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크 대침공
“구, 국왕 폐하.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가?”
“오크 대군이 성 밖 평원에 나타났습니다. 수는 어림잡아 8만!!”
“드디어 그들의 복수가 시작되는가……. 연설을 준비하라.”
이벤트의 시작을 알리는 병사가 등장하자 국왕은 연설을 준비시켰다. 병사들이 분주히 준비를 끝내자 국왕이 단상 위에 섰고 곧이어 자리를 빽빽이 채운 유저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 성 밖 평원에 오크의 대군이 나타났다하오. 국왕 된 자로서 군대를 내보내야 마땅하나 군대와 오크가 맞붙으면 큰 피해를 막을 수 없고, 그렇게 되면 이웃나라에서 침략할 것은 자명한 일!! 때문에 그대들에게 이 왕국의 미래를 맡기려하오. 적의 수장을 처치한 용사와 가장 많은 활약을 한 용사에게는 왕국의 보물을 드릴 것이며, 끝까지 살아남은 자들에게도 활약 정도에 따라 보상할 생각이오. 부디 이 왕국을 지켜주시오.”
국왕이 말을 끝내고 돌아서자 각 길드는 바빠졌다. 엄청난 길드석의 가격 때문에 길드의 수가 많지는 않았지만 엄선된 실력과 인원, 명성 덕분에 일반 유저들도 그들의 지시에 따를 것을 약속했다.
“멍청한 오크들에게 지옥을 보여주자!!”
“와아아아아아.”
붉은 복장 일색인 디아블로 길드의 장 보카치오가 외치자 군중들이 환호로 답했다. 레벨 10대에 학살해 보았던 상대라서 인지 모두 사기충천, 오크들의 압도적인 머릿수도 이들에게는 문제되지 않을 듯했다.
“궁수와 마법사는 모두 성벽 위로, 궁수가 앞에 서고 그 뒤에 마법사가 선다.”
“모두 위치로!!”
궁수와 마법사들이 한데 뭉쳐 성벽을 올라가던 중 환호가 비명으로 바뀌는 상황이 벌어졌다.
“크아아악.”
콰앙! 굉음과 함께 성벽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그 위에 있던 이들은 돌에 깔려 아웃을 면치 못했고 길드 연합을 비롯한 모두가 크게 당황했다.
“투, 투석기다!!”
“오크들이 어떻게 공성 병기를?! 이런 말도 안 되는…….”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몇 개의 돌덩이가 더 떨어져 피해를 주더니 곧 다시 조용해졌다.
“쏴라, 쏴!! 투석기를 조종하는 놈들부터 죽여!”
“무립니다, 화살이 닿질 않아요.”
지휘부인 길드 장들이 발악적으로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절망적이었다. 하지만 이러는 사이에도 적들은 투석기 재장전을 준비하고 있을 테니 서둘러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망할, 궁수들은 내려오고 마법사들이 투석기를 막는다. 위력 있는 마법으로 돌덩이를 부숴버려!!”
“작전을 세울 시간을 벌어라!!”
사기가 꺾인 상황에서 성벽마저 없으면 이길 가능성은 희박했다. 무엇보다 투석기의 무력화가 급한 상황. 몬스터보다 사람을 죽이면 경험치를 더 얻는 어쌔신은 이벤트에서 배척했기 때문에 수가 적은 로그나 발 빠른 궁수들로 투석기에 전해지는 돌의 보급을 끊어야 했다.
“저렙 유저들로 시선을 끌고 궁수와 로그들이 배후를 쳐서 돌의 보급을 끊어야겠습니다. 각 길드에서 로그나 궁수, 그리고 실드 파이터를 차출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엘시노님.”
엘시노, 철의 기사단 길드를 이끄는 냉정하고 머리가 뛰어난 사내였다. 로그와 궁수 말고도 실드 파이터(방패를 가지고 싸우는 기사)를 찾은 이유도 전멸할게 뻔한 저렙 유저들을 이끌면서도 생존 확률이 가장 높은 클래스이기 때문이다. 발 빠른 사람들로는 궁수들의 화살 세례를 막기 힘드니까.
“디아블로 길드의 로그와 궁수 여섯을 모았습니다.”
“저희 철의 기사단은 실드 파이터 다섯을 모았습니다.”
“리벤지 길드 궁수 다섯을…….”
여러 길드에서 조금씩 인원을 차출하자 꽤 많은 수가 되었다. 작전대로 실드 파이터들은 성문 앞에서 저렙 유저들을 선동했고 로그와 궁수들은 텔레포트를 이용한 기습을 준비했는데, 저쪽에 안티 매직 실드라도 펼쳐진 건지 텔레포트를 할 수 없었다.
“로그와 궁수는 저렙들이 서쪽 문으로 나갈 때 북쪽과 남쪽으로 나뉘어 출발한다.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작전인 만큼 사력을 다하도록. 작전 시작이다, 출발하라!!”
“성문을 열어라!! 돌격이다!”
“와아아아아.”
실드 파이터 중에 이름을 날린 이가 꽤 있어선지 수백의 저렙들이 길드들의 생각대로 쉽게 움직여줬고, 불나방들이 불을 향해 뛰어드는 동안 로그와 궁수들은 고함 소리에 녹아들어 사라졌다.
“재수 없는 길드놈들, 저렙이라고 이용해 먹다니…….”
“그건 상관없는데, 저 돌덩이는 이제 어디로 보내란 말이야?!”
가장 고생하는 건 돌진하는 저렙들도, 기습을 준비하는 로그와 궁수도 아닌 성벽 위의 마법사들이었다. 겨우겨우 부숴가며 땅으로 떨어뜨리고 있는데 거기로 저렙 부대를 보내면 어쩌자는 말인가?
“알게 뭐야. 어차피 죽을 것들 우린 돌만 부수면 되는 거지. 파이어 볼, 파이어 볼, 파이어…….”
“오랜만에 옳은 말을 하는구나. 콜 라이트닝!!”
