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뼈가 잘리거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의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살갗이 터져나가고 여기저기 멍이 시퍼렇게 들어 있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예리하게 베인 상처가 벌어지면서 핏물이 배어나와 얼핏 보기에는 온몸에 성한 곳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진우는 간신히 예상치 못했던 상황에 적응을 할 수 있었고, 그때부터 싸움은 승패를 섣불리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팽팽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공수의 균형을 맞추었을 뿐, 마수들의 몸에 자질구레한 공격의 흔적을 남기는 것 이외에는 이렇다 할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지 못했다.
답답한 싸움이 계속되었다. 아직 싸움을 시작한 지 10분도 되지 않았지만, 정작 마수들을 상대하는 진우의 입장에서는 며칠이 지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달리고, 뛰고, 검을 놀리고 있었지만 정작 싸움은 지루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거나 집중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순간들이 빠르게 돌아가는 영화 필름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진우도 혀가 바짝바짝 마를 정도로 초조했지만 마수들을 움직이는 하이뇰 역시 무리한 마나 운용으로 인해 본체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날카로운 장막처럼 펼쳐진 하쿠의 공격을 피해 몸을 숙이는 순간 쿼클로가 축구공을 차듯 진우의 몸을 노리고 발을 내질렀다. 미처 피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진우는 두 발을 굳게 땅에 딛은 채 두 팔로 녀석의 공격을 막았다.
꽝
손과 발이 부딪히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큰 폭음이 울리면서 진우의 발이 땅을 파헤치며 뒤로 죽 밀려났다. 가격한 쿼클로의 발도 돌조각이 일부 떨어져나갔지만, 진우 역시 두 팔이 욱신거려 움직일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순간 공격력이 장난이 아니네. 계속 막기만 하다가는 시간을 맞출 방법이 없겠는데...”
진우는 힐끗 시계를 보았다. 용사의 관에 들어온 지 10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조금 있으면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심헤네스 일행이 통신선을 절단할 것이다. 그들이 작전을 실행한 뒤에는 늦지 않게 하이뇰의 본체를 직접 공격해야 했다.
그것은 그가 최대한 빨리 마수들을 쓰러트려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마수를 공격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의 공격을 막거나 피하는 것만 해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진우가 땅에 묻힌 두 발을 빼어내는 순간 하쿠가 공중에서 거대한 장막을 펼친 듯한 모습으로 그의 머리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하앗.”
진우는 위를 향해 두 손을 내뻗어 허공에 십여 개의 마나창을 만들었다. 그의 손짓에 따라 마나창들이 날아가서 장막처럼 변한 하쿠를 공격했다. 하지만 마나창은 놈의 몸을 잠시 멈추게 할 뿐 큰 효과를 내지 못했다.
쏘아진 마나창이 떨어져 내리는 하쿠의 몸에 작지 않은 구멍들을 뚫고 사라지자, 녀석은 액체 금속 같은 몸을 움직여 순식간에 구멍을 메우면서 그대로 그의 몸을 덮치려 하였다. 진우는 할 수 없이 다시 땅을 굴러야 했다.
그가 구르는 자리를 뒤쫓아 쿼클로의 무거운 발이 번갈아 작은 구덩이들을 만들며 내리 찍혔다.
“할 수 없군.”
진우는 안정된 마나 운용을 포기하고 마나 기관에 있던 마나를 무리하게 끌어내었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여유가 없었다.
“기어코 폭주를 마다하지 않겠다고? 그럼 같이 하는 수밖에.”
마나를 결정화시켜 구현하는 것은 진우도 무수히 연습했던 일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래왔지만, 아무리 쿼클로와 하쿠가 단단한 결정의 형태로 몸을 감싸고 있어도 그것을 부수거나 와해시킬 자신이 있었다.
문제는 시간이 없다는 점이었다. 놈들의 몸 전체를 이루고 있는 마나 크리스털의 단단한 구조를 깨기 위해서는 동조 능력을 정밀하게 운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중을 유지할 시간이 필요했는데, 두 마리의 마수들이 펼치는 치밀한 연합 작전 때문에 도저히 그 만한 시간을 벌 수가 없었다.
정밀한 마나 운용이 어렵다면 결국 힘으로 깨뜨리는 수밖에 없었다. 진우는 독하게 마음을 먹고 마나 기관에 있던 막대한 마나들을 몸 안으로 풀어내었다. 그와 동시에 체내의 마나 흐름을 빠르게 해서 풀려난 마나들이 몸 안으로 신속하게 퍼져가게 했다.
“잘못하면 나도 함께 날아갈 수 있겠지만, 빌어먹을. 하이뇰 네 녀석이 미치기로 작정했다면 나도 같이 미쳐주는 수밖에.”
