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태양의 대지
“그리고 이것…….”
그녀는 얼음덩이를 하나씩 우리에게 나눠주었다. 티끌 하나 없이 깨끗하고 투명한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일꼬?
“그들이 숨어있는 화탑은 보통 방법으론 볼 수 없습니다. 어디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구요. 여러분께 드린 것은 어떠한 열에도 녹지 않는 얼음인데, 제 분신과도 같은 것이지요. 화탑이 있을만한 곳에 가셔서 그걸 눈에 대고 보시면 존재 여부를 확인 하실 수 있을 겁니다. 만약 화탑의 위치가 확인된다면 그것들을 화탑을 향해 던져주십시오. 화탑을 숨기는 결계와 그 얼음이 부딪치면 결계는 힘을 잃고 화탑이 나타날 겁니다. 그 다음은…… 여러분들께 맡기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죠.”
“서둘러 주십시오. 그것들로 인해 저의 힘은 더욱 약해졌습니다.”
“잽싸게 해치우고 올 테니 보수나 준비해 놓고 있으라고!!!”
에크만의 외침을 마지막으로 모두 마을로 이동했고, 도중하차했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리고 퀘스트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전에 얼음의 동굴 클리어에 참여하지 않았던 다른 마스터들에게도 귓말을 날려 영입을 시도했다.
공지
[지금 막 한 파티가 얼음의 여왕의 부탁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벤트가 발동되었습니다. 이벤트 명은 붉은 태양의 대지. 얼음의 여왕이 그들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면서 그녀의 힘은 더 약해졌고 모든 필드가 ‘사막화’되었습니다. 지금부터 일정 시간 내에 ‘물’을 마시거나 ‘그늘’에서 쉬지 않으면 능력치가 일시적으로 감소하고 오랫동안 햇볕을 쪼일 시 HP가 조금씩 감소합니다. 또한 불 계열의 정령이나 몬스터를 조종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를 참조하세요]
“이벤트?!”
얼음이 녹느니 어쩌니 하더니 전부 이벤트를 이끌어 내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던 모양이다. 회사 자체에서 주도하는 것이 아닌, 일정 조건을 만족 시켰을 때만 발동하는 이벤트. 불의 정령들과 불 계열 몬스터 조종이 불가능하다하니 사전에 준비를 할 수 없었던 정령술사, 소환술사 유저들의 반발이 있겠지만 회사가 직접 개입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하면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홈페이지를 보고 오겠습니다.”
“그러시죠.”
처음부터 던전 공략을 주도했던 기사가 자진해서 홈페이지에 접속하고 오겠다 말하고 로그아웃했다. 나야 귀찮은 일을 덜어서 좋긴 한데 저 녀석…… 왠지 대장 노릇을 하려고 한단 말이야? 그래봐야 난 이름도 모르는 상태지만.
“크흠, 그동안 멍하니 있기도 뭐한데 ‘탑’이 있을 만한 곳을 생각해 보죠.”
“뻔하지, 화산.”
“확실히 가능성이 높기는 합니다만 다른 곳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면 사막.”
“…….”
정령술사가 나름대로 친목을 다져보고자 말을 꺼냈지만 에크만이 짧은 대답으로 초를 쳐버렸다. 그 다음 정령술사가 할 말이 없는 것이, 그곳들 빼면 화탑이라 불릴만한 곳이 없기 때문. 무안해진 그는 침묵했고 다른 사람들 역시 무안 당할까봐 섣불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가운데 홈페이지를 보러갔던 기사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클리어 방법에 대한 것 이외엔 특별한 것이 없더군요.”
‘그게 특별한 거야, 이 양반아!!!’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의 말인 즉, 클리어 방법은 모두 3가지. 첫째는 아주 간단하게 최상층으로 올라가 불의 최상급 정령인 이플리트를 때려잡는 것이고, 둘째는 총 3천 점(하급은 1점, 중급은 3점, 상급은 5점)에 해당하는 정령을 잡아 죽이는 것. 마지막 셋째는 탑 안 곳곳에 새겨진 마법 진을 찾아 모두 부수는 것이다.
“아참, 그리고 시간제한이 걸렸는데 이곳의 얼음이 녹기까지는 현실시간으로 한 달. 시간 내에 클리어 하더라도 너무 늦으면 섬이 상당히 줄어버린다고 하더군요.”
들어보니 이것 역시 특별한 일이었다. 이 인간은 일의 경중을 따질 줄 모르는 건가?!
“그런 걸 보고 특별한 거라 하는 겁니다…….”
“아, 그런가요? 그럼 어서 조력자를 모으도록 하죠. 이벤트이니 참여하려는 마스터 유저가 많을 겁니다.”
에크만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각자 귓말을 날려 마스터 유저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난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보아하니 이번 일은 쉬울 듯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어디 있는지 모르니 시간이 걸릴 테고, 잘못하면 클리어하고도 욕먹는 사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걸 어쩐다…….
“조금 전에야 컨셉이 ‘최강자’였으니 그렇다 쳐도 화탑을 깨는 것까지 이 멤버로 가기는 무리하고 생각하는데……. 어떻게들 생각하시는지?”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결국 ‘레벨 안 되는 놈들은 꺼져라.’라는 소리였다. 그 말에 마스터들은 공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나키르 등 다른 사람들은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확실히 이런 일은 마스터가 아닌 사람들이 나서면 방해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보수로 마법서까지 준다는데 쉽게 포기 할 수 없지 않은가? 어차피 물러설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기에 나서기로 했다.
“음……. 확실히 이 멤버로 갔다간 전멸하거나 아까처럼 전멸 직전까지 가겠지요. 하지만 몇 명은 빠질 수 없는 이유가 있으니 패스입니다.”
무슨 소린지 알아듣지 못하고 기사가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이유라뇨?”
“이것, 잊으셨습니까?”
내가 들어 보인 것은 얼음의 여왕이 나눠준 얼음 덩어리. 확인해본 결과 타인에게 양도 불능이란다.
“……넘겨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니, 사도록 하죠.”
그는 아직 확인을 안 해봤는지 사겠다고 나섰다. 훗, 거만하군.
“내 것을 남에게 베푸는 취미가 없으니 그냥 줄 순 없고, 원한다면 팔아드리죠. 그래, 얼마나 주겠다는 겁니까?”
씨익-.
그는 말이 통한다고 생각했는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역겨운 자식, 내 친히 엿 먹여 주마.
“장난하십니까?”
그는 두 손을 이용해 30골드를 표시했다가 내 말에 급히 40으로 고쳤다. 완전 사람을 바보로 아는군.
“퀘스트 수행하며 얻는 경험치와 명성만 해도 얼만데 달랑 40골드라? 보수로 얻을 아이템은 생각 안 해보셨습니까? 계속 이러시면 협상은 결렬입니다.”
“그럼 팔십 골드!!”
피식.