현재 성벽을 사수하는 마법사들을 이끄는 건 마법사 최고 레벨의 에크만, 알테어 둘이었는데 둘은 같은 레벨에 현실에서도 친구지만 추구하는 마법관은 정 반대였다. 먼저 에크만은 무한 마나를, 알테어는 일격필살을 지향했는데 덕분에 에크만의 특기는 마법 콤보였고 알테어는 범위 마법이었다.
“으아아악!!”
“돌을 이리로 보내면 어떻게 해!!”
“우리로 남 신경 쓸 시간 없으니까 알아서 피하고 고슴도치 되기 싫으면 방패나 들어!!”
오크들은 그들이 진격해도 움직이지 않다가 3분의 1정도까지 오자 오크궁수들이 나서 화살로 하늘을 가득 메웠다. 마나가 실리지도, 스킬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지만 방패가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 질 수밖에 없었고 결국 퇴각 명령을 내렸다
“후퇴, 후퇴하라!!”
기다리던 퇴각 명령이 떨어지자 모두 뒤도 안 돌아보고 달렸는데 방어가 허술해 져서인지 무사히 성으로 돌아온 사람은 100명 남짓이었다. 그런 그들을 보며 길드들은 화살받이가 줄었다는 생각뿐, 별다른 감흥은 없어했고 참다못한 한 사내가 항의했다.
“이건 좀 너무 하잖습니까?”
“뭐가 말이죠?”
그도 길드 쪽 인물인 듯 엘시노는 조소를 띠면서도 존대를 해주고 있었다.
“그럼 다른 대안이라도 있습니까?”
항의하던 사내는 라스트 길드의 길드 장, 거트루드였다. 그들도 분명한 길드였으나 세력이 약하고 친목 길드라 인원이 적은 탓에 은근히 다른 길드에서 무시당하고 있는 게 사실이었고, 길드라는 이유 때문에 그나마 겨우 존대를 받는 정도였다
“말에 빗자루 같은걸 달아서 눈을 속인다거나…….”
“저들을 지휘하는 건 운영자입니다. 그런 얕은 수에 넘어갈리 없죠. 할 말 다 하셨으며 물러나 주시겠습니까?”
“젠장, 이럴 때 콜이라도 있었으면……. 이 자식은 이벤트가 시작했는데 아직도 탑에 쳐 박혀 있는 건가?”
나지막한 그의 말속에는 콜이란 사내에 대한 커다란 믿음이 담겨져 있었다.
“큰일 났습니다.”
“기습조가 발각된 건가?”
“그게…… 전멸 당했답니다.”
“!!”
기습조로 뽑힌 이들은 각 길드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였다. 그런데 그들이 이 짧은 시간에 전멸 당하다니. 오크들의 진영에서도 이탈의 움직임이 없었는데……. 믿을 수 없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유는?”
“어쌔신들의 짓이랍니다.”
각 길드의 수뇌부들은 다시 한 번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어쌔신들이 이벤트 참가 의사를 밝히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몰랐다.
“망할 놈의 자식들.”
“그들이 그 짧은 시간에 전멸 당했다면 보급을 차단하는 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서 다른 작전을 짭시다.”
“투석기도 투석기지만 문제는 오크 궁수입니다. 맞대응하기엔 수가 너무 많아요.”
“고렙들도 그 정도의 숫자라면 막아내기 힘들 것 같던데…….”
절망적인 상황에 수뇌부들은 침묵했다. 그 침묵을 깬 건 엘시노였다
“방법이라면 있습니다. 하지만…….”
엘시노는 그새 생각해 놓은 게 잇는지 입을 열었지만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우리에게 조건이 따르질 않습니다.”
“그래도 뭔지나 말씀해 보십시오.”
“알겠습니다. 저들은 화살에 마나를 담거나 스킬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즉, 풀 플레이트를 착용한 기사나 실드 파이터들에게는 아무런 타격을 줄 수 없다는 소리죠. 하지만 풀 플레이트를 가진 사람이 그렇게 많지도 않고, 실드 파이터들로 막아내면서 전진하려면 사람 몸만 한 크기인 히터실드를 착용해야할 텐데 우리에겐 실드 파이터의 숫자도, 히터실드의 숫자도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왕국 측에 부탁해보면 안되겠습니까?”
“이미 접촉해 봤지만 거절당했습니다.”
장내에는 또다시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오크 이벤트란 소리에 내심 일방적인 학살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반대로 학살당하게 생겼으니…….
“저들이 거리를 유지하면 승산이 없습니다. 돌을 막는 것도 한계가 있을 텐데……. 마지막으로 전면전을 벌이면 어떨까요.”
“저렙을 화살 받이로 쓴다 해도 그건 무립니다!! 전멸 당할 바엔 이번 이벤트를 포기합시다.”
레벨 다운이 두려운지 몇몇 길드에서는 이벤트 포기를 주장했다. 사실 다른 길드들도 같은 생각이었지만 그럴 수 없는 이유가 있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전면전을 생각하는 것이었다.
“지금 상황이 모두 TV를 통해 전국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길드들이 포기한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명성이 허물어지는 것은 물론, 비겁자로 낙인찍힐 겁니다.”
“큭…….”
오크 침공이라는 말에 무시하던 그들이 이번 이벤트의 전면에 나선 것도 길드의 명성을 드높이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이 말을 들음으로써 더 이상 그들에게 남아있던 선택권이 사라졌다.
“후우……. 그럼 저렙들을 앞세우고 길드는 후방의 궁수와 로드를 처리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거참, 듣다듣다 못 들어 주겠네.”
“누구냐!! 길드 관련자만 들여보내라고 그렇게 말했건만…….”
“그렇게 열낼 필요 없어. 나도 엄연히 한 길드의 멤버니까.”
“콜!”
엘시노에게 시비 거는 사내를 보자 저렙을 앞세운다는 소리에 속이 안 좋았던 거트루드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 * *
“뭐야, 라스트 길드 원인가? 괜히 끼어들지 말고 우리가 시키는 대로나 움직여. 정 무섭다면 로그아웃해도 상관없고. 어차피 너희한테는 기대도 안 하니까.”
“엘시노님, 저쪽에서 시비를 걸었다고는 해도 말이 심하십니다. 라스트 길드는 친목 길드니 전력이 약한 건 어쩔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어떻게 돈을 마련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길드랍시고 여기저기 다 끼는 게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솔직히 다른 길드 분들 생각도 같지 않습니까?”
