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거래의 3단계 (3/43)

거래의 3단계

“아!!”

갑자기 거트형이 뭔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췄다. 그러고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고 우리는 의아해 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정보 길드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

“…….”

우린 목적지만 알고 길은 몰랐던 것이다. 앞장서서 가기에 아는 줄 알았는데, 이거 낭패로군.

“할 수 없죠. 사람들한테 물어볼 수밖에.”

그렇게 우리는 흩어져서 사람들에게 정보 길드의 위치를 묻고 다녔다. 현재 존재하는 정보 길드는 총 두 곳, 이름은 꽤 알려졌지만 그들도 음지에서 활동하기 때문인지 위치를 안다는 사람은 쉽게 나오지 않았고, 간혹 아는 사람이 있어도 큰 금액을 요구하기 일쑤였다.

주려면 못 줄 것도 없지만 겨우 그런 걸로 돈을 뜯어내려는 인간들은 마음에 안 들어서 말이야. 뭐, 지금 가려는 정보 길드도 비슷한 걸로 먹고사는 건가?

“혹시 정보 길드를 찾지 않았소?”

“맞습니다만.”

“용건은? 아, 난 길드 사람이오.”

“정보를 팔고 싶어서요. 길드 장을 직접 만나야겠습니다.”

“길드 장은 아무나 만나주지 않소.”

“드래곤에 관한 정보인데도 말입니까?”

“!!”

슬슬 마스터 급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두 정보 길드에서 드래곤을 비롯한 고급 정보를 비싸게 사들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에 살짝 운을 띄웠다.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그 정보원은 얼굴이 굳어지며 주위를 살폈고, 다른 길드의 사람이 들을 새라 같이 갈 것을 재촉했다. 하지만 칼자루를 쥐고 있는 쪽은 이쪽, 나는 다른 일행들을 불러 모으며 시간을 끌었고 상대는 바짝 달아올랐다.

“자, 그럼 가죠.”

“어, 어서 이쪽으로.”

급한 와중에도 골목골목을 지나며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정보원. 꽤나 잘 훈련된 사람 같았다. 한참을 돌아 도착한 곳엔 길드 장은 아니어도 상당히 높은 직책으로 보이는 자들이 몇 명이나 나와 있었는데, 평범한 복장을 함으로써 신분을 들키지 않으려 했다.

어떻게 알아냈냐고? 주위에 있는 몇 명의 길드원이 움츠려든 모습을 보였거든. 마치 상사에게 찍히지 않으려고 조용히 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부하 직원처럼. 일단 담담한 척해서 가격을 낮추고 상대가 트집 잡을 때를 대비해 간부를 배치한 건가? 예상이 맞는다면 치밀하군.

“잘 오셨습니다. 일단 들어가시죠.”

그들이 우릴 이끈 곳은 식당. 식탁엔 본적 없는 요리들이 즐비해 있었다.

“길드 장을 만나고 싶은데?”

“곧 오실 겁니다. 드시면서 기다리시죠.”

“그럼 잘 먹겠…….”

게임이라도 맛은 느껴지기에 진작부터 군침을 흘리던 일행은 포크를 들고 음식을 집으려는 포즈를 취했다.

“잠깐.”

음식에 포크가 닿기 전, 간신히 포크의 움직임이 멈췄고 거트형은 왜 그러냐는 의미의 원망스런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흠흠, 눈빛이 부담스럽긴 하지만 할 건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겠지?

“이거, 공짜 맞는 겁니까?”

“무, 물론입니다.”

당황하면서도 뭔가 아쉽다는 표정을 짓는 간부들. 그냥 먹었으면 진짜로 나중에 음식비를 청구했을지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음식들을 먹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길드 장으로 보이는 인물이 금으로 수놓아진 화려한 옷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쳇, 음식도 제대로 못 먹게 하는군.

“드래곤에 관한 정보를 가지셨다구요?”

“물론, 레어의 정확한 위치까지. 원한다면 데려다 줄 수도 있어.”

드디어 협상 시작이군, 오면서 거래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았으니 실망시키면 안 되겠지?

“드래곤에 관한 다른 정보나 추가적인 건 없습니까?”

“있지, 동영상까지.”

“예를 들면?”

“여기, 정보 길드가 아닌가보지? 그럼 돌아가겠다.”

그 말을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리자 길드 장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날 말렸다. 명색이 정보 길드에서 정보를 거져 얻으려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했군요.”

“한번만 더 이렇게 나오면 다른 길드로 가겠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죠, 얼마를 원하십니까?”

“천 골드로 하지.”

천 골드라는 어마어마한 숫자에 상대는 물론 일행들마저 기겁을 했다. 하지만 이런 거대 길드라면 그 정돈 있겠지. 사람 수만 몇인데. 게다가 정보만 팔지는 않을 테고…….

“천 골드가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레어 주변에 상당한 몬스터가 있다. 레벨대도 다양하지. 사람도 없고 렙업에는 최적의 장소로 생각되는데, 보스 급 몬스터도 있으니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도 거기에 가지 않을 것을 약속하지.”

“보스 급 몬스터까지 있다니 끌리긴 하지만 천 골드는 너무 많군요. 600골드까진 드리겠습니다. 여섯이니 100골드씩 나눌 수 있고, 그 정도면 돈 걱정 없이 생활하실 수 있을 텐데요.”

“천 백 골드. 싫다면 다른 길드로 가겠다. 적어도 정보의 가치를 모르진 않을 테지.”

길드 장이 눈썹을 꿈틀거리며 손짓하자 어디선가 여섯 명의 어쌔신이 나타나 목에 칼을 겨누었다. 무력행사인가?

“듣자 듣자하니 저렙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군. 겨우 그 레벨로 우리에게 협박을 해? 당장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불어라., 그렇지 않으면 게임 접게 만들어주마. 정보 길드라고 정보만 모으는 걸로 생각하면 안 되지.”

“협박이 아니라 위협이지.”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나 본데, 위협은 이렇게 하는 거다.”

어쌔신들의 칼날이 좀 더 목에 밀착했다.

“후우, 역시 위협에선 무력행사가 최고인가? 레벨 다운이라는 강수가 있으니…….”

“그걸 이제 알다니 생각보다 멍청하군.”

“글쎄, 내 얘긴 아직 안 끝났어. 확실히 위협에는 무력행사가 최고야. 하지만 협박은 좀 다르지. 난 광장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촬영하고 있다. 이게 홈페이지에 오르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음지에서 활동을 해도 명색이 정보 길든데 신용이 생명 아니겠어? 그럼 여기서 문제, 신용을 잃은 정보 길드의 운명은 어떻게 될까요? 우리야 여기서 죽어봐야 경험치 한번 잃고 다른 길드 가서 안전 보장까지 요구하면 되니까 별 상관은 없어.”

두 개뿐인 정보 길드 중 한 곳이 신용을 잃게 되면 당연히 다른 쪽이 정보 및 의뢰를 독점할 테고, 그렇게 되면 신용을 잃은 쪽은 붕괴, 복수를 하려해도 세력이 사라져 불가능해질 게 뻔했다. 이제 결론은 하나.

“좋다, 거래하지.”

“천이백. 정보 길드의 장이 평정심을 잃다니, 그에 따른 벌이라 생각하십시오.”

또다시 백 골드를 올려 부르자 길드 장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게 하지. 내가 너무 경솔했군.”

그는 거래를 승낙함과 동시에 품속에서 큰 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600골드와 6미스릴이네. 그럼 천이백 골드짜리 정보를 들어볼까.”

미스릴 동전 하나는 100골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만 워낙 큰돈이라 가진 사람이 많지 않다는 희귀한 것이었다. 물론 100골드만 있다면 은행에서 바꿔주긴 하지만…….

“장소와 동영상 파일이 전부, 언어적인 정보는 거의 없습니다. 동영상에 다 포함 돼있으니 분석하시는 게 낫겠죠. 제 생각에는 홈페이지에 올리면 올해의 베스트까진 받을 수 있을 것도 같습니다만 어떻게 할지는 그쪽 마음일 테고, 위치는 저희 쪽에서 한 명이 직접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동영상은 메일로 보내야 할 텐데, 메일 주소가?”

