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쿠데타 (10/43)

쿠데타

“으음, 몇 시지?”

창밖이 어둑한 걸로 보아 꽤 오래 잔 듯했다. 시계의 시침이 11을 가리키고 있으니 대충 8시간쯤 잔 셈. 지그시 느껴지는 두통에 눈살을 찌푸리며 냉장고로 가 물을 마신 뒤 오랜만에 컴퓨터를 켰다. 연재 중단 선언은 한 지 오래라 메일에 있는 것들은 전부 광고 성 문구들. 고개를 젓고 힐름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공지라고 떠있는 것들도 뻔한 얘기들이라 별 흥미를 끌지 못했고 BBS(게시판)에 접속해 사람들의 들어보기로 했다.

“이거, 악당이 되어 버렸군.”

글을 올린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붉은 태양의 대지라는 시크릿 이벤트를 발동시켜 모두에게 피해를 준 우리는 악당이고, 사냥을 포기해가며 섬을 지키려한 더 매지션 길드는 영웅이라는 뭐 그런 것이었다. 그나마 더 매지션 길드 측에서 옹호하는 글을 올려 나는 비난을 덜 받았지만.(나에 대해 적으면 받을 팬클럽의 무수한 댓글을 두려워한 것이다.)

“새로운 정의의 길드 출현이란 건가?”

비록 며칠간 섬에 묶여 있었지만 이 정도 명성을 얻었으니 길드 자체로 보면 그렇게 나쁜 보상이 아니었다. 아니, 이것으로 세력과 영향력이 더 커질 테니 좋은 건가? 그래봐야 나하곤 별 상관없는 얘기지만.

“접속. longway ******.”

“마침 잘 왔다. 이리 좀 와봐.”

접속하자마자 내 손을 잡아끌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아론. 그곳엔 중무장한 병사 셋이 앉아 있었다. 난 잘못 한 적 없는데?

“콜로니스트님 되십니까?”

“예, 그런데 무슨 일이시죠?”

“저희랑 잠깐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

“크로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

크로반이라면 오크 대 침공 이벤트 때 병사를 빌릴 수 있도록 나와 협상을 한 녀석이다. 설마, 벌써 때가 되었단 소린가? 하지만 아직 난…….

“크로반이 누구야?”

“갔다 와서 말해 줄게.”

굳은 표정으로 세 병사를 따라 걸어갔다. 도착한 곳은 성의 정문이 아닌 조그만 비밀통로. 방향감각을 잃게 하려는 것인지 미로 같은 길을 빙빙 돌더니 탁자와 의자 두 개만 놓여 있는 방으로 인도했다.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는 크로반. 그의 찢어질 듯 올라간 입 꼬리에 난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어서 앉으시오.”

“벌써…… ‘때’가 된 것입니까?”

“그렇소.”

“전 아직 조건에 충족되지 못할 텐데요?”

“조건은 이미 충족되었소. 그대는 마법사 ‘최강자’가 아니오?”

“큭, 그렇다면 언제 시작하실 겁니까?”

“오늘 저녁. 오래 끌어봐야 정보만 새어나갈 뿐이니까. 자세한 계획은 따로 사람을 보내 알려드리리다. 그럼 이만.”

그는 내 의견 따윈 묻지도 않고 뒤돌아 나가버렸다. 후우, 미치겠군.

“이곳에선 마법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데려다 드리지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이끄는 대로 몸을 맡기고 이번 일에 대해 고민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으로 들어오자 내가 병사들을 따라 갔다는 말을 들은 건지 전원이 모여 있었고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질문이 쏟아져 나왔다.

“형, 크로반이 누구에요?”

“어디 갔다 온 거예요?”

“또 무슨 사고를 친 거야?”

“다들 할 얘기가 있으니까 잠깐 모여 봐.”

안 그래도 모두 모아서 의견을 물어야 했는데 수고를 덜게 되었다. 심각하게 말하자 장난치는 사람도 없었고 모두 내 입을 주시하며 무슨 말이 나올지 걱정 반, 기대감 반을 가졌다.

“후우, 먼저 크로반이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하지. 그는 왕을 마음대로 주무르는 간신이야. 저번 오크 대 침공 때 내가 방패 병 지원 받아온 것 기억나지? 그때 안 된다고 하는 왕을 설득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이 놈이야. 대신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지.”

“조건?”