급해졌는지 두 배나 더 올려 불렀다. 80골드면 상당히 큰돈이기에 정령술사와 프리스트는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고, 그들이 팔겠다고 나서기 전에 또 한 번 가격을 올려야 했다.
“백 오십.”
거의 두 배나 되는 가격으로 높여 부르자 그의 얼굴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다른 사람들도 어리벙벙한 얼굴로 날 쳐다봤고 에크만만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히죽거리고 있었다.
“혹시 압니까? 보수로 준다는 아이템이 미스릴 소드같은 대단한 놈일지. 뭐, 이 정도 투자할 배짱도 없다면 기대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입니다.”
“배, 백 골드!!”
“백 사십.”
“백 삼십!!! 하나만 사고 말 것도 아닌데 이 이상은 무리입니다.”
애처로운 그의 목소리에 빙긋 웃으며 협상을 매듭지었다. 한 사람 당 백 삼십 골드. 프리스트는 데려간다고 해도 정령술사까지 도합 이백 육십 골드라는 거금을 내야하는데도 그는 웃고 있었다. 실제로는 백 삼십 골드를 날.리.는. 일이 되겠지만.
“잘했다, 자식.”
그 기사를 아는 사람인 듯 또 기사 한 명이 나타나 어깨를 쳤다. 그를 선두로 다른 마스터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시작했는데, 그때마다 나키르 등이 움찔거렸다. 쫀 건가?
“그것은 이 형님에게 드리십시오.”
“선불.”
당당히 선불을 요구하는 내게 이맛살을 찌푸리며 돈을 건넸다. 정확히 백하고도 삼십 골드, 난 더 이상 볼일 없다는 식으로 얼음덩이를 그에게 던져줬고, 그는 건방지다고 생각했는지 받으면서 날 쏘아보았다. 얼마 가진 못했지만…….
“크아아악!!!!”
그것을 받는 순간 그의 손은 극심한 한기에 얼어버렸고 냉기는 계속해서 팔의 위쪽으로 뻗쳐올라갔다.
“이게 무슨 짓이냐!!!”
“뭐가? 난 달래서 줬을 뿐인데. 그게 에고 아이템이라도 돼서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나 보지.”
실없는 소리를 내뱉으며 돌아서 뭐라고 하다가 사내의 상태가 더 악화되는 것을 보고 서둘러 움직였다.
“저도 이미 같은 걸 가지고 있으니 해를 입지 않을 겁니다, 잠시만 기다리…… 크아악!!!”
자신도 같은 걸 가지고 있으니 괜찮을 거라며 얼음덩이에 손을 댄 기사도 손이 얼어붙으며 고통을 호소했다. 도와주려는 사람마저 그렇게 되자 사람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방방 뛰기만 했고 에크만과 알테어는 고소하다며 낄낄거렸다. 이쯤 했으면 수거작업으로 들어가 볼까?
“누가 이것 좀 치워 줘!! 크윽, 빨리 부숴버리기라도 하란 말이야!!!”
부수는 것쯤은 검강을 사용하면 가능할지 모른다고 생각들은 하고 있으나 이것이 부서지면 이벤트 클리어가 불가능해 질지도 몰랐기 때문에 아무도 나서는 이는 없었다.
“부수느니 버리는 게 어때?”
“버리든 X랄을 하든 어떻게 좀 해보란 말이야!!!”
“그럼 실례.”
그들 손에 놓인 얼음덩이를 살짝 들어 올리자 얼음도, 통증도 사라졌다. 극심했던 통증이 사라지자 힘이 풀린 둘은 쓰러진 채 일어설 줄을 몰랐고, 조금 뒤에나 겨우 검에 의지하여 일어 설 수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는 어찌하지 못한 채.
“네 놈, 무슨 짓을 해놓은 거냐!!!”
“클클클클, 멍청한 놈들!! 이 얼음은 양도가 불가능한 것도 몰랐냐? 그런 식으로 작용할 줄은 몰랐는데 몸소 알려주니 고맙군!!”
“탓하려면 자신의 멍청함이나 탓하라고.”
알테어와 에크만, 둘의 비난에 수치스러웠는지 그 형이란 인간은 돌아가 버렸고 기사는 침묵하다가 슬쩍 옆으로 와 속삭였다
“환불…… 해줘요.”
씨익-.
그와 나는 미소 지은 채 한참을 서로 마주봤다. 하지만 점점 차오르는 그의 희망을 싸늘히 외면하며 무표정으로 바꾸었고 그의 표정은 구겨진 종이컵처럼 일그러졌다
“버리든 말든 멋대로 하라면 서요? 전 지금이라도 손에 쥐어 드릴 의향이 있습니다만…….”
“아, 아니. 그것만은…….”
“그럼 슬슬 인원 편성을 하죠. 늦어서 필드가 좁아졌다간 클리어하고도 욕먹을 테니. 그나저나 올 때가 됐는데?”
말하는 즉시 옆에 흰 빛이 모이는 걸 보니 파트리크, 이 사람도 양반은 못되는 듯싶었다.
“당신은 더 매지션 길드의?”
모인 사람들 중 하나가 그에게 아는 체를 했다. 하지만 그는 예의상 고개만 까딱일 뿐, 거의 무시하고 내게로 걸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벤트에 대한 내용은 알고 있겠죠? 여기 있는 사람들이 이벤트 클리어를 위해 떠날 사람들입니다. 아닌 사람도 있지만요. 한데 위치를 정확히 아는 게 아니라 필드가 상당히 줄어들 위험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더 매지션 길드에서 그걸 막아주십시오.”
“어떻게……?”
“간단하죠, 아쿠아 같은 물 속성을 사용한 뒤 프리즈 등을 사용해 섬 외각부터 얼리는 겁니다. 단순 반복 작업이라는 게 문제지만 섬의 크기를 유지시키는 것쯤은 어느 정도 가능할 듯싶군요. 프로그램 상 섬 크기를 더 늘리지는 못 하겠지만.”
“알겠습니다. 준비하도록 하죠. 섬의 크기가 크기인 만큼 다른 마법사 유저들의 도움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서둘러야겠군요. 그럼 이만.”
그가 사라지자 무시당했던 격투가가 잔뜩 볼이 부풀어 오른 모습으로 내게 물어왔다. 어떻게 아는 사이기에 저렇게 깍듯이 대하냐고.
“그냥 존중해주는 정도죠. 제가 이것저것 조합을 많이 하다 보니 가르쳐 달라고 해서요. 저도 도움을 받으니 공생관계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럼 왜 마스터이신 저분들과는 말도 안 하죠?”
그가 이상한 점을 집어내자 알테어와 에크만이 슬쩍 노려보고 딴청을 피웠다. 다른 마법사들이 그렇듯 더 매지션 길드 전체가 그 둘을 싫어하고 둘 역시 마스터인 자신들보다 나를 더 높이 평가하자 ‘약한 놈들끼리 모여서 발버둥치는 것이다.’라고 떠들고 있기 때문에. 대강의 상황 설명이 끝나고 인원 편성으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당연히 로그와 궁수, 나키르가 빠지고 나와 정령술사는 양도가 불가능한 아이템 덕분에 마스터가 아님에도 합류하게 되었는데, 내가 기사를 등쳐먹은 돈을 조금 풀자 금세 떨어져나간 사람들도 환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역시…… 돈이 최고다.
