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5화.
다른 이유 말고
나를 안고 있는 송하견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미안해요, 하견 형. 많이 놀랐어요?”
“…….”
여전히 이어지는 말이 없었다. 시야가 흐려서 송하견이 어떤 표정인지 잘 모르겠다.
괜한 민망함에 말이 생각을 거치지 않고 흘러나왔다. 나도 내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을 무렵,
“선이한.”
송하견의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지던 내 말을 끊었다.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온종일 두서없는 말만 늘어놓을 뻔했다.
송하견을 가만히 바라봤다. 송하견이 나를 더 힘주어 감싸 안았다. 차분하고 느릿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안 놀랐어?”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어요.”
“…….”
“정말이에요. 형이 이렇게 받아 줬잖아요.”
내 몸이 허공에 살짝 떠오른 듯했다. 송하견이 한 손을 들어 올려서 말없이 내 눈가를 쓸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뿌옇게 흐렸던 시야가 다시 맑아졌다. 송하견의 시선이 나에게로 오롯이 향해 있었다.
“이제 괜찮아.”
“…알아요, 형.”
나는 당연히 괜찮았다. 슬슬 내려 달라는 뜻으로 송하견의 어깨를 살짝 두드렸다.
송하견이 내 등을 부드럽게 토닥이고는 한 손을 까딱였다. 어디선가 커다란 통나무가 미끄러지듯 끌어당겨져 왔다. 송하견은 나를 그 위에 가볍게 앉혔다.
“…그래서 이유는?”
“네?”
“위에서, 당황했다면서.”
“어…. 내가요?”
“응. 그렇게 말했어.”
내가 그랬나? 뭘 말했는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이래서 말을 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생각 없이 말하다가는 미래의 자신이 두 배로 생각해야 할 테니까.
뭐, 이번 건 딱히 숨길 생각은 없었으니 상관없었다. 송하견에게 내가 겪은 일을 설명했다. 물론 퀘스트 관련한 것은 제외하고. 내 말을 들은 송하견이 곰곰이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장막?”
“얇은 물결 같은 걸 통과하는 느낌이었어요.”
“잘 모르겠는데. …다녀와 볼게.”
“같이 가요.”
송하견이 고개를 단호하게 젓고는 내게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그리고 마법을 외우려는 것처럼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잠깐만. 뭐가 그렇게 급한 건지 모르겠다.
하견 형, 그렇게 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다리에서 힘이 탁 풀렸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건 좀 부끄러웠다. 내 차분함과는 별개로 몸은 긴장된 상태였을 수 있는데 그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럴 때는 좀 뻔뻔하게 나가야 했다.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괜찮아?”
깜짝이야. 어느새 바로 앞으로 다가온 송하견이 나를 부축하는 것처럼 단단히 붙들었다. 송하견이 마법을 써서 먼저 가 버리지 않도록 소매 끝을 살짝 잡았다.
“하견 형. 나도 데려가요. 그래야 정확하게 확인해 볼 수 있잖아요.”
“네가, 같이 가고 싶은 거야?”
“…? 네.”
“다른 이유 말고. 네 의지인 거냐고, 묻고 있는 거야.”
“네. 한 번 더 살펴보고 싶어서요. 아까는 제대로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니까요.”
송하견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진심인지 가늠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나는 지금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자 송하견이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러면.”
송하견이 두터워 보이는 망토 하나를 순식간에 허공에 만들어 냈다. 그걸 내게 감싸듯이 두른 송하견이 앞쪽에 달린 끈을 헐렁하게 묶었다.
따뜻하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몸이 훌쩍 들렸다.
“…가자.”
송하견이 나를 번쩍 안아 들고 있었다. 지금 나를 안은 채로 가자는 건가? 내가 뭐라고 말할 새도 없이 시야가 천천히 높아졌다.
송하견은 꼭대기의 튼튼한 나뭇가지 위로 올라온 뒤에도 나를 내려 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높은 곳에서 굳이 내려 달라고 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가만히 안긴 채 하늘로 손을 뻗었다.
퐁.
맑은 소리가 울렸다. 손끝에 뭔가 통과하는 느낌이 나며 하늘이 옅게 일렁였다. 확실했다.
“하견 형. 봤어요?”
“…아니.”
송하견은 내가 손을 대고 있는 허공을 한참 들여다봤다. 그러고는 내 손에 깍지를 끼는 것처럼 손을 맞댔다. 기다란 손가락이 부드럽게 감겨 왔다.
송하견의 손이 허공을 쑥 가르고 올라갔다.
“…아무 느낌도 없어.”
생각에 잠겨 있던 송하견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마법 같은 건가? …결계?”
송하견이 모노클을 한 번 고쳐 올리고 위쪽을 빤히 바라봤다. 연한 보랏빛의 눈동자에 어두운 하늘이 들어찼다.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송하견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우선, 내려가자.”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주위가 점차 밝아졌다. 꼭 환한 빛에 감싸이는 것 같다고 생각할 때 바닥으로 완전히 도착했다.
땅에 발을 딛은 송하견이 주위를 밝혔던 빛 상자를 하나만 남기고 정리했다. 그리고 걸음을 천천히 옮겨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여전히 나를 안아 든 채로.
“형…? 이제 내가 걸어갈게요.”
“응. 들어 봐, 선이한.”
송하견의 느릿한 말이 이어졌다. 송하견은 내가 느꼈던 장막 같은 것이 결계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이 장소를 뒤틀어 놓는 결계.
“라엔이 말했던 적 있어. 네 마나의 형태가, 일반적이지 않다고.”
