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무너지는 콜로니(1)
세상에 우연 따위는 없다. 있다면, 그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 뿐.
전쟁을 멈출 기회라면 있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죽은 이들을 되살릴.
드라칸의 존재마저도 지워버리고 오류들을 바로잡을 기회 또한.
모든 것이 내 손에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본다면. 대체 왜 그랬던 건지.
리브, 너는-.
(2602년에 시공의 틈새에서 발견된 기록)
* * *
머나먼 미래. 2400년도에 이른 지금.
물론 이 세계에도 여전히 기가스는 존재했다.
다만, 그것의 용도는 과거와는 완전히 달랐다.
주로 콜로니의 건설이나 도시 확장에 이용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정작 기가스가 제작된 의의는 드라칸과의 전투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유성은 이 삶에 내심 만족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말 괜찮은 건가.’
가끔 유성은 생각하곤 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느껴진다.
전생에서 겪었던 오랜 전쟁의 시간이, 여전히 뚜렷한 탓이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과거의 전장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가끔은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일어나 보면 온몸이 식은땀으로 젖어 있었다.
아직도 유성이 과거를 잊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과거를 떨쳐내려 노력하고 있으나, 쉽게 이루어지고 있지만은 않았다.
철컥!
하지만 그때, 기가스 스크래퍼의 가슴팍에 달린 사출구가 덜컥 열렸다.
그의 상념이 깨졌다.
유성의 귓가에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유성!”
산업용 기가스 스크래퍼의 사출구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여자 생도였다.
한창 스크래퍼의 정비를 하고 있던 유성은 고개를 들었다.
“안녕, 유성!”
“라피스.”
“참. 손이라도 흔들어 주지그래?”
“그래.”
유성은 대충 손을 흔들고는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드라이버를 들곤 묵묵히 정비에 집중했다.
기이잉, 전동 드라이버가 돌아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거참, 성의 없기는.”
라피스는 불만 서린 얼굴로 툴툴거렸다.
옆에 길게 뻗은 줄을 타고 내려온 그녀는 연신 불퉁거렸다.
라피스 엘 바이어스.
그녀는 외관부터가 평범한 사람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미묘했다.
저토록 선명한 푸른빛의 머리칼과 눈동자라니.
물빛이라고 불러야 정확할 터였다.
과거의 인류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색감이었다.
하지만 현재의 인류 중에는.
푸른빛을 띤 신체를 타고난 인간들이 간혹 존재했다.
주로 마나의 영향을 짙게 받아 태어난, 뛰어난 재능을 지닌 이들이었다.
칠흑 같은 검은 눈동자와 머리칼을 가진 유성과는 대비되는 색감이 아닐 수 없었다.
라피스의 푸른 눈동자가 유성이 펼친 책 쪽으로 향했다.
“오늘도 공부하고 있는 거야?”
“그래야 장학금을 받을 테니까.”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유성의 말에 라피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아마 다른 생도들이 네 말을 들으면 어처구니가 없어할걸.”
그 말에 유성은 보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뗐다.
그는 영문을 몰라 라피스에게 물었다.
“뭐가?”
“뭐기는. 검술 성적도 1위를 차지하면서, 필기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잖아.”
“노력은 사람을 배반하지 않으니까.”
그 대답에 라피스는 남모를 미소를 지었다.
이내 후후, 하고 웃음을 흘린 그녀가 말을 건넸다.
“하지만 정작 노력이라고 하기엔 그 검술 실력은, 단순히 타고난 거잖아? 검술을 따로 연습하는 걸 본 기억은 없는데?”
“그것도 그렇군. 틀린 말은 아니지.”
유성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유성은 단 한 번도 검술을 따로 연습하거나 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말이다.
라피스가 그의 옆자리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는 차가운 생수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말을 건넸다.
“있잖아, 유성!”
“음?”
라피스는 방실방실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오늘도 쪽지 시험 만점이라면서? 축하해!”
하지만 정작 그 대상인 유성은 별다른 표정의 변화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나사를 조일 뿐이었다.
“딱히 대단한 건 아니니까.”
유성은 대충 말을 받아넘겼다.
그 말에 라피스가 실실대며 옆에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에이. 아닌 척하기는.”
사실 유성은 아카데미의 생도들 모두가 주목하는 만점 거론자였다.