“후…… 그럼 새로 오신 분들도 있으니 다시 소개하죠. 먼저 전 마스터레벨의 기사, 망혼입니다.”
“귀찮으니 마스터란 말은 뺍시다. 난 기사 탈라스.”
“기사 녹텐.”
“기사 루핏.”
“기사 무이파.”
“격투가 권혼.”
“마법사 알테어.”
“마법사 에크만.”
“프리스트 우토입니다.”
“프리스트 사오마이입니다.”
“정령술사 프라피룬입니다.”
“마법사 콜로니스트.”
나를 포함해 모두 열두 명. 목적지가 좁은 ‘탑’ 안이니 궁수는 제외되었다. 마스터 유저도 없었지만. 기사 다섯에 격투가 하나, 프리스트 둘에 마법사 셋이라…… 프리스트가 모자란 거 아닌지 모르겠군.
“먼저 어디로 가는 게 좋을까요?”
“화산.”
힐름 내에 화산이 하나도 아니거니와 화산 주변의 공터도 보통 넓지 않은데 막연하게 화산이라 하면 어쩌란 말이야?
“그냥…… 얼음을 가진 사람들이 흩어져서 찾아내고 그 다음에 뭉쳐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그게 좋겠군요. 수고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난 히메네스 화산으로 가지.”
“전 하기비스 화산으로 가겠습니다.”
“전…….”
혼자 다닐 수 없는 프리스트가 난감해하자 정령술사가 나서서 함께 갈 것을 얘기했다. 남은 하나의 화산, 테우른 화산은 권혼이 차지해 버렸고, 난 어디로 가지?
“전…… 사막 쪽으로 가보겠습니다. 한번 갔던 적이 있으니 텔레포트가 가능할 겁니다.”
“그럼 정해졌군요. 시간은 게임시간으로 두 시간, 여기서 다시 만나도록 하겠습니다.”
망혼은 끝까지 리더인 척 해댔다. 얼음을 가지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제각기 사냥을 즐기거나 아이템 쇼핑을 하러 흩어졌고 임무를 맡은 우리는 몸을 움직여야했다.
“텔레포트.”
슈호프 마을에 도착하자 웬일인지 제법 활기를 띠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의아해하며 주위를 살피자 우물에서 물을 긷는 여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물물은 말랐을 텐데……?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오랜만입니다, 촌장님. 한데 어떻게 우물이 정상이 된 거죠?”
“아, 콜로니스트 님들이 돌아가셔서 길드에 얘기해주신 덕분에 다른 분들이 오셔서 우물 안의 괴물을 처리해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생활할 수 있을 정도의 물은 얻을 수가 있게 됐지요.”
“그래, 그러고 보니 우물 안에는 불의 상급 정령과 마법진이……!! 내가 왜 이 생각을 못했지?! 그렇다면 ‘탑’의 위치는…….”
얼음덩이를 꺼내 눈앞에 댄 후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건 황량한 사막의 모래와 저 멀리 점으로 보이는 건물. 건물? 저번에 왔을 땐 없었는데?
“일단 확인 정도는 해봐야겠군.”
이 더운 날씨에, 이 차림으로 저 먼 거리를 걸어갈 수 없기에 몇 실버를 들여 싼 낙타와 옷, 물을 산 뒤 천천히 출발을 했다. 어차피 일찍 찾아봐야 별 소용도 없는데 여유 있게 가자고.
“투엣 투엣.”
한 반절쯤 왔을까? 조용하던 낙타가 갑자기 흥분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겁에 질린 듯이…….
두두두두두두-.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 일어나는 땅의 울림, 샌드 웜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었다.
“젠장!!”
낙타를 재촉해 보았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가오는 샌드 웜, 피하느냐 공격하느냐 그것이 문제였다.
“에라이, 일단 시도나 해보자. 세상 모든 것을 휩쓰는 강력한 바람…… 토네이도!!”
샌드 웜은 모래 속에 숨어있지만 공격할 때는 항상 점프를 한다. 내가 노린 것은 바로 점프가 최고조에 이를 때. 비록 무게 때문에 추가로 올라간 건 얼마 안 되지만 완전히 뒤로 뒤집힌 채 넘어가 타격을 줄 수 있었다.
“헥헥, 쪄 죽어버려라.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그 동안은 마나 량이 딸려서 거의 쓰지 않았지만 저 큰 덩치에 제대로 타격을 주려면 어지간한 마법으론 소용없을 것 같았기에 무리해서 인페르노를 시전 했다.
[더위로 인해 능력치가 다운되셨습니다 ]
능력치가 다운 됐지만 그걸로 죽지는 않기에 남은 마나를 몽땅 인페르노에 쏟아 부었다. 그리고 마나 포션을 들이키자 내려갔던 능력치가 돌아왔고 샌드 웜은 노릇노릇 하게 구워진 상태로 부들거렸다.
“아무래도 확인사살이 필요하겠군. 멸망으로 이끄는 홍염의 불꽃, 그랜드 파이어.”
마나 포션에 의해 차오르던 마나가 다시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또 다시 머리가 구워진 샌드 웜은 부들거림조차 멈춘 채 아이템을 남기고 사라졌다.
“위에서 소화가 안 됐다는 거야 뭐야?”
떨어진 아이템에는 이물질이 잔뜩 묻어있었다. 특별히 좋아 보이지는 않는 아이템들. 줍지 말까 고민도 해봤지만 그냥 두 손가락으로 집어 아이템 창에 쑤셔 박았다. 이럴 때는 이 게임의 리얼리티가 싫다니까.
“에……?”
토네이도 때문인지 인페르노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느새 낙타가 실신해 있었다. 산 넘어 산이로군.
“할 수 없지, 포션 러시다. 블링크, 블링크, 블링크, 블링…….”
이동거리가 짧더라도 사막을 도보로 이동한다는 것은 생각도 못할 일이었으므로 마나 포션을 끊임없이 들이키며 블링크 러시를 감행했다. 그렇게 한 5분쯤 지났을까? 마나가 남아있는데도 블링크가 통하지 않았다. 즉,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말. 얼음을 통해 바라보자 하얀 색 탑이 자리하고 있었다.
“빙고.”
얼핏 보이는 붉은 생물은 불의 정령임에 틀림없었다. 혼자서라도 살짝 둘러보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더 이상은 접근 불가. 무언가 보이지 않는 막이 둘러져있어 마임 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 당장 사람들을 부를 것이냐, 좀 더 살필 것이냐. 시간제한이 있긴 하지만 준비도 없이 무작정 들어가는 멍청한 짓은 하기 싫었기에(알테어와 에크만이라면 앞뒤 안 가리고 들어갈 것이 뻔했다.) 탑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시간을 보냈다.