“[email protected]”

“곧 보내드리죠. 그 장소로는 저 기사가 같이 갈 겁니다. 앞으로 저희 일행에 대한 어떠한 정보를 파는 일도, 공격하는 일도 없었으면 합니다.”

“그 정돈 들어주지.”

안내자로는 베르를 지목했다. 린이 갔다가 혹시라도 아웃되면 경험치 손실이 클 테고, 거트형은 우리 중 가장 연장자이니 가면 뭔가 꿀리는 것 같고, 내가 가기엔 드래곤이 다시 날뛸 위험이 있으니 그것도 안 되고……. 결국 세리, 베르, 드라이저뿐인데 그나마 베르가 제일 침착하니 적당하겠지.

“혀, 형.”

“드래곤한테 미움 받은 내가 가리? 그랬다간 이 거래도 없던 게 될 걸.”

“형, 그걸 말하면!!”

“뭐 어때, 어차피 귓말 해도 정보 길드에 독순술 쓰는 사람 하나가 없겠냐. 안 그렇습니까?”

“……여간 내기가 아니군. 거래 내용을 문서로 남기겠나?”

문서라…… 그것도 좋지.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아뇨, 그깟 종이 쪼가리보단 동영상이 더 믿을 만하죠.”

“큭큭, 내가 졌다. 나도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들어줄 텐가?”

“들어봐서요.”

“나중에 내가 한 가지 부탁을 하면 긍정적으로 고려해주게. 강요는 아니야.”

“좋습니다. 고려하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죠. 그럼 이번엔 제가 정보 길드에 정식으로 의뢰를 하겠습니다. 보수는 100골드.”

내가 100골드나 되는 거금을 선뜻 의뢰비로 내놓자 일행을 포함한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천이백 골드나 얻었는데 이 정돈 봐달라고.

“정보길드가 세워진 이래 100골드짜리 의뢰는 처음이군. 자기 돈 아니라고 인심 쓰는 거라면 좋겠지만 눈빛을 보아하니 쉬운 의뢰가 아니겠군.”

내 얼굴이 차갑게 굳자 길드 장도 약간 긴장했다. 자신을 상대하면서도 표정 한번 안 변했으니 긴장하는 게 당연한 건가?

“로즌 크랜츠. 그자에 대한 지속적인 정보의 제공입니다.”

“어쌔신 클레스 최고 레벨 유저를 말하는 건가? 어렵군…….”

이들로서도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잘못 건드렸다가 보복으로 게릴라전이라도 펼치면 막을 방도가 없을 테니까.

“미안하네. 이 의뢰는 받아들일 수 없군.”

“그럼 그자의 대략적인 위치와 이동 방향 같은 것도 안 되겠습니까?”

“그 정도라면…….”

“그거면 충분합니다. 어차피 맺힌 걸 푸는 건 저희 몫이니까요.”

주머니에서 1미스릴을 꺼내 탁자에 내놓고 뒤돌아 길드를 빠져나왔다. 내가 앞장서 나오자 베르를 제외한 4명도 조용히 따라왔고 광장으로 가 베르를 기다렸다.

“형, 갔다 왔어요.”

길드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일이 잘됐는지 입가에 미소를 띠우고. 드래곤은 다시 레어 안으로 돌아 갔나보군.

“뭐래?”

“그냥 ‘괜찮군.’이라는 말만하고 가보라던데요.”

“마음에 들었나본데? 자, 그럼 돈을 나눠야지. 의뢰비는 사적인 일이니까 내 몫에서 제할게.”

천이백이었으니까 200골드씩 주면 되는 건가? 음…… 역시 의뢰비로 100골드나 내는 게 아니었는데, 괜히 폼 잡는다고 무리했어.

“오빠, 그러지 말고 우리 길드 만들어요. 집도 하나 사구요.”

“길드? 하지만 길드석 사는데 100골드나 들잖아!!”

“에이, 천골드도 넘게 있는데 무슨 상관이에요. 솔직히 오빠가 거래했으면 100골드도 못 받았을 거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그래, 까짓 거 이참에 길드 하나 만들어보자.”

길드 하나 만드는데 100골드. 아무리 길드가 난립하지 못 하게 하려는 의도라지만 너무 큰 비용임에는 틀림없었다. 집도 작은 건 100골드가 안 되는데 말이야

“그럼 일을 나누자. 먼저 나랑 콜, 드라이저는 길드 석을 사러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집을 알아보는 거야. 크기는…… 큰 게 좋겠지?”

“그냥 중간 사이즈로 사. 너무 크면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될 테니까.”

게임 전체에서 개인 소유의 집은 몇 채 안 될 정도로 길드 이외에 집을 사는 사람이 적은데 대형 저택을 산다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다. 이목이 집중되다 보면 우리가 약하다는 것을 알 테고, 자연스레 PK대상 1순위에 뽑힐 테니까.

“그럼 집사고 귓 말 할게요. 사람 눈에 잘 안 띄는 곳이면 되죠?”

“그래, 이따 보자.”

그렇게 일행은 둘로 갈라졌다. 길드 석을 사는 곳은 전부터 거트형이 눈독들이던 터라 쉽게 찾을 수 있었고, 도착하자 먼저 온 손님이 NPC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길드 하나 만드는데 뭐가 이렇게 비싸!”

“손님, 이건 정해진 가격이라 저희도 어쩔 수 없습니다.”

“100골드가 뉘집 개 이름인줄 알아? 그 돈이면 작은 집이 두채고 수십 명이 장비를 맞출 수 있어!!”

“하지만 임의적인 가격의 변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척 보아하니 우리와 비슷한 레벨 정도의 사내가 막무가내로 엔피씨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물론 NPC는 눈 하나 꿈쩍 안 하지만.

“안 살 거면 잠시만 비켜 주시겠습니까? 시간이 많지 않아서요.”

“뭐야, 너흰.”

“저희도 길드 세우려고 온 사람들입니다만.”

“그래? 마침 잘 왔네. 글쎄 길드 설립 비용이 100골드라지 뭐야. 우리 같이 운영자한테 따지자.”

확실히 너무하다 싶을 정도이긴 하지만 고수들에게는 큰 무리가 아닐 테니 할 말 없어. 게다가 혼자 길드를 세우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글쎄요, 그래봐야 운영자가 들어 줄 것 같지 않은데 헛수고하고 싶진 않군요.”

“젠장. 그래, 알았다 알았어. 사면 될 것 아니야. 먼저 물건부터 보여줘.”

“자, 여기…….”

그는 포기하고 제 값에 사려는 척 하다가 길드석 문서(품에 넣거나 들고 다니기 힘든 물건은 문서화돼되서 거래된다)를 낚아채 도망치려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회색으로 물들어 가는 자신의 몸을 보며 절망해야했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아웃, 마스터 클래스의 기사라 해도 보일 수 없을 듯한 몸놀림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NPC였다.

“……왜 NPC중에 상인 클래스만 스틸이 불가능하단 건지 알겠군.”

“무력을 사용하긴 싫었습니다만 결국 이렇게 됐군요. 잊어 주시기 바랍니다.”

“상인 NPC들은 모두 이렇게 강합니까?”

“그건 제가 설명해 드리지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며 한 사내가 나타났다.

“아, 제롬씨!!”

“오랜만입니다, 콜로니스트님. 저한테 사기 치신 이후 처음이네요.”

“하, 하……. 뭐 그런 걸 마음에 담아두고 그러십니까.”

“유저한테 사기 당했다고 제가 다른 운영자들에게 얼마나 갈굼 당한 줄 아십니까!! 후……. 관두죠. 아무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운영자가 직접 나서는 걸 보니 자세한 설명은 NPC에게 무리란 건가? 하긴, 프로그래밍된 머리로 제작사의 의도를 알 순 없겠지.

