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207화 (207/235)

207화

진우가 998관에 도전하던 날은 크리켄데르의 분위기가 다른 때보다 오히려 조용했다. 사실상 이번 도전이 용사의 관에 대한 진우의 마지막 도전이 될 수도 있었지만, 메심헤네스 일행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그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피엔다 행성 사람들은 사실상 용사의 관이 몇 관까지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잠시 후면 그들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중요한 일이 벌어지려는 순간이었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적었다.

“후읍~”

진우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돔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열었다. 다른 때와는 달리 오후 늦게야 도전에 나선 진우는 사전에 낮 시간을 이용해서 몇 시간 동안 바다 속을 누볐다.

예전처럼 해변에 마나 인형을 만들어 세워둔 그는 해저의 마나 집적 장치에서 용사의 관으로 향하는 모든 공급 장치에 마나 폭탄을 만들어 두었다. 그는 마나폭탄의 지연시간을 정밀하게 조정하고, 그들 사이에 시간차를 둠으로써 계획된 시간이 되면 모두 일시에 폭발할 수 있도록 조정했다.

그것을 위해 이미 며칠 동안 바다 속에서 마나 폭탄을 만들고 지연 시간을 조절하는 연습까지 했었다.

“네가 없어지거나, 플레비크 인들에게 조금 성가신 일이 생기게 되겠지.”

그는 돔 안으로 들어서면서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작은 목소리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의 발걸음을 따라, 어쩌면 용사의 관에서 치르는 최후의 도전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이 눈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돔 안은 텅 빈 상태였다. 마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고, 진우가 도전을 시작할 때마다 허공을 떠다니던 카메라도 지금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 앞에 있는 것은 오직 하나, 뚜렷한 실체를 가지고 구현된 실물 크기의 하이뇰 뿐이었다.

“좌표는 가지고 왔나?”

녀석은 진우의 앞에 나타나자마자 표정없이 굳은 표정으로 대뜸 그렇게 물었다.

“용건부터 마무리하자는 건가?. 오랜만인데 반갑다는 인사도 없네?”

진우는 되도록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하지만 하이뇰의 반응은 여전히 냉랭했다.

“우리가 서로 인사를 주고받기에는 쌓인 게 너무 많지. 잔소리 말고 좌표부터 불러.”

녀석의 목소리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잘 만들었단 말이야.’

진우는 하이뇰의 노골적인 적의에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좌표를 불러주었다. 플레비크 행성의 좌표였다.

“네가 도전을 시작하는 순간, 내 로봇이 포털을 타고 방금 말한 좌표로 이동할 거다. 만약 네가 부른 좌표가 이상한 곳일 경우...”

“어떻게 할 건데? 손가락질이라도 하며 욕을 할 건가?”

진우가 하이뇰의 말을 잘랐다. 순간 녀석의 얼굴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하지만 진우는 그것을 무시했다.

어차피 서로가 쓸 데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진우가 고향 행성의 좌표를 제대로 불러주지 않았다는 게 확인되면 녀석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해서 그를 공격할 것이다.

반대로 그가 부른 좌표가 정확한 것이라면? 그래도 녀석은 진우를 공격할 것이다. 좌표가 확인된 마당에 그를 살려 둘 이유가 없을 테니까.

진우는 하이뇰에게 자신의 목숨을 보장하라는 따위의 약속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럴 경우 협상이 복잡하게 꼬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스스로도 굳이 그걸 요구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싸움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고, 결국 둘 중에 하나가 죽지 않으면 끝이 나지 않을 대결이었다. 진우는 하이뇰을 고장난 인공지능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하이뇰은 진우를 질투하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질투는 죽은 자가 산 자를 향해 품은 것이니까.’

아무리 인간과 비슷하게 생각하고 감정까지 표현하게끔 만들었다고 해도, 하이뇰은 이미 죽은 사람의 복제품에 불과했다. 반면에 생전의 자신과 비교가 될 정도로 뛰어난 진우는 살아 있는 존재였다.

진우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에게 앞으로도 더 발전할 여지가 있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죽은 자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했다. 설사 하이뇰처럼 자신을 꼭 닮은 인공지능을 만들어 인공적인 방법으로 영생의 삶을 실현했더라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네가 아무리 하이뇰인 척 해도 너는 사람이 아니야. 잘 만든 복제품일 뿐이지. 그거 알아? 너에게 미래는 그저 앞으로 다가올 무한의 시간에 지나지 않아. 희망도, 꿈도, 새로 달성해야 할 발전된 목표도 없지. 너는 앞으로도 영원히 지금 있는 자리에서 단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할 거야. 덩치가 더 커지고, 사방에 네 눈과 귀를 달아둔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질적으로 변하는 게 없으니까. 그러니 그만 닥치고 마수나 불러내라.”