“그, 그건…….”
다른 길드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우리 길드가 약한 건 사실이지만 저놈 말하는 투가 너무 재수 없는데? 한번 해보자 이거지??
“어차피 전멸 당하려고 덤빌 거면 제게 전권을 넘기시죠. 멋들어지게 박살을 내줄 테니까.”
“그럼 전투에 대한 모든 책임도 라스트 길드에서 지겠다는 건가?”
“물론, 승리했을 때 그쪽 길드의 이익을 모두 우리에게 넘긴다면.”
“좋다, 그런데 길드 장의 의견은 묻지 않아도 되는 건가?”
“아, 난 괜찮아.”
거트형도 쉽게 승낙했고 다른 길드들이 증인이 되어 거래가 성립됐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성에서 병사들이 몰려옵니다!”
“뭐, 뭣이?!”
두두두두두두두두두.
멀리서부터 들리던 땅의 진동 소리가 점점 커져왔다. 아마도 부탁한 ‘그들’이 오는 거겠지, 당황하는 엘시노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고 앞장서서 밖으로 나오자 반듯하게 정렬해 있는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건 히터 실드!!”
“저들이라면…… 이길 수 있다!!”
NPC답게 미동조차 없이 서있는 모습은 추락한 사기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했고 엘시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졌다.
“알고 있었나? 이들이 올 것을.”
“물론이죠, 제가 오게 만들었는데.”
“그럴 리가 없어!! 우리 길드에서 도움을 청했을 때도 거절했는데 너 따위가, 너 따위가!”
자신들이 해내지 못한 일을 내가 해냈다는 것을 믿기 힘들었는지 저렙들을 희생시킬 때도 눈 하나 깜짝 안 하던 그의 얼굴은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지며 벌겋게 달아올랐다. 거참, 게임 한번 리얼하단 말이야?
“그럼 작전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들이 방패로 앞과 머리 위를 막아줄 겁니다. 방패가 큰 만큼 안에 공간이 남겠죠? 그 사이를 고렙의 유저로 꽉꽉 채워 넣고 화살을 쓸 수 없을 만큼의 거리에 왔을 때 튀어 나가는 거죠. 여기서 기사가 투석기를 처리하려면 뚫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니 정령술사와 마법사는 필수입니다.”
“알겠습니다, 길원들에게 그렇게 전해두죠.”
“후후, 드디어 저희 정령의 황혼 길드가 활약할 때로군요.”
“그리고 쉽게 로드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전해주십시오. 운영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 친위대 같은 걸 조직해 뒀을 겁니다. 그럼 서둘러 주십시오.”
각 길드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사람이 없어 준비할 것도 별로 없는 라스트 길드에서는 콜의 복귀를 환영했다.
“제때에 잘 돌아왔다.”
“오빠, 잘 돌아왔어요.”
“넌 언제나 사람을 놀래 키는 구나!!”
“이번엔 무슨 수를 쓴 거야? 마법은 완성했고??”
환영의 인사와 함께 쏟아지는 질문들, 일일이 답할 수는 없어서 간략하게 줄여 말해야했다.
“이벤트 시작한 걸 알고 와 보니까 저렙들은 사지로 뛰어들고 궁수와 로그가 옆문으로 몰래 나가잖아? 그래서 대충 상황을 살펴봤더니 오크들이 공성 병기를 쓰고 머릿수를 이용해 화살을 날리더군. 기습조가 실패할 건 대충 예상했어. 만약 성공했다면 거기에서 로드를 바로 칠 수도 있을 텐데 운영자도 바보는 아니니까. 그래서 저들을 얻기 위해 성으로 갔더니 누가 먼저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왕을 알현하고 있더라고. 대답은 다들 알다시피 거절, 그런데 왕이 결정을 내리는데 옆에 있는 신하의 영향을 많이 받더라고? 그래서 슬쩍 그를 매수한 거야, 왕을 좌지우지하는 신하치고 썩지 않은 놈 못 봤거든.”
“이야…….”
당연히 매수하는데 사용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처음에 돈으로 매수할까 생각도 해봤지만 그 정도 되는 자에게 몇 골드는 그리 큰돈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 그를 넌지시 떠보았다. 그러자 그 자는 직접적으로 자신의 요구를 드러내었고 난 경악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 요구는 바로…….
“모든 길드 집결했습니다.”
“그런 가요?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맨 앞의 병사 뒤에는 기사가, 그 뒤 세줄 정도는 정령술사와 마법사가 섭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채우시면 되고 1군이 전투에 들어간 뒤 병사들이 돌아오면 다른 유저들이 같은 방법으로 진입합니다. 투석기가 박살나면 성벽의 마법사들도 모두 전투에 투입해 주십시오. 수가 수인만큼 범위 공격이 절실하니 말입니다. 그렇게 반복하다가 궁수들의 수가 줄면 성안에 남아있던 유저들도 총 공격을 가합니다.”
“알겠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우리의 힘을 보여주자, 선두는 길드에서 맡는다!”
길드가 선두를 맡는다는 말에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좀 전에 이용당한 기억이 남아있는지라 환호소리가 아까처럼 크지는 못했다.
“……신용을 잃은 건가. 모두 준비!!”
“잠깐!! 나도 가겠어.”
“나도!!”
성벽을 수비하던 에크만과 알테어가 참여의사를 밝혔지만 거절당했다. 그들이 없으면 성벽 방어에 큰 구멍이 뚫릴 테니까. 결국 2군에 투입되는 걸로 합의하고 그들을 말렸다.
“성문을 열어라, 출격이다!!”
요란한 소리가 나며 성문이 열리자 1군은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천천히, 안전하게 전진해 나갔다. 오크 궁수들은 끊임없이 화살을 날렸지만 커다란 방패에 막혀 힘없이 떨어질 뿐이었다.
“어쌔신이 나타나면 어떻게 하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빨라도 저 화살비 속으로 뛰어드는 건 자살행위와 마찬가지니까요.”