“지금까지의 모든 롤플레잉 게임에서 보면 아무리 용자라 해도 상점에서 물건을 사면 무조건 돈을 내야했죠. 민가에 들어가서는 아무렇지 않게 뒤지고, 아이템을 챙겨갔으면서 말입니다. 그래서 생각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라구요.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두 가지. 첫 번째는 상인길드의 존재로 값을 치르지 않고 도망갈 시 식료품을 포함한 모든 물품의 공급을 끊는다는 것인데, 연락 수단도 마땅치 않고 모든 상인이 그런 사람 하나하나를 알아 볼 수 없을 것이기에 보류했었습니다. 두 번째는 바로 상인이야말로 용자도 이기지 못할 진정한 고수라는 것!! 예전에 상점에서 아이템을 사려면 땅에 널어놓은 것을 집고 상인에게 가서 값을 치르는 게임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게임에서 돈을 안 내고 물건을 집은 채 밖으로 나가려하면 어느새 나타난 상인이 입구를 막고 서있더란 겁니다. 그러면 용자는 무슨 짓을 해도 밖으로 나갈 수 없고 돈을 내거나 다시 아이템을 내려놓거나 둘 중 하날 택해야 했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상인은 용자로서도 어쩔 수 없는 대단한 존재라는 거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용자’니까 그런 게 아닌가요? 상인을 죽이고 물건을 훔쳐 도망가면 그게 악당이지 용자겠습니까.”

“후후, 그렇다면 다른 확실한 예를 들지요. 젤X의 전설이란 게임에서 상인이 두리번거리면서 감시하는데 고개가 돌아간 사이 빠르게 이동해서 도망가는 수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상점에 들어가면 상인이 발사하는 이상한 광선에 플레이어는 엄청난 데미지를 입게 되죠. 여기서 상인이 은거한 초고수란 공식이 성립 되는 것입니다.”

“꽤 그럴 듯하기는 하지만 황당한 설정이군요.”

새삼스레 이 게임의 개발자들의 머리를 해부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인간들이기에 이런 설정을 잡을 수 있는 거지?

“기발하단 말로 알아듣겠습니다. 그럼 빨리 사시죠. 이제 곧 서버를 닫아야 하니까요.”

“서버를 닫아요?”

“공지도 안 읽어보셨습니까? 상용화와 패치 때문에 내일까지 서버를 닫아야 한다고 올려놨는데요.”

벌써 상용화라고? 홈페이지에 안 들어가니 알 수가 있나. 패치라……. 재미있는 내용이 많았으면 좋겠는데.

“자, 길드석 값입니다.”

얘기하는 사이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서있는 NPC에게 1미스릴을 건네고 길드석 문서를 받아 들었다.

“이야, 벌써 돈을 그렇게나 버시다니, 또 어떤 운영자한테 사기라도 치신 건가요?”

“…….”

저번 사기 당한 것 때문에 쌓인 게 많았나보다.

“아니오, 유저한테요.”

“!!”

“사기라니, 정당한 거래였잖아.”

내가 생각해도 정당한 거래…… 라고 불리기엔 무리가 있을 것 같은데, 이거 말해도 되나 몰라

“거래이긴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정당하진 않아. 이쪽은 뻥 카드였으니까.”

“너 설마…….”

“사실은 깜박하고 동영상 안 찍었지 뭐야. 그래도 그쪽에 줘야하는 동영상은 제대로 찍었으니까 걱정 마.”

“너…… 생각보다 사악한 놈이구나.”

“뭐, 기본이죠.”

“형, 집 샀는데 시간 없으니까 빨리 오라는데요.”

“가야지. 그럼 제롬씨, 다음에 뵙죠.”

“예, 길드 잘 세우세요. ……지만…….”

제롬씨의 뒷말이 흐릿하게 들린 게 걸리긴 하지만 별 신경 쓰지 않고 상점을 나와 그녀들이 말해준 장소로 갔다.

“오빠, 여기에요.”

그녀들의 뒤로 보이는 평범하고 적당한 크기의 집. 사용하기에 불편함은 없을 듯했다.

“이제 인테리어를 해야 될 텐데 시간이 없네요. 나머지는 내일 하죠.”

[안녕하십니까, 운영자 제롬입니다. 이제 5분 뒤 서버를 닫겠으니 모두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 주시기 바랍니다.]

“타이밍 한번 기막히군. 그럼 내가 늦을지도 모르니까 200골드 주고 갈게. 인테리어는 여자들이 할 거지?”

“네, 하지만 수련용 더미랑 물약, 화살, 가구들은 남자들이 옮겨야 해요.”

“설마 그런 걸 여자한테 시키겠냐. 걱정하지 말라고. 그럼 파일 보내야 하니까 먼저 간다.”

“내일 봐요.”

“로그아웃.”

약간의 현기증이 일었지만 무시하고 비틀거리며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를 켜고 힐름 접속 기계와 연결시켜서 파일을 꺼내 길드 장에게 보낸 후 패치 내용을 알아보기 위해 모처럼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어디보자……. 아, 찾았다.”

[힐름 상용화와 패치 내용. 상용화 된 힐름은 매달 3만원의 요금이 부과될 것이며 처음 일주일은 적응기간으로 요금을 부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패치 내용 : 호칭 제도 도입. 이벤트 때 운영자가 직접 부여해 주는 것으로 호칭을 얻으면 상점에서 물건을 3%싸게 살 수 있습니다. 에피소드 시작. 에피소드1, 오크 대침공이 시작됩니다. 모든 종류의 오크가 나타나며 준비 기간은 두 달 드리겠습니다. 처음 하시는 분들은 베타 테스터 분들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빨리 성장하시기 바랍니다.

맞춤 무기 등장. 각 케릭터의 능력치 등을 고려한 맞춤 무기를 만들 수 있습니다. 보석을 박음으로써 마법을 부여할 수도 있고, 레벨이 오르면 업그레이드를 해서 쓰셔도 좋습니다.

아이템 가격 조정. 문제가 있다 싶은 아이템들의 가격이 조정됩니다]

“에피소드야 대형 길드들의 주도 하에 클리어해 갈 것이고 맞춤 무기라……. 안 그래도 지팡이 하나가 필요했는데 잘됐군.”

잠시 홈페이지를 돌아다니며 몇 가지 정보를 알아 본 뒤 오랜만에 소설 비축분을 쌓아갔다. 한동안의 잠적으로 그나마 있던 독자들의 상당수가 떠나간 건 말할 것도 없겠지.

“그러고 보니 이것들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코빼기도 안 보이네?”

아르바이트 끝날 시간이 지났건만 웬일로 아론과 레이가 보이지 않았다. 아, 걔들도 길드에 넣어야겠다. 고렙 3명이 키워주면 한결 수월해 지겠지.

“으갸갸갸갸갸.”

어제 글 쓰느라 밤늦게까지 고생했더니 몸이 말이 아니었다. 간단하게 세수와 양치를 끝내고 집어든 것은 당연히 힐름의 접속기기. 오전에 패치가 끝났다고 하니 지금쯤 전의 두 배 이상 되는 사람이 접속해 있을 것이다.

“접속.”

익숙한 화면과 함께 오랜만에 정상적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면 운이 좋은 편인가?

“오빠, 왜 이렇게 늦었어요.”

접속하자마자 근처에 있었는지 린이 달려와 한소리 했다. 12시를 넘겼으니 욕먹어도 싼 건가?

“미안, 늦잠을 자서. 인테리어는 어때?”

“잘되고 있어요. 침대 1골드씩 6개 주문했고, 장식품이랑 가구가 10골드, 드라이저가 책장을 마법서로 꽉 채워서 30골드 사용했고, 체력 회복 포션 5상자랑 마나 포션 3상자. 또…….”

“알아서 잘했겠지. 보고 같은 건 필요 없어. 어차피 공동의 돈이잖아. 그리고 침대 두 개만 더 늘려 줘. 아론과 레이를 끌어 들여야겠어.”

집에 침대를 사서 놓으면 죽었을 때 집에서 깨어날 수 있다. 금세 정비해서 갈 수 있으니 상당히 편한 시스템이지. 일단 아론은 린이 있으니 당장 달려올 테고, 레이는 화살 값만 대줘도 오겠지? 집 정리만 되면 둘을 불러서 레벨 좀 올려야겠다.

“콜, 너 일부러 늦었지!! 우리가 얼마나 고생 한 줄 알아?!”

“마법사인 제가 있었다고 뭐 달랐겠어요? 힘 많이 찍은 형이 이해해야죠.”

“젠장, 괜히 힘을 많이 찍어서 피 보는군.”

“좀만 더 힘써주세요. 정리 끝나면 제가 친구들 불러서 가입시키고 키워 달라고 부탁할게요.”

“정말? 좋았어, 모두 힘내서 빨리 해치우자!”