“내가 마법사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를 때 자신의 계획을 도우라는 그런 내용이었지. 사설이 좀 길긴 했지만 요약하면 그런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난 최고의 자리라는 게 마스터에 오르는 것이라 생각했어. 내가 마스터가 될 거라 생각지도 못했었고 된다 해도 몇 년은 걸릴 테니 아무 생각 없이 오케이 해버렸지. 그런데 듀얼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함으로서 마법사 ‘최강자’가 되 버렸고 그의 조건을 충족시킨 셈이 된 거야.”

“그래서 그가 널 불러다가 약속을 지키라고 했다는 거야?”

“맞아.”

“이렇게 심각하다는 것은 그 약속이란 게 터무니없을 정도로 어려운 거란 소리겠고?”

“반은 맞아. 터무니없을지 아닐지는 모르지만 위험 부담이 큰일임에는 틀림없어.”

“그럼 걱정할 것 없네. 까짓 거 정 안 되면 한번 죽어주면 되는 거잖아?”

“그게 그렇지가 않아. 잘 못하면 힐름 전체에 현상금이 걸리고 캐릭터를 지울 때까지 도망 다녀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거든.”

“신하가 꾸미는 일 중에 그럴만한 것이라면, 설마…….”

“쿠데타?!”

내가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모두들 얼굴에 미세한 경련까지 일으키며 경악했다.

“꼭 하지 않아도 되니까 안심해. 나한테도 생각이 있으니까. 잠깐 나갔다 올 테니 의견을 모아줄래? 한다면 오늘밤에 일을 벌여야 해서 시간이 없거든.”

“그래, 다녀와. 그 동안 우리끼리 상의해 볼 테니까.”

철컥 탁 밖으로 나와 문을 닫자 안에서 조그만 소리들이 새어나왔다.

“형, 이건 너무 위험해요. 실패하면 현상 수배라니……. 콜 형한테 생각이 있다니까 믿고 포기해요.”

“그럴까……?”

실패하면 캐릭터를 삭제할 때까지 도망 다녀야 한다는 부담이 너무 컸던 것일까? 모두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섞인 걸 들으며 씁쓸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서 오세요, 연금술사 길드입니다.”

“폭발 포션 20개랑 독 포션 10개.”

순간 웃고 있던 점원의 얼굴이 굳었다 펴지며 말투가 퉁명스럽게 변했다.

“그런 건 취급하지 않습니다.”

“5개, 3개씩은 상급. 나머진 중급으로. 15골드 주지.”

“……따라오시죠.”

상급은 개당 1골드, 중급은 5개에 1골드씩이니 그들로선 2골드 정도 이득을 보는 것이다. 잠시 암산을 마친 점원(유저)은 옆에 있는 점원(NPC)에게 가게를 맡기고 뒤쪽 문으로 날 이끌었다.

“중급은 다행히 남은 게 있습니다만 상급은 새로 만들려면 시간이 좀 걸립니다. 실패 확률도 높고…….”

피식.

두 종류의 상급 포션이 없을 리 없다. 지금 그가 중급 포션을 꺼내고 있는 항아리 옆 상자에도 10개 정도는 쌓여있겠지

“18골드 주지.”

싱긋.

내 예상이 맞았는지 그는 깜박했다는 듯 손바닥으로 이마를 탁 소리 나게 치며 옆의 상자에서 몇 개의 포션을 꺼냈다.

“아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몇 개 만들어 뒀죠. 여기 있습니다.”

“굶어 죽진 않겠군.”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는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답했다. 상인 기질이 있는 놈이군.

“후, 한 바퀴만 더 돌고 돌아가 볼까?”

이미 상당한 시간이 지났지만 조금이라도 생각할 시간을 더 주고 싶었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니까.

“후우…….”

철컥!

심호흡을 한 번하고 문을 열자 기다린 건지 근처에 있던 린이 내 팔을 잡고 모두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작전 세울 시간도 빠듯한데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닌 거야? 빨리 앉아!!”

“다들……?”

“까짓 거, 멋들어지게 성공해주면 될 거 아니야? 저 놈이 편지 가져왔다니까 읽어보고 우리가 할 일부터 설명해.”

한쪽 구석에 서있던 병사가 내게 다가와 한 통의 편지를 전했다. 중요한 것이라고 표시하듯 밀봉된 편지, 아마도 크로반의 지시겠지.