하이뇰은 진우가 하는 말에 담긴 의미를 금방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남겨진 마지막 안전장치를 제거해 버렸다. 하이뇰은 납덩이처럼 딱딱한 얼굴로 잠시 진우를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입매를 비틀며 거슬리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크크큭. 그래도 어쨌든 나에게는 다가올 시간이 있지만 너에게는 없어. 오늘이 너의 마지막 도전이 될 거다. 아쉽지만 너의 시간은 여기서 끝이야.”

하이뇰의 비아냥대는 말을 들은 진우는 웃음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여기는 998관이야. 아직 하나가 더 남았다고.”

그러나 하이뇰은 진우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었다.

“아니. 오늘이 마지막이야. 내가 지루해져서 시스템에 조금 다른 명령을 내렸지. 999관의 마수도 상대해보고 싶나? 걱정하지 마. 지금 보여줄 테니까.”

그 말과 함께 하이뇰은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텅 빈 채로 있던 돔의 공간이 이지러지더니 새로운 마수들이 나타났다. 쿼클로와 헤쿠. 두 마리였다. 그리고 카메라는 없었다.

*  * * * *

“어떻게 된 거야? 왜 도전 시작 시간이 지났는데 화면이 나오지 않는 거야?”

용사의 관 밖에서 방송 준비를 하고 있던 방송국 직원들이 발칵 뒤집혔다. 진우가 돔 안으로 들어가서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도 당연히 보여야 할 돔 내부의 모습이 전혀 잡히지 않았던 것이다.

“모르겠습니다. 신호가 전혀 잡히지 않는데요? 용사의 관에서 영상이 아예 송출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어디가 고장 난 거야? 원인을 찾아봐, 빨리.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방송을 기다리고 있는지 알잖아? 잘못되면 우린 끝장이라고.”

“저희 쪽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용사의 관에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거기서 오는 영상 신호 자체가 아예 없어요.”

용사의 관 주변을 지키고 있던 트란메토이 방송국 스텝들은 더욱 난리가 났다. 그들은 진우가 마수에 대한 도전에 성공하고 나올 때를 기다리며 현장에서 인터뷰를 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들 역시 다른 방송국들처럼 용사의 관에서 보내오는 영상을 받아 방송을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트란메토이는 최근 가장 시청률이 높은 방송국이었다. 그런 곳이니만큼 방송에 차질이 생기면 그로 인해 발생할 피해는 다른 방송국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용사의 관 현장은 물론, 방송국 내부 역시 폭탄이 터진 것 같은 분위기였다.

“가제타는 어디 간 거야? 왜 방송이 시작될 때가 지났는데도 담당 피디가 보이지 않는 거야?”

“모르겠습니다. 한 시간 전부터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 시간 가제타는 자신이 맡은 통신선을 차단하기 위해 다른 곳에 있었다. 그와 함께 하는 메심헤네스 일행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진우가 돔 안으로 들어갔다는 연락이 온 뒤부터 초조하게 시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  * * * *

‘이 자식이 자기 무덤을 파는 군.’

진우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두 마리의 마수를 쳐다보며 속으로 혀를 찼다. 쿼클로와 헤쿠. 각각 998관과 999관의 마수였다.

쿼클로가 전설 속의 골렘처럼 온통 바윗덩어리들을 뭉쳐 놓은 듯한 마수라면, 999관의 마수인 헤쿠는 또 다른 부정형 마수였다.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은 검은 색의 액체 금속이었다.

진우를 향해 흐르는 물처럼 바닥을 기어오고 있는 녀석의 몸 전체가 특유의 금속광택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두 마리를 동시에 등장시키는 것이 어떤 것인 줄 잘 아는 놈일 텐데. 지금쯤 크리켄데르의 마나는 물론이고, 시스템의 자원이 여기저기에서 거의 고갈되다시피 했겠군.’