철의 기사단도 못 한 일을 해내서 일까? 은근히 무시하던 다른 길드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살라만다!!”
“카사!!”
“파이어 볼.”
“파이어 월.”
전투의 시작을 알린 건 정령술사와 마법사였다. 제 1 타깃은 당연히 투석기, 나무로 만들어진 투석기는 너무도 쉽게 파괴되었고 병사들은 서둘러 성으로 돌아왔다.
“이번엔 저도 갑니다, 성벽 위의 두 분도 어서 오시죠.”
“무한 마나의 위대함을 보여주마!!”
“남자라면 한방이다!”
에크만과 알테어, 그리고 나. 이 셋을 빼고도 상당수의 마법사가 참여했지만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어쌔신이 아니기에 기사나 격투가 등의 수를 늘렸다. 우리는 빠르게 편성을 마친 뒤 다시 전선으로 투입됐고 거의 다 도착했을 때 길드 원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해야만 했다
“한바탕 쓸어버리고 싶겠지만 잠깐 날 좀 보호해줘.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맡겨만 두라고!! 얼씬도 못하게 할 테니까.”
“부탁한다. 대지 속에 감춰진 파괴의 힘, 마그마!”
방패가 열리고 안에 있던 유저들이 활약하기 위해 뛰쳐나가자 나도 서둘러 마법을 캐스팅 했다. 아주 대단위의 주문으로.
“꾸우우욱!”
“저건 뭐야?!”
오크들의 진형 깊은 곳의 지형이 땅에서 마그마로 바뀌며 그들을 몰살시켰다. 범위를 최대한 확대시켜 위력이 현저히 줄어들었다고는 해도 레벨 10대 사냥감인 오크 따위가 7써클을 버텨낼 순 없는 것이다.
“마나 포션 좀 먹여줘.”
스스로도 최대한 빨리 마나 포션을 들이키고 있지만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마나를 감당하기엔 벅찼다. 결국 두 명이 더 달라붙어 입에 마나 포션을 들이붓는 상황이 벌어졌고, 그러는 사이에 수백의 오크가 더 죽임을 당했다. 몇 만 단위의 대군인지라 오크들은 그 지역을 피할 수 없던 것이다. 그들은 서로에게 떠밀려 싸워보지도 못하고 녹아 없어졌고, 안타깝지만 아이템은 포기해야했다. 오크가 얼마나 주겠냐마는…….
“치사하게 저런 방법을 쓰다니, 질 수 없다!”
“이름도 모르는 놈한테 질 수야 없지!!”
에크만과 알테어는 내가 유지중인 마그마를 보여 불타올랐고 그것은 곧 오크들의 학살로 이어졌다. 그 많던 오크도 마법난사와 계속 이어지는 충원에 끝이 보였고, 다음은 오크 전사의 차례였다. 일반 오크에 비해 수는 적었지만 체력도, 힘도, 레벨도 높았기에 마그마의 범위를 축소시켜 위력을 높이고 유지시켰다.
“포션 배달 왔습니다.”
마나 포션이 바닥을 보일 무렵 성에 남아있던 타 길드의 사람들이 마나 포션 지원을 해왔다. 그 덕에 또다시 소다 맛의 마나 포션을 물리도록 먹어야했지만 싸움이 훨씬 수월해 졌다.
“놈도 왔을 거다. 긴장 늦추지 마.”
“컥.”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리가 쓰러졌다. 등에 작은칼을 하나 박은 채로.
“제길, 등을 맞대. 마법 유지는 포기다.”
“날 찾나? 얼마나 실력이 늘었는지 평가해 주도록 하지.”
놈이었다. 그렇게 복수를 다짐했건만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사람과 몬스터의 혼전 속에서 어쌔신은 그만큼 몸을 숨기기 쉬우니까.
“빌어먹을, 하필 이런 상황에서 만나다니.”
채챙-.
놈은 빠르게 이동하며 비도를 날렸고 상당한 렙 차이가 나는 상대가 던진 것이라 다들 막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놈은 한번씩 치고 들어와서 몸에 상처를 입히고 사라졌는데, 검에 독이라도 묻힌 건지 상처부위가 파랗게 변했다.
“큐어.”
세리가 없는 상황에서 해독이 가능한 건 거트 형뿐. 놈은 계속해서 형을 공격해 왔고, 결국 몇 개의 비도를 막아내지 못해 아웃됐다.
“파이어 볼!!”
“멀티 샷!!”
“파이어 애로우, 멀티 샷!!”
움직임을 예상해 가면서 까지 공격을 해봤지만 모두 허사였다. 각 길드의 주축들이 와서 도와주면 좋으련만 그들은 이미 적진 깊숙이에서 활약 중이라 뒤쪽에 있는 우리에게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저번보다는 제법 반항을 할 줄 알았는데 실망이군.”
어떤 공격도 피할 자신이 있다는 걸까? 그는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주위에 몬스터나 사람이 없어서 숨을 수도 없는 상황. 상대방의 자만심을 이용해 ‘그것’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이것도 피해봐라, 파이어 볼!!”
파이어 볼이 점점 작아지며 작은 구슬이 되었다. 크기가 작아서 일까? 놈은 고개를 까딱여 가볍게 피했고 내 입가엔 미소가 걸렸다.
“폭발.”
퍼엉-!
이미 피한 파이어 볼의 압축판이 폭발하며 파이어 볼을 훨씬 뛰어넘는 위력을 발휘했다.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였다고는 해도 엄청난 중상. 쓰러진 그를 향해 일격을 날리려는 순간 다른 어쌔신 두 명이 끼어들며 비도를 날렸다.
“위험해요!!”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제대로 방어도 못했고, 비도를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 내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 로그인 듯한 검은 옷의 유저가 몸을 날려 등으로 비도를 대신 받아냈고, 그들은 놈을 부축해 사라졌다.
“너는!!”
“헤헤……. 저번에 죄진 게 있으니 이렇게라도 갚아야죠.”
검은 옷의 로그는 두 달 전 파티에서 쫓아낸 세르였다.
“오빠!!”
“흠흠……. 고맙다.”
“이제 용서해 주시는 거예요? 헤헤.”