[밤 10시, 최대한 시선을 끌며 성문으로 쳐들어 갈 것. 이후 뚫든 버티든 자유, 퇴각은 용납되지 않음.]

“……이라는데?”

“미끼가 되라는 건가? 수도쯤 되면 경비 수가 장난 아닐 텐데. 게다가 성문이란 것도 쉽게 부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고…….”

“성문이라면 ‘사부님’의 마법과 제 ‘골렘’으로 어떻게 해 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사부님’에 ‘골렘’? 서, 설마…… 너, 왜 여기 있는 거냐?”

“응? 니 제자 아니었어?”

말은 그렇게 해도 거트 형은 저 녀석이 차고 있는 팔찌, 그러니까 ‘증표’ 때문에 받아들인 것일 게 뻔하다. 안 그래도 가끔씩 강한 길드 원을 받아들여 길드를 키우고 싶어 했는데 한 클래스의 ‘최강자’가 내 제자를 자처하며 찾아왔으니 얼씨구나 했겠지. 이렇게 되 이상 어쩔 수 없군.

“내가 제자 같은 거 키울 시간이 어디 있어요. 얘기를 들어 버렸으니 게임에서 살인멸구라는 게 가능할 리 없고……. 어쩔 수 없이 한 배를 탔군.”

‘살인멸구’라는 부분에서 나키르의 몸이 움찔거렸지만 곧이어 나온 한 배를 탔다는 소리에 바보처럼 실실거렸다. 이 얘기가 적대적인 상대(예를 들면 엘시노)의 귀에 들어가면 골치 아파질게 뻔하니 넘어가는 수밖에.

“흠흠,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우리가 세울 수 있는 작전은 하나 뿐인 것 같다. 작전은 가서 알려줄 테니 각자 철저하게 준비를 마쳐라, 해산!!”

거트 형이 길드 장 다운 근엄한 목소리로 해산을 외치자 모두 뿔뿔이 흩어져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다짜고짜 아론이 심각한 얼굴로 내 등을 떠밀며 집밖으로 나갔다.

“만약 하지 말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으면 어떻게 하려고 했냐?”

“그야…….”

“거짓말 할 생각은 하지 마. 네 말처럼 크로반이라는 놈이 왕을 마음대로 주무른다면 이번 약속을 안 지키는 것만으로도 쫓기는 신세가 될 수 있다는 것쯤은 나도 알고 있으니까.”

맞는 말이다. 쿠데타까지 계획하는 놈이 핑계거리 하나 만들어서 사람 죄인 만드는 것을 못하겠는가?

“그래, 네 말처럼 이 약속은 안 지킬 수가 없어. 만일 하지 말자는 쪽으로 의견이 모이면 거트 형을 구슬려서 길드 장 자리를 넘겨받고 모두 추방시키려고 했지. 나 혼자 하더라도 일단은 길드 차원에서 돕는 게 되니까 그 쪽도 뭐라 하진 못할 거잖아? 그리고 시선 끄는 정도라면 몇 번 죽더라도 나 혼자 충분히 할 수 있…….”

퍽-!

갑작스레 날아온 주먹에 상체가 크게 휘청거렸다. 큭, 격투가 레벨이 없어도 힘이 높으니 엄청 아프군.

“너 혼자 그렇게 다 뒤집어쓰고 영웅 행세하면 누가 고마워 할 줄 알았냐?! 왜 예전처럼 모든 걸 혼자 해결하려고 해. 지금 네 곁엔 네가 토끼가 브레스 쏜다 말해도 곧이곧대로 믿어 줄 사람들이 있잖아!!”

아론은 그 말을 끝으로 씩씩거리며 들어가 버렸다. 신뢰, 혼자가 아니라는 것…… 잊고 있었다. 이 게임을 하면서 제 멋대로 날뛰던 내 뒤에는 항상 묵묵히 따라준 길드 원들이 있었다는 걸.

“혼자가…… 아니었던가? 큭큭큭…….”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어 속 시원하게 광소를 터트려 버렸다. 그 탓에 시끄럽다고 욕먹은 건…… 그리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이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어린 아이의 손톱만큼 가느다란 초승달만이 세상에 은은한 빛을 뿌려주고 있었다. 밤낮 없이 시끄러운 마을과는 달리 풀벌레 우는 소리마저 뚜렷이 들리는 내성 입구에선 졸음이 가득한 눈을 한 병사 둘이 하품을 하며 교대를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과 가장 가까운 골목에는 그들의 행동을 주시하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었다.

