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6화.
듣고 싶었던 말이
발갛게 물든 선이한의 눈가가 또렷하게 보였다. 여전히 약간 부어 있었다. 선이한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고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하견 형…?”
선이한이 눈을 반짝 떴다.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담아내는 푸른 눈동자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살짝 흔들리고 있었다.
“…응. 잠시만, 이렇게 있어.”
눈가를 쓸어내렸다. 선이한이 말없이 다시 눈을 감았다. 닿아 오는 눈꺼풀에서 열감이 느껴졌다. 그 위로 수건을 조심스레 올렸다. 차가운 온도에 선이한이 몸을 흠칫 떨었다.
아까 눈물을 그렇게 흘렸으니 눈이 부을 수밖에 없었다.
위쪽으로부터 순식간에 떨어지는 선이한을 받아 낸 후였다. 선이한의 몸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선이한은 떨리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흔들리는 목소리를 더듬더듬 이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하견 형. 다친 데는 없어요. 형 덕분에요. …괜찮아요. 잠깐 당황해서, 실수였어요. 앞으로는, 이런 일 없게…. 정신 차리고 있을게요. 그리고….
선이한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한 방울씩 도르르 흘러내렸다.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은 몸이 잘게 떨리고 있는 채였다. 그럼에도 얼굴에는 여전히 옅은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말랑한 뺨을 쓸어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냈다. 손끝에 방울져 맺히는 눈물이 뜨거웠다. 모든 감각이 낯설도록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곳은 분명 새까만 밤인데도 선이한은 홀로 또렷하게 빛났다. 주위에 퍼져 있는 빛이 오로지 선이한을 향해 쏟아지는 것만 같았다. 흩어질 것처럼 가벼운 몸을 힘주어 안았다.
어둠 속에서도 새하얀 옷자락. 바람에 흩날리는 새까만 머리칼. 닿아 오는 마른 몸에서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
그런 모든 것들 사이에서 선이한이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 시선을 마주하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모르겠어요.”
선이한의 조그만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선이한이 고개를 든 채 눈가에 덮인 수건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하견 형. 이거 왜 올려놓은 거예요?”
“…그냥. 진정하라고.”
“나는 항상 진정해 있었어요.”
“…알아.”
“음….”
잠깐 말을 멈춘 선이한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바로 옆에서 타오르는 불길이 선이한의 하얀 얼굴을 연하게 물들였다.
“그래도 좋았어요.”
그 목소리를 듣자 몸이 잠깐 굳었다. 선이한이 수건을 천천히 걷어 내며 말을 이었다.
“시원해서요. 고마워요, 형.”
마주한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살짝 부었던 눈가도 가라앉은 채였다. 그 부근을 손끝으로 쓸었다. 수건의 물기 때문에 차갑게 젖어 있는 살갗의 감각이 생경했다.
선이한의 손에 유리잔을 쥐여 주며 입을 열었다.
“…곧, 다들 돌아올 거야.”
◇
“벌써요?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났나 봐요.”
이제 다들 돌아올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 송하견에게 대답했다. 송하견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눈을 깜빡이는 게 좀 편해진 듯했다. 눈가에 올렸던 수건 덕분인 것 같았다. 수건에서는 연한 약초 향이 났다. 송하견이 손에 들려 준 따뜻한 차에서도 엇비슷한 향기가 났다.
그렇지만 전부 묘하게 달랐다. 수건에서 나는 향은 약간 씁쓰름했는데 지금 한 모금 마셔 본 차는 달콤했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약초를 어디서 구해 오는 걸까.’
송하견에게 물어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렇지만 많이 바쁠 테니 아마 한참은 지나고 나서야 물어볼 시간이 날 것 같았다.
세상을 구하고 나면 조금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그 이후에도 모두를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때가 되면 시스템이 준 능력은 사라질 테고, 나는 도움 될 만한 게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썼다.
모닥불 쪽으로 다리를 쭉 뻗었다. 불길에 가까워질수록 따뜻했다. 나도 내 다리로 걸어오지 못할 줄은 몰랐다. 걷지 못한다는 페널티를 받은 게 아닌데도.
‘송하견도 나를 안아 들고 올 생각은 아니었겠지.’
그런데 그 순간 코피가 터져 버릴 줄이야.
아무리 간헐적 코피라고 해도 그런 순간에 나는 건 좀 억울했다. 언제 실행될지 모르는 페널티보다는 차라리 메스꺼움 페널티처럼 한 번에 받는 편이 나은 것 같았다.
가만. 다음 페널티가 뭐였지? 그렇게 생각하자 눈앞에 퀘스트 창이 떠올랐다.
<필수 퀘스트> ‘라엔-의심하지 말아요!’Ⅴ
성공 시: 라엔의 믿음 획득
실패 시: 간헐적 각혈 3개월 페널티
제한 시간 : 54일
바로 아래 뜬 제한 시간도 착실히 줄어들고 있는 채였다. 차근차근 깎여 나가는 제한 시간을 보니 어쩐지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시작도 하기 전에 실패를 생각하는 게 좋은 자세가 아니라는 건 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봐야 했다. 처음부터 실패를 생각할 수밖에 없게 한 쪽도 잘한 건 아니었다.
이것도 듣고 있니, 시스템? 반성이 필요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는 이제 뭘 해야 이 퀘스트를 깰 수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봤는데.
한숨을 푹 쉬는데 바로 앞의 모닥불이 잠깐 일렁인 것 같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람이 훅 불어왔다.
“어, 선이한. 일어났네. 하견 형님, 다녀왔습니다!”
