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형사 오병호-25화 (25/45)

25. 日本 아가씨

그리지아는 저렇게 연약하고 온화해 보이는 아가씨가 어떻게

이런 일에 끼어들게 되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그녀한테는 테러리스트로서의 잔혹함이나 과단성, 용기 같은

것은 털끝 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그녀를 볼 때마다

느끼는 점이었다. 그녀는 정말 여성다운 여성이었다.

아파트 안으로 들어가자 안방에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의

왼손에는 피스톨이 들려 있었다. 들어온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고 나서 그는 피스톨을 내리고 방문자들과 악수를

나누었다.

"답답해 죽겠어요. 이게 뭡니까?"

그는 그리지아에게 불평을 늘어놓았다.

"러트, 다 마찬가지예요. 모든 게 날씨 때문이에요."

그들은 소퍼에 둘러앉았다. 일인 아가씨가 차를 가지러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수염을 깎으니까 몰라보겠어."

난장이가 히죽 웃으며 말했다.

"수염을 깎으니까 힘을 못 쓰겠어."

토머스 러트는 길쭉한 턱을 쓰다듬었다. 검은 테의 안경

너머로 푸른 눈이 빛나고 있었다. 머리는 검은 색이었다.

"재미 많이 봤어?"

주방 쪽을 턱으로 가리키며 난장이가 물었다.

그리지아가 눈을 흘겼다. 러트는 머리를 흔들었다.

"잘 알면서 왜 그래? 난 여자는 싫어.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았어. 그리고 저 여자는 지조가 있는 여자야. 아무한테나

벌려주는 여자가 아니야."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기미가 코피를 가져왔다.

"대접할 게 없어서 죄송해요."

그녀는 마치 주부처럼 말했다. 코피를 마시는 모습도 아주

얌전해 보였다.

"할 이야기가 있어요. 아주 중요한 이야기예요."

코피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그리지아가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일본

아가씨를 쳐다보았다. 러트가 자리를 피해주려고 일어서자

그리지아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러트, 그대로 앉아 있어요. 당신한테도 해당이 될 테니까."

러트는 도로 자리에 앉았다.

그리지아는 찻잔을 내려놓고 나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문제가 생겼어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확인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을 확인하기 전에는 작전을 개시할 수 가

없어요."

그녀는 열차에서 난장이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그들에게, 특히

일본 아가씨에게 집중적으로 해주었다. 그녀가 이야기를 끝냈을

때 일본 아가씨와 푸른 눈의 사나이의 얼굴은 납처럼 굳어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흐른 뒤 입을 연 것은 러트였다.

"만일 기미양이 체포되면 그 뒷수습은 어떻게 할 겁니까?

기미양한테만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누구한테도 희생을 강요하지는 않아요. 이건 희생이

아니예요."

그리지아는 차갑게 내뱉었다. 그러자 기미가 한 마디 했다.

"전 괜찮아요. 희생 같은 건 두렵지 않아요. 하지만 그 전에

사쓰마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요."

그녀는 사쓰마 겐지를 선생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사쓰마의 동의를 얻도록 해주겠어요."

그리지아는 끄덕이고 나서 잔에 남아 있는 코피를 마저

마셨다.

"만일 기미양이 체포된다면 다른 사람들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러트가 굳은 표정을 풀지 않고 물었다.

"물론이에요. 기미양은 사실 가장 위험 부담이 적은

인물이에요. 그런 인물이 체포된다면 한국 경찰의 수사가 어느

정도까지 진행됐는가를 알 수가 있을 거예요."

"그럼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죠? 비행기에 타기도 전에

체포될 텐데......?"

"모두가 잡히는 거지 뭐."

난장이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러트가 난장이를 노려보았다.

"농담할 때가 아니야!"

"농담이 아니야."

하니 가랄은 여전히 히죽거렸다.

"그의 말이 맞아요. 모두가 잡히는 거예요."

그리지아가 가랄의 말에 동조하고 나섰다. 러트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수배 대상인 사람들은 모두 자진해서 잡히는 거예요. 하지만

수사권 밖에 있는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서 작전을 개시하는

거예요."

"수배 대상 인물과 수사권 밖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우리가

알 수 있나요?"

"확실하게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짐작은 할 수 있어요.

지명수배된 제1의 용의자는 러트 당신이에요."

러트는 창백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건 각오하고 있어요. 내 방에서 화이트가 살해됐으니까요."

"당신이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도 이번 작전은

성공해야해요."

"다른 패스포트를 마련하면 될 거 아닙니까?"

"그것도 생각해 봤지. 하지만 쓸데없는 짓이야."

난장이가 거기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 그리지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 수사진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그러는 거예요. 그들이

수배 대상에 올릴 수 있는 인물들을 선정해 보았는데...... 당신

외에 사쓰마 겐지, 마주르, 율무, 오노, 그리고 기미양 등

6명이에요. 여섯 사람은 H호텔에 흔적을 남겼어요. 한국 경찰은

틀림없이 그 흔적을 가지고 조사에 임했을 거예요. 율무와

오노는 아직까지 H호텔에 버티고 있지만 나머지 4명은 모두

행방을 감추었어요. 행방을 감추었기 때문에 경찰이 더욱

의심하고 찾고 있을 가능성이 많아요. 다른 사람들, 그러니까

나를 포함해서 대장과 가랄, 닥터는 H호텔에 흔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수사권 밖에 있을 가능성이 많아요. 수사권

밖에 있으면 행동하는데 불편하지 않아요."

거기까지 말한 그리지아는 반응을 살피듯 기미와 러트를

바라보았다. 그들은 그녀의 말에 수긍이 가는지 잠자코 앉아

있었다.