쿠구구구구-.

굳게 닫혔던 내성 문이 안쪽으로 활짝 열리며 병사 둘이 걸어 나왔다.

“난 좀 잘 테니까, 수고들…… 헉, 뒤, 뒤에!!”

교대 확인서 쯤 되 보이는 종이에 기록을 해 넘겨주고 들어가려던 병사 A가 손가락으로 방금 교대한 병사 C 의 등 뒤를 가리켰다.

“이 사람이 장난도, 뒤에 뭐가 있다고…… 컥!”

“침입자다!! 성문을 닫아라!!!”

도망가려던 병사 A, B도 곧 병사 C, D를 따라갔지만 그의 목소리는 멀리까지 퍼져 성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소환, 파이어 골렘 X 2.”

인비저빌리티라는 고급의 투명화 마법으로 하이딩한 록의 옆에 숨어있던 소환술사가 모습을 드러내며 성문이 닫히는 것을 막았다. 온몸이 불타는 골렘의 손이 닿았으니 성문도 불타야 마땅하건만 보호 마법이라도 걸려있다는 건지 손이 닿은 부분만 조금 그을리기만 했고 성문을 잡아당기느라 따로 방어할 여력이 없는 골렘의 몸이 조금씩 부서지자 골목에 숨어있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힘으로 성문을 여는 걸 포기했다.

“작전은 하나다. 죽지 말고 난장판으로 만들어!!”

“멸망으로 이끄는 홍염의 불꽃, 그랜드 파이어.”

“멸망으로 이끄는 홍염의 불꽃, 그랜드 파이어.”

신호에 맞춰 골렘들이 피하자 성문에 두 개의 불덩이가 작열했다. 폭발이 끝나자 절구질하듯이 골렘들의 반죽(?)이 시작됐고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성문에 구멍이 뚫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콰직!

몇 군데 더 구멍이 생기고 오래된 걸레 조각이 되어 버린 성문은 힘없이 이방인의 출입을 허용했다. 성문 안에 가득 자리 잡은 병사와 기사들. 수에서만 우리의 네 배는 됨직 했다.

“잡것들, 많이도 밀려왔군.”

“라이트닝 인챈트, 라이트닝 애로우.”

“타겟 온, 풍!!”

그러고 보니 린이 새로 익힌 기술은 처음 본다. 그녀의 손에서 떠나 화살은 제각기 다른 방향으로 퍼지며 세 기사의 목을 노렸고 두 명의 목을 정확히 꿰뚫었다. 한데 손끝을 떠난 화살 주위에 희뿌연 무언가가 있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이었을까?

“또 우리 차례군.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내게 대항하는 자들은 모두 한줌의 재로 화할지니, 인페르노.”

81이상의 마법사라면 사용할 수 있는 9써클 마법이지만 지속적으로 소모되는 대량의 마나 때문에 91이상은 되어야 쓰기 시작한다는 인페르노. 얼마 전까지 나보다 레벨이 높던 드라이저는 금세 한계를 보이며 멈추고 마나 포션을 들이켰지만 90이상이 레벨 업하면 주어지는 추가 포인트의 대부분을 wisdom에 투자한 덕인지 내 마법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레벨 5차이가 이렇게 클 줄이야.

“깔끔하게 쓸었군.”

“이렇게 노린내가 심한데 깔끔하긴 뭐가 깔끔해. 우리가 제대로 보여주지.”

입구에 뭉쳐있던 적들은 사라졌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또 한 무더기의 병사가 쏟아져 나왔다. 수는 대략 20. 하지만 검기조차 쓰지 못하는 일개 병사들로는 시간도 끌 수 없었다.

“이 반역의 무리들, 우리 광휘의 기사단이 국왕 폐하를 대신해 너희를 처단하겠다!!”

이번엔 제법 그럴싸하게 기사단씩이나 되는 놈들이 앞을 막아섰다. 하지만 그래봐야 대부분이 검기가 고작, 검강 사용이 가능한 아론과 베르가 송사리들부터 잡고 협공하자 검강을 쓰는 기사단장도 얼마 버티지 못했다.

“이런, 제기랄…….”

안에서 돕기로 한 놈들은 어디서 퍼질러 자고 있는지 성안에 있는 병력이란 병력은 다 모인 것 같았다.

“지금…… 10시 맞지?”