“과연…….”
2시간을 흘려보내고 방금 찾은 것처럼 연기해서 일행을 데려왔다. 역시나 에크만과 알테어는 탑을 보자마자 몸이 근질근질 한지 보채기 시작했고 나머지 사람은 클리어 방법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다른 유저들의 원성을 최소화시키려면 역시 최단 루트로 올라가 보스를 처리해야 할까요?”
“퀘스트를 해결하는 우리 이외의 사람들에겐 피해만 주는 이벤트라 왠지 당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군요.”
우리가 탑을 찾는 동안 홈페이지에 접속해 사람들의 반응을 살펴본 녹텐의 말에 따르면 제작사는 ‘숨겨진 이벤트를 찾아낸 것이라 어쩔 수 없다.’라며 책임을 회피하는 것도 모자라 우리에게 떠넘겼다는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조용히 해결하고 끝낼 수 있겠지만 문제는 이쪽의 이름을 모두 밝혀 버린 것. 대부분이 마스터이다 보니 질투 어린 비난까지 더해졌고 악명 높은 두 마법사의 이름도 한몫 톡톡히 했다. 비난하는 사람의 수가 수이다 보니 소속된 길드 측도 어쩔 수 없이 침묵. 오직 내 팬클럽만이 그들에 대항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고 한다. 이래서 빠순이가 무섭다는 거였군.
“전 반대입니다. 최상급 정령을, 그것도 평소보다 강한 상태에서 잡는 건 무리 아닐까요? 약해진 최상급 골렘에게도 전멸 당할 뻔하지 않았습니까?”
이런 불리한 조건에서 최상급 정령을 잡는다는 건 무리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골렘이 ‘재생’을 하긴 했지만 최상급으로 분류되는 이유 중 하나가 그 능력 때문이기도 하니까 최상급 정령 역시 압도적인 능력치나 특수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게 뻔하지 않은가? 게다가 정령은 크리티컬 히트를 당하지 않는다.
“그때야 골렘이 ‘재생’도 했었고 또 마스터가 별로 없었지 않습니까?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망혼은 유독 마스터란 단어를 강조하며 말했다. 오호, 그러셔?
“확실히 다르긴 다르군요. 몸을 아끼지 않고 길을 뚫어줄 골렘도 없고 저희 마법사가 거의 힘을 쓰지 못할 테니 말입니다.”
정령들이 몸으로만 공격해 오지 않을 테니 가끔 기사들이 피할 것이고 그 공격은 고스란히 우리에게 떨어질 것이다. 그것들을 어찌어찌 막으면서 이프리트에게 간다 해도 물 속성 마법 중 쓸만 한 공격마법은 거의 없었고 그나마 강하다 하는 것들도 모두 근처에 물이 있어야 제대로 사용 가능한 것들 뿐. 결국 기사들만의 힘으로 잡아야 한다는 소린데 가능하리라 생각지는 않는다.
“기사들만으로도 클리어 가능하다 말하고 싶으신 건 아니겠죠?”
찌리릿-!
잡아먹을 듯 노려보는 망혼을 무심한 눈으로 내려봐 주자(내 키가 좀 더 컸다.) 그는 더 열이 오르는지 부르르 떨리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만들 하시죠, 이러다 싸움 나겠습니다.”
주위에서 지켜보던 두 명의 기사가 한 사람씩 잡고 멀찌감치 이동하자 루핏이 말을 이었다.
“콜로니스트님도 일리가 있습니다만 제 생각엔 마법사 분들이 견제만 해주셔도 마스터 기사 다섯에 격투가 한 명이라면 충분히 가망은 있을 것 같습니다. 가는 길에 만날 정령들은 큰 문제가 안 될 테고 말이죠. 그래서 한번 정도는 시도해 보고 싶습니다. 대신, 마스터가 아니신 분들이 아웃되실 경우 복구될 때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루핏은 제법 예의를 갖추고 의견을 얘기했다. 둘러보자 다른 사람들도 동의하는 눈치. 못마땅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을 듯싶었다
“……좋습니다. 하지만 전멸이 확실해 질 때는 혼자서라도 몸을 피할 겁니다.”
마스터들이야 죽으면 두 번째 택한 직업의 레벨이 떨어지지만 나와 권혼, 프리스트들은 사정이 달랐다. 재수 없게 레벨이 3정도 떨어져 버리면 몇 달 고생을 해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물론입니다. 다른 분들도 이의 없으시죠?”
“나도 90대에 한번 누워봐서 그 심정 알지. 당연한 말이야.”
“그럼 이제 이 벽 좀 없애 주시겠습니까?”
요청을 받고도 우린 잠시 동안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이 얼음을 사용해야 한다는 건 알되, 사용하는 방법은 몰랐으니까.
“어차피 저 막을 깨는 게 목적이라며? 그럼 이거밖에 더 있겠어, 에잇!!”
에크만은 얼음을 몇 번 던졌다 받더니 보이지 않는 막을 향해 냅다 던져 버렸다. 빠르게 날아가던 얼음은 막에 닿자마자 소리 없이 공중에서 멈췄고 무언가를 기다리듯 버티고 있었다. 다른 것들이 튕겨 나오던 걸 생각하면 옳은 방법이긴 한 것 같군.
“왠지 허무하지만…… 맞나봅니다.”
나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도 각기 가진 얼음을 던졌다. 공중에서 멈춘 다섯 개의 얼음은 먼저 던져진 에크만의 것 주위로 모여들었고 밝은 빛을 발하다 가루가 되어 떨어져 내렸다.
“갑시다.”
예상대로 앞을 가로막던 막은 사라져 있었다. 가루가 되었어도 녹지 않는 성질이 남아있다면 가져다가 이프리트에게 뿌릴 생각으로 얼음 가루를 찾았으나 땅에 떨어진 가루들은 이미 흔적도 없이 녹아 사라졌고, 아쉬움에 혀를 차며 일행의 뒤를 따랐다.
“잠깐.”
탑의 입구로 들어가기 전 나와 알테어가 동시에 모두를 불러 세웠다.
“음?”
“얼래?”
“왜들 그러시죠?”
알테어가 나와 같은 생각일 가능성은 제로였고 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기도 했기에 말할 기회를 양보하기로 했다.
“그럼 나중에 아이디어 뺏겼다면서 울지 말라고. 흠흠,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차피 올라갈 거 꼭 정문으로 갈 거 있느냐, 그거지.”
“?”
“그러니까 예를 들면 블링크!! ……어? 안 통하잖아. 그렇다면…… 새처럼 하늘로, 플라이.”
