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꼼수의 달인 (2/43)

꼼수의 달인

째깍째깍.

초조함 때문인지 방안 한 구석에 걸려있는 골동품 시계의 초침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들렸다.

“홍채 인식과 기분 나쁜 몸 스캔은 끝냈고, 이제 서버만 열리면…….”

서버가 열리는 시간까진 대략 5분. 난 오랜만에 1분이 1년처럼 느껴지는 초조함과 두근거림을 맛볼 수 있었다.

“5, 4, 3, 2, 1 접속.”

힐름의 전용 접속기기인 괴상한 헬멧을 뒤집어쓰고 기대감에 들뜬 목소리로 외치자 갑자기 눈앞에 중세풍의 숲과 도시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더니 이내 한 파티가 몬스터를 사냥하는 모습이 보였다.

“드래곤?”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나무에서 새들이 날아오르고 멀리서 거대한 드래곤이 나타났다.

“뻔하군, 이젠 검을 고쳐들고 달려가겠지?”

역시나 화면은 기사의 손을 클로즈업해서 잡았고 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가 파티 원들에게 뭐라 외치자 그들은 앞을 향해 달려갔고 선두의 기사는 오크 한 마리의 목을 힘껏 베어버린 뒤 뒤로 살짝 물러섰다.

가장 속도가 느린 마법사를 포함한 모든 파티 원이 도착해 원형을 이루며 서자 한가운데에 자리한 마법사가 허리춤에서 스크롤로 보이는 종이 두루마리를 힘껏 찢으며 외쳤다.

“보조마법? 아니면 방어 주문?”

그런 나의 예상을 비웃듯 마법사의 머리 위에 뜬 단어는 return, 즉, 귀환이었다. 몇 초간 빛에 휩싸인 그들은 마을의 분수대 앞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냈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 하아…….”

어이없는 상황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아직도 뭔가 남았는지 한숨을 내쉬던 이들 중 하나가 갑자기 당황했고 무슨 일인지 나머지 사람들도 덩달아 허둥댔다. 다시 장소는 좀 전의 사냥터, 그들이 사라졌던 자리에 궁수로 보이는 한 구의 회색 빛 시체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그리고 오프닝 시작 후 처음 들려오는 사람의 목소리.

“니들 다 죽었어!!”

그야말로 피맺힌 절규였다

[힐름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이디와 패스워드를 불러주세요.]

패닉 상태에 빠진 날 다시 제정신으로 돌려놓은 건 부드러운 여인의 목소리였다. 고마운 마음에 생각 같아선 당장이라도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난 그럴 수 없었다. 아직까지는.

“계정 생성.”

눈앞에 다른 게임들도 인해 익숙해진 계정 등록 창이 뜨자 손이 먼저 반응했다.

[순서대로 천천히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까지 손으로 하던 게임을 생각하고 무심결에 움직인 손이 허공을 가르자 보는 사람이 없음에도 왠지 무안해졌다.

“longway, ******, …….”

[계정이 성공적으로 등록되었습니다.]

“후후, 이제 아까 못 들어준 요구를 들어줘 볼까?”

좀 전의 부드러운 목소리를 떠올리자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로그인. 힐름엔 뭣 하러 왔나, 뭐? 이민 왔다고? 그럼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대봐!]

이번엔 산적처럼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쩌렁쩌렁하게 울려왔다. 이거, 어떻게 돼먹은 게임이야?

“longway, ******.”

[허허, 미안하게 됐군. 캐릭터가 없는걸 보니 오늘이 처음인 것 같은데, 만들고 싶다면 캐릭터 생성을 외치게.]

“캐릭터 생성.”

[묻는 말에만 답해라.]

이번엔 사내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클래스를 선택해라. 종류는 기사, 마법사, 궁수, 도둑…….]

“마법사.”

키나 체격, 뭐로 봐도 기사가 제격이지만 마법사를 고른 단 하나의 이유는 내가 ‘판타지 작가’이기 때문이다. 뭐, 아직 출판 같은 건 하지 않은 아마추어지만.

[말 끊지 말고 끝까지 들어라.]

“A.I라는 건가?”

[클래스를 선택해라. 종류는 기사, 마법사, 궁수, 도둑, 정령술사, 프리스트가 있다.]

“마법사.”

[알았다. 이름은?]

“음…….”

[음이라고? 잠깐만 기다려라. 참고로 캐릭터를 지우면 일주일 안에는 다시 만들지 못한다.]

“잠깐!!”

[…….]

난 더욱 소리 높여 악을 쓰듯 고함을 질렀다.

“잠까안!”

[말이…… 짧군.]

마, 말이 짧아? 그럼 존대하라고?

[싫은가? 그럼 난 내 할 일을 하겠다.]

“아니요, 아닙니다. 기다려주세요.”

[훗, 이미 늦었어.]

게임사에서는 이놈을 통해 내게 A.I가 얼마나 사악할 수 있는지, 그리고 이 게임의 NPC는 조심해야 한다는 중대한 사실을 각인시켜 주었다. 아주 확실하게.

“…….”

[이미 누군가 사용하고 있는 이름이군. 그래도 하겠나? 아니라면 다른 이름을 대라.]

누군지는 몰라도 나와 비슷한 상황을 먼저 겪은 듯했다. 겨우 살았군, 이번엔 제대로.

“colonist(개척자).”

[잠시만 기다리도록. …‥등록되었다. 사고치지 말고 열심히 살도록.]

순간 눈앞이 밝아지며 내 몸은 어느덧 낯선 도시의 한복판에 서있었다.

“대단해.”

짧지만 복합적인 뜻이 담겨있는 내 중얼거림은 시끌벅적한 사람들의 소리에 묻혀 빠르게 사라졌다. 간간히 보이는 베타테스트 유저들과 그들에게서 뭔가 조금이라도 얻어 보려 아부하는 이들, 그리고 게임에 대한 정보를 익히려 바삐 움직이는 자들이 뒤섞이자 상당히 소란스러웠다.

“귓속말.”

[원하는 상대의 아이디를 말씀해 주십시오.]

“아론.”

[colonist : 있냐?]

[아론 : 누구?]

[colonist : 나 태연이다. 와서 아이템 좀 뱉어봐.]

[아론 : 지금 어딘데?]

[colonist : 방금 시작했는데 뭘 알겠냐?]

[아론 : 시작하는 곳이란 말이지? 기다려라. 큐베레이 데리고 갈게.]

[colonist : 큐베레이는 또 누구냐?]

[아론 : 상연이. 무슨 생각인지 궁수 골랐더라.]

[colonist : 알아서 하겠지. 일단 오기나 해.]

[아론 : O.K.]

“귓속말 해제.”

귓속말을 사용한 채 말하면 주위의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는다. 입만 뻐금 거리는 것으로 보일 뿐. 독순술이라면 알아맞힐 수 있을지도……. 아무튼 어차피 태진이와 상연이, 아니, 아론과 큐베레이가 올 때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것이므로 이것저것 건드려 보기로 했다.

“스테이터스 창 오픈.”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내 능력치와 착용중인 장비, 레벨, 그리고 경험치를 나타내는 창이 나타났다. 레벨과 경험치는 당연히 1에 0%, 능력치는 마법사답게 지혜와 집중력에 치중되어 있었고 장비는 달랑 셔츠와 반바지뿐이었다.

“스테이터스 창 닫고 아이템 창 오픈.”

내 요구대로 이번엔 아이템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역시나 썰렁, 웬 막대 하나와 50브론즈라는 돈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거 어떻게 꺼내지?”

결국 이런저런 헛소리와 추한 몸짓을 하고 있을 때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어∼.”

“휴……. 왔냐?”

“그런데 무슨 일이냐, 혼자 생 쑈를 하던데.”

“……아이템 창에서 아이템 어떻게 꺼내냐?”

“품속에 손 집어넣고 꺼낼 물건 떠올려봐, 이미지는 아이템 창에서 보고.”

녀석의 말대로 하자 손에 기다란 무언가가 잡히는 느낌이 들었고 그대로 손을 빼자 좀 전의 막대가 쥐어져 있었다.

“다음부턴 모르면 물어봐라. 혼자 헛짓 하지 말고.”

“그런데 상연, 아니 큐베레이는 어디에 버리고 왔어?”

“곧 알바 가야 한다고 혼자 사냥하겠다던데?”

“바쁘신 몸이군.”

“같이 알바하는 애가 마음에 든 모양이더라. 그럼 가자.”

저번에 사귀던 애랑 헤어진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만들려는 건지……. 정말 카사노바들의 머릿속 세계는 이해할 수 없다니까.

“어디 가는데?”

“어디긴, 니 놈 꼴을 보아하니 마법사 고른 것 같은데, 마법은 배워야 할 것 아냐?”

“자식, 가자.”

역시 방향치인 녀석을 믿는 게 아니었다. 결국 우린 10여분이나 헤맨 후 마법사 길드에 도착했다.

“수고하십니다.”

먼저 도착해 마법을 배우던 사람들은 녀석의 등장 멘트에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다시 각자 할 일을 했다.

“어서들 오게나. 길드에 가입하고 싶어서 온 건가, 아니면 마법을 배우고 싶어서 왔나?”

NPC로 보이는 중년의 사내 앞에 서자 사내는 우리의 방문 목적을 물어왔다.

“길드 가입하면 뭣 좀 주려나?”

“야야, 아서라 아서. 엄청 부려먹고 돈도 짜게 주니까. 아, 너 어떤 계열 할 거냐?”

“전부다.”

“뭐? 너 미쳤냐?!”

힐름에는 물, 불, 바람, 땅, 전기, 식물의 6가지 마법 속성이 있지만 실제로 사람들이 배우는 종류는 두세 가지뿐이다. 이유는 종류가 많으면 속성끼리 반발 작용이 일어나는 건지 레벨 올리기가 훨씬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물이나 땅 속성 같은 경우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서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도 홈페이지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어떤 것을 고를까 많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나름대로의 가설을 세우고 실천에 옮기기로 결정했다. 실패하면 캐릭을 지워야겠지만 성공하면 내가 원하는 능력을 갖추게 될 테니 해볼 만한 장사 아니겠어?

“다 생각이 있어서 그러니까 잔말 말고 돈이나 대줘.”

아론은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포기한 듯 1실버를 건넸다.

“옜다, 나중에 캐릭 지워도 난 모른다.”

“그래, 그래. 아저씨 마법 가르쳐 줘요.”

“아저씨라니! 아직 장가도 안 간 총각한테!”

“알았어요, 그럼 형, 가르쳐 주세요.”

“큭큭, 역시 난 동안이란 말이야. 애 셋 딸린 아저씨가 저 어린 것에게 형이라고 불리다니.”

망할……. 또 속았다.

“그래, 뭘 배우고 싶으냐?”

“다요, 전부다. 맨 처음 배울 수 있는 마법 전부다 가르쳐 주세요.”

“오, 전부다? 요즘 익히기 어렵다고 두세 개만 배워가는 근성 없는 놈들이 많아서 걱정했는데. 내 특별히 라이트(light)와 이클립스(eclipse)는 공짜로 가르쳐 주마. 아참, 그리고 한번 정한 속성은 변경할 수 없는 거 알지?”

“네.”

맨 처음 속성을 정하면 추가와 삭제, 어느 쪽도 불가능하다. 따라서 난 이 캐릭을 지우지 않는 한 여섯 가지 속성을 모두 몸에 담고 힘겹게 숙련도를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노가다의 시작인가?

“하압.”

형…… 이라 우기던 NPC는 내게 속성을 불어넣어 준 뒤 마법을 차례로 보여주며 스펠을 가르쳐줬고, 10브론즈의 거스름돈을 남기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다음 사냥감(?)을 찾기 위해.

“다 배웠다, 가자.”

“그래, 그런데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 거냐?”

“글쎄, 비밀이랄까? 후후.”

아론과 나는 마법사 길드를 나와 파티를 맺고 사냥터로 향했다.

“음하하하, 봤느냐? 이 몸의 위대함을.”

“예∼예. 어련하시겠습니까?”

겨우 오크 몇 마리 죽이고 생색은…‥. 하긴, 말이 오크 몇 마리지 장난이 아니다. 보통 게임에선 두어 번의 클릭으로도 쉽게 죽일 수 있는 하찮은 몬스터지만 직접 몸으로 겪어보니 몸이 생각처럼 움직여 주지 않아 게임오버 당할 뻔한 것도 벌써 여러 번이니까.

“또 젠이군, 에잇.”

또 다시 아론의 검이 오크의 목을 갈랐다.

경험치 균등이라 그런지 빨리 오르는데? 벌써 렙이 7이라니.

“이거, 렙 얼마나 올려야 숙련도용 마법 난사하냐?”

“속련도용? 그건 10만 돼도 어느 정도 난사할 수 있을걸? 마나 소비가 거의 없어서.”

“흐음, 그래? 혹시 근처에 호수 같은 거 없냐?”

“마을에서 조금만 가면 있지. 그건 왜?”

“물고기 잡아다 팔 수 있을까?”

“당연하지. 낚시 스킬 올리는 사람이 없어서 가격도 상당할걸? 왜, 낚시 스킬 올리게?”

“그건 아니고, 그럼 낚시 배 같은 것도 빌릴 수 있겠네?”

“그렇지 뭐, 무슨 일인데?”

“아니, 됐어. 쇼크, 쇼크, 쇼크!”

우리가 말하는 동안 리젠된 오크 한 마리가 아론의 뒤쪽으로 걸어왔고 난 전기속성 수련용 마법인 쇼크를 연사 했다. 쇼크라고는 해도 아주 잠시 동안 경직을 일으키는 것뿐이라 이렇게 연속으로 써야만 겨우 마비를 시킬 수 있다.

“꾸엑.”

갑작스런 마비로 오크의 손에 힘이 풀리면서 들고 있던 글레이브를 놓쳐버렸고 앞으로 쓰러진 글레이브는 아론의 엉덩이를 정확히 반으로 나눴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꼈다’랄까?

“이 버러지 같은 것이! 가뜩이나 치질로 고생하고 있는데! 헙!”

녀석은 오크의 정수리에 칼을 박아 넣다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입을 틀어막았다. 치질이라…… 이거지?

“크그그극.”

“태, 태연아. 우린 친구지? 그렇지? 친구의 비밀은…….”

“푸하하핫.”

평소에 깨끗한 척 다 하던 녀석이 치질이라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사건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 걷는 폼이 어정쩡했던 거였군.

“말 안 할 거지? 그렇지?”

당연히 말 안 하지. 대신 내 계획에 필요한 일꾼이 되어줘야겠어.

“큭큭, 당연하지. 우린 친구잖아? 친구의 부탁이라면 당연히 들어줘야지. 그러고 보니 슬슬 마나 포션이 필요할 듯 싶네만, 친구?”

“마나 포션은 비싼데…….”

“그래? 아아, 친구의 부탁을 이렇게 매정히 뿌리치다니, 갑자기 슬퍼지는군. 내일 학교에서…….”

“아, 아냐. 사줄게. 친구의 부탁인데 돈이 없으면 장비를 팔아서라도 사줘야지, 아무렴.”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그렇게까지는 안 해줘도 되는데. 성의가 있으니 받도록 하지. 그보다 일단 렙업을 해야 하지 않겠나?”

“그, 그래.”

아론을 오크들 사이로 내몰고 나는 뒤쪽에서 쇼크를 이용해 오크들의 움직임을 늦추며 숙련도를 올렸다. 그렇게 한 두 시간이나 사냥했을까? 내 레벨은 어느새 11을 넘기고 있었다.

“야, 마을로 가자.”

“갑자기 왜?”

“렙 10넘겼으니 2써클 배워야지.”

“뭐, 무게도 상당한데 정비하고 다시 오지.”

아론이 오크가 남긴 아이템 중 가볍고 가격이 나가는 것만 챙겨와 팔았더니 2실버(1실버=100브론즈) 가량이 나왔는데, 처음부터 모두 내가 갖기로 했었기 때문에 그 돈은 모두 내 마법과 마나 포션이 되었다. 마나 포션이 하나에 20브론즈나 해서 몇 개 사진 못했지만.