“아니, 10시 20분. 이 개자식들은 왜 소식이 없어?!.”

“아무도 안 죽는 건 무릴 것 같다. 무조건 뚫고 들어가서 국왕새끼 모가지 따와!! 으아아아앗!!!!”

상황은 난전으로 이어졌다. 그들이 뭉쳐있는 덕에 아무데나 공격해도 피해를 입힐 수 있고 검기와 검강이 자주 날아오지 않는다는 이점이 있지만 그들을 전부 죽일 만큼의 마나는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한계인가?”

“포기하기엔 아직 일러요, 애로우 샤워.”

갑자기 린이 하늘을 향해 활을 쏴대며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방어가 없으니 당연히 몸에는 자잘한 상처들이 생겨났고 생명에 위협이 갈 정도로 HP가 떨어져 갈 무렵, 하늘에서 화살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으악!!”

희한하게 화살의 비는 우리 위에선 방향을 틀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고 적들에게는 근거리에서 직접 쏜 것과 같이 강하고 빠르게 꽂혔다.

“린!!”

대부분이 잔 상처였지만 그 수가 많아 위험한 지경이 된 린이 바닥에 쓰러져 숨을 몰아쉬자 아론이 황급히 달려가 보호했다.

“린, 먼저 돌아가.”

“회복하면 괜찮아요, 저도 도울게요.”

“거트 형이 널 치료해 줄 시간도 없고 포션으로 회복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그냥 가!!”

이미 드라이저, 세리, 카엘, 나키르가 아웃된 상태. 더 이상 버티는 건 무리기에 뚫고 들어가려 하는데 저런 상태의 린은 오히려 짐만 될 수 있었다. 린도 그걸 이해했는지 내가 벗어준 이탈의 망토를 두르며 시동어를 외쳤다

“네…… 이스케이프.”

“이제 뚫는다!! 못 따라오면 버리고 갈 거니까 알아서들 해!!!”

린에게 조금 심하게 대한 것 때문에 아론이 불만인 듯 했지만 그런 걸 달래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화살 비를 피하며 잔뜩 몸을 움츠리고 있는 기사, 병사들 사이를 뚫으며 달리고 달려 안쪽으로 들어가자 조금 다른 옷을 입은 병사들끼리 서로 공격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시간 끌 동안 조용히 안쪽에서 제거 작업을 하고 있던 건가? 약았군.”

“따지는 건 나중에 하고 일단 국왕이란 놈의 면상이나 봐야겠다.”

상황은 이미 혼전이라 옆에 누가 지나가는지, 무슨 말을 하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조심조심 사람들을 헤치고 도착한 국왕의 집무실. 국왕이란 작자는 왕좌 뒤에 숨어 근위병들과 기사들의 싸움을 관전하면서 눈을 이리저리 굴려 도망칠 구멍을 찾고 있었다.

“아론, 베르. 도와주고 와.”

“알았어. 자, 빨리 끝내고 돌아가자!!”

하나같이 검강을 내뿜는 근위병들에게 밀리는 감이 있던 기사들은 싸움에 난입한 아론과 베르에 힘입어 조금씩 우위를 점해갔다. 그러길 5분여, 아직 우세하긴 했지만 아론과 베르의 마나가 그리 오래 버텨줄 것 같지도 않았고 잘못하면 우릴 포위했었던 병사들이 올라 올 수 있었기 때문에 다른 수를 마련해야 했다.

“흐음?”

한 순간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아닌 국왕이었다. 근위병과 국왕……. 써먹을 수 있겠군.

“세르, 단검 아직 남았지?”

“뭐, 열댓 개 정도는…….”

“그럼 저 국왕을 향해 던져.”

“그래봐야 근위병들이 몸을 던져서라도 막을 텐데……?”

난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던지기를 계속 재촉할 뿐.

“그럼, 던집니다. 하앗!!”

세르의 손에서 날아가는 단검을 발견한 근위병 하나가 말 그대로 몸을 바쳐 막아냈다. 하지만 빈틈을 보이고 상처까지 입었으니 죽는 건 당연한 일. 힘들이지 않고 근위병 하나를 줄일 수 있었다.

“헤에?”

단검을 던지면 근위병이 개구리처럼 폴짝 뛰어 몸으로 막고, 대신 맞아 쓰러지거나 겨우 막아내면 기다리고 있던 기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고. 이 상황이 꽤 우습고 재밌었는지 세르는 연신 히죽거리면서 즐겼다. 남은 호위병은 고작 셋, 아론과 베르의 마나가 고갈되지만 않는다면 어렵지 않은 숫자였다.