“큐어, 힐링!!”
거트 형이 간단한 치료를 하자 세르는 곧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상황을 보니 어쌔신들은 이미 물러난 상태. 놈이 그들을 이끌었던 것 같았다. 골치 아프던 어쌔신들이 물러나자 승패는 쉽게 갈렸다. 고렙들이 뒤치기 걱정 안 하고 전력을 다하자 오크 전사와 궁수는 도저히 상대가 되질 못했고, 유저들 중 일부는 내 말을 무시한 채 로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런 멍청이들!!”
중·고렙으로 보이는 셋이서 로드를 잡으러 막사로 뛰어 들어갔다가 한 명만 튕겨져 나왔다. 안에서 소란이 없는 걸 보니 나머지 둘은 이미 아웃된 상태. 내 예상대로 막사 안에는 로드만 있는 것이 아닌 듯싶었다.
“콜님, 이제 거의 정리가 된 것 같은데 로드를 잡아도 되지 않을까요?”
“음……. 큰 무리는 없겠군요. 대신 뒤쪽이 밀리지 않게 로드를 잡으러 가는 사람은 각 길드에서 세 명 정도로 했으면 합니다.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한 누가 로드를 잡든 상관없구요.”
“알겠습니다.”
얘기가 각 길드로 퍼지자 선발된 자들이 로드의 막사로 몰려들었고, 난 한발 앞서 막사에 도착해 그들을 기다렸다. 맹렬히 달려오는 이들을 보니 로드를 먼저 처치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이대로라면 앞뒤 안 가리고 막사로 뛰어 들어가 로드만을 노릴 것 같았다.
“후우, 이거 안 되겠군. 불과 바람의 조합, 파이어 스톰.”
안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들어가는 건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는 생각에 불꽃 섞인 바람으로 막사를 태우고 날려버렸다. 그와 함께 드러나는 막사 안의 실체.
“헉.”
“뭐가 저렇게 많아?!”
막사 안에 있던 친위대의 수는 100에 육박했다. 명색이 친위대인 만큼 실력도 뛰어날 테고 두세 명이 합공하면 고전을 면치 못할 것이었다. 시간을 끌며 지원을 기다릴 것이냐, 아니면 이들과 맞붙을 것이냐 서둘러 결단을 해야 했다
“젠장, 로드만 잡으면 되는 거야!!”
한 명이 기세 좋게 달려갔다가 친위대에 가로막혀 겨우 살아 돌아왔다. 생각보다 막강한 그들의 실력에 선발대는 긴장했고 난 로드를 향해 소리쳤다.
“로드!! 난 네 목에는 관심 없다. 제롬을 내놓아라!”
“내 목을 가져가면 왕국의 보물을 얻을 수도 있을 텐데 관심이 없다라? 재미있는 녀석이군.”
제롬이 누군지도 모르는 다른 사람들은 그게 뭘까? 숨겨진 이벤트라도 되는 건가?? 하는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솔직히 여기서 보물을 얻어 봐야 우리에겐 독이 될 수 있다. 엘시노가 말한 것처럼 우린 아직 약하니까. 그런데 로드라 저렇게 말을 잘하는 거야? 저번에 제롬은 몬스터 소리를 내던데…….
“로드라 말을 그렇게 잘하는 겁니까?”
“운영자는 어떤 몬스터로 변해도 말을 할 수 있다네. 그보다 제롬은 왜 찾는 거지?”
“빚이 있거든요.”
친위대 중 하나가 움찔거리며 다른 몬스터 사이로 숨었다. 하지만 모두가 정지한 상태에서 그런 것이 오히려 눈에 띄게 만들었고 제롬이 누구인지 확실해 졌다.
“제롬은 아무래도 나올 생각이 없나보군. 어차피 싸우게 될 것, 굳이 그를 희생시키고 싶진 않네.”
“그럼 할 수 없군요. 에크만님, 알테어님.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알고 있었나? 뭐, 그러도록 하지.”
각 길드의 선발대가 올 때 아무 길드에도 들지 않은 그들이 숨어서 따라오는걸 우연히 봤지만 그냥 놔뒀다. 길드만 잡아야 한다는 생각은 너무 이기적이니까.
“일단 수를 줄여야 할 것 같군요. 악을 심판하는 하늘의 힘, 콜 라이트닝!!”
“그러지. 무지한 자에게 심판을, 체인 라이트닝.”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연옥의 불꽃, 헬 파이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굵은 번개와 그 이상의 힘으로 수많은 몬스터의 몸을 헤집고 다니는 전기, 그리고 상대의 무기, 갑옷 할 것 없이 녹여버리는 궁극의 불꽃. 이 엄청난 위력에 그 많던 친위대의 숫자는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줄어버렸다
“이 정도의 인간이 있을 줄이야, 전원 공격!!”
수가 많이 줄었다고는 해도 아직 선발대보다는 많았다. 덩치가 큰 그들이 한꺼번에 달려 나오자 상당한 위압감이 느껴졌는데 그 속에서 머뭇거리는 한 마리, 제롬이 보였다
“우리 길드는 로드를 포기한다.”
“뭐?”
“유니크 아이템을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라구요!!”
“그러니까 안 된다는 거야, 객관적으로 우리 길드의 힘은 매우 약해. 그런데 그런 걸 얻으면 다른 길드에서, 아니 일반 유저들까지 우릴 노릴 테지. 우린 그냥 친위대나 잡으면서 경험치랑 아이템을 먹는 게 제일이야.”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아쉬운지 입맛을 다시는 일행을 뒤로하고 제롬을 향해 돌진해 버렸다. 갑작스런 대시에 당황해 검을 휘두르는 제롬에게 가볍게 파이어 볼을 날려주고 아무도 없는 곳으로 슬며시 유인했다.
“이제야 겨우 둘만의 시간이 돌아왔군요.”
“뭐?! 이런!!”
이제야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은 건지 그는 크게 당황했고 도망치려 했다. 내가 저렙일 때 당했던 기억이 있으니 조금은 두렵기도 하겠지
“라이트닝 애로우!!”