"만일 여섯 사람이 체포되면 작전은 네 사람만으로 개시할

수밖에 없어요. 좀 어렵겠지만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

"작전은 성공한다치고......그러면 체포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리를 버리고 도망가겠다는 겁니까?"

러트가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은 사실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지아는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버리다니요. 천만에! 여섯 사람이 체포되면 경찰은 일당을

모두 체포한 걸로 알고 경계를 풀 거예요. 여기서 주의할 게

있어요. 여러분들은 일당이 모두 체포된 것처럼 행동하지 않으면

안 돼요. 경찰이 승리감에 도취해 있을 때 우리 네 사람은

작전을 개시할 거예요. 일단 비행기를 손에 넣으면 인질을

사이에 놓고 경찰과 흥정을 벌일 거예요. 먼저 체포된 6명을

석방하라고 말이에요. 그런 흥정은 지금까지의 흥정으로 보아

우리 쪽에 승산이 있다는 건 당신도 잘 알 거예요."

"경찰이 우리를 석방하면 우리를 함께 태우고 떠나겠다 이

말입니까?"

"그래요. 그 방법밖에 없어요."

"그럴듯한 방법이군요."

러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일말의 불안한 그림자가 어른거리는 것을 지울 수는 없었다.

기미는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불안한 그림자

같은 것은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녀는 러트보다 훨씬 침착해

보였다.

"문제는 한국 경찰이 함정에 빠져주느냐 하는 거군요."

러트가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건 여러분이 얼마나 연기를 잘해 주느냐에 달렸어요. 특히

기미양의 역할이 중요해요."

모두가 기미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손끝 하나 떨지 않고

침착하게 찻잔을 집어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먼저 기미양은 여기서 빠져나가 서울로 가세요. 서울에서

체포돼야 우리한테 안전하니까요. 서울로 올라가서 이름있는

일류 호텔과 삼류 호텔 두 군데쯤에 투숙하세요. 숙박카드에

이름을 올려놓고 반응을 기다리는 거예요. 굳이 일부러 체포될

필요는 없어요. 기미양은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매시 정각에

은신처로 전화를 걸어줘요. 오늘 밤 자정까지 계속 전화를

걸어줘요. 만일 두 시간이 지나도록 전화가 없으면 이쪽에서

호텔로 전화를 걸겠어요. 전화를 받지 않으면 체포된 걸로

알겠어요. 호텔 방에서 체포된 상태에서 전화를 받게 되면

이쪽에서 남자가 필요하지 않으세요 하고 묻겠어요. 그러면

아니요 라고 대답해 줘요."

"자정이 지나면?"

기미가 그리지아에게 조용한 눈길을 던졌다.

"자정이 지나서 아무 일이 없으면 그때 가서 새로 지시를

내리겠어요. 체포되면 기미양은 심한 고통을 겪게 될지도

몰라요. 한국 경찰은 지금 매우 초조해 있을 거예요. 하이재킹을

눈치 챘다면 기미양을 무섭게 다그칠 거예요. 차라리 점잖게

대하는 것보다 그렇게 해주는 게 우리한테는 유리해요. 고통을

주지도 않는데 자진해서 자백하면 그들이 함정이라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자백의 범위는 어느 정도로 할까요?"

기미가 조용한 어조로 물었다.

"경찰이 하이재킹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으면 굳이 그걸

말해줄 필요는 없어요. 마침 오는 28일에 세계금융가회의가

서울에서 열릴 계획이니까 그 회의를 습격하기 위해서 왔다고

말해요. 세계 거물급 은행장들이 거의 참석하니까 습격

대상으로는 아주 적절해요. 그리고 제2 은신처를 알려줘요.

거기에 숨어 있는 다섯 명이 자연스럽게 체포될 수 있게

말이에요."

"만일 자백할 상황이 아니라면 어떡 하지요?"

"기미양이 체포되고 나면 우리는 다섯 시간 동안 기다려 줄

거예요. 그때까지 경찰이 은신처에 나타나지 않으면 동지들은

은신처를 나와 경찰 수사망에 자신들을 노출시킬 거예요. 그렇게

해서라도 체포되게 할 거예요."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기미양이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영어로 몇 마디 주고받고 나서 수화기를 그리지아에게 넘겼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대장이었다.

"8시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어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빨리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분케의 목소리는 더욱 쉬어 있었다. 그것은 그가 흥분해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모두 이해가 됐나요?"

"네, 그렇게밖에 할 수 없다는데 모두 동의했습니다. 그쪽은

어떻습니까?"

"거의 마무리되어가는 중이에요. 그런데 기미양이 사쓰마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해요. 사쓰마를 바꿔줘요."

잠시 후 사쓰마 겐지가 나오자 그리지아는 그와 몇 마디 나눈

다음 수화기를 기미에게 넘겼다.

기미는 거의 자기 의견을 말하지 않았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만 있다가 '네네, 알겠습니다.'하고 말한 다음 전화를

끊었다.

"뭐라고 해요? 이제 됐어요?"

그리지아가 기미의 어깨를 뒤에서 짚으며 물었다.

"네, 선생님은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러트가 갑자기 벌떡 몸을 일으키며 큰 소리로 말했다.

"뭐가 문제라는 거야?"

난장이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러트는 기미를 힐끗

쳐다보고 나서

"기미양은 지금 임신중이에요."

하고 말했다. 그 한 마디에 방안은 찬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그리지아는 앞으로 돌아가 한쪽 무릎을 구부리며 앉았다.

그리고 기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가만히 올려놓았다.

여자들끼리만이 통할 수 있는 따뜻한 감정이 손을 통해 흘렀다.

"기미양, 정말인가요?"

일본 아가씨는 창백한 얼굴로 그리지아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갑자기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난 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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