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화.
이해할 수 없어도
사실 딱히 싫은 건 아니었다. 그냥 굳이 안겨서 갈 이유가 없을 뿐이었지. 이렇게까지 간절하게 말할 일도 아니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라엔이 살짝 웃었다.
동시에 살랑, 바람이 불어왔다. 내 몸 위로 라엔의 로브가 살포시 덮였다. 달콤한 향기가 부드럽게 퍼졌다.
“이제 올라갈게요.”
라엔의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천천히 높아졌다. 고개를 내려 보니 방금까지 발을 딛고 있던 땅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모닥불 옆에 서 있는 세 사람의 인영이 조그맣게 보였다. 그중 한 명이 이쪽으로 인사하듯 손을 크게 흔들었다. 그러고는 곧 모두가 훅 꺼지듯이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타오르는 불길만이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텅 빈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하늘도 역시 텅 비어 있었다.
별도 달도 없는 어둠이 쓸쓸해 보였다. 고개를 기울여서 라엔에게로 가만히 기댔다. 온기가 전해져 왔다. 닿아 오는 몸으로도, 그리고 마음으로도.
어쩐지 심장이 세차게 울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뭐지?’
온 힘을 다해 달린 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였다.
나는 지금 절대 긴장한 게 아니었다. 고작 한 번 삐끗해서 떨어졌다는 이유로 높은 곳에 겁먹을 리가 없었다.
내 가슴께로 손을 올려 보려는 순간.
“…이한.”
바로 옆에서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람 소리가 섞여서인지 살짝 흔들리는 듯했다.
라엔이 고개를 내려서 나와 시선을 맞춰 왔다. 조금 크게 뜨인 듯한 금색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비쳤다. 라엔의 붉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휘날렸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를 먹먹하게 스쳤다. 라엔이 눈썹을 살짝 올린 채로 옅게 웃었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것 …아요.”
작은 속삭임이 허공에 흩어졌다. 그 목소리가 내게로 다 전달되지 않았다.
내가 듣지 못했다는 걸 얘기하기도 전에 라엔이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처음부터 내게 전하려고 꺼낸 말이 아니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의문만 하나둘 늘어나는 중이었는데, 라엔까지 이렇게 친절하게 궁금증을 더해 줄 줄이야.
한 번만 다시 말해 달라고 얘기하려는 순간 주위가 서서히 환해졌다.
어둠 속으로 샛노란 색의 작은 빛이 점점이 퍼지고 있었다. 꼭 하나하나가 별빛 같았다. 하늘로 천천히 떠오르는 우리를 따라오듯 그 빛도 같이 이동해 왔다.
“…이런 마법도 있구나.”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나왔다. 은하수를 걷는다면 이런 기분일까.
라엔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나를 더 단단히 안아 왔다. 아직도 심장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그럴 수 있었다. 눈앞이 아리도록 반짝였으니까. 이렇게 심장이 터질 것처럼 벅차게 울릴 만도 했다. 닿아 오는 온기마저도 선명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를 올라갔을 때였다. 순간 장막을 통과하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라엔 형. 방금 거기예요.”
라엔이 눈을 감고 잠시 집중하는 것처럼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러더니 잘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다시 눈을 떴다.
“이한. 잠깐 귀 막아 볼래요?”
“네.”
“지금 내 목소리 들려요?”
나를 안고서 바로 가까이에서 말하는데 들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양손으로 귀를 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라엔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음. 그러면 안 되는데….”
“왜요?”
“조금 시끄러울 거라서요. 그러면 주변 소리를 잠깐 차단할게요. 아무것도 안 들려도 당황하지 마요.”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확인한 라엔이 입을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고는 알아들을 수 없는 문장을 느릿하게 읊었다.
순간 주위가 완전히 고요해졌다.
살갗에 닿아 오는 바람이 분명히 느껴졌음에도, 귓가를 스치는 작은 바람 소리마저 없었다. 귀를 막았던 손을 내렸다.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라엔이 시선을 아래쪽으로 내려서 텅 빈 어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내가 말한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해 보는 듯했다.
라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다른 문장을 읊는 것 같았다.
동시에 아래쪽에서 바람이 훅 불어왔다. 내 몸 위에 덮였던 라엔의 로브가 살짝 들어 올려졌다가 다시 내려앉았다. 붉은색의 쨍한 빛이 잠깐 반짝인 듯했다.
라엔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굳었던 표정을 조금 푼 라엔이 입 모양으로 글자를 또박또박 말했다.
추워요?
그렇게 물어보는 것 같았다. 고개를 저었다. 라엔이 옅게 웃고는 조금 더 위로 올라갔다.
다시 시선을 내린 라엔을 따라 나도 아래쪽을 바라봤다. 어둠 속에서 빨간 불빛이 이리저리 반짝 터졌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꼭 뭔가가 폭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어느 정도 불빛이 잠잠해지자, 귓가에 바람이 스치는 소리를 시작으로 주변의 소리가 서서히 들렸다. 라엔이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확인해 봤는데 주변에 감지되는 마나는 없었어요.”
흐릿한 뭔가가 느껴지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건 마나가 아닐 거라고 했다. 고작 그 정도의 마나로 장소를 뒤틀 만한 결계를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는 말이 이어졌다.
다시 내려가는 길이 꽤 길었다. 라엔의 말로는 평소에는 마법으로도 올라올 일 없을 정도로 높은 곳까지 온 것이라고 했다.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전혀 몰랐을 일이었겠구나.’