“다시 가볼까?”

“그전에 음식점부터 가자.”

“거긴 왜?”

“거기서 계속 있으려면 심심하잖아? 간단한 거라도 사 가지고 가서 먹자. 맛도 느낄 수 있다며?”

괜찮다 생각했는지 아론은 순순히 음식점으로 향했다. 물론 지도 보면서 내가 앞장섰고.

“거기, 자네들.”

음식점 문을 열고 들어가자 NPC로 보이는 아저씨가 다른 손님에게 무언가를 부탁했다가 거절당하고 낙담하다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무슨 일이시죠?”

“난 이 음식점의 주인이라네. 한데 물고기가 떨어져서 물고기 요리를 만들 수가 없어. 그래서 말인데, 물고기를 좀 잡아다 주지 않겠나? 내 값은 후하게 쳐줌세.”

“그 정도쯤이야…….”

“야! 받아들이지 마. 물고기 잡으려면 낚시 스킬이 필요한데, 올리기도 어렵고 너무 오래 걸려. 지금 거절하면 괜찮지만 받아들이고 못한다고 하면 괜히 명성치만 떨어지니까 거절하는 게 나아. 아저씨, 죄송하지만…….”

“하겠습니다.”

“오오, 그래 주겠는가? 특별히 기한은 없지만 될 수 있으면 빨리 좀 부탁 하네.”

[물고기 공급 퀘스트를 받으셨습니다.]

“야!”

“나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걱정 말고 따라오기나 해. 돈 벌게 해줄 테니까.”

아론은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돈을 벌게 해준다는 소리에 순순히 따라왔다. 우리가 간 곳은 근처의 이름 없는 호수였다.

먼저 물고기를 담을 통과 고기를 건져 올릴 뜰채, 그리고 작은 배 한 척을 빌렸다. 물론 아론의 돈으로.

“어떻게 하려고?”

힘을 안올렸다는 이유로 노 젓는 걸 떠맡긴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녀석의 말을 무시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멈춰, 이쯤에서 시작하자.”

“뭘?”

“잠자코 보기나 하다가 고기나 건져. 쇼크, 쇼크, 쇼크, 쇼크…….”

마법 난사란 이런 것이다! 라는 것을 보여주며 호수에 쇼크를 쉴 새 없이 쏟아 부었다. 쇼크는 전기속성이니 물에 잘 통할 테고 그럼 물고기가 경직 돼서 떠오르겠지?

“대박이닷!!”

내 예상이 들어맞았는지 마비된 물고기가 끊임없이 수면으로 떠올랐고, 아론은 신이 나서 뜰채로 물고기를 건져 올렸다. 그렇게 수십 마리를 건져다 팔면 몇 실버씩 되는 거금이 손에 들어왔고, 물고기를 잡아 오르는 경험치와 함께 전기 계열의 숙련도도 빠르게 상승해 갔다.

“야, 대여섯 시간은 지난 것 같은데 지금 몇 시냐?”

4시쯤 접속했으니 아홉시쯤 되려나?

“6시.”

“뭐? 그것밖에 안 됐어?”

“바보야. 여기서 3시간이 현실로 1시간이잖아. 아직 시간은 널널하다고.”

“그래, 여기 물고기 씨를 말려보자!”

우리의 노가다는 아론이 편의점 알바를 갈 때까지 계속됐다.

“아론도 없고, 이제 뭘 한다? 숙련도 창 오픈.”

스테이터스 창이나 아이템 창처럼 내 속성 숙련도를 보여주는 숙련도 창이 나타났다.

“5.3이라, 많이도 올랐군. 진짜 힘든 건 5부터라고 했던가? 음?”

막 숙련도 창을 닫자 ‘렙10대 파티 구합니다.’라고 머리 위에 떠있는 기사가 보였다.

“저거 이름이야, 파티모집이야?”

잠시 생각한 끝에 아론의 머리 위에 저런 게 없었던 것을 떠올리고는 그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렙13 마법사인데 파티 되나요?”

그는 나를 한번 훑어보더니 못 미더운 눈빛으로 대답했다.

“13 맞나요?”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내 장비가 처음 캐릭을 만들었을 때 그대로인 것에 생각이 미치자 한숨만 나왔다. 그럴싸한 옷이라도 사달라고 할걸.

“라이트닝 애로우.”

하는 수 없이 1써클 전기 속성 마법인 라이트닝 애로우를 두 개 만들어 보이고 나서야 겨우 파티에 가입할 수 있었다.

“레벨 15 기사.”

“14 기사.”

“프리스트 11요.”

“구, 궁수 16이요.”

내성적인 듯 말까지 더듬는 여성 궁수 유저를 마지막으로 파티 결성이 끝이 났다. 파티 장까지 해서 기사 셋에 마법사, 궁수, 프리스트 한 명씩. 이 정도면 꽤 쓸 만한 파티로군.

“꾸, 꾸엑.”

“꾸에에엑.”

우리는 아까 아론과 함께 왔던 곳을 지나 좀 더 깊숙이 들어와서 사냥하고 있다. 레벨 차이가 20가량이나 나서 그런지 전사 셋의 실력이 아론에 비해 훨씬 떨어졌지만 뒤에서 내가 쇼크로 움직임을 막고 궁수가 견제하며 프리스트가 힐로 보조를 하자 아까보다도 빠르고 수월하게 사냥이 이루어 졌다.

“대충 정리가 됐군요. 리젠까진 시간이 있으니 좀 쉬죠.”

파티 장은 먼저 바닥에 앉으며 쉴 것을 권유했다.

“쳇, 제멋대로군.”

마음에 안 드는 녀석. 왜냐고? 이건 좀 전의 일이다.

“쇼크, 쇼크, 쇼크.”

오크 한 마리가 나타나자 난 재빨리 쇼크를 걸어 움직임을 막았다.

“법사, 공격을 하라고!!”

파티 장 녀석은 재빨리 달려가 오크의 목을 따고는 내게 신경질 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쇼크, 쇼크.”

등을 돌리는 녀석의 뒤에 또 다시 오크 한 마리가 나타나자 난 주저 없이 쇼크를 날렸다.

“젠장, 그럴 시간에 공격 마법으로 죽이란 말이다!!”

“…….”

더욱 신경질적으로 말하는 녀석에게 난 무언으로 맞섰다. 저런 놈들은 제 풀에 지치기 마련이니까.

“니 놈이 뭔데 내 말을 무시해?! 혼자 잘났다 이거지? 너 같은 놈은 파티에서 빼버리겠어.”

이놈 또라이 아냐? 맘에 안 드니까 떨궈 놓고 가겠다고?

“그만 하시죠.”

놈이 날 파티에서 제외시키려하자 궁수가 말렸다. 저 궁수 이름이 글로린이랬나?

“저런 먹자 놈은 일찌감치 파티에서 빼버려야 합니다.”

그래도 상대가 여자라 그런지 약간 정신을 차리고 존대했다. 내가 먹자라고?

“전 지금까지 저분이 아이템 줍는 걸 못 본 것 같은데요. 그리고 조금 전에도 저분이 아니었으면 님도 부상을 입지 않았을까요?”

“그, 그건…….”

역시 억지 부리는 놈에겐 논리적인 말이 쥐약이다. 글로린이 차분히, 그리고 또박또박 말하자 반박할 말이 없는지 녀석은 침묵했고 더 이상 내 행동에 태클을 걸지 않았다.

“커헉.”

바닥에 앉으려 하는 순간 재수 없는 파티 장의 목에 화살이 날아와 박혔다. 누군지는 몰라도 나이스 샷!!

“뭐, 뭐야?!”

“PK? 아니면 오크 궁수?”

화살이 날아온 방향을 응시하니 오크 궁수 한 마리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제2발을 장전하고 있었다.

“쇼크, 쇼크, 쇼크!”

내 주문에 오크 궁수는 마비됐지만 이미 당겨진 화살이 내 어깨를 훑고 지나갔다. 거리가 있어서 마법이 늦게 도달한 때문이다. 저 망할 놈의 오크가!!

“꾸엑.”

옆에 있던 글로린이란 궁수가 재빨리 화살을 날려 오크의 목을 꿰뚫어 버리고 프리스트가 다가와 치료해 줬지만 흥분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파티 장이 죽어 최고 렙인 글로린이란 궁수가 파티 장이 되었는데, 그녀는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오프닝 때 봤던 귀환 스크롤을 사용했다. 저거… 꽤 비쌀 텐데?

“멋대로 귀환해서 죄송해요. 동료도 한 명 잃었고 마법사 분도 흥분 상태라 다시 젠이 되면 또 누구 하나를 잃어야 할지도 모를 것 같아서요. 제가 먼저 알아내서 잡았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수련만 끝나면 오크들 씨를 말려 버리겠어. 반드시!!

“로그아웃.”

“저, 저기…….”

로그아웃하려하자 궁수가 날 불렀지만 그냥 무시했다. 눈앞이 까맣게 변하며 현실로 돌아오자 상당한 피로감이 느껴져 그대로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했다.

* * *

“삐빅, 삐빅, 삐빅, 삐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비빅!!!”

시계가 요란한 소음을 내며 잠을 깨웠다. 저거, 알람 소리를 바꾸든지 해야지, 머리가 아프군.

“오늘 수업이 있던가?”

글을 쓰기 위해 수업을 비워둔 날이란 걸 떠올리고 더 잘까 생각해 봤지만 그냥 방문을 열고 나왔다. 시간은 8시, 이르지도 늦지도 않은 시간이지만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후우…….”

남자 혼자 사는 자취방이란 게 다 그렇지만 왠지 모를 한숨만은 어쩔 수 없었다. 습관처럼 냉장고 문을 열고 빵과 우유를 꺼내 한 입 베어 물며 글을 쓸까 생각했지만 비몽사몽간에 썼다가는 망칠 것 같았기에 방으로 들어가 헬름 전용기기인 헬멧을 뒤집어썼다.

“접속.”

[입안에 이물질이 있습니다. 게임 중 질식의 위험이 있으니 처리 후 다시 접속해 주십시오.]

“기계가 사람 걱정까지 해주는 군.”

난 빠르게 빵을 씹어 삼킨 뒤 다시 외쳤다.

“접속.”

[꾸욱 꾸꾸꾸우욱 꾸웨웨엑.]

이번엔 말 그대로 돼지 멱따는 소리가 귀를 괴롭혔다.

이, 이번엔 오크냐?! 이미 현실과는 거리가 있는 가상의 세계였지만 왠지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무서운 게임이야…….

“으음?”

순간 눈앞이 밝아지더니 로그아웃했던 그 자리에 서있었다. 어제도 그러더니 좀 전의 그 빛은 홍채 인식이었나? 나름대로의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있을 때 아론으로부터 귓말이 들어왔다.

[아론 : 어디냐? 오늘도 돈 벌어야지?]

[colonist : 그래야지. 어제 거기에서 만나자.]

[아론 : 오케이!!]

“귓속말 해제. 자식, 돈맛을 알았군.”

실소를 머금고 어제 갔던 그 호수에 가자 이미 아론이 장비마저 벗은 채로 기다리고 있었다.

“아주 작정을 했구나?”

“어차피 사냥할 것도 아닌데 무게를 최대한 줄여야 하지 않겠어?”

“하긴. 자, 누가 따라 하기 전에 최대한 벌어두자!!”

“좋았어!”

이걸로 돈이 잘 벌리는 이유는 공급이 없다는 점뿐이었으므로 경쟁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바짝 벌어 둬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대학교 수업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투자하며 폐인 생활을 한 지 2주째에 한 가지 공지가 올라왔다.

“야, 콜!!”

“알아, 나도 지금 보고 있어.”

아론은 내 아이디인 colonist가 부르기 어렵다는 이유로 콜이라 부르고 있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막 도착한 공지 메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힐름의 운영자 제롬입니다.

최근 칼라일 근처 호수에서 물고기가 빠르게 리젠되는 점을 이용, 특수한 방법으로(밝힐 수는 없습니다.) 대량의 물고기를 잡아 상당한 돈을 버시는 분들이 포착되었습니다. 부정한 방법이 아닌 만큼 처벌이나 제지는 하지 않겠습니다만 게임의 밸런스를 생각해서 대신 물고기의 리젠 속도와 양을 조정하였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칼라일이라면 우리가 있던 마을이고, 물고기를 잡아다 파는 것은 우리뿐. 결국 저 공지는 우리에게 보내는 경고와도 같은 것이다.

“플레이어보단 운영자가 빠르군.”

그래도 처음 시작할 때 너무 돈이 많이 들어오는 걸 보고 1주일 안에 경쟁자가 생기거나 운영자의 제지를 받을 걸로 예상했는데, 이 정도면 많이 벌었지.

“어떻게 할 거냐?”

“괜찮아. 슬슬 가격도 떨어지고, 그만두려 했으니까.”

“그럼 돈부터 나누자.”

근데…… 얼마나 벌린 거지? 가져다 파는 건 저 녀석이 전부 담당해서 총액을 모르겠군.

“얼마나 벌린 거냐?”

“놀라지 마라. 무려 45골드다.”

45골드? 실버도 아니고 골드?! 5골드만 있어도 렙20정도가 장비와 물약을 풀로 살 수 있을 텐데?!

“8대2.”

“뭐?”

"쇼크만 수 백 번 외치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냐?”

“하, 하지만 나도 그거 짊어지고 왔다 갔다 하느라 힘들었는데 그냥 5대5 하면 안 될까?”

“7대3.”

“6대4. 더 이상은 안 돼. 나도 2주일간 폐인 생활했다고!!”

“6대4 낙찰, 장비부터 사자.”

“2주 동안이나 사냥을 안 했더니 몸이 근질거려 죽겠다. 이 돈이면 그동안 사고 싶었던 장비들을 모조리……. 크크크.”

“그럼 가볼까?”

배를 반납하고 마을을 향해 걸어가려는 순간 아론이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건넸다.

“리턴?”

“서두르자고!!”

마을까진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지만 녀석은 뭐가 그리도 급한지 한 장에 1실버씩이나 하는 리턴 스크롤을 사용했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며 우리는 무기점으로 이동됐고, 도착하자마자 아론은 내게 27골드를 건네고 무기점 NPC에게 찰싹 달라붙어 장비를 이것저것 둘러보기 시작했다.

“마법사용 아이템을 보고 싶은 데요.”

“목록을 나열해 드리겠습니다.”

마법사 같은 모습을 한 여성 NPC에게 말을 걸자 아이템 목록을 나열해 주었다. 어디보자……. 전부 마법 공격력 상승이네?

“저기…….”

“물건이 마음에 안 드시나요? 저희 마을은 작아서 이 이상의 무기는 구하기 힘든데…….”

“아뇨, 혹시 속성 수련도 올리는걸 보조해 주는 아이템은 없나요?”

“있긴 합니다만 어떤 속성을 원하시는지?”

보통 마법 공격력을 상승시켜주는 걸 찾는데, 내가 특이하게 속성 수련을 보조해주는 아이템을 찾자 마법사는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전부 다요. 그런 게 없으면 종류별로 하나씩.”

“아뇨, 있습니다. 아무도 안 찾아서 말이죠. 한데 가격이…….”

“저 돈 많아요.”

“20골드입니다.”

“네?”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지팡이 하나에 20골드라니, 그 정도면 40레벨도 충분히 장비를 맞출 수 있는 가격이었다. 이걸 꼭 사야하나?

“이름은 training master. 능력은 수련 마법의 능력 상승. 모든 속성 중 한 가지 속성씩 사용자가 그때그때 정해서 보조해주죠. 보조해주는 능력은 착용 시 수련도 4하락.”

“하락? 실컷 올린 수련도를 20골드나 주고 내리라고?!”

어느 샌가 장비를 모두 맞춘 아론이 다가와 내 앞의 여자 상인에게 따졌다. 하지만 NPC는 녀석의 고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말했다.