“하지만…… 쉽게 쉽게 가는 게 좋겠지? 세르, 단검 하나만 줘봐.”

단검이 두 개 남은 상태에서 자신의 놀잇감을 빼앗긴다 생각했는지 조금 머뭇거렸지만 군말 없이 단검 하나를 내게 넘겨주었다.

“블링크.”

목적지는 국왕의 등 뒤. 걸어서 가려면 근위병의 견제 때문에 쉽지 않았겠지만 단번에 이동하니 그들도 막을 방법이 없었다. 아니, 아직까지 내가 국왕의 숨통을 쥐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살려달라고 외쳐.”

“케, 켁. 사람 살려!!!”

국왕은 내 요구를 착실히 이행하여 소리를 질렀고 그 덕에 호위병들은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시선을 빼앗긴 건 비단 그들뿐이 아니었지만 내 눈짓과 턱짓으로 아론과 베르는 각자 할 일을 해나갔다.

“크억.”

“이것으로 끝.”

각자 한 명씩의 목과 심장에 검을 찔러 넣고 남은 한 명이 돌아보는 순간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노려 공격하니 성공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가 없었다.

“훌륭하구만, 훌륭해. 내가 사람을 제대로 봤어.”

짝짝짝짝-.

조그만 박수 소리와 함께 기둥 뒤에서 크로반이 걸어 나왔다. 생각 같아선 저놈을 갈아 마시고 싶지만 참을 인자 세 개면 살인을 면한다 했으니…… 참자, 참아

“크, 크로반. 마침 잘 왔네. 어서 병사들을 이끌고 이 반역의 무리를 처단해…….”

“이런, 이런.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됐나보군. 지금 네가 지칭하는 그 반역의 무리를 조종한 게 바로 나다.”

“뭐, 뭣이? 어째서?!”

“당신처럼 우유부단하고 어리숙한 사람은 국왕이란 자리에 맞지 않아. 그래서 카리스마 넘치는 내가!! 그 자리를 대신 맡아주려는 것뿐이지. 어때, 고맙지 않나?”

“군주의 자질이 떨어지면 옆에서 보좌하며 그걸 메워야 할 신하가 반역이라니!!!”

“자꾸 반역, 반역하지 말라고. 예로부터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 하지 않았나? 그리고 원래의 군주는 실패하면 성군, 성공하면 폭군이 되는 것이지. 크하하하하하!!!”

맞는 말이고, 뭐라 하든 다 좋은데 시간을 너무 끄는 것 같았다. 아래의 병사, 기사들이 올라오면 다 끝난 상황이긴 해도 좀 골치 아파질 수 있기 때문에 그를 재촉했다.

“빨리 끝내시죠. 시간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뭐, 그러도록 하지.”

스릉-.

그는 옆에 있던 기사의 검을 뽑아들고 천천히 내게로 걸어왔다. 한데, 왕의 목 위에서 검을 높이 치켜들기만 할 뿐 내려치지는 않는 게 아닌가? 그가 그렇게 시간을 끌수록 병사들이 가까워져 오는 소리는 커져갔고 답답해진 나는 소리를 질렀다.

“시간이 없어!!!”

“아무리 그래도 예전에 모시던 국왕인데 차마 내 손으로 죽일 순 없군. 대신 부탁하네.”

위. 선. 자.

모두의 머릿속에 새겨진 글자이리라. 그렇게 말하면서도 손에 떨림 따위는 있지도 않았고 표정도 웃지는 않았지만 편안한 상태, 그것이었다.

“젠장 할.”

푹-!

손에 들고 있던 단검을 왕의 목에 깊이 박아 넣음과 동시에 크로반이 들고 있던 검으로 자신의 팔에 상처를 냈다. 이건 또 무슨 짓이야?!

“국왕 폐하!!!”

불행히도, 아래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는 상당수의 기사, 병사들이 밀고 올라왔다. 잠깐, 설마…….

“저들을 포위하라!! 저들이 폐하를 암살했다!!!”

설마라는 놈이 사람 여럿 잡았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싸우다 상처 입은 것처럼 연기하며 우리를 일의 주범으로 몰아 세우는 크로반, 아무리 A.I가 뛰어나다지만 NPC주제에 이래도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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