렙업이란 소리에 열을 내서 짐을 옮기는 거트형을 보며 아론과 레이를 부르기 위해 귓말을 날렸다. 마침 둘은 접속해 있었고, 대강의 사정을 들은 뒤 이쪽으로 오기로 했다.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겠다고 큰소리치던데 과연 얼마나 강해졌는지 볼까?

“콜, 정리는 대충 끝냈는데 걔들은 언제 오는 거냐?”

“아, 왔네요.”

골목의 저편에서 아론과 레이가 걸어오고 있었다. 나름대로 폼은 잡고 있지만 같이 오는 이유는 아론이 길치이기 때문 아니겠어?

“안녕하세요. 전 기사 레벨 74 아론, 이놈은 궁수 64 큐베레이입니다. 콜로니스트 친구죠.”

“광전사 아론과 마궁수 레이?!”

광전사에 마궁수? 이것들이 두 달 동안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야.

“광전사란 말은 좀 빼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광전사. 거창해 보여도 결국엔 미친놈이란 소리다. 듣기 좋은 말은 아니지. 아론도 그게 거슬렸는지 정중하게 부탁했다.

“아, 미안. 유명 인사를 만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니들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거냐.”

“이거 왜 이래, 난 필사적으로 렙업한 죄밖에 없어. 너야말로 이번엔 무슨 짓을 한거냐? 길드석이 아무리 상용화되고 20골드나 가격이 떨어졌다지만 80골드면 웬만한 고수도 만지기 힘든 돈인데, 거기에 집까지 사다니. 보통 큰일을 저지른 게 아닌데?”

“뭐,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 그런데 그게 무슨 소리야? 길드석 가격이 20골드나 떨어지다니.”

“말 그대로 상용화되고 가격 조정 돼서 지금 80골드야. 몰랐어?”

제롬이 마지막에 중얼거리던 게 이걸 말한 거였나. 분명 저번 일에 대한 복수렸다? 그래, 좋아.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는 걸 몸소 체험하게 해주지.

“망할.”

“이미 산 걸 어쩌겠냐, 일단 길드부터 세우자. 모두 집으로 들어와.”

벌써부터 길드석 문서를 들고 있는 거트형을 선두로 모두 집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아론과 레이는 밖에서 버둥거리는 게 아닌가? 무슨 마임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차, 깜박했다. 공동소유주 설정. 아론, 큐베레이.”

둘은 그 말이 끝나고 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 올 수 있었는데, 아마도 도둑을 방지하기 위한 것 인 듯했다.

“그런데 길드 이름은 뭐로 하지?”

“그걸 생각 못했네. 생각해 놓은 이름 있어?”

“가즈 나이트 어때? 신의 기사. 폼 나잖아?”

“여기서 프리스트는 형하고 세리, 둘 뿐이거든? 기사도 두 명, 형을 포함한다 해도 세 명이 전부고.”

……게다가 난 신 따윌 믿지 않아. 목구멍까지 올라온 마지막 말을 꾹 눌러 참았다. 해봤자 득 될 것도 없으니까.

“그럼 헬 가디언이나 켈베로스, 그것도 아니면 헬 하운드…….”

“기각, 기각, 기각. 헬 같은 것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평범한 거 찾아봐. 우린 친목 길드잖아?”

그 후로도 몇 가지 의견이 나왔지만 한결 같이 폼 나는 것들뿐이라 기각됐다. 폼 나면 좋긴 하겠지만 실력이 뒤따르지 못한다면 이름을 지키기 힘들 테니까.

“라스트 피스 어때?”

“그건 우리가 히든 피스 찾으러 모인 것 같잖아.”

“그런가? 그럼 피스만 빼고 라스트 어때? 뭐가 심오해 보이지 않아?”

“에라, 나도 모르겠다. 형 마음대로 해.”

“오케이, 길드 석 설치.”

문서를 들고 말하자 형의 앞에 조그만 비석이 생겨났다. 물론 문서는 사라졌고. 100골드짜리 돌이라…… 허탈하군.

“길드명 라스트. 모두 이리 와서 돌에 손을 얹고 길드 가입이라고 말해.”

“길드 가입.”

‘라스트 길드에 가입 신청하셨습니다.’

“승낙, 승낙…….”

가입 처리는 아주 단순하게 이루어졌다. 가입이 끝나자 공용 창고와 개인 창고의 설명이 있었고 각자 침대에 이름을 새김으로써 소유권을 얻었다.

“6,70대가 3명이니 레벨 대에 맞는 사냥터에서 고생하지 않아도 돼. 그럼 어디로 갈까? 평소 나랑 레이가 팀플하는 히메네스 화산이나 데포우 던젼이면 광렙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위험하지도 않을 테고, 니가 도와주면 못 가보던 곳도 갈 수 있을지 모르지.”

“화산이면 콜형이 있어도 별 도움이 안 되잖아요? 전부 불 속성 몬스터일 텐데.”

“응? 콜, 너 속성 뭔지 얘기 안 했냐?”

“분명히 저번에 버스트 플레임을 썼는데…….”

아, 린이 얘기 한 줄 알고 아무 말 안 했더니 모두 불, 바람 속성으로 알고 있는 건가?

“말 안 했던가? 나 올 속성 마스터야.”

“!!”

“그, 그거 올리기 어렵잖아요.”

“대충 때려 맞췄더니 되더라고. 굳이 따지면 히든 피스라고도 할 수 있겠지. 난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론 히든 피스라기보다 사람들이 생각을 못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든 알 수 있는 사실이고 불과 바람, 물과 땅 등 이미 널리 퍼진 사실 아닌가?

“나도 지우고 다시 키울까…….”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지금까지 올린 레벨이 아까워서라도 그러진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나 같은 방법이 아니면 마법 위력이 현저히 줄어들 테니까

“현실 시간으로 몇 달간 사냥도 안 하고 노가다 할 자신 있으면 맘대로 해.”

“……그냥 이거 키울래요.”

“이봐들, 어디 갈 건지나 정해야지.”

“데포우 던젼은 주로 뭐 나오는데?”

“던젼에 별 게 있냐, 언데드나 골렘이지.”

아무리 레벨이 낮아도 프리스트가 두 명인데 언데드를 잡는 게 조금이라도 수월해 지겠지.

“데포우로 가자. 괜찮죠, 형?”

“나야 레벨만 올릴 수 있으면 어디든 오케이지.”

“그럼 간다, 매스 텔레포트!”

레이와 아론이 반반씩 나눠서 데려갔다. 빛이 사라지고 나타난 곳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동굴 앞이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 1층은 50대로도 충분히 버틸 수 있으니까. 린, 레이. 지원 부탁해.”

“네, 오빠.”

경험치 균등으로 파티를 맺은 뒤 천천히 동굴로 들어갔다. 어두운 던전에서 시야 확보를 하기 위해 나와 드라이저가 라이트를 시전 했고, 린과 레이도 스킬을 발동 시켜 어둠을 꿰뚫었다.

“대충 상대하고 아래로 내려가자. 어차피 이런 놈들 잡아봐야 경험치도 별로 못 먹는데.”

“그러지 뭐. 그럼 달린다. 멀티 샷!!”

뛰면서도 레이와 린은 흔들림 없이 화살을 발사해 몬스터의 접근을 막았다. 정면에서 가로막는 몬스터들도 아론의 공격에 힘없이 쓰러졌기에 별다른 피해 없이 다음 층, 또 그 다음 층으로 쉽사리 내려올 수 있었다.

“이제부턴 보조만 해줘. 체력 약한 마법사나 프리스트는 죽기 쉬우니까.”

“알았어. 모두 들었지? 거트형도 이번엔 보조 마법을 걸어줘요.”

달그락 달그락 뼈마디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며 검과 방패를 든 해골이 다가왔다.

“스켈레톤 나이트라, 공격력은 강하지만!!”

채챙! 스켈레톤 나이트(이하 스나)가 린의 화살을 방패로 막을 동안 아론은 달려들어 검으로 힘껏 내려 쳤다. 약간의 불꽃을 동반하며 너무도 쉽게 잘리는 스나의 뼈, 과연 아론이 강해지긴 한 것 같다.

“스켈레톤 나이트는 시미터에 원형의 메탈 실드를 들고 있고 본 나이트는 시미터에 카이트 실드를 들고 있어. 각각 공격력과 방어력이 우수하니 잘 구분해서 싸워야 돼.”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아까와는 다른 빠르고 많은 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몰이라도 하는 건가?