검술 과목에서는 물론이고, 실기 부분에서도 언제나 상위권이라니.
보통 문과 무, 어느 하나가 뛰어나면 다른 하나가 뒤떨어지기 마련인데.
유성은 말 그대로 만능의 천재가 따로 없었다.
하지만 정작, 유성 그의 관점에서 본다면 그다지 대단할 게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인데, 그다지 어려울 건 없었으니까.’
이전 생에서 유성은 기가스의 파일럿이었다.
뛰어난 기갑 파일럿으로서, 출전 횟수 역시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았다.
그런 유성이기에 군 관련 지식을 폭넓게 가지고 있었다.
특히 기가스나 군사 지식에 관련된 것이라면 대부분 머릿속에 주입되어 있었다.
대부분 그가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본 것들이었다.
그렇기에 잊을 리도, 모를 리도 없는 것이다.
유성이 뛰어난 상위권 생도인 이유였다.
다만 문제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한 가지, 그의 진로 방향이었다.
“여전히 진로는 군사 학교가 아니라 일반 산업 대학 쪽으로 잡고 있는 거야?”
“그래.”
라피스의 물음에 유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좀 더 정확히 말한다면, 산업용 기가스를 연구하고 제작하는 학부였다.
그것이 지금 그가 밤낮을 새가며 ‘기가스 스크래퍼’를 제작하고 정비하는 이유였다.
유성은 이곳 아카데미의 점수조차 단순히 산업용 기가스 연구를 위한 발판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재능만 보자면 그는 군사 학교의 유력한 후보자였다.
교수들도 주목할 정도의 뛰어난 생도임에도, 그는 자신의 재능을 십분 살릴 생각이 없었다.
조금의 여지조차도 없었을 정도로 말이다.
‘왜냐하면 내가 이곳에서 배우는 이유도, 모두 평범한 진로를 위한 거니까.’
유성은 태어나 쭈욱 자란 고향 행성 테라에서 이곳 아카데미까지 유학을 나왔다.
“아쉽네. 너라면 분명 군사 학교에서도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을 텐데.”
라피스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조금 쓰게 웃었다.
그녀는 그렇게 느낀 듯했지만, 거기에 대해서 유성이 해 줄 말은 그다지 없었다.
끼릭. 끼릭.
한창 드라이버를 돌리며 나사를 조이던 그가 문득 손을 멈췄다.
그러더니 라피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라피스.”
“응?”
“나야 그런 이유로 왔다고는 하지만 넌 어째서 이곳 아카데미에 온 거야? 다른 곳도 많을 텐데.”
“그거야…… 아하하.”
라피스는 대충 말을 흐렸다.
어색하게 웃는 것을 보니, 그다지 말을 하고 싶지가 않은 모양이었다.
“음?”
유성은 이상해서 눈썹을 치켜 올렸지만.
다시 물어보지는 않았다.
라피스 쪽에서 그다지 원치 않는 모양이었다.
실제로 유성이 다시금 스크래퍼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라피스가 한 발자국 슬그머니 멀어지는 게 느껴졌다.
역시 적당한 거리감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슬슬 정비를 끝마친 유성이 몸을 일으켰다.
그는 옆에서 혼자 노닥거리는 라피스를 불렀다.
“라피스. 다시 한번 탑승해 보겠어?”
“응? 그래, 좋아.”
라피스는 익숙하게 옆에 길게 뻗은 줄을 타고 올랐다.
그러더니 기가스 스크래퍼의 조종석에 앉았다.
조종석의 전원을 키고 시스템에 접속하자 곧 불이 들어온다.
그 익숙한 모양새가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녀는 스크래퍼에 탑승할 유일한 파일럿이었기 때문이다.
마나를 사용하지 못하는 일반인인 유성을 대신해서 말이다.
“후우-.”
잠시간 숨을 들이쉬며 정신을 집중하던 라피스.
그녀가 감았던 눈을 뜨자.
고오오-.
새파란 빛이 두 눈에서 환하게 새어 나왔다.
바로 저것이야말로 마나 사용자들의 전유물인, 마나였다.
동시에,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마력이 조종석의 회로를 타고 기가스에 흘러나갔다.
번-쩍!