7개의 전기 화살이 날아가 그의 등을 가격하자 약간 감전됨과 동시에 땅에 꼬꾸라졌다.
“원거리에서 공격하는 마법사에게 등을 보이다니, 그렇게 죽고 싶은 건가요?”
“크윽, 나도 이판사판이다!!”
마비가 풀렸는지 무작정 달려오는 제롬, 하지만 흥분은 독이 될 뿐이다. 전 속력으로 달려오는 그의 앞에 파이어 월을 생성시키자 속력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얼굴을 가린 채 뛰어 들었고 그러는 사이 난 옆으로 이동해 마법을 준비했다.
“라이트닝 스피어.”
또 다시 마비된 그의 몸, 내겐 너무나 좋은 기회였다.
“옛정을 생각해서 이쯤으로 끝내죠. 파이어 볼!!”
점점 작아지는 불꽃의 구, 그것은 로즌 크랜츠에게 중상을 입혔던 그것이 분명했다. 압축되어 관통력을 지니게 된 파이어 볼은 브래스트 아머가 있는 제롬의 몸 대신 방어구가 없는 다리를 꿰뚫었고 제어를 풀자 내부에서 폭발했다.
“조금…… 잔인한가?”
제롬이 있던 자리에는 심하게 찌그러진 갑옷과 몇몇 아이템만 있을 뿐, 시체는 찾아 볼 수 없었다. 굳이 더 찾으라면 주위에 잘게 찢긴 회색의 고기조각들 정도?
“콜!!”
떨어진 아이템을 수거하고 있을 때 친위대 한 마리를 떨치고 달려오는 일행이 보였다. 일행이 다가오는 동안 회색의 고기조각들은 사라졌고 잔인한 모습을 보이지 않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뭐가요?”
“방금 그 마법.”
잔인한 장면이라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봐버린 모양이다. 어차피 계속 쓸 건데 별 상관없으려나?
“파이어 볼이에요. 변형시킨 거지만.”
“파이어 볼이 그런 위력을 낼 리가 없잖아!!”
“맞아요, 아까 어쌔신에게 쓸 때의 위력도 7써클의 플레임 스트라이크와 맞먹었다구요.”
“후……. 설명해 줄게. 원판은 파이어 볼 맞아. 그런데 그걸 압축시키려하면 폭발하지. 폭발을 막으려면 폭발력보다 압도적인 힘으로 제어를 해야 하는데, 처음에 바람으로 했더니 압축은 안 되고 불꽃만 커지더라고. 그래서 순수한 마나로 감싸버린 거야. 때문에 제어를 풀면 파이어 볼의 폭발력에 마나가 더해져서 그런 위력이 나오는 거고. 이거, 다른 사람한테 말하면 절대 안 된다.”
“아, 예.”
“나도 이거 하면서 셀 수도 없이 죽었다. 불 속성은 마스터했는데도 말이야. 너도 만약 시도해 볼 거면 최소 불 속성 정도는 마스터해야 할 거야.”
탑에서 수련할 때 아웃돼도 페널티가 없어서 다행이지, 아니었다면 지금 내 레벨은 40도 안 됐을 것이다. 마그마를 만들 때도 상당히 고생했지.
“넌 정말 알 수 없는 놈이야.”
“어떻게 그런 생각을….”
“그렇게 비행기 태울 것 없어. 다른 판타지 작가들도 한가지씩은 마법을 개발했을 테니까.”
“그래도 대단한 건 대단한 거예요.”
오늘 보여준 마그마와 변형 파이어 볼에 드라이저는 거의 내 추종자가 되어 있었다. 상태가 심각하군.
“로드는?”
“거의 다 처리한 것 같아요. 길드 장들이 상대하고 있으니까 금방 승부가 나겠죠.”
상황을 보니 길드 원들이 친위대를 맡고 있고 길드 장들과 에크만, 알테어가 서로 로드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죽이면 유니크 급일 왕국의 보물이 들어올 테니까.
“하아압!! 검기 연격.”
“에너지 볼트!!”
“필라 오브 파이어(pillar of fire).”
“크으으윽.”
로드의 능력이 생각보다 뛰어났지만 다구리엔 장사가 없다고 몸에 상처가 하나 둘씩 늘어갔다.
“이놈은 내꺼다!!”
결국 오크 로드의 목은 철의 기사단 길드 장인 엘시노에게 돌아갔다. 뭣이? 엘시노?!
“이거 일 났군.”
“왜요? 로드 잡았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이벤트도 끝일 테고…….”
“내가 저놈이랑 시비 붙고 내건 거래 내용이 뭐였지?”
“그거야 이번에 승리하면 철의 기사단에서 얻는 모든 이익을 우리에게…… 그럼!!”
“왕국의 보물이란 게 우리한테 들어와 버리는 거지, 미치겠군.”
약속의 내용을 기억 못하는지 엘시노는 보물을 얻을 기쁨에 젖어 있었다. 로드가 죽고 나서 길드 장들이 가세하자 친위대를 비롯한 나머지 오크들이 순식간에 궤멸되었고 길드들은 위풍당당하게 성으로 돌아갔다.
“이 왕국의 국왕으로서 감사의 마음을 표하는 바이네. 그럼 약속대로 왕국의 보물을 수여하도록 하지, 보물을 가져오라!!”
왕의 외침에 병사들이 몇 개의 아이템을 쿠션으로 받쳐서 들고 왔다. 아이템들을 보며 엘시노의 차가운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고 그 모습은 무척이나 재수 없었다. 저걸 가지는 건 꺼림직 하지만 저놈을 생각해서 팔아먹기라도 해야겠군.
“로드를 해치운 용사 엘시노와 가장 큰 활약을 보여준 colonist는 앞으로 나오라!”
에…… 나? 설마 마그마로 몰살시킨 것 때문에 그러는 거야?! 생각해보니 방패 병사에 마그마, 어쌔신 철수까지……. 은근히 한 게 많았군. 산 넘어 산이로세.
“나 에번스 왕국의 국왕 엘리엇 보들레스 디스릴가르드는 왕국을 구한 용사들에게 보답으로 왕국의 보물을 수여하는 바이다. 원하는 걸로 고르도록.”