민주혁이 밝은 목소리로 말하며 손을 크게 흔들었다. 옆에 박율과 라엔도 있었다. 다들 돌아오니 주위가 더 환해진 것 같았다.
자꾸만 몸을 피하는 모두를 부탁까지 해 가며 한 번씩 치료한 후에 그 결계 같은 것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다들 아리송한 얼굴이었다.
박율이 잠깐 고민하더니 허공에 지도를 띄웠다. 다 같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어떤 순서로 일을 해 나갈지 정리하는 듯했다.
대화를 얼추 마무리한 박율이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옅은 눈웃음을 지은 채였다. 그럼에도 어쩐지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박율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한아. 하견이 얘기를 들어 보니까 많이 위험할 뻔했어.”
“미안해요, 율이 형.”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닌데.”
“앞으로는 안 그럴게요.”
“그것도 아니야.”
“……알려 주세요.”
반성하며 푹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박율이 어쩐지 쓰게 웃는 것처럼 보였다. 박율이 무릎을 살짝 굽혀서 내게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꼭 같이 가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어.”
왜요? 순간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퀘스트에 나 홀로라는 말이 없었던들, 이건 내가 할 일이었다. 괜히 당신들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퀘스트 자체가 위험한 것도 아니었다. 이번에는 그냥 내가 삐끗했을 뿐이지.
그냥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려고 하는데, 박율이 내 대답을 기다리는 듯한 시선을 보내왔다.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결국 어물어물 말을 뱉었다.
“…노력할게요.”
“그래. 지금은 그거면 됐어.”
환하게 웃은 박율이 내 머리에 손을 턱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내 머리칼을 평소보다 거칠게 헤집었다. 박율이 작은 목소리로 스치듯이 덧붙였다.
“기다릴게.”
뭐를 기다린다는 걸까. 박율은 내 생각이 더 이어지기 전에 뒤쪽에 있던 라엔을 불렀다.
라엔은 송하견과 민주혁과 함께 지도를 짚으며 상의하던 중이었다. 라엔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라엔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박율이 입을 열었다.
“라엔아, 부탁할게. 잘 다녀와.”
“네, 리더 형.”
박율이 라엔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헝클였던 내 머리칼을 다시 정리해 주고 송하견과 민주혁에게로 훌쩍 걸어갔다.
“이한. 지금 저 위로 다녀와 볼 생각이에요.”
내게 그렇게 말한 라엔이 망설이듯이 말을 이었다.
“괜찮다면, 같이 가 줄 수 있나요? …어디쯤인지 정확히 가늠이 되지 않아서요.”
“네. 같이 가요, 라엔 형.”
“정말 괜찮겠어요? 무리하지 않아도 돼요. 하견에게 대략적인 위치는 들었어요.”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라엔은 복잡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힘들면 꼭 중간에라도 말해요.”
박율도 라엔도 이렇게나 걱정하는 건 송하견의 탓이 컸다. 나는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송하견이 내가 허공에서 순식간에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불쑥 꺼내 버렸다.
평소에는 그렇게 말도 없는 사람이 상황을 조목조목 되짚는 모습에 당황해서 바로 반박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설명이 너무 과장되기도 했고.’
나는 송하견이 말한 것과 같은 반응까지 보인 적은 없었다. 어쩌면 송하견이 쓰고 있는 모노클에는 상황을 멋대로 보여 주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는 걸지도 몰랐다.
결국 송하견의 말이 모두 끝난 후에야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내가 곡해된 부분을 정정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다들 내 말을 받아들이는 눈치가 아니었지.’
원래 극적인 이야기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었다. 그걸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까 송하견은 처음부터 상황 전달을 조금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일이 다시 생긴다면 송하견이 말을 꺼내기 전에 내가 먼저 상황을 설명해야지. 그렇게 다짐하며 라엔에게 입을 열었다.
“꼭 말할게요, 형.”
라엔이 조금 안심한 것처럼 표정을 풀었다. 그러고는 이제 다녀올 거라는 말을 모두에게 전했다.
민주혁이 이쪽으로 재빨리 뛰어와서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야, 선이한. 조심해서 다녀와.”
“내가 할 말이야. 저번처럼 다치지 좀 말고, 민주혁.”
“…너, 지금은 괜찮아?”
“안 괜찮았던 적 없어.”
“아주 입만 열면 그런 말이지.”
민주혁이 한 손을 들어서 내 뺨을 살짝 늘렸다. 그러고는 내가 뭐라고 말할 새 없이 순식간에 뛰어서 다시 돌아갔다. …다음부터는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라엔 형님, 안녕히 다녀오십쇼!”
민주혁의 힘찬 인사에 라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 소매를 살짝 잡고서 몇 걸음을 앞으로 잡아끌었다.
라엔이 입고 있던 로브를 천천히 벗었다. 동시에 내 몸이 공중으로 부드럽게 떠올라서 라엔의 품으로 가볍게 내려앉았다. 라엔이 나를 단단히 안아 왔다.
잠깐만. 꼭 이렇게 가야만 하는 건가? 어디든 접촉만 하면 마법을 쓸 수 있는 것 같았는데. 급하게 입을 열었다.
“라엔 형, 잠깐만요. 꼭 이렇게….”
“이한. 금방 다녀올 거니까.”
라엔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그러고는 여전히 나를 안은 채로 내게로 고개를 푹 숙였다.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잠시만, 이렇게 있어 줘요.”
목소리에서 옅은 흔들림이 느껴지는 듯했다.
라엔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려서 내게 눈을 맞춰 왔다.
금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빛났다. 그 안에 내 모습이 고요하게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