송하견 자신은 인식할 수 없었지만 나는 뭔가를 느꼈던 이유가 그것일 수도 있다고 했다. 다들 돌아오면 한번 확인해 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특히 라엔이.
라엔은 마나를 예민하게 감지하니까 결계가 있다면 알아볼지도 모른다고 했다. 물론 지금까지 조사하면서 아무런 말도 없었다고는 했지만.
‘송하견의 말이 맞는 것 같아.’
그렇다면 시스템이 돌발 퀘스트를 준 것도 내가 그걸 알도록 하기 위함이겠지. 그런데 왜 내게 그걸 알리려고 한 걸까.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에 대해 고민하다가, 문득 송하견이 아직도 나를 내려 주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렇게 안긴 상태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견 형. 이제 정말 내려…. 어?”
끈적한 것이 얼굴에 주륵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소매로 그 부근을 쓸었다. 순식간에 소매가 붉게 젖어 들어 갔다. 코피였다.
아니, 갑자기 이럴 이유가 없는데? 지금은 딱히 피곤한 것도 아니었다. 그때 띠링, 하는 소리가 들렸다. 흔들리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간헐적 코피’ 페널티 적용 중입니다.」
아. 이유가 있긴 했다. 그런데 하필 이 시점이라니. 송하견에게 서둘러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가끔 이래요. …하견 형?”
◇
하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이, 송하견의 시야에 선명하게 담겼다.
‘갑자기 왜?’
아무런 징조도 없이 터져 나온 코피가 섬뜩했다.
고개를 휙 들었다. 멀리서 타오르는 모닥불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지금은 숲속을 덩그러니 걷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정도 거리면 두 사람분의 텔레포트를 쓸 마나가 됐다.
서둘러 이동해서 모닥불 앞에 선이한을 앉혔다. 선이한은 순식간에 진행되는 상황을 따라가기 벅차다는 것처럼 당황한 표정이었다.
손수건을 하나 소환해서 선이한의 손에 들려 줬다. 선이한이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가만히 숙였다.
선이한과 함께 지낸 이후로 이런 갑작스러운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젠가의 깊은 밤이었다. 꼭 지금과 같은 새까만 밤.
-…흐, 윽. …싫어.
싫다는 말을 처절하게 뱉으며 피를 쏟아 내던 창백한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떨리는 몸으로 흐느끼던 울음과 피로 물든 파리한 입가도.
정말 괜찮은 건가? 라엔이 치료 마법에 대가가 있을 거라는 얘기를 꺼낸 적이 있다.
나도 그 말에 동의했다. 어쩌면 선이한이 계속해서 피를 토하는 것도 그 때문일지 몰랐다.
그런데도 선이한은 치료 마법을 아무것도 아닌 일인 양 썼다. 치료할 때마다 몸에 무리가 가는 거라면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리가 없을 텐데도.
정말로 대가가 없는 건가? 그런데 그럴 리가…. 아니면 설마 대가를 감수하면서도 치료 마법을 쓰는 건가?
아까도 그랬다. 선이한이 피를 토하고 잠들었다고 박율 형이 분명히 말했는데도, 선이한은 깨어난 직후 나를 치료했다.
-이게 내가 할 일이에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할 수 있는 일이면, 해야 하는 일인 걸까? 선이한의 여상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빙 맴돌다가 그런 물음을 만들어 냈다.
선이한은 순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꽤 심지가 곧은 사람이었다. 쉽게 휘둘리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할 말을 다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런데도 가끔 그 나아가는 걸음이 오롯이 자기의 결정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꼭 제 의지가 아닌 일을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처럼.
-하견 형. 이 너머로,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말하며 나에게로 곧게 향한 눈동자는 어딘가 곤란해 보였다. 가 보고 싶다는 것이 아니었다. 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선이한의 말은 마치 이유가 따로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곱씹어 보면 방금까지의 모든 상황이 그랬다. 선이한은 분명 이곳이 처음일 텐데도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정해져 있다는 양 어둠 속을 차분히 걸었다. 작은 머뭇거림조차 없었다.
-금방 다녀올게요.
그렇게 말하는 선이한을, 나는 끝까지 막아설 수가 없었다.
나는 너의 생각을 몰랐고, 너의 상황을 몰랐다. 그러니 너의 선택에 손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네가 너의 길을 간다는데 내가 그 옆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결국 주위에 안전을 위한 마법 따위나 둘러놓고, 공중으로 떠올라서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선이한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선이한은 한참 후에 위쪽에서 빠르게 낙하해 왔다.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움직였다. 선이한을 재빨리 받아 냈다. 내 품에 안긴 선이한의 몸이 긴장한 채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선이한이 나를 향해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마주한 선이한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은….
“하견 형.”
선이한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선이한이 말갛게 웃으며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혈하던 손수건을 떼어 낸 채였다.
“이제 다 멈췄어요.”
“…응.”
선이한의 손에서 피에 젖은 손수건을 빼냈다. 그리고 얇은 수건 한 장을 새로 소환했다.
적당한 약초를 시원한 온도의 물에 풀어서 수건에 적셨다. 옅은 약초 향이 밴 수건을 허공에서 비틀어 짜며 선이한에게 다시 물었다.
“어디, 아픈 데는?”
“괜찮아요.”
“…잠깐 눈 감아 봐.”
“왜요?”
선이한은 의문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면서도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바람에 새까만 머리칼이 살랑였다. 그 아래로 고요히 눈을 감은 단정한 얼굴이 보였다. 나도 모르게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