“물론 착용 시에만 이고, 5일 때 사용하면 1일 때 올리는 정도의 노력만 하면 되죠. 물론 사용하지 않을 때는 원래 수련도가 되죠. 착용전의 위력을 상승시키고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비싼 거 아닌가? 그런 능력이라면 한 가지 속성씩 가진 걸 샀다 되파는 식으로 해도 더 싸게 먹힐 텐데?”

“그렇죠. 하지만 식물 속성 같은 건 쓰는 사람이 없어서 잘 팔지도 않고 여기엔 마지막 옵션이 하나 더 붙어있거든요.”

“마지막 옵션?”

아깐 분명 그런 말 없었는데? 이 NPC 뻥치는 거 아냐? 에이, 설마 NPC가 유저한테 사기를 치겠……구나, 내가 한두 번 속은 것도 아니고…….

“속성 수련도 140%증가. 1오를 게 1.4오르는 거죠.”

“뭐, 뭣이?!”

그런 게 있다면 겨우 20골드일 리가 없을 텐데?

“단, 조건이 붙어요. 사용한 마법으로 10마리 이상의 몬스터가 데미지를 입어야 한다는. 그리고 사용자가 특정 수련도를 모두 마스터할 시 자동소멸하며 타인에게 양도가 불가능합니다.”

“되팔 생각은 하지 말라는 거로군. 좋아, 사지. 그리고 레벨10대 마법사가 찰만한 장비도 챙겨 줘.”

마법사에겐 큰 방어구가 필요 없기 때문에 결국 22골드를 주고 장비와 마나 포션을 가득 챙겼다.

“이제 가 보실까?”

“너, 괜찮겠냐? 그렇게 지출을 많이 하고.”

“이 정도 능력에 20골드면 그리 아깝진 않아.”

“뭐, 알아서 해라. 난 모르겠다.”

녀석은 포기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상점을 나섰다. 이걸로 목표 달성이 빨라진다면 20골드가 대수겠어?

“혹시 공터가 앞에 있는 던젼 같은데 없냐? 몹이 많이 나오고.”

“음……. 있긴 한데, 나오는 몹이 리자드 맨이야.”

“리자드 맨? 쎄냐?”

“렙제 45라면 알겠냐?”

45라, 성공하면 폭렙이고 실패해도 죽기밖에 더하겠어?

“흐음……. 너 원거리 공격 같은 건 못하지? 아, 그럼 날 거기에 데려다주고 큐베레이 불러와라.”

“상연이는 왜?”

“걔 궁수잖아. 렙은 낮아도 원거리 공격이 되는 건 걔뿐이니까 할 수 없지.”

“또 무슨 생각이 있는 거냐? 그럼 내가 아는 궁수 한 명 있는데, 걔 데려와도 될까?”

“어차피 한 명으론 부족할 테니 데려오면 좋지.”

“오케이, 당장 실행하자.”

“야, 데려왔다.”

아론의 뒤로 상연이의 익숙한 얼굴과 여성 유저의 모습이 보였다. 쟤가 아론이 말한 궁수인가?

“왔냐? 처음 뵙겠습니다.”

“저, 처음이 아닌데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였지만 듣기에 큰 무리는 없었다. 구면이라고? 난 댁을 본적이 없는데?

“아, 당신은…….”

자세히 보니 처음 파티 사냥 갔을 때 오크 궁수에게 일격을 날린 그 궁수였다. 글로린 이랬나? 잠깐, 아론과 아는 사이면 클로즈 베타 유저일 텐데 왜 오크 따윌 잡은 거지? 그것도 경험치가 나뉘는 파티사냥으로.

“이쪽은 글로린, 레벨 32의 궁수다. 둘이 어떻게 아는 거야?”

“저번에 첫날, 너 알바 가고 나서 파티 맺고 오크 잡으러 갔었는데 같은 파티였다. 그런데 레벨30대가 왜 오크 따윌 잡은 거죠?”

“아, 저, 그게…….”

“하도 허접해 보여서 키워주려고 했나보지, 맞지?”

“네…….”

뭔가 수상해. 키워주려고 했다면 본 렙을 밝히는 편이 더 좋았을 텐데, 굳이 레벨을 속일 필요가 있었을까? 뭐, 아무래도 상관없겠지.

“그런데 네놈은 준비 끝난 거냐?”

“아직. 거의 끝냈어.”

“이제 슬슬 계획을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하긴, 미리 계획을 일러두는 편이 좋겠지? 약간의 준비가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이번엔 말이야. 이렇게 저렇게 해서 저차여차하면…….”

그리 길지 않은 설명이 끝나자 아론의 얼굴은 크게 일그러졌다.

“결국 나한테 목숨 걸라는 거냐?”

“그렇게도 해석이 되나? 하지만 넌 그 한번으로 끝이잖냐, 수고 좀 해라.”

“호수에서의 일도 있고 하니 속는 셈치고 믿어보마. 대신, 죽으면 위로금은 주는 거지?”

“그래. 준다, 줘. 나 같은 초보한테 돈을 뜯으려 하다니, 수전노 자식.”

“아껴야 잘 사는 법이라네, 친구.”

결국 위로금 1골드를 걸고 녀석을 고용(?)할 수 있었다.

“디그, 디그, 디그, 디그…… 헥헥.”

“대충 끝난 건가?”

물의 수련마법인 아쿠아로 땅을 적시고 땅의 수련마법인 디그로 파놓은 크고 깊은 구덩이를 보며 나는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그래, 이제 가서 몹 몰이나 해와. 한두 마리 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 알지? 포션을 다 쓰는 한이 있어도 성공해야한다.”

“오케이, 맡겨만 두라고. 후우……. 간닷!!”

아론은 숨을 고른 뒤 동굴을 향해 달려갔다. 방어력은 낮지만 가벼운 레더 아머 만을 입은 채로.

“괜찮을까요? 역시 제가 가는 게…….”

“숙녀 분에게 험한 일을 시킬 수야 없죠. 그리고 약간 빠른 것 보다 체력이 많은 쪽이 나을테구요. 포션도 넉넉히 챙겨갔으니 쉽게 죽거나 하진 않을 겁니다.”

“네…….”

두두두두두-. 잠시간 긴장되고 어색한 침묵이 흐른 후, 아론의 성공을 알리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걸음아 날 살려라!!”

녀석의 뒤에는 중무장한 리자드 맨들이 줄지어 따라오고 있었다. 숫자는 대략 열둘 정도?

“콜, 실패하면 넌 내 손에 죽을 줄 알아!!”

다섯 발자국, 넷, 셋, 둘, 하나. 아론이 표시된 지점에서 재빨리 몸을 틀어 오른쪽으로 이동하자 뒤쫓아 오던 리자드 맨들은 관성의 법칙을 깨지 못하고 구덩이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추락 데미지로 땅 속성 수련도 증가, 정신 차릴 새도 없이 2차 공격이 이어졌다.

“아쿠아, 아쿠아, 아쿠아, 아쿠아…….”

피슛.

내가 그들에게 높은 곳에서부터 물을 떨어뜨리자 수련도 상승과 함께 약간의 데미지가 추가되었고, 레이(큐베레이)와 글로린이 활을 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부탁으로 리자드 맨에게 크고 작은 상처만을 입혔을 뿐, 죽이진 않았다.

“쇼크, 쇼크, 쇼크…….”

물을 잔뜩 뒤집어 쓴 놈들은 수련도 9.3에 빛나는 쇼크 마법에 마비되어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고, 두 명의 궁수도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분 후, 리자드 맨은 40대의 레벨이 무색할 정도로 쉽게 전멸했고 모두 상당한 업을 할 수 있었다. 굳이 밝히자면 우리들 중 가장 레벨이 높은 아론이 3업을 해서 38이 됐고, 레이가 7업으로 29, 글로린이 4업으로 36. 마지막으로 나는 9업으로 25가 되었다. 게다가 전기속성 수련도 마스터에 물과 땅의 수련도도 각각 7.6과 7.2. 폭렙이란 게 이런 걸 말하는 거겠지?

“룰룰루.”

어느새 레이와 아론은 약간의 마비를 감수하면서까지 물속에 들어가 리자드 맨들이 남긴 아이템을 줍고 있었다.

“콜, 넌 정말 천재야!!”

“정말 대단해요, 그런 작전을 세우시다니.”

아론의 말에 잘난 척 하려 했지만 옆에서 들려온 글로린의 목소리 때문에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초면, 아니 구면이라도 그런 소릴 하면 사람을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운이 좋았던 거죠.”

“아니에요, 이건 보통 사람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대단한 거예요.”

그녀는 약간 흥분한 듯한 목소리로 말하다가 이내 얼굴을 붉혔다.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흥분했나 봐요.”

“그럴 수도 있죠, 그런데 나이가?”

“네?”

“비슷해 보이는데 계속 존대하기 거북하지 않나요?”

“열아홉이요.”

열아홉이면 한참 공부할 때 아닌가? 자신 있거나, 포기했거나. 둘 중 하나군.

“그럼 동생이네. 말 놔도 되지?”

“그러세요.”

“너도 편하게 해.”

“네, 오…… 빠.”

오빠라, 거의 못 들어본 말이라 그런지 나쁘진 않은데?

“야, 콜. 너 나 좀 보자.”

벌써 아이템 회수를 끝냈는지 아론이 불쑥 나타나 내 목덜미를 잡고 끌고 갔다.

“너, 재연이한테 눈독들이지 마라. 내가 먼저 찍었으니까.”

“쟤 이름이 재연이냐? 근데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혹시 스토킹을…….”

“우리 옆집 산다. 장난 아니니까 명심해둬.”

이 녀석이 여자한테 이렇게 진지한 적이 없었는데, 진심인가 보군.

“글쎄다. 내가 워낙 잘 나서 나한테 반해버리는 건 어쩔 수 없지.”

“그땐…… 친구고 뭐고 사생결단이다.”

녀석, 푹 빠졌군.

“알았다, 알았어. 다 챙겼으면 마을에나 가자. 20넘겼으니 마법도 배우고 견습 딱지도 떼야지.”

아, 힐름에선 레벨 별로 명칭이 바뀌고 그때마다 약간의 보너스를 준다. 마법사인 경우에는 견습 마법사(probation mage Lv 1∼20), 초보 마법사(elementary mage 21∼40), 마법사(mage 41∼60), 노련한 마법사(skillfulness mage 61∼80), 전문 마법사(expert mage 81∼99), 위자드(wizard 100 여성의 경우에는 witch).

다른 대부분의 클래스들도 뒤에 붙는 직업 명칭만 바뀔 뿐인데 굳이 이유라 하자면 퀘스트 수행 시 얻는 명성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그래, 그리고 잘되면 한턱 쏘마.”

“포장마차는 사절이다.”

“내가 그렇게 쪼잔해 보이냐.”

“응.”

“크흠.”

우리가 얘기하는 사이 이번엔 레이와 글로린이 어색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레이는 헛기침으로 구조를 요청했다.

“레이, 잠깐 나 좀 보자.”

아론이 이번엔 레이를 데리고 상담을 시작했다. 쟤 저러다 결혼이라도 하면 의처증 걸리는 거 아냐?

“콜 오빠, 저 구덩이는 어떻게 하죠?”

“그냥 두면 운영자가 알아서 메우겠지. 그럼 그때까지 이 방법은 못 쓰는 건가?”

“아뇨, 이젠 이 방법을 사용하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만.”

아무것도 없던 곳에서 갑자기 파란 머리의 사내가 나타났다. 운영자인가?

“운영자?”

“예, 버그 처리 반을 맡고 있는 제롬입니다.”

“버그? 이건 버그가 아닐 텐데요?”

버그란 소리에 글로린은 움찔했다. 버그는 아니었지만 그에 못지않은 일로 폭렙을 했으니까.

“물론 아니죠.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이번 일로 제지를 가하려는 게 아니라 부탁을 드리러 온 겁니다.”

“부탁?”

“예, colonist님과 아론 님께서 저번에 벌이신 일과 이번 일, 모두 버그 같은 건 없었습니다. 아직 이런 일을 하신 분이 없어서 제가 처리를 맡았을 뿐이죠. 일단 두 가지일 모두 저희 제작팀이 놀랄 만큼 뛰어난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유저들이 따라하면 게임의 밸런스가 무너질 수도 있고, 뒤처리가 쉽지 않거든요. 저번 호수도 물에 계속 미약한 전류가 흘러서 물을 전부 교체해야했고 리젠 시간과 양도 조절한 건 아시죠? 그리고 이번 일도 땅을 전부 메우는 것뿐만 아니라…….”

“보상은?”

“예?”

“합법적 플레이를 하는데 운영자가 힘들다는 이유로 제지한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운영자가 아이템을 줄 수 있는 건 이벤트뿐인데…….”

“그럼 ‘직접’만 아니면 되지 않습니까?”

“무슨 말씀이신지…….”

나와 운영자의 대화를 멀뚱멀뚱 지켜만 보던 셋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직접만 아니면 되는 거잖아? 후후…….

“아이템 빵빵하게 넣은 몬스터 소환을 원합니다.”

“아…….”

모두가 감탄하는군. 역시 난 천재? 내 획기적인 제안에 제롬 씨는 잠시 고민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맞는 말이긴 하지만 약한 몬스터가 좋은걸 떨어뜨리게 해드릴 순 없는 데요.”

“…….”

맞는 말이었기에 침묵이 흘렀다. 하긴, 오크 같은 몬스터가 비싼 아이템을 떨어뜨린다면 나중에 발각되었을 때 어찌해볼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다면…….

“혹시 여기서 마법 배울 수 있나요?”

“레벨만 되신다면 그 정도는 가능합니다. 물론 값은 치르셔야하구요.”

“배우겠습니다.”

NPC 대신 제롬 씨에게 마법을 배우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던젼 보스 급 몬스터가 뭐죠?”

“리자드 마스터입니다. 레벨은 72, 느리긴 하지만 엄청난 파워를 가지고 있죠.”

“장비는?”

“무기는 미스릴이 섞인 바스타드 소드, 방어구는 몇 가지 마법이 걸린 플레이트 메일. 그밖에 몇 가지 장비가 있지만 신경 쓸 건 못되고 나오는 아이템 중 레어도 몇 개 있다고 들었습니다.”

“보스 급이라 그런지 빵빵하군요. 그런데 놈한테도 이 방법이 통할지…….”

“글쎄요, 통하긴 하겠지만 경직 시간은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안 통하면 도망치면 되죠.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롬씨는 의미 불명의 미소를 짓더니 구덩이 한가운데를 향해 걸어들어 갔다. 뭐 하는 짓이야?

“뭡니까?”

“이벤트 성 몬스터는 운영자가 직접 움직이는 게 가능하죠. 열심히 공격해 보세요.”

이거…… 역으로 죽는 거 아냐? 몬스터면 멍청해서 상대하기 쉽지만 사람이 직접 하면 상황이 다르잖아?!

“젠장,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다. 다들 준비해!!”

상의 한마디 없이 내린 결정이었지만 좀 전에 폭렙을 시켜 줘서인지 말을 잘 따라줬다.

“크워어어!!”

캐스팅을 끝낼 시간도 없이 제롬 씨가 리자드 마스터로 변했다.

“라이트닝!!”

기습용으로 준비한 3써클 전격 마법 라이트닝을 날렸지만 제롬씨는 한차례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마법을 없애 버렸다.

“칫, 직접공격은 안 통한다는 건가? 쇼크, 쇼크, 쇼크!!”

그의 주변의 물에 쇼크를 선사하자 간접 공격은 통하는지 약간 경직된 모습을 보였다. 이제 궁수들이 잘해주면 되는 건가?

“차근차근 데미지를 입혀선 못 이겨요, 머리를 노리세요.”

“알았어, 연사!!”

나이는 레이가 많지만 일단 게임에선 선배인 린이 말하자 레이도 군말 없이 따랐다.

“이 정도론 어림없습니다.”

채챙챙.

계속되는 쇼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제롬은 검을 들어 화살을 쳐냈다. 쇼크도 안 통하면 잡을 방법이 없잖아?

“젠장, 저게 뭐가 느려. water prison(물 감옥)!!”

[변형마법 water prison(물 감옥)을 익히셨습니다.]