블링크를 이용해 위층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탑은 블링크가 가능한 지역이 아니다. 그래서 두 번째 방법으로 택한 것이 플라이. 그는 충분히 높이 올라 탑을 향해 돌진했다. 쿵-. 뭔가에 부딪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알테어가 하늘에서 떨어져 내렸다. 위쪽에는 나름대로의 보호막이 쳐져있던 듯. 그의 몸이 그대로 땅에 부딪쳤다면 죽음을 면치 못했겠지만 다행히 권혼이 한 기사의 어깨를 밟고 점프해서 안전하게 받아 낼 수 있었다.
“위로의 침입은 불가능한 것 같군요. 설마 콜로니스트님도 저걸 시도하려 했던 건 아니겠죠?”
이제 망혼의 말에는 뼈가 들어있었다. 엘시노 이외에 또 하나의 적을 만들어 버린 것 같은데? 뭐, 상관없겠지. 힐름은 넓으니까.
“물론이죠. 전 한 가지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려 했거든요. 하늘의 축복, 때로는 저주. 레인 폴.”
손에서 나온 빛이 하늘로 올라가고도 아무 일 없자 망혼은 입가에 잔뜩 비웃음을 띠운 채 뭔가 할 말이 있는지 다가왔고 난 무슨 말을 할지 팔짱끼고 들어 보기로 했다
“이런 이런, 처음부터 사실대로 말하셨으면 이해했을 텐데 구차하게 변명까지 하시다니 정말 실망입니다. 마침 동영상까지 찍었는데 그 열성적인 팬들이 보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
“비?!”
때마침 마법에 의해 생겨난 먹구름에서 비가 한 방울씩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고 망혼의 표정이 구겨진 종지 조각처럼 일그러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 정도면 적들이 받는 상승효과도 조금은 줄어들겠죠. 이제 갑시다.”
그렇게 뒤쳐진 망혼은 후방을 맡게 되었고 본격적인 화탑 정벌이 시작되었다.
“소환, 도루루 X 3.”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물고기 세 마리가 양 측면과 후방에 하나씩 자리를 잡았다. 이게 물의 중급 정령인가?
“불 속성 위주로 사용해서 물의 정령은 중급까지가 최곱니다. 방패막이 정도는 되겠죠.”
몸놀림이 둔한 우릴 지켜줄 정령들이 나타나자 왠지 마음이 놓이는 것 같았다. 저 기사들이 몸 바쳐 보호해 줄 리는 만무했으니까. 탑은 모두 다섯 개의 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첫 번째 층은 하급정령마저도 아주 가끔 보이는 정도의 길 찾기 수준이었고 2층은 그나마 꽤 많은 숫자의 하급 정령이 돌아다녔다.
“……여기…… 인간…… 올 수 없다…… 죽어라…….”
하급 정령인 주제에 제법 말을 잘했다. 하지만 죽으란다고 죽어줄 만한 위인은 존재하지 않았기에 다음 상황은 학살로 이어졌고 정령들이라 그런지 아이템하나 내뱉지 않으며 사라져갔다.
“이거 원, 싱거워서. 이딴 것들이 강해져 봤자 인데 뭘 그렇게 두려워하는지…….”
망혼의 저 소리는 분명 나보고 들으라는 것이었다. 이젠 대 놓고 빈정거리시겠다?
“겨우 하급 정령 몇 죽이고 강약을 운운하다니……. 마스터도 레벨 60이하의 정령술사와 싸워 이기면 기쁜가 보지요? 생색내는 걸 보니.”
중급 정령 소환 가능 레벨은 61, 즉 이놈들을 잡았다는 건 60이하의 정령술사와 싸워 이긴 것과 비슷한 일인 것이다. 아니, 정령술사라면 좀 더 다양한 공격 패턴을 가지고 있을 테니 그보다도 못한 건가?
“저런 애송이랑 같이 평가하지 말라고. 마스터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니까.”
“뭐야!!”
에크만이 던진 한 마디에 망혼이 또다시 발끈했고 서로를 노려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만두지 못해!!”
“하지만 형님…….”
“네가 어린애냐!! 그런 것 하나 참지 못하고 일일이 반응하게. 에크만님도 참으시지요. 이 녀석은 제가 잘 가르쳐 놓겠습니다.”
“그렇게 까지 말한다면야…….”
화가 나서 돌아가 버린 기사 이외에 무이파란 기사하고도 아는 사인지 망혼은 ‘형님’이란 단어를 사용했고 그는 호통을 치며 다그쳤다. 망혼이 야단맞는 동안 저 멀리에서 살라만다가 기웃거리는 것을 발견해 도루루로 해치웠는데, 멀리서나 몇 마리씩 보일 뿐, 우리 주변에 리젠되는 녀석들은 없었다.
“리젠 속도가 상당히 느리군. 올라갑시다.”
아직도 어린애처럼 야단맞고 있던 망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고 무이파는 뭔가 아쉬운 듯 썩 좋은 표정을 짓지 못했다.
“너, 이따가 보자.”
나중에 잔소리를 더 들어야 했지만 일단 지금 끝났다는 게 중요한 듯 망혼은 자신의 위치도 망각한 채 앞으로 오다가 결국 한 대 맞았다.
“……여기…… 인간…….”
“니 맘 다 아니까 1절만 하자고.”
중급 정령 카사 역시 같은 말을 내뱉었고 두말 할 것 없이 전투에 들어갔다. 살라만다완 급이 다르다는 걸 증명하듯 놈들은 이따금씩 파이어 볼과 파이어 애로우를 날려댔고 그 정도는 스펠 없이 사용 가능했기에 상쇄해가며 상황을 관전했다. 강해진 카사와 약해진 도루루가 1대1로 붙으면 질 것이 뻔했으므로 프라피룬은 세 마리가 한 마리를 공격하게 조종해댔고 오래지 않아 3층도 정리되었다.
“여기도 리젠이 느리군. 전체적으로 그런 건가?”
수가 그렇게 많지는 않겠지만 상급 정령은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기에 한숨 돌리고 올라가기로 했는데, 쉬는 동안 2층과 마찬가지로 멀리서나 한두 마리 나타날 뿐, 우리 주위에서 리젠은 일어나지 않았다.
“소환, 도루루.”
멀리 떨어져있는 카사를 상대하다가 도루루 한 마리가 소멸되었기에 올라가기 전 다시 보충시켰다. 세 마리가 힘을 합쳐봐야 엑젝터 한 마리나 잡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올라가자마자 기습하도록 하죠. 검강. 셋 세겠습니다. 하나, 둘, 셋!!”
올라가기 전 무이파가 검강을 끌어올리며 기습을 제안했고 모두 그에 동의했다. 카운트에 따라 뛰어 올라가자 이번에도 역시나 엑젝터는 아랫것들과 같은 대사를 읊어댔고 그 사이 검강을 날려 큰 데미지를 입혔다. 이것들…… 바보 아냐?
“도루루, 방어 태세.”
어차피 덤벼봐야 엑젝터의 상대는 되지 못한다는 걸 아는지 프라피룬은 도루루에게 방어를 명했고 세 마리의 물고기는 우리 주위에 서서 기사들이 피할 때마다 날아오는 마법들을 힘겹게 막아냈다.
