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27화 (27/45)

27. 태풍

마스오 부장은 1942호실 방문 안쪽에 붙어서 렌즈 구멍을 통해

건너편 방을 노려보았다.

이윽고 비에 흠뻑 젖은 젊은 여자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오더니

1918호실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그녀는 열쇠로 방문을 따고

안으로 사라졌다.

"오다 기미가 틀림없습니다!"

마스오 부장이 돌아서서 흥분한 어조로 말했다.

"다행이군요."

병호는 끄덕이고 나서 부하들에게 문에서 눈을 떼지 말라고

지시했다.

전화벨이 울렸다. 문형사가 전화를 받았다.

"반장님 전화입니다."

그것은 1917호실로 들어간 왕형사가 걸어온 것이었다. 병호는

수화기를 귀에 갖다댔다.

"오다 기미가 강남에 있는 B호텔에도 나타났답니다!"

두꺼비는 꽤 흥분해 있었다.

"뭐야? 그게 무슨 말이야? 오다 기미가 두 명이란 말이야?"

"그게 아니고......1시 40분경에 그 여자가 B호텔에 나타나

체크인했답니다. 방번호는 505호실입니다. 그리고 3시 조금 지나

외출했답니다. 그러니까 B호텔을 나와 이곳 K호텔로 온 것

같습니다."

"그럼 두 군데다 방을 정했다는 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왜? 이유가 뭐야?"

"미리 방을 확보해둔 게 아닐까요? 만일을 위해서. 아니면

필요해서 그랬겠지요."

"몇 사람 데리고 빨리 가봐!"

병호는 전화를 끊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필요해서 다른 호텔에 방을 또 하나 구해 놓았다면 왜 그렇게

멀리 떨어진 곳에다 얻었을까? 이런 의문은 풀리지 않은 채

의문으로 남았다.

"그 여자가 나옵니다."

렌즈 구멍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형사가 말했다. 병호는 얼른

시계를 보았다. 4시 5분 전이었다.

"그 여자가 로비로 내려왔습니다."

아래층에서 구내 전화를 통해 보고가 올라왔다. 조금 후에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공중전화를 걸고 있습니다."

병호의 손목시계가 4시 정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아직까지 아무 이상 없어요. 너무나 조용한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예요."

"그대로 계속하시오. 반드시 공중전화를 이용하도록 하시오."

"알겠습니다."

일본 여인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무섭게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지만 두꺼운 유리로

막혀 있는 호텔 안은 바람 한점 없이 조용하기만 했다.

태풍은 한 시간 전보다 더욱 세찬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녀가 보기에 서울은 지금 태풍의 중심권에 들어가 있는 것

같았다. 지금이 고비일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렇게 많이 굴러다니던 차량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고, 텅빈

차도 위로는 온갖 잡동사니들만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도 날려버릴 만큼 태풍은 위력이

있어 보였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남자 몇 명이 차를 타고 나가려다가

포기하고 차에서 내리는 것이 보였다. 젊은 남자들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의 점퍼 자락이 바람에 날리면서 허리에 차고 있는

권총이 살짝 드러나보였다. 그녀는 그 남자의 인상이 꼭 두꺼비

같다고 생각했다.

로비로 들어선 두꺼비는 급히 프런트 쪽으로 걸어가더니 구내

전화기 앞에 다가서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태풍때문에 도저히 나갈 수가 없습니다."

왕형사의 보고에 병호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굉장하군."

"굉장합니다."

"그럼 바람이 잘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도록 해."

"그 아가씨 지금 코피숍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누구와

만나기로 한 것 같습니다."

"잘 감시해. 나도 내려가보겠어."

병호가 아래층 코피숍으로 들어섰을 때 두꺼비는 다른 형사 한

명과 마주앉아 코피를 마시고 있었다.

병호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두꺼비를 쳐다보았다. 두꺼비가

창쪽을 가리켰다.

일본 아가씨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앉아 있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녀는 머리를 뒤로 묶고 있었다.

옆모습이 참 멋지다고 생각했다. 미동도 하지 않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비바람치는 광경을 구경하고 있는 것 같다. 한참

동안 넋나간 모습으로 바깥을 쳐다보고 있다.

창밖의 나무들이 미친 듯 떨어대고 있다. 어떤 나무가지들은

꺾어지기도 하고, 뿌리째 뽑혀 나뒹구는 것들도 보인다.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녀가 책을 집어든다. 'W의

비극'일 것이라고 병호는 생각한다.

그녀의 독서하는 모습은 너무나 안정되고 평화로워 보인다.

저럴 수가 있을까. 잘못 짚은 게 아닐까. 인기척에 그는 고개를

돌렸다. 학자같이 생긴 도꾜 경시청의 마스오 부장이 가만히

의자에 앉는다.

"독서에 열중하고 있군요."

"매우 평화로워 보입니다. 테러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모습

입니다."

그들은 함께 코피를 마셨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위장입니다."

하고 마스오 부장이 말했다.

