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경찰이 나누어준

것이었다. 그 명단 속에 있는 자가 투숙하면 경찰에 즉각 연락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바쁘게 움직이다보면 으례 그것을

잊어먹기 일쑤였다.

지명수배자 명단은 두 종류로 나누어져 있었다. 한쪽은 내국인

명단이었고 다른 한쪽은 외국인 명단이었다. 내국인

지명수배자는 수십 명이나 되었고, 외국인 지명수배자는

15명이었다. 그중에는 1년이 지난 이름도 들어 있었다.

12시부터 3시 사이에 투숙한 사람들 가운데 내국인은

18명이었고 외국인은 29명이었다.

새로운 투숙객이 있을 때마다 즉시 지명수배자 명단과 대조해

보도록 지시를 받았지만 프런트 데스크 직원들은 그 지시를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었다. 그런 지시는 1년 3백65일 내내

계속되고 있었고, 그래서 형식적으로 처리하는 버릇이 있었던

것이다.

여느 때 같았으면 지명수배자 명단을 들여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며칠 전부터 경찰이 뻔질나게 드나들고 있었고

전화도 자주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은 새로 추가된 외국인

지명수배자들에 대한 문의였다. 수사관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번 경우는 시각을 다투는 일인 것 같았다.

그러니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명수배자 명단은 눈여겨보지 않아도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다.

수없이 들여다보았기 때문에 이름들을 일일이 외고 있을 정도는

아니라해도 그것들은 대충 머리 속에 그려져 있었다.

외국인 투숙객들의 숙박카드를 들여다보던 여직원의 눈이

갑자기 한 곳에 머물렀다. 그것은 일본인 투숙객의 카드였는데

이름란에는 '多田紀美'라고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의 영어

이름란에는 'Oda Kimi'라고 씌어 있었다. 그 이름을 본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수배자 명단을 들여다보았다. 그 이름이

보였다. 그것은 맨 끝에 들어 있었다. 여자였다.

"오다 기미......"

그녀의 가슴은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프런트

데스크 책임자를 불렀고, 그는 즉시 경찰로 전화를 걸었다.

수사본부에서는 오병호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혼자 투숙했나요?"

"네, 혼자 투숙했습니다."

"지금 방에 있습니까?"

"부재중입니다."

"몇 시에 투숙했습니까?"

"12시 50분경에 투숙했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가 갈 때까지 그 방을 찾아

간다거나 전화를 한다거나 하는 짓은 삼가주십시오.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게 가만히 내버려 두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병호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오다 기미가 나타났다!"

그의 목소리는 아주 맑았다. 수사관들이 일제히 그를

쳐다보았다.

"일본팀을 불러."

형사 한 명이 구내 전화로 일본 수사관들이 묵고 있는 방을

불렀다. 조금 있자 마스오 부장과 그의 부하 한 명이 수사본부로

달려왔다.

"오다 기미가 나타났습니다. K호텔에 투숙했는데 지금

외출중입니다. 함께 가보시겠습니까?"

마스오 부장의 얼굴이 붉어졌다.

"물론 가보겠습니다. 그런데 당장 체포하실 겁니까?"

"글쎄, 좀 기다렸다가 다른 자들이 나타나면 함께 체포했으면

좋겠는데...... 아무튼 일단 거기 가서 결정해야겠습니다."

병호는 왕형사에게 20명을 출동시키라고 지시했다. 왕형사는

밖에 나가 있는 수사관들에게 즉시 연락을 취했다.

K호텔은 H호텔로부터 차로 5분 거리에 있었다.

호텔에 도착한 병호는 먼저 오다 기미의 숙박카드부터

들여다보았다. 그런 다음 마스오 부장이 기미의 사진을 보이자

프런트계 직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다 기미는 그때까지 외출중이었다.

한국 형사들과 일본 형사들은 호텔 내에 있는 코피숍, 식당,

스카이라운지, 카페 등을 돌아다니며 오다 기미를 찾아나섰다.

수사관 몇 명은 로비를 지켰다. 병호는 1918호실 옆방인

1917호실과 그 건너방인 1942호실에도 부하들을 배치시켜

놓았다.

준비가 끝나자 호텔측의 양해하에 마스터키로 1918호실 문을

따고 안으로 들어가보았다.

방안에는 검정 가죽으로 된 여행가방 하나만이 탁자 위에 달랑

놓여 있을 뿐이었다. 방안은 깨끗이 정돈된 상태였다.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되짚어 나간 것 같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가방을 열어보았다. 먼저 눈에 뛴 것은

일본판 소설책이었다. 제목은 'W의 비극', 화장품과 팬티,

스타킹, 스립, 검정색 스카트, 푸른색의 블라우스 등이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그밖에 패션관계 잡지, 스케치북, 여행안내서

따위가 맨 밑에 들어 있었다. 왕형사가 눈에 불을 켜고

뒤져보았지만 이상한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처음대로 잘 넣어둬."

병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차임벨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려왔다.

문을 열자 밖에서 그의 부하가 다급하게 말했다.

"오다 기미가 지금 막 도착했답니다! 빨리 나오십시오!"

"빨리! 그 여자가 올라온다!"

병호는 왕형사를 재촉했다.

왕형사는 가방을 제자리에 놓고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병호가 1918호실을 나와 건너방으로 막 몸을 숨기자 모퉁이로

오다 기미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비에 흠뻑 젖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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