제롬의 발밑에 고여 있던 물들이 내 의지에 따라 솟아올라 감옥의 쇠창살과 같은 역할을 했다.

변형 마법 첫 성공인가? 마나 소비는 크지만 시간은 벌었군.

“우리가 잡을 수 있을까?”

“죽을 때 죽더라도 그냥은 못 죽어. 갈 데까지 가보자고!!”

맞는 말이다. 죽어도 올려놓은 경험치가 많으니 걱정은 없지만 이왕 죽을 때 죽더라도 곱게 죽는다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땅과 물의 조합, 언밸런스!!”

들썩 들썩.

처음 만들어 보는 조합마법이라 성공할지도 의심스러웠지만 좀 전의 성공도 있고, 지금은 하는 데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기에 주저 없이 실행했다. 하지만 역시나 실패……. 바닥이 약간 들썩거리기만 할 뿐, 내가 원하던 모습은 연출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언밸런스!!”

[조합마법 언밸런스(unbalance)를 익히셨습니다.]

순간 제롬의 왼발이 땅으로 꺼지고 반대쪽 발밑에선 강한 물줄기가 솟아올라 그를 넘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그를 가두던 물줄기에 머리와 몸을 가격 당하자 비틀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쏴!!”

처음 보는 마법에 약간 얼이 빠져있는 둘에게 마나 포션을 들이키며 소리치자 다급히 화살을 날렸지만 그새 정신을 차린 제롬에겐 통하지 않았다.

“망할.”

“죄송해요.”

“말할 시간 있으면 활이나 쏴. 필라 오브 워터(pillar of water)"

제롬이 정신없는 틈을 타 근처까지 접근한 아론이 점프하자 나는 그 틈에 물줄기를 비스듬하게 뿜어 녀석의 발을 밀어 올렸다. 그 덕에 제롬은 예상치 못한 가속이 붙은 녀석의 검을 제대로 피하지 못했고, 급히 몸을 틀어 즉사는 면했지만 목에 깊은 상처가 났다.

“크헉.”

큰 상처를 입고 발악적으로 휘두른 검에 맞아 아론이 멀찌감치 나가 떨어졌지만 입가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놈은 마비됐다, 끝내!!”

아론의 말이 사실인지 제롬의 움직임이 이상하더니 멈춰버렸고 린이 이번엔 재빨리 상황을 파악하고 상처를 향해 철 화살을 명중시켰다.

저런 걸 쓰려면 힘을 많이 찍어야 할 텐데?

“쇼크, 쇼크. 모든 것을 관통하는 전격의 창, 라이트닝 스피어!!”

일단 쇼크로 마비 시간을 늘려 캐스팅 시간을 번 후 라이트닝 스피어를 날렸다. 라이트닝 스피어는 약간의 물리력을 발휘해 철 화살을 더욱 깊이 박아 넣었고 쇼크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전류를 제롬의 몸에 흘려 넣었다.

“키아아아악.”

그는 잠시 고통에 몸부림치더니 이내 몸이 회색으로 물들어 갔다.

이, 이긴 건가?

“어찌어찌 잡긴 잡았군. 아론, 살아있냐!!”

“죽지 못해 살아있다.”

“헛소리하는 걸 보니 팔팔한가 보구나. 마비된 건 어떻게 안 거야?”

“벨 때 잠깐 스파크가 보였어.”

아론은 HP가 간당간당한지 남은 포션을 몽땅 입에 부으며 대답했다.

아이템 꺼내려면 한참 있어야겠는데?

“으윽……. 힘드시면 제가 꺼내 드리죠. 솔직히 전멸시킬 자신이 있었는데, 대단하시군요. 변형 마법과 조합마법을 그렇게 쉽게 만드시다니.”

“생각 없이 쓰다 보니……. 운이 좋았죠. 그보다, 저게 뭐가 느리단 겁니까!!”

“하하……. 그거야 다른 보스 급들에 비하면 그렇다는 거지요.”

태연하게 말하는 제롬씨를 보자 살심이 치밀어 올랐지만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자제했다. 사실은 그럴 만한 힘도 남아 있지 않아서였지만.

“후우…….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마음에 두지는 않겠습니다. 아이템은?”

“제가 말이 많았군요. 한번 죽었더니 정신이 없어서, 여기 있습니다.”

“운영자도 죽으면 고통을 받나요?”

“예, 보통 운영자 상태일 때야 죽을 일도 없지만 몬스터로 변신하면 예외일수 없죠.”

제롬씨가 건넨 아이템은 총 5개. 하나같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들뿐이었다.

이제 돈 걱정은 안 하겠군. 아참, 레벨은?

“스테이터스 창 오픈.”

제롬씨가 건네준 아이템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셋은 내 행동을 보고 따라서 레벨 확인에 들어갔다.

“헉.”

스테이터스 창에 표시된 내 레벨은 무려 41. 16이나 오른 것이다. 다른 애들도 마찬가지인지 지쳐있던 얼굴이 환해졌고 난 이 틈에 아이템을 가지고 도망가볼까 진지하게 고민해봤다.

“레벨 72의 보스급 몬스터를 잡으셨으니 또 폭렙 하셨을 테고, 한 번에 이렇게 렙을 많이 올리게 했으니 시말서 써야할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전 이만 던젼을 폐쇄하고 바닥 복구해야겠습니다. 마을로 보내드리면 되죠?”

“네, 될 수 있으면 무기점 앞으로요.”

“아참, 이제 디그로 파지는 땅의 깊이에도 제한을 걸겠습니다. 뭐, 이제 colonist님에게는 별 상관이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럼 안녕히.”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우리 몸은 이미 빛에 휩싸여 마을로 돌아와 있었다. 내겐 상관이 없다? 혹시?!

“숙련도 창 오픈.”

역시나, 리자드 맨을 잡으면서 마스터한 전기속성 이외에도 물과 땅의 속성이 각각 9.6과 9.1로 마스터에 가까워져 있었다.

조합, 변형 마법 때문인가? 숙련도에 의해 좌우되니 맞는 것 같지? 9까지야 지팡이 덕분에 쉬우니까.

“글로린, 그 철 화살은 어떻게 쓴 거야? 그런 걸 사용하려면 힘을 많이 찍어야 할 텐데.”

“린, 린이라고 불러주세요, 오빠.”

“그래, 린.”

“리자드 맨 잡고 나서 남은 포인트를 대부분 힘에 투자했어요.”

“우리 때문에 스탯 엉망 된 거 아니야?”

“아니에요, 리자드 마스터잡고 오른 걸로 커버됐는걸요.”

“야, 감정 안 해?”

“알았다, 알았어. 감정해 주세요.”

NPC에게 감정하지 않아도 감정주문서라는 게 존재하긴 하지만 한 장에 1골드나 하는 고가이기 때문에 개당 10실버밖에 안 받는 무기점에서 하는 것이다.

10실버에 ‘밖에’라는 말을 붙이다니, 나도 이젠 통이 커졌군.

“50실버, 선불.”

“여기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길…….”

NPC는 안으로 들어가 주먹만 한 돋보기를 가지고 나오더니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5분을 들여다봤을까?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감정이 끝났습니다.”

초보자들로 붐비는 가게 탓인지 무심히 말을 하며 아이템을 건네준 뒤 다른 손님을 향해 몸을 돌렸다.

[리자드 마스터의 바스타드 소드]

리자드 맨 계열에게 추가 데미지. 힘+5. 리자드 맨을 100마리 이상 죽이면 꺼내 놓은 동안 리자드 맨 계열의 접근 방지.

[엘프의 목걸이.]

민첩성+5. 궁수 모든 스킬 +2.

[이탈의 망토.]

마나 40을 사용하여 가장 최근에 들렀던 마을로 이동할 수 있다. 1인용.

[신의 눈]

시야 확대. 민첩성+3 눈앞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리자드 마스터의 증표 : 퀘스트 아이템]

의뢰소에 가져다주면 보상을 해준다.

“헉!”

“커, 커헉.”

“어, 엄청나잖아.”

웅성웅성. 우리의 비명소리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급히 아이템을 치우고 별일 아닌 척 했지만 언뜻 보기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것들이라 모두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딴 데로 가자.”

“그, 그래.”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 몇몇의 인물이 뒤쫓아 나왔다. 아마도 우리를 협박, PK해서 아이템을 강탈하려는 거겠지.

“귓속말, 아론.”

[colonist : 미행이 있다.]

[아론 : 나도 봤어. 어떻게 하지? 마을 안에서야 안전하겠지만 밖에서 뒤치기라도 당하면 곤란한데.]

[colonist : 아직 우린 우리 레벨대의 전투법을 모르니 할 수 없지. 내가 따돌릴 테니 애들이랑 2시 방향 무기점으로 가있어.]

“귓속말 해제.”

우리는 거짓으로 헤어지는 척하며 그들의 시선을 나에게로 고정시켰다.

“혼자이긴 하지만 사냥을 가볼까?”

씨익. 들으라고 한 소리인지도 모르고 뒤쫓아 오는 이들은 만족스런 웃음을 지었다. 나는 걸으면서 슬며시 품에 손을 넣어 준비한 것을 언제든 꺼낼 수 있게 했다.

“거기 마법사 양반, 좋게 말할 때 아까 감정한 아이템 놓고 꺼져라.”

“싫다면?”

“모두 떨굴 때까지 죽여주마.”

“즐!! 체인 쇼크(chain shock).”

[변형마법 체인쇼크를 익히셨습니다]

쇼크를 널리 알려져 있는 체인 라이트닝처럼 변형시켜 그들의 움직임을 늦춘 뒤 품에서 이탈의 망토를 꺼내 두르며 마나를 불어넣자 망토가 파랗게 빛났다.

그 모습에 당황한 강도(?)들은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예상보다 빠른 발동 속도 덕분에 그들과 내 사이의 거리가 반절로 좁혀 졌을 때 자리를 뜰 수 있었고, 그들과 다시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일행이 기다리는 무기점으로 달렸다.

“여긴 여전히 한적하군.”

처음 시작했을 때 아론의 놀라운 방향감각으로 마법사 길드를 찾아 헤매다가 우연히 찾은 상점은 좀 전의 그곳과는 달리 파리만 날리고 있었다.

“어떻게 할래. 쓸까, 팔까?”

“글쎄, 팔려 해도 제값 주고 살만한 재력을 가진 사람도 몇 없을 테고…….”

“쓰자, 어차피 레어면 이걸로 렙 올리고 나중에 팔아도 많이 받을 거 아냐?”

“맞아요, 오빠. 당장 돈이 필요한 것도 아닌데 우리가 써요.”

린이 쓰자는 쪽으로 나서자 아론도 바로 맞장구를 쳤다. 사내자식이 줏대 없기는…….

“그럼 하나씩 나누자. 먼저 검은 아론, 목걸이는 여자인 린이 갖는 게 좋겠지? 고글은 레이고 난 망토인가? 마지막 남은 이 구슬은…… 사용할까?”

“당연하지. 리자드 마스터 퀘스튼데 경험치를 좀 주겠냐?”

“하긴, 근데 의뢰소는 어디 있는지 알아?”

“글쎄, 찾다보면 나오겠지.”

“의뢰소는 이 마을에 없습니다.”

갑자기 NPC가 끼어들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알려줬다. 굳이 묻지 않아도 알아서 정보를 주다니, 역시 A.I는 편하다니까.

“그럼?”

“이 근처에는 리자드 맨 던젼을 제외하면 초보자들이 사냥하는 곳뿐이니 의뢰소 같은 게 있을 리 없죠. NPC들이 주는 작은 퀘스트라면 모를까, 리자드 마스터 처치 같은 큰 의뢰는 웬만한 도시 정도는 가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다른 도시로 가야하는 건가? 하긴, 리자드 맨 던젼에서 죽칠 게 아니라면 그 편도 좋겠지.

제한 레벨에서 4밖에 차이나지 않으니 가도 별 상관없지 않느냐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41이면 이제 막 5써클을 배웠다는 것이고 제한 레벨인 45정도면 5써클에 능숙하고도 남을 정도이니 그 차이는 쉽게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대단하다. 게다가 ‘제한’이라는 것은 ‘최소한’을 의미하는 것이니 꼼수로 폭렙한 우리에게 무리가 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의뢰소가 있는 가장 가까운 도시가 어디죠?”

“뤼크레스. 걸어서 3일 정도 거리죠.”

“그래도…… 가야겠지?”

“당연하지!! 또 렙업 할 텐데 3일 걷는 게 대수냐?”

3일이라, 현실로 따져도 꼬박 하루는 걸린다는 소리다. 도중에 몬스터도 나올 테고 레벨이 높아 졌어도 포션 값, 화살 값이 만만치 않을 텐데…… 아!

“가려면 포션, 화살 소모가 많겠지? 아론, 레이. 아이템 창 연다. 실시.”

“뭐?”

“숙녀 앞에서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나도 좋습니까, 실시.”

“시, 실시!!”

저번 아론의 치질 사건을 포함해 녀석들의 치부가 상당히 많이 내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다. 나야 내 성격상 그런 걸 쉽게 만들지도 않고 녀석들이 기억하지도 못하니 협박이 가능한 것이지만.

“아까 리자드 맨들이 떨군 아이템을 모두 꺼낸다. 실시.”

“실시!!”

군데군데 찌그러진 브레스트 아머에서 리자드 마스터에게 일격을 날렸던 검까지 하나씩 꺼낸 아이템들은 탁자를 가득 메웠다.

저 검이 유용해 보이긴 하지만 아론은 리자드 마스터가 떨군 검이 있으니 필요 없겠지.

“이걸 다 챙기려고 했냐.”

“그게 아니라 말할 시간이…….”

“나도 리자드 마스터에 정신이 팔려서 깜박…….”

“됐다. 아저씨, 이것들 얼마나 쳐줄래요?”

하긴, 나도 방금 겨우 생각해 냈으니까. 마법 걸린 것도 있으니 몇 골드는 족히 나오겠지?

“대체…… 어디서 사냥한 겁니까?”

“무슨 문제라도?”

“얘기를 들어 보니 리자드 마스터를 잡은 것 같은데, 왜 이것들 전부에 전기 속성이 붙어있냐는 말입니다.”

“전기 속성이 붙으면 안 되는 이유라도?”

“그야 당연하죠, 리자드 마스터는 리자드 맨 던젼에만 서식하니 거길 다녀오신 모양인데, 리자드 맨은 전기 속성 몬스터가 아니란 말입니다!!”

리자드 맨이 전기 속성이 아니라 그들이 떨군 아이템에 전기 속성이 붙을 수 없다? 몬스터의 속성에 따라 붙는 속성도 다른가 보군. 한 두 개면 플레이어가 죽어서 떨군거라 생각 할 수도 있지만 숫자가 숫자이니 그런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버그 신고하면 보상은 없냐?”

“게임 상의 이점은 없지만 상용화하고 나서 얼마간 공짜로 할 수 있다고 들었어요.”

“고마워, 린. 제롬씨 좀 불러야겠다. 귓속말, 제롬.”

[colonist : 잠시 와주시겠습니까?]

[제롬 : 무슨 일이시죠?.]

[colonist : 버그를 발견한 것 같은데요.]

[제롬 : 그럼 당장 가야죠. 잠시만 기다리세요.]

[colonist : 여기가 어디냐 하면…….]

“휴,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롬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운영자에게 이 정도 추적은 간단한 건가?

“귓속말 해제. 빨리 오셨네요.”

“사실은 아까 얘기했던 맵 복구와 수정을 하고 있었는데 귓말 듣고 도망쳐 나왔습니다. 신참이라고 너무 부려먹네요, 버그는 어디에?”

신참이 일하기 싫어서 도망쳐 오다니, 빠졌군. 보통 게임이 아니라 상당히 복잡할 것 같기는 하지만.

“이 아이템들 좀 봐주시겠습니까?”

“아까 리자드 맨들에게 회수하신 아이템 아닙니까? 특이한 점이라곤 전기 속성이 붙어있는 정도?”