“큭.”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서 앞 뿐 아니라 뒤, 옆에서 날아오는 마법들까지 신경 쓰며 엑젝터를 상대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았는지 꽉 다문 입에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기습이 아니었으면 이쪽도 적지 않은 타격을 받았겠군.
“하아, 하아….”
간신히 엑젝터 무리를 해치웠지만 기사들의 몰골도 정상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그을린 자국에 폼으로 둘러쓴 망토도 내구력이 다했는지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 있었고 고른 숨을 내쉬지 못했다.
“호오, 역시 누구 말대로 마.스.터.들이라 보조 없이 잘 싸우시는군요.”
망혼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고 무이파는 그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봤다. 그들이 가시방석 같은 자리에서 쉬는 동안 에크만과 알테어는 킬킬거리며 저 멀리서 끌고 온 엑젝터 한 마리를 이리저리 데리고 놀았고 다른 이들은 보조 마법을 다시 건다던가, 마나를 회복시키고 있었다.
“이제 가죠. 이번에도 기습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얼음의 여왕처럼 혼자여야 할 텐데…….”
놈이 혼자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기에 잔뜩 긴장한 채 한 걸음씩 발을 떼었다. 열 계단, 아홉 계단, 여덟 계단……. 이번엔 후방에 있던 망혼도 앞쪽으로 이동해 자리를 잡았고 카운트에 맞춰 뛰어 올랐다.
“……여기…….”
안타깝게도 5층에는 이프리트 혼자 있지 않았다. 다섯 마리의 살라만다와 세 마리의 카사, 두 마리의 엑젝터. 그리고…… 이프리트!! 거만한 왕처럼 왕좌에 앉아있는 이프리트의 뒤로 두 마리의 엑젝터가 근위병처럼 서있었고 그보다 5m쯤 앞에 카사 세 마리, 계단 주위에 살라만다가 다섯 마리 기웃거리고 있었는데 기습한 쪽도 놀라는 바람에 살라만다 둘에 카사 셋, 엑젝터 하나를 소멸시키고 나머지 엑젝터 하나를 약화시키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녀의 부탁을 받은 자들인가? 그렇다면 살아 나갈 수 없다!!”
“치잇, 조금은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할 수 없지, 제대로 붙어보자!!”
기사들이 일제히 검강을 뿌리는 동안 프라피룬이 나머지 살라만타를 해치웠고 프리스트들도 열심히 주문을 외웠다. 결국…… 노는 건 마법사들뿐인가?
“클클클, 이따위 속도로 날 맞출 수 있을 것 같나!!”
“홀리!!”
이프리트가 빠른 속도로 검강을 벗어나자 그 데미지를 엑젝터가 고스란히 받으며 사라졌고 몸을 피한 녀석 역시 뒤이어 날아간 프리스트 최대, 최강의 공격 주문. 홀리에 몸이 노출되어 뒤로 밀려났다.
“크흑.”
안타깝게도 빗맞은 데다 놈이 방어까지 해버렸다. 거의 모든 신성력을 쏟아 붓는 홀리의 특성상 프리스트들은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고 분노 때문인지 이프리트의 몸이 더욱 크게 타올랐다.
“감히 인간 따위가!!!”
화르르륵-!
시동어도 외치지 않았는데 이프리트의 팔이 부풀어 오르며 6써클의 플레임 스트라이크가 튀어나왔다.
“저런!!”
너무 갑작스런 공격에 대응할 틈도 없거니와 내가 스펠 없이 쓸 수 있는 주문은 5써클까지였으므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 한 채 회색으로 물드는 모습을 봐야했다.
“그 인간이 너희 정령을 상급까지 부릴 수 있다는 걸 잊은 거냐!!”
이번엔 전사들이 넓게 포진해서 이프리트를 덮쳐갔다. 아무리 빠른 속도를 가졌어도 피하는 건 불가능. 그런 위험한 순간에 놈은 오히려 그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죽으려고 환장했구나!!!”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검을 움직여 놈의 목을 베려는 망혼. 이프리트는 멈추지 않고 일부러 목을 들이댔고 그는 쉽게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피해!!”
“커헉?”
망혼이 이프리트의 목을 정확히 베고 여유 부리는 순간 약간의 힘을 상실했을 뿐, 여전히 살아있던 이프리트는 뒤로 돌아 녀석과 근처에 있던 루핏의 목을 잡아 비틀며 태워버렸고 둘은 경악에 찬 눈빛으로 아웃됐다.
“멍청한 놈들, 정령에겐 크리티컬 히트가 안 터지는 것도 모르다니!!”
“너희도 곧 저들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헛소리!!”
일단 검강과 권강으로 거리를 벌려 놓고 자세를 가다듬었지만 딱히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권풍 연격, 백보신권.”
“안 돼!!”
그의 백보신권 사용을 막으려 했지만 너무 늦어버렸다. 내 예상이 맞는다면 아마…….
“큭큭, 고맙군. 이런 약한 바람은 내게 힘을 주지.”
“젠장, 엄청나게 강한 바람이 아닌 이상 놈이 더 크게 타오를 수 있는 재료가 될 뿐입니다.”
“두 놈이 뒈진 게 말짱 도루묵이군. 킥킥.”
알테어와 에크만은 죽어도 별 상관없다는 듯 도울 생각도 안하고 구석에서 관전하고 시시덕대고 있었다. 두 번째 직업 레벨이 낮아서 상관없다는 건가.
“폭강!!”
“강기 난사!!”
“슈팅 스타!!”
성수를 통해 약간의 신성력을 회복했는지 한 명 남은 프리스트까지 합세했다. 허나 그 정도로 메워질 만큼 적은 힘의 차이가 아니었고 되레 반격을 받아 조금씩 모두의 몸에 상처가 더해졌다.
“심심한데 우리도 같이 놀아볼까?”
“미친놈들.”
그들의 말투에서는 장난기가 진하게 묻어 나와 열심히 싸우는 다른 이들의 원망을 사기에 충분했다
“아이스 월, 블링크, 아이스 월, 블링크, 아이스 월…….”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레인 폴의 기운이 약해져 가는 이때, 불의 기운이 충만한 화탑에서 얼음 계열 마법을 쓰려면 평소보다 훨씬 많은 마나가 필요했지만 에크만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는 듯 이프리트의 주위를 빠르게 돌며 얼음의 벽으로 가둬버렸다.
“가소롭구나!!”
얼음 상자에 잘 포장된 장난감처럼 갇혀있던 이프리트는 주먹을 휘둘러 벽을 부쉈지만 겹겹이 둘러싸인 탓에 부서진 덩어리들이 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쳇.”
데미지 없이 귀찮기만 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분명 효과가 있었다. 그가 열심히 부숴대는 순간에도 얼음의 벽은 꾸준히 생성되었고 결국 부수기를 포기했는지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고 제자리에 멈춰 섰다.