"난 잘못 판단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저건 위장입니다. 아니면 너무 침착한

여자인지도 모릅니다. 죽음을 앞두고도 책을 읽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녀에게 접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녀가 코피 한잔을 또 시키는 것이 보였다.

"코피만 마시고 있는데요."

하고 마스오가 말했다.

오경감은 초조해졌다. 언제까지 그녀를 지키고 있어야 할지

판단이 내려지지가 않았다. 그로서는 1초가 귀중한 시간이었다.

문득 함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여기에다 수사의

초점을 집중시켜 놓고 경찰이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다른

곳에서 일을 벌인다 -- 그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저렇게 태풍이 불어닥치고

있는데 다른 곳에서 일을 꾸민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현재

비행기는 뜨지 못하고 있다. 언제 뜰 수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함정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고 마스오 부장이 물었다.

"글쎄요."

"기다릴 것 없이 지금 체포해 버리죠."

병호는 망설여졌다. 법적으로 따지면 오다 기미는 위법 사실이

없다. 그녀를 체포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다. 그러나 지금 그런

것을 따지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임의동행식으로 끌고가는

거다. 그러나 병호는 머리를 천천히 흔들었다.

"좀더 기다려 보죠. 뭔가 잡힐 때까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으니까요."

오다 기미는 4시 50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코피숍을 나와 로비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코너에 있는 책방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주로 외국 원서들을 팔고 있는

조그마한 가게였다. 쇼윈도에 비치는 오가는 사람들의 모습에

그녀는 주의를 기울였다. 분명 그녀가 주목한 두 남자의 모습이

코피숍을 나와 그녀의 뒤로 지나쳐가는 것이 보였다. 두꺼비

인상을 한 남자와 그와 함께 코피를 마시던 또 한 명의

사내였다.

그녀는 몸을 돌려 천천히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두 남자는 흩어져 있었다. 두꺼비는 여행사 앞을 기웃거리고

있었고 또 한 명의 남자는 웬 젊은 여자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5시 정각. 오다 기미는 공중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해바라기 10호......"

"예루살렘......"

"2호를 부탁해요."

잠시 후 분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바라기 2호......"

"아직 아무 이상 없어요. 그런데 제 주위에 이상한 사람들이

어른거리고 있어요."

"경찰인가?"

"그런 것 같아요. 완전히 포위된 것 같아요."

"계속 견뎌봐요."

수화기를 놓고 돌아선 그녀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매시 정각에 어디론가 전화를 걸고 있습니다."

병호가 시계를 들여다보고 나서 마스오 부장에게 말했다.

"일당에게......사쓰마 겐지에게 걸고 있을 겁니다."

"그 전화를 잡을 수가 있으면 좋겠는데 공중전화만 이용하고

있어요."

"지하로 내려갑니다."

일본 아가씨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지하로 막 내려가고

있었다.

지하로 내려간 그녀는 쇼핑상가 쪽으로 빠졌다.

쇼핑상가는 고급 대리석 타일로 바닥이 입혀져 있었고, 휘황한

네온으로 장식된 쇼윈도로 이국적인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느릿느릿 걸어갔다. 많은

사람들이 상가를 오가고 있었다.

그녀는 현란한 물줄기가 뿜어져나오고 있는 분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분수 주위를 천천히 돌다가 분수가에 놓여

있는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빨간 모자를 쓴 여자

종업원에게 아이스크림을 하나 주문했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보니 두꺼비 같은 사내가 안경을 낀

중년 남자와 맞은편 가게에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안경 낀

중년 남자는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호텔 로비에서 보았던 남녀

한쌍은 구두가게 앞에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먹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갑자기 버리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호텔 쪽으로 급히 걸어갔다.

"이거 완전히 놀림을 당하고 있는 기분인데......"

1942호실로 돌아온 병호는 화가 난 투로 중얼거렸다.

"아무 하는 일없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

합니다."

왕형사가 선 채로 안절부절 못하면서 말했다.

"뭔가 기다리고 있어."

"태풍이 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닐까요?"

"그 여자가 나왔습니다!"

렌즈 구멍을 지키고 있던 형사가 말했다. 병호는 시계를

보았다. 6시 5분 전이었다.

"공중전화를 걸러 갈 거야."

그의 말은 맞았다.

6시가 막 지나자 로비를 지키던 형사로부터 보고가 올라왔다.

"지금 막 전화를 걸고 나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차가 다니나?"

"한 두대씩 다니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조금씩 자고

있습니다."

"미행해!"

병호는 전화를 끊고 왕형사를 돌아보았다.

"빨리 내려가 봐!"

오다 기미는 콜택시를 탔다.

"강남......B호텔......"

그녀는 운전사에게 서툰 한국 말로 말했다.

"B호텔! 오우케이!"

중년의 운전사는 싱글거리면서 차를 출발시켰다.

아직도 태풍의 기세는 꺾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는지 차들이 하나 둘씩 차도에 나타나고 있었다.

그녀는 의자에 상체를 기댄 채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들이

뒤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니 뒤가 섬뜩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차가 도착할 때까지 눈을 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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