“!!”

말이 씨가 된다고 했던가. 검은 복장의 한 사내가 십여 마리의 몬스터를 끌고 우리 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도와 달라는 말도 안 하고, 설마…….

“하이딩.”

이번엔 말도 안하고 생각만 했는데 실현 돼 버렸다. 사내는 도둑 클래스인지 우리 쪽으로 오더니 하이딩 스킬을 사용해 몸을 숨겼고, 타깃을 잃은 몬스터들은 우리를 향해 돌진해 왔다.

“젠장, 일단 원거리 공격 충분히 먹여놔.”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파이어 볼…….”

제대로 맞지 않는 한 큰 타격은 못 주겠지만 끈질기게 파이어 볼을 난사했다. 몇 방을 그렇게 날리자 흙먼지가 피어올랐고, 할 수 없이 마법사용을 중지해야 했다.

“이제 나한테 맡겨둬. 본 직업에 지장을 줘가면서까지 마법사 클래스를 올린 성과를 보여주도록 하지. 파이어 인챈트.”

레이는 자신 있는 말투로 화살에 불 속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리던 먼지를 바람 속성 마법으로 날리자 천천히 다가오는 몬스터들이 보였고, 레이는 화살 세 개를 시위에 걸었다.

“파이어 애로우, 멀티 샷!!”

불 속성이 걸린 화살과 불꽃의 화살, 총 6개의 화살이 몬스터들을 덮쳤고, 이어서 제2탄이 나가자 대여섯의 숫자가 줄어버렸다.

현실성의 추구란 명목 하에 1회 최대 발사 가능한 화살 수를 3발로 정해 놓은 회사 측의 제약을 간단히 풀어버린 것이다. 비록 파워는 약하지만 많이 사용하면 숙련도가 늘어 데미지와 속도가 올라갈 테니 그런 걱정을 안 해도 될 터였다. 마법과 활, 어찌 보면 안 어울리는 둘을 멋지게 조합해 버리다니, 대단한 걸 생각해냈군.

“이번엔 내 차례다. 프로보케이션(provocation), 크오오오!”

“저건?!”

“도발, 상대를 버서커와 비슷하게 만들어서 공격력을 높이는 대신 방어력을 떨어뜨리는 기술인데, 그걸 자신한테 건 거야. 버서커와는 달리 이성은 남아 있어서 제어가 가능하지. 일격 필살용으로도 가끔 사용 할 수 있더라.”

공격력이 한껏 증폭된 아론은 몬스터 사이에서 쉽사리 뼈다귀들을 가루로 만들고 있었다. 광전사란 게 이런 뜻이었군. 진짜 미친놈을 말하는 거였어.

“잘못 맞으면 데미지가 크긴 하지만 공격력, 속도가 오르고 마나로 검의 절삭력까지 올리니 상당히 유용한 기술이란 말이야. 쓸 만하지?”

“그래, 미친 놈 소리 듣기는 딱 좋겠다만 효과는 확실하네. 어디보자, 경험치가…… 헙.”

“왜 그래?”

“벌써 3업인데?”

3업도 모자라 경험치 바는 거의 끝을 가리키고 있었다. 과연 70대 사냥터라는 건가? 가만, 리자드 마스터도 70대 였는데?

“당연하지, 렙 몇 짜릴 잡았는데. 아이템이나 챙겨.”

“그러고 보니 리자드 마스터도 70대였잖아? 그런데 경험치 차이가 많이 나네?”

“말이 70대 사냥터지, 몬스터 레벨이 70대 라는 건 아니야. 게다가 저번에 잡은 리자드 마스터는 보스 급이잖아? 보스 급한테는 경험치 보너스가 붙는다고.”

“그런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템을 줍는 우리를 놀랜 눈으로 보는 네 쌍의 인간이 있었으니, 거트형, 세리, 베르, 드라이저였다. 하긴, 보스 급 몬스터를 지금보다도 훨씬 레벨이 떨어질 때 잡았다니 놀랄 만도 하겠지. 민간인(?)으로선 꿈도 못 꿀 일일 테니.

“자, 그럼 이 싸가지 없는 놈을 잡아 보실까?”

좀 전 사내가 하이딩으로 숨은 자리를 일행이 동그랗게 둘러쌌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내 모습을 감추고 있었고 나도 슬슬 짜증이 났다.

“린, 레이. 멀티 샷으로 원안을 갈기고 드라이저는 나와 같이 마법으로 지진다. 하나, 둘…….”

“자, 잠깐만요.”

하이딩을 사용해서 숨는다 해도 ‘숨어있는 것’에 불과 하기 때문에 그 지역 전체를 날려버리면 끝이었기에 내 협박에 겁을 집어먹고 나온 것이다. 에……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여자?”

“그런 짓을 한 이유, 물을 것도 없겠지? 설마하니 레벨 업 도와주려고 그런 건 아닐 테고.”

“죄, 죄송해요. 하지만 나쁜 의도는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믿어줘요…….”

눈물까지 글썽거리지만 ‘아, 그래요? 그럼 가보세요.’하고 보내 줄 생각은 없다. 눈물은 여자의 최대 무기라는 생각으로 눈물부터 흘리는 여성 플레이어가 한둘도 아니고 말이야.

“우리가 뭐로 널 믿을 수 있지? 하이딩을 사용하는 걸 보니 어쌔신 클래스 같은데, 난 어쌔신을 제일 싫어하거든.”

“아니에요, 전 로그 선택했어요!!”

로그? 그런 것도 있었나?

“로…… 그?”

“네. 도둑으로 레벨 50까지 키우면 어쌔신과 로그 중 하나를 택하게 되는데, 로그는 어쌔신과 다르게 PK를 하지 않아요.”

“생각해 보니 얼핏 들은 기억도 나는 것 같은데?”

“맞다, 저번에 ‘놈’에 대한 정보 모을 때 들었는데, 도둑은 레벨 50때 로그와 어쌔신으로 갈라져. 범죄자 마을에서 칭호 받으면 어쌔신이 되고, 일반 마을에서 하면 로그가 된다나?”

녀석들도 그 일 이후 놈에 대해 정보를 모았던 것 같다. 그럼 로그와 어쌔신의 차이점은 뭐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

“어쌔신은 주로 사람을 죽이기 때문에 살상용 스킬이 많고 로그는 함정 설치라던가, 함정 해제, 문 따기 같은 스킬이 많은데 헌터쯤으로 생각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더군.”

“살상용 스킬이 적으니까 몹 몰이로 우릴 죽이려 한 건가? 변명부터 들어보지.”

“그게 아니에요, 사냥 왔는데 어쩌다보니 몹이 몰려서 도망치다가…….”

“혼자서 말인가? 이곳 3층은 50대 레벨이 올만한 곳이 아닐 텐데?”

고렙과 파티 맺고 온 것도 아니고 혼자서 왔다는 소리는 자신을 믿지 말라는 말과 진배없다. 거짓말이 너무 서투르군.

“사실은 로그는 스피드가 빠르니까 하이딩으로 숨어 있다가 기습으로 크리티컬 히트를 노리면 폭렙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지?”

“증거를 대라고 하시면 어쩔 수 없지만 정말이에요, 믿어주세요!!”

“오빠, 한번 믿어줘요.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어찌나 애처롭게 빌던지 린이 그 로그의 눈물까지 닦아주며 용서해 줄 것을 부탁했다. 아론은 당연히 오케이, 나머지 사람들도 결국 몹 몰이로 렙 업을 했기에 별다른 반발은 없었다.

“좋아, 그럼 가봐. 다시 한 번 이런 짓 하다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오빠, 잠깐만요. 얘도 렙업 욕심에 그런 건데 이대로 보내면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모르잖아요? 그러니까 얘도 같이 올려주면 안 될까요?”

“하지만 파티는 8명까지잖아?”

“두 달 뒤에 있을 오크 대침공 이벤트 때문에 60레벨 이상의 유저들을 대상으로 작은 이벤트가 생겼어요, 한사람이 두 명까지 다른 사람 레벨을 키워줄 수 있고, 10이상 업 시켜주면 복권 한 장씩 주는 걸로요. 대신 최대 파티원 수가 2명이 늘게 되구요.”