“와아아아아아.”
이벤트가 끝나 추가 페널티가 사라지자 아웃됐던 사람들이 좀처럼 보기 힘든 이 장면을 위해 재접속 했다. 뭘 고르지?
“이것은 무한의 주머니로 사용자의 레벨에 맞춰 아이템 보관량이 늘어납니다.”
“이걸로 하지.”
약간 낡은 주머니 앞에 서자 들고 있던 NPC가 설명해줬고 꽤 괜찮은 물건이란 생각에 두말없이 선택해 버렸다. 엘시노가 고른 것은 기사답게 롱소드, 검신이 약간 푸른 것이 심상치 않았다
“추가로 그대들에겐 왕국 내 모든 시설을 3%할인된 가격으로 이용할 수 있는 특권을 주겠네.”
3%. 적은 것 같지만 비싼 아이템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100골드짜리를 사면 3골드를 남겨먹는 것이니 장사를 해도 꽤 많은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돈 걱정은 없이 살겠는데?
“그럼 모두 다시 찾아온 평화를 만끽하라!!”
“와아아아아아.”
함성소리를 마지막으로 이벤트가 완전히 막을 내렸다. 하지만 아직 우리는 할 일이 남았지
“어딜 가시나, 검은 놓고 가셔야지.”
“무슨 헛소리냐!!”
“기억 안 나나? 분명 승리했을 때 철의 기사단에서 얻는 모든 이익을 우리에게 넘기기로 했을 텐데.”
“아참, 그랬었군요. 안 되셨습니다, 엘시노님. 큭큭.”
같이 잡다가 마지막을 장식했다는 이유로 보물을 얻은 엘시노에게 안 좋은 감정이 생겼었는지 다른 길드에서도 그를 압박했다.
“그럴 순 없어!!”
“약속을 어기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럼 길드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 저희 모두의 척살을 각오하셔야할 겁니다.”
실제로 그들은 그 검을 위해 척살을 각오했을 것이다. 그게 엘시노가 아닌 누구라도. 그들에겐 악 성향이 올라간다 해도 죽지 않고 성향을 바꿀 능력이 있으니까.
“빌어먹을…….”
“어서 결정하십시오. 모두가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이벤트가 끝난 직후라 사람들은 엘시노가 선택한 검을 볼 수라도 있을까 하는 마음에 떠나지 않고 있었다.
“두고 보자!!”
엘시노는 검을 바닥에 내리 꽂고 사라졌다. 누구나 집을 수 있는 상황. 하지만 어느 길드도 함부로 손을 뻗지 못했다. 검의 가장 가까이에 내가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흠집하나 없다니, 과연 미스릴 소드로군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신지 알 수 있을까요?”
그들은 내게 협상하자고 보이지 않는 손을 내밀면서 무언의 압박을 주고 있었다. 괜히 한쪽 편에 붙어서 피 보긴 싫다고.
“어차피 들고 다니기엔 벅찬 물건, 경매에 붙이기로 하죠.”
“그럼 시작 가격은 얼마나…….”
“예상컨대 미스릴 소드라는 자체는 유니크가 아닐 것 같군요. 물론 다른 미스릴 소드에는 없는 특수한 추가효과가 붙어있겠지만 말입니다. 지금 이 검의 능력은 아무도 모르는 상태. 저도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시작은 가볍게 출발하죠, 천골드.”
“컥.”
자신들은 꿈도 못 꿀 가격이 시작가로 나오자 지켜보던 사람들이 경악했다. 하지만 길드 쪽은 고민할 뿐, 그리 놀라는 기색은 아니었다. 현재로서도 최강이고 나중에 가도 최고급의 자리를 유지할 검이니 자신들을 마스터 클래스로 이끌어줄 구세주 같아 보이겠지.
“천 오십 골드.”
“천 백.”
“천 이백!!”
경매의 묘미는 누가 뭐래도 경쟁에 있다. 한번 불이 붙으면 원래 가격 이상을 부르게 되는, 그것 때문에 망하는 경우도 허다하지만 설마 길드에서 망하기야 하겠는가? 길원을 총 동원해서 돈만 벌어들여도 입에 풀칠은 할 텐데.
“천 삼백.”
“천 오백.”
“이천 골드!”
경매에서 짜잘하게 나가면 가격만 치솟는다. 한 번에 기선을 제압하는 큰 액수를 부르는 게 승산을 높이는 방법., 디아블로 길드에서는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
“이, 이천 백.”
“이천 오백.”
“큭……....”
“더 없습니까? 그럼 미스릴 소드는 디아블로 길드의 보카치오님에게 낙찰되었습니다.”
마지막에 한번 따라온 길드가 있긴 했지만 또다시 사백골드를 올린 디아블로 길드에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보카치오도 출혈이 컸는지 표정이 좋지만은 않았고 떨리는 손으로 이천 오백 골드라는 거금을 지불했다.
“첫 번째 마스터는 나다!”
그는 미스릴 소드를 하늘 높이 향하며 첫 번째 마스터가 될 것을 장담하는 퍼포먼스를 했고 또다시 군중들은 환호했다. 그렇게 힘겨웠던 첫 번째 이벤트는 경험치와 막대한 돈, 원하지 않은 명성을 남기고 끝이 났다.
“이제 전 가볼게요.”
상황이 끝나자 돌아가려는 세르를 불러 세웠다
“가긴 어딜 가. 이왕…… 이렇게 된 거 우리랑 함께 하지 않을래?”
“예? 그럼…….”
“길드 가입 권유하는 거야. 나름대로 용기내서 말한 거니까 거절하진 말아 줘.”
“좋아요.”
세리는 약간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지만 다른 사람들은 대 환영이었다. 특히 린은. 세르를 데려와 정식으로 길드 가입을 하고 나서 돈을 분배했는데, 받을 수 없다는 세르에게 억지로 떠넘기고 잊고 있던 지팡이를 찾으러 마법사 길드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팡이를 찾으러……!!”
“오셨군요, colonist님. 기.다.렸.습.니.다. 꽤 많이 늦으신 건아시죠? 무려 두 달이군요. 하루에 2실버씩 연체료 1골드 20실버 되겠습니다.”