“이것으로 내 움직임을 멈출 수 있지만 너희도 날 공격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잠시 여기서 힘을 회복해 지옥을 맛보여주마.”
“누가 공격을 못한다고? 보기에도 두려운 날카로운 얼음의 송곳, 아이스 오거.”
어느 새 벽 위로 올라가 이프리트를 내려다보던 알테어가 남은 공간의 대부분을 메울 정도로 커다란 얼음송곳을 쏘아내 그를 위협했다.
“크으…….”
“뭣들 해? 올라가서 한방 씩 날리지 않고.”
“아, 예!!”
역시 마스터란 건지 꽤 높은 벽임에도 불구하고 다들 간단히 벽 위로 올라섰다.
“권강.”
제일 먼저 도착한 권혼이 이프리트를 향해 권강을 뿜어냈다. 허나 자세가 불안정해 명중률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그 자신도 추락할 듯 휘청거렸고 그 틈을 타 이프리트의 벽 부수기가 다시 시작되었다.
“띄워줄 테니 갈겨버려. 단, 오래는 못 버틴다. 그대에게 부유의 힘을 부여하나니, 레비테이션!!”
“강기난사, 백수신권!!”
갑자기 떠오르며 불안정한 자세를 재빨리 제어한 권혼이 엄청난 양의 강기를 뿌려댔지만 이프리트는 영악하게 부서뜨린 벽의 일부분으로 방어하며 데미지를 최소화 시켰다.
“왜 그래?”
“마나가 없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나도 없어, 그냥 몸으로 때워!!”
권혼이 엉성한 자세로 떠있는 몸을 움직여 안전한 위치로 향하려 하자 알테어는 가차 없이 마법을 풀어버렸다.
“으아악!!”
“그대로 내려찍어!!!”
쿠웅-!
권혼의 오리하르콘 너클이 이프리트의 몸을 스치며 바닥을 강타했다. 어찌나 세게 쳤던지 바닥이 패인 것은 물론 그의 팔까지 떨림이 전해졌고 잠시 물러섰던 이프리트는 기회라 여겼는지 달려들었다.
“젠장.”
오른 팔이 저린지 왼팔로 감싸고 제자리에서 도약해 왼발 돌려차기를 시도하는 권혼. 달려오던 힘을 이기지 못한 이프리트를 정확히 가격했지만 그 역시 상당한 데미지를 입었다.
“큭, 비싼 돈 주고 산 미스릴 부츠도 소용이 없군.”
발목 정도에 맞았다면 괜찮았겠지만 이프리트가 너무 깊이 파고들었다. 종아리 부근에 화상을 입은 그는 점프해 도망 갈 수조차 없게 되었고 기사들의 견제를 무시하며 달려든 이프리트에게 죽임을 당했다.
“부유 마법은 사양입니다. 검강!!”
부유 마법의 최후를 지켜 본 기사들은 정확도가 떨어지더라도 벽 사이를 뛰어다니며 공격하는 쪽을 택했고 이프리트는 세 가닥의 검강을 여유 있게 피해가며 기회를 엿볼 수 있었다.
“걸렸군, 필라 오브 파이어.”
셋이 동시에 공중으로 떠오른 순간, 이프리트는 자신의 몸을 커다란 불기둥으로 만들며 그들을 태워버렸다.
“플레임 노바.”
뒤이어 펼쳐진 마법은 주위의 벽들을 녹여 버리고 우리에게까지 영향을 미쳐왔다.
“이런, 미친…….”
다행히 벽을 녹이느라 많이 약해진 불꽃, 위협적이긴 했지만 치명타를 입히기엔 많이 부족했다.
투두둑 하늘에서 까맣게 타버린 시체 세 구가 떨어져 내렸다. 하아, 이거 잘 익어 버렸군.
“이쯤 되면 끝까지 자리를 지킬 의무 따윈 없는 거겠지? 이크!”
다시금 날아온 내 몫의 파이어 볼을 피하고 주위를 살피니 알테어와 에크만, 프라피룬과 에, 그러니까…… 아무튼, 프리스트로 팀이 갈려져 있었다.
“그렇다면…… 블링크.”
“어?”
내가 자신들의 곁이 아닌 좀 더 뒤쪽으로 이동하자 프라피룬은 어리둥절해하며 뒤돌아 날 쳐다봤다.
“보호하는 마법의 장막, 실드.”
“리턴.”
“이스케이프.”
에크만은 실드를, 알테어는 리턴을 사용하는 콤비 플레이가 펴쳐 지고 나는 자신들의 뒤로 와 이탈의 망토를 사용하니 프라피룬은 더 이상하게 여기다가 뭔가 깨달았는지 급히 목을 돌려 앞을 쳐다봤다.
“플레임 스트라이크.”
“마, 막아.”
“리, 리턴!!”
좀 전보단 조금 약해진 기둥에서 두 개의 불덩이가 뿜어져 나왔다. 목표는 당연히 나뉜 두 개의 팀에 하나씩. 첫 번째 것은 에크만의 실드를 뒤흔들며 사라졌고 나머지 하나는…… 뒤늦게 도루루로 방어를 하려한 프라피룬과 곁에 있던 프리스트를 아웃 시켜버렸다. 물론 둘을 방패로 삼은 난 안전하게 탈출 할 수 있었고.
“여어∼.”
“병원으로 가죠. 기다리고 있을 텐데.”
“그러지.”
내가 살기 위해 둘을 이용했지만 죄책감 따윈 전혀 없다. 난 개죽음 당하고 명예 찾는 멍청이가 아니니까. 보기에도 초라한 병원으로 가자 죽었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고 그 중 둘은 나와 눈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혼자서라도 몸을 피할 거라 예고했을 텐데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그들도 날 쳐다봤다. 노려봤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지만.
“이제 무리라는 걸 알았으니 방법을 바꿔야겠죠? 수를 채우는 게 가장 나을 듯싶습니다만.”
“리젠 속도가 너무 느리던데 마법진을 부수는 편이 더 빠르지 않을까요?”
“그건 무리야. 빠져나오기 전에 살라만다 한 마리가 왕좌 뒤에서 기어 나오던걸.”
“그게 무슨 상관이……?”
알테어의 발언에 모두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하니 눈만 껌벅거리자 그가 답답했는지 설명해 줬다
“확실치는 않지만, 만일 정령들의 리젠 장소가 마법진이라면 무리라고!!!”
“아!!”
‘웬일로 저 인간이 정상적인 생각을 다 하나.’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지만 넘어가기로 하고. 그의 말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다. 그의 말처럼 확실치는 않지만 만일 예상이 맞는다면 퀘스트 클리어에 실패할 가능성도 있는 거니까. 맞는다고 가설을 잡을 시, 마법진을 부수면 그 층에서는 정령을 잡을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일단 클리어 방법 한 가지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5층의 마법진 파괴에 실패 한다면? 이프리트를 죽이지 못한 다면? 이벤트는 불의 정령 측 승리로 끝이 날 것이고 제작사가 별도의 이벤트를 만들어 조치를 취하기 전까진 페널티를 받으며 지내야 한다. 게다가 이 미친 작자들은…… 진짜로 섬을 없애 버릴지 모른다.