그러고도 무슨 뜻인지 모르다니. 이 인간, 운영자 맞아? 어떻게 NPC보다 더 모를 수가 있지?

“……이 NPC의 말에 따르면 리자드 맨은 전기 속성이 붙은 아이템을 절.대.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그런가요? 제가 아이템이나 몬스터 담당이 아니라 그런 것에 대한 정보가 없네요. 하하……. 잠시만요.”

아이템이나 몬스터 담당이 아니기 때문이 아니라 신참이라 그런 것 같은데. 잠깐, 그렇다는 것은 우리에게 준 아이템도 뭔지 모르고 막 줬다는 얘기일 테고, 그래서 레어가 많았던 건가? 제롬씨는 다른 운영자에게 도움을 구하는지 입만 뻥긋거렸다.

“그럼 이것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회수 당하는 거예요?”

“야, 그럼 화살 값은!”

화살 값이 은근히 걱정 됐는지 레이는 화살 값 걱정부터 한다. 그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내가 운영자도 아니고……. 확실히 이 상태에서는 회수 당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적어도 몇 달간은 요즘 공짜라는 혜택을 얻을 테고, 상대가 저 제롬이라면 어떻게든 말로 구워삶을 자신이 있으니 걱정 없다고!!

“기다려봐. 생각이 있으니까.”

얘기가 길어지는 듯 제롬씨는 계속해서 귓속말을 하고 있었고 나는 슬쩍 무기점 NPC에게 다가가 은밀한 제안을 했다.

“흠흠, 왜 버그인지는 대충 알겠군요. 혹시 의심되는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제 생각엔 아까 수없이 사용한 쇼크 때문에 전기 속성이 깃들어 버린 것 같은데요.”

“그럴 듯하군요. 자세한 건 조사해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 아이템은 회수해가겠습니다.”

“잠깐.”

제롬씨가 막 품속으로 아이템들을 집어넣으려는 순간, 나는 그의 행동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후후, 그렇게 쉽게 내줄 수는 없지.

“왜 그러시죠? 보상이라면 버그가 확인되는 데로 통보해 드리겠습니다.”

“그건 당연한 거고, 우리가 몬스터 잡아서 아이템 떨어진 게 버그인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죠. 하지만 이건 증거로…….”

“증거, 물론 있어야죠. 하지만 그 아이템에 전기 속성이 붙지 않았을 경우의 돈은 주셔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음……. 그 말도 일리가 있네요. 그럼 얼마나?”

“가격은 NPC에게 묻는 것이 정확할 것 같은데요.”

제롬씨는 수긍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NPC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얼맙니까?”

“도, 도합 시, 시, 십 골드입니다.”

“저 NPC가 왜 말을 더듬죠?”

갑자기 말을 더듬는 NPC에 이상함을 느꼈는지 제롬씨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자, 침착하게 하자, 침착하게.

“운영자를 처음 봐서 그런가 보죠. 이게 다 드림(dream)사의 A.I기술이 뛰어나다는 증거 아니겠어요?”

“하하, 그런가요? 자, 여기 10골드입니다. 수고하세요.”

제롬씨는 회사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의심 없이 10골드를 내주고 퇴장했다.

회사 칭찬에 저 정도로 좋아한다면 회사 간부나 사장 아들쯤이라도 되나보지?

“콜!! 아무리 리자드 맨이 준거라지만 9개에 10골드라니, 뭐가 그렇게 비싸냐?”

“맞아요, 오빠. 하나에 1골드가 넘다니, 레벨 60대인 트롤도 특별한 아이템이 아니고는 40실버짜리 정도밖에 안 떨군다던데.”

“가만히 좀 있어봐. 아저씨, 약속한 1골드입니다.”

“고, 고맙네.”

내가 NPC에게 1골드나 되는 거금을 건네자 무슨 일인지 영문을 모르는 셋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날 바라봤다.

이번 일의 1등 공신은 저 NPC인데 1골드면 작은 거지.

“그렇게 보지 마라, 부담스럽다.”

“오빠, 왜 저 NPC에게 1골드나 주신 거예요?”

그나마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린이 물어왔다. 아주 좋은 질문이야, 학생

“약속했으니까.”

“예? 그게 무슨…….”

“저 NPC랑 짜고 운영자를 속였거든. 9개에 10골드,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어떻게 NPC가 거짓말을……. 아니, 그보다 걸리면 어쩌시려고…….”

내가 그 정도 생각도 안하고 일을 벌였을까봐? 날 그렇게 허술하게 보면 섭하지.

“문제없어, 거짓말 한 건 내가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만, 그럼 저 NPC는 어떻게 사기를 칠 수 있는 거지?”

어느새 정신을 차린 아론이 질문을 던졌다.

그거야 간단하지. 잘 만들어진 NPC의 약점이랄까?

“저 NPC가 처음 만들어 졌을 때 어겨서는 안 되는 규칙 같은 게 정해졌겠지? 그럼 그게 뭘까?”

“상인 계통이니까 아마도 유저에게 사기 칠 수 없는 거랑 유저의 물건을 떼어먹지 못하는 것, 또…….”

“바로 그거야, 유.저.에.게. 사기를 치지 못한다는 거지.”

“그럼?”

이 정도까지 얘기했는데 못 알아듣다니, 학습 능력들이 떨어지는군. 하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는 법이니까

“유저가 아닌 제롬씨에게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는 거지. 그래서 물건값을 뻥튀기 해 부를 수 있던 거고.”

“원래 가격은?”

“글쎄, 아무리 비싸도 3골드는 안 넘을 걸?”

내 뛰어난 계략에 모두 할 말을 잊은 채 멍하니 서있었다. 그렇게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고…….

“넌 역시 천재야!!”

“오빠, 너무 대단해요.”

“솔직히 말해, 너 운영자지?!”

“니들, 내가 이런 게임 만들어지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잊었냐? A.I의 특성쯤은 기본이지.”

그 말에 아론과 레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 도피를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기다리다 못해 소설로나마 끄적 거린 적도 있는데 이 정도야 우습지 뭐, 습작에 그치긴 했지만

“우선 장비부터 맞추자. 레벨에 맞지도 않는 장비를 차고 다니긴 그렇잖아?”

“네, 그런데…….”

“아아, 돈 걱정 같은 건 안 해도 돼. 이것 말고도 한탕(?) 해놓은 게 있어서 넉넉하니까. 게다가 아론과 나는 무기를 살 필요도 없고.”

우리처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보통 레벨을 올리면서 조금씩 모은 돈으로 겨우 장비를 맞춘다. 다음 레벨 장비를 사고 약간 남을 정도로 밸런스 조정을 해놨으니까. 따라서 정석 플레이를 해오던 레이와 린에게 그만한 돈이 있을 리는 만무했고 린의 장비를 아론의 사비로, 레이와 내 장비는 좀 전의 그 돈으로 마련했다. 역시 레벨이 레벨이라 나와 아론의 무기를 사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돈이 깨졌고, 화살과 포션을 사자 남은 돈은 겨우 몇 실버뿐이었다.

“뭐, 퀘스트 보상으로 돈도 좀 주겠지. 사냥하면서 가면 약간은 벌릴 테고.”

린은 미안한 표정이었지만 레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저놈이 안면몰수신공을 대성한 게 엊그제 일도 아니니, 이해해야지.

[15시입니다. 로그아웃하시겠습니까?]

“아니? 야, 나 간다. 이따 올 수 있으면 올게.”

“왜? 글 쓰려고?”

“그것도 있고, 2주간 폐인 생활했는데 좀 쉬어야지.”

“그래? 그럼 난 린이랑 파티사냥이나 가야겠다.”

저놈, 나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는데 아직도 팔팔하네? 누가 무한 체력 아니랄까봐…….

“넌 괜찮냐?”

“나야 너 같은 약골하곤 다르지. 그리고 러브러브 파워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

“그래, 잘해봐라.”

“오빠, 아니에요. 그냥 아론 오빠가 농담하는…….”

아론의 발언에 린이 당황하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얼굴이 빨개지는 게 꽤 귀엽네?

“나도 사냥이나 가야겠다. 그렇다고 너희한테 붙을 건 아니니까 걱정 마. 어차피 레벨도 안 맞는데 괜히 가서 오붓한 시간을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레이마저 거들자 린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좀 심했나? 반응이 약간 심한 것 같은데……. 녀석, 마음잡으려면 고생 좀 하겠어.

“나중에 보자. 로그아웃.”

눈앞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하며 약간의 어지러움과 허기가 느껴지자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비틀거리며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자 쌓여있는 빵과 우유가 보였다. 습관처럼 빵 하나와 우유 두 개를 집어들고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컴퓨터 켜.”

내 음성에 반응해 컴퓨터에 전원이 들어왔고, 인터넷 연결에 메일 확인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메일이 104통? 이주간 안 들어 왔더니 무지하게 쌓였구만.

“메일 확인.”

역시나 주소를 거의 퍼트리지 않는 나에게 오는 메일은 단 3종류였다. 첫째는 메일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스팸메일. 필터링 프로그램을 개발한 만큼 우회하는 프로그램도 개발돼서 이젠 걸러내는 걸 포기한 상태다. 두 번째는 2주간의 잠적으로 인한 독자들의 압박이 가득 담긴 메일. 마지막 세 번째는 카페 및 힐름 같은 게임 회사에서 오는 메일. 어라? 힐름?

“힐름에서 왜?”

두 가지 일 모두 좋게 해결됐고 방금 사기 친 일이라면 게임 상에서 얘기하면 될 테니 메일이 올 이유 따윈 없다. 그런데 왜?

여러 추측들은 접어두고 메일을 열어봤다. 보면 확실히 알 수 있을 테니까

“에?”

[버그 신고에 대한 보상 안내.]

안녕하십니까. 힐름입니다.

이렇게 메일을 보낸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귀하께서 신고해 주신 버그에 대한 보상을 안내해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귀하께서 신고해 주신 버그는 사실로 판명 되었으며 이에 보답하는 차원에서 1년 무료 쿠폰을 드립니다. 쿠폰 번호는 sorthow3pwe4이며 앞으로도 많은 지적 부탁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1년씩이나? 그럼 또 하나 찾으면 2년? 나중에 제롬씨한테 물어봐야겠다.

나머지 메일은 가볍게 삭제해주고 기쁜 마음으로 글 쓰는데 열중했다. 많이 비축해둬야 힐름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오늘의 마지막 수업인 초급 일본어가 끝나고 강의실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웬만해선 울리지 않는 핸드폰이 긴 잠을 깨고 울부짖었다.

“왜?”

핸드폰에 익숙한 번호와 함께 태진이의 모습이 보였다. 평소엔 전화 없이 나타나서 이리저리 끌고 다니더니 웬일로 전화를? 그것도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웃으면서.

-정문인데, 와라.

“무슨 일이 길래 안 하던 전화질이냐?”

-오면 알아, 10분 안에 안 오면 팔아(?)버린다.

녀석은 팔아버리겠다는 섬뜩한 말을 남기고 미련 없이 전화를 끊었다. 여기서 정문까지는 걸어서 15분, 뛰어도 될까 말까한 아슬아슬한 시간이었기에 욕 한마디 내뱉지 못하고 전력 질주를 시작했다.

인신매매도 아니고 무슨 소리냐고? 내 자랑 같지만 난 꽤 준수한 외모에 나쁘지 않은 머리와 집안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대학에 와서 고백도 몇 번 받았는데, 아직 잊지 못하는 이가 있어 매번 정중히 거절했다.

잠시 얘기가 샜는데, 아무튼 어느 날 태연이가 술값이 모자라자 즉석에서 노예팅을 벌여 날 팔아(!)버린 적이 있었다. 앞서 말했듯 준수한 외모 탓에 노예팅이 벌어지기 무섭게 낙찰되었고, 예상치 못한 전개에 당황해하는 동안 일행은 은신술이라도 사용한 듯 사람들 속에 녹아 사라졌다.

어쩔 수 없이 주인님(?!)에게 끌려 다니다가 그녀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탈출해서 그 길로 핸드폰의 번호를 바꾸고 한동안 잠수를 탄 덕에 나머지 6일간의 노예 생활은(노예팅에 팔리면 기본적으로 1주일간은 끌려 다녀야 한다.)면했지만 그 후로 나이트에 가면 긴장하는 버릇이 생겼다.

아무튼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엔 태진, 상연과 함께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여기야, 여기.”

내 고생은 생각지도 않는 듯 태진이는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흔들었다.

저걸 죽여, 살려?

“9분 51초, 아깝군.”

“헉헉, 젠장. 그 거리에 10분이라니, 날 말려 죽일 셈이냐!!”

“미친 듯이 운동할 때는 8분대에도 주파하던 놈이 많이 약해 졌구나.”

고3때, 백년 넘게 이어져온 망할 놈의 수능을 끝내고 한동안 헬스, 권투, 태권도 등을 하며 미친 듯이 몸을 굴린 적이 있었다. 몸만들기 같은 목표가 아니라 단순히 몸을 혹사시켜서 누군가에 대한 생각을 떨쳐 버리려는 것이었지만…….

“옛날 얘긴 꺼내지 말자.”

“흠흠, 그래. 재연이도 왔는데 처져있으면 안되지.”

그러고 보니 쟤가 웬일로 여기에…… 고등학생이면 학교에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럼 땡땡이?!

“학교는 안 가?”

“아, 선생님들한테 수시 쓰기 전에 학교들 좀 둘러본다고 말하고 나왔어요.”

수, 수시!! 수시를, 그것도 꽤 높은 우리학교를 쓸 정도라면 어지간히 공부를 잘하는 게 아닌데. 게다가 그렇게 말한다고 선생들이 보내주다니, 그럼 말로만 듣던 모범생?!

“고, 공부를 잘하나봐?”

“그저 그런 정도에요.”

“모의고사 점수는 얼마나?”

“운 좋으면 다 맞을 때도 있고, 어려우면 985정도?”

“!!”

약 100년 전 총점400(원점수)이던 것이 총점500점, 변환으로 1천 점까지 늘린 이후 수능 점수는 계속 상승했고 오늘날에는 원점수가 1천 점에 변환하면 2천 점이 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그런데 못 봐도 985?! 그런 점수라면 우리 학교보다 훨씬 좋은 곳도 많을 텐데 어째서? 우리 학교가 국립이라 등록금이 적긴 해도 더 좋고 국립인 곳도 있을 텐데, 게다가 저 정도 실력이면 장학금도 문제없겠고.

“그런데 왜 우리 학교에?”

“그, 그게…….”

“다 이몸 때문 아니겠냐, 뭘 그런 걸 묻고 그래. 자, 일단 나가자.”

뭔가 이상했지만 개인 사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뒤따라 나갔다.

일단 나오래서 나오긴 했지만 이제 뭘 하지? 딱히 할 것도 없는데.

“어디로 갈 건데?”

“글쎄, 나이트나…….”

이 대낮에? 그리고…….

“재연이를 들여 보내줄까? 난 아니다에 올인.”

“큭, 그럼 넷룸이라도…….”

“그런 건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 굳이 밖에서 돈 쓸 이유가 없지.”

“그, 그럼 노래방이나 가자.”

“뭐, 썩 내키지는 않는다만…….”

“결정했으면 렛츠 고!!”

태진이는 우리를 거의 끌다시피 해 노래방에 데려갔다. 2시간쯤 부르고 나오니 벌써 하늘은 붉게 물들어갔고 간단히 저녁만 먹은 뒤 헤어졌다.

“쳇, 끌고 왔으면 지가 쏠 것이지 달랑 2인분만 내고 가버리다니.”

투덜대다보니 어느 덧 장소는 집 앞이었다. 내 방은 4층, 엘리베이터도 없어서 걸어 올라가야 했지만 고등학교 때 학교가 거의 산 수준의 높이에 있던 덕에 저절로 강해진 다리 힘으로 어렵지 않게 올라 갈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옷을 벗어 던지고 또 다른 세상의 나를 찾았다.

“접속, longway ******.”

[아론 : 마을 북동쪽 출구로 와라.]