오크들이 쳐들어오는 정도로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아무리 오크의 수가 많다지만 개개인의 힘은 유저들이 압도적일 텐데, 분명 뭔가 이상한 짓을 꾸미고 있는 게 틀림없어.

“난 모르겠다, 그럼 니가 알아서 책임져.”

“고마워요, 오빠. 넌 이름이 뭐야?”

“훌쩍……. 나이세르에요, 언니.”

“어, 언니? 그래, 앞으로 잘 지내자.”

언니란 소리를 거의 못 들어 봐서인지 린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린이 외동딸 이랬나? 그럼 남자들이 오빠소리 듣는 거랑 느낌이 비슷할지도…….

“모두 절 세르라고 불러주세요. 그럼 세르, 몹 몰이 해오겠습니다!!”

세르는 어느새 거트 형에게 파티등록을 하고 던젼의 안쪽으로 달려갔다. 거참, 회복이 빠른 녀석일세?

“봐요, 나쁜 애는 아닌 것 같죠?”

“뭐, 그런 것 같기는 하군.”

“생긴 것도 꽤 귀엽게…… 읔!!”

베르가 멍하게 눈이 풀리자 세리가 발을 밟아 버렸다. 역시 과욕은 화를 부르는 법, 여자 친구를 옆에 두고 한눈을 팔다니 맞아도 싸지.

“흥!!”

아무래도 세르는 세리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힐 듯했다. 여자의 질투란…….

“그런데 10이상 키워줘야 복권을 얻을 수 있다며. 우릴 키워주려면 못 얻을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아무리 경험치 균등이 있다곤 해도 적지 않은 레벨에 숫자도 많아서 복권 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 만큼 자기 레벨도 못 올리니 초보를 키워주고 나머지 시간에 사냥하는 것보다 손해가 클 테고.

“안 해줬다가 나중에 무슨 소릴 들으려고? 지금이야 레벨 차이가 나지만 솔직히 니가 레벨 업하고 싸우자고 하면 도망갈 거다.”

“그리고 복권 같은 건 괜히 기대만 키우잖아요. 그렇게 좋은 것도 안 줄 텐데.”

“뭐, 우리야 고맙지. 그런데 얘는 어디까지 들어간 거야? 올 생각을 안 하네.”

꽤 깊게 들어갔는지 발자국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한 5분을 기다렸을까? 주위에 간간히 리젠되는 스나와 본나를 잡고 있을 때 엄청나게 많은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얼마나 끌고 오는 거야?!”

“후……. 다들 범위 공격 준비해. 세르가 몸을 피하면 일제 사격이다.”

“사람 살려어어어∼.”

“피해!! 파이어 인챈트, 파이어 애로우.”

“트리플 샷, 관통, 연사!!”

“버스트 플레임!”

“파이어 월!!”

뽀각 뽀각 뽀각……. 정겨운 뼈소리와 함께 범위 공격으로 상당수의 몹이 다시 한 번 흙으로 돌아갔다. 남은 몬스터들은 높이 쳐진 불의 벽 때문에 접근하지 못 했고, 그것은 우리에게 또 한 번의 기회가 됐다.

“화살이나 마법은 통할 거야. 매직 애로우!!”

“이런 방법도 있었군, 파이어 인챈트, 파이어 애로우.”

“스핀 샷!!”

“윈드 애로우.”

파이어 월을 지나면서 매직 애로우에는 불 속성이 붙었다. 레이의 화살과 마법이야 원래 불 속성이니 추가 효과는 못 봤고 린의 스핀 샷은 빠르게 회전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드라이저의 윈드 애로우도 약간의 이득을 봤는데, 모두에게 무엇보다 큰 효과는 시야가 가려진 게 아닐까 한다.

“도중에 소리가 끊긴 걸로 봐선 전멸인 것 같은데?”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지. 누가 다시 화살 좀 날려봐.”

“제가 할게요. 트리플 샷, 연사.”

틱.

제2탄이 날아감과 동시에 린의 활시위가 끊어졌다. 스핀 샷이 내구력에 무리를 많이 줬나보군.

“아…….”

투둑, 투두둑. 활시위가 끊어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소리. 그것은 안에 무언가가 살아남았다는 증거였다. 지금까지와는 소리가 다른데?

“언니, 제가 사실은 몰이하다가 실수로…….”

부웅! 검을 내리 긋는 소리와 함께 파이어 월의 불꽃이 꺼질 듯 휘청거렸다. 풍압이 이 정도란 말이야?!

“저, 저건!!”

놀람 때문에 파이어 월이 사라져 버렸고, 생존자의 신원이 밝혀졌다. 어둠과 동화라도 된 듯 몸을 감싼 흑빛 갑옷에 한 손에는 피에 젖은 듯 붉은 빛을 띠는 롱소드, 다른 한 손에는 좀 더 위에 있어야할 머리가 들려진 그의 이름은 듀라한 나이트!! 세르가 말한 실수는 바로 이것이었다.

“듀라한…… 망할!!”

“4층에서나 나오는 몹인데……. 잡으려면 우리 중 몇은 죽어요.”

“그럼 도망가야지!!”

“그게 말처럼 쉽냐, 제길, 온다!!”

갑작스런 대쉬와 함께 검을 뻗는 듀라한을 아론이 힘겹게 막아내고 있었지만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제가 끌고 온 거니까 제가 책임지고 처리할게요.”

“잠깐, 어떻게…….”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르는 듀라한을 향해 달려갔다.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듀라한이 검을 휘두르는 순간 세르는 간발의 차이로 검을 피하고 하이딩을 사용해 몸을 숨겼다.

“큭큭큭, 어설픈 짓을!”

이놈도 A.I인지 말까지 하며 세르가 숨은 자리를 향해 검을 내리쳤다. 굉음과 함께 세르가 있던 자리가 움푹 팼고, 그 틈을 타 아론의 기습이 이어졌다.

“하압!!”

챙! 세르의 희생을 뒤로 한 아론의 기습은 실패로 끝났다. 검끼리 부딪친 충격으로 경직돼 있는 아론은 듀라한의 재빠른 공격에 힘없이 날아갔고, 레이가 재빨리 화살을 날렸다. 하지만 역시나 실패, 레이의 공격은 듀라한의 시선을 우리에게로 돌렸을 뿐이었다.

“으…… 바보들, 도망갔어야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이판사판이다. 바인드(bind).”

땅에서 솟아오른 식물들이 듀라한의 몸을 꽁꽁 묶어버림으로써 행동을 제약했다. 그에 이어 드라이저와 나, 레이가 불꽃 계열 마법을 난사함으로써 식물과 함께 듀라한을 태워버렸고, 그는 불타는 몸을 이끌고 달려왔다.

“블레스, 홀리 라이트.”

“디바인 실드.”

세리가 블레스로 능력치를 낮추고(언데드에게는 반대 효과로 작용한다.) 홀리 라이트로 충격을 줄 때 거트형은 디바인 실드를 펼쳐 우릴 보호했다. 한두 방이면 깨져버릴 보호막이지만 캐스팅 시간은 벌어주겠지.

“이따위 걸로 날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쿠웅! 단 한 번의 휘두름이었지만 디바인 실드가 크게 흔들렸다. 이제 기회는 한번이 고작, 더 이상 버텨낼 재간도 없었다.

“라이트닝 랜스(lightning lance)!!”

“스핀 샷!!”

“파이어 랜스!!”

“파이어 애로우!!”

두 번째 공격으로 디바인 실드가 깨짐과 동시에 듀라한은 우리의 총공격을 몸으로 고스란히 받아냈다. 여기저기 타고 구멍 난 모습. 그러고도 기어이 다가오는 놈의 모습은 공포심을 심어 주기에 충분했다.

“끄억?”

놈의 등 뒤에서 칼을 박아 넣은 건 아웃된 줄 알았던 세르였다. 버둥거리는 몸 위에 몇 개의 비도를 더 찔러 넣은 세리는 마지막으로 듀라한이 들고 있던 머리를 발로 차버리고 잽싸게 빠져나왔다.

“어떻게 된 거야?!”

“얘기는 이따 듣지, 일단 이 머리부터 없애놔야겠어. 멜트(melt)!!”

“아, 안돼!! 크허어억.”