진우의 몸 전체에 마나가 터질 듯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내장이 뒤틀리고 근육이 경련을 일으켰다. 아무리 마나의 흐름을 빨리 해도, 풀려나오는 마나가 워낙 많다 보니, 흐름을 벗어난 마나들이 그의 몸 바깥으로 조금씩 새어나왔다. 진우는 사력을 다해서 제멋대로 뛰어놀려고 하는 마나를 제어하며 이를 악물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다, 개자식아.”
그의 발목을 노리며 바닥을 미끄러지듯 회전하며 다가오는 하쿠의 공격을 펄쩍 뛰어 피하자, 쿼클로가 기다렸다는 듯이 주먹을 휘둘러왔다. 진우는 공중에 뜬 자세 그대로 몸을 돌려 비스듬히 물구나무를 서듯 손바닥을 땅에 대었다. 그리고는 쿼클로의 주먹이 발바닥을 살짝 스치고 지나가자 곧바로 다리를 접고 몸을 회전시켜 쿼클로의 벌려진 두 발 사이를 미끄러지듯 통과했다.
등에 땅을 대다시피 누워서 움직이고 있는 진우의 눈에 그를 놓친 쿼클로가 거대한 몸짓에 어울리지 않는 빠른 동작으로 몸을 돌리려 하는 것이 보였다.
“차앗.”
그가 접었던 발을 뻗어 땅을 차며 재빨리 위로 도약하자 울퉁불퉁한 바위들로 이루어진 쿼클로의 넓은 등판이 보였다. 진우는 뛰어오르던 자세 그대로 재빨리 오른손을 뻗어 녀석의 등을 이루고 있는 바위 하나를 잡았다. 그리고는 지금도 몸 안에서 미칠 듯이 뛰놀고 있는 마나를 왼손에 모았다.
“이얍.”
짧은 기합소리와 함께 마나가 짙은 우윳빛으로 뭉친 진우의 왼손이 쿼클로의 등판을 이루고 있는 바위를 날카롭게 잘라내며 틀어박혔다.
쩡
정으로 바위를 깨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손끝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그래도 그의 왼손이 손목까지 녀석의 등 안으로 파고들었다.
바위처럼 보이는 녀석의 몸은 그 자체가 결정화된 마나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진우의 손끝에 모인 마나의 밀집도가 그보다 강했다. 진우는 자신의 손이 쿼클로의 몸 안에 단단히 박히자 그 상태에서 마나를 운용해 놈의 어설픈 마나 결정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쿼클로의 몸 안에서 날뛰고 있던 마나가 파고 든 진우의 손을 찢어발기려는 듯 사납게 몸부림쳤다.
“쳇.”
생각 같아서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놈의 마나 크리스털 자체를 완전히 붕괴시키고 싶었지만, 어느새 쿼클로에게 매달려 있는 그를 향해 길쭉한 금속 창으로 변한 하쿠가 쏘아져 오고 있었다. 한 손이 쿼클로의 몸에 단단히 박혀 있는 자세 그대로 진우가 하쿠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의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오르고 있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빌어먹을”
정상적인 싸움을 하는 상태였다면 쿼클로의 등에서 손을 빼서 피해야했다. 하지만 시간이 없었다. 밖에 있는 메심헤네스 일행과 약속했던 10분이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진우는 쿼클로의 등에 왼손을 박은 채로 남아 있는 오른손을 돌려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하쿠를 향해 쭉 뻗었다. 그러자 액체 금속인 하쿠의 몸으로 만들어진 창이 그의 손바닥을 꿰뚫으며 관통했다. 진우의 오른손이 뒤로 휙 젖혀지면서 하쿠의 창끝이 그의 손을 매단 채 쿼클로의 등에 꽂혔다.
“으아아아압”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소리가 진우의 입을 통해 터져 나왔다. 그의 몸에서 움직이고 있던 마나가 구멍 난 오른손을 통해 하쿠의 몸 안으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갔다. 그것은 그의 왼손 역시 마찬가지였다.
만약 하쿠나 쿼클로에게 입이 있었다면 진우의 기합보다 훨씬 더 큰, 마치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새어나왔을 것이다. 진우는 마나 기관에서 흘러나오는 막대한 양의 마나를 자신의 양 손을 통해 그대로 두 마수의 몸 안으로 몽땅 쏟아 부었다.
녀석들은 처음에는 그의 마나를 받아들였지만, 그것이 어느 한도를 넘어서자 온 몸을 떨며 진우의 손에서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렸다. 하지만 쿼클로의 등에 매미처럼 찰싹 달라붙은 진우는 전력을 다해 두 마수의 몸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았다.
우르르르
한 동안 고장 난 자동인형처럼 꼼짝도 않고 멈춰있던 한 사람과 두 마수의 몸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단단하던 쿼클로의 몸에 금이 가며 쩍쩍 갈라졌다. 어두운 금속광택으로 빛나던 하쿠의 몸 역시 급격히 빛을 잃으며 거무튀튀한 쇳덩이로 변해 갔다.