접속을 하자마자 아론에게서 귓말이 날아왔다. 내일은 토요일, 아무래도 뤼크레스로 향할 모양인데 우리 같은 대학생은 수업이 없으니 괜찮다고 해도 재연이는? 오늘 하루만이 아니라 며칠간 쉬어 주는 건가?

“자, 지금부터 뤼크레스로 간다. 준비는 됐지?”

“뭐, 특별히 준비랄 게 있냐. 나야 마나가 무기인데.”

“하긴, 나도 마법사나 할 걸 그랬나? 기사는 무기 값이 장난 아니란 말이야.”

“글쎄, 나야 지팡이가 특이해서 그런 거고, 다른 사람들은 다를 걸.”

“음……. 그럴 수도 있겠군. 아무튼 가자.”

기사 한 명에 마법사 하나, 궁수 둘. 그리 썩 좋은 파티는 아니지만 던젼 탐사도 아니고 단순히 옆 마을로의 이동이니 문제 될 건 없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 했었다.

“거의 다 온 건가? 크게 어려운 몬스터는 없었지만 프리스트가 없으니 포션 소모가 많은데. 다음부터 사냥 갈 때 프리스트 한 명쯤은 채워야겠어.”

뤼크레스로 가기 위해 칼라일을 떠난 지 하루가 넘었다. 길을 따라 걸어선지 나오는 몬스터는 마비 침이 성가신 고블린과 오크떼, 코볼트등 어렵지 않은 것들뿐이었지만 파티 중에 프리스트가 없어서인지 포션의 소비가 극심했고, 남은 수량은 화살 300여 발(린과 레이 것 합쳐서), 체력 회복 포션(중급)20여 개, 마나 포션(중급)8개(나밖에 사용하는 사람이 없어서 얼마 안 샀다.)뿐이었다.

“응?”

마을을 얼마 안 남기고 길옆에 떨어진 조그만 보석이 빛을 반사시켰다. 아론은 눈에 광채를 띄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뒤 쪼르르르 달려가서 날름 보석을 집어 들었다. 그때 근처 나무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며 누군가가 아론을 향해 뛰어 내렸다.

“윈드 볼(wind ball)!”

윈드 볼, 이것 역시 내가 개발한 마법으로 파이어 볼처럼 바람의 기운을 뭉쳐서 쏘는 것이다.

윈드 애로우는 있어도 윈드 볼이 없던 이유? 그건 데미지가 거의 없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파이어 애로우는 가느다란 불의 화살로 적을 관통하고, 파이어 볼은 폭발로 주위에까지 큰 타격을 입힌다. 이것은 바람 속성도 마찬가지인데 윈드 애로우가 관통력을 갖지만 바람이 무슨 폭발을 일으키겠는가? 단지 약간의 데미지와 함께 상대를 밀어낼 뿐이다.

아무튼 내 재빠른 대응에 아론은 엉거주춤하게 앉은 상태에서 옆으로 날아갔고, 녀석이 있던 자리에는 초록색 살수 복장을 한 사내의 검이 꽂혔다.

“PK!!”

“쳇.”

그 특이한 복장의 어쌔신은 재빨리 검을 뽑고 이동하여 모습을 감췄다.

뭔가 아는 놈이군, 어설픈 놈들이면 낮이나 밤이나 검은 옷을 입고 설쳤을 텐데 주위와 비슷한 색을 이용하다니.

“모두 조심해.”

아론이 황급히 일어나 내 옆에 자리를 잡았고 우린 서로 등을 맞댄 채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린과 레이가 궁수 스킬을 써도 찾아내지 못하는 상대를 아론이나 내가 찾아 낼 리 만무했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서서히 집중력이 떨어져 갈 때쯤 숲속에서 비도 하나가 빠르게 날아왔다.

“이까짓 거!”

마법사인 내가 반응하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는지 나를 향해 오는 비도를 아론이 몸을 틀며 쳐냈지만 상대의 노림수였는지 살수는 측면을 돌아 린에게 쇄도해 들어갔다.

“꺄악.”

린은 베타 테스터이긴 하지만 쭉 원거리에서 보조만 해서인지 빠르게 공격해 들어오는 상대에게 대응하지 못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젠장, 눈을 감아버리면……!!

“린!”

푸욱-.

어쌔신은 무심히 검을 린의 심장에 꽂고 비도 하나를 레이에게 던졌다. 비도는 정확히 레이의 눈을 향했지만 레이의 민첩성이 좋아서인지 급히 들어 올린 팔에 박혔다. 그러는 사이 아론이 광분하며 달려왔고, 그는 린의 심장에서 검을 회수해 뒤쪽으로 몸을 날렸다.

“안 돼!!”

아론은 품속에서 포션을 꺼내 린의 상처 부위에서 뿌려보고 입에도 흘려 넣어 보았지만 크리티컬 히트를 당한 린의 몸은 회색으로 물들어갈 뿐이었다.

“너 이 자식!”

린의 아웃으로 흥분한 아론은 앞뒤 안 가리고 달려 나갔다.

저렇게 달려 나가면 당해!!

“기다려!!”

하지만 이미 분노가 머리끝까지 퍼진 아론에겐 들리지 않는지 달려가는 발에 더욱 힘을 가했다. 현재 린은 아웃되고 레이는 팔에 맞은 비도에 독이 있었는지 전투력을 상실, 내가 마법을 쓰려 해도 어쌔신과 아론이 일직선상에 있기에 그것도 용이치 않은 상태. 게다가 다시 숨지 않는 어쌔신의 모습에서 큰 불안감이 느껴졌다.

한번만, 한번만 버텨라.

“죽여 버리겠어!!”

아론이 극도로 흥분해 스킬도 쓰지 못하고 칼부림을 하자 상대도 이걸 노렸는지 나와의 직선을 유지하며 틈을 노렸다.

“쉐도우 스탭(shadow step), 쉐도우 홀드(shadow hold), 크로스 샷(cross shot).”

그림자를 쫓은 자는 자멸하는 법. 여러 개로 분열하는 상대를 마구잡이로 쫓던 아론은 기술에 걸려 움직이지 못하고 일곱 개의 비도에 맞고 쓰러졌다.

“젠장, 이대론 전멸이다.”

가히 절망적이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레이는 얼마 전에 얻은 ‘신의 눈’을 착용하고 상대를 살폈다. 상대는 아론을 처리한 뒤 우릴 조롱하듯 가만히 서 있었고 이내 레이의 입이 열렸다.

“이름은 로즌 크랜츠, 71렙 어쌔신 클래스. 강한 이유가 있었군.”

신의 눈으로 놈의 정보를 훑어봤는지 레이가 중얼거리자 로즌 크랜츠라는 어쌔신은 눈에 이채를 띄었다가 욕심이 났는지 레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난 상관 말고 공격해.”

“미안하다. 워터 프리즌(water prison)!!”

일단 재빠른 상대의 속도를 없애기 위해 리자드 마스터를 가둘 때 썼던 그것을 사용했다. 하지만 바닥에 물이 없어서인지 땅을 뚫고 올라오느라 발동 시간이 길어졌고, 어느새 레이의 심장은 뚫려있었다.

“쳇, 역시 안 떨구는군.”

구구구구-.

“음?”

쿠와아아아아-!

놈을 중심으로 6방향에서 굵은 물기둥이 솟구쳐 오르자 놈의 모습이 가려져 그림자만이 위치를 알렸다. 무식하게 굵던 물줄기도 처음만 그런 듯, 사람이 옴짝달싹 못할 정도의 굵기로 조절이 되며 얇아져 갔다.

“악을 심판하는 하늘의 힘. 콜 라이트닝(call lightning)!”

콰과과과과광 번개를 부르는 5써클의 전격마법. 대량의 마나가 빠져나가며 일반 라이트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대한 번개가 내리 꽂혔다. 써보질 않아서 숙련도는 낮지만 전격 속성 수련도가 max라 커버가 된 듯했다.

“끝인가?”

아무리 고렙이라도 이걸 맞고 멀쩡할 리 없다. 혹, 살았다 해도 장시간의 마비 효과일 테니……. 하지만 안심이 안 되는 건 왜일까?

“기대를 저버려 미안하군.”

흙먼지 속을 뚫고 세 개의 비도가 날아왔다. 내가 피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이럴 줄 알았으면 본 직업의 업이 힘들더라도 격투가 레벨을 올려둘 걸 그랬나.

“윈드 볼!!”

보통의 움직임으로는 피할 수 없으니 바닥을 향해 윈드 볼을 날려 그 힘으로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것까지 생각한 걸까? 어느새 다가온 적은 아주 투박하게 생긴 검을 내 목에 밀어 넣었다.

“크헉.”

회색으로 물들어 가는 내 몸을 보며 검을 회수하는 그의 어깨에 내가 순간적으로 사용한 윈드 애로우가 스쳐지나간 자국이 나 있었다.

제길, 겨우 스치기 밖에 못 한 건가

“재미있군, 기억해 두지.”

* * *

“젠장!!”

“역시 너도 아웃됐구나.”

눈을 뜨자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셋도 내가 놈을 잡았을 거라 기대하진 않았는지 기다리고 있었고, 잠시 동안 알아봤는지 놈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레이가 말했듯이 놈의 이름은 로즌 크랜츠, 어쌔신 클래스 최고 렙을 자랑하는 인간이란다. 어쌔신은 도둑 클래스가 50때 바뀌는 이름으로 몬스터를 죽일 때 다른 클래스보다 적은 경험치를 얻는 특성이 있기에 그 때문인지 놈도 잡은 몬스터의 숫자보다 사람의 숫자가 더 많다고 알려져 있다. 덕분에 상당히 많은 현상금이 걸렸지만 그를 잡겠다고 선뜻 나서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다음에 만나면 같이 죽는 한이 있어도 아웃시킨다.”

로즌 크랜츠. 놈의 이름을 가슴 깊이 새겨두고 병원을 나왔다.(죽었을 때 살아나는 곳은 가장 가까운 마을의 병원이다.) 눈을 찌르는 하얀빛과 함께 눈에 들어온 건 칼라일과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의 건물들과 북적거리는 사람이었다.

이틀간 모은 경험치는 몽땅 사라졌지만 새로운 도시와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채워주기에 충분했다.

우리가 먼저 찾아간 곳은 당연히 의뢰소, 막상 찾아가긴 했어도 낮은 레벨과 명성치 때문에 리자드 마스터에 대한 의뢰를 않아 꽤 애를 먹었지만 리자드 마스터의 증표를 보여주며 억지를 써서 겨우 승낙을 받았다.(일반 NPC라면 꿈도 못 꿀 일이지만 과연 A.I는 뭔가 달랐다)

그 결과 아론이 52, 레이가 46, 린이 50, 그리고 난 44가 되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는데, 난 그것을 끝으로 일행과 헤어져 개별 행동을 시작했다. 좀 전의 일로 내 무력함을 깨달았으니까.

“네놈 특성상 최소한 수련도를 마스터하기 전까진 사냥도 하지 않겠지, 얼마나 걸릴 것 같냐.”

“글쎄…….”

“걱정 말고 강해져라. 우린 우리대로 강함을 찾을 테니.”

“오빠, 하지만…….”

“아아, 걱정할 필요 없어. 저러다 제 풀에 지쳐 나오겠지 항상 그래왔으니까…….”

씨익 레이는 말을 잠시 멈추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아론과 동시에 입을 열었다.

“강력한 무기와 함께.”

그 말을 끝으로 아론과 레이는 린을 이끌고 발걸음을 옮겼다. 린은 걱정되는지 자꾸 뒤돌아봤지만 나 역시 돌아섰으니 녀석들을 따라 사냥 가겠지.

“일단 정리를 해보자. 현재 전기와 물 속성 마스터에 땅 속성 9.7이라? 다음은 식물 속성이군.”

숙련도가 저항 없이 잘 오르는 걸로 보아 내가 세운 가설이 얼추 들어맞는 것 같다.

내가 세운 가설이란 상성이 좋은 순서로 연계해서 올리는 것. 전기는 물과, 물은 땅과, 땅은 식물과, 식물은 바람과, 바람은 불과 상성이 좋다. 식물과 바람의 상성이 좋다는 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식물이 없으면 공기도 없고, 공기가 없으면 바람도 없으니 상성이 좋을 수밖에. 불이 있으려면 바람이 필요하단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 결국 반절을 끝낸 셈이다. 하지만 전부 끝냈을 땐…….

“열 배의 힘을 끌어내고 말 테다.”

굳은 결심을 다지며 수련을 위해 마을 외곽으로 향했다. 날 지름길로 인도해줄 training master를 꽉 움켜쥔 채.

그로부터 두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동안 디그로 수로를 파서 농사를 도와 약간의 사례금을 받았고, 식물계 수련마법인 홀드로 소매치기도 잡았다. (NPC도 있었고 도둑 계열도 있었다. 행인 NPC의 물건밖에 못 훔친다(상인계통에겐 불가, 잡히면 감옥 행)).

그로 인해 경비대와도 친해졌고. 바람 계열 수련 마법인 윈드로는 신전 건축 현장에서 인부들의 땀을 식혀주며 그들과 친해졌다. 마지막 불 계열의 파이어로는 여관에 취직(?)해 손님들의 목욕물을 데우는 일을 하며 푼돈을 벌었다.(목욕하는 손님은 대부분 여성 유저나 싸우다가 바닥을 구른 플레이어들이다.) 그렇게 전 속성을 마스터하자 training master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부서지는 건가?”

지팡이는 산산이 부서지는가 싶더니 도중에 붕괴를 멈췄다. 그러더니 왼쪽에서는 검은 빛이, 오른쪽에서는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이상한 변화에 당황해 하고 있을 때 누군가 귓속말을 하는 것처럼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 6속성을 마스터한 자.

그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깨달아야 하나니, 나 그대에게 그 실마리를 부여하노라.]

지팡이는 알쏭달쏭한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가루조차 남기지 않고. 일종의 히든 피스인가? 실마리라…….

“스킬 창 오픈, 스테이터스 창 오픈, 숙련도 창 오픈.”

뭔가 달라진 게 있을까 유심히 살펴봤지만 변동 사항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운영자의 장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뭐, 해만 없으면 되는 거지. 이제 활동을 시작해 보실까?”

두 달, 게임시간으론 무려 여섯 달이라는 긴 시간이었다. 일반 플레이어들도 엄청난 렙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이니 폐인들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물론 로즌 크랜츠도 예외는 아니겠지, 젠장.

“후우……. 귓속말 아론.”

‘현재 접속해 있지 않습니다.’

“귓속말 큐베레이.”

‘현재 접속해 있지 않습니다.’

“귓속말 글로린.”

[colonist : 있어?]

[글로린 : 아, 오빠!! 수련은 끝나신 거예요?]

[colonist : 그럭저럭, 다른 애들은 없네?]

[글로린 : 오늘은 좀 늦는 댔어요. 아직 레벨 그대로시죠? 제가 도와드릴게요.]

[colonist : 나야 좋지. 레벨은 많이 올렸어?]

[글로린 : 73이에요. 아직 뤼크레스죠? 지금 갈게요.]

저번에 50이었으니까 두 달 동안 23업? 저 정도면 광렙이군. 아론과 레이도 상당하겠지. 나도 ‘그것’만 완성되면…….

“오빠!!”

근처에 있었는지 어느새 나타난 린이 달려왔다. 폼에서 제법 고수 티가 나는데? 하긴, 그 동안 놀고 있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 건가?

“오랜만이네, 별일 없었지?”

“별일이라면 별일인데, 레이 오빠가 신의 눈으로 몬스터의 약점을 알 수 있어서 레벨 올리기가 쉬웠어요. 엘프의 목걸이 덕에 사냥도 쉬웠구요. 아참, 이럴 때가 아니지. 오빠, 빨리 가요.”

“어딜?”

“파티 원들한테 양해를 구하고 오빠도 합류하기로 했어요. 빨리요.”

“아, 그래? 그럼 서둘러야지.”

린과 파티를 이룬 사람들이라면 상당히 고렙일테고, 그런 사람들이 내가 끼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런 사람들을 이해시키다니 고생했겠어.