다행히 제롬은 내가 벌어들인 이천 오백 골드에 대해 모르는 듯했다. 알았다면 하루에 1골드씩 붙였을 지도…….
“여기 2골드, 나머진 팁.”
탁자에 2골드를 내려놓고 지팡이를 낚아채자 제롬은 사태 파악을 못하고 눈만 깜박거렸다.
[거트루드 : 어디냐?]
[colonist : 마법사 길드에서 막 나왔는데 무슨 일 있어요?]
[거트루드 : 지금 밖에 어떻게 알았는지 초보들이 몰려와서 돈 좀 달라고 소리치고, 중·고렙은 가입시켜달라고 난리야. 그리고 여성 유저 중에 네 팬도 생겼는데?.]
[colonist : ……골치 아프군요. 일단 가서 얘기하죠.]
“귓속말 해제. 리턴.”
이젠 익숙해진 빛이 날 길드 집으로 인도했다. 도착하자마자 내다 본 창밖엔 좁은 골목을 꽉 메운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고 여성 유저들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러댔다. 이거 장난이 아닌데.
“휴우... 처치 곤란이다. 네가 어떻게 좀 해봐.”
“알았어요.”
잠시 숨을 고르고 베란다로 나가자 여기저기에서 환호와 함께 돈 좀 달라, 길드에 넣어 달라, 자기와 사귀어 달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난 침묵을 일관하며 조용해지기를 기다렸다.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서있자 몇몇 사람들이 내 뜻을 이해하고 사람들을 진정시켰다.
“안녕하십니까, 전 라스트 길드의 colonist라고 합니다. 잠시 어딜 갔다 와서 이제야 나와 보게 됐군요. 기다리시게 한 점 일단 사과드립니다. 여러분의 얘기는 다른 길드 원들을 통해 들었습니다만 저희 길드의 전체적인 레벨이 낮아서 한동안 길드 원을 뽑을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신 어느 정도 레벨 업을 한 뒤 다른 플레이어분들에게 도움을 드릴 것을 약속하죠.”
“말도 안 된다!! 핑계 대지 마라!”
한 유저가 야유를 보냈다가 여성 유저들에게 압박을 받고 조용해졌다.
“굳이 밝히자면 지금 제 레벨이 63, 이 중에는 저보다 훨씬 강하신 분도 많을 겁니다. 못 믿으시겠다면 스크린 샷을 찍어서 홈페이지에 올려드릴 수도 있습니다. 혹시 던전이나 사냥터에서 만나셨을 때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힘닿는데 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정중한 인사를 끝으로 다시 방에 들어오자 다행히 얘기가 먹혀 들어간 듯 사람들도 하나 둘씩 떠나갔다.
“에휴... 사냥할 때 포션 많이 들고 다녀야겠는데? 저 많은 사람들을 다 도와주려면.”
“그래도 잘했어, 일단 민심을 잃으면 힘들어지는데 그 어려운 상황을 용케도 빠져나갔네.”
“수고하셨어요, 오빠.”
“하여간 네놈 말 하난 잘한단 말이야.”
“내가 못 하는 게 어디 있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을 때 거트 형에게 알 수 없는 한 통의 편지가 왔다.
“이건!!”
“왜요?”
“콜, 네 팬클럽이 생겼다. 지금 그 길드에서 동맹 요청 왔어.”
“!!”
편지의 내용은 아까 소리치던 여자들이 돈을 모아 길드를 세우고 우리에게 동맹을 요청하는(사실은 정식 팬클럽으로의 인정을 요구하는)것이었다.
“절대 안 돼!”
“냉정하게 잘 생각해. 지금 철의 기사단이 우리한테 이를 갈고 있다고. 최대한 전력을 확보해야할 때야. 그리고…… 나중에 얼굴 비치러 갈 때 나도 좀 데려가라. 혹시 알아? 나한테 첫 눈에 반하는 여자가 생길지.”
“나도, 나도.”
“저, 저도요.”
거트 형과 레이, 드라이저가 이리저리 핑계를 대도 결국 여자뿐인 그 길드에 갈 때 데려가 달라는 소리였다. 괘씸해서라도 거절하고 싶지만 철의 기사단이 우릴 노리고 있는 게 사실이니 어쩔 수 없군.
“알았어요.”
“잘 생각했어. 승낙.”
거트 형이 승낙을 외치자 자동으로 편지에 거트 형의 이름이 써지고 사라졌다. 사건이 일단락되자 세르가 구하기 힘든 것을 줄 때도 있다며 퀘스트를 제안했다. 하지만 한 개의 퀘스트에 매달리기에는 인원이 너무 많았고 결국 두 패로 나뉠 수밖에 없었는데, 오크 이벤트를 통해 상당한 명성을 쌓은 나와 평소 자주 퀘스트를 했다는 세르가 주축이 되었다.
“그럼 의뢰소에서 일단 일거리부터 찾아보자.”
“네, 그리고 오빠는 얼굴을 가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서 이동하기 힘드실 텐데.”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제롬이 인피면구 비슷한 걸 가지고 있었어.”
“그거 범죄자 도시에서 파는 거잖아? 가격은 문제가 안 되겠지만 잘못하면 PK 당할텐데……. 거기도 도시라 리콜로 도망도 못 가고.”
“제가 갔다 올게요. 일단 로그니까 쉽게 잡히진 않을 테고, 여차하면 텔레포트 스크롤로 빠져나오면 되잖아요.”
세르가 자진해서 사오겠다고 나섰다. 그러고 보니 텔레포트 스크롤이 있었군. 그래도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려면 로그인 세르가 났겠어.
“그럼 부탁할게. 수고 좀 해줘.”
“수고랄 것까지 있나요. 전직 전인 것처럼 행동하면 적이 많은 어쌔신들은 동료가 느는 거라 공격하지 않는데.”
역시 저번 이벤트 때 나타났던 어쌔신들…… 세력이 있던 거였나? 그렇다면 이끄는 자는 '놈'이겠군. 후우……. 힘들게 엉켜버렸어.
“그럼 정비하고 퀘스트 얻으러 가자.”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