아무리 마나 응용력이 좋더라도, 실체를 가진 마수를 구현하려면 엄청난 양의 마나가 필요했다. 강한 마수가 등장할수록 필요한 마나의 양 역시 더욱 증가했다. 그런데 용사의 관 막판에 이르러 하이뇰은 두 마리나 되는 마수를 한꺼번에 구현시켰다. 당연히 엄청난 양의 마나가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진우의 앞에 쿼클로와 하쿠가 나타난 순간, 크리켄데르 곳곳에서 마나가 부족해서 장치를 작동시킬 수 없다는 알림 메시지가 뜨고 있었다. 하이뇰이 무리하게 마나를 끌어다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녀석은 최상급 마수로 분류할 수도 있는 녀석들을 두 마리나 조종하기 위해 다른 데 정신을 팔 수 없었다. 그 때문에 도시 전체의 시스템이 마비나 다름없는 상태에 빠져 있는데도 그것을 총괄하여 통제할 여력이 없었다.

‘녀석으로서는 모든 것을 동원한 셈이겠지만, 하이뇰은 지금 잘못된 기준에 따라 잘못된 판단을 내리고 있는 거야. 자신에게만 합리적인 길을 따라 가는 거지. 이미 폭주 상태이거나 그 직전이겠군. 사람으로 치면 자살이나 마찬가지야. 이 바보 같은 자식이, 정말.’

가용한 모든 마나와 자원을 끌어다 쓰는 것이 진우를 쓰러트리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기는 했다. 하이뇰 또한 다소 무리를 하더라도 이번 기회에 진우를 확실히 없애는 것이 그에게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었겠지만 진우의 생각은 달랐다. 그의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해 보자, 개자식아.”

진우는 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마나탐색을 통해 놈들의 몸 어딘가에 있을 마나 크리스털을 찾았다. 하지만 잠시 후 그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마나 크리스털이 없어?”

진우의 예측이 빗나갔다. 녀석들의 몸에서 마나 크리스털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부터 그가 전과는 달리 꽤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음을 의미했다.

*  * * * *

퍼억

쿼클로의 무거운 주먹이 진우의 몸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으윽.”

진우는 하쿠의 공격을 피하다가 미처 쿼클로의 공격을 피하지 못했다. 주먹을 얻어맞은 그는 신음을 내뱉으며 돔의 한쪽 구석으로 날아가 땅에 처박히고 말았다.

온몸이 부서질 듯한 고통으로 칼을 든 손을 제대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그는 지금 5분 째 두 마리의 마수에게 몰리며 이리저리 피해 다니고 있었다.

간혹 틈을 노려 공격을 시도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녀석들의 협공은 정교했다.

동조의 기술도 잘 먹히지 않았다. 그가 허공에 만들어 던진 무수한 마나창들은 쿼클로와 헤쿠의 몸에 작은 상처 이상의 피해를 주지 못했다. 마나검 역시 녀석들의 몸을 제대로 베지 못했다. 대신 그들의 공격은 진우의 온몸에 착실하게 상처를 늘리고 있었다.

“미친 놈. 미친 하이뇰.”

헤쿠의 몸 전체가 예리한 날로 변해 그의 몸을 두 동강 내기 위해 달려들었다. 진우는 녀석을 피해 다급하게 옆으로 몸을 날리면서도 하이뇰을 향해 욕을 뱉어내었다.

“어떻게 마수들의 몸 전체를 결정화시킬 생각을 했냐. 그러기 위해서 필요한 마나가 도대체...”

쿼클로와 헤쿠에게는 따로 마나 크리스털이 없었다. 하이뇰은 그의 몸 전체를 하나의 마나 크리스털처럼 만들어버렸다.

심지어 액체 금속처럼 보이는 헤쿠 역시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마나 크리스털의 결정도 자체는 매우 미약했지만, 전신을 통해 전해지는 마나의 크기는 말 그대로 가공할 정도였다.

두 마리의 최상급 마수가 온몸이 결정화된 마나 크리스털처럼 되어 숨 쉴 틈 없이 공격을 계속하자, 진우가 가진 마나로도 제대로 방어하기가 힘들었다.

“지금쯤 도시 여기저기에서 마나 부족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겠군.”

그의 말 그대로였다. 진우가 도전을 시작한 뒤로 이미 도시의 절반에 전기가 공급되지 않고 있었다.

지하통로를 오가는 운송수단인 고바체와 자레닌의 대부분이 멈춰 섰다. 크리켄데르는 엄청난 혼란에 빠져 들었다.

독립적인 시스템들이 병원을 비롯해 중요한 사회 시설들에 간신히 마나를 공급하고는 있었지만, 그마저도 하이뇰의 폭주가 더 심각해지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에도 진우는 열심히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