“매스 텔레포트(mass teleport).”

리턴보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스크롤을 거침없이 찢자 발밑에서부터 빛이 휘감겨왔다. 그리고 이동, 눈앞에는 음침한 기운이 깔린 검은 대지가 들어왔다.

“colonist님?”

“예, 염치없지만 신세 좀 지겠습니다.”

전 속성 마스터라고는 하지만 아직 실전 경험이 적고 고렙의 몬스터들에게 얼마나 통할지 미지수였기에 먼저 양해를 구했다. 어느 정도의 따가운 시선은 각오한 채. 하지만 그들은 린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받아 줘 딱딱하게 나올 거란 예상과 다르게 따뜻이 맞이해 주었다.

“신세라니요, 오히려 저희가 고맙죠. 안 그래도 마법사가 한 명 뿐이라 밀리는 구석이 있었는데.”

“제가 있는 다고 뭐 달라질게 있겠습니까, 짐만 안 되면 다행이죠.”

“아닙니다, 저희 쪽 마법사도 46인걸요. 나머지 일행은 50대 초반이구요.”

“예?”

50대? 6, 70대가 아니고? 그런데 린이 왜 이 파티에…….

“레벨 업 하시는 거 도와드리고 있었어요. 마침 오빠 레벨도 비슷하니 잘됐네요.”

“아, 그래,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거트루드님께서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참가하시겠습니까? Yes/No.]

“Yes.”

“우리야말로 잘 부탁할게. 나보다 어린 것 같은데 말 놔도 되지?”

어딜 가든, 어떤 게임을 하든 저런 사람은 꼭 하나씩 있다. 허락을 구하기도 전에 말을 놓는. 조금 황당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사교성이 좋으니, 어찌 보면 부럽기도 하다. 음침한 구석이 있는 나에게는 특히.

“예, 물론이죠.”

“예라니, 편하게 말해. 그러고 보니 인사도 안 했네? 난 거트루드, 프리스트고 저쪽 못난이 아가씨는 세페리스, 역시 프리스트지. 세리라고 부르면 되.”

“누가 못난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옆에 비실비실하게 생긴 녀석은 베르 길리우스. 어울리지 않게 기사야, 여자에게 쥐어 사는 한심한 놈이지.”

“…….”

“마지막으로 저기 뻣뻣하게 서있는 녀석은 겉멋만 잔뜩 든 한심한 마법사 드라이저.”

“내가 뭘!!”

“그 증거로 아직도 거추장스러운 로브를 입고 있잖아?! 니가 로브 밟고 넘어져 아웃 당한 게 한두 번이냐? 그러니 혼자 레벨이 안 오르지.”

이 형은 뭔가 아는군. 내가 마법사의 상징이라 불리는 로브 대신 가죽 갑옷을 입는 이유도 거추장스럽기 때문이다. 로브가 가볍고, 온몸을 덮을 수 있으며, 마법에 대한 저항력을 높여준다지만 맞아서 데미지를 입는 것보다 아예 안 맞는 게 낫지 않은가? 매번 마법에만 공격당할 리도 없고 말이다. 가볍고 방어력이 쓸 만한 가죽 갑옷이라는 대처 방안이 있음에도 로브가 많이 팔리는 이유는 마법사에 대해 이상한 로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 이 녀석처럼…….

“모르는 소리, 로브야 말로 마법사의 꽃!! 형은 마법사의 로망을 몰라!!”

“별로 알고 싶지도 않다. 콜로…… 그냥 콜이라고 부르지, 나 말고는 다 어리니까 말 놔. 그런데 가죽갑옷이라……. 제법 생각이 트였구만!!”

“형이야말로 메이스라니, 뭔가 아시네요?”

“아, 이거 말이야? 내가 고전 게임을 상당히 좋아하거든.”

힐름에서 지원하는 숨겨진 직업 시스템.

사람들은 가장 간단한 조합으로 마법사+기사(검)=마검사, 프리스트+격투가=몽크, 프리스트+기사(검)=성기사를 생각한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른데, 힐름은 정통 RPG에 기반을 두는 듯하다는 것. 바로 이 때문이다.

무슨 소린가 하면 예전에 프리스트는 신을 믿는 자로서 날이 있는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며 둔기류를 고집했다고 한다.(개인적으론 때려죽이는 게 더 잔인하다고 생각하지만)하지만 그것이 현대로 오면서 변질되어 검과 창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졌고, 판타지에 조예가 깊지 않은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따라서 프리스트+기사(메이스)야 말로 진짜 숨겨진 직업이 아닐까? 커트형이 레벨 올리는데 별 제약이 없는 듯하니 확실해 보이지만.

“눈치 챘어? 혹시나 해서 시도해 봤는데 되더라고.”

“그런 걸 쉽게 말해줘도 돼요?”

“뭐 어때, 이미 알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알아내기 어려운 조합도 아닌데. 벌써 이런 조합으로 키우는 사람 수백은 될 걸?”

“그것도 그러네요. 이번엔 그 위력을 보여줄 차례입니다. 끝없이 타오르는 불꽃의 장벽, 파이어 월(fire wall)!!”

화르르륵. 어느새 리젠되어 다가오는 좀비와 구울들 앞에 사람 키만 한 크기의 파이어 월이 생성되었다. 놈들은 성 속성에 약하지만 불 속성에도 약한 언데드인지라 다가오지는 못하고 마냥 마법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세리, 서둘러.”

“홀리 인챈트.”

린의 외침에 세리는 대답 대신 모두의 무기에 성(聖)속성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거트형? 형은 자기 몸과 무기에 잔뜩 인챈트를 걸었는데, 체력이 달리는 프리스트이다 보니 보조 걸게 많은 듯했다.

“콜, 그런데 정말로 끝없이 타올라?”

준비를 마쳤는지 거트형은 내게 다가와 질문을 던졌고 그 사이 린은 성 속성이 깃든 화살을 꺼내 시위에 걸었다.

“마나만 공급해주면 그렇겠지만 이렇게 전송되는 마나를 끊으면…….”

그 말을 끝으로 좀비와 구울의 행동을 제약하던 불의 벽은 달궈진 공기만을 남기고 사라졌다.

“형 차례가 오는 거죠.”

슈슉 파이어 월이 걷히며 린의 공격이 시작됐지만 그 사이 또 리젠 됐는지 불어난 몬스터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구멍 뚫린 몸으로 계속 전진해왔다. 역시 머리를 노려야 하는 건가?

“콜, 너 두고 보자. 블레스(bless)!!”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거트형은 자신과 베르에게 차분히 축복을 걸고 선두에 있는 구울을 향해 쇄도해 들어갔다. 그럼 히든 피스의 위력을 감상해 보실까?

“거트형, 베르. 파이팅!!”

이미 혼전인 상황에 마법사가 나서서 어쩌겠는가? 자기편을 희생할 게 아니라면. 이왕 전투에 들어간 거 좀 더 확실한 결과를 보기 위해 린에게도 적당히 엄호만 할 것을 부탁했다.

“으랏차차.”

힘을 얼마나 올린 건지 거트형의 공격에 좀비, 구울 할 것 없이 목이 달아났다. 검도 아닌 메이스에 말이다. 베르도 세리의 서포트를 받으며 선전을 펼쳤지만 거트형이 너무 화려(?)하다 보니 눈에 덜 들어오는 게 사실이었다.

“공격과 회복, 해독까지 동시에 할 수 있으니 편리하군. 하지만 그 뿐인가?”

“오빠, 왜 그래요?”

“아냐, 아무것도…….”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지만 뭔가 부족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간단한 조합에 내가 너무 많은걸 바라는 건가?

“매직 애로우, 연사.”

손을 앞으로 내밀자 추적 기능이 달려있는 마나의 화살 5개가 생성되어 날아갔다. 한 번에 만들 수 있는 1써클 마법의 숫자는 써클 수와 1대1로 비례하는데 5써클인 내가 썼으니 당연히 5발이 한계, 각각 다른 타깃이 잡힌 매직 애로우들은 어지러이 흩어지며 날아갔다.

“끄우우욱.”

큰 데미지는 아니었지만 틈을 만드는 데는 충분했고, 덕분에 나머지 몬스터들의 처리가 손쉽게 끝났다. 구울이라면 우리와 비슷한 레벨에 독까지 있으니 그렇다 쳐도 좀비는 상대가 안 될 텐데 왜 여기서 사냥하는 거지?

“이놈아, 갑자기 마법을 풀어버리면 어떡해!! 그리고 그런 마법이 있으면 진작 써야 할 것 아냐. 뭐, 그것도 쓸 줄 모르는 인간도 있다만…….”

거트형이 눈치를 주자 드라이저는 괜히 딴청을 피웠다. 솔직히 몬스터만 맞는다는 보장도 없었는데……. 이건 말 안 하는 편이 낫겠지?

“잘만 싸우던데요, 뭘. 그런데 좀비로 업할리는 없고, 구울도 조금밖에 안 나오는데 왜 여기서 사냥해요?”

“아아, 린이 널 데려온대서 마중 나온 거지. 원래 사냥하던 데는 우리끼리 무리거든.”

“그럼 다시 그리로 가죠. 여기 있어봐야 경험치도 얼마 못 먹을 텐데.”

“아, 콜형. 잠깐만요.”

그곳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드라이저가 나를 불러 세우고는 짧은 막대기 하나를 건넸다. 지팡이? 그러고 보니 트레이닝 마스터가 부서지고 바로 와서 지팡이도 없었군.

“아, 고마워. 잘 쓰고 돌려줄게.”

“그냥 가지세요. 겨우 캐스팅 속도 상승 하나밖에 안 붙어있는데요.”

캐스팅속도 상승이라, 확실히 오래 쓸건 못되는군. 마을가면 하나 장만하긴 해야 할 텐데 뭐로 하지? 옵션이 하나뿐인 건 나한테 안 맞을 텐데……. 뭐, 목록을 보면서 생각해야겠다.

“그럼 가볼까?”

앞쪽에 거트형과 베르, 중간에 나, 린, 드라이저, 맨 뒤에 세리가 서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진형을 갖추고 전진하자 돌파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나아갈수록 점차 좀비가 나오는 횟수가 줄고 그 자리가 구울로 채워지며 공격이 매서워 졌지만 프리스트가 두 명이나 됐고 린이 저격으로 많은 데미지를 입혔기에 포션 사용 없이도 순조로울 수 있던 것이다.

십여 분을 이동했을까? 모두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왜 그래요?”

“지금부터 위험한 곳이야. 위치를 바꿔야겠어. 콜, 넌 맨 앞에 있는 세리 왼쪽에 서고, 드라이저는 오른쪽 그리고…….”

거트형의 지시대로 움직이자 아까와는 반대가 되어 버렸다. 접근전 해야 할 사람들이 뒤쪽으로 가다니, 무슨 생각인거지?

“온다.”

“디바인 실드(divine shield)!”

세리의 갑작스러운 외침에 정신 차리고 앞을 보자 상체만 대머리 인간의 형태를 하고 하체는 꼬리처럼 생긴 반투명한 괴물이 허공에 떠있는 채로 우리에게 파이어 볼을 날리는 모습이 들어왔다.

“저게 뭐죠?”

“스펙터(specter)야. 7써클까지의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 몬스터지. 그나마 다행인 건 지능이 높지 않아 랜덤하게 마법을 사용한다는 정도? 차분히 상대하면 잡을 수 있어.”

마법을 랜덤하게 사용한다고 해도 7써클이면 버티기 힘들 텐데 용케도 저런 걸 잡았네. 린 덕분인가?

“앞으로 한방만 더 막는다. 그 뒤엔 알아서해.”

“오케이. 콜, 너도 준비해.”

“예.”

거트형과 베르는 우리 뒤에 바짝 붙어 뛰어나갈 준비를 했고, 린도 화살 두 개를 꺼내 시위에 걸었다. 곧이어 스펙터가 사용한 마법은 라이트닝 애로우. 겨우 1써클 밖에 안 되는 마법이라 가볍게 막았지만 세리는 예고한 대로 실드를 풀어버렸다.

“트윈 샷(twin shot)!!”

“파이어 스피어(fire spear)!!”

“버스트 플레임(burst flame).”

마법 사용직후 무방비 상태였던 스펙터는 가슴과 배에 화살이 꽂힌 채 뒤이어 오는 불꽃의 창에도 관통 당했다. 하지만 죽을 정도의 데미지는 아닌지 앞으로 다가왔고 거트형과 베르가 나가 상대하려 했다.

“기다려!! 아직 끝난 게 아니야.”

츠츠츠츠!

“키에에엑?”

콰과과광! 5써클의 범위공격 버스트 플레임. 발동시간이 길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위력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방심했던 탓일까? 다가오던 스펙터는 걸레조각처럼 여기저기 상처 입고 뒤로 날아갔는데, 땅에 닿아보지도 못하고 린의 화살이 미간(으로 보이는 곳)에 박혀 생을 마감했다. 언데드니 두 번 죽은 셈인가?

“이거 우리 차례까진 오지도 않잖아? 멋지게 해치우려고 했는데.”

“그럼 다음번엔 형한테 맡겨 드려요?”

“크흠,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커트형은 좀 전의 일로 보아 내가 진짜로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금세 말을 바꾸며 태연한 척 했다.

그나저나 5써클이라 그런지 마나 소비가 장난이 아니군. 큰 마법은 될 수 있으면 자제해야겠어.

“좋아, 이런 식으로만 하자.”

랜덤이라고는 해도 7써클까지 사용하는 마법 몹이라 그런지 경험치가 상당히 많이 올랐다. 정말 이대로 가면 레벨 업은 문제도 아니겠는데?

“디바인 실드.”

어느새 리젠된 스펙터, 이번엔 린의 첫 번째 공격이 크리티컬 히트를 기록하며 처리됐고, 그 다음엔 거트형과 베르가 활약을 해서 약간 위험할 때도 있었지만 사냥은 한동안 계속됐다. 회수되는 아이템은 약간씩의 돈과 간혹 떨어지는 마법서(7써클부터는 마법서가 필요하다)가 전부.

돈은 겨우 본전치기나 될까한 정도였지만 마법서를 팔면 상당한 돈이 될 테고 레벨도 잘 오르니 모두 별로 신경 쓰지는 않는 듯했다. 떨어진 마법서 중 두 개는 이미 드라이저가 가지고 있는 것이어서 내게 돌아 왔는데, 하나는 불 계열의 플레임 스트라이크(flame strike), 다른 하나는 바람 계열의 토네이도(tornado)였다.

“크흐흐흐, 잘도 내 부하들을 처치했군.”

“리, 리치?!”

리치라면 스펙터보다 훨씬 더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고 놈처럼 멍청하게 아무 마법이나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방금 전 우리에게 말하는 것만 봐도 상당한 지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길 수 있을 턱이 없다.

“이번엔 너희 차례다. 다크 썬더(dark thunder)!!”

“디바인 실드!!”

스치기라도 하면 그 부위가 썩어들어 간다는 7써클의 다크썬더. 몇 번의 전투로 상당량의 DP(divine point)를 소모한 세리가 급조한 디바인 실드로는 단 한 번의 방어로 만족해야했다.

“세리, 린!!”

“알았어요.”

“어둠으로부터 보호하는 성스러운 힘, 디바인 실드!”

보조 계통의 신성마법만 사용하던 거트형이 처음으로 디바인 실드를 사용했다. 하지만 숙련도가 부족해서일까? 스펠까지 읊은 완전한 실드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날아온 다크 썬더에 크게 흔들렸다.

“리턴(Return)!!”

“리턴(Return).”

세리와 린이 동시에 리턴을 외치자 여섯의 몸은 하얀빛에 휩싸였다. 리턴 스크롤로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숫자는 모두 다섯, 사람 수가 여섯인 것도 있지만 사람 수가 적을수록 빨리 발동한다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휴우……. 실컷 올린 경험치 날려 먹을 뻔했네.”

“거기서 왜 리치가 나오는 거야!!”

“몇 개는 못 줍고 그냥 왔네, 아깝다.”

“그래도 살았으면 됐죠.”