손에서 불꽃이 뻗어나가 듀라한의 머리를 태웠다. 원래는 주문대로 녹여야겠지만 이 게임이 18금도 아닌데 그건 힘들겠지.

“뭐야, 머리가 약점?”

머리가 약점인지 HP가 다 깎인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듀라한의 몸이 회색으로 물들며 움직임을 멈췄다.

“휴우…… 그나저나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 보실까?”

“그게…… 하이딩한 채 움직이는 스텔스란 기술로 피한 다음에 기회를 노린 거예요.”

“결국 또 숨어있었단 소리군.”

“저, 저는 기회를 노리려고…….”

“글세……. 듀라한이 멀쩡했어도, 우리가 전멸을 당했어도 모습을 드러냈을까? 난 아닐 거라고 보는데.”

듀라한이 멀쩡한 상태였다면 절대 하이딩을 풀지 않았을 것이다. 기회를 노렸다? 기회라면 아론이 당했을 때, 그러니까 레이가 화살을 날리기 전에도 충분히 있었으니 핑계가 될 순 없다. 승산이 있는 싸움을 하는 게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일행을 버리는 짓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그, 그건…….”

“오빠, 하지만 세르 덕분에 잡았으니까 한번만 봐줘요.”

세르가 마음에 들었는지 린이 다시 한 번 선처를 부탁했지만 이번만큼은 물러설 수 없었다.

“기회를 노렸다는 변명 따윈 하지 마. 기회라면 레이가 화살을 날리기 전에도 있었어. 결국 넌 일행을 버린 거나 마찬가지고, 난 언제 뒤통수를 노릴지 모르는 상대와 함께 다닐 수 없어. 파티에서 나가라.”

“오빠!!”

“어차피 네 말대로 폭렙이 목적이라면 수십 마리의 스나, 본나와 듀라한으로 충분히 달성했잖아? 적어도 5렙 이상은 올랐을 테니.”

“그래도 위험하니까 이번 사냥까지만 같이 다녀요. 세르가 몰이해 오면 레벨 올리기도 쉽잖아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세르를 린이 계속 옹호했다. 동생 같은 마음은 알겠지만 사적인 감정의 개입도 일정한 선을 정해야 하는 거야.

“버틴다 이거지? 거트형, 추방시켜요.”

“으응? 한데…….”

거트형은 린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고렙의 눈치가 보인다 이건가? 아론이 편들면 사냥도 여기서 끝일 테니 렙 업 기회를 놓치고 싶진 않겠지.

“그럼 제가 나가죠. 10초의 결정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10, 9, 8…….”

10초가 지날 때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이대로 파티는 물론 길드도 탈퇴할 생각이었다. 고렙의 눈치나 보는, 무엇보다 우유부단한 길드 장 밑에선 있기 싫으니까. 시간이 촉박해지자 린은 아론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빛을 날렸고, 내 표정을 살피던 아론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나도 콜과 같은 생각이다. 신뢰가 없는 동료와 함께 다니느니 혼자 있는 게 낫지. 게다가 저 녀석이 한번 고집부리면 아무도 못 막거든.”

“……파티 탈퇴.”

결국 세르가 자진해서 파티를 나왔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연발한 뒤 리콜 스크롤을 사용해서 마을로 돌아갔고, 남은 사람들 사이에는 무거운 공기가 흘렀다.

“억지 부려서 죄송해요. 제가 동생이 없다보니 동생 같은 생각이 들어서…….”

“네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한번 같이 사냥하고 헤어질 동료 사이에도 어느 정도의 신뢰가 있어야 하는 거야. 신뢰가 없다면 협공은커녕 개인이 가진 힘조차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니까.”

“네…….”

모두가 침묵하고 있는 틈을 타서 듀라한이 떨군 아이템부터 수거하기 시작했다. 내가 앞장서서 줍자 다른 사람들도 뒤따랐고, 난 각종 보석과 무기, 방어구들 틈에서 마법서로 보이는 검은색 책을 한 권 주워들었다.

“이게 뭐지?”

“에이, 검은 색이에요? 돈도 안 되겠네.”

드라이저가 뭔가 아는 듯 아쉬워하며 말했다.

“이게 뭔지 알아?”

“몰라요? 언데드가 주는 건데, 마법서처럼 보여도 배울 수가 없어서 뭐하는 물건인지 말이 많던데.”

“배울 수가 없어?”

“현재 각 속성의 고렙 마법사들이 익히려고 했는데 안 돼서 마법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대요. 퀘스트 아이템 쯤으로 생각하던데.”

“퀘스트 아이템이라…….”

무심결에 책장을 넘기자 빛바랜 종이 색 이외엔 아무것도 없던 책에 글씨가 떠올랐다. ‘레벨이 낮아서 배울 수 없습니다.’라는. 레벨이 낮다는 건 배울 수 있다는 뜻? 새로운 종류의 마법을 배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분이 들떴다.

“혹시 지금까지 나온 검은 책들이 한 종류뿐이야?”

“아뇨, 비슷하게는 생겼지만 몇 종류 된다던데……. 혹시 형 익힐 수 있어요?”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진짜요? 어떻게요? 왜 다른 사람들은 익힐 수 없는 거예요?”

왜? 그러고 보니 검은색은 어둠과 연관시킬 수 있다. 어둠이라면……?

“라이트.”

갑자기 라이트 하나를 더 띄우자 모두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대답 대신 행동으로 답을 해줬다.

“이클립스.”

이클립스의 뜻은 (해, 달의)식, 그리고 빛의 소멸!! 어두운 그림자가 라이트를 덮자 라이트는 무언가에 상쇄된 듯 사라졌다.

“책의 비밀은 어둠 속성인 것 같은데? 이걸 익히면 흑마법사나 네크로맨서가 될 위험도 있지만 레벨을 올려서 마법 이름을 보면 알 수 있겠지.”

“……아무래도 케릭 다시 키울까봐.”

새로운 사실을 알아 갈수록 드라이저의 한숨 또한 더해갔다.

“실망하지 마. 혹시 알아? 어둠의 신전 같은 곳에 열심히 기부하다보면 어둠 속성을 내려줄지. 큭큭.”

“그걸 바라느니 마왕이벤트라도 열리면 그때 마왕 군에 가담하고 어둠 속성 얻는 게 빠르겠네요.”

“호오, 그런 수도 있었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아론들은 몬스터를 때려잡기 위해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렇게 열심히 부려먹은 결과 어느덧 레벨이 61을 돌파했고, 더 이상 이 인원으로 경험치를 먹을 수 없는 경지에 이르렀다.

“일단 마을로 가서 아이템 처분하자. 가는 김에 마법도 배우고 무기도 주문하고.”

“맞춤 무기 만들려고? 보석은 얻은 걸로 사용하면 된다고 해도 제작비용이 엄청나다던데.”

“돈이야 차고 넘치니까 상관없어. 마법서도 게임 초기라는 점을 이용해서 사재기 해뒀으니 문제 될 것 없고.”

“저번에 대체 얼마나 벌었기에 길드 석에 집까지 사고도 돈이 넘치는 거야?!”

나는 미소를 띠우며 양쪽 손가락을 하나씩 펴 보였다. 그러자 아론들은 잠시 뭔가 생각하는지 눈동자가 위쪽을 향했고 다시 돌아 올 때는 눈이 튀어나올 듯 커져있었다.

“처, 천백골드?!”

“정확히는 천이백이지. 그 중 100골드는 ‘놈’의 위치 등을 알려주는 대가로 정보 길드에 줬고.”

“놈이라면 그 빌어먹을 어쌔신이냐?”

“그래, 언젠가 우리 손으로 잡아야지.”

“마지막 숨통을 끊는 건 나다. 그 때문에 극단적인 기술을 써가면서까지 광렙한 거고.”

극단적인 기술이라면 프로보케이션을 말하는 건가? 확실히 빠름 위주의 몬스터에게 잘못 걸리면 죽기 쉽겠더군.

“그럼 가자, 리턴!!”

“리턴!!”

라이트가 있었다고는 해도 한동안 동굴(던젼)속에만 있어서인지 눈이 잠시 동안 적응하지 못했다. 십여 초 후 눈에 들어온 건 광장의 분수대가 아닌 하얀 벽이었다.

“길드 집인가?”

주위를 둘러보니 일행들이 각자 모자란 화살과 포션 등을 보충하고 있었다.