시스템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듯해서 기분이 묘했다. 그렇지만 선택을 내린 것은 내 의지였기에 딱히 할 말은 없었다.
물론 실패 페널티가 등을 떠민 것도 이유라면 이유였지만, 애초에 퀘스트 자체가 감당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면 어떤 페널티를 받더라도 시도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아무리 내 눈앞에 퀘스트를 들이밀어도 그걸 실행할지 말지 결정하는 것은 나였다. 나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뭐, 결과적으로 나쁜 일은 아니기도 하고.’
이런 뒤틀린 장소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찾아낸 거니까 얻은 것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정확히 알아낸 건 없지만.
한참을 생각하고 있는데, 아까부터 나를 빤히 바라보던 라엔이 입을 열었다.
“이한에게는 하늘이 일렁이는 것처럼 보였다고 했죠. 아까 그 경계를 완전히 통과한 거고요.”
“네, 맞아요. 경계를 통과하고 그보다 더 위쪽으로 올라갔던 것 같아요.”
입술을 깨물고 잠시 생각하던 라엔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한의 마나는 일반적인 형태가 아니에요. 알고 있죠?”
“알고 있어요.”
“그래서 결계가 있는 게 맞다면, 그리고 그 결계도 이한의 마나와 비슷한 형태인 거라면. 그러면 이한에게만 반응하는 것도 설명이 돼요. 그런데….”
라엔이 망설이듯 말을 잠시 멈췄다.
어느새 지면과 거의 가까워진 것 같았다. 퍼져 있던 빛이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거의 땅에 다다를 무렵 라엔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한의 말대로라면 아까 결계를 넘어갔다는 건데, 왜 그곳의 하늘도…. 여전히 어두울까요.”
순간 강한 바람이 불어와 나를 훑고 지나갔다. 라엔이 바닥으로 완전히 내려섰다. 귓가를 때리는 바람 소리에 눈을 질끈 감았다.
“눈 떠도 괜찮아요.”
웃음기 스민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슬쩍 떴다. 라엔이 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 설핏 웃고 있었다.
라엔이 나를 안은 채로 몇 걸음을 걸어갔다. 그러고는 모닥불 앞에 놓인 통나무 위에 나를 천천히 앉혔다. 바닥에 발이 닿았다. 어쩐지 스스로 발을 딛는 게 오랜만인 것 같았다.
내 머리칼을 정리하듯이 부드럽게 쓸어내린 라엔이 바로 옆에 사뿐히 앉았다. 어느새 내 어깨에 로브가 자연스럽게 걸쳐져 있었다. 그걸 차곡차곡 접어서 라엔에게로 건넸다.
“고마워요, 라엔 형.”
라엔이 손에 로브를 가만히 든 채 생각하는 것처럼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고는 그걸 펼쳐서 내 무릎 위에 덮었다.
“나도 고마워요.”
뭐가 고맙다는 거지? 내가 로브를 돌려준 게? 그런데 왜 다시 건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라엔이 내 무릎을 가만히 도닥였다. 차마 그 손길을 뿌리치고 로브를 걷어서 돌려줄 수가 없었다.
몸에 온기가 도는 듯했다. 바로 앞에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며 라엔이 아까 했던 말을 곱씹었다.
‘결계를 넘어갔는데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는 건 이상한 게 맞아.’
결계라면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 경계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 외부는 멀쩡해야 했다.
그런데 아까 본 하늘은 그렇지 않았다. 보통의 밤하늘이 아니라 아무런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새까만 암흑이었다. 아래에서 볼 때와 마찬가지로.
“이한.”
옆에서 라엔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를 바라보는 라엔의 가까이에 불길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도 막연히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모든 일에는 마땅한 이유가 있으니까요.”
“그래도…. 알 수 없는 이유라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라엔이 고개를 들어서 허공에 펼쳐진 새까만 어둠을 눈에 담았다.
“아직 찾지 못했을 뿐이니까요. 멈추지만 않는다면 찾아낼 수 있어요.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달처럼 밝은 금안이 반짝 빛났다. 라엔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그게 뭐든, 꼭 알아낼게요. 이번 대의 용사 임기가 끝나는 날까지 반드시요.”
라엔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모두가 남은 날까지 숨겨진 진실을 알아내고 세상을 구해 내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었다.
지난번에 박율이 5년마다 용사를 선택한다는 얘기를 해 준 후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시스템이 내게 말한 건 세상을 구하라는 거였다.
‘그러니까 이번에 모두가 세상을 구해 내지 못한다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다음 대의 용사들과 새롭게 함께해야 하는 걸지도 몰랐다.
왠지 그건 조금 싫었다. 진정한 힐러라면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걸까? 그렇지만 어쩔 수 없었다.
처음으로 만난 용사들이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당신들 이후에 다른 용사들이 선택된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러니 나는 당신들이 세상을 구해 냈으면 좋겠다.
물론 이건 내 목표가 아니었다. 실상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척이나 적었으니까, 내 욕심이라고 하는 편이 옳았다.
‘그래도, 조금은 욕심내도 괜찮지 않을까.’
나도 최선을 다해서 같이 나아갈 테니까. 조금 이기적일지라도 그런 바람을 품고 싶었다.
라엔의 손이 여전히 내 무릎 위에 올려져 있었다. 그 손을 가볍게 잡고 일어섰다.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겨서 라엔을 마주 봤다. 라엔이 말없이 나를 올려다봤다. 나를 담아낸 눈동자가 옅게 흔들리는 듯했다.
“라엔 형.”
맞닿아 있는 단단한 손이 잠깐 떨렸다.