제각기 한마디씩 했지만 큰불만은 없는 듯했다. 왠지 리치가 나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단 느낌이 드는데?

“거기 원래 리치 나와요?”

“아, 가끔. 스펙터가 리치의 부하라는 설정이거든. 그래서 좋은 렙업 장소임에도 사람이 없던 거고.”

그랬군. 그런데 리치가 아무리 잘났어도 제정신이 아닌(?) 스펙터를 부하로 삼긴 힘들 텐데, 직접 제작이라도 하나보지? 아무튼 얼마간 거긴 못 가겠군.

“그럼 재정비해서 다른 데로 가볼까?”

거트형은 몇 번 리치를 만나 봤는지 좀 전의 사냥터에 미련을 두지 않고 잡화상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일행은 잡화상에 도착하자마자 좀 전에 벌어들인 돈으로 다시 인벤창에 포션을 꽉꽉 채워 넣은 후 매스 텔레포트 스크롤을 써서 어떤 숲으로 이동했다.

“여기는 놀이 나오니까 조심해. 놀은 무리지어 다니는 거 알지?”

“네. 여기 좀 어둡네요?”

“나무에 해가 가려진 거지. 야수 같은 놈들이라 어두운 걸 좋아 하나봐.”

“크르르르.”

“왔다.”

어두운 숲속에 수십 쌍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일행은 담담하게 각자의 무기를 쥐었고 선공은 린의 몫이었다.

“스킬 조합 트리플 샷(triple shot), 관통(貫通)!!”

린의 손에서 세 개의 화살이 떠나자 관통 스킬 덕에 뛰쳐나온 8마리 놀 중 3마리가 각각 복부, 가슴, 다리에 맞아 행동 불능이 되었다.

“윈드 커터(wind cutter).”

“파이어 인챈트.”

“하아압!!”

내가 윈드 커터로 놀의 몸을 유린할 때 드라이저는 베르와 거트형의 무기에 불 속성을 부여했고, 둘은 빠르게 달려가 놀들을 쓰러뜨렸다. 베르의 검에 베인 자리가 까맣게 타들어 가는 건 그렇다 쳐도 거트형의 메이스에 당하는 건 정말이지…… 비위 좋은 나로서도 보기 힘들다.

“망자의 요람보다는 경험치가 적지만 그래도 한 번에 여러 마리씩 나오고, 아이템도 짭짤하니 괜찮은 편이지. 특히 기사용 장비를 잘 주거든.”

“망자의 요람?”

“아, 말 안 했던가? 아까 스펙터 나오던 필드 이름이야. 여긴 우연히 발견한 곳인데, 크로네이드라는 산맥의 한 구석이지.”

“구석인데 이런 놈들이 나온단 말이에요?”

“그러게 말이야. 올라갈수록 나오는 몹들도 강해지는 것 같고. 이상하긴 하지만 딱 좋은 레벨 업 장소니 별 신경 안 써.”

올라갈수록 나오는 몬스터도 강해진다? 말 그대로 레벨 업에는 딱 좋은 장소긴 한데 뭔가 꺼림직 하단 말이야. 이 풍경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고.

“또 온다, 준비해.”

“트리플 샷.”

푹푹 팅 팅? 갑자기 소리가 왜……?

“저건 뭐야?”

이번 놀 무리의 숫자는 좀 전의 두 배는 돼 보였다. 하지만 그건 별 문제가 안 됐고, 특이하게 갑옷을 걸친 놈이 있다는 것. 그게 우리의 눈을 끌었다.

“버근가?”

“그게 아니라 우두머리 격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번쩍, 순간 나와 거트형의 눈이 번뜩였다. 아마 주위 사람들이 보기엔 먹이를 발견한 배고픈 하이에나 같은 모습처럼 보이겠지.

“대박이다!!”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놈이 보스 급이라는 것. 놀의 레벨이 40대이니 그렇다면?

“!!”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가는 워 해머를 보며 등줄기에 흐르는 땀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리자드 맨도 놀과 비슷한 레벨이었지. 그럼 저 놈도 리자드 마스터와 동급? 이거 대박이 아니라…….

“X됐다.”

“집중(concentration), 일점사(一點死).”

스쳐 지나간 보스 급 놀의 공격에 놀라 황급히 뒤로 물러나자 린이 집중력을 상승시킨 뒤 여러 발의 연속되는 화살을 한곳에 집중시키는 일점사를 사용했다. 노린 곳은 놀의 머리, 하지만 안타깝게도 헬름을 찌그러뜨리는 정도의 효과밖에 보지 못했다. 긍정적인 면에서는…….

“크아아아.”

헬름이 찌그러지면서 심한 고통을 줬는지 놈은 버서커가 되어 린에게 달려갔다. 손오공의 금강테처럼 심하게 조이는 건가?

“린, 피해!!”

“알고 있어요.”

콰앙! 힘껏 내려친 놀의 워 해머가 땅을 진동시켰다. 민첩성이 높은 덕분에 쉽게 피한 린은 거리를 벌려가며 조금씩 놈에게 데미지를 입혔고, 그럴수록 놈의 분노도 커져갔다.

“괴물 주제에 감히 누굴 공격하는 게냐!!”

까앙! 놀은 어느새 달려간 거트형의 메이스를 간발의 차이로 고개를 숙여 피했고, 덕분에 메이스에 맞은 투구는 날아가 버렸다.

“크에에에.”

고통스럽게 머리를 죄던 투구가 사라지자, 일반 놀들을 빠르게 정리하고 달려오는 우리를 발견해선지 놈은 전력을 다해 산 위쪽으로 도망갔다.

“쫓아, 잡으면 대박이다!!”

“홀드.”

오랜만에 나무속성 수련마법인 홀드를 사용해봤지만 도망치는 속도가 너무 빨라 붙잡을 수 없었다. 결국 달려서 붙잡아야 했는데, 민첩과 체력이 약한 마법사와 프리스트(거트 형은 예외)로는 무리였기에 베르와 린이 흔적을 남기며 가기로 했다.

“여기야?”

“네, 이 동굴로 들어가 버렸어요.”

“멀리는 못 갔네. 이 동굴이 얼마나 깊을지, 뭐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까 전의 풍경, 이 동굴까지,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이상하다. 데자뷰 현상일 뿐인가?

“끼아아아아악.”

동굴 안쪽으로부터 예사롭지 않은 놀의 비명소리가 들려왔고, 그 소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점점 커졌다.

“온다, 피해.”

쿵! 달려오던 놀은 뒤쪽에서 날아온 불꽃에 맞아 우리 앞에 쓰러졌다. 약간의 움직임이 있는 걸로 봐서 아직 죽지는 않은 듯. 놈이 나온 뒤에서는 감당키 어려운 엄청난 마나를 가진 존재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맞아, 여긴 분명!!”

“감히 내 레어 앞에서 소란을 피운 게 네놈들이냐?”

“오프닝에 나왔던 드래곤 레어!!”

젠장, 왜 진작 기억해내지 못한 거지. 이렇게 되면 할 수 없군. 카메라 기능 온.

“내 단잠을 깨운 죗값은 목숨으로 갚아라!!”

“잠깐!!”

“뭐냐, 인간.”

다행히 골드 드래곤은 내 말에 귀를 기울였고, 전멸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아니, 잠시 늦췄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겠지.

“나, 인간 마법사 colonist. 그대에게 도전하겠다. 설마 드래곤씩이나 되면서 거절하진 않겠지?”

“오빠!!”

“콜!”

“건방지군, 겨우 5써클밖에 안 되면서 드래곤에게 도전이라? 좋다. 받아들이도록 하지. 시작할까?”

“잠깐.”

“아직 할 말이 남아있나? 아량을 베풀어서 유언정도는 들어주지.”

“인간들의 세계에선 강자가 약자에게 먼저 3번의 공격 기회를 주지. 나 역시 그대를 강자로 인정하는 바, 3번의 기회를 부탁한다.”

“좋다, 기회를 주지. 단, 도망가면 저 녀석들의 목숨은 물론이고 이 대륙의 모든 인간에게 책임을 묻겠다.”

모든 유저가 모인다 해도 드래곤에게 타격을 줄 수 있는 인원은 얼마 안 될 테고, 그 중에서도 제대로 된 공격을 할 사람은 스무 명 남짓일 것이다. 내가 여기서 도망가면 힐름 자체가 붕괴될 수도 있겠지.

뭐, 처음부터 도망갈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기진 못해도 힘을 가늠할 수는 있지 않겠어? 그리고 다음에 만날 땐…… 반드시 죽여주마.

“좋다. 그럼 시작하지. 악을 심판하는 하늘의 힘. 콜 라이트닝!”

콰과과과광! 하늘에서 굵은 빛이 드래곤을 향해 내려 꽂혔다. 하지만 드래곤은 자기보다 한참이나 작은 빛을 보며 간지럽다는 듯 한번 쳐다보는 게 전부였고, 두 번째 공격을 재촉했다.

“이거 미안하군. 내게 6써클 이하의 공격은 통하지 않는다고 말 안 해줬던가?”

그 말에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며 창백해졌다. 기대도 안 하긴 했지만 6써클 이하 무효화라니, 역시 드래곤이군.

“그럼 두 번째 갑니다. 모든 것을 옭아매는 속박의 힘, 자이언트 플랜트(giant plant).”

말이 끝남과 동시에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이 심하게 흔들렸다. 잠시 후 땅을 뚫고 나온 건 거대한 식물의 줄기였다. 줄기는 드래곤의 몸을 감싼 후 강하게 죄었고, 드래곤에게도 데미지가 있었는지 버둥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드래곤이 힘을 주자 줄기는 너무 쉽게 끊어져 나갔고 나에겐 마지막 기회만이 남겨졌다.

“베르, 남는 검 하나만 줘봐.”

“아, 예. 받으세요.”

쉬익, 퍽! 베르는 인벤 창에서 검 하나를 꺼내 무식하게 투창하듯 던졌다. 검은 내 앞쪽 땅에 박혔고 녀석은 자기가 멋있었다고 생각했는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 곧 죽을 판인데 웃음이 나와?

“후우…… 파이어 인챈트.”

베르가 던져준 검은 평범한 롱소드로 검의 내구력이 다할 때를 대비해서 가지고 다니는 것 같았다. 검에 불 속성을 부여하자 약간 붉은 빛이 감돌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한숨밖에 안 나왔다.

불 속성까지 불어넣은 검을 있는 힘껏 주변에 있던 놀의 목에 찔러 넣었고, 그 덕에 약간의 숨이 붙어있던 놀은 생을 마감했다.

“감히 이 몸을 상대하다 말고 그깟 놈에게 신경을 써!!”

“미안하지만 이길 수 없는 상대에게 덤비다 죽는 것보단 이 편이 이득이라는 판단이…….”

화르르륵!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화가 난 드래곤의 공격이 날아왔다. 불꽃이 뻗어 오는 걸로 봐서 인페르노 쯤 되는 것 같은데 죽을 때 죽어도 고통스럽게 죽기는 싫다고.

“윈드 볼.”

“신기한 걸 쓰는군. 하지만 죽는다는 사실엔 변함이 없지. 썬더오거(thunder auger).”

드래곤의 손에서 커다란 전기의 송곳이 나를 향해 날아오자 린이 재빨리 철화살을 장전했다. 전기니까 철로 흡수시킬 수 있겠지. 하지만 그건 내 몫이야.

“린, 그만 둬.”

“하지만…….”

“나도 있다고!!”

놀의 목에 박아 넣었던 검을 뽑아 날아오는 마법을 향해 힘껏 던지자 전기를 간단히 흡수하며 드래곤을 향해 날았다.

“흥!!”

드래곤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검은 저 멀리로 사라져 버렸고 베르는 아까운지 입맛을 다셨다. 이 상황에서도 돈 걱정 하다니 무서운 자식…….

“크오오오오오오오.”

“브, 브레스?!”

“이젠 끝장이군.”

“어차피 이길 생각을 한 건 아니잖아? 이 정도면 오래 버틴 거지.”

“내 롱소드가……. 놀이 뱉은 아이템도 드래곤이 날려버리고, 내 피 같은 돈이…….”

“내가 새로 사줄 테니 걱정 마. 그보다 복구하려면 운영자들도 고생 꽤나 하겠군.”

콰과과과과과과과과광! 브레스에 맞자 상당한 고통과 함께 눈앞이 뿌옇게 변했다. 그런데 롱소드 새로 사준다는 게 아무리 기뻐도 그렇지, 이 상황에서도 웃고 있다니, 베르, 니가 진정한 짠돌이다.

“으으……. 머리가 쑤시는군.”

“그러게요. 좀처럼 익숙해지질 않는다니까.”

“큭, 익숙해 질 때쯤엔 니 렙이 10도 안 될 거다.”

머리가 아픈 건 나만의 느낌이 아닌지 다들 한마디씩 투덜거리며 일어났다. 레벨이 떨어졌겠군. 후후, 하지만!!

“뭐야? 레벨이 올랐잖아?!”

“정말? 어디…… 정말이네! 3이나 올랐어.”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설마 콜이 드래곤에게 데미지를 입혀서??”

오호, 그것도 가망이 있지만 겨우 간지러운 수준의 공격으로 레벨이 이렇게 오를리 없지, 아무리 상대가 드래곤이라도.

“내가 마지막에 놀 잡았잖아. 비록 아이템은 드래곤 때문에 날려먹었어도.”

“아!! 그런데 드래곤이 거의 다 죽여 논 거잖아.”

“처음 공격은 누가 시작했지? 스틸 범한테 경험치가 얼마나 돌아가겠어.”

최강의 생명체 드래곤이 스틸 범으로 전락하는 순간이었다.

“아무튼 고맙다. 니 덕에 좋은 구경도 하고. 캬…… 그걸 찍어뒀어야 하는 건데.”

“맞아, 그러고 보니 아직 드래곤 레어 밝혀진 곳 없잖아? 우리가 처음 찾은 건가? 그렇다면…….”

또다시 나와 거트형, 그리고 이번엔 베르까지 추가로 눈이 번쩍였다. 때론 그 무엇보다 비쌀 수 있는 것이 정보니까

“정보 길드에 팔아먹자!”

아직 잡을 수는 없다고 해도 드래곤의 레어라는 정보의 가치는 대단한 것이었다. 지금은 아니라도 언젠가는 잡을 수 있을 테니까. 내 머릿속에선 정보 길드 쪽에서도 돈을 아끼지 않고 사들일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아니, 사들이게 할 것이다.

“오오, 의견이 딱딱 들어맞는구나. 이번 기회에 우리 한번 폼 나게 살아보자!!”

이거…… 내가 동영상 찍었다는 것도 알려야하나? 뭐, 홈페이지에 올리면 자연히 알게 될 테니 상관없겠지.

“형, 사실은 나 동영상 찍었는데…….”

“진짜? 그럼 홈페이지에 올려라. 베스트 동영상 뽑히면 뭐라도 주겠지. 그보다 모두 정보 길드로 출발∼.”

“응.”

린을 뺀 나머지 일행은 갑부의 꿈을 꾸며 정보 길드로의 걸음을 재촉했다. 헬렐레 웃고 있는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조금 굳어있는 린의 얼굴, 뭔가 걱정거리가 있는 듯했다.

“왜 그래? 레벨이 안 올랐어?”

“아뇨, 1올랐어요. 저…… 오빠.”

“왜?”

“아니에요.”

“무슨 일인데? 걱정 말고 말해봐.”

“정보 길드에서 그렇게 많은 돈을 주려고 할까요?”

린은 정보 길드에서 우리 렙이 낮은 것을 이용, 적은 금액을 제시하거나 실력 행사로 빼앗을까봐 걱정하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히…….

“쉽게 내주진 않겠지.”

“예? 그럼…….”

“혹시 거래의 3단계 방법을 알아?”

“거래의 3단계 방법이요?”

“그래. 쉽게 협상, 위협, 협박으로 나눌 수 있지. 우리가 하려는 것은 싸움이 아니라 거래야. 힘만으로 해결하는 건 바보들의 이야기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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