기가스 스크래퍼의 눈에서 푸른빛이 뿜어졌다.
기가스라는 것은, 오로지 마나 사용자들만이 탑승할 수 있었다.
사출구를 닫은 라피스가 이내 시험 삼아 창고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쿠웅-! 쿠웅-!
스크래퍼가 발을 내디뎠다.
아까 전 넘어지기 전보다 훨씬 나아진 움직임이었다.
유성은 마음에 드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군. 양호한 편이야.”
그런 그의 귓가에 라피스의 음성이 전달되었다.
[이제 조금 뛰어 볼게, 유성.]
“알았어.”
유성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스크래퍼가 창고를 나섰다.
그러곤 아카데미의 뒤쪽에 위치한 공터를 조금 빠른 속도로 주행하기 시작했다.
유성이 기가스를 정비하고 제작하는 역할을 맡았다면.
라피스는 스크래퍼를 시범 삼아 작동하고 주행하는 테스트 역할을 맡은 부원이었다.
한동안의 시범 주행을 맡았던 라피스가 곧 스크래퍼에서 내렸다.
그녀는 온몸에서 땀을 비 오듯 쏟고 있었다.
단지 조종석에 앉아 기가스를 조종할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진이 빠질 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먼저 유성에게 생각을 물었다.
“하아, 하아. 어땠어, 유성?”
“괜찮은 편이야. 아까보다 훨씬 나아졌는걸.”
“그랬어?”
“물론.”
유성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담백하지만 솔직한 대답이었다.
그에 안도했는지 라피스의 표정이 밝아졌다.
조금 지친 와중임에도 꽤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유성은 평소 아카데미에 알려진 그의 실력만큼이나 기준 또한 상당히 높다.
저 정도의 대답만으로도 충분히 잘했다는 의미인 것이다.
유성은 그녀에게 수건을 건넸다.
“받아.”
“하하, 고마워! 유성!”
유성에게서 긍정적인 대답을 받는 것은 꽤나 어려웠다.
그는 그 뛰어남만큼이나 무미건조한 사람이었으니까.
그와 오랫동안 알아 왔던 사이인 라피스는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라피스가 밝아지는 게 그리 이상한 것만은 아니었다.
둘은 오랜 시간 함께 친구로 지내왔다.
우우웅-.
그때, 그의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어머니.]
문자는 그의 어머니로부터 온 것이었다.
[유성아. 엄마란다. 아카데미에서는 잘 지내고 있지?]
말없이 문자를 응시하던 유성의 입가가 작게 올라갔다.
지금의 유성은 부모님이 있었다.
과거, 고아였던 그와는 다르게 말이다.
남들처럼.
다른 이들처럼 그저 평범하게 말이다.
그때, 문자가 새로이 도착했다.
[하아, 유성아. 이제는 너도 핸드폰 말고 다른 걸 사용하지 그러니. 요즘은 통신용 칩셋도 조작이 쉽다더라.]
그는 쓰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부모는 다들 이런 것인가.
언제나 관심과 걱정의 문자로 가득하다.
유성은 대충 뭐라 대답할지 고민하다 문자를 날렸다.
지금 막 도착한 메시지일 뿐이지만, 이곳 콜로니는 행성 테라와는 아주 먼 거리에 있었다.
이 전파가 테라에 도착하기까지는 그리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었다.
아마도 며칠쯤은 걸리지 않을까.
문득 유성은 생각했다.
400년이 지난 이 시대에서마저 여전히 사용하는 핸드폰이라.
일반인들에게는 차라리 생소하기까지 한 구시대적 물품이었다.
이게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이들도 간혹 있었다.
‘하지만 난 오히려 이게 더 편하니까.’
오히려 그는 칩셋이나 홀로그램 팔찌 따위가 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생리적 거부감이 들었다.
생살에 칩을 꽂아 넣어 사용한다니 말이다.
* * *
해가 저물었다.
“라피스. 난 먼저 간다.”
“나중에 봐, 유성!”
유성은 먼저 창고에서 빠져나왔다.
라피스는 여전히 기가스의 조종 연습에 여념이 없었다.
그는 가능한 조용히 아카데미를 나섰다.
라피스의 집중을 구태여 깨트리기 싫어서였다.
저 멀리 해가 저물고 있는 게 눈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