* * * * *
꽈앙~
돔 천정이 들썩거릴 정도의 큰 폭음이 용사의 관 전체를 울렸다.
“뭐야, 무슨 일이야.”
밖에서 영상이 송출되기를 기다리던 트란메토이 방송국 직원들이 앉아 있던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에서 이미 싸움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났는데도 영상이 송출되지 않는 이유는 둘 중의 하나였다. 아직 싸움이 시작되지 않았거나, 아니면 용사의 관에 무언가 이상이 생겨 영상 송출을 할 수 없게 되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러나 시스템에 대해 강한 신뢰를 가지고 있던 방송국 직원들은 전자의 가능성에 더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런데 진우가 들어간 돔에서 커다란 폭음이 들리자 가능성은 급격하게 후자 쪽으로 옮겨갔다.
“싸움이 시작되었는데 왜 영상이 송출되지 않는 건데?”
가제타를 대신해서 현장을 지휘하고 있던 책임자가 딱히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분명하지 않은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그를 쳐다보는 직원들 가운데 그 말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나운 눈초리로 애꿎은 주변의 스텝들을 노려보던 책임자는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앉아 있던 의자를 거세게 발로 걷어찼다.
성질이 머리끝까지 난 그가 씩씩 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뜨이는 것은 멀리 날아가 부서진 자신의 의자뿐이었다.
* * * * *
“우욱.”
돔 밖에서 죄 없는 의자 하나가 부서지고 있는 동안 진우는 폭발의 잔해 속에 주저앉아 피를 토하고 있었다. 더 이상 마나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된 마수들이 폭발의 조짐을 보이자 그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서 마수들의 몸통 가운데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은 반대편 부분을 약화시켰다.
그쪽에 있는 결정의 구조를 와해시켜 폭발의 여력이 되도록 자신이 아닌 반대편을 향해 뚫고 나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시도는 성공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았다. 폭발의 위력이 너무나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돔 전체를 진동시킨 폭발로 인해 쿼클로의 몸은 산산조각이 났고, 액체금속이던 하쿠의 몸체 역시 가루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진우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두 마수의 몸을 붙잡고 있던 양손은 엉망이 되었다. 비록 손이 떨어져 나간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뼈가 보일 정도로 파헤쳐진 팔의 상태는 갈라진 걸레나 다름없었다. 폭발의 충격에 의해 내장은 모두 뒤집어지다시피 했고, 입에서는 끊임없이 피가 울컥거리며 흘러나왔다.
“이러다간, 하이뇰보다 내가 먼저 죽겠다.”
진우는 사력을 다해 치료용 마나를 돌려 내장과 양 손의 출혈을 막았다. 덕분에 피는 금세 멎었지만 당장은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 정도로 뱃속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는 마수들의 잔해가 점차 마나로 변해 흩어지고 있는 바닥에 등을 깔고 길게 누웠다.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고막이 터졌는지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출혈이 멎는 기미가 보이자 억지로 마나를 돌려 고막을 치료했을 때, 그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 대답을 해라 이 개 같은 자식아.”
그의 머리맡에서 하이뇰이 분에 겨워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했지만 진우는 간신히 상체만 일으켜 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하이뇰의 홀로그램 영상이 허공에 떠 있었다.
“너... 이제는 실체화도 안 되는가 보네?”
진우가 피식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하이뇰은 그의 말을 무시하고 계속해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널 반드시 죽여 버릴 거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테다. 이 레제보다도 못한 자식아...”
“아아... 좀 작은 소리로 얘기해라. 귀가 울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 그나저나 날 어떻게 죽일 건데? 더 쓸 수 있는 마나라도 있어?”
진우가 귀찮은 듯이 손을 저으며 말하자 하이뇰이 살기를 띤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내 마나는 무한하다. 조금만 있으면 다시 마수들을 만들 수 있어. 하지만 너는 아니지. 지금 네 몰골을 봐라. 움직이기도 힘들지? 넌 졌어. 내가 곧 쿼클로와 하쿠뿐만이 아니라 다른 마수들까지 모조리 불러낼 거다. 크리켄데르의 모든 마나를 모아서라도 반드시 너를 죽이고 말겠어.”
진우는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하이뇰이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해서 치료용 마나를 돌려 몸을 회복시키고 있었다.
당장은 녀석의 말마따나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었지만 하이뇰이 마수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마나를 모으기 전에 자신이 먼저 녀석의 본체가 있는 곳을 찾아야 했다. 그는 속으로 가만히 시간을 따졌다.
‘이제, 마나폭탄이 작동될 때가 됐을 텐데.’
진우가 막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고 있던 하이뇰의 영상이 갑자기 흐릿해졌다.
“널... 만 두지... 않을... 이건 뭐....?”
녀석의 목소리 역시 도막도막 끊어졌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영상이 꺼지듯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