“이제 서너 명이면 충분히 거기서도 버틸 것 같으니 팀을 나누자.”

이제 더 이상 그 파티로 레벨 업 하기가 어렵다고 느꼈는지 거트형이 제안하자 모두가 동의했다. 하지만 우리 다섯이 같이 다니기엔 돌아오는 경험치가 너무 적고, 두세 명이 같이 다니기엔 너무 버거워서 팀짜기가 곤란했다.

“우리 넷이 팀을 짜고 너희는 둘씩 짝지으면 적당할 것 같은데, 니들 생각은 어때?”

“난 린과 함께라면 찬성이야.”

아론이 이럴 때마다 린은 곤란한 표정을 지었지만 내성적이라 그런지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 다녔다.

“결정 났네, 그럼 각자 흩어지자.”

“레이, 이것저것 할 게 많으니까 2시간쯤 뒤에 보자.”

“2시간? 그런 어중간한 시간동안 난 뭐하라고……. 적당히 때우다 오겠습니다, 주인님.”

품에서 3골드를 꺼내 주자 레이의 태도가 180도로 달라졌다. 역시 녀석은 돈에 약하단 말이야.

“그럼 난 간다.”

무려 두 달 동안 생활한 뤼크레스였기에 각 상점 등의 위치정도는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목적지는 마법사 길드. 맞춤 무기 역시 각자의 직업에 맞는 길드에서 제작할 수 있기에 망설이지 않고 최단 거리로 달려왔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맞춤무기를 제작했으면 하는데요.”

“마법을 배우시려면 왼쪽, 무기를 제작하시려면 오른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어떤 걸 먼저 하든 상관은 없었지만 일단 마법을 배우는 쪽을 선택했다. 왼쪽으로 꺾어 들어가자 백발의 할아버지가 ‘나 길드장이오.’라 말하듯 위엄 있는 모습으로 앉아있었다.

“마법을 배우고 싶습니다.”

“자네는 모든 속성을 다 익혔군? ‘방법’을 찾았다 해도 쉽지 않은 길이었을 텐데 대견하구만. 자네 같은 젊은이가 많아져야 이 세상에 다시 마법이 번영할 텐데……. 아, 늙은이가 너무 말이 많았나보군. 6써클 전부 합쳐 5골드라네. 7써클부터는 마법서를 얻어서 배워야 한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여기 있습니다. 한데 한 가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뭔가, 알고 있는 거라면 알려 주도록 함세.”

품속에서 검은 색 마법서를 꺼내 탁자 위에 놓자 길드 장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건 어둠의 마법서가 아닌가. 구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용케도 구했군.”

“어둠 속성의 마법을 익히는 것이라고 예상은 했습니다만 혹시 익히면 흑마법사가 된다거나 하는 제약이 있습니까?”

“허허, 그런 건 없다네. 빛도, 어둠도 결국엔 마나의 일부분인데 어찌 그런 생각을 하는가.”

큭, 그 말이 정답이군. 그럼 빛의 마법서도 존재할 수 있다는 소린데……. 나중에 찾아봐야겠어.

“좋은걸 배웠군요. 저처럼 어둠의 마법서에 대해 물어본 사람이 또 있습니까?”

“얼마 전에 한 다섯 정도가 묻고 간 걸로 기억하네. 그럼 이제 마법을 전수하도록 하지.”

길드 장이 중얼거리자 머릿속에 마법명과 능력들이 펼쳐졌다. 이미 몇 번 겪으면서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이 사라지면 끝난 거란 걸 알고 있었기에 두 말 없이 무기를 제작하러 일어났다.

“맞춤 무기를 제작하고 싶습니다.”

“모든 속성을 마스터하신 분이군요. 지팡이에도 전 속성을 부여하시겠습니까?”

“예.”

“에메랄드, 루비, 사파이어, 토르말린, 다이아몬드, 캣츠아이, 토파즈, 흑수정이 필요합니다. 먼저 능력치 스캔을 실시하겠습니다.”

그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달랑 그걸로 능력치 확인이 끝난 건가?

“보석은 여기 있습니다.”

뭐가 뭔지 몰라서 보석이 담긴 주머니를 통째로 그에게 내밀자 주머니를 들여다본 그는 뒤적거리더니 8개의 조그만 보석을 꺼내고 주머니를 돌려줬다.

“제작비용은 30골드입니다.”

“!!”

아론이 비싸다는 말을 할 때만 해도 많아봐야 10골드를 예상했는데 30골드씩이나 요구하다니, 예상 밖의 지출이었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속성의 종류가 종류인 만큼 프리미엄이 붙는 것뿐이니까요.”

“휴……. 여기 있습니다.”

찌직! 순간 그의 인피면구가 벗겨지며 나타난 것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제롬!!”

“돈은 잘 받았고, 열흘 뒤에 찾으러 오시면 됩니다. 큭큭.”

저 웃음으로 봐서 필시 나한테 바가지를 씌운 게 틀림없다. 정녕 네가 나에게 시비를 걸었단 말이더냐!

“……제롬씨.”

“크큭, 왜 그러시죠? 이건 제 재량으로 처리하는 일이니 권력 남용 같은 건 아닙니다.”

“이번 오크 대침공 이벤트 때 봅시다.”

“헉!!”

첫 번째로 열리는 대규모 이벤트인 만큼 제롬도 몬스터로 변해 참여할 것이다. 죽기 쉬운 일반 몬스터로는 나오지 않을 테니 보스급만 찾다보면 발견할 수 있겠지? 그럼 그때 두고 봅시다. 운영자 양반.

“패럴라이즈.”

가지고 있던 검은 책, 아니 어둠의 마법서를 펼치자 패럴라이즈라는 글씨가 떠올랐다. 그 단어를 입으로 옮기자 마법 책은 사라졌고, 마법 창에는 패럴라이즈가 추가됐다. 길드 집으로 가면 사놓은 7써클 마법서가 있겠지만 더 많은 어둠의 마법서를 구해두기 위해 광장으로 향했고, 남은 시간동안 어둠의 마법서를 사들였다. 물론 그것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겹치지도 않게.

“레이, 가자.”

“매스 텔레포트!!”

길드 집에 도착하자마자 포션과 7써클 마법서들을 집어 들고 레이를 재촉해 데포우 던젼으로 향했다. 목표는 당연히 레벨 업. 다시 로그 인 할 때 레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제약이 따르긴 했지만 큰 무리 없이 버텨나갈 수 있었다. 그렇게 한 달 하고도 25일이 지났다.

“접속. longway, ******.”

[공지. 수련자의 탑 추가, 소환사 클래스 추가. 오크 대침공 이벤트 앞으로 5일 남았습니다. 준비 철저히 하시기 바랍니다.]

소환사라……. 드디어 네크로맨서로의 길이 트였구나. 수련자의 탑은 또 뭐야? 뭐, 접속해 보면 알겠지.

“늦었네?”

“그래, 수련자의 탑은 뭐냐?”

“말 그대로 수련하는 데지. 들어보니까 마법사 조합마법 중에 공격적인 건 실패하면 폭발한다며? 거기선 그걸로 죽어도 경험치 다운이 없대. 대신 비싸고.”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슬슬 시작할 때가 온 건가? 지금껏 생각만 해오던 ‘그것’의 완성을.

“어디에 있는데?”

“마법도시 일리아드.”

“오늘부터 날 찾지 마라.”

그 말과 함께 레이의 손에 1골드를 쥐어주자 멀어져 가는 나를 향해 손까지 흔들어줬다. 녀석의 배웅을 뒤로하고 거금 3골드의 텔레포트 비용을 들여가며 도착한 일리아드. 먼저 찾은 곳은 당연히 수련자의 탑.

“수련실을 빌리고 싶은데요.”

“하루에 2골드입니다.”

“예?!”

“안심하십시오. 현실시간으로 하룹니다.”

하긴, 게임시간으로 하루였다면 쓸 사람이 없겠지. 현실시간 하루도 비싼데.

“먼저 5일치 선불로 내죠. 더 써야 되면 추가로 내겠습니다.”

“좋습니다. 첫 번째 손님이시니 1골드 깎아 드리죠. 101호입니다.”

그에게 9골드를 주자 101이라 적힌 패가 달린 열쇠를 줬다. 그럼 이제 슬슬 시작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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