“일리가 있군요. 먼저 1층이나 2층에서 확인해보고 결정하는 게 좋겠습니다.”
“포션 소모도 별로 없었으니 바로 움직이죠.”
우리는 탑에 도착하자마자 2층을 쓸고 정령이 나타나는 쪽을 따라 이동해 나갔다. 그들을 따라가자 나온 건 붉게 빛나는 마법진, 불행히도 예상이 맞아버린 것이다.
“리젠 장소를 점령하고 점수를 쌓아 가는 게 최선일 듯싶군요. 한동안 수고들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상급 정령이 나오는 4층은 기사들과 레벨이 떨어진 프리스트, 정령술사가 맡았고 3층은 마법사들이, 2층과 1층은 나머지 기사들과 격투가가 나누어 맡았다. 그렇게 일주일, 도중에 지겨움을 못이긴 알테어, 에크만이 한번 탑을 뛰쳐나가 놀다오는 바람에 죽음의 고비를 넘기긴 했지만 착실히 점수를 쌓아가 3천 점을 모두 채울 수 있었다.
“하아……. 끝난 건가?”
3천 점이 채워지는 순간 마법진이 희미해지고 정령들이 모두 사라졌다. 그리고 떠오르는 공지.
[공지]
[화탑 정벌 퀘스트가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다시 불의 힘은 약해졌고 ‘사막화’ 현상도 끝났습니다. 이제 버려진 화탑에는 새로운 주인이 생겨날 것입니다. 탑 안에 계신 분들은 5분 뒤 탑에서 자동으로 튕겨나가게 되니 미리 이동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운영자는 이곳에 몬스터를 채워 넣기 위해서인지 미리 밖으로 이동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자동으로 옮겨준다는데 돈 아깝게 스크롤을 사용할 리가 없잖아?
“스테이터스 창 오픈.”
레벨은 2나 상승한 95!! 프라피룬과 합의 하에 자리를 바꿔 상급정령을 다수 잡은 결과이다.
“응?”
갈수록 희미해지던 마법진이 완전히 사라지며 그 자리에 붉은 깃털 하나를 남겼다. 한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하다?
“확인.”
인벤토리를 뒤적거려 확인 스크롤 하나를 꺼내 사용해보자 이 깃털이 낯익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피닉스의 꼬리. 불사조 피닉스의 깃털로, 대상 1인을 완벽히 살려낼 수 있다. 경험치 손실 없음.
“심봤다아!!!”
피슝-.
피닉스의 꼬리를 손에 들고 만세 부르는 자세에서 튕겨져 나오자 새로운 사냥터가 될 화탑에 가려고 모인 사람들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아, 하, 하…….”
이미 들켰겠지만 피닉스의 꼬리로 얼굴을 가리며 재빨리 그곳을 빠져나왔다. 한참을 뛰다보니 권혼 등이 모여 탑에서 얻은 듯한 붉은 색 아이템들을 물물교환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이것으로 오케이.”
들고 있던 검을 넘겨주고 창을 받은 알테어는 만족스러운 듯 창을 쓰다듬으며 실실거렸다. 두 번째 직업이 창 계열 기산가 보군. 창 계열은 선택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텐데?
“이제 진짜 보수를 받으러 갑시다.”
역시 마스터가 많다보니 얼음의 동굴 공략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나, 최상급 아이스 골렘이라는 강력한 문지기는 단 일곱에게만 출입을 허용했고 나머지 인물들은 그의 무시무시한 힘에 쫓겨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오셨군요.”
왕좌에 앉아있던 여왕은 우릴 보자 벌떡 일어나 감사의 말을 건넸다.
“인사는 됐고, 약속했던 보수나 달라고.”
“그러죠.”
그녀는 왕좌의 뒤쪽 얼음 기둥으로 가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왔다. 검 두 자루와 마법서 두 권, 너클 하나에 반지, 로브 하나 씩. 모두 두 번째 직업은 염두에 두지 않은 본 클래스 용 아이템들이었다.
“난 창이 더 필요한데…….”
한 클래스를 마스터하고 다른 직업을 키울 때는 솔로 플레이를 할 시 일반의 1.5배, 파티 플레이를 할 시 2배의 경험치를 얻어야 하므로 알테어의 투덜거림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마스터가 아닌 자들은 달랐지만 마스터들의 낯빛이 썩 좋지 못한 걸 보아 같은 생각인 듯. 하지만 여왕은 생글생글 웃으며(그래봐야 얼음이라 자연스럽지 못했다.) 강제 이동 시켜 버렸다.
“게이트?”
보수로 받은 마법서의 이름이었다. 익혀지긴 하되, 사용을 하려해도 발동이 되지 않는 마법. 골머리를 싸매고 있을 때 해답을 제시해 준 것은 뜻밖에도 에크만이었다.
“머리 싸매고 있어봤자 넌 아직 못써. 마스터만의 마법이랄까?”
“그게 무슨…….”
“대충 이런 거지. 공간의 흐름을 따라 내가 원하는 곳으로, 워프.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함께, 게이트.”
워프라 하면 매스 텔레포트와 같은 마법이었다. 그런데 거기다 더블스펠로 게이트를 사용하니 타원형의 파란색 게이트가 형성되었고 그곳을 통해 여럿이 이동 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저쪽으로 넘어 간 뒤 다시 돌아 올 수 있다니!! 놀랍기도 했지만 이걸 알려주는 그의 진의도 궁금해졌다
“어째서 내게 이걸 알려주는 겁니까?”
“그야 한 달 후에 이것에만 매달려 있다가 졌다는 말을 듣기 싫어서지. 그럼 한 달 후에 내가 가지러 갈 때까지 증표나 잘 보관해두라고!!”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아직 닫히지 않은 게이트를 통해 사라져버렸고 나도 가벼운 마음으로 길드 집에 돌아갈 수 있었다.
“리턴.”
하얀 빛 무리에 휩싸여 낯익은 벽을 마주하자 편안한 느낌이 들며 퀘스트로 인한 피로가 가시는 듯했다.
“나, 다녀왔어.”
“오셨어요. 저, 오빠…….”
“응?”
꼭 누가 있을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마침 근처에 있던 린이 답했다. 그런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네?
“아니에요…….”
“싱겁기는. 할 말 없으면 난 잠깐 가서 눈 좀 붙이고 와야겠다. 며칠간 고생을 좀 했더니 피곤하네.”
“네, 그러세요.”
“로그아웃.”
눈앞이 흐릿해지며 본래의 세계로 돌아왔으나 그걸 느끼기도 전에 잠의 세계로 